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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이후의 마르크스주의 - 우리에게 마르크스는 무엇인가?

이강기 2021. 5. 5. 20:31

학술 · 연구

마르크스 이후의 마르크스주의 - 우리에게 마르크스는 무엇인가?

젊은 시절의 마르크스

대학지성 In & Out 기자

2021.05.03 00:37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43강>_ 강신준 동아대학교 명예교수의 「마르크스 이후의 마르크스주의」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6. 서양 근대 문명과 그 세계적 영향’ 제 43강 강신준 명예교수(동아대 경제학과)의 강연 중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마르크스 이후의 마르크스주의 - 우리에게 마르크스는 무엇인가?

 

강신준 교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처음부터 실천을 전제로 한 것이며 그런 실천에 유효한 이론이라는 점에서 ‘과학적’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하였기에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에 숙명과 같은 태생적 과제”였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그 과제를 풀기 위해서 마르크스의 사후에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를, “제2인터내셔널, 러시아, 독일 등”에서의 역사를 돌아보며 살펴보는데 결국 “이들 시험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라고 평한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존재 이유를 상실한 것일까”를 묻는다면, 2008년 전 세계적 경제 위기 이래 “돌아온 마르크스주의가 새로운 실천의 시험대에서 자신의 유효성을 입증할 수 있을지”는 “결국 실천의 조건에 맞는 새로운 이론의 재정립을 이룰 수 있을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한다.

 

지난 4월 10일, 강신준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43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마르크스의 이론적 유산: 마르크스주의의 기원

 

마르크스의 정신적 유산은 18세기에 태동하여 한창 번성기로 향하고 있던 19세기의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평생의 지적 행로를 통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 제도를 일관되게 비판하고 그 제도의 변혁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회복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처음에는 프로이센의 절대주의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영국에서 꽃을 피우고 있던 자본주의가 변혁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자신이 지향하던 사회 변혁의 롤모델로 삼았고 1848년 혁명에서 그 변혁의 실체적 동력을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비판 이론을 현실의 실체적 동력과 결합시켜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 변혁 이론을 완성하였고 그것을 필생의 저작인 『자본』에 담고자 노력하였다.

 

비록 미완성으로 남긴 했지만 『자본』에 담긴 내용으로부터 그의 변혁 이론을 추론해보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부분을 재구성할 수 있다. 그는 일단 자신이 살던 시기의 시대적 과제를 “불가항력적인 사회 혁명”으로 압축하고 이 사회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네 가지 요소를 제시하였다. 첫째 그는 변혁의 대상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그에 상응하는 생산관계 그리고 교환관계”로 확정지은 다음 둘째 이 변혁이 지향하는 목표를 “궁핍과 외적인 합목적성 때문에 강제로 수행되는 노동”이 멈춘 “자유의 나라”(같은 곳)라는 개념으로 집약하였고 셋째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변혁의 수단으로 “노동일의 단축”을 최우선적인 지렛대로 설정하였다. 마지막으로 넷째 그는 이런 변혁을 실현할 수 있는 유효한 방법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개념으로 정립하였다. 즉 사회 제도는 “인간의 의지나 의식, 의도를 뛰어넘는” 독자적인 법칙을 가지고 있고 이 법칙은 유기체적 발전 과정을 따르며 변혁은 사회 제도의 이 법칙에 따라서 이루어져야만 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변혁 이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단지 변혁의 정당성을 이론적으로 밝힌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정당성을 현실의 운동 법칙과 결합시켜 실질적으로 변혁을 실현할 수 있는 실천적 유효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 있다. 즉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과학적 체계로 완성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그가 스스로 변혁의 방법으로 제시한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르면 사회 제도는 인간의 의지는 물론 인간에게 제약된 시간과 공간을 모두 뛰어넘는 독자적인 자연 법칙에 따라 변화하고 따라서 변혁의 이론과 그것의 실천 사이에는 의지와 현실의 간격에 해당하는 먼 거리가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갖가지 제약에 묶인 한 인간으로서 그가 남긴 유산은 이론으로만 남았고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는 후속 세대에게 실천적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 이후의 마르크스주의”는 바로 이런 후속 세대의 과제에서 출발하였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변혁 이론에 운명적으로 주어진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도전의 시험대가 되었고 오늘 우리가 그로부터 새롭게 돌아볼 수 있는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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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후 냉전 체제와 마르크스주의

 

러시아 볼셰비키의 도전은 1991년 최종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판명 나긴 했지만 1917년 이후 70여 년 동안 존속하였다. 특히 소련은 내전을 수습한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전승 국가의 대열에 합류하였고 이후의 냉전 체제에서 마르크스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종주국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소련의 이런 역할로 말미암아 냉전 체제 기간 동안 세계적으로 두 개의 마르크스주의가 기형적인 형태로 만들어졌다. 하나는 소련과 정치적 대척 관계를 이루었던 서방의 마르크스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두 번의 세계 대전 이후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식민지들에서의 마르크스주의이다.

 

서방의 마르크스주의는 제2인터내셔널의 해체에서 비롯되었다. 애국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거스르며 참전을 묵인함으로써 이론과 결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런 흐름의 가장 앞장에 섰던 독일은 이론적 목표이던 사회 혁명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였고 그 결과 자신에게 가장 적대적이던 히틀러에게 권력을 넘김으로써 궤멸적인 탄압을 자초하였다. 망명을 통해 가까스로 연명해오던 독일 사민당은 히틀러의 패망 이후 망명에서 복귀하여 재건되었지만 연이은 선거에서 계속 패배하자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최종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폐기하였다. 이론과 분리되었던 실천이 명목으로만 남겨두었던 이론 그 자체도 결국 폐기해버린 것이었다. 그리하여 독일 사민당은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와는 무관한 조직이 되었다.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소련이 마르크스주의의 종주국을 자처하고 자본주의 진영과 대립적인 냉전 체제를 구축한 것도 이런 이론의 폐기에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제2인터내셔널에 속했던 다른 서방 국가들의 노동운동도 대부분 독일의 길을 따랐다. 이들은 소련이 제2인터내셔널을 대신해 독자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제3인터내셔널(혹은 코민테른)을 결성하자 이와 구별하여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 SI)을 따로 결성하기도 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이미 독일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이론과 실천의 거리를 받아들이고 실천을 위해 이론적 목표로서 마르크스주의를 폐기 혹은 유예하였다. 사실상 이론 없는 실천만 남겨진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장기 번영 기간 동안 자본가 진영의 케인스주의와 “동업 관계”를 즐기기도 하였고 케인스주의의 몰락 이후에는 자본가 진영의 새로운 이데올로기였던 신자유주의와 다시 타협하여 “제3의 길”을 걷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도 몰락하자 이론의 부재가 치명적인 약점으로 드러났고 그 결과 최근에는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한편 이처럼 대중 조직이 실천을 앞세워 이론을 포기하자 혼자 남겨진 이론은 실천과 무관하게 독자적인 존립의 길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영역은 소련이 이미 종주국을 자처하고 있었고 바로 그 소련은 서방과 정치적으로 적대 관계에 서 있었다. 서방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현실적으로 허용된 영역은 실천과 무관한 대학의 연구실과 강의실이었고 이론적 연구의 내용 그 자체도 소련과의 차별성을 전제로 해야만 했다. 이들은 자신에게 허용된 영역을 찾아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실천과 분리된 범주를 구획 지었고 자신들의 연구를 이 범주에 집중시켰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초기와 후기로 분리하고 초기를 주로 연구 대상으로 삼은 소위 네오마르크스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네오마르크스주의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를 중심으로 냉전 기간 동안 소련과의 이론적 차별성을 부각하면서 발전해나갔다.

 

하지만 실천과 분리된 이론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으로 유예된” 것일 뿐 실천을 궁극적인 목표로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의 태생적 본질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이들 이론은 한때 “68혁명”이라는 대중적 실천의 계기와 만나기도 하였으나 대학의 연구실과 강의실이라는 자신의 제약을 벗어나지 못하고 좌절하였으며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마르크스의 귀환에도 불구하고 아직 실천과 결합할 수 있는 계기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방의 마르크스주의 외에 또 하나의 마르크스주의는 식민지에서 해방된 소위 제3세계의 마르크스주의이다. 이들 마르크스주의는 식민지 해방 투쟁과 냉전 체제가 함께 작용하면서 형성되었다. 식민지들에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해방 투쟁이 발생하자 소련은 이들을 적극 지원하였고 그에 따라 식민지 해방 투쟁과 마르크스주의가 결합하여 제3세계의 마르크스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 식민지 지역은 원래 반봉건적 상태에서 식민지로 편입되었고 식민지 기간 동안 제국주의의 수탈 대상으로만 기능했기 때문에 독자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의 계기를 거의 갖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은 외부로부터의 제국주의적 착취라는 형태로만 존재하고 내부적으로는 아직 자본주의적 모순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 결과 이들 지역의 마르크스주의는 식민지 모국과의 외부적 모순(소위 민족 해방)을 일차적인 모순으로 간주하고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소위 자본 임노동의 계급 관계)은 부차적인 모순으로 간주하는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그 자체의 내재적 모순을 직접 문제로 삼는 본래의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전제(생산력과 민주주의)가 아직 충족되지 않은 미숙한 형태의 마르크스주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을 2008년 위기 이후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논의에 포함시키는 것은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지난 세기 소련이 미숙한 자본주의적 조건에서 사회주의로 도약하려 하다 좌초한 경험을 그대로 떠올리게 한다. 최근 이들 지역의 마르크스주의가 대부분 어려움과 굴절, 혹은 좌초하고 있는 정황은 그것을 그대로 설명해준다.

 

6. 남겨진 교훈과 과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처음부터 실천을 전제로 한 것이며 그런 실천에 유효한 이론이라는 점에서 “과학적”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은 마르크스주의에 숙명과 같은 태생적 과제인 것이다. 이 과제는 이론을 남긴 마르크스의 사후에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고 제2인터내셔널, 러시아, 독일 등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하지만 이들 시험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존재 이유를 상실한 것일까? 실제로 이들 실천의 마지막 시험대였던 소련에서 1991년 마르크스주의가 퇴장하자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박제되어 박물관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마르크스가 『자본』 서문에서 헤겔에 대한 당시 세간의 부당한 평가를 마치 “죽은 개”처럼 간주한다고 했던 그 비판이 이제 마르크스주의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천박한 어떤 학자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는 끝났다!”라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의 무대는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작동 원리와 모순에 있어서 마르크스가 150년 전에 분석했던 내용과 본질적으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냈다. 마치 반복해서 되살아나는 좀비처럼 2008년 경제 위기가 다시 발발하자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그것을 설명할 유일한 이론으로 다시 “르네상스”를 맞았다. 실천의 시험대에서 실패를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은 여전히 현실적 유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또 다시 입증된 것이다. 그러나 물론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현실적 유효성은 그 본질에 비추어 실천적 유효성을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 결국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르네상스는 한 세기 전에 이미 그것이 부딪쳤던 도전을 다시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실패가 남긴 교훈은 이런 새로운 도전에 어떤 단서를 제공하고 있을까? 제2인터내셔널의 경험은 이론이 실천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실천적 이론으로 재해석, 재편성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주었다. 하지만 제2인터내셔널에서 가장 선도적인 위치에 있던 독일 노동운동의 경험은 이런 재해석이 기존의 이론을 실천이 필요한 새로운 조건에 맞추어 변증법적으로 한 단계 고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독일의 경험은 또한 기존의 이론이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지 못하면 그것이 실천의 새로운 조건과 충돌하고 모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론은 필연적으로 실천을 끌어내지만 실천은 다시 이론을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키는 변증법적 상호작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련의 경험은 이론과 실천의 불일치를 의지로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즉 실천의 조건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곳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실천과 결합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 실천의 조건은 바로 생산력과 민주주의였다.

 

이처럼 기존의 경험은 이론과 실천 사이의 변증법적 관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런 변증법적 관련은 이론이 실천과 만나는 순간 운동으로 시작되고 그것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로서 결코 은폐하거나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 따라서 돌아온 마르크스주의가 새로운 실천의 시험대에서 자신의 유효성을 입증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결국 실천의 조건에 맞는 새로운 이론의 재정립을 이룰 수 있을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 새로운 시험대의 첫걸음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실천해나갈 대중 조직이 결성되고 그 조직이 자신의 실천과 함께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새롭게 만들어나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능성이 어디에 있을지, 그리고 어디에서 시작될지 그것은 아직 열려 있는 물음으로만 남아 있다. 적어도 아직 본격적인 움직임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관련된 단서를 언급해둘 수는 있을 것 같다. 마르크스주의의 대중적 실천의 첫걸음이 “8시간 노동일의 요구”에 있었다는 점, 비록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독일과 소련에서 노동자 정부가 시행한 정책 가운데 세계적으로 확대 관철된 것이 “8시간 노동일”이었다는 점,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사회 혁명을 우려한 자본가 진영이 국제노동기구(ILO)를 결성했다는 점, 또한 비록 이론과 결별한 실천이긴 하지만 독일 노동운동이 이룬 성과 가운데 가장 괄목할 것으로 “노동일의 단축”을 들 수 있으며 이를 토대로 “모델 도이칠란트”라는 노사 관계의 세계적 모범이 만들어졌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실패를 거듭하며 이어진 마르크스주의의 이들 행보가 일관되게 지향하고 있는 목표가 바로 노동일의 단축인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시험대는 노동일의 단축을 전술적 매개로 삼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이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돌아온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확인해주고 있다.

 

“자유의 나라는 궁핍과 외적인 합목적성 때문에 강제로 수행되는 노동이 멈출 때 비로소 시작된다. … 노동일의 단축이야말로 바로 그것을 위한 근본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