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연 동국대학교 명예교수는 23일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 “조선이야말로 서양보다 앞서 출판혁명과 지식의 대중화에 성공한 진정한 책의 나라였다”고 강조했다. 최영재 기자
1972년 프랑스에서 발견된 고려의 직지심경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으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간행한 금속활자본 성경보다 78년 앞선다. 한국인이라면 교과서에서 배워 누구나 일고 있는 상식이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금속활자로 무슨 책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 냈는지 아는 이는 드물다. 근대 이전의 출판문화에 대한 체계적이고 심층적인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그러다보니 금속활자 발명은 빨랐지만 구텐베르크 활자로 출판 혁명이 일어난 서양에 비해 출판문화는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란 통념이 퍼져 있는 게 사실이다.
원로 정치학자인 황태연 동국대 명예교수가 이런 통념에 반기를 들고 나왔다. 그는 “조선이야말로 서양보다 400여년 앞서 출판혁명과 지식의 대중화에 성공한 진정한 책의 나라”였다고 주장한다. 우선 작업량이 방대하다. 황 교수는 국내외 도서관, 박물관 목록과 서지 데이터베이스를 샅샅이 뒤져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출판된 모든 금속활자 책의 목록을 완성했다. 그가 출간할 저서 『책의 나라 조선의 출판혁명』(상,하권)의 부록에 385페이지를 할애해 수록한 목록만 1만4117종이다. 금속활자가 출현한지 800년 만에 실현된 최초의 목록화 작업인 셈이다.
『책의 나라 조선의 출판혁명』 출간 예정
전공인 정치철학과 무관한 금속활자와 출판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공자 철학의 서천(西遷·서양으로 옮겨가 영향을 줌)을 연구하다 우연히 ‘한국 금속활자의 서천’을 주장하는 서양 학자들의 기록을 발견했어요. 국내 관련학계에 이 사실을 알려줬지만 10년간 전혀 변화가 없었죠. 그렇다면 내가 직접 책을 내고 이 사실을 밝히자 생각했죠.”
한국의 금속활자가 서양으로 건너갔다는 의미입니까.
“구텐베르크가 한국 금속활자 인쇄술을 모방했다는 거죠. 이미 외국에는 한국 금속활자 인쇄술의 서천에 대한 논문 저서가 14건이나 있어요. 이번 연구를 진행하면서 6개의 육상·해상 서천 루트를 제시하고 논증했는데, 이중 4개의 루트는 내가 처음 발견한 것들입니다. 금속활자 발명이 구텐베르크보다 앞섰다는 사실 못지않게 중요한 게 조선의 서적 출판 유통 규모가 중국·유럽을 압도적으로 앞섰다는 점이에요. 인쇄·출판혁명은 발간되는 책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책값이 극적인 수준으로 저렴해져 누구나 책을 사 보고 지식이 대중화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조선이야말로 출판혁명이 세계에서 가장 앞섰던 나라죠.”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황태연 명예교수가 출간한 서적 『책의 나라 조선의 출판혁명』(한국문화사) 상-하권 표지. [사진 한국문화사]
황교수에 따르면 구텐베르크 활자를 이용해 최초로 라틴어문법서 『도나투스』를 찍은 1440년부터 60년간 유럽 16개국의 1개국당 평균 책종 총수는 같은 기간 조선이 활인한 책종 총수의 6분의 1에 불과하다. 중국 인쇄서적의 책종 수는 조선을 능가했지만, 명·청대 중국 인구는 조선보다 약 25~30배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1인당 책종 수는 조선에 크게 못미친다. 그래서 중국은 일찌감치 조선을 ‘문헌지방(文獻之邦)’, 즉 책의 나라라 불렀다고 한다.
1만4117종의 책은 주로 어떤 내용인가요.
“조선이 양반 중심의 성리학 사회라는 통념과 달리, 실제로 출판된 성리학 경전은 수백 권에 불과해요. 대신 90%가 농업·양잠·어업· 의학 등 산업 또는 기술 서적입니다. 양민의 삶에 밀접한 실용적 지식 보급이 왕성했음을 알 수 있죠.”
‘농부들은 글 모르는 무지렁이었다’는 주장도 뒤집힙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장교 쥘 베른이 강화도 침공 후 농촌을 쑤시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가난한 농가들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같은 책을 발견하죠. 이 집 들어가도 책이 있고, 저 집 들어가도 책이 있고. 쥘 베른은 이후 ‘서양문명의 치욕’이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조국 농가에는 책이 없는데 조선의 농가에선 다 책을 읽는다며 엄청 창피해 했어요.”
황 교수에 따르면 세계최초의 일간신문도 조선에서 발행됐다. 1577년 11월 6일 서울의 전문인쇄업자들이 펴낸 상업적 일간신문인 민간 ‘조보(朝報)’다. ‘조보’는 국왕의 명령과 지시, 관리의 임명 등 조정의 소식을 알리는 신문 형태의 문서로 서울과 지방의 관리, 양반들에게 돌렸다. 이 신문은 1650년 창간된 유럽 최초의 상업적 일간신문 ‘아인콤멘데 치이퉁’(일명 라이프치거 차이퉁)보다 73년 빠르다. 황 교수는 “민간에 전문인쇄업자들이 생겨날 만큼 조선의 금속활자 기술이 발달했고, 수많은 책이 민간에 보급·유통됐던 ‘책의 나라’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했다.
선조가 조보를 발행한 관련자 38명을 유배 보냈다던데.
“선조는 우리 정부의 주요 정보가 중국으로 흘러갈 거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해요. 인쇄업자들로선 억울하죠. 관청에서 허가를 받아 발행한 것이니까요. 당시 조보는 지방 관리들에게 매우 유용했어요. 중앙정부에서 행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쉽게 알 수 있었으니까요. 대신들이 조보 관련자들을 유배 보낸 처사는 부당하다고 여러 번 상소를 올렸지만 선조는 끝내 듣지 않았죠.”
책종이 1만4117종 이상이란 것을 밝혀 냈는데 실제 발행된 책의 부수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17세기 이후 조선에선 반상차별, 상천차별 없이 일반 백성도 모두 자식을 서당에 보내는 게 일반적이었어요. 1807년(순조 7년) 기준으로 전국 공·사립 서당 수는 약 8만 개. 1개 서당의 평균 학생 수를 8명으로 치면, 약 64만명의 학생과 약 8만명의 훈장이 보는 책이 필요해요. 학도·훈장 1명당 천자문을 비롯한 주요 경전 4권씩을 필요로 했다면 매년 288만권의 책이 필요하죠. 여기에 성균관·향교를 비롯해 서원·사찰·각급 행정기관까지 공급하려면 줄잡아도 매년 400만권 이상의 새 책이 공급돼야 했죠. 조선의 혁명적 출판역량이 매년 이를 감당하고도 남았다는 얘기입니다.”
같은 기간 조선의 책값과 유럽의 책값 차이가 컸나요.
“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유통된 30쪽짜리 싸구려 소설책 값이 농업노동자 월급 3분의 1을 상회했어요. 반면 19세기 조선의 철학책 『대학』은 농업노동자 월수입의 22분의 1, 『중용』은 15분의 1에 불과했죠. 이는 ‘다책종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던 조선 금속활자 활판술의 ‘활인·번각’ 시스템 덕입니다.”
번각(飜刻) 시스템이란, 중앙에서 내려온 활인본 책을 전국 팔도감영에서 해체한 후, 낱장을 뒤집어 목판에 물풀로 붙이고, 거꾸로 비친 글자를 그대로 목판에 새기는 작업이다. 이는 같은 책을 만들 때 처음만큼 시간과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대량생산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유럽에서는 이렇게 못했나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금속으로 알파벳을 하나씩 만들고, 이를 조판한 뒤 묶어서 고정시키는 판형 인쇄 방식이었어요. 그래서 인쇄 후 조판을 해체해 재사용하는 게 불가능한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었죠. 또 목판인쇄를 활용한 번각 시스템을 활용할 줄 몰랐어요. 그러니 다량의 출판인쇄가 불가능했죠.”
‘조선조 언문활인본 총목록 265종’ 목록도 함께 제시했습니다. 금속활자로 된 한글 책도 상당했다는 얘기죠.
“이는 조선 500년 동안 간행된 불서 277종, 성리학 활인본 399종과 대비해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에요. ‘한글은 기껏해야 한문의 보조역할만 했다’는 일부 국내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임금의 법령 등 국가통치 시스템의 중요한 분야에서 한글이 적극 활용됐음을 알 수 있어요. 1894년 고종이 ‘우리 글자를 국문(나라글자)이라고 부르며 공문서를 한글로 쓰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는 칙령 1호를 발표했는데, 이렇게 해도 문제가 안 생긴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그러니까 집안의 아낙네들, 상놈들이나 한글을 썼다는 건 잘못된 주장이에요. 대한제국기에 발행된 신문들도 보면 독립신문·매일신문·국제신문은 순 한글이었고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는 국한문혼용이었죠. 이처럼 상당히 권위 있는 글에도 전부 한글을 써왔기에 고종이 칙령을 시행하기 쉬웠던 거죠.”
‘배워야 산다’ 집단 DNA, K컬처 원동력
이 방대한 목록을 만들기까지 꽤나 힘들었겠습니다.
“정말 죽을 뻔했습니다.(웃음) 현존하는 책은 물론이고, 책은 남아있지 않지만 문헌 기록이 너무 명확해서 출판됐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경우까지 일일이 확인하고 포함시켰죠. 서로 다른 분야의 학자들이 자기 것만 공부하려고 만든 목록들도 다 뒤져서 새로 정리하고, 미국 도서관에 처박혀 있는 목록들은 구글로 일일이 뒤졌습니다. 제일 어려웠던 점은 책 제목이 여러 개라는 거였어요. ‘직지심경’을 ‘직지심체요절’ 또는 ‘직지’라고도 부르니까요. 문집의 경우는 ‘선생’이 붙은 게 있고 안 붙은 게 있고. 이걸 일일이 다 확인해야 했습니다.”
조선이 ‘책의 나라’였음을 밝힘으로써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첫째는 잘못 알고 있는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 둘째는 우리 스스로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 ‘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잘살게 됐지?’에 대한 답을 주고 싶었어요. 오늘날 세계에서 맹활약하는 한국인들의 놀라운 비밀병기는 ‘책의 나라’ 조선시대부터 체질화된 ‘집단적 DNA’, 즉 향학열과 교육열이라는 거죠. 조선은 학교이자 출판사였고, 금속활자는 ‘학교·출판사 국가’의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었어요. 이때 형성된 집단 DNA, ‘배워야 산다’가 향후 민주화와 산업화 그리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K컬처의 원동력이 됐죠. 우리 역사에 자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황태연. 서울대와 동대학원에서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9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괴테대학에서 마르크스 철학을 연구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4년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초빙되어 2022년 3월 명예교수가 되기까지 동서양 정치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며 가르쳤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