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가다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대학지성
- 2021.03.21 19:30
■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46)_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가다
“학자의 잉크는 순교자의 피보다 거룩하다”-- 무함마드 언행록 <하디스> 중에서
(좌) 19세기 독일 폰 코르벤의 작품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우) 알렉산더 대왕(1256년 작, Istanbul Archaeology Museum)
이집트 북단 지중해에 면해 있는 역사적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의 명령에 따라 기원전 331년 4월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도시 이름이 “알렉산더의 땅”이라는 의미의 알렉산드리아가 되었다. Alexandria를 아랍어로는 알-이스칸다리야, 이집트 아랍어로는 에스켄데레이야, 이집트인들의 원 모국어인 콥트어로는 라코디라고 한다. 아랍인들은 알렉산더를 이스칸다르라고 불렀다. 라코디는 ‘새로 건설되는 것’이라는 뜻을 갖고 있음에 비춰 당시 사람들이 알렉산드리아를 ‘신도시’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모습
현지인들은 알렉산드리아를 ‘지중해의 신부’라고 부른다. ‘추억의 도시’라고도 한다. 그럴 만하다. 이곳의 역사를 알면 알수록 추억이 쌓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 게 맞다.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준 알렉산더에 얽힌 사연도 그러하려니와, 그의 사후 이 땅의 지배자가 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2대, 3대 부자의 지식 사랑, 그리고 300년 세월이 지난 뒤 태어난 세계 최고의 미녀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도전적 삶과 죽음,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로마에서 온 남자 카이사르와 그의 뒤를 이은 안토니우스와의 사랑 이야기 등 수많은 역사적 사건이 이 도시와 연관되어 있다.
‘아드리아해의 진주’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은 성 마르코다. 현재 성 마르코 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그의 유해가 본디 여기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 서기 68년에 순교한 그의 유해를 알렉산드리아로부터 가져오기 위해 비밀작전이 수행되었다. 세관을 통과해 배에 싣기 위해 무슬림이 싫어하는 돼지비계로 유해를 감쌌다. 서기 828년의 일이다.
틴토레토(Tintoretto,1518-1594)가 그린 <성 마르코 유해의 발견> 1562,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우리가 아는 클레오파트라는 정확히 말하자면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다. Cleopatra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 Kleopatra에서 온 것으로 “아버지(pater)의 영광(kleos)”이라는 뜻을 지닌다. Philopator는 당시 헬레니즘 군주들의 이름에 흔히 쓰였던 수식어로 “father-loving”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클레오파트라가 태어났을 때 카이사르는 32세였다. 둘이 처음 만난 건 기원전 48년의 일이다. 클레오파트라가 22살, 카이사르는 53세가 되는 해였다.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 이름은 Ptolemy XV (Philopator Philometor) Caesar, 즉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는) 카이사르 가문의 프톨레미 15세였다. 기원전 47년에 태어나 4살이 되던 기원전 44년에 파라오로 즉위하여 모친인 클레파트라와 공동 통치를 하다가 18세 되는 해인 기원전 30년 여름 유명을 달리한다. 나중에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의 처단 명령에 의해서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는 사라지고, 마지막 파라오의 별명은 카이사리온(Caesarion)으로 남아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제대로 불러볼 수 없었을 프톨레미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는 그리스식 이름과 별명 이외에 이집트어로 된 더없이 훌륭한 호칭이 네 개나 있었다.
. Iwapanetjer entynehem: 구원의 신의 상속자(Heir of the god who saves)
. Setepenptah: 프타 神의 선택을 받은 자(Chosen of Ptah)
. Irmaatenre: 태양신 라의 규율을 실행하는 자(Carrying out the rule of Ra) 또는 정의로운 태양(Sun of righteousness)
. Sekhemankhamun: 살아 있는 아문 神(Living image of Amun)
클레오파트라 조각상(좌/중), 이집트 신화의 프타 신(우)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말하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고대 페르시아의 후예인 이란인들이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가 이끄는 동방정벌군이 아케메네이드 왕조 페르시아를 침공해 당시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다리우스 황제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따라서 민족적 자부심이 강한 이란사람들은 희랍 또는 알렉산더라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페르시아를 침공한 알렉산더를 대왕이라 부르는 건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798년 7월 3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의 알렉산드리아 입성
알렉산더가 자신의 나라로 만들고 싶어 했던 알렉산드리아에 로마가, 비잔틴제국이, 그리고 7세기 중반(641년)에는 이슬람이 침략해 들어와 자신들의 속지로 만든다. 그로부터 천 여 년의 세월이 지난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이 입성을 한다. 그리고 학문세계의 지대한 관심사가 된 로제타스톤을 손에 넣는다.
통치자의 역할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문화의 창달과 융성이다. 문화 발전에 관심이 없거나 기존의 문화조차 말살하는 권력자는 지도자로 떠받들 가치가 전혀 없다. 그런 점에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짓도록 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1대 파라오 소테르와 그의 아들 2대 파라오 필라델포스는 위대한 인물이다. 힘 있는 자의 선한 뜻과 명령으로 이뤄지는 일은 그 가치를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압바시드 이슬람 왕조 칼리프들의 학문을 존중하는 마음가짐 또한 놀랍다. 이들은 꾸란의 훈령, 무함마드와 그 교우의 언행록인 하디스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학자의 잉크가 순교자의 피보다 거룩하다.”는 것이 그들의 지론이었다.
9세기경 7대 칼리프 알 마문에 의해 새로운 수도 바그다드에 ‘지혜의 전당’이라는 도서관겸 번역 전문 기관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전 세계로부터 온갖 학문서적이 수집되어 바그다드로 들어왔다. 페르시아 문헌을 아랍어로 옮기는 일 뿐 만 아니라 그리스 로마 시대의 주요 저작들과 중앙아시아 소그드 학자들의 저술 또한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이것이 유럽 스콜라 철학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14세기에 시작된 르네상스의 밑바탕이 되었다.
중세 최고의 도서관 바그다드 ‘지혜의 전당’과 ‘지혜의 전당’ 출신의 유명한 수학자 알 콰리즈미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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