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

이정식 미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이강기 2020. 9. 11. 08:33

‘평양쌀장수’ 의 인생역전...九旬 석학이 몸으로 겪은 한국 현대사

 

이정식 미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자서전 출간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조선일보

2020.09.10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로 이름난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가 최근 자서전을 냈다. /조선일보 DB‘한국 공산주의 운동사’로 이름난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가 최근 자서전을 냈다. /조선일보 DB

 

“저는 유엔군이 평양을 해방시켜 주기를 갈망하며 매 순간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만일 그때 유엔군이 북상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오래전에 사라져버렸을 것입니다.”

 

1996년 영국 옥스퍼드대 초청으로 연단에 선 이정식(89) 교수가 입을 열자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옥스퍼드대 초청자인 로즈메리 풋 교수는 6·25 당시 미국의 38선 북상을 비판한 ‘잘못된 전쟁(The Wrong War)'으로 이름을 얻은 연구자. 이 교수는 유엔군의 북한 진격이 잘못이라고 주장한 풋 교수를 자신이 겪은 체험을 담아 에둘러 비판한 것이다. 6·25 당시 열아홉 청년 이정식은 인민군 징집을 피해 평양에서 넉 달 가까이 숨어 지내다 유엔군 입성으로 자유를 얻고 월남했다.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는 로버트 스칼라피노 UC 버클리대 교수와 함께 쓴 ‘한국 공산주의운동사’로 1980년대 한국현대사 연구 붐을 일으킨 주역이다. 1973년 미국서 출간돼 이듬해 미국정치학회가 주는 최고 저작상인 우드로 윌슨 재단상을 받은 이 책으로 세계 학계에서 인정받는 한국현대사 권위자로 떠올랐다.

 

이 교수가 파란만장한 청소년 시절을 담은 자서전(일조각)을 펴냈다. 구순의 노학자가 민족사의 운명과 맞물린 개인의 체험을 세계사적 통찰로 녹여낸 일급 기록이다. 중일전쟁 초기 한커우에서 일본인 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국공(國共)내전 당시 만주 랴오양(遼陽)의 면화 공장 청소부, 김일성 정권 치하의 평양 쌀장수, 월남 후 국민방위군 사관생도, 미군부대 통역 요원을 거쳐 1954년 떠난 미국 유학이 대종을 이룬다. 게오르규 소설 원작 영화 ’25시‘ 주인공 앤서니 퀸을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다.

 

우드로 윌슨 재단 저작상을 받은 이정식 교수. /일조각

 

중일전쟁 초기인 1939년 아버지 사업 때문에 가족이 이주한 한커우 조계(租界)가 첫 무대다. 일본이 점령한 한커우에서 조선인은 일본인 취급을 받았다. 자전거를 타던 꼬마 이정식은 중국 여성의 다리를 쳤다. 전족을 한 이 여성은 사방을 둘러본 후 이정식이 타던 자전거 앞바퀴를 걷어찼다. 침략자에 대한 분노를 담은 반일감정으로 이 교수는 해석한다.

◇랴오양 면화공장 청소부에서 사무원으로

1941년 평양에 돌아온 열 살 소년 이정식은 ‘대동아결전의 노래’를 신나게 부르고 동남아 침략에 나선 일본의 승전 선물로 고무 공을 받고 즐거워한다. 2년 뒤엔 만주 랴오양의 일본 상업학교에 다니면서 만주국을 체험한다. 어린 그의 눈에도 ‘다섯 민족이 화목하게 지낸다’는 만주국 ‘오족협화(五族協和)' 구호는 가짜였다. 전시 치하 만주국은 일본인은 흰색, 조선인은 노란색, 중국인은 적갈색 배급 통장을 나눠주고, 흰색 통장엔 흰색 쌀, 노란색엔 좁쌀, 적갈색엔 수수를 나눠줬다.

8·15 해방은 근로동원 나간 관동군 군수 공장에서 맞았다. ‘그날 랴오양의 날씨는 참으로 맑고 서늘했다. 공습경보도 울리지 않았다.’ 이정식은 ‘나는 독립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고 썼다. 만주국 지방 관리를 지낸 아버지가 8·15 이듬해 행방불명되면서 졸지에 소년 가장이 됐다. 매독 주사를 놓고 붕대를 세탁하는 병원 조수로 일하다 면화 공장 청소부로 취직한다.

 

 

 

이정식 교수가 1957년 아르바이트 삼아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 '타임 리밋' 포스터. 이 교수는 미군 포로를 호송하는 북 인민군 병사 역을 맡았다. /일조각

 

◇국민방위군 사관후보생, 미군부대 통역

1948년 초 팔로군이 랴오양을 점령하면서 평양으로 돌아온 이정식은 재빠른 눈치와 계산 능력을 바탕으로 평양 신양리 시장의 쌀장수로 거듭난다. 고모가 운영한 쌀가게를 거들었다. 6·25 이전까지 평양은 공산통치 과도기로 소규모 상점과 공장은 개인이 운영할 수 있었다. 종교의 자유도 어느 정도 묵인돼 이정식과 그의 어머니는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다.하지만 6·25가 터지고 보안대원들이 청년들을 붙잡아가면서 이정식은 4개월 가까이 집 마루 아래 숨어 지내야 했다. 그는 자서전에 ‘백선엽 장군이 이끈 한국군 제1사단이 10월19일 평양을 탈환한 것은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고 썼다.

 

1950년 12월 월남한 이정식은 국민방위군 사관학교에 들어간다. 고위층 부패로 수많은 장병이 굶어죽은 스캔들로 떠들썩했던 곳이다. 이정식은 부대 이동 중에 민가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국민방위군의 실체를 체험한다. 사관학교 졸업장은 받았지만 방위군이 해체되면서 갈 곳 없어진 이정식은 부산의 미군 통역부대 중국어 통역원으로 들어간다. 2년 남짓 중국군 포로를 심문하며 영어를 익힌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UCLA에서 석사를 한 뒤 동아시아 전문가였던 로버트 스칼라피노 제안으로 한국 공산주의운동사를 연구하면서 박사 학위를 받는다.

 

평양 쌀장수에서 아이비리그대 교수가 되기까지의 역정은 고비마다 놀랍고 아슬아슬하다. 더 값진 것은 역사의 풍랑을 헤쳐온 노(老)교수의 통찰이다. “(해방 전후) 남한에서 일어난 일들의 이유를 남한의 테두리 안에서만 찾으려고 했다”며 현대사 연구자들의 협소한 시야를 지적하거나, “한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동양사와 세계사를 잘 연구해 그 바탕에서 한국을 봐야 한다”(21세기에 다시 보는 해방후사·2014)는 조언이 그렇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나 ‘친일파 청산’ 같은 이슈가 해방 80년이 가까운 오늘날까지 한국 사회를 갈라놓은 데는 이런 편협과 편향이 초래한 몫이 크다. 그의 통찰이 소중한 이유다.

 

이 교수는 자서전 서두에서 “왜 신(神)은 내게 이처럼 다채로운 생애를 주셨을까” “왜 나로 하여금 그처럼 여러 번의 전쟁을 겪게 했을까”라고 물었다. 구순(九旬)을 맞은 그의 질문은 달라졌다. “왜 신은 나로 하여금 이렇게 예상외의 영예를 누리게 하셨을까.” 그는 “30대 중반의 청상 과부가 겨우 열 다섯 살짜리 장남을 엄동설한 노동판에 내보내고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을 것인가. 내가 받은 영예는 그 눈물과 간절한 기도의 결실이었다”고 썼다. 누군가의 자서전을 새벽2시 넘도록 읽어본 건 정말 오랜만이다.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편집국 문화부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