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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위기. 사진/버트
글린.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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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기
= 요정처럼 큰 눈으로 유명했던 트위기는 60년대를 대표하는 얼굴 가운데 한 명이었다.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모델로 출발하여 연예계에 진출했다.
그녀의 매니저 저스틴 드 빌너브 역시 진정한 60년대식 인물이었다.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나 장터 권투선수와 포르노
영화 판매원 등으로 일했고, “언젠가 1년에 11곳의 미용실에서 일한 적도 있죠.” 그는 또 빈민가 사기꾼 피터 래크먼이 경영하는 소호의 스트립
클럽에서 기도를 보기도 했다. 그 후 골동품 가판대를 운영하다가 “너무나도 조그맣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 사랑스럽고 작은 소녀”를 만났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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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렌스 올리비에 경과 그의 아내 비비언 리. 사진/그레이엄 헤일스.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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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올리비에와 비비언 리 = 1947년에 기사 작위를 받은 로렌스 올리비에 경과 그의 부인 비비언 리는 스튜어트 그레인저, 허더즈필드 출신의
제임스 메이슨, 그리고 브리스틀 출신의 캐리 그란트와 함께 국제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1947년에 루돌프 빙의 후원으로 에든버러에서 최초의 국제 예술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 본격적인 텔레비전 시대의
도래에 앞서 영화는 마지막 호황을 누렸고 매년 15억 장의 티켓이 팔렸다.
올리비에의 「햄릿」은 영국 영화 최초로 오스카 최고작품상을 수상했다. 발레 드라마인 「빨간 구두」는 두 개의 상을
더 거머쥐었다. 알렉 기네스가 주연한 세 편의 전통적인 ‘일링 코미디’, 즉 「핌리코로 가는 여권」, 「위스키 참 많네!」, 「친절한 마음과
작은 왕관」도 이 당시에 제작되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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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틀스의 멤버 메카트니. 사진/데이비드 헌. <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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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 = 1963년 초만
해도 비틀스는 고향 리버풀의 캐번이라는 클럽에서 연주하던 잘 알려지지 않은 팝 그룹이었다. 그로부터 18개월 이내에 그들의 인기는 가장 나이
많은 세대까지도 기차에 탄 매카트니를 알아볼 정도로 치솟았다.
이듬해 여왕은 이들 전설적인 4인조Fab Four에게 MBE 훈장(영국의 5개 훈장 품계 중 가장 낮은 것. 기사
작위는 아니다-옮긴이)을 수여했다. 비틀스 마니아들은 뮌헨은 물론 미국에도 많았다. 레넌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예수보다
더 유명해요. 둘 중 어느 게 더 중요한지 잘 모르겠어요, 로큰롤인지 기독교인지.”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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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링스톤스가 그들의 앨범 ‘거지의 연회‘를 판촉하는 모습이다. 사진/마이클
조지프.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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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스톤스 = “스톤스를 볼
때까지 기다려!” 뉴욕의 사교계 명사 ‘베이비’ 제인 홀저가 1964년에 한 말이다. “그들은 섹스 그 자체에요. 신이 내린 축복이고…… 다들
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지배하죠…… 마치 완전한 혁명 같아요.”
롤링스톤스가 그들의 앨범 「거지의 연회Beggar’s
Banquet」를 판촉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영국 청년들은 1960년대 미국의 대중문화 독식에 위협적인 도전장을 내민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정숙과 복종이라는 번데기 안에 그토록 오랫동안 갇혀 있던 한 국민이
말썽꾸러기 나비로 변신한 데 대한 전 세계의 궁금증이 그들의 성공에 더욱 큰 역할을 했다.
1967년에 믹 재거가 이탈리아에서 합법적으로 구입한 각성제 암페타민을 소지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을 때
〈타임스〉의 편집인은 이 사건이 캔터버리 대주교가 “로마에서 비행기 멀미약”을 구입한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고 논평했다. 이러한 비유는
그의 도덕적 해이와 더불어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당시 영국인들 전체가 바로 이런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스톤스의 멤버 브라이언 존스는 2년 후 약물 남용으로 사망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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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반가 조지 리 맬러리(왼쪽). <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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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리
맬러리 = 영국의 등반가 조지 리 맬러리는 왜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려 하냐는 어느 미국인의 질문에 “거기에 있으니까.”라고 대답했다.
1924년에 그는 영국 등반대의 다른 두 멤버와 함께 에베레스트 산으로 가던 도중, 개천 하나를 건넌 다음 셀프타이머를 이용하여 반라의 상태로
스스로를 촬영했다(사진에서 왼쪽). 리튼 스트레이치가 1900년대에 그를 사모한 적이 있었다. “황홀한 핑크빛이 도는 그의 몸에 녹아들어 죽어도
여한이 없으리.”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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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 행위 = 극작가이자 비평가, 채식주의자, 에세이 작가,
팸플릿 작가이며 공산주의자였던 조지 버너드 쇼가 해변에서 수염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다. <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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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트레이치가 에디 색빌웨스트,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있는 모습.
사진/레이디 오털린 모렐.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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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 블룸즈버리 그룹은 태비스톡 스퀘어에 있는 레너드 울프와 버지니아 울프의 집 지하실에서 호가스 프레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
모임은 레너드 울프가 실론에서 공무원으로 일할 당시 캘커타 스위프를 통해 번 돈으로 운영되었다.
이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적 기준을 혐오했는데, 리튼 스트레이치와 E. M. 포스터가 동성애자였다는 점으로 볼
때 그 혐오의 정도를 더욱 잘 짐작할 수 있다. 스트레이치가 에디 색빌웨스트,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있는 모습이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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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엘 카워드(오른쪽)가 거트루드 로렌스와 공연하고 있다. 사진/사샤.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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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엘
카워드와 거트루드 로렌스 = 영국 예능인들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했다. 오랜 전통, 각 지역 레퍼토리 극단들이 제공하는 배우 훈련,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극작가들, 그리고 영어 그 자체는 훌륭한 배우들을 만들어내기에 매우 훌륭한 조건이 되었다.
배우이자 극작가이며 작곡가였던 노엘 카워드는 1927년 웨스트엔드에서 네 작품을 동시에 공연하기도 했다. 그가
「오늘밤 8시 30분」에서 거트루드 로렌스와 함께 공연 중이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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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아 시트웰. 사진/세실 비턴. <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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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시트웰 = 세실 비턴은 1930년에 조지아 시트웰을 촬영했는데, 〈보그〉는 당시 그녀를 잉글랜드에서 “가장 예쁘고 젊은 유부녀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했다. 그녀의 남편은 오즈버트 시트웰과 이디스 시트웰의 동생인 서셰버럴 시트웰이었고, 이 세 사람은 전간기 “모든 예술 분야의
아방가르드 대가들”이었다.
이 사진은 다비셔에 있는 그들의 저택 레니쇼 홀에서 열린 가족파티 중에 촬영한 것이다. 비턴의 회상에 따르면,
조지아의 축 늘어진 듯한 우아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던 그녀의 개 보조이 피오는 “저택에 몰래 데려온 것으로, 오즈버트의 눈에 띄지 않도록
마구간에 가둬놓아야 했다.” <북폴리오> 제공
뮤직홀과
극장 = 뮤직홀과 극장은 항상 만원이었다. 교태를 부리면서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이 여자는 로티 콜린스라는 가수로, 그녀의 노래 「타 라
라 붐 데 에이!」는 에드워드 시대의 진취적 기상을 대변했다.
「해질녘의 방황」 같은 스코틀랜드 노래들을 불렀던 해리 로더는 글라즈고와 런던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인기를
누렸다. 1907년 이후에는 매년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자치령들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어느 웨이터의 일곱 자녀 가운데 한 명으로 태어난 메리 로이드라는 여자는 위트 있는 거친 농담과 「오, 미스터
포터」, 「내가 사랑하는 소년이 갤러리에 앉아 있네」 등의 노래를 불러 유명해졌는데, 1922년에 세상을 뜨기 며칠 전까지도 미국과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은 물론 국내 각지를 돌아다니며 만원의 관중 앞에서 공연했다. 전통적인 극장의 분위기는 점점 더 점잖아졌다.
<북폴리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