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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바이런의 회고록을 불태웠나…'잿더미 문화유산' 수난사

이강기 2021. 12. 31. 23:30

누가 바이런의 회고록을 불태웠나…'잿더미 문화유산' 수난사

중앙일보

입력 2021.12.31 17:56

'책을 불태우다' 표지

 

'변신'이나 '심판' 같은 카프카의 대표작이 그냥 사라질 뻔했다는 건 유명한 얘기다. 생전에 무명작가나 다름없었던 카프카는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이 죽은 뒤 미발표 원고를 모두 없애달라고 당부했는데, 브로트는 없애기는커녕 공들여 세상에 내놓았다.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걸작으로 꼽히는 장편서사시 '아이네이스'도 없어질 뻔했다. 시인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원고를 불태워 달라고 절친한 다른 시인에게 부탁했는데, 거절당했다.

 

이처럼 종종 작가의 뜻을 거스른 친구들 덕에 위대한 문학적 유산이 살아남은 경우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복누이를 비롯해 여러 상대와의 불륜 로맨스로도 유명한 19세기 영국 시인 바이런이 자기가 죽은 뒤 출간하라며 친구에게 맡긴 회고록 원고는 결국 불태워졌다. 그 내용이 시인의 명성에, 그 가족에게 불명예가 될 것을 우려한 이들이 출간에 반대한 결과다.

5세기 초의 그림. 앉아 있는 사람이 시인 베르길리우스. [사진 책과함께]

 

모두 『책을 불태우다』에 나오는 일화다. '책'으로 대표되는 지식·정보·기록 등을 모으고 보존하는데 힘을 쏟은 역사, 반대로 이를 파괴하려 한 역사를 다양한 사건과 일화를 통해 다룬 이 책에서 비교적 쉽게 읽히는 대목이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유서 깊은 보들리 도서관 관장인 저자는 상대적으로 생경한 사건,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는 사건, 디지털 정보 홍수 시대의 새로운 상황 등을 통해 지식의 보존에 관련된 이슈를 광범위하게 펼쳐낸다.

 

군대의 방화로 불탄 도서관

그중 도서관이 겪은 수난을 빼놓을 수 없다. 19세기 초 미국 워싱턴을 공격한 영국군은 미국 의회 도서관을 불태웠고, 20세기 초 프랑스로 진군하던 독일군은 벨기에에서 루뱅대학 도서관을 불태웠다. 설립 초기였던 미국 의회 도서관은 당시 장서가 3000여권에 정도였지만, 15세기 설립된 루뱅대학은 당시 장서가 30만권이 넘었다.

 

특히 한 사회의 지식과 기록이 유형의 자산으로 집적된 곳이란 점에서 도서관에 대한 공격은 특정 문화, 특정 사회에 대한 공격과도 맞물린다.

 

1992년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는 작심하고 도서관을 겨냥한 공격이 벌어졌다. 세르비아 민병대는 불이 잘 붙는 소이탄으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국가·대학도서관을 포격했고, 소방수를 겨냥한 저격병까지 배치했다. 책을 빼내려 동분서주하던 도서관 직원 중 한 명도 저격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중세 필사본을 포함해 15만 점이 넘는 책과 자료를 소장한 도서관이 다 타는 데는 사흘이 걸렸다. 당시 보스니아에서는 나중에 '인종 청소'라고 불릴 정도의 살벌한 학살이 벌어졌다. 도서관·기록관도 보스니아 전역에서, 이슬람교도 지역에서 수십 곳이 공격당했다.

1947년 미국 뉴욕에 하역된 YIVO 자료들. [사진 책과함께]

 

이 책은 파괴자만 아니라 치열한 수호자들을 소개하는데도 큰 분량을 할애한다. 유대인을 탄압한 나치는 유대인들이 소장한 책과 유대 관련 자료를 대규모로 압수하고 폐기하는 작업을 펼쳤는데, 책과 자료의 선별을 위해 동원된 유대인들은 '종이부대'라고 불렸다. 이들은 위험을 감수하며 나치의 눈을 피해 책과 자료를 조금씩 빼돌렸다. 이에 앞서 동유럽에서는 유대 관련 문화와 역사를 수집하는 광범위한 운동이 일어났다. 지금은 리투아니아의 수도가 된 도시에서 1920년대에 설립된 이디시과학연구소(YIVO)는 그 중심이 된 기관이다. 헌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구소련이 해체된 이후 이런 자료는 여러 국가나 지역이 저마다 권리를 주장하는 등의 문제가 벌어지기도 했다.

 

사실 지금 시대의 지식 보존은 국경을 넘나드는 이해관계가 다면적으로 얽히곤 한다. 미술품이나 문화재와 더불어 정복자들이 약탈한 뒤 반환하지 않은 책들, 제국주의 시절 유럽 열강이 본국으로 가져가거나 파기해 정작 식민 지배를 경험한 나라에서는 접근이 어려운 자료들도 그 예다. 저자는 이를 두고 "한 사회의 지식을 빼돌리는 것"이라며 "한 사회가 자기네 스스로의 역사에 접근하지 못하면 과거에 대한 서술이 통제되고 조작되면 문화적·정치적 정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지식의 보존은 과거 아닌 미래의 문제

이는 한 나라나 지역에도 해당할 수 있는 지적이다. 저자는 억압적 통치를 경험했거나 겪고 있는 지역에서 문서 등 관련 자료가 대량으로 폐기되는 현실,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방대한 기록의 저장과 보존에 따르는 지식의 통제권과 접근권에 대한 새로운 문제 역시 주목한다.

 

1장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서관 얘기로 시작한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지식의 보존은 근본적으로 과거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미래에 관계된 것"이라고. 메소포타미아의 도서관도 점성술·천문학 등 미래 예측에 관한 책이 많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