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쿠데타 일어난 미얀마 ... 네윈과 박정희와 전두환
박정희는 혼란 수습 후 병영 복위하는 네윈식 쿠데타, 전두환은 퇴임 후 막후 영향력 행사하는 '上王정치'에 관심
글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2021. 2. 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민 아웅 흘라잉 장군(오른쪽)과 실각한 아웅산 수치(왼쪽). 사진=뉴시스/AP
미얀마(옛 이름 버마)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미얀마군(軍) TV는 2월1일 “(집권당의) 선거 부정에 대응해 구금조치를 실행했다”면서 “군은 1년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고 공포했다. 미얀마군TV는 또 “권력이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에게 이양됐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AFP, 로이터 등 외신들은 아우산 수치 미얀마 국가최고고문과 그가 이끄는 집권당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고위 인사들, 윈 민 대통령 등이 구금됐다고 보도한 바 있다.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문민정부는 작년 11월 8일 총선에서도 전체 선출 의석의 83.2%를 석권하면서 압승한 후, 군부의 기득권을 보장하고 있는 현행 헌법의 개정을 추진하면서 군부와 갈등을 빚어왔다. 2015년 NLD가 총선에서 승리하기 전까지 53년간 미얀마를 지배해 온 군부는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도 상·하원 의석의 4분의 1과 무력(武力)을 관장하는 국방·내무·국경 등 3개 부처 장관을 지명하는 등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또 배우자가 외국인인 경우 대통령으로 출마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정을 헌법에 두어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가 대선에 출마하는 것을 원천봉쇄했다 (아웅산 수치의 작고한 남편은 영국인임). NLD 정권은 작년 총선에서의 압승에 자신감을 가지고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는 현행 헌법을 개정하려다가 군부와 갈등을 빚어왔다. 군부는 작년 총선 직후부터 유권자 명부의 860만 명 정도가 실제와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정부에 이에 대해 해명하라고 요구해 왔다.
영국 식민지였던 미얀마는 건국 과정에서부터 군부가 주된 역할을 했다. 아웅산(1915~1947년)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세력은 처음에는 영국 식민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았지만, 영국을 몰아내고 버마를 지배하게 된 일본 역시 영국 못지않은 식민주의자들임을 깨달은 후에는 항일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반파시스트인민자유동맹(AFPFL)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이끌던 아웅산은 1947년 1월 영국 정부와 버마 독립에 합의했으나, 그해 7월 반대파에 의해 암살됐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건국 전야에 30대 초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웅산(1915~1947년)은 이후 버마의 국부(國父)로 추앙받았다.
건국 후 버마는 우누(1907~1995년)가 이끄는 문민정부가 들어서 영국식 의회민주주의를 실시했다. 하지만 카렌족 등 소수민족이 무장투쟁을 벌이고 국공내전에서 패한 중국 국민당 패잔병들이 버마 북부지역을 강점하는 등 혼란이 계속됐다. 이러한 안보위기는 군부의 대두로 이어졌다. 결국 1958년 10월 네윈(1911~2002년) 국방장관이 사회혼란 수습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수상에 취임했다. 네윈은 1960년 4월 우누의 민간정권에게 권력을 넘겨준 후 병영으로 복귀했다가 1962년 재차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후 혁명평의회 의장에 취임한 네윈은 ‘불교사회주의’를 내건 군사독재체제를 구축했다. 네윈은 1974년 군부 출신인 세인 윈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었으나, 집권당인 버마사회주의계획당 (BSPP)당수 자격으로 막후에서 실권(實權)을 행사했다. 그는 민주화 열기가 높아지던 1987년 7월 은퇴를 선언했는데, 물러나면서도 "군대가 총을 쏠 때에는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국민들을 겁박했다. 이후에도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지만, 2002년 돌연 쿠데타 연루 혐의로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버마의 독재자 네윈.
1987년 9월 버마 정부는 유통 중인 지폐의 일부를 환수하겠다고 발표했고, 이에 항의하는 대학생과 시민들은 1988년 8월 8일 대대적인 민주화운동을 일으켰다. 전 세계적인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버마 역시 민주화될 수 있다는 기대가 높아졌으나, 군부는 3000여명의 시위대를 학살하면서 시위를 진압했다. 국부 아웅산의 딸 아웅산 수치는 당시 영국 유학 중이었는데, 와병 중인 모친을 간병하기 위해 일시 귀국했다가 군부의 잔혹한 시위진압을 목격하고 이후 민주화운동가로 변신했다.
소마웅 장군이 이끄는 버마 군부는 시위를 진압하는 한편,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1997년 국가평화발전위원회(SPDC)로 개칭]라는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정권을 장악했다. 버마 군부는 네윈, 세인 윈 등 국민들의 지탄을 받던 구(舊)세대 군부 지도자들도 밀어내는 한편 이듬해에는 ‘식민잔재’ 탈피라는 명목으로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수도 랭군은 양곤으로 개칭했다 (아웅산 수치 등 민주화운동 진영이나 미국은 '미얀마'라는 국호는 정통성 없는 군부가 제정한 것이라는 이유로 '버마'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1992년에는 SLORC부의장이던 탄쉐가 소마웅을 몰아내고 의장에 취임했다. 2011년까지 미얀마를 강권통치한 탄쉐는 점성술에 심취했는데, 2006년 수도를 네피도로 이전한 것도 점성술사의 조언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탄쉐가 내륙지방인 네피도로 수도를 옮긴 것은 당시 조지 W.부시 미국 대통령이 독재국가들의 체제교체(Regime change)를 추진하자, 미국의 기습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있다. 탄쉐가 미국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한때 핵무장을 추진하고 있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탄쉐는 2007년 승려와 학생, 시민들의 민주화요구시위(샤프론혁명)을 유혈진압했지만, 국제사회의 압력에 밀려 2010년부터 점차 민주화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결국 군부와 아웅산 수치 세력의 타협에 의해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군부의 기득권을 보장해주는 헌법개정이 이루어졌고, 2015년 문민정권이 들어섰다. 배우자가 외국인인 경우 대통령에 출마하지 못한다는 헌법 규정 때문에 대통령으로 출마하지 못한 아웅산 수치는 측근인 윈 민에게 대통령직을 맡기고, 자신은 국가최고고문 겸 외무부 장관으로 실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아웅산 수치는 군부의 눈치를 보느라 로힝야족 학살 등에 대해 눈을 감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네윈의 쿠데타와 통치기법은 군 출신 한국 대통령들에게도 영향을 줄 뻔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5·16 이전부터 쿠데타에 동참할 만한 장교들에게 ‘네윈식 쿠데타’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게 뭐냐?”고 물어보면 “군부가 나서서 사회 혼란을 수습한 후 병영으로 복귀하되, 이후 민간정부을 감시·감독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생각은 5·16혁명공약 제6조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규정으로 현실화됐다. 5·16 혁명 후 중앙정보부는 민정(民政)이양을 앞두고 정권을 민간정부에게 넘겨준 후에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원수(元帥)계급을 달고 군부 최고지도자로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안을 연구하기도 했다. 물론 이 방안은 한국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고 해서 폐기되었고, 박정희 장군은 군복을 벗고 대선에 출마,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네윈 모델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당시 3허(許) 중 하나로 꼽히던 이 중 하나가 7년 임기를 마친 후 어떤 식으로 영향력을 유지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전두환 대통령에게 군부 출신인 세인 윈에게 대통령직을 넘겨 준 후 집권당 당수 자격으로 막후에서 실권을 행사하던 네윈 모델을 속삭였다는 것이다.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이 동남아순방을 하면서, 당시 한국과 정치·경제·외교적으로 별다른 관계가 없던 버마를 순방국에 포함시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순방은 아웅산 국립묘지 참배시 북한의 폭탄테러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어쩌면 전두환 대통령이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국가원로회의를 통한 ‘상왕(上王)정치’를 모색했던 것은 버마 모델의 변형일 수도 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보다 잘 살던 미얀마(버마)는 1962년 네윈의 두 번째 쿠데타 이래 군부 독재 하에서 아시아 최빈국 수준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미얀마 군부에 대한 시각은 엇갈린다. 60년 가까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강권통치와 인권유린, 부정부패로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나마 미얀마의 통일과 발전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집단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미얀마에서 9년간 사업을 했던 박창현씨는 2007년 11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양곤 시내에 준장급 장성만 500여 명...월급 20달러에 빌딩 소유 호화생활’을 하는 미얀마 군사정권의 부정부패상을 폭로했다. 하지만 현재 미얀마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는 L씨의 이야기는 다르다. 그는 “미얀마 중견장교들은 똑똑하고 국가발전에 대한 열의에 차 있는 것이 마치 5·16혁명을 일으켰던 한국군 장교들을 보는 것 같다”면서 “미얀마의 현실을 ‘독재 대(對) 민주’라는 관점으로만 보는 것은 단견”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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