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 900년 역사가 주는 교훈
- 김종영
- 교수신문, 2023.01.11
현대국가는 지식국가이다. 지식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대학에서 나온다. 그런데, 대학과 학문이 붕괴되고 있다. 한국만큼 대학에 투자하지 않는 국가도 없다. 대학과 학문, 교육에 대한 비판적이고 통찰력 있는 분석이 필요한 때다. 최근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쓰고, ‘지식과 권력’ 3부작을 내놓았던 김종영 경희대 교수(사회학과)가 도발적인 문제제기에 나섰다. 학문과 정책(정치)의 연결에 대한 고민을 던진다.
한국대학의 역사는 기껏 10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하버드, 프린스턴에 주눅 들어 있는
한국의 식민지 지식인들은 대학의 역사를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지적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위대한 대학을 한국에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다.
옥스퍼드대학교의 저명한 역사학자 로렌스 브락리스(Laurence Brockliss)는 1990년대 후반 옥스퍼드대학 학장 키스 토마스(Keith Thomas)로부터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를 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900년 역사의 옥스퍼드대학의 역사를 쓰는 것은 광범위한 조사와 열정적인 노력을 장기간에 투자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옥스퍼드대학 출신이자 교수인 브락리스는 이 엄청난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고 이 책을 쓰기 위해 15년이라는 시간을 바쳤다.
옥스퍼드대학 역사에 대해서는 여러 명이 공저한 책이 옥스퍼드 출판사에서 8권이나 출판되었지만 옥스퍼드대학의 전체 역사를 가로지르는 분석틀이 부족했다. 옥스퍼드에 대한 많은 사실들을 모으고 또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하더라도 그것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특정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생존과 번영을 위해 끊임없이 변화한 옥스퍼드
브락리스가 던진 질문은 옥스퍼드가 900년 동안 어떻게 발전하고 번영했는가 이다. 16세기 알카라대학(Alcala University, 스페인)은 유럽 휴머니즘의 중심이었다. 비텐베르크대학(Wittenberg University, 독일)은 루터와 종교개혁 운동의 중심지로서 당대 최고로 유명했다. 부르주대학(Bourges University, 프랑스)은 법학 분야에서 가장 명성이 자자한 대학이었다.
브락리스는 “오늘날 이 대학들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대부분 알카라대학, 비텐베르크대학, 부르주대학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브락리스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 때 유명한 대학이었다고 계속해서 살아남고 번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옥스퍼드 대학교가 오랜 대학이었기 때문에 유명한 것이 아니다. 옥스퍼드대학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 끊임없이 변화했고 시대에 맞추어 때로는 시대를 앞질러 변화를 주도한 대학이었다.
브락리스는 옥스퍼드대학 900년을 네 시기로 구분한다. 가톨릭 대학(1100~1534), 영국 국교회 대학(1534~1845), 제국 대학(1845~1945), 그리고 세계 대학(1945~현재). 옥스퍼드 대학을 포함한 당시 거의 모든 유럽 대학은 설립 초기부터 교황(로마 가톨릭)과 황제의 권력에 의해 승인된 교육 기관이었다.
가톨릭 대학에서 제국 대학, 세계 대학으로
종교개혁 이전 유럽의 모든 대학은 가톨릭 대학이었고 성직자를 배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신정일치인 기독교 세계에서는 종교, 정치, 대학은 긴밀하게 엮여 있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유럽 전체가 종교전쟁으로 휩싸이고 나서 대학은 ‘가톨릭 대학’과 ‘신교 대학’으로 나뉘게 되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도 이런 세계사적 변화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종교개혁 이후 헨리 8세의 결혼 문제 때문에 교황과의 큰 다툼이 일어났고 영국은 격심한 정치적 소용돌이를 겪는다. 가톨릭 성직자와 주교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헨리 8세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신학자들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결과적으로 헨리 8세는 영국 국교회를 세우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는 영국 국교회 대학(Anglican University)이 되었다.
제국주의 시기 옥스퍼드는 국가가 요구하는 인재와 지식을 가르쳤고 영국 제국을 위해 임무를 수행한 제국 대학(Imperial University)이었다. 19세기 유럽 대학의 급격한 변화와 달리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변혁은 더디었다.
1890년이 되어서야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 대학원 과정이 생겼다. 옥스퍼드가 연구중심대학을 지향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이었고 193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이것도 옥스퍼드 자체의 역량보다는 나치를 피해 독일로부터 망명한 탁월한 과학자들 덕분이었다.
옥스퍼드가 왜 살아남았고 번성했는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국주의 시대가 저물자 옥스퍼드는 세계 대학(World University)으로 성장했다. 1945년 이후 전세계 대학과 마찬가지로 영국대학에도 대규모 양적팽창, 곧 ‘빅뱅’이 일어났다. 질적으로 옥스퍼드는 연구중심대학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굳혔는데 이는 영국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 나치 정권의 억압에 의한 과학자들의 국제적 이주, 그리고 옥스퍼드 내부의 노력에 기인한다.
‘다른 대학들과 달리 옥스퍼드가 왜 살아남았고 번성했는가?’라는 특정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브락리스의 명저는 옥스퍼드대학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옥스퍼드대학 출신이자 교수이지만 브락리스는 대단히 냉정하게 옥스퍼드가 세계대학사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별 볼 일 없는 대학이었다고 평가한다.
즉 서울대와 마찬가지로 옥스퍼드도 ‘국내용 대학’이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7월 발표된 서울대 중장기발전계획은 서울대가 ‘국내용 대학’이라는 신랄한 내부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했다. 도대체 브락리스의 대학평가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대학이 ‘창조권력’으로서 ‘세계를 바꿀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영국 최초의 대학이지만 브락리스는 1920~30년대가 되어서야 옥스퍼드가 비로소 중요한 대학이 되었다고 말한다.
원래부터 위대한 대학은 없었다
900년 역사를 지닌 옥스퍼드 출신의 가장 위대한 3인은 누구일까? 옥스퍼드는 가장 많은 영국 수상을 배출한 대학이지만 브락리스는 의외의 답을 내놓는다. 교회의 구조를 바꾼 존 위크리프(John Wickliffe),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정치철학자인 존 로크(John Locke), 그리고 페니실린 발명자 중 한 명인 하워드 플로리(Howard Florey)를 꼽았다.
즉 학문이 대학과 국가를 뛰어넘어 세계를 바꾸었느냐 아니냐가 그의 위대한 인물의 선정 기준이다. 브락리스는 자연과학이나 공학뿐만 아니라 인문학자나 신학자도 세상을 바꾸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옥스퍼드조차 100여 년 전부터 중요한 대학이 되었다면 한국 대학들도 충분히 중요한 대학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원래부터 위대한 대학은 없었다. 단 대학이 ‘불연속성’을 일으켜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브락리스는 옥스퍼드는 1920~30년대에 창조권력인 연구중심대학으로 자신을 재창조했기 때문에 오늘날 살아남았다고 강조한다.
한국대학의 역사는 기껏 10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하버드, 프린스턴에 주눅 들어 있는 한국의 식민지 지식인들은 대학의 역사를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지적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위대한 대학을 한국에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다. 옥스퍼드 900년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김종영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
‘교육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사회적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최근 출판했다. 지식과 권력 3부작인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지민의 탄생: 지식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지성의 도전』, 『하이브리드 한의학: 근대, 권력, 창조』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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