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인문학…‘교육혁신/융합연구·교육 활성화/재정지원 강화’ 필요하다
- 고현석 기자
- 대학지성, 2022.12.10 21:29
인문학의 위기란 국내 대학 및 사회에서의 인문학 저변의 약화, 인문학 전문가 그룹의 축소, 학문후속세대 양성의 차질 등 현상 전반을 일컫는다. 이런 현상은 한편으로는 수십 년 전부터 발생한 추세라고 볼 수 있고, 세계적 흐름인 측면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최근 10여 년간, 학령 인구 감소에 따른 대학 구조 조정의 압력이 커지고, 취업 경쟁이 점차로 심해지면서 빠른 속도로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2011년~2022년 사이 전국 대학에 설치된 철학과의 수가 80개에서 60개로 감소한 것은 인문학 위기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에 한국연구재단은 위기 속 인문학의 국내 대학 현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그 원인을 진단함으로써 현 위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제언하는 이슈 리포트 <변화와 위기의 인문학 연구와 교육의 역할에 대한 연구>(저자: 경북대 철학과 권홍우 교수 외 3명)를 발간했다.
인문학 위기의 원인이 복잡다단한 만큼, 위기에 대한 단일한 해법이 있을 수 없으나, 보고서는 ‘첫째, 인문학 교육의 혁신을 통한 대학 교육에서의 인문학의 입지 강화, 둘째, 융합 연구 및 융합 교육의 활성화, 셋째, 인문학 분야 학문후속세대 양성을 위한 기초 재정 지원 강화’ 를 해결 방안으로 제안하고 있다.
이번 연구는 인문학의 현황을 분석함에 있어서 인문학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기보다는 인문학의 대표 분야인 문학, 사학, 철학 분야의 사례를 대상으로 했으며, 현황 분석은 여러 통계 자료 분석 및 관련 분야 연구 및 교육자와의 면담, 문헌 조사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 보고서 내용 중 철학 분야를 발췌해 소개한다.
■ 인문학의 위기 현황 - 철학 분야
철학 분야는 다른 인문학 분야 못지않게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특히 철학과가 폐과되는 대학이 많아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철학과 전임 교원의 감소 현상도 두드러진다.
▶ 철학과 현황
ㅇ 철학과 전임 교수, 전공생 현황
국내 대학에서 10년 동안 철학과의 수가 급격하게 감소했으며, 그에 따라 최근 10여 년 동안 전공 학생 수 및 전임 교원의 수도 급감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장차 5~6년 안에 철학과 전임 교원 중 많은 수가 퇴임하면서 이 중 상당수의 자리는 충원되지 않을 것으로 보여, 철학과가 지속적으로 축소 또는 폐과될 위기에 처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부 학과는 이런 과정에서 “철학상담학과”, “철학윤리학과” 등으로 명칭과 정체성을 변경하여 취업률 제고를 시도하는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했으나, 실제로 실효성이 있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인문학으로서의 전통적인 철학의 순수성을 훼손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으로 볼 수 없다.
ㅇ 학부 교육 현황
∎ 철학 전공 교육 현황
전공 교육의 경우, 전공 학생 수가 줄어든 만큼 예전에 비해 수강생이 줄고 전공 수업의 활력이 떨어지는 경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부 대학 철학과의 경우 복수 전공생, 일반 선택으로 철학 전공을 수강하는 학생들이 꾸준히 유입되어 전공 교과목 자체가 위기를 겪는 상황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최근 10여 년 사이 PSAT, LEET 등의 공무적성시험 준비를 위해서 논리 분야 및 분석 철학 분야의 학습이 중요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철학 분야 전공 수업 및 교양 수업의 수요는 완만히 증가하거나 유지되는 추세이다.
∎ 철학 관련 교양 교육 현황
교양 수업에 있어서도 철학과는 논리 관련 과목 및 기타 교양 과목에서 대학 내에서 비교적 많은 수요를 누리고 있다. 특히 교양 기초 수업에 해당하는 “논리와 비판적 사고”와 기초 논리학 교과목의 증가세가 두드러진다. 몇몇 대학에서 많은 수의 강좌가 개설되는 대표적인 과목에 해당된다. 일례로, 경북대학교의 경우 철학과에서 주관하는 교양 교과목 분반 수는 1년에 80~90개에 이른다.
이런 점에서 철학 분야는 다른 인문학 분야에 비해 교양 교육에서의 입지가 두터운 측면이 있다. 이는 철학 전임 교원이 줄어드는 추세 속에서 꾸준한 강의 수요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학문후속세대에게는 한가닥 희망이 될 수 있다.
∎ 융합 교육 현황
철학 분야에서는 꽤 오래 전부터 다양한 방면에서 융합 연구 및 교육이 시도되어 왔다. 과학 철학, 과학사, 과학 사회학, 과학 정책학 등을 융합한 STS(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과정(예를 들어, 서울대학교에서 “과학기술학 연계과정”으로 운영), 철학, 정치학, 경제학 등을 융합한 PPE(Philosophy, Politics and Economics) 과정(예를 들어, 서울대학교에서 “정치경제철학” 연계과정으로 운영)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뿐만 아니라 국내 여러 대학의 철학과에서는 상담학과와의 연계를 통한 “인문카운슬링” 또는 “철학상담” 등의 융합 시도가 있어 왔다. 교육 및 연구에 있어 융합의 시도는 그 성공을 판단하기는 이르나, 철학과가 축소되고 있는 현실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판단된다.
ㅇ 철학과 대학원 현황
∎ 대학원생 수
대학원 철학 분야의 경우 특이하게도 전반적인 통계에서는 재학생이 감소하는 현상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철학 관련 학과 전체를 포괄한 통계로, 철학과의 경우 전업 대학원생이 아닌 비전업 대학원생의 꾸준한 유입에 기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순수 학문후속세대의 수는 전반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국내 주요 대학만을 놓고 볼 때, 최근 국내 대학원 철학과의 재학생 수는 소폭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재학생은 양극화되는 현상을 보인다. 이는 대학원 철학과 진학 희망 학생들이 줄어들면서 점차 “상향 지원”하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서울대학교와 서울의 주요 사립 대학, 그리고 지방 거점 국립대에서 꾸준히 학문후속세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인 것으로 판단된다.
∎ 철학과 대학원생에 대한 재정 지원 현황
BK21 사업을 수행하지 않는 학과의 경우 대학원생에 대한 재정 지원은 상당히 적은 규모인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대학 자체 지원은 대부분의 경우에 극히 제한된 편이다.
일례로 경북대학교의 경우, 한 학기에 3~4명의 학생들만이 등록금 감면 장학금의 수혜를 받으며 그마저도 40만 원 정도로 등록금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일부 학생들에게는 TA, RA 등의 기회가 주어지나 그 기회가 많지 않은데다가 한 학기에 160만 원 정도로 등록금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간혹 지도 교수가 개인연구 과제를 수행하며 연구 보조원으로 장학금을 수여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나, 개인연구를 수행하는 교수의 수 자체가 많지 않다.
∎ 철학 분야 BK21 사업 수행 현황
전국에서 BK21 사업에 참여 중인 철학과는 5개에 불과하다. BK21 사업을 수행하는 철학과의 경우 석사 과정생 70만 원/월 이상, 박사 과정생 130만 원/월 이상의 생활비 지원 장학금이 지급되고 있어 비교적 넉넉한 재정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 학기 등록금이 국립대학교의 경우에도 200만 원이 넘는 상황에서 풍족한 지원이라고 볼 수는 없다.
∎ 철학과 대학원생 취업 현황
다른 인문학 분야와 마찬가지로 철학과 대학원 졸업자 대부분은 대학 강사 등의 교원으로 진출하며, 그 중에 일부분만이 전임 교원으로 임용된다.
철학의 경우, 교양 교과목의 수요가 상당하여 강사 자리가 비교적 넉넉한 편이다. 박사 학위자가 어느 정도 수의 강사 자리를 얻지 못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 철학 분야 문제 진단
• 국내 대학교의 철학과 수 감소 및 그에 따른 철학과 전공생 수 감소는 2~30년 전부터 점차적으로 진행되어 온 현상으로, 이 추세는 앞으로도 어느 정도 지속될 것으로 보임
• 철학이 가진 학문으로서의 기초성을 고려할 때에도 전문 철학 연구자가 어느 정도 규모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과제
• 모든 대학에 철학과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철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정도의 비판적인 의견이 있는 만큼, 이것 자체가 비관적으로 볼 현상은 아닐 수 있음
• 다만, 대학에 철학과가 없다고 하더라도 전공 교육 수준의 철학 교육을 경험할 만한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은 중요한데, 많은 대학에서 이런 기회조차 점차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
• 이를 위해서는 양질의 교육을 담당할, 훈련을 잘 받은 학문후속세대가 지속적으로 양성될 필요가 있음
• 따라서 철학 분야의 위기 해소를 위해 대학 교육에서의 수요 확장을 통한 저변 확대와 꾸준한 학문후속세대 양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 집중할 필요가 있음
• 비록 철학 분야 대학원생이 일부 대학으로 편중되고 있지만,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부정적으로 볼 필요만은 없는 것으로 판단됨. 오히려 이런 추세를 이용하여, 연구 역량이 출중한 대학의 철학과에서 내실 있는 철학 연구자를 꾸준히 양성하는 것이 중요함
• 최근 학부 철학과 졸업생이 본과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비율이 다소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 이는 고무적인 현상으로 판단됨. 이런 학생들에 대한 적절한 지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함
▶ 철학 분야 문제에 대한 해법
ㅇ 대학 내 철학 교육의 저변 유지 및 확대
• 현재 철학 또는 인문학의 위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많은 대학에서 대학 당국 및 학생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다는 점임
• 이는 대학의 취업 위주 교육에 어느 정도 기인한 점도 있으나, 철학 분야에서 학생들의 눈길을 끌만한 양질의 교육이 행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반성이 필요함
• 국내외 많은 대학에서 다전공(복수 전공, 부전공, 마이크로전공)을 강조하는 분위기는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분야에 새로운 기회가 될 것으로 보임. 많은 학생이 취업 경쟁으로 인해 주전공으로는 철학을 택하기를 꺼려하나, 부전공이나 마이크로전공 등의 보다 적은 단위의 전공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있음
• 철학과와 같이 정원이 소수인 학과가 전공 교육에 있어 저변을 확대하는 유일한 길은 다전공생을 확보하는 것이므로 이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음
ㅇ 후속세대양성에 대한 기본적인 재정 지원 확대
• 철학과 같은 기초 분야에서 우수한 학문후속세대를 지속적으로 양성하는 것은 대학 교육에 있어서나 국내 학계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임
• 철학과의 경우 대학원 진학률이 상당히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고, 특히 동양 철학 분야나 고전철학분야는 미래에 학문 자체의 유지가 힘들어질 수 있을 정도로 재학생이 저조한 편임.
• 이는 사회적 분위기 및 현재 대학생들의 성향과 상당 부분 관련이 있어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나, 현재 대학생들의 성향에 맞도록 적절한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재고의 여지가 있음
• 특히 철학과에서는 학·석사연계과정생들에게 학부생 시절부터 과감한 재정적 지원을 하는 경우, 꾸준히 대학원으로 유입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음
• 철학을 비롯한 순수 학문 분야에서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학문을 지속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대학원생의 대학원 등록금 및 기본 생활비에 대해 대학 또는 국가 차원에서 과감한 보편적 지원이 필요함
■ 인문학의 위기와 해법
ㅇ 인문학 분야 역시 시장 논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기초 학문 성격을 가진 제반 인문학의 여러 분야 전문가들 집단이 그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 국가 차원에서는 절실하게 중요한 문제
ㅇ 특히 학문의 성격상, 전문가 집단을 양성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사회적 여건이 좋지 않을 때에도 최소한 명맥을 유지하도록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할 필요
ㅇ 그러나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는 사회 질서 속에서, 인문학이 국가의 재정적 지원에만 의존하여 생존하고자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 인문학 내에서도 인문학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고자 하는 혁신의 노력이 필요하며, 재정 지원의 상당 부분이 이런 혁신을 유도하고 지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사료됨
ㅇ 특히 세 가지 방향에 집중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안
① 대학 내 인문학 분야 교육의 혁신 필요
대학에서 인문학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인문학 교육을 혁신하여 저변을 넓히고자 하는 시도가 필요. 학생들의 수요에 지나치게 편승하지는 않되, 현 세대 학생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교육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재정 지원
② 융합 연구 및 교육 시도
인문학 연구 및 교육의 혁신과 타 학문 분야와의 융합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이에 대한 지속적인 재정적 지원
③ 대학원생 및 학문후속세대에 대한 기초적인 지원 다각화
학문후속세대의 최소한의 안정적인 공급이 이루어지도록 대학원생을 과감하게 지원하는 방향으로 재정 지원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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