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기독교도 창자 끝을 말뚝에 묶고…" 교황 연설에 기사들이 봉기했다

이강기 2020. 8. 25. 20:36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22] "기독교도 창자 끝을 말뚝에 묶고…" 교황 연설에 기사들이 봉기했다

조선일보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0.08.25 03:12

 

십자군 전쟁의 시작

이미지 크게보기1095년 11월 27일, 프랑스의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는 장면. 당시 교황은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자고 호소했고, 그곳에 모인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서 원하신다’고 외치며 호응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갤러리 디 피아자 스칼라 소장. /게티이미지코리아

 

1095년 11월 27일,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 원정을 선포했다. 이 회의에서 교황이 어떤 연설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공의회에 참석했던 인물들이 후대에 쓴 기록으로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로베르 수사가 1107년에 쓴 연대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튀르크족은 하느님의 교회를 완전히 파괴했다. 그들은 기독교도에게 할례를 행하고 그 피를 제단에 바르거나 성수반에 붓는다. 또 희희낙락하며 기독교도들의 배를 갈라 창자의 끄트머리를 꺼내서 말뚝에 묶고는 채찍으로 때려 말뚝 주위를 돌아 내장이 쏟아져 죽게 만든다. … 여자들을 겁탈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랴."

기독교 세계 통합하려는 교황의 야망

 

 

교황은 이런 선동적 연설을 통해 하루빨리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자고 호소했고, 그곳에 모인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서 원하신다(Deus vult)'고 외치며 호응했다. 동방 원정에 참여할 사람들은 1096년 8월 15일에 퓌(Puy) 지역에 집결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다른 순례자들과 합세한 후 함께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자는 계획도 발표했다. 200년 가까이 지속될 십자군 운동은 이렇게 시작했다.

그런데 셀주크튀르크가 팽창해 오면서 중동 지역에 살던 기독교도들이 위험에 빠지고 성지순례를 방해받았다는 것은 사실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예루살렘은 서기 638년 이래 무슬림 지배하에 있었지만 이곳 기독교도들은 관용적 취급을 받았고, 성지순례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렇다면 비잔틴제국 황제가 원군을 요청했기 때문에 십자군 운동이 시작되었는가? 이는 절반 정도만 맞는 설명이다. 셀주크튀르크가 1084년 안티오크, 1087년 에데사를 점령했고, 위협을 느낀 비잔틴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가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 사절을 보내 원군을 요청한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비잔틴제국이 원한 건 소수 정예 용병이지 광신자 집단이 떼로 몰려오는 건 아니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기독교 세계 전체를 다시 통합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교황은 동방정교의 세계인 비잔틴제국을 군사적으로 도움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사실 이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도 5만 병사를 끌고 성지를 탈환하려고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 적이 있다. 우리가 주목해서 살펴볼 점은 이와 같은 군사 원정의 의도가 역설적으로 평화 회복이었다는 점이다.

유럽 봉건 기사 폭력의 배출구

1095년 예루살렘으로 출병한 기독교 사상 최초의 십자군 운동 당시 유럽 봉건 기사 초상화. /게티이미지코리아

 

당시 유럽 세계는 폭력이 넘쳐나는 위험한 세상이었다. 오랫동안 바이킹과 마자르족 그리고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받아 유럽은 마치 전쟁터처럼 되었다. 사방에 성채가 들어섰고, 기사와 보병 부대가 할거하여 통제하기 매우 힘들었다. 교회는 폭력 사태를 줄이기 위해 '하느님의 평화(Peace of God·비전투원에 대한 공격 금지)'와 '하느님의 휴전(Truce of God·일요일과 성인의 날에 전투 금지)' 운동을 펼쳤지만 큰 효과를 얻지 못했다.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한 이유 중 하나도 봉건 기사들의 파괴 성향을 통제하는 방책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기사들에게 아무 때나 칼을 휘두르지 말고 기독교 전사로서 규칙을 지키며 싸우고, 무엇보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행사하라고 주문했다. 최선은 신앙의 적들과 싸우는 것이다. 십자군은 유럽에서 가장 광포한 세력을 외지로 내몰아 튀르크인들과 싸우게 함으로써 폭력의 배출구를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12세기 초 기베르 드노장(Guibert de Nogent)의 표현을 옮기면 같은 편끼리 서로 죽이지 말고 나가서 이방인을 죽이라는 것이다.

 

교황의 의도는 그렇다고 해도 당시 사람들은 왜 그토록 열광했는가? 십자군 운동 참가자들은 고향에서 기회를 얻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 잃을 것 없는 사람들이 군사 모험을 통해 한밑천 잡자는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 종전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최근 실증 연구 결과는 정반대 사실을 말해 준다. 십자군 전사들은 잃을 것이 아주 많은 부자였다. 사실 물질적 이익을 노리고 참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동방 원정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재산을 팔거나 저당 잡혀서 돈을 구해야 했다. 반면 전투로 큰돈을 벌 가능성은 극히 낮다. 혹시 승리를 거두어 토지를 획득하더라도 그 땅은 원론적으로 비잔틴 황제에게 귀속된다고 교황이 선언했다. 실제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은 대개 궁핍을 피하지 못하고 빚에 시달리곤 했다. 이 시절에 돈을 번 사람은 십자군 참전 기사들에게서 땅을 사들이거나 전쟁 물자를 판매한 상인들로서, 다시 말해 십자군 운동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聖戰과 참회를 연결한 십자군 운동

기사들은 돈 벌러 간 게 아니라 구원을 얻기 위해 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죄를 참회하고 저세상에서 영원한 보상을 구하는 열정이 들끓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세적 가치를 부정해야 한다. 단적으로 두 가지를 금해야 한다. 무기와 성기(性器)를 남용하지 말라! 구원을 얻으려면 폭력과 성적 쾌락을 멀리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죄를 많이 범하는 집단은 주로 기사들이다. 그런 만큼 이들에게는 참회할 기회가 필요하다. 세상을 버리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든지 콤포스텔라, 로마, 예루살렘 등지로 순례에 나서야 했으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사 집안 출신이면서 클뤼니 수도원을 거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누구보다도 수도원 이상과 기사 이데올로기의 갈등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이었다. 기사들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갈망이 크지만, 현실적으로는 전사라는 지위 때문에 흔히 죄의 길로 들어선다. 이때 우르바누스 2세가 불안과 죄책감에 빠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이 세상을 등지지 않아도 될뿐더러, 칼을 놓는 게 아니라 오히려 칼을 휘둘러 하느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 예수 성묘를 앗아간 무슬림들을 축출하는 신의 전사(milites Dei), 그리스도의 전사(milites Christi)가 되면 가능하다.

우르바누스 2세의 창의적 해법은 성전(聖戰)과 순례를 통합한 데 있다. 성전 개념은 전례가 있었다. 8~9세기에 이탈리아 해안 지역을 습격하는 무슬림과 싸우는 기사들에게 죽으면 하느님이 천국에서 맞아줄 것이라고 한 바 있다. 교회 편에 선 전사들의 죄를 사면하고, 전장에서 죽으면 순교자로 친 것이다. 우르바누스 2세는 신앙의 적과 싸우러 가는 행위가 순례라는 놀라운 해석을 제시했다. 십자군 운동은 개념적으로 전투 이전에 순례 행위다. 기사들은 자신을 순례자로 칭했다. 다만 칼을 가지고 순례에 나선 점이 달랐을 뿐이다. 성스러운 전투와 참회, 이 두 가지를 연결한 것이 십자군 운동이었다.

 

[기사도 문학, 무슬림을 악마 묘사]

 

롤랑의 노래 "죽더라도 순교자 되어 천국에서 왕관을…"

 

십자군 운동은 조만간 문학적으로 정당성을 얻게 된다. 기사도 문학은 무슬림 적들을 '악마화'하고, 그 때문에 그들과 싸우는 전투는 정당할 뿐 아니라 성스러운 행위이며, 영적 보상이 이루어지는 임무라고 해석했다. 대표적 작품이 '롤랑의 노래'다. 십자군 운동 시대에 탄생한 이 작품은 전투에 임하는 기사들에게 죄의 사면과 축복, 구원을 약속한다.

 

기사들의 영웅적 행위를 예찬하는 서사시 ‘롤랑의 노래’ 여덟 장면을 묘사한 그림. 십자군 운동 시대에 탄생한 이 작품은 전투에 임하는 기사들에게 죄의 사면과 축복, 구원을 약속했다. /위키피디아

 

"튀르팽(Turpin) 대주교는 설교를 시작했다. … 당신들은 곧 전투에 임할 것이니/ 하느님께 죄를 고해하고 은총을 빌라/ 당신들 영혼의 구원을 위해 내가 죄를 사면할 것이며/ 죽더라도 순교자가 되어/ 천국에서 왕관을 받으리라."

여기에서 확 인하듯 우르바누스 2세가 제시한 십자군 운동의 이념은 이데올로기 혁명이었다. 초기 교회의 평화와 비폭력은 이제 전투를 부추기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이전에는 칼을 맞고 희생당한 사람이 순교자였지만, 이제는 칼을 휘두르는 사람이 순교자가 되었다. 이슬람의 지하드(이슬람 성전·聖戰)와 십자군 운동은 사실 같은 내용이다. 조만간 이 두 운동은 서로 충돌하게 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25/202008250005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