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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德府學(일명
열하태학관)자리에 承德市 제8중학교가 있었다. 2007년 8월 현재 부학을 복원키 위해 제8중학은 이사를 갔다.
기풍액과 천체를 종횡하던 그날 밤, 기씨는 연암을 자기 방으로 초대했다. 방에는 초 네 자루가 불을
밝히고, 한가득 음식이 차려진 교자상이 있었다. 교자상에 닭찜이 올라 있었는데, 주둥이와 목, 발목이 그대로 달려 있었다. 중국의 찜 요리는
거위나 오리도 마찬가지다. 연암이 얼마나 놀랐으랴. 전체적이면서 실용적인 중국 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날 밤 닭이 두 번째 홰를 치도록 나누던 방담에 우리를 놀라게 하는 대목이 있다. 방담의 일부가
‘황교문답(黃敎問答)’에 실렸는데, 황교는 티베트 지방에 성행하는 라마 불교의 별칭인바 ‘황교문답’은 그에 관한 역사·교리·현실 등을 문답식으로
풀이한 부록이다. 조선인으로서 황교를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 터. 그래서인지 연암은 그 벽두에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 겪는 여섯 가지
어려움을 설파했다. 그것은 단순히 황교 입문의 어려움일 뿐 아니라 외국 문물 고찰에 따르는 보편적인 어려움일 것이다. 필자는 이를
‘출국고찰6난(出國考察六難)’이라고 요약해보았다.
연암은 먼저 덜렁이 외국 여행자를 비꼬았다. 외국에 나가 대강대강 둘러보곤 ‘적정(敵情)을 잘
살폈다’느니 ‘풍속을 알았다’느니 큰소리치는 덜렁이를 야유했다. 그러고는 여섯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는 길잡이를 찾기 어려움이요, 둘째는 통역을
얻기 어려움이요, 셋째는 중국과 외국인 사이에 형적이 다름이요, 넷째는 말이 옅거나 깊어도 실정을 알기 어려움이요, 다섯째는 묻지 말아야 할
일을 물어서 정탐의 혐의를 받는 어려움이요, 여섯째는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치를 꾀할 수 없듯 그 나라의 금역을 알아야 그 나라의 도를
말할 수 있는 어려움이다.
일곱 가지 한심한 일
한 시민, 한 벼슬아치가 외국에서 겪는 어려움과 지켜야 할 매너를 조선의 일개 비공식 수행원
박지원이 230년 전 입김으로 밝혔다. 당시의 국제 매너를 짚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나 연암은 오늘처럼 국제간의 질서와 친목이 당위시되고 또
오늘처럼 국제간 경쟁과 반목이 치열해질 것을 미리 내다본 셈이다.
8월14일, 연암에게는 뜻 깊은 날이었다. 아침에 생각 없이 대문을 나섰다가 목동 하나가 수숫대 한
개비로 수백 필 말 떼와 30~40마리 황소떼를 고삐나 그물은커녕 코도 뿔도 꿰지 않은 채 몰고 가는, 그 유유한 행렬을 보고 감탄했다. 평소
가슴에 묻어뒀던 가축 몰이나 말 기르기에 대한 생각이 부스스 일어났다.
목축에 대한 이야기는 길다. 앞에서 천체 관측이 달구경에서 시작하듯 목축에 대한 이야기는 수백 필
말떼와 수십 필 소떼, 수십 마리 당나귀가 수숫대 한 개비와 막대기 하나에 질서가 잡히는 것을 보고 시작됐다. 그렇게 방목하는 열하의 가축을
보고 연암은 숙소로 돌아왔다. 집 밖에 매어둔 말 꼴을 보니 그 몰골이 더욱 초라하고 한심했다. 그래서 조선의 명목을 지키는 제주도 목장
이야기로 시작해 ‘우리나라 목장의 여덟 가지 한심한 일(我東牧場, 八大寒心事)’을 비롯, 축목상의 금기, 번식 방법, 행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풀었다.
이야기는 탄력이 붙어 목축은 단순한 목마(牧馬)에 그치지 않고 목민(牧民)을 간접 암시하거나 직접
설파하기도 했다. 여기서 말을 백성으로 대체했을 때 그 뜻이 뜨겁게 달궈졌다. 아니, 연암의 이 글은 당장 정치 담론으로 훌쩍 탈바꿈할 수도
있었다.
그중에도 ‘칠대한심사’는 절묘하다. 목축이란 측면에서 귀담아들을 만한 내용임은 물론이요 그 지적의
비유나 상징의 패러독스가 튕기듯했다.
첫째, 조선 최대 목장인 탐라의 말들은 원나라 때 방목한 종자인바, 사오백년을 두고 개종하지
못한지라 느림뱅이 꼬마 말로 변했거늘, 이 느림뱅이 꼬마 말로 대궐을 지키고 적진을 찌르겠다니 한심한 일이요. 둘째, 대궐용 준마가 대부분
요동·심양 등지서 사들인 말이요, 토산이란 한 마리도 없거늘 어느 날 요동·심양길이 막히면 말의 공급원이 없어져 한심한 일이요. 셋째, 백관이
말을 빌려 타거나 나귀로 대신하거늘 이런 꼴로 궁궐의 위엄을 갖출 수 없어 한심한 일이요. 넷째, 옛날 문관이나 대부의 지체를 수레나 말로
시위했는데 지금 조선 대부의 마당에 수레 열 채는 고사하고 단 두 채가 없음이 한심한 일이요. 다섯째, 높은 무관은 졸개 100명쯤은 거느릴
터에 말 한 마리조차 삯말을 내어 전장에 나간다는 소문이 한심한 일이요. 여섯째, 무관이 이럴진대 기병은 어이할까. 기병조차 이름만 지닐 뿐
실상이 없음이 한심한 일이요. 일곱째, 토산 말인 데다 쌍가마를 끌고, 쌍가마엔 잔뜩 무거운 짐을 싣고 교자꾼조차 말에다 몸을 싣듯 붙어서
가거늘 말이 달릴수록 짐이 짓누르니 말이 죽지 않으면 병들 수밖에 없는 일, 어찌 한심치 않으랴.
연암의 한탄은 계속된다. 말이야 죽든 말든 산더미처럼 짐을 싣고, 먹이느니 더운 여물죽이요, 시도
때도 없이 흘레붙이거늘 정강이는 힘을 못 쓰고 발굽이 말랑하여 풍기 들고 망가질 뿐 한심한 일이 어찌 이뿐이랴. 그야말로 불행의 극치요, 말로의
징후다. 모두 주인의 무지와 과욕이 빚은 결과다.
뜨거운 여물에 소금을 뿌려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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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으로
보이는 것이 明倫堂 지붕이다.
이 밖에도 연암은 비장한 목마(牧馬)론을 비쳤다. 말을 다루는 원리나 먹이를 먹이는 방법으로부터
번식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면서 실제적인 내용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목마 이론은 ‘순시순천(順時順天)’적인 자연주의에 바탕하고, 생산주의나
유물주의에 급급하지 않았다. 여기서 또 한번 연암 철학의 뿌리가 깊고, 그 빛이 따뜻한 실학주의와 인간주의임을 확인한다.
연암은 말을 사람으로 보았다. 사람이 고달프면 쉬고 배고프면 먹이를 찾듯, 말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편한 옷가지를 선호하고 그 어떤 굴레에서도 벗어나고 싶듯 말도 그러하다. 말도 지치면 쉬고 싶고, 답답하면 시원한 데를 찾고, 배고프면 들녘에서
잡초를 뜯고 싶다. 한시라도 굴레를 벗어나서 견마잡이의 관제를 뿌리치고 마음대로 긁고 마음대로 뒹굴고 싶다.
연암은 또 조선의 말잡이가 말을 잘 먹이지 못한다며 분개했다. 말은 본디 익힌 음식을 싫어하고
찬물을 좋아함에도 조선의 목마꾼들은 그걸 몰랐던 것. 기껏해야 뜨거운 여물에 콩을 삶고 거기다 소금을 뿌려주었으니…. 그러한 까닭에 말이 신열을
보이면, 신열을 없앤다고 또 더운 죽을 먹였다. 냉수를 먹으면 정강이와 발굽이 단단해지는데 말이다. 결국 느림뱅이 꼬마 말이 되고 마는 것은
삶은 콩을 넣어 끓인 죽 탓이다. 얼마나 엉터리 목축인가.
연암은 애써 말을 잘 기르기보다 좋은 씨 받는 일이 관건임을 주장했다. 그는 먼저 중국의
‘주례(周禮)’나 ‘예기(禮記)’의 ‘월령(月令)’ 편 기록을 빌려 번자(蕃·#54870;) 방법을 피력했다. 그 방법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당나라 때부터 중국 서북 변방인 감숙 땅에 목마장을 개설하고, 정관(貞觀) 연대에는 70만 필로 불어났고, 개원 13년(725) 명황이 태산에
제사할 때 그 행차에 동원된 수만 필 말의 대열이 비단필처럼 휘황찬란했다고 인용 술회했다. 말은 과연 부국강병의 상징이었다.
기껏해야 베갯머리 울리고
부국강병의 상징인 말은 그냥 생기거나 퍼지지 않는다. 우생학적인 연구를 따라 넓은 목장에서 충분한
영양 공급을 하고 운동을 시켜가며 길러야 한다. 연암은 말이 크고 건장한 데다 준수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작은 종자에 취약한 체질, 노둔한
신경은 못쓰는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끊임없이 종자를 개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려면 기운과 혈기 넘치는 흘레 말을 확보해 늦은 봄 3월쯤에
암놈이 있는 목장에 풀어놓으라고 했다. 그리고 여름에는 수놈을 거세하고 말이 새끼를 배었을 때는 수놈의 접근을 막으라고도 했다. 연암의 종자
개량을 위한 진흥은 자질구레하다 싶을 만큼 구체적이다. 옛 선왕의 ‘순시육물(順時育物)’, 곧 자연의 시순을 따라 만물을 육성한다는 원리를
지키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연암의 이용후생을 통한 우국우민의 발로였다. 오늘에 태어났더라면 ‘목축입국(牧畜立國)’이란
표어를 내놓았을지 모른다. 그가 8월14일자 일기에서 고백했듯 연암이 황해도 연암에 낙향한 것은 목축에 뜻을 뒀기 때문이다. 거기 첩첩 산중,
수초가 좋은 편편한 골짜기가 목축에 적합한 땅이라고, 나아가서 조선이 가난을 벗지 못한 까닭은 바로 목축이 제 구실을 못했기 때문이라 했다.
연암은 조선 목축의 현주소와 목축을 관리하는 관아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질타했다. 개종도 하지 않고
수입도 하지 않고 이대로 가만둔다면 조선의 말은 모두 당나귀가 될 거라 내다봤다. 꼬맹이 말을 연암은 ‘침마(枕馬)’라고 했다. 지독한 풍자다.
늦가을에 난 서리병아리를 여러 번 번갈아 씨를 받으면 꼬마 닭이 되는데 그 새끼의 울음이 기껏해야 베갯머리를 울린대서 ‘침계(枕鷄)’라 했다.
마찬가지로 말 종자가 작아져 베갯머리의 담배통을 구유로 쓸 수 있겠다면서 ‘침마’라 한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의 벼슬아치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명령만 했다. 감목(監牧)이란 자가 있지만 말을
먹이거나 말에 관한 허드렛일은 하지 않았다. 목마에 대한 지식은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하인을 부렸다. 말을 알고 말을 만지는 관원은 오히려
좀스럽다는 비방을 면치 못했다.
“달밤이면 당신 생각에 어찌 견디랴”
그날 오후, 세 명의 조선 사신이 대성전을 참배했다. 연암은 많은 성철 가운데서도 유독 주자의
위패를 주목했다. 주자의 석차가 열한 번째로 올랐더라 했다. 위패마다 붉은 운문단 휘장을 늘였고 작은 향로 한 개씩을 세워두었다. 그 외벽에는
황제의 훈시와 학규들이 빗돌에 새겨 있었다고 했다.
어스름 저녁, 연암은 황제로부터 다음 날 북경을 거쳐 귀국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물론 불시다.
연암이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곳을 다음날 바로 떠나야 했다. 울분을 삭일 수 없었다. 북경으로 입성하라는 날도 그랬거니와 열하로 오라는 날도
조선 사절이 정한 일정이 아니었다. 들고 나고, 만나고 물러서는 모든 의전을 청나라 황실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어쩔 수 없이 그 밤이
이슥하도록 떠날 채비에 바빴다.
지난 엿새는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최고의 학습이기도 했다. 연암은 중국의 학자 왕민호(王民?, 호는
곡정(鵠汀)), 학성(?成, 호는 장성(長城)), 윤가전(尹嘉詮, 호는 형산(亨山)), 기풍액(奇豊額, 호는 여천(麗川)) 등과
천문·음악·종교·경전·역사·정치·풍속 등을 토론했는가 하면 많은 것을 참관했다. 거리에 나가 요술을 구경했고 원림에 들어 희곡을 보았다. 사원에
가선 정각 꼭지에 세운 황금색 호로병을 구경하기도 했다. 조선 사신이 황제에게 올리는 3배9고두를 보았고, 황제의 명령에 따라 꼼짝없이 활불
반첸을 뵈러가는 사절의 무거운 발걸음도 보았다.
어찌 보면 욕스럽기도 했지만 이전까지 열하에 와본 조선 사절이나 선비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며칠만 더 묵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연암은 무엇보다 엿새 동안 교유했던 중국 친구들이 떠올랐다. 당장 그날 밤, 고별 인사를 해야
했다. 만주 사람(원래는 조선계)으로 귀주(貴州) 안찰사인 기풍액, 강소 사람으로 과거를 준비 중인 왕민호, 안휘흡현 사람으로
산동도사(山東都司)인 학성, 그리고 박야(博野) 사람으로 대리사경(大理寺卿)에서 은퇴한 윤가전을 차례로 찾아갔다. 학성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만났다. 갑작스러운 이별의 슬픔을 누르지 못한 채 모두 눈물을 뿌렸다. 모두가 ‘달밤이면 당신 생각에 어찌 견디랴’했다. 기풍액과 윤가전, 두
사람과는 북경에서 또 만나자고 약속했다.
연암의 그림자 위에 살포시
말도 통하지 않는 사내끼리, 통역을 세우거나 필담을 나눈 달빛 속 만남이 그토록 아쉬운 눈물을 빚을
줄이야. 필자는 두 나라 문학사 속에 한·중 문인이 만나서 포옹하고 헤어지며 감루하던 장면을 여럿 기억하고 있지만 연암의 그것처럼 영롱하고 짙은
물방울이 얼마나 더 있을까 싶다.
필자는 열하의 승덕부학(承德府學)에 서 있었다. 연암이 말한 태학관이다. 태학은 북경에 있는
최고학부를 일컫는다. 그러한 명칭의 잘잘못을 따지려는 게 아니라 이번처럼 천체의 관측이나 목축에 대한 논증, 그리고 중국 선비들과 대담했던 곳,
말하자면 그 무대의 중심에 서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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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 ● 1934년 전북 임실
출생 ●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졸업, 대만 사범대 대학원
석·박사(중국문학) ● 1961년 중국시단 데뷔 ● 한국외대 중어과 교수, 고려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정년 ● 現 한국외대 대학원
초빙교수 | |
왕민호와 함께 악기를 구경한 시습재, 수백 필의 말떼를 만난 태학관 문 앞, 윤가전과 함께 목축을
토론한 수업재, 세 명의 조선 사신이 공자사당을 참배할 때 주자의 위패를 본 대성전, 달을 보면서 천체를 논했던 명륜당 난간, 열하에 입성하던
날 밤 연암이 교교한 달빛 아래 같이 놀 사람 없어 슬퍼한 명륜당 뒤뜰…. 그 모두가 부학에 모여 있었다.
그것들은 아직 자취가 완연했다. 대성전은 아직도 우뚝하고, 명륜당 시습재 수업재의 지붕과 추녀,
벽돌담은 역연했다. 한 늙은이가 뼈는 남은 채 살이 삭듯, 오직 그때의 모습으로 남았으리라 믿어지는 것은 명륜당 뒤뜰의 고목들 그 짙푸른
그늘이었다. 필자는 요 몇 년 동안 연암의 그림자 찾기에 미친 이처럼 쏘다녔다. 여기서만은 연암의 그림자 위에 내 그림자가 얹혔으리라 믿고
싶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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