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행로
- 고현석 기자
- 대학지성 2023.02.04
■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35강_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의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의 증대는 자유의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한다. 자유의 이념과 지향에 관한 동서양의 지적 자산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다섯 번째 섹션 ‘한국에서의 자유주의’ 제35강 김경일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김경일 교수는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 연원을 둔” 여러 이데올로기들이 “한국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해왔는가를 살피는 것은 근대 한국 사회가 걸어온 특수한 발전의 길에 비추어볼 때 매우 흥미로운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선 제기될 수 있는 물음으로 “일정한 요소들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자유주의가 사실상 고사하다시피 했는가”라는 것과 민족주의가 “주류 이데올로기와 어떻게 연관”되었는라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에 대한 답으로 먼저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가 맞은 가장 커다란 변화라 할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절멸”에 따라 자유주의의 상대로 “보수주의만이 남게” 되면서 자유주의가 “냉전과 반공주의, 그리고 1960년대 이후에는 경제 성장”의 “압도하는 영향에 의해 뒷받침된 보수주의에 의해 포섭”되었음을 든다. 한편 한국에서의 민족주의는 1950년대에 “근대성의 표지로 설정”됨과 동시에 오히려 “때로는 전통의 영역에 가까운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다의와 복합의 성격”을 가졌으나, 이후 “1960년대의 지식인들에게 민족과 민족주의”가 “전통의 창조와 근대화를 위한 강력하고도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중심 기표”가 됐다고 지식사회학 관점을 토대로 이야기한다. 그 가운데서 “이 시기 민족 전통에 대한 가장 독특한 입장의 사례”로 시인 김수영을 언급하며 당시 대다수 지식인과 달리 “민족주의 이념에 근거하여 전통을 강조하지 않”은 채 “민족주의의 미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전통을 추구하고자” 했음을 평가한다.
한국에서 자유주의/민족주의의 행로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 연원을 둔 이들 이데올로기가 한국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해왔는가를 살피는 것은 근대 한국 사회가 걸어온 특수한 발전의 길에 비추어볼 때 매우 흥미로운 문제일 것이다. 이들 이데올로기에 조응하는 요소는 19세기 후반의 개항 이후 조성된 지정학에서 당시 한국 사회가 처한 ‘위기’에 대한 대응의 다양한 형태들—예컨대 위정척사 운동, 개화파, 농민 운동 세력, 독립협회, 활빈당 등—에서 각각 찾아볼 수 있다. 보수주의는 비록 기본에서는 봉건과 전근대의 성격을 갖는다 하더라도 위정척사 운동의 일정한 요소를 내포했다. 자유주의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나 갑오농민혁명 운동과 독립협회에 나타난 자유와 개인의 권리, 그리고 평등의 원리에 조응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주의는 횡포한 부호에 대한 엄징(嚴懲)을 내건 동학이나 활빈당 활동에서 일정한 편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서세동점과 제국주의의 대두를 배경으로 이 모든 이념은 궁극에서는 국권 침탈에 반대하거나 국권 회복의 주장에서와 같이 민족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수렴되어가는 경향이 있었다.
1910년 민족의 굴욕과 패배 이후 10년의 시련기를 거치며 분출한 1919년의 3·1 운동은 이후 식민지에서 전개된 주요 이념의 기원이 되었다. 자유와 인권, 개혁과 관용, 표현의 자유, 평등과 같은 자유주의의 일정한 편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이 궁극에서 민족의 독립과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의 부활을 위한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시대는 유감스럽게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20년대 초·중반 이후 민족주의는 사회주의와 일정하게 대립하였지만, 곧이어 그것은 사회주의에 주도권을 넘겨야 했다. 이리하여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사회주의가 각축을 벌인 서구와는 달리 일제 강점기 이념 지형에서는 민족주의를 기조로 하면서도 그 맞은편에는 보수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닌 사회주의만이 눈에 띄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다음에 제기되는 질문은 이 시기 민족주의가 위의 주류 이데올로기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하는 것이다. 원리에서 민족주의는 보수주의와 양면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집단에 대한 헌신으로서 보수주의의 교리는 민족주의가 지향하는 민족의 대의와 조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통과 현상의 옹호라는 보수주의의 교리는 식민지 피압박민 스스로가 식민 지배를 승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양자는 화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3·1 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정치의 지형에서 식민지 피지배민 내부에서 일정한 단서 아래 식민 지배를 용인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자유주의와의 관련에서 보면 이들은 서구의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합리성과 계몽, 그리고 정치 개혁 프로그램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민족주의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와 활동을 흔히 민족이나 독립과 같은 집합 목표들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서구 자유주의자들이 자신의 정치 프로그램을 위해 국가의 의의를 최소한의 범위로 제한하고자 했지만, 식민지의 경우 국가나 민족이란 획득되지 않은 실체로서 개인을 초월하는 ‘신성함’과 비장한 느낌을 자아내는 어떤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1930년대 이후 자신의 것을 일본의 그것으로 대체하면서 ‘제국’의 외연적 확장에 기꺼이 보조를 함께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하나의 역설이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자유주의는 보수주의와의 차별성을 상실했다.
이로써 민족주의의 대의는 훼손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내용에서는 자유주의의 지향을 지닌 이 시기의 민족주의가 왜 서구의 자유주의처럼 사회주의를 포섭하는 보편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을 수 없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민족주의의 이러한 속성이 이른바 해방 정국 시기에 이르기까지 지속하는 여운을 남기는 가운데, 그 영향력이 미미한 무정부주의나 사회민주주의 등을 논외로 한다면 자유주의로 포섭되지 않은 사회주의 주류는 ‘정통’을 표방하면서 급진과 관념의 편향으로 빠져들어갔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해방, 그리고 정부 수립 이후 제정된 헌법에서 자유주의는 비록 명시화된 형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신설 공화국의 정체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라는 형태로 신성화된 이 이데올로기가 해방 이후에 걸어간 길이 일제 식민 지배 아래에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이는 전쟁과 냉전에 의해 조성된 해방 이후의 상황에서 각각의 이데올로기들이 상호 작용한 결과였다. 가장 커다란 변화는 내전 이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절멸이었다. 이로써 자유주의의 상대로는 보수주의만이 남게 되었다.
이리하여 자유주의는 냉전과 반공주의, 그리고 1960년대 이후에는 경제 성장—정치 억압에 의해 흔히 그 정당성에 심각한 도전이 제기되었다고는 하더라도—의 압도하는 영향에 의해 뒷받침된 보수주의에 의해 포섭되었다. 서구에서 자유주의가 보수주의를 아우른 보편 대의와 중심의 원리를 표방한 것과 반대로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주류 보수주의에 의해 궁극에서 규정되는 측면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자유주의는 때때로 보수주의를 위한 주장과 명분으로 동원되고 이용되었다고는 하더라도, 구체화한 강령이나 프로그램으로 스스로를 실체화하지는 못했다.
독재나 권위주의, 혹은 수구라는 이름의 보수주의는 특히 1970년대 유신 체제에서 그러했지만 자유에 대한 논의 자체가 국가의 생존과 관련된 안보와 같은 이해관계에 치명의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보수주의는 자유주의를 흔히 미국식의 물질주의와 자유분방함, 그리고 퇴폐 등과 연관시킴으로써 대중 차원에서 이러한 믿음을 전파하고자 했다.
보수주의자들의 이러한 차별화 전략은 1980년대 이후 그 존재가 뚜렷이 부각된 사회주의 진영에 의해서도 시도되었다. 사회주의 진영은 예컨대 인권에 대한 억압이나 기본권의 침해에 대한 공동의 대응과 같이 자유주의 강령과 공유할 수 있는 부분보다는, 평등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반대나 시민의 권리와 자유의 억압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침묵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다시 말하면 자유주의는 보수주의와 사회주의 양쪽으로부터의 협공에 직면했다.
1990년대 이후 이러한 사정이 급격하게 변화했다. 동구권의 몰락과 사회주의의 붕괴를 배경으로 냉전 시대가 막을 내렸으며, 이와 아울러 정치 민주화와 사회 전반의 민주화 물결이 보수주의의 풍부한 토양을 급속하게 침식했다. 1980년대 사회 변혁의 급격한 분출을 배경으로 사회주의자들은 냉전의 사슬로부터 벗어나서 자신들의 주장과 강령을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독재와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사상의 모색은 자유주의 자체에 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대된 사실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처럼 자유주의에 관한 관심의 증대가 한국에서의 구체적 실천이나 정치 프로그램으로의 실체화, 혹은 그에 대한 대중 차원에서 폭넓은 지지와 확산과 같은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1989년에 냉전의 종식과 함께 막을 내린 보수주의 시대의 종언은 사실은 동시에 자유주의의 종말을 의미했다. 그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역사적으로 자유주의가 보수주의에 의해 규정되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아가서 보수주의 체제로부터 배제되어온 소수자의 목소리에 자유주의가 거의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년 세대나 여성을 비롯하여 장애인, 성 소수자, 환경생태론자, 혹은 이주자나 아직은 소수이지만 난민과 같이 기존 체제가 배제해온 집단의 폭발적 분출은 한국 사회에서 진보로 포괄되는 영역의 주요 구성 요소를 이루고 있다. 보수주의의 맞은편에 자신의 위치를 설정한 이 다양하고 역동적인 진영에서 장차 어떠한 정치 강령과 프로그램이 출현할지를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보수주의는 이미 구체제가 되었으며, 사회주의가 가까운 장래에 전열을 재정비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 체제를 떠받쳐왔던 보수주의와의 동반 관계에서 스스로의 정당성을 상실해버린 자유주의에서 대안을 찾을 수 없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전후 시기 민족주의와 전통
1950년대의 한국 사회를 만약 제3세계로 분류한다면,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근대성의 표지로 설정될 수 있겠지만 오히려 정반대로 그것은 때로는 전통의 영역에 가까운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다의와 복합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일반으로 한국의 토착 문화와 역사를 무시하고 모멸하는 정책으로 일관한 일제의 식민 권력에 의한 통치가 수십 년에 걸쳐 지속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전통에 대한 태도는 이중의 복합 의미로 나타났다. 하나는 전통과 자신과의 동일시에서 나왔다. 즉 일본에 의해 무시당한 전통에 대한 강렬한 애정과 집착이었다. 다른 하나는 식민 지배자의 논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즉 그것은 고유한 전통에 대한 열등감과 혐오, 그리고 경멸이었다.
1945년 이후 해방으로 인한 식민 권력의 퇴각과 미군정의 지배는 이러한 생각에 일정한 변화를 가져왔다. 만일 전통에 대한 애착이 일제의 억압으로 더욱 고양된 측면이 있다고 한다면, 이제 금지와 부정이라는 조건이 소멸한 상태에서 그것이 식민지 시기처럼 절실하고 또 시급한 문제는 아닌 것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전통에 대한 애정의 절박성은 없어져서 느슨한 상태로 옮겨갔지만, 전통에 대한 식민 지배자의 인식은 식민지 유산으로 살아남아 계승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이 시기에 급작스럽게 밀려온 미국, 또는 근대와의 피상의 대비를 통하여 더욱 강화되면서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서 전통에 대한 부정 의견이 뚜렷하게 형성된다.
전통에 대한 무시와 외면은 정치권력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시도는 있었을지언정 정치권력에 의한 서구화는 유감스럽게도 내재하는 전통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를 외면했다.
그렇다고 하여 민족주의의 대체와 그에 대한 억압이 일반 대중의 차원에서도 그대로 유효하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비록 모호하고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 민족주의는 여전히 일정한 지지 지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점에서 그 정치적 효용이 소멸되어버리지는 않았다. 일반 대중의 이러한 정서와 의식은 정치권력에 의해 포섭되었으며, 이에 따라 민족주의의 대중적 실천은 왜곡되거나 오도되었다.
일본 전통의 지속과 나란히 그것의 거부와 배격이 일상을 통해서 별다른 모순 없이 혼재했으며, 실질 민족주의의 부재는 허구 민족주의의 현존으로 대체되었다. 결국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식민 지배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 억압과 독재를 위한 도구이자 동시에 국민의 동원과 통합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근대화 시기(1960년대) 민족주의와 민족 주체성
1960년대에 들어오면 한국의 전통과 고유성, 한국적인 것에 대한 인식의 지형은 매우 복합적이고 활발한 양상을 띠게 된다. 앞 시기와 달리 이 시기에는 시대의 당위, 일종의 시대정신으로 제시된 근대화의 추구에 대한 사회 합의를 배경으로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났다. 일제 강점기에서처럼 일본에 의해 부과ㆍ강요된 형태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시기의 근대화가 서구, 특히 미국의 외래 문화를 수용하는 형태를 띤다고 할 때, 비록 그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자발 내지는 반자발의 형식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일방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수용자의 내면 심리는 고유한 자존심의 손상이라는 미묘한 복합의 반응을 수반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950년대에 급격하게 진행된 외래문화의 영향과 충격은 전통에 대한 무관심과 그로 인한 자아의 손상을 초래했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과 근대화 즉 서구화한 개념의 도입은 민족문화에 대한 무관심이나 인식의 잘못을 결과했고, 한국 부재의 한국문화란 수치스런 현상을 불면할 위기에 다가서고 있다”는 지적(이주혁 1968: 320)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물러간 일본 제국과 신생 미국의 두 제국에 의한 전통과 자아의 훼손은 1960년대 들어와 어떠한 형태로든지 자아의 재정립과 전통에 대한 재인식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자아의 일부로서 고유한 역사 전통에 대한 인식과 정립에 대한 필요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1960년대는 민족 주체성의 시대였다. 이 시기의 주체성은 이제 더 이상 일본에 의해 부과된 것도, 그렇다고 해서 서구ㆍ미국에 의해 일방으로 이끌리는 것도 아닌, 한국인에 의한 한국의 주체성이 되어야 했다. 이러한 점에서 1960년대의 민족주의는 1950년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 1960년대의 지식인들에게 민족과 민족주의는 전통의 창조와 근대화를 위한 강력하고도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중심 기표가 되었다.
근대화 시기 민족주의와 전통
1960년대는 민족 주체성의 시대였으며, 이러한 시대 사조에서 민족의 전통은 근대화의 새로움을 강조하는 주체성의 표상이 되었다. 민족과 민족주의가 강조될수록 민족 전통이 주목받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1960년대는 20세기 전반을 통틀어 민족 고유의 전통에 대한 모색과 추구가 가장 활발하게 나타난 시기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1960년대의 시점에서 민족 전통의 실체로는 어떠한 것이 거론되고 있었는가? 일반으로 말하면 이 시기 한국적인 것의 대상과 내용은 근대 이후 한국적인 것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일본과 미국이라는 두 타자에 의해 주로 규정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중에서 어느 타자를 유의미한 준거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민족 전통의 추구는 다양한 차이를 보였다.
이 시기 민족 전통에 대한 가장 독특한 입장의 사례로는 아무래도 김수영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의 전통 인식은 “한국의 지성사에서 매우 독보적”인 사유로서 평가되고 있다. 「거대한 뿌리」(1964)에서 김수영은 ‘요강, 망건, 장죽, 곰보’와 같이 사라져버린 민중 생활의 항목들을 민족 전통의 유력한 표상들로 제시한다. 이처럼 낙후한 시대 토속의 사물들과 고유어에서 역설의 전통을 발견함으로써 그는 ‘공식적인 기억’의 연대기에 내포된 모순과 착오를 폭로하거나 교정하는 방식을 통해 민족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다가서고자 했다.
한국적인 것, 민족 전통의 대상이 ‘과거의 빛나는 유산’과 같이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고 내세울 만한 어떤 것을 선택, 강조하는 경향은 특히 공식의 역사, 혹은 지배 계급의 역사 서술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김수영에게 전통은 열등감이나 설움, 후진성의 기호로 읽히는 어떤 것으로, 수치심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이와는 대조를 이룬다. 김수영의 전통은 타자로서의 대상화나 일정한 거리 두기가 아닌 자신의 몸에 새겨져 살아 있으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어떤 것이다.
김수영은 정치권력이 기획한 ‘민족중흥’의 맥락에서 민족의 귀감이나 영웅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에 희생당하고 배반당한 개인의 수난과 고통을 기꺼이 민족의 전통으로 받아들였다. 박연희가 지적하듯이 그의 전통론은 과거로부터 망각된 기억의 잔해를 하나하나 호명하여 주체의 분열을 유도함으로써 역사적 모순과 위기를 더욱 극명하게 부각하는 전략을 택한다(박연희 2011: 226, 230-231). 이러한 점에서 그는 우와 좌,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당시 지식인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민족주의 이념에 근거하여 전통을 강조하지 않았으며, 이에 대신하여 민족주의의 미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전통을 추구하고자 했다(박연희 2011: 218-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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