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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중심은 中 아닌 이곳"…18세기 조선 학자가 본 세계

이강기 2022. 1. 24. 14:28

"세계의 중심은 中 아닌 이곳"…18세기 조선 학자가 본 세계

 
중앙일보

업데이트 2022.01.24 13:37

윤동규가 필사한 『곤여도설(坤輿圖說)』의 일부 [사진 허경진 교수]

 

"유럽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나라를 에스파냐라고 하는데, 둘레가 1만2500리이다. 세간에서 말하기를 세상 모든 나라들 중 영토의 크기에 대해 하나로 이어진 것으로 따지자면 중국이 으뜸이나. 만약 다른 지역으로 분산된 영토까지 한다면 에스파냐가 으뜸이라고 한다."

 

가톨릭 신부 페르비스트가 남회인(南懷仁)이라는 중국명으로 1672년에 간행한 『곤여도설(坤輿圖說)』의 일부. 세계를 두 개의 반구도(半球圖)로 나누어, 오대주와 사대양이라고 기술하는 한편 세계 각지의 지리와 자연과학에 대한 정보를 집약한 지리과학서다. 이 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으로 유입됐다.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고, 청-조선-일본 정도 외에는 모두 금수의 땅이자 오랑캐에 불과했다고 여겼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성호 이익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필사본이 만들어지며 큰 관심을 끌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활동한 학자 서유본은 아들에게 쓴 편지에 『곤여도설』을 언급하며 "중국은 적도의 북쪽에 치우쳐서 있으니. 진실로 천지의 중앙이 아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지난 12월 나온 『곤여도설』은 조선에서 유통되던 책 중에서 성호의 제자 소남 윤동규의 필사본을 번역한 것이다. 『곤여도설』은 현재 상권이 윤동규 종가에 필사본으로, 하권은 규장각에 목판본으로 한 권씩만 남아있다.


윤동규는 이 필사본에 다양한 메모를 남겨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이 책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테면 바다의 조석(潮汐)에 대해 다룬 부분에서 윤동규는 『직방외기(職方外紀)』를 인용해 "그리스에서 떨어진 에보니아의 바다에는 조수가 하루에 일곱 차례나 있다. 이르난 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연유를 알지 못하여 애석하게도 이 물가에 이르러 죽고 말았다"는 메모를 추가해놓았다. 『직방외기(職方外紀)』 역시 명나라 말기에 이탈리아 선교사 알레니가 한문으로 적은 세계지리책이다.

 

윤동규는 영조 때인 18세기에 활약했던 학자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에서 이런 책이 필사되고 유통된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 책을 번역한 허경진 연세대 명예교수 통해 책과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세계 인식에 대해 들어봤다.

페르비스트가 제작한 '곤여전도'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페르비스트가 제작한 '곤여전도' 중 아시아 부분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윤동규라는 인물이 이 책을 필사한 이유는 무엇인가


=성호 이익의 부친이 청나라 북경에 사신을 다녀오면서 책을 수 천권씩 사 왔다고 한다. 그중에는 서학(천주교)을 비롯해 서양 관련 책도 많았다. 윤동규는 성호를 진심으로 존경해서 조금 더 그와 가까워지려고 서울에서 인천으로 이사를 하였을 정도(성호는 안산에 거주)였는데, 그 집에서 책을 많이 필사했다. 이 외에도 남겨진 편지들을 보면 천주교와 관련된 책도 많이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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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이익과 윤동규, 정약용 모두 남인이다. 남인들이 서학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남인은 당시 과거 시험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다. 영·정조 때는 정계에서도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까 과거 시험을 목적으로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과거시험은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정답을 요구받는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면에서 자유롭다 보니까 서양에 대해서도 탄력적으로 접근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일본 유학자들이 서양 학문에 대해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거기는 과거 시험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윤동규가 필사한 『곤여도설(坤輿圖說)』의 일부 [사진 허경진 교수]

 

-그런데 같은 남인끼리도 정약용의 천주교 문제를 비판하지 않았나


=같은 남인이라도 근기(서울·수도권) 남인과 영남 남인은 차이가 있었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 남인은 지형적 요인이나 지역적 분위기 때문인지 굉장히 보수적이었고, 서울 인근에 있던 남인들은 개방 지향적이었다.

 

-윤동규가 그리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닌데,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본인의 저서가 없다 보니 연구자들의 관심에서는 다소 소외된 사람이다. 다만 이익이나 안정복처럼 당대 유명한 학자들과 매우 많은 교류를 했던 인물이다. 이분이 그들과 나눈 편지가 1300여편이나 남아있을 정도다. 흥미로운 건 성호박물관에는 정작 성호의 편지가 없는데, 윤동규 종가에서 보관 중인 편지 중에는 성호의 편지가 200편이나 있다. 현재 이 편지들을 번역 중인데, 올해 말쯤 빛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편지에는 그 사람이 무엇을 궁금해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도구다. 이 번역이 완료되면 18세기 남인들이 어떤 세계관과 철학을 갖고 있었는지 보다 상세히 알려지게 될 것이다.

『곤여도설』 [사진 보고사]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