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21세기 중국] 한무제 대외 팽창 연상케 하는 일대일로 “자본의 공간 이동”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신화=뉴시스]
최근 인문학자이자 중국 연구자로서 필자의 가장 큰 고민은 “중국을 어떻게 접근하고 이해할 것이냐”다. 학문 연구에선 가치와 신념도 중요하지만, 실용과 전략적 측면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역사와 문학, 사상은 물론, 처세학과 군사학이 발달한 국가다. 공산당 70년 통치 기간에는 처세학과 군사학이 훨씬 더 주목받았다. 중화인민공화국 출범 후 30년간 군림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성향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마오는 근본적으로 인문학 분야 지식인을 신뢰하지 않았다. 국가 중대사를 주로 군 간부와 상의해 결정했다. 그렇다고 역사·문학·사상이 공산당 정권에 의미가 없었는가 하면, 또 그렇지 않다.
중국 역사학자 거자오광(葛兆光)은 “구미에서 사상사 연구가 점차 쇠퇴해가는 것과 달리 중국에선 여전히 활력을 유지하고 있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중국 역사학자 거자오광(葛兆光)은 “구미에서 사상사 연구가 점차 쇠퇴해가는 것과 달리 중국에선 여전히 활력을 유지하고 있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시진핑, 집단지도체제 무력화
중국 통치자는 부(富)와 강(强)이라는 이중 과제를 달성해야 했다. 마오쩌둥은 강을, 덩샤오핑은 부를 우선시했다. 현재 중국은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시진핑의 노선은 부를 바탕으로 강을 추구한다. 일본 침략, 국민당과 내전으로 피폐했던 마오 시기 중국이 아니다. 시진핑 정부 주변에는 개혁파보다 강경파, 특히 민족주의자가 다수 포진해 있다. 그런 상황에서 강한 중국을 추구하는 시진핑 노선은 주변국이 예의 주시할 일이다. 한무제는 중국 통일 왕조 최초로 본격적인 대외 원정에 나섰다. 원동력은 앞선 왕조 진나라에서부터 마련된 통일 중국이라는 정치적 유산, 한나라가 건국 후 축적한 경제적 부다. 그런 점에서 최근 중국의 일대일로(一?一路)는 한무제의 서역 진출을 연상케 한다. 다만 지금 중국이 앞세운 것은 창과 칼보다 위협적인 자본의 힘이다. 그런 점에서 영국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일대일로를 “자본의 공간 이동이자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한 신(新)식민주의적 행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중국 일대일로 정책에 반대하는 호주 시민들. [동아DB]
“中, 서구 민주주의 명예회원 거부”
키신저는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서 중국과 핑퐁외교를 주도했다. 1979년 미·중 수교 때까지 중국을 약 50번이나 오가며 현지 정세를 자세히 관찰했다. 키신저는 중국이 언젠가 서구적 민주주의를 채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필스버리는 이것이 미국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며 오히려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의 시각에 주목한다. 리콴유는 “중국은 서구 민주주의의 명예회원이 아닌, 중국 자체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중국인 사고의 핵심에는 식민지배와 착취라는 굴욕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동아DB]
미국 역대 대통령들은 리콴유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이 같은 충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냉전 승리도 미국이 중국을 얕보는 계기가 됐다. 미국 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압도했다며 ‘역사의 종언’을 주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후쿠야마의 선언은 중국 지식인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 결과 1990년대 중후반 중국에선 신좌파가 대두해 민족주의를 주창했다. 중국 신좌파 지식인은 국가 이데올로기인 사회주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경우 민족주의가 이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00년대 들어 중국에선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앵그리 차이나’ 등 민족주의 성향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다만 이들 책의 저자는 대부분 민간 지식인이었다. 중국 정부는 자국 대중의 민족주의 움직임이 미국을 자극할까 우려해 거리를 뒀다. 그런 와중에 2010년 류밍푸(劉明福) 중국국방대 교수가 ‘중국몽(中國夢)’이라는 책을 냈다. 중국 정부는 이 책을 권장도서로 선정하는 등 띄우기에 나섰다. 시진핑 정부를 상징하는 슬로건 중국몽이 여기서 비롯했다. 이 책의 핵심은 “2049년까지 중국이 세계 제1의 ‘도덕적 강국’이 돼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체제 경쟁에서 실패한 소련과 달리 미국 패도(覇道)에 왕도(王道)로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다만 왕도를 내세우면서도 패도 수단인 군대를 강조한 것이 아이러니하다. 이러한 미래 청사진에 따르면 중국은 30년 후 시진핑 말처럼 ‘아름다운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건설해 세계를 호령하게 된다. 세계 패권국을 향한 100년의 마라톤에서 시진핑 정부가 막판 스퍼트를 담당한 셈이다.
미국의 중국 전문가들은 두 가지 이유로 류밍푸의 저서를 일찌감치 주목했다. 우선, 민간 지식인이 아닌 군 간부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둘째, 미국을 제치고 중국이 세계 패권을 쥘 방법이 제시됐다는 점이다. 마오쩌둥 시절부터 중국의 국가 중대사는 대부분 군부가 결정했다. 미국과 핑퐁외교를 비밀리에 설계하고 추진한 것도 군부였다. 중국판 선군정치인 셈이다. 1969년 5월 중국인민해방군 원수 천이(陳毅)는 마오쩌둥에게 “미국과 회담을 위해 대만 문제를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시 소련과 관계가 틀어진 중국은 일시적 친구로 미국을 선택했다. 대약진운동의 슬로건 ‘7년 안에 영국을 초월하고 15년 내 미국을 따라잡자’에서 알 수 있듯이 마오는 내심 미국을 경쟁 상대로 봤다.
마르크스 저작보다 자치통감 읽은 마오
21세기 중국을 이해하려면 사회주의 이념보다 역사와 전통, 관습이라는 틀에서 관찰해야 한다. 가령 역대 중국공산당 지도자는 마르크스의 저작 등 공산주의 이론서보다 전근대 중국 고전을 탐독했다. 마오쩌둥은 ‘자치통감’을 17번이나 통독하며 “읽을 때마다 새로운 수확을 얻는 책”이라고 극찬했다. 이념적 당위가 아닌 역사와 현실 속 중국 모습을 직시해야 한다.
조경란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인문정책특별위원회 위원. 중국현대사상·동아시아 사상 전공. 홍콩중문대 방문학자·베이징대 인문사회과학연구원 초빙교수 역임. 저서로는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 신좌파·자유주의·신유가’ ‘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 전통·근대·혁명으로 본 라이벌 사상가’ ‘국가, 유학, 지식인: 현대 중국의 보수주의와 민족주의’ 등이 있다.
조경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