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憶해 두어야 할 이야기

‘주상 앞에서 중국 사신들은 심야까지 기생을 희롱하였다’ - 이씨 왕실 족보 왜곡과 1537년 경회루에서 벌어진 막장 사대(事大) 대참사

이강기 2022. 10. 26. 08:36

‘주상 앞에서 중국 사신들은 심야까지 기생을 희롱하였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320. 이씨 왕실 족보 왜곡과 1537년 경회루에서 벌어진 막장 사대(事大) 대참사

조선일보, 2022.10.26 
 
 
 
 
경복궁 경회루에서는 왕이 주재하는 연회가 수시로 열리곤 했다. 그런데 중종 때인 1537년 봄날, 명나라 사신인 한림원 수찬 공용경(龔用卿)과 호과 급사중 오희맹(吳希孟)은 배석해 있던 조정 신하들이 온몸을 떨며 분통을 터뜨릴 정도로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평상복을 입고 나타나는가 하면 중종을 끌고 궁궐을 두루 구경하는가 하면 기녀들에게 음란한 춤을 추게 하고 먹물을 얼굴과 옷에 뿌리는 행패도 보였다. 하지만 고려 때 ‘역적 이인임’이 전주 이씨 조상이라고 기록된 명나라 문서를 고치기 위해서, 중종은 그 대참사를 그대로 지켜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기록상 전주 이씨 족보를 바로잡는 ‘종계변무’는 52년이 지난 1589년에 이뤄졌다. /박종인 기자
 

* 유튜브 https://youtu.be/aFnguLn665U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기 1368년 주원장이 명 태조에 등극했다. 이듬해 고려 공민왕 또한 원나라를 버리고 명에 입조했다. 이미 권력은 권지국사(權知國事) 벼슬아치 이성계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때 명이 고려왕실에 축문(祝文)을 내리고 명산대천에 이를 읽으며 제사를 올리라 명했는데, 그 시작이 이러하였다. ‘고려 배신 이인임의 후손 이모(李某)가 나쁜 짓을 하므로 이를 상제(上帝)에 고하라’(1394년 음6월 16일 ‘태조실록’)

 

여기 나오는 ‘이모’는 전주 이씨 이성계이고,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이인임은 이성계의 친원파 정적이었다. 조선 건국 2년 뒤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선 정부는 이를 고치기 위해 눈물겨운 투쟁을 벌였으니, 이를 ‘종계변무(宗系辨誣)’라고 한다. 봉건왕조 뿌리를 뒤집어놓은 이 황당무계한 족보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조선 정부는 그 어떤 가련한 일도 서슴지 않았다. 오늘 이야기는 중종 때인 서기 1537년 봄날 저녁 경복궁 경회루에서 벌어진 치욕의 사대 대참사.

 

막장의 씨앗, 족보

개국 2년째인 1394년 4월 25일 흠차내사(欽差內史) 직책을 가진 명나라 내시 황영기(黃永奇)가 조선을 찾았다. 황영기는 조선인 출신 내시였다. 그때 황영기가 가져온 축문을 보고 이성계는 자기가 정적 아들이라고 적힌 사실을 알았다.(1394년 6월 16일 ‘태조실록’) 문제는 심각했다. 이 축문을 명산대천에 두루 읽으며 스스로를 저주해야 하는 게 아닌가. 게다가 저주가 이뤄지지 않으면 ‘정토군을 일으키지 아니할 수 없다’는 협박까지 달려 있었으니, 하늘과 황실이 연합해서 조선 왕실을 멸망시키겠다는 것이다. 태조는 아들 이방원까지 명에 사신으로 보내며 “아랫사람을 슬프고 긍휼히 여겨 족보를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했다.

 

문제가 원만히 해결된 줄 알고 있던 조선 정부는,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직후인 1402년 명에서 돌아온 사신에 의해 이씨 왕실이 여전히 이인임 후손으로 적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겁했다. 태종은 이듬해 11월 명 황실에 문서를 올리며 다시 한 번 수정을 요청했다.(1403년 11월 15일 ‘태종실록’) 이듬해 명나라는 당시 황제 영락제가 조선 측 요구를 수용했다는 문서를 보내왔다.(1404년 3월 27일 ‘태종실록’)

 

114년 뒤인 1518년 중종 때 사신들이 명나라 법전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구입해왔다.(1518년 4월 26일 ‘중종실록’) 조공 국가의 조공 품목을 나열한 ‘조공-조선국’ 규정을 보니, 놀라웠다. 여전히 이성계는 이인임 아들이며, 한발 더 나아가 ‘이들 부자가 왕씨 왕 넷을 죽였다’고 기록돼 있는 게 아닌가! 정적 아들도 억울한데 그 정적과 손잡고 왕을 넷씩이나 죽인 살인범이라니. 통분(痛憤)한 조선 정부는 이후 줄기차게 기록 수정을 요구했으나 명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19년 뒤 어느 봄날 밤, 천자국에서 막장 사신들이 궁궐에 들이닥친 것이다.

 

사신에게 다섯번 절한 중종

1536년 12월 1일 평안관찰사 이귀령이 명나라 한림원 수찬 공용경(龔用卿)과 호과 급사중 오희맹(吳希孟)이 황실 태자 탄생 기념 조서를 들고 조선을 찾는다고 보고했다. 이들은 무신이나 조선 출신 환관이 아니라 말이 들어먹힐 문신(文臣)들이니, 족보 수정이라는 왕실 최우선 외교 목적을 달성할 기회였다. 중종은 즉시 사신을 접견할 때 입을 복식을 만들라고 명하고 접견 준비에 착수했다.(1536년 12월 1일 ‘중종실록’)

 

이듬해 봄, 압록강을 건넌 사신들이 평양에 도착했다. 이상한 조짐은 이미 그때부터 나타났다. 공식 의례를 행하기 전 사신 공용경이 사신이 가져온 칙서를 향해 중종에게 허리를 숙이는 국궁(鞠躬) 대신 오배삼고두례(五拜三叩頭禮)를 행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오배삼고두례는 다섯 번 절하고 마지막 절에는 세 번 고개를 숙이는 예법이다. ‘대명회전’에 실려 있는 예법이며 천하가 다 거행하는 예법이라는 것이다.(1537년 2월 30일 ‘중종실록’)

 

망설이던 중종은 닷새 뒤 이를 수용하고 3월 10일 서대문 밖 모화관에서 왕세자와 문무백관, 유생들을 거느리고 공용경과 오희맹을 맞이하며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고개를 숙였다.(1537년 3월 10일 ‘중종실록’) 개국 이래 처음 있는 예법이었고, 이후로 이는 공식 예법이 됐다.(최종석, ‘국궁인가 오배삼고두인가?’, 한국문화 83권 83호,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18)

 

그런데 이들 사신은 서울 도착 전 조정에 공식 문서를 보내 ‘당도할 때까지 여인이 시중 드는 일을 금하라’고 부탁한 보기 드문 ‘청렴한’ 인물들이었다.(1537년 2월 8일 ‘중종실록’)

평상복을 입고 나타난 중국 사신은 경회루에서 젊은 기녀 넷에게 춤을 추라 하고 큰 붓에 적신 먹물을 촛불 든 기녀에게 뿌리며 외설한 짓을 멋대로 방자하게 하였다.(‘중종실록’) /박종인 기자
 

봄날 밤 벌어진 경회루 대참극

3월 14일 오후 1시, 공용경과 오희맹이 경복궁에 입궐해 경회루 남문으로 들어왔다. 지금과 달리 당시 경회루는 사방으로 담이 둘러쳐 있는 은밀한 공간이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중종은 사신에게 본론부터 꺼냈다. “‘대명회전’ 편찬을 맡은 대인께서 오시니 한 나라 원통함을 씻어주시오.” 정사(正使) 공용경은 “이다음에 새로 편찬될 대명회전을 보시면 알게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중종은 거듭 ‘이인임은 전주이씨 왕실과 무관하다’고 말하며 다짐을 받았다. 공용경은 “같은 내용을 문서로 써서 부사(副使) 오희맹에게도 주시라”고 말했다.

 

본론이 끝나자마자 분위기가 돌변했다. 청렴과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중종이 후원(後苑) 산책을 이들에게 권했다. 그러자 공용경이 느닷없이 “관복 대신 평상복을 입고 싶다”고 말했다. 중종이 “대인들은 그리하시라”고 하자 두 사신은 진짜 의례복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고 등장했다.

 

그렇게 곤룡포를 입은 중종과 평복을 입은 명나라 사신들이 경회루 2층에서 주연을 즐겼다. 이들은 백악산을 공극산, 인왕산을 필운산으로 개명하고 이를 붓으로 써줬다. 그리고 후원으로 걸어갔다. 명 사신들은 꽃을 꺾어서 중종 익선관에 꽂았는데, 하나만 꽂으려 하는 중종에게 두 개를 꽂으라 우겨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만들기도 했다. 불편한 예복을 입은 임금이 정원을 걸으니, ‘한 나라 임금을 끌고 정원 안을 두루 걸으므로 곤룡포가 풀이슬에 질질 끌리게 되고 울퉁불퉁한 구릉과 골짜기에서 임금이 비틀거렸다.’ 이를 본 신하들은 그 무례함에 분개하고 한탄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밤이 깊어 불꽃놀이를 관람한 뒤 술자리가 이어졌다. 사신들은 잔을 돌리려는 중종을 막고 큰 잔에 가득 술을 부어 나눠 마시자고 제안했다. 해산물이 안주로 나오자 공용경은 “조리를 잘 못해 입에 맞지 않는다”고 타박했다.

 

행패는 끝이 없었다. 술이 다 돌고, 공용경이 큰 글자를 써주겠다고 제안하며 이렇게 주문했다. “젊은 기녀 둘에게 촛불을 들게 하고 또 젊은 기녀 넷은 춤을 추게 하라.”

 

기녀들이 춤을 추었다. 공용경이 “선학(仙鶴)이로다!”하며 촛불을 든 기녀 머리 장식을 떼내고 얼굴을 기녀에게 들이밀었다. 그리고 큰 붓에 먹물을 적시더니 그 기녀를 향해 뿌리는 게 아닌가. 여자는 얼굴과 옷에 온통 먹물이 튀었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허공에 붓을 놀리며 농담을 해대는 것이었다. 그때 대사헌 권예가 중종에게 이리 아뢨다. “사대는 성의 있게 해야 하지만, 저들의 소행은 미치광이 짓과 같나이다.”

 

모두가 그러했다. 중종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조상 족보를 바꿔야 하는 의무가 아니었다면 큰 사달이 났을 터이나, 중종은 “저들이 술을 권하지 않으면 나 또한 권하지 않겠다”고 참았다. 자정이 될 때까지 조선 국왕 중종과 관료들은 이 명나라 사신이 펼치는 음주 서예 ‘쑈’를 묵묵히 지켜봐야 했다.(이상 1537년 3월 14일 ‘중종실록’) 사흘 뒤 두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태평관에 가서 이들을 만난 중종은 ‘종계변무’ 보고서를 담은 문서책을 손에 쥐여주며 이들을 환송했다.(1537년 3월 17일 ‘중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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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끈한 대접을 받은 그들이 조선국 소원을 들어줬는가. 들어주지 않았다. 향응 접대와 갖은 뇌물을 받은 이들이 돌아가고도 종계변무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자그마치 52년이 흐른 1589년 선조 때에야 명나라에서 ‘대전회통’ 개수 작업이 이뤄졌다. 이를 성사시킨 관료 19명은 나라를 빛낸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책봉됐다.(1589년 10월 1일 ‘선조수정실록’) 그리고 3년 뒤 임진왜란이 터졌다. 백성이 경복궁을 불태웠다. 아주 훗날 흥선대원군이 궁궐을 중건할 때까지 오래도록 경회루도 돌기둥만 서 있었다. 그사이, 아주 많은 봄날들이 갔다.

저 어스름한 달빛 아래 중종과 신하들은 중국사신 행패에 분통을 터뜨렸것다!(‘중종실록’)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역사가 됩니다. 땅에는 흔적이 남습니다. 그게 역삽니다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