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

이어령의 아내 영인문학관 강인숙 관장

이강기 2023. 2. 11. 22:38

김태완의 인간탐험

이어령의 아내 영인문학관 강인숙 관장

“이어령은 시인과 수학자가 동거하는 희귀한 인물”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월간조선 2023년 2월호

 
 
⊙ “‘善終’이란 말이 참 좋아. 집에서 통증이 잦아든 시간에 考終命을 하셔서 참 다행”
⊙ “《이어령전집》 1차분 24권 1주기 안에 나와… 이어령 서재는 가을에나 공개할 수 있을 듯”
⊙ “이 선생이 그렇게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간 딸과 손주) 영향”
⊙ “《문학사상》 주간실은 정말로 아늑한 사랑방… 《문학사상》을 시작하니 집에 오는 손님이 없어지더라”
⊙ “할 수 있다면 죽어 재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가고 싶어”
⊙ “神이, 절대 神이 필요가 꼭 있을까? ‘착한 섭리’는 있다고 믿고 늘 감사해”
⊙ “남편 위해 비각 세워드리고 싶어”

姜仁淑
1933년생. 서울대 국문과·숙명여대 대학원 졸업(국문학 박사) / 1965년 《현대문학》 통해 평론가로 등단. 건국대 교수 역임 / 저서로 《한국현대작가론》(1971), 《자연주의 문학론I·II》(1987, 1991), 《일본 모더니즘 소설 연구》(2006), 에세이집으로 《아버지와의 만남》(2004), 《민아이야기》(2016), 《어느 인문학자의 6·25》(2017), 옮긴 책으로는 게오르규의 《25시》(1975), 《키랄렛의 학살》(1974)과 에밀 아자르의 《가면의 생》(1977) 등 다수다. 現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영인문학관 관장
사진=조준우
 
  2월 26일이면 ‘우리 시대의 지성(知性)’으로 불리던 이어령(李御寧·1933~2022년) 선생이 영면(永眠)한 지 1년이 된다. 아내 강인숙(姜仁淑·90) 영인문학관 관장(건국대 명예교수)이 《글로 지은 집》(열림원)이라는 책을 최근 펴냈다.
 
 
영인문학관 강인숙 관장이 최근 에세이집 《글로 지은 집》(열림원)을 펴냈다.
  책의 부제가 ‘구십 동갑내기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주택 연대기’다. 집 이야기이기도 하고 서재 이야기이기도 하다. 살아오며 두 사람은 각자의 서재가 필요했다. 두 분 다 대학교수이고 평생 글을 써왔으니 말이다.
 
  서재를 마련하기까지 오랜 시간과 정성, 돈이 필요했고 그렇게 해서 지금의 ‘영인문학관’(서울 평창동)이 완성되었다. ‘영인’은 이어령과 강인숙에서 한 자씩 가져온 말이다.
 
  1년 전 선생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서재를 정리했다고 전한다. 남겨진 책들에 대한 마지막 인사라고 할까. 기자는 지난 1월 3일 이어령 선생의 서재(영인문학관 위층)에서 강인숙 관장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 관장의 말이다.
 
  “우리 부부에게 집을 마련하기 위해 보낸 세월은,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나만을 위한 방’ ‘나만이 있을 수 있는 방’을 얻는 과정이었어요. 보통 작가들은 창작촌 같은 데서 글을 쓰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게 안 됐어요. 강의 준비, 평론, 논문 등은 책을 많이 펼쳐놓고 써야 하는 글이잖아요. 그러니 밖에서 쓰는 건 불가능해요. 우리는 날마다 출근해야 하는 직장이 있고, 난 나대로 아이들을 기르며 짬짬이 글을 써야 했기에 더 집 밖에 나가 쓸 수 없었죠.”
 
 
  서재, 차곡차곡 쌓인 知的 연대기
 
 
서울 종로구 평창동 이어령 선생의 서재. 가을쯤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사진=조준우 기자
  이어령 선생은 논문이나 평론을 쓸 때 방바닥에 참고문헌을 일목요연하게 세워놓고 쓰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서재가 작으면 안 되었다. 서재는 작업장이기 때문에 작업량이 증가하면서 공간도 커져야 했다. 부부의 일생을 더듬어 보면, 가장 중요한 과업이 글 쓰는 방, 서재를 갖는 일이었고 그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두 사람의 지적(知的) 연대기가 완성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내 집 마련을 위해 살잖아요. 일본에서는 한 남자가 집을 사고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집을 마련하느라 자기 인생이 다 지나가버렸으니까….”
 
  ― 우리도 그렇잖아요.
 
  “거기(일본)는 우리보다 한결 더 어렵거든요. 정착할 장소를 찾는 문제, 그 문제가 모든 이의 문제이면서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니까….”
 
  ― 선생이 돌아가신 지 1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근황이 궁금합니다.
 
  “이 선생의 자료를 정리하기도 하고, 내 자료를 정리하기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6개월간 사람이 와서 ‘이어령 자료 아카이빙’을 만들고 있었고요.
 
  3년은 걸려야 정리가 다 될 것 같아요. 3년이란 시한이 있으니 그 안에 빨리 정리를 해야죠.”
 
 

  ― 강 관장님의 건강은 어떠세요.
 
  “일하다 앓다 쉬다 하면서 지내요. 이 선생을 위해 무언가 할 일이 많았고, 그 일들이 위로가 되었어요. 무언가 해줄 일이 있다는 게 고마웠죠.
 
  아직은 ‘콤퓨타(컴퓨터)’를 할 수 있습니다. 걸을 수도 있으니 감사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은 그걸 못 하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 언론 보도를 보니, 이어령 서재가 일반인에게 공개된다던데 언제쯤입니까.
 
  “가을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 방에 있는 책 정리하는 데만 1년이 걸렸어요. 녹음해놓은 자료가 많고, ‘콤퓨타’ 내용물도 채록해야 하고, 쓰다 만 원고도 많아서 정리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메모한 것도 끝없이 많고요. 아직 디지털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업을 했죠. 디지털은 아들들이 하기로 하고 나는 아날로그만 하기로요. 다 정리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겁니다.”
 
 
  《이어령전집》과 《강인숙전집》 출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강인숙 관장. 뒷 배경으로 이어령 선생의 시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가 보인다. 사진=조선DB
  만약 ‘영혼의 집’이 책이라면 선생의 영혼이 전집(全集)이란 새집으로 단장돼 조만간 세상에 나올 예정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7년 전부터 준비해온 것이라고 한다.
 
  “《이어령전집》은 1차분 24권이 1주기(周忌) 안에 나옵니다.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이미 준비한 것이어서 거의 마무리됐습니다.”
 
  강인숙 관장의 전집도 차례로 출간될 예정이다. 1차로 《강인숙평론전집》(전 6권)은 이미 세상에 나왔다. 6권을 열거하자면 《김동인과 자연주의》 《염상섭과 자연주의》 《박완서 소설에 나타난 도시와 모성》 《일본 모더니즘 소설 연구》 《한국 근대소설 연구》 《여류문학, 유럽문학 산고》 등 모두 한국 현대문학 연구서들이다.
 
  “앞으로 기행문집 3권을 따로 내고, 그다음에 자전적인 에세이를 내고…. 다 절판이 됐으니까…. (내 전집은) 전체 12권쯤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젠 눈이 안 보여서 교정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까 하나씩 정리해서 올해 안에 내야겠죠. 그리고 이어령 선생에 대한 것도 좀 더 써야겠고….”
 
  강인숙 관장의 연구는 서구 문학, 특히 프랑스 문학을 그 연원으로 두고 일본 근대문학을 하나의 전신자(傳信者)로 삼는 폭넓은 비교문학적 시각과 지평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내가 연구한 자연주의의 한국적 양상이나 일본 모더니즘에 대한 연구는 꼭 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은 거예요. 힘만 들고 생색은 나지 않는 분야거든요. 불어와 일본어를 알아야 하고, 세 나라의 문학작품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죠.
 
  일어를 학교에서 배운 우리 세대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연구라서 한 겁니다. 그래서 나는 (각)주에 원문을 넣었어요. 후학들을 도우려고요. 절판이 되면 누가 또 나 같은 수고를 다시 해야 지금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으니까, 전집을 준비하면서 평론집부터 냈어요.
 
  그렇지만 에세이는 계속 쓰고 있습니다. 보들레르가 신에게 빈 것처럼 인간의 육체와 심성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다가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에세이는 통이 넓어서 아무 이야기나 다 쓸 수 있는 가장 근대적인 양식이죠. 그래서 좋아요. 자유롭고요.”
 
 
  “‘콤퓨타’를 칠 수 있는 날까지…”
 
  강 관장은 “써놓은 글이 두 책 분이 더 있다. 그걸 다듬어서 낼 것이다. ‘콤퓨타’를 칠 수 있는 날까지 계속 글을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책이 팔리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그건 내 목소리니까 내 소리를 지키는 겁니다. 할 일이 그것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해요.”
 
  ― 이어령 선생의 서재는 자주 찾았지만, ‘강인숙 서재’가 궁금해지네요.
 
  “내 서재는 3평입니다. 요즘 와서 사람의 크기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웃음) 베스트셀러 작가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나는 이어령 선생처럼 큰 인물이 못 되니까 지금 그대로 치수가 작은 내 서재가 좋아요. 그게 내 한계니까 큰 방을 원하지 않았어요. 내 방이 커지려면 영인문학관이 작아져야 했기에 그건 내 선택이었습니다. 3평짜리 서재는 영인문학관을 위한 내 양보였고 크기에 대한 자기 인식의 결과였습니다.
 
  그 방에서 나는 원하는 글을 쓰고 있어요. 지금 나는 혼자 살잖아요. 주로 식탁에서 일을 합니다. 6인용이라 커서 자유로워요.”
 
  이어령 선생은 2015년에 대장암에 걸렸다. 7년간의 투병 생활이 시작되었다. 강 관장에 따르면 선생은 자기 생명에 시한이 생기자 조급해졌다고 한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쓰다가 끝내지 못한 글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혼자 글 쓸 수 있는 고독한 시간을 무척이나 갈망했다”고 한다.
 
  ― 항암 치료를 마다했는데 그걸 곁에서 감내하기가 무척이나 괴로웠을 것 같아요.
 
  “연세가 있으니 항암 치료를 거부한 건 이해가 됩니다. 몸이 약해져서 수술이 큰 부담이고 그걸 감당하기도 어렵고요. 나도 그럴 거거든요. 그런데 그게 암이 (온몸에) 퍼지는 걸 지켜보는 과정이잖아요. 7년 동안이나…. 힘든 일이죠. 식사량은 나날이 떨어져 가고요. 안 먹으면 죽는 게 육체의 조건인데 안 먹으니까 자꾸 다투게 돼요. 실은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거’라는 걸 아니까 그렇게 안달을 하게 되는데, 마지막에는 마음이라도 편하라고 동의한 거죠. 하지만 지켜보는 일은 당신이나 가족이나 참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가 앓는 것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지도 몰라요. 나날이 죽음으로 다가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잖아요. 도울 힘이 하나도 없으니 그거라도 해야죠. 먼저 가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 번으로 끝나니까요.”
 
 
 
 
“못 움직이면서 장수한다면 그건 저주”
 
  ― 이어령 선생이 우리 사회에 ‘죽음’이라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죽음을 되돌아보게 했고, ‘메멘토 모리’라는 단어를 마주 보게 했어요.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는 것이니까요. 인간은 모탈(mortal·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잖아요? 우리가 임모탈리티(immortality·불멸)를 동경하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좋게 죽는 사람을 보면 모두 관심을 가집니다. ‘선종(善終)’이란 말이 참 좋아요. 집에서 통증이 잦아든 시간에 고종명(考終命)을 하셔서 참 다행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그건 다리가 꺾어진 인간에게 오는 것이기 때문이죠. 한 생명이 끝나는데 차임벨만 울릴 순 없어요. 오랜 아픔과 고독과 슬픔과….”
 
  ― 이어령 선생도,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도 찾은 답입니다만, 신은 왜 인간을 사랑한다면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는 걸까요.
 
  “죽음에 관한 한 이의(異議)가 없습니다. 나와 제 친구들은 사방이 아픈 몸으로 너무 오래 살게 될까 봐 겁을 먹고 있어요. 자유가 좋아서 가끔 고양이처럼 혼자들 살고 있는데 못 움직이면서 장수한다면 그건 저주일 것 같아요. 인간은 유기체잖아요? 고장은 나게 마련이고 시간이 가면 못 쓰게 되기 마련이죠.
 
  다 망가지면 없애야 하지 않습니까. 엘리옷(T.S. 엘리엇)의 작품[〈황무지〉] 첫머리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무녀(巫女) 이야기가 나와요. ‘소원이 무어냐’고 물으니까 ‘죽는 것’이라고 하는 대목이 생각납니다.
 
  그녀는 죽지 못하는 벌을 받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나는 주어지는 날까지 열심히 살 겁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살아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죠.”
 
  ― 삶의 고통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나는 참 신통찮은 몸을 가지고 태어나서 남보다 많이 앓았어요. 그래서 고통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예전엔 그게 억울했는데, 요즘은 받아들여요. 유기물은 고장 나기 마련이니까….”
 
 
  “神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이어령 선생과 강인숙 관장. 사진=조선DB
  ― 죽음을 경험하면서 신(神)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전능(全能)한 신은 없다고 생각해요. 굳이 전능해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요. 공물(供物)을 기억하고 좋은 응답을 내리는 건 좋은 신이 아니죠.
 
  하지만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전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제가 교인(敎人)이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사도신경은 ‘전능’부터 내세우고 있지 않습니까. 신이 전능하다면 적어도 어린 아이들은 앓거나 죽게 하지 말아야죠.
 
  우리 딸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는데 대학을 막 나온 아들을 잃었잖아요? 겨우 출발점에 섰는데, 살아갈 준비를 방금 끝냈는데, 죽은 겁니다. 살아보지도 못하고요.
 
  그 아이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그 어미는 11시간을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살려달라고 기도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누군가가 등을 조용히 쓸어주면서 ‘나도 아들을 잃었어. 그 애도 젊었어’라고 슬프게 말하더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있다고 그 애는 믿고 있었어요. 그거면 된다고 생각해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같이 아파해주는 그런 사랑이잖아요?
 
  그래도 ‘착한 섭리’는 있다고 믿고 늘 감사해요. 딸네집이 해안가에 있었는데 아침에 찰랑이며 밀물이 차 올라오는 것이 너무 신비했어요. 봄이 되면 마른 가지에 물이 올라오는 것 또한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어령 선생은 딸(故 이민아)과 24세 손주를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보냈다. 선생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지성(知性)에서 영성(靈性)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강 관장도 기막힌 아픔을 같이 겪었다. 여기다 항암 치료를 거부하며 기꺼이 죽음과 마주한 남편과 이별했다. 그 슬픔의 깊이를 감히 헤아리기 어렵다.
 
  “이 선생이 그렇게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그(딸과 손주의 죽음) 영향이죠. 어른이 아니라 자기보다 아랫사람을 먼저 보낸다는 건, 참 충격이죠.”
 
 
 
 
모태신앙… 열두 살 때 동생 죽음에 충격
 
  강인숙 관장의 말에 기자는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1947)에도 그런 말이 나오지만 ‘아이들까지 주리를 트는 그 불행이, 만약에 인간의 잘못이라면, 잘못이라 한다면, 나는 그런 신이 필요가 없다’는 대사가 나오거든요.
 
  사실 제 (친정)어머니가 크리스천이어서 난 모태신앙이에요. 그런데 내가 열두 살 때 동생이 죽었어요. 함경도에서 피란 와가지고, 두 주일 폐렴 앓다가 죽더라고요. 38선 넘어 그 추운 겨울도 넘겼는데 그만 4월에 죽었어요.
 
  나보다 어린 사람이 죽는다는 것…. 노인의 죽음은 다들 준비하고 있으니 덜 충격을 주는데, 동생의 죽음은 참 충격이더라고요. 내가 그걸 극복하는 데 3~4년이 걸렸어요. 혼자 무덤가에 앉아 있기도 하고, 학교를 빠져보기도 하고, 별짓 다 했는데, 충격이 없어지질 않았어요.
 
  또 지난 10년 동안 이 선생하고 딸하고 손자하고 (떠난 이가) 셋이잖아요.”
 
  강 관장은 “어린 손자가 떠났을 때 가장 아팠다”고 고백했다.
 
  “그 아이를 기르느라 딸하고 나하고 고생이 많았거든요. 방학이 되면 여기 데려다 놓고, 개학하면 데려다 줘야 하고…. 그러면서 24년을 키워 겨우 독립할 나이가 되니까 그냥 죽더라고요. 그것까지 하나님 탓을 한다면, 그런 신은 믿을 수가 없는 거죠.
 
  내 생각에는 신이, 절대 신이 필요가 꼭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강 관장의 음성은 낮고 단호했으며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신은) 굉장히 ‘파워풀(powerful)’하지만, ‘올마이티(almighty·전지전능)’는 아니다 하는…. 물론 신이 없으면 세상이 안 돌아가죠. 질서의 관리자는 있는 게 확실한데 계절 바뀌는 것도 그렇고, 그게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거든요. 사람이 무슨 재주로 천지를 덥혀가지고 꽃을 다 피우겠어요?
 
  그러니까 선(善)한 섭리가 있다는 거는 확실한 거고, 그런데 꼭 어떻게 완벽할 수가 있겠는가? 너무 크고 너무 방대한데 그걸 어떻게 다 챙기겠냐는 거예요.
 
  우리 딸이 (아프면서도) 병원에 안 갈 때 내가 야단치면서 ‘왜 네 몸을 네가 관리해야지 하나님한테 고쳐달라고 떼를 쓰느냐. 하나님이 바쁜데, (챙기셔야 할)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얘기한 일이 있어요. (신이) 다 챙기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교회만 가면 천국에 가는 줄 알고…”
 
 
10년 전인 2013년 12월 이어령 선생의 팔순 잔치가 서울 순화동 호암아트홀에서 열렸다. 당시 이어령 선생은 “화환과 축의금, 얼음 조각, 내빈 소개, 축사가 없는 5무(無)잔치”라며 “나는 잘난 사람이 아니고 그저 그동안 즐거워서 열심히 산 것뿐인데 이렇게 챙겨주니 송구스럽다”고 밝혔다. 사진=조선DB
  그는 “불완전한 대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잠시 헷갈렸다. 신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것인지,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인지….
 
  “나는 ‘괜찮다’ 그런 생각이 드는데, 기독교인들은 그걸 용서 안 하거든요. 기독교가 제일 나쁜 게 독선이에요. 교회만 가면 뭐가 되는 줄 알고 그러는데, 참 기독교인이 몇 명 없거든요. 그런데 교회만 가면 천국에 가는 줄 알고 천국에 예금하듯 헌금을 하고….
 
  안 믿는 사람은 괜찮은데 복권 사듯 헌금하고 그걸로 천당을 간다고 여기는, 그런 생각 같은 것이 문제예요.”
 
  ― 관장님은 어떤 죽음을 맞이할 건가요.
 
  “내가 그(기독교) 안에서 자랐으니까. 내가 죽으면 기독교식으로 매장될 거예요. 이 외에 다른 장례 방법을 본 일이 없으니까.”
 
  ― 영혼의 존재는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맑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가다듬으며 살아야죠.”
 
  ―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이 천국과 지옥에 간다는 것은 믿나요.
 
  “나는 천국을 믿지 않습니다. 개의치도 않아요. 천국에 가려고 착한 일을 한다면 그것도 거래(去來)죠. 옳게 살려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인간의 몫이니, 판결에는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어요.
 
  교회에 안 나간다는 이유로 지옥행을 선고받으면 받아들일 거예요. 거짓 신앙을 고백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을 것 같아요. 하지만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재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가 없어져 버리고 싶어요. 죽음이 그냥 종말이면 좋겠다는 겁니다. 불평하지 않고 살아왔지만 몸이 약해서 사는 일이 늘 버거웠거든요.”
 
 
  “신앙은 세속적 영화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
 
  ― 생이 불공평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영화(榮華)라는 게 애초부터 ‘카이자[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에서 나옴]의 것’이잖아요? 그 질서대로 가는 거겠죠, 뭐. 신앙은 세속적 영화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상승하고자 하는 내적 욕망이니까 초월적이어야겠죠.
 
  하지만 세속적인 면에서 인간이 할 일은 해야겠지요? 사도 바울(바오로)이 텐트 장사를 해서 생계를 유지한 것은 칭찬받을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세속에 몸의 절반은 담그고 사는 ‘모탈(죽을 운명)’이니까요.”
 
 

  ― 천국 가기 위해 착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시나요.
 
  “천당 가려 착한 일을 하는 건 일종의 거래죠. 그건 안 되죠. 가기 위해 착하게 굴어라? 그런 거는 안 되는 얘기고, 정말 순수한 신앙은 그런 것이어선 안 된다 생각해요.
 
  ‘내가 안 쓰고 모아서 집을 산다는 것과 내가 안 쓰고 모아 천당 간다’는 것은 다른 얘기거든요. 그게 같아서는 안 되죠. 그러니까 나는 나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안 된다고 하면 할 수 없는 거지. (신이) 가라는 대로 가야죠. 만약 지옥이 있다면 지옥에 가래도 가야 하는데, 6·25전쟁 같은 게 지옥이죠, 뭐.
 
  이만큼이나 넓은 한탄강 철교를, 밤에 12세짜리 애가, 기어서 건넜거든요. 뒤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후퇴가 안 되는 거예요. 머무를 수도 없고 후퇴도 안 돼. 안 나가면 남이 죽으니까 그런 것이 지옥이죠. 그러니까 지옥에 갈 각오가 돼 있어요. 그러나 그건 내가 선택할 문제는 아니니까, 생각 안 하기로 했고….”
 
  ― 잠깐만요. 무신론자는 아니신 거죠?
 
  “그렇진 않습니다. 제 (친정)어머니가 굉장히 괜찮은 크리스천이셨어요. 동네 한 이웃이 전염병에 걸렸는데 그 집에다 주먹밥을 해가지고 매일같이 던져줘서 굶어 죽지 않게 한 적극적인 크리스천이셨어요.
 
  교회에 너무 많이 갖다 줘서 내가 맨날 잔소리를 하고 그랬는데…. 무슨 보상을 바라시고 한 일이 아니셨어요. 어머니는 당신 자녀들이 교회에 안 가는 걸 끌고 가지 않으셨어요. 안 가는 애는 놔두셨죠.”
 
 
  “혼자 글을 쓴다는 거는 상당한 에고이스트 아니면 못 해”
 
 
이어령 선생의 서재에서 강인숙 관장. 사진=조선DB
  ― 교회에 다녔나요.
 
  “나는 다니다 말았거든요. 세례 받을 단계가 돼서 그만뒀어요. 세례는 안 받겠다는 생각이 오래전부터 확고했어요. 그런데 나하고 이 선생하고 비교해보면 이 선생은 나보다 훨씬 감성적이거든요. 감성적인 사람이 종교와 가까워질 가능성이 많죠.
 
  이 선생은 크리스천 집안도 아니고, 시어머니가 불교를 믿으셨는데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외경심…, 외경심이 항상 있었어요. 그게 크리스천이 된 소지가 되었겠죠.
 
  난 산속 외딴집에서 자랐거든요. 해가 지면 막 무서워서 울었어요. 엄마가 오실 때까지 우는 거야. 그런데 제 어머니가 샤머니즘적인 두려움이 거의 없으셨어요. 내가 감수성 면에서 이 선생보다 약하니까 크리스천이 될 소질이 적은 거죠.”
 
  ― 어떻게 보면 좀 냉철하신 면이 있으시군요. 그러면 외람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어령 선생님이 천국에 가셨을까요.
 
  “글쎄요. 기준에 따라 다르겠지요. 혼자 글을 쓴다는 거는 상당한 에고이스트(egoist·자기 본위의 사람)가 아니면 못 해요, 글쓰기는…, 글쓰기는 ‘에고’가 응집돼서 세상이 그야말로, 저 강태공처럼 비바람에 다 떠내려가도 모를 정도로 자기 안에 빠져야 됩니다. 세상을 떠나 있는 거죠.
 
  그것도 죄라면 죄죠. 그러니까 그걸 죄로 보느냐 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지겠죠. 누가 (천국에) 갔을까 그런 생각은 안 해요.
 
  박완서 선생의 말씀처럼, 그러면 형체(形體)의 문제는 어떻게 되느냐? 내가 (천당에) 가면 뭘로 내 자식을 알아보겠어요?
 
  내가 천당에 가면 영혼밖에 없는데, 셰이프(shape·형체)가 없는데 내가 뭘로 내 자식을 알아보겠느냐는 겁니다. 박완서 선생도 상당히 지적인 분이거든요. 그분이 이모셔널(emotional·감성적인)한 데가 별로 없어요. 그래서 박경리(朴景利·1926~2008년) 선생은 교인이 될 소질이 있어도, 박완서(朴婉緖·1931~2011년) 선생은 그게 없는 분인데 훗날 크리스천이 되더라고요.”
 
 
  “슬픔에 공감하는 면에서 마음 약해”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이 평창동 문학관에서 문인들이 쓴 편지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그러셨구나.
 
  “그런데 그게(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과) 연애, 사랑과 같은 커패서티(capacity·용량)거든요. 둘 다 감성적이잖아요.”
 
  ― 관장님 이야기를 들으니까 왜 말랑말랑한 소설 대신 문학평론을 택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요.
 
  “꼭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가 내 이름을 지었는데, 어질 인(仁)자가 들어 있어 참 좋았어요. 난 누군가를 보면 저 사람이 뭐가 괴롭겠구나, 얼마나 힘들까 이런 생각을 해요. 그런 면에서 마음이 상당히 약한 편이고 남의 잘못에도 관대합니다. 그 편에선 점수가 꽤 나가요. 그런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베르테르 같은 면은 약하거든요.
 
  우리 어머니가 잘 안 우시는 분인데 엄마가 눈물을 흘릴 때는 내가 꼭 옆에 있었거든요. 내가 언니들보다 더 어린데도 그런 슬픔에 공감하는 것…, 그런 면에선 마음이 상당히 약해요. 남과 잘 안 부딪히는 것도 아마 그가 불쌍해서, 상대방이 불쌍해서 화를 못 내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문학사상》은 기적의 문예지”
 
  ― 우리 시대에 이어령 선생이 어떤 흔적을 남겼나요.
 
  “지적인 다양성과 전문성이 합쳐져서 하나의 종합성을 이뤘다고 봅니다. 지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이 섞인 셈이지요.
 
  예술사로 보면 시대가 각각이 하나씩 도래했어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그랬는데 다만 르네상스와 비잔티움 때만 (지성과 감성이) 듀얼로 왔어요. 그래서 이어령 선생은 르네상스적인 양면성을 공유했다고 볼 수 있어요.
 
  또 외국에 대한 지식과 우리 전통에 대한 관심이 모두 깊었는데 그래서 새로운 이론이 겉돌지 않았어요. 또 한국적인 것을 이해하는 데 유리한 자리에 있었어요. 이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충청도가 전통을 아는 고장이잖아요. 또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관심과 예술의 형식에 대한 관심도 깊었어요.”
 
  ― 그런 양면성이 《문학사상》을 꽃피우게 만든 것은 아닐까요.
 
  “정말 《문학사상》은 기적의 문예지예요. 이 선생이 하던 12년간 적자가 안 났거든요. 독자들의 지적 수준이 그만큼 높았던 거죠. 그리고 이 선생이 잡지를 워낙 잘 만들었어요. 해외에서 발표되는 신작을 바로 들여다가 연재하는 식인 데다가 이 선생은 한국 전통에 밝잖아요?
 
  고전도 새로운 방법론으로 접근하면서 신구(新舊)의 밸런스를 맞추었지요. 지적인 글과 감성적인 글도 조화를 이루었고, 새로운 작가 발굴도 활발했고요.
 
  다른 사람은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잡지를 만든 겁니다. 원동력은 작품을 보는 이 선생의 미적 안목의 탁월함이었어요. 필자도 독자도 잡지사도 모두 신명이 났던 시절입니다.”
 
 
  “희랍 신전 양식의 비각 하나 세워드리고 싶어”
 
  이상문학상은 스폰서가 없이 시작해서 성공한 유일한 상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작품만 잘 고르면 그게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작품의 예술성에 대한 것만은 이어령 선생이 직접 챙겼거든요. 후보작을 함께 엮어서 수상작품집을 만드는 것도 이 선생 아이디어였습니다. 누군가가 이 선생을 돈키호테라고 했는데 아닙니다. 그는 남에게 안 보이는 것을 미리 보는 눈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자기가 기획한 일에 실패한 일이 거의 없어요. 시인과 수학자가 동거하는 희귀한 인물이기 때문일 겁니다.”
 
  ―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계획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이어령 선생에게 비각(碑閣)을 하나 세워드리고 싶어요. 어머니 무덤이 있는 고향 언덕에 희랍 신전 양식의 작은 비각을 세우고 어록비가 드문드문 서 있는 숲을 만드는 게 현재 내 꿈입니다.
 
  이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이 선생이 지금은 공원묘지에 묻혀 있어서 비석이 하나도 없거든요.”⊙
 
사랑방이던 《문학사상》 주간실
 
  서울 종로구 적선동에 《문학사상》이 있었다. 한옥은 주간실로 쓰고, 옆 건물인 양옥은 편집실로 썼다고 한다.
 
  당시 많은 문인에게 사랑방 같은 공간이었다. 또 이상(李箱·1910~1937년)의 미공개 사진, 김안서(金岸曙·훗날 金億으로 개명·1895~?)의 시고(詩稿) 등 발굴 특종을 쏟아냈다. 강인숙 관장의 말이다.
 
  “《문학사상》 주간실은 정말로 아늑한 사랑방이었어요. 주간실이 한옥인 데다가 편집실과 딴채여서 마음대로 떠들 수 있었거든요. 경복궁 바로 옆에 있어서 교통도 편했고요. 문인들이 모여서 지적 담화만 하는 희한한 곳이기도 했죠.
 
  《문학사상》을 시작하니 집에 오는 손님이 없어지더라고요. 선생은 거기에 자료실을 따로 두었어요. 서지 전문가를 모셔다가 전문적으로 자료를 찾게 했죠. 1970년대 초에 말입니다.
 
  이상의 육필 원고와 사진 앨범, 김안서의 시 원고 같은 것을 그렇게 찾아냈죠. 그리고 해외에 전문적인 특파원을 각국에 두었습니다. 현지에서 연구하는 학자들을 섭외해서 만든 지적 네트워크입니다.
 
  김성곤, 최월희, 김도희, 이숙희 같은 놀라운 분들이 성심껏 도와주셨죠. 아직 공개하지 않은 특파원 원고가 영인문학관에 쌓여 있습니다. 그 모든 분이 합심해서 만든 게 《문학사상》이었어요. 장욱진, 변종화, 서세옥, 오수환 같은 화가들이 다달이 표지화를 그려주시는 호사도 누렸고요. 문학과 미술의 아름다운 제휴였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