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憶해 두어야 할 이야기

천안함·세월호 구조대장 ”특검에 모멸감, 이런 세상 싫어 그간 침묵”

이강기 2021. 5. 2. 09:04

천안함·세월호 구조대장 ”특검에 모멸감, 이런 세상 싫어 그간 침묵”

 

[최보식이 만난 사람] 천안함과 세월호 현장의 증인, 김진황 前 해난구조대장

 

 

최보식 <최보식의 언론> 편집인

조선일보

2021.05.02

 

 

 

 

 

 

 

천안함 폭침 현장에서의 김진황 전(前) 해군 해난구조대장

 

세월호 참사 후 7년간 9번째 진상조사를 벌일 ‘세월호 특검’이 임명됐을 때다. 누군가 내 휴대폰으로 이런 메시지를 보내왔다.

 

<저는 천안함과 세월호 현장에서 발로 뛰었습니다. 천안함에서는 55일간, 세월호에서는 84일간 현장에서 온몸으로 부딪쳐가며 살았는데 결국 얻은 것은 그 당시 받았던 스트레스로 인해 심장병이 발병했고, 2017년 7월 아산병원에서 심장을 열어 수술을 받고 다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는 김진황 전(前) 해군 해난구조대장이었다. 해사 40기인 그는 34년간 군 생활의 절반을 특수부대인 해난구조대(SSU)에서 근무했다. 천안함(2010년) 사건 현장에서는 수심이 훨씬 깊었던 선미(船尾) 수색을 맡았고, 세월호(2014년) 현장에서는 해군 책임관으로서 유족들 앞에서 수색 상황을 브리핑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작년 2월 대령으로 전역했다.

2013년 5월 임하댐 추락 산림청 헬기 인양 현장에서.

 

통화를 하니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정말 이 정부, 말도 안 되는 논리와 이야기로 세상을 혼돈 속으로 몰아넣고 국민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군복 입었던 사람의 서글픔이라고 할까요. 제복 입은 사람은 죄가 있어서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단지 복잡한 것이 싫어서, 이런 세상이 싫어서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장을 준 이현주 세월호 특검은 민변 출신에다 대전시 정무부시장를 지낸 친여(親與) 인사이더군요.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대체 몇 번째입니까. 현장에 있었던 군인으로서 정말 모멸감을 느낍니다. 군에 치욕을 주는 겁니다. 당시 선체 수색을 직·간접적으로 도와준 민간 업체 관계자나 잠수사들까지 불러가 조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게 나라입니까. 이런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지 못할망정…, 자발적으로 도와주고 나니 마치 흑막이 있는 것처럼 조사받고 매도됐어요. 앞으로 누가 나라를 위해 나서겠습니까.”

 

-현 정권에서 검찰특수단이 구성돼 이미 1년 넘게 총 201명이나 조사했지요. 올 초 검찰특수단은 여러 제기된 문제에 대해 ‘유족이 실망하겠지만 되지 않는 사건을 억지로 만들 수는 없다’며 무혐의를 발표했습니다. 그걸로 끝날 줄 알았지만 다시 특검이 시작됐군요.

 

“저쪽에서 VDR(항해기록 저장장치)를 조작했다느니 하는데, 그걸 건졌던 친구가 몇 번 조사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머리에 피가 확 치밀어 올랐습니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물속에서 그걸 다 보고 바꿔치기를 합니까. 공상과학 소설도 그렇게 쓸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조사했으면 저쪽 말대로 어느 누군가가 나와서 양심선언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천안함과 세월호 사건 현장 양쪽에 모두 있었다고 했지요?

 

“군인은 명령에 따라 죽고 삽니다. 해난구조대는 이런 사건·사고 현장에서 작전하는 부대이고, 임무가 주어지면 행하는 게 군인입니다.”

 

-시간 순으로 천안함 사건부터 얘기합시다. 폭침 당일 무얼 하고 있었지요?

 

“진해에서 미군과 연합훈련을 하다가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날 밤 출동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현장에서 UDT는 천안함 함수(艦首)를, 제가 지휘하는 SSU 부대는 더 깊은 수심에 위치한 함미(艦尾) 수색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냥 역할 분담입니까, 두 특수부대 간에 기능적 차이가 있는 겁니까?

 

“평소 두 부대의 훈련이 다릅니다. UDT는 침투 부대여서 잠수도 수심 20m 이내에서 합니다. 구조 전문은 SSU입니다. 천안함 함수는 수심 18m, 함미는 수심 48m 아래에 있었습니다.”

 

-수심 48m이면 까마득한 거리인데?

 

“이런 심해에는 바깥과 연결된 호수로 공기를 주입하는 ‘SSDS(표면공기공급방식)’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조류가 너무 센 데다 바닥이 굵은 자갈밭이어서 앵커를 박아 고정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걸 포기하고 공기통을 메는 스쿠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쿠버의 한계는 수심 40m입니다. 부하 대원들이 바다 속으로 집어넣고서 다시 나올 때까지 저는 초긴장 상태였습니다. 정말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습니다. 부하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 제 책임이었습니다. 나중에 작전이 끝난 뒤 저는 불러가 ‘스쿠버 잠수의 한계 수심은 40m인데 왜 집어넣었느냐’고 감사(監査)를 받았습니다.”

 

-천안함 수색 과정에서 UDT 한준호 준위가 사망했는데?

 

“함수 수색을 맡았던 한준호 준위가 숨졌지요. 규정대로 하면 침투 부대인 UDT는 구조작전에 투입돼서는 안 됩니다. 불가피한 상황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 3월 날씨가 너무 추웠어요. 바닷속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니 감기 걸린 대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생존자가 있을지 모른다고 시간에 쫓겨 야간 다이빙까지 해야 했습니다. 현장에서는 군 상부와 여론의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인명 구조를 나갔다가 오히려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장면이 없습니다.

 

“이대로 계속 가면 우리 대원들에게 불상사가 생길 것 같았습니다. 부하들을 죽여가면서 이 임무를 맡고 싶지 않았습니다. 전대장을 찾아가 대원들의 어려움을 보고하니, ‘너희는 죽기라도 했어. 죽을 때까지 해!’라는 호통이 돌아왔습니다. 전대장도 상부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을 겁니다. 저는 경례를 하고 돌아서 나왔습니다. 상사급 이상 대원들을 모아놓고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이틀 뒤 천안함 승조원 김태섭 상사의 시신이 발견되자, 실종자 가족들이 ‘위험하니 이제 수색을 중단하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혹시라도 살아있을 걸로 믿었는데 현실을 받아들인 겁니다. 그 뒤 수색을 중단하고 민간 업체가 주도하는 인양작전으로 넘어갔습니다.”

 

-천안함 루머와 음모론은 끊이질 않았지요. 한 달 전 천안함에 대해서도 재조사 결정을 했다가 번복했지요.

 

“저는 사람 목숨을 구하는 부대에서 근무해왔지만, 그 따위 음모론을 제기하는 인간이 눈앞에 보이면 정말 죽이고 싶습니다.”

 

-천안함의 폭침 증거인 북한 어뢰 잔해물을 현장에서 봤습니까?

 

“UDT를 지휘하는 해사 2년 후배인 권영대 중령이 ‘이상한 물건이 올라왔다’고 보고했습니다. 저는 김정두 제독, 국방부 헌병단 조사관과 함께 현장에 가서 그걸 봤습니다. 저는 합참 근무 시절 2년간 해군 무기체계를 담당했고 김정두 제독은 잠수함 함장을 했기에. 그게 북한 어뢰 잔해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해 국방부와 조선일보가 주는 ‘위국헌신상’을 수상했더군요.

 

“군인으로서 주어진 임무를 했던 것뿐입니다. 2010년 그해는 유독 해난사고가 많았습니다. 4월에는 해군 링스 헬기가 소청도 인근에 불시착했어요. 천안함 사건 현장에 있다가 출동했습니다. 6월에는 강릉 앞바다에 추락한 공군 F-5 전투기 인양 작전을 지휘했습니다. 11월에는 제주 근해에서 해군고속정이 트롤 어선에 받혀 침몰해 두 명이 숨졌습니다. 해저 117m에 가라앉아 있어서 인양 작전을 하느라 40일 넘게 바다에 있었습니다.”

 

-그 뒤 스트레스로 심장병이 생겼다고 했나요?

 

“그해 말 복귀한 뒤 부대원들을 격려하려고 돼지 세 마리를 사서 파티 준비를 지시했어요. 그러고는 부대 뒷산을 오르는데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내려오니 멀쩡했습니다. 그 뒤 그런 증상이 두세 번 일어났습니다. 병원에 가니 ‘원인은 모르겠지만 심근경색이나 뇌졸중 같다’며, 혈관이 막히는 것을 막는 니트로글리세린을 처방해 줬습니다. 그때부터 이 약을 계속 복용하게 됐습니다.”

 

그의 부대는 2012년 말 북한이 쏜 장사정 미사일의 잔해가 서해안에 떨어졌을 때 그걸 수거해 돌아왔다. 해난구조대장으로서 임무를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몸 상태가 됐다는 걸 느꼈다. 전근을 자청해 제주방위사령부로 옮겨갔다.

세월호 구조 현장에서.

 

“세월호 사건이 터지자 제주도에 있는 제게 연락이 왔습니다. 헬기를 보내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번에는 진도 팽목항 세월호 현장에 있게 된 겁니다.”

 

-그때는 해난구조대장이 아니었는데, 세월호 현장에서의 역할은?

 

“해경에는 심해 구조작전을 아는 이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저는 해경청장을 보좌하기 위해 해경함에 탔습니다. 해경과 해군, 민간 잠수사들 간의 임무 조율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해경차장이 유족들에게 브리핑하다가 봉변을 당하자, 내게 그 임무를 맡겼습니다.”

 

-어린 자녀들을 잃어 슬픔으로 거의 실신상태였던 유족들 앞에 선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요. 당시 기사를 보니까 김 대령의 브리핑은 유족들의 신뢰를 얻은 걸로 나오더군요.

 

“저는 브리핑에서 거짓말을 안 했습니다. ‘생존자가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헛된 기대를 주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바닷속에 들어갈 수 없을 때는 들어갈 수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왜 그런지 안 되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당시 몸 상태는?

 

“어떨 때는 계단을 못 오를 정도로 힘들었고 어지러웠습니다. 약도 다 떨어졌습니다. 독도함에 근무하는 후배에게 ‘니트로글리세린을 타 달라’고 했습니다. 후배가 약을 갖고 와서는 ‘군의관 말로는 이 약을 먹는 사람은 현장에 있어서 안 된다고 합니다’라고 걱정했습니다. 제가 ‘나도 안다. 받은 임무인데 어떻게 하겠나. 버틸 때까지 버텨보겠다’고 말했습니다. 8월 7일까지 현장에 있었습니다.”

 

-근무 혹사와 심장병과 확실히 인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까?

 

“세월호 현장에서 돌아온 뒤 서울 아산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았습니다. 비후성 심근경색이라고 했습니다. 선천적이면 20대에 발병하는데, 젊은 시절 SSU 훈련을 받아도 끄덕없었습니다. 가족·형제 중 누구도 이런 병이 없습니다. 술 담배도 안 하니, 결국은 극심한 스트레스가 발병 원인이었지 않을까요. 7시간 반에 걸친 심장 수술을 마치고 나왔을 때 집사람이 울고 있었다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34년 군 생활을 마치고 나오니 어떤가요?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제가 군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아 할 수 있었던 게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살아서 전역한 것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더 많은 기사는 <최보식의 언론>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