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죽음의 문제를 항상 直視하길…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와 연결돼있어"

이강기 2020. 8. 31. 09:20

[최보식이 만난 사람] "죽음의 문제를 항상 直視하길…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와 연결돼있어"

조선일보

 

입력 2020.08.31 03:12

불교 공부에 빠졌던 예수회 神父… '도전돌밭공동체' 서명원 신부

늦은 밤 뉴스 채널에서 죽음에 관한 짧은 기획 프로를 봤다. '단 한 번도 나의 죽음이었던 적이 없을 뿐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한 장면에서 개량 한복 차림의 서양인 신부가 나왔다.

"남동생의 자살, 누나의 죽음도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부모님의 죽음이었다. 그때부터 죽음과 나 사이의 '방패'가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서명원 신부는 "밤에 명상할 때마다 '죽음이 하루 더 가까워졌음'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주=최보식 기자

 

부모 세대가 떠나니 이제 우리가 죽을 순번이 된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방패'라는 절묘한 표현을 썼을까. 그는 캐나다 출신의 예수회 신부였다. 본명은 베르나르 세네칼이고, 몇 년 전 한국 국적을 얻어 '서명원'이 됐다.

의대생에서 수도자의 길로

그는 1953년 프랑스어가 공용어인 캐나다 퀘벡주(州)의 의사 집안에서 출생해 부모 뜻에 따라 프랑스 보르도 의대에 입학했다. 의대 졸업 직전인 1979년 예수회에 들어갔다. 1984년 한국에 파견된 뒤로는 불교 공부와 수행에 심취했다. '천달(天達)'이라는 법명도 받았다. 그는 성철 스님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고, 작년 초까지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로 불교 강의를 해왔다.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차로 두 시간 남짓 달렸다.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에 있는 '도전돌밭공동체'. 그는 여기서 몇몇 회원과 함께 기도와 수행, 공부를 하면서 농사짓고 있다는 것이다. 배추, 참외, 옥수수, 토마토, 고구마 등이 자라는 1000여 평의 밭 끝으로 컨테이너 건물이 보였다. 서명원 신부는 햇빛을 쬔 적 없을 것 같은 피부에 키가 컸다.

―농사지을 몸은 아닌 것 같군요?

"보다시피 타고난 몸은 농사짓는 몸이 아닙니다. 그래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대부분 타고난 것과 무관한 일을 하며 살지 않습니까. 10년 전쯤 교수 안식년을 이 마을에 있는 사제관에서 보낸 게 인연이 됐습니다. 한 신도가 '텃밭 놀리지 말고 작물을 키우자'고 했을 때 '나는 흙을 안 만진다. 대학교수 신분이다'라고 말할 수 없잖아요. 그 뒤 여기에 공동체를 만들었고 농사짓고 있습니다."

―원래는 의사가 되려다가 죽음의 문제에 관한 답을 찾기 위해 수도원(예수회)으로 들어갔다고 했지요?

"아버지가 의사여서 자식들도 의사로 만들길 원했지요. 파리에 유학 보내 5년간 비싼 학비를 대줬는데 막판에 제가 탈선했습니다. 부모님의 배신감은 엄청났지요. 저를 '거짓말쟁이' '인생 낙오자'라고 비난하며 등을 돌렸습니다."

―의술을 베푸는 것은 보람 있는 일 아닙니까. 사회적으로 대접도 받고?

"한국에서도 의사를 최고 직업으로 여기지만, 제게는 맞지 않는 옷과 같았습니다. 병원에서 연구용 시신을 해부하는 동안 죽음의 적막한 모습을 많이 봤지요. 의사들은 병을 치료할 순 있지만 죽음까지는 해결 못 합니다. 그러던 중 수도원에서 며칠간 피정(避靜)하면서 독신과 청빈의 수도자 길을 택했어요. 이 결정을 지금껏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습니다."

―수도자가 되니까 그런 죽음의 문제가 해결됐나요?

"아무리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해도 해결이라 말하기 어렵지요. 자신이 죽어봐야 체험할 수 있지, 간접적으로 남의 죽음을 목격한 걸로는 알 수 없지요. 엄밀하게 말하면 저는 죽음을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됐지만, 죽음에 대해선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해답이 있을 줄 알고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저는 다만 세상 사람들보다 많이 생각했을 뿐입니다. 죽음은 우리의 존재 이유, 삶의 의미와 연결돼 있어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늘 의문점으로 남아 있는 것이지요."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죽음을 막아주던 '방패'가 사라졌다고 했지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을 때 저도 죽음의 벼랑 끝에 서 있게 됐음을 확실히 알았죠. 설령 '100세 시대'라고 해도 제 인생의 3분의 2는 지나간 겁니다. 저는 일과를 마치고 밤에 명상할 때마다 '죽음이 하루 더 가까워졌음'을 생각합니다. '죽음의 초읽기' 안으로 들어간 것은 확실합니다."

―제 처지도 별로 다를 바 없을 것 같군요.

"이제 양적인 삶이 아닌 질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죽음이 있다는 걸 알지만 자신과는 연결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부정합니다."

―부정한다기보다 생각을 안 하려는 거죠. 생각해본들 두렵고 막막하거나 허무할 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언젠가 세상을 떠나야 할 것을 인식하면서 지금을 열심히 진실되게 살아야 합니다. 죽음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을 보여줍니다. 지금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죽음의 순간을 잘 겪을 수도 힘들어할 수도 있습니다. 욕심과 죄악으로 살아온 사람은 쉽게 죽지 못합니다."

 

―한 번 주어진 인생인데 죽음을 의식하며 사는 게 과연 현명할까요?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 뿐이지요. 사는 동안 즐겁게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요?

"저는 동의하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을 비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분들의 선택이니까 이해합니다. 어차피 죽을 거니 그냥 즐기자는 것보다, 저는 죽음 문제를 해결 못 해도 직시하고 싶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하루에 몇 번씩 질문을 던집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오늘 무엇을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성철 스님 연구서' 논란

―현실에서는 악인이나 위선자들이 권세와 부귀영화를 더 누리고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지는데요?

"그런 게 대단해보인 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재산을 많이 축적해도 죽을 때는 지폐 한 장 갖고 갈 수 없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순간 자신이 그 뒤에 이어질 삶을 놓쳐버렸다는 걸 알 겁니다."

―신부님이니까 사후를 믿겠지만?

"엄마 배 속의 태아는 바깥세상을 몰라요. 갓 태어난 아기도 자신의 일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요. 앞으로 이어질 영생(永生)에 비하면, 현세는 갓난아기가 장난감을 갖고 노는 수준입니다."

―사람을 포함한 생물에게 살고 죽는 것은 그냥 자연의 이치지요. 인간만 죽음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온 게 아닐까요?

"생물학적 죽음은 그렇지만,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저는 사후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은 단절되지 않고 이어질 겁니다. 먼 여행에 앞서 준비를 해야 하는 것처럼 사후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윤리적인 삶, 정직한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후 세계는 한 번도 증명된 적은 없지요. 그 세계는 단테의 '신곡(神曲)' 같은 겁니까?

"그건 머릿속에서 상상한 모습이지요. 죽고 난 뒤에 여기서 상상하는 것 같은 모습의 사후 세계는 발견하지 못하겠지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 연속성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 차원은 완전히 다를 겁니다."

―예수회 신부로서 1984년 한국에 파견됐지요?

"파견 명령을 받고 지도를 펼쳐보니 지정학적 위치가 너무 오묘했습니다. 보통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 저와 운명적으로 연결된 것 같았습니다. 여전히 한국에 대한 감정은 '나만의 당신'처럼 흔들림이 없어요."

―한국에 와서는 불교에 심취했는데?

"그 전까지 기독교 문화권에서만 살았어요.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타 종교를 접했지요. 절을 찾아다니고 무당 굿도 많이 봤어요. 무엇보다 불교 가르침을 알게 됐을 때 마치 우물 안 개구리가 먼 바다를 발견한 것처럼 충격이 컸어요. 1988년부터 불교 공부를 본격적으로 했고 참선 수행법도 배웠어요. 너무 매력적이어서 가톨릭 신부로서 내적 갈등과 혼란이 심했어요."

―개종할 뻔했다는 뜻인가요?

"솔직히 말해 한동안 많은 번민과 시련, 위기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개종을 안 해도 불교를 깊이 알 수 있었어요. 좋은 스님들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서 불교를 알려고 공부한 만큼이나, 기독교를 본격적으로 심도 있게 배우고 이해하려는 스님들은 아직 만나지 못했어요."

―지금도 참선 수행을 한다고 들었는데, 주로 어떤 화두(話頭)를 갖고 합니까?

"참선은 '비움[空]'을 위주로 하는 것인데, 수행을 하다 보니 제 초점이 다르다는 걸 알았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합일(合一)하기 위해 명상하고 있습니다."

―법명 '천달(天達)'까지 받았는데 교계에서 '이단'으로 몰리지 않았나요?

"가톨릭은 이단 심문을 엄격하게 합니다. 제가 프랑스에서 석사 논문인 '부처님과 예수님의 만남'을 출간했습니다. 교계 전문가들이 이 책을 검토한 뒤 '교계 전통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정해줬습니다. 한 번도 사상 문제가 없었습니다. 저는 결국 예수쟁이입니다."

―성철 스님 연구로 파리 7-드니디드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지요. 그 뒤 국내에서 출간한 '가야산 호랑이의 체취를 맡았다'는 책이 성철 스님을 폄하했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았지요?

"학문적으로 문제점을 가리켰을 뿐 폄하하진 않았습니다. 성철 스님은 한국에서 거의 신격화된 분이죠. 비판 자체가 신을 모독한 것처럼 됐습니다. 한국 사회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합의점을 찾는 문화가 아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그걸 겪으면서 저는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청빈과 금욕

―신부님처럼 독신 생활하는 성직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힘들게 밥벌이하는 서민의 고단한 삶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도 있어요. 자기 한 몸만 아니라 가족을 꾸려 책임지는 삶이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청빈과 금욕을 지키는 수도 생활도 사실 힘듭니다. 세속적 삶보다 더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저 자신은 이 길에서 여러 번 살고 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적 언어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작별할 때 그는 '여기에 내려와 지내도 된다'고 또다시 권했지만, 넓은 밭을 보니 중노동해야 할 것 같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31/20200831000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