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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개동개

이강기 2020. 8. 19. 11:15

[독자가 사랑한 우리말] [26] 동개동개

조선일보

  • 권영순 53세·서울 노원구

입력 2020.08.19 05:00

 

시어머님이 잘 마른 빨래를 고사떡 괴듯 동개동개 개켜 놓으셨다. 한 줄로 쌓아 올린 수건과 속옷이 칼로 자른 듯 반듯하다. 양말들도 네 귀퉁이 이가 꼭 맞는다. 핑그르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어릴 적 시골 뒤꼍에 쌓여 있던 나무누리(나뭇단을 쌓은 더미)다. 밥 짓는 연료요, 방을 데우는 군불용 땔감으로 나무가 많이 필요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를 떠올리는 기억의 창에는 늘 무거운 나뭇짐을 지게에 지고 오시는 모습이 비친다. 밭 한 뙈기 겨우 물려받아 올망졸망한 여섯 남매를 키워내야 했던 삶의 무게가 지게에 얹힌 나뭇단처럼 아버지 어깨를 누르고 있지 않았을까. 깊은 산에서 오리목이며 소나무 등의 잔가지를 쳐낸 뒤 새끼줄로 묶어 당신 키보다 높게 쌓은 나무를 지고 아버지가 사립문을 들어서면 어머니는 남편의 시장기를 알아차리고 부리나케 밥상을 차리셨다. 길이도 모양도 같은 크기로 동개동개 쌓아 올린 나뭇단이 흙담을 따라 길게 이어지면 우리는 부자가 된 듯 마음이 푸근했다. 뒷마당에는 또 한 곳에 동개동개 쌓인 나무가 있었으니 장작더미였다. 엿을 고거나 떡을 찌고 긴긴 겨울밤의 추위를 녹이는 군불을 땔 때는 불에 오래 타는 굵은 장작이 필요했다.

말없이 도끼로 장작을 패는 아버지와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어머니 모습은 지금도 구들장을 덥히는 불처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조각조각 쪼개져 활활 타오르는 불에 타서 없어지는 나무처럼 두 분은 지칠 줄 모르는 헌신의 불을 태워 자식들 삶을 지피는 장작이 되셨다. 베틀에 손수 짜서 단정히 접어놓은 삼베옷, 가을걷이 끝내고 사랑방 툇마루에 재어놓은 곡식 가마니들도 뒤꼍의 나무누리, 장작더미와 함께 그리운 부모님 얼굴로 내 마음의 곳간에 동개동개 머물러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18/202008180523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