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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교수의 신열하일기(4)

이강기 2015. 8. 29. 10:18
허세욱교수의 신열하일기(4)    2012/02/23 12:22
 
 
나는 말을 믿고, 말은 제 말굽을 믿고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1870년 8월5일 연암은 나흘 뒤 열하에서 열리는 건륭의 고희연에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는다.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닷새 동안 밤낮없이 500리를 이동하는 강행군을 한다. 힘겹게 강을 건너면 더 큰 강이 떡 버티고 있는 험난한 여정. 북경에서 열하까지 이동하면서 겪은 감상을 기록한 열하일기 다섯째 장 ‘막북행정록’에는 연암의 인간적인 면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필자는 2004년 12월과 2007년 5월, 그리고 2007년 8월 세 차례에 걸쳐 연암이 간 길을 되밟았다.

 

 

 

허세욱 교수가 뒤쫓는 연암의 연행도.

북경은 연암 인생 43년 사상의 중심지요, 그가 중년 들어 추구했던 실학의 쇼윈도다. 그는 북경에서 두 가지 충격을 받았다. 하나는 다민족으로 이뤄진 중국을 3000년간 한 문 한 길로 통일시킨 것이 요·순으로부터 시작한 ‘유정유일(惟精唯一)’이라는 중심적·통일적인 중화주의란 사실이고, 또 하나는 부와 선진을 상징하는 27만 칸의 유리창(琉璃廠) 다락 난간에서 ‘천하의 지기 한 사람 있으면 한이 없겠노라’는 절대 고독론에 몸서리를 친 기억이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에 사로잡혀 붕붕 떠다닌 지 닷새째, 그는 또 다른 충격으로 한동안 파멸할 수밖에 없었다. 북경 거리를 구경 나갔다 술 몇 잔 걸치고 꼬꾸라져 잠든 8월4일, 정사(正使)의 마두(馬頭)인 시대로부터 내일 새벽이면 열하로 먼 길을 떠나야 한다는 청나라 예부의 급보를 받은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밤낮 나흘 동안 북경에서 열하까지 224km를 불가의 ‘404병(病)’ ‘81난(難)’과 같은 고행을 하는 심정으로 뛰었다. 그보다 더 큰 아픔은 경축 사절의 인원 제한으로 수족과 다름없던 장복이를 북경에 떨어뜨린 것이었다.

열하로 가는 북녘땅 500리

‘열하일기’의 다섯째 장(章)인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은 8월5일부터 8월9일 아침까지 북경 이북의 변강을 고행한 기록으로, 정신적·육체적인 고난과 아픔으로 얼룩진 ‘열하장정(熱河長征)’의 마지막 레이스를 담고 있다.

사실 1780년 청나라 고종 고희 경축 사절의 여정은 출발부터 고행이었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는 유월에 도강해 건륭의 생일이라는 사실 외에 경축식이 열리는 시기, 장소 등 정확한 의전 지시가 일절 없었다.

7월2일 통원보에서 장마에 갇힌 지 사흘째, 부사가 문짝과 수레로 뗏목을 만들어 건널 것을 제안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다시 나흘 뒤, 결국 하인 30여 명이 맨몸으로 가마를 메고 세찬 물살을 간신히 건너는 모험을 벌였다. 북경에 입성하던 8월1일, 맨 처음 사절의 표자문을 청나라 예부에 제출한 뒤 나흘을 기다린 것도 정확한 의전 지시를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8월4일 밤, 정사의 초조는 극에 달했는지 꿈결에 열하 길을 떠났노라고 연암에게 하소연할 정도였다. 그 조울증은 연암에게도 전염된 모양이다. 연암의 꿈결에도 별안간 벽돌 밟는 발자국 소리가 마치 담이 허물어지고 집이 무너지듯 요란스럽게 압박하더라는 것이다.

과연 8월9일 아침까지라는 도착 시기와 사람 74명에 말 55필로 사절의 규모를 제한하라는 요구사항을 통보받았다. 우리 사절은 100시간 내로 산 설고 물 선 500리 남짓 길, 그것도 큰물 큰바람이 개지 않은 북녘 땅을 어여차어여차 가야만 했다.

그해 5월25일 한양을 떠날 때부터 건륭의 고희연을 열하에서 주최하지 않을까 짐짓 예견했지만 그들은 얼른 속내를 보이지 않았다. 한참 지나서야 당시 청나라를 가장 위협했던 양대 변강인 티베트와 몽골, 그중 티베트의 6세(世) 활불이던 얼더니(額爾德尼)의 건륭 경축 사절이 전용할 수 있도록 1년 동안 수미복수(須彌福壽)의 사원을 신축해 건륭의 생일을 맞은 것으로 보아 경축 시기는 짐짓 예정된 것이었다.

연암에게 열하는 아직 낯설었을지 모른다. 강희 42년(1703)에 착공해 건륭 57년(1792)에 완공했으니, 연암이 갔을 때만 해도 피서산장과 궁궐·사원 등 세 곳의 마무리를 서둘렀을 것이다.

열하는 무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청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열하로 이름 지었고, 옹정은 승덕주(承德州)로, 건륭은 승덕부(承德俯)로 승격시켰다. 정치·문화상 지명인 열하와 행정상 지명인 승덕은 오늘에도 함께 쓰인다.

열하의 궁전과 피서 원림(園林)은 통틀어 ‘피서산장’ ‘열하행궁(熱河行宮)’, 또는 ‘승덕리궁(承德離宮)’ 또는 ‘하도(夏都)’ ‘새외경도(塞外京都)’로도 불린다. 열하의 정문에는 1708년 강희가 쓴 ‘避暑山莊’이란 편액이 붙어 있다. ‘더위를 피하는 산장’이라는 소박한 뜻이다. 강희 때부터 매여름 피서와 정무·외교·종교·문화·국방 등의 중요 국사를 집무하던 행궁이요 이궁이었다. 그럼에도 그 표면에는 피서라는 간판을 달고 능청을 떨고 있다. 하긴 궁전의 건축이나 수식에 있어 채색이나 기교를 부리지 않는 것으로 그 품격이 드러났고, 그보다 당시 북경 교외에 삼산오원(三山五園 : 万壽山, 香山, 玉泉山, 暢春園, 圓明園, 靜宜園, 靜明園, 淸·#54582;園) 등 대규모의 황가 원림을 건설했는데, 그 건설 바람이 북경 500리 밖의 막북까지 뻗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원고변(綏遠固邊)의 피서산장

그러나 강희와 옹정·건륭의 내밀한 포부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궁전에다 레저·종교까지 아우르기 힘든 주제를 한 울타리에 모았다. 거기다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을 단결하는, 북녘의 몽골민족과 유목민족의 남하를 막는 벨트도 있다. 멀리 티베트와 몽골에서 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라마교의 교세를 아예 중원으로 유치해 대립과 갈등을 무마한 것이다. 국방의 기능도 그렇다. 비록 열하의 어디에도 요새를 두지 않았지만 강희는 열하의 축조에 앞서 1685년 열하의 북쪽 150km쯤에 광활한 목란위장(木蘭圍場) 땅을 사냥과 사격의 연병장으로 닦았다.

그렇다면 ‘피서산장’을 내건 약 170만 평 뜨락에는 강희와 건륭이 각각 선정한 36경(景)이 산재해 있는데 그것들은 변방 민족의 견제와 변방 군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피서산장의 숨은 목적은 바로 ‘수원고변(綏遠固邊)’, 곧 먼 곳을 회유하고 변방을 안정시키는 행정이었다. 정치·국방말고도 건륭 때 편찬한 3457종의 ‘사고전서(四庫全書)’가 피서산장의 문진각(文津閣)에서 완성돼 그곳에 수장됐다.

연암은 그걸 간파했다. ‘막북행정록’ 도입 부분에서 그는 ‘열하가 몽골의 목구멍을 막고, 천자가 북녘 오랑캐의 남하를 막는 요새’라고 했다. 어쩌면 연암이 열하에 발을 디디던 1780년 전후가 열하의 정치적 시운의 전성기였을지 모른다. 건륭이 매년 열하에서 4~5개월을 보낼 정도이니 열하는 명실상부 제2의 수도였다.

그러나 열하의 지기(地氣) 또한 100년을 넘지 못했다. 그 역사(1703~2007)의 성쇠가 역력했다. 최초 18세기가 청나라의 중심과 번영을 열하로 연신하면서 강·옹·건(康·雍·乾)제의 피서적 태평성대였다면, 두 번째 19세기는 외국의 침략과 유린말고도 걷잡을 수 없는 내우에 휘말린 혼돈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20세기에는 북벌·항일·국공합작 등의 전쟁으로 쇠락한 열하를 신중국 건설과 개혁 개방의 재건으로 부활시켰다.

필자는 내친김에 열하의 정치적인 지위와 300년 열하 역사의 평가를 섭렵해 봤다. 연암은 그때 오늘날만큼 내다볼 수 없었으리라. 연암에게 열하는 의식의 초점이었다. 70일 여정에 피로가 누적됐고, 만일 열하를 갔다가 거기서 곧장 귀국하면 연경이나 변경 구경을 놓치게 될 판이었다. 거기에다 경축 사절의 제한으로 마두를 모두 없애고 견마잡이만 대동키로 한 결정도 못마땅했다. 그러니 장복이는 떨구고 창대만 데리고 갈 수밖에.

그러나 연암은 열하에 큰 호기심을 느꼈다. 그의 말대로 앞서 방문한 조선 사람들이 열하를 보지 못한 터라 새로운 견문으로 우쭐할 수 있으리라는 약간의 치기도 있었다. 그래서 연암은 열하가 가고 싶기도 가기 싫기도 한 경외(敬畏)의 대상이었다.

장복이와의 이별

연암이 열하에 경외를 느낄수록 장복이와의 생이별은 연암에게 비극으로 다가왔다. 사람과 말이 모두 시들시들 병색이 짙어가면서 가려운 살을 긁으면 굶주린 이들이 더덕더덕 떨어지는 고난에 겹친 이별은 연암을 옥죄었다. 과연 8월5일자 일기에 토로한 이별론은 천하의 명문으로 떠오를 만큼 감동적이었다.

서관을 나선 일행이 첨운패루와 지안문을 지나 다시 북경의 동북쪽 동직문에 다다랐을 때, 장복은 말등자를 잡고 흐느끼다가 다시 창대와 울며불며 이별했다. 그리고 문 열자 산을 보듯 이별론의 정곡을 찔렀다. 요컨대 사람이 살면서 가장 괴로운 것은 이별인데 이별 중에도 생별이 사별보다 슬픈 거라 했다. 하나는 살고 하나가 죽는 것은 순리의 이별이며, 순리를 따르는 것은 괴로움이 아니라는 논리를 상기시켰다.

슬픔에 절절한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몫이라 했다. 곧 산 사람의 느낌에 따라 슬픔은 더할 수도 덜할 수도 있다는 환경론을 제기했다. 이별 장소로 어슴푸레 안개 속에 다리도 나무도 늙어버린 물가, 멀리서 물새가 부침하고 가까이서 단 두 사람이 보내고 떠나는 하량(河梁), 거기 물살이 돌을 끌어안고 흐느끼듯 우는 곳이 제격이라 했다. 그리고 중국문학사상 감동의 이별시인 소무(蕭武)의 ‘별이릉(別李陵)’을 비롯해 강엄(江淹)의 ‘별부(別賦)’, 장자의 ‘남화경’에 나오는 시남료(市南僚)의 이별사, 유우석(劉禹錫)이 상수(湘水)에서 유종원(柳宗元)을 애도하던 시를 예로 들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이별가로 대악부의 한 가락인 ‘배따라기곡’을 들면서 그 또한 중국에 들어가는 뱃길, 곧 물가임을 상기시켰다. ‘닻 올려라! 배 떠난다 이제 가면 언제 오리’라고.

그러나 연암은 지금 하필 하량이나 물가여서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반전할 수밖에 없었다. 장복이와 부자·군신·붕우의 관계가 아님에도 이토록 절절해서 말이다. 그러한 예를 또 하나 들었다. 연암은 비록 ‘내가 이나 벼룩 같은 신민(臣民)’일지라도 100년 전 심양으로 잡혀온 소현세자를 위해 당시 우리나라 신료들이 심양이란 타국타향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행색이나 정경을 이렇게 그렸다.

‘저 요동 벌은 끝이 없고 심양의 버들은 아득히 우거졌는데, 사람은 팥알처럼 아물거리고 말은 겨자씨만큼 작아질 때 시력은 다하고 땅 끝과 물시울이 맞닿았거늘….’

연암이 ‘야출고북구기’를 썼던 고북구. 만리장성이 이 마을을 지난다.

이렇게 이별의 환경으로 하필 물가냐고 했다. 굳이 어슴푸레한 안개 속이나 돌을 끌어안고 흐느끼는 물살만이 이별의 마당일 수 없노라고 했다. 이것은 이별의 환경론에서 이별의 본질론으로 선회한 것이다. 남의 땅에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모든 이별은 통곡의 원인임을 밝혔다. 이별의 시공간이 화창한 봄날, 현란한 동량일지라도 가슴을 칠 수밖에. 심지어 ‘돌부처라도 뒤를 돌아볼지요. 쇠로 만든 창자일지라도 녹고 말 터니, 이때야말로 우리나라에 정사(情死)하기에 제일 알맞은 때’라고 했다.

이별론의 결론은 생별이 사별보다 슬프다는 것을 전제했고, 생별은 환경에 따라 그 강도가 달라지나 타향에서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이별이라면 그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애끓는다고 했다. 곧 모든 것이 이별의 땅일 수 있다는 주관적 비극론으로 매듭지었다.

연암의 이별론은 이렇게 주관적이고 상투적이지만, 이별의 통절은 누구와의 이별이냐에 달려 있다. 연암은 비록 장복이나 창대와의 관계를 부자·군신·붕우의 그것이 아니라 했지만, 그들은 신분상 주종관계를 뛰어넘은 인간관계임이 확실했다. 오죽해야 장복이와 연암의 생별을 ‘오동제일정사(吾東第一情死)’에 견주었을까.

하룻밤 아홉 번 강을 건너며

‘열하일기’는 그 고난의 대목마다 주머니에 감춰둔 사진처럼 창대나 장복이를 꺼내본다. 그것은 6월24일 연암 일행이 의주를 떠나 도강하기 직전, 문루의 기둥에 연암의 마부 창대와 하인 장복이의 무사 발섭을 빌기 위해 술을 뿌리면서부터다. 7월7일 연산관을 지나 도강할 때는 세 사람의 목숨은 모두 작은 말 등에 꽁꽁 묶여 있었다. 창대는 말 머리를 껴안고 장복은 뒤에서 연암의 궁둥이를 바짝 부축하면서 세찬 물결을 갈랐으니 누구 하나라도 삐끗하면 몽땅 낙화유수될 뻔한 공동운명체였다.

‘막북행정’에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북경에서 장복이와 헤어진 지 하루 만에 창대가 백하를 건너다 말굽에 밟혔는데 그만 말편자가 살을 뚫고 박힌 것이다. 아프고 쓰려 오도가도 못하는 창대에게 연암은 기어서라도 따라오라해놓고 친히 고삐를 잡고 앞을 나섰으니 그 마음이야 어찌 헤아리랴! 창대는 그 뒤로 포기하지 않은 채 돈을 주고 나귀를 세내거나 부사의 가마에 매달리면서 필사적으로 따라왔다.

나흘이나 밤낮없이 고행타가 마침내 창대를 만났지만 창대는 주림과 추위를 이기지 못한 채 마치 학질에 걸린 듯 헛소릴 해댔다. 연암은 창대에게 말을 내주고 흰 담요를 꺼내 창대를 싸고 띠로 묶을 뿐 아니라 수역의 마부더러 창대를 부축케 하고 연암과 수역은 걸어서 깊은 밤을 터덕거렸다. 연암의 피는 그만치 뜨거웠다.

연암의 이별론은 연암이 북경에서 사무치게 피력했던 ‘유정유일’론이나 ‘천하지기’론의 반응이요 연속이었다. 청나라의 정양문과 자금성이 절대적으로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깃발을 높일수록, 조선의 선비는 절대적인 고독과 소외를 한 아름 안았다. 바로 그때 연암은 뜻밖의 열하행을 결정했고 거기에 따른 생별의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한 타래의 실이다. 얽혔다가 풀리고, 풀렸다가 사리는 어려움이 있다. 그 어려움이 마침내 열하행은 물론 ‘열하일기’의 정점을 만든다. 그것들은 모두 8월7일에 쏟아졌다. 연암 산문중에도 백미로 꼽히는 ‘밤중에 고북구를 빠지며(夜出古北口記)’와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一夜九渡河記)’가 그것이다. 필자는 여기에 ‘우리나라 말 모는 사람의 여덟 가지 위기’란 뜻의 ‘아동어마지팔위설(我東御馬之八危說)’을 보태고 싶다.

8월7일 연암은 아침에 목가곡(穆家谷:현재 지명은 목가욕(穆家·#54014;). 谷과 ·#54014;은 같은 뜻으로 쓰이나 연암의 오기인지 현재의 변용인지 분명치 않음. 다만 중국에선 ·#54014;자를 지명에 쓰는 예가 많음)을 떠난 뒤 광형하(廣?河)·석갑성(石匣城)을 지나 밤중에 고북구를 빠져나왔고, 다시 고북구를 지나 심야에 물을 만났다. 그것은 장성의 새북에서 물길을 얻어 유하(楡河)와 조하(潮河), 그리고 황화진천(黃花鎭川) 등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밀운(密雲)성에서 백하(白河)로 굵어진 흐름이었다.

여러 갈래가 아우른 데다 큰물이 진 뒤 돌에는 이끼가 끼고, 물살같아 화살로 그것들을 거슬러 오르면 빙빙 현기증이 났다. 이를 두고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며(一夜九渡)’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한 강을 아홉 번 건너며(一河九渡)’와 같았다. 강이 아홉 갈래가 아니라 강을 아홉 번 건넌 고난을 말한다. 여기서 ‘아홉구(九)’는 숫자의 의미보다 ‘많다’나 ‘지극하다’의 상징어다.

고북구 장성에 새기다

벽하에서 정사는 돈 500닢으로 현지인을 고용해 물길을 안내받았다. 하지만 말을 몰거나 견마잡이의 말을 타고 험한 물을 건너는 일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그 위기를 겪으며 말 몰기의 어려움을 일기에 토로했다.

그 첫 편인 ‘밤중에 고북구를 빠지며’는 연암이 8월7일 목가곡을 출발, 광형하와 석갑성을 경유해 일로북진, 삼경에서 마침내 고북구에 도착해 시전과 장성을 답사한 감격을 기록한 산문이다. 연암은 장성을 만나면 온몸에 전류를 느끼는 모양이다. 관문(關門)을 들고 나가는 길목에서 사람은 길흉을, 민족은 피아를, 역사는 개폐(開閉)를 기록했다.

 

밀운시를 관통하는 백하 하류.

연암이 산해관에서 처음 장성을 만났을 때 한 나라의 존망을 사무치게 목도했다. 그때 북경과 열하·관내와 새북을 가르는 고북구 장성에서 연암의 세포 알알이 곤두선 것이다. 관문을 나와 말을 장성 아래 세우고는 여남은 길이의 높은 장성이 전지의 백지로 보인 것이다. 패도(佩刀)를 뽑아 벽돌 위의 이끼를 긁고 붓과 벼루를 꺼냈다. 물이 없었다. 밤샘 때 마시려 아껴둔 술 몇 잔을 안장에서 꺼냈다. 이슬로 붓을 풀고 별빛에 붓을 들었다. 벼락이 치듯 붓이 요동쳤다.

‘건륭45년(1780) 경자 8월7일 밤 삼경, 조선의 박지원 이곳을 지나다(乾隆四十五年庚子八月七日三更朝鮮朴趾源過此)’

모두 21자를 갈겼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한낱 서생으로 머리가 세어서 장성 밖을 나서노라’고. 그때 초승달이 지고 시냇물이 요란했다. 우리네 산 사나이들이 북한산 백운대에 제 이름 세 글자 남기느라 징으로 낑낑거리며 화강암에 구멍을 판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연암은 못내 아쉬웠다. 별빛에 돌덩이 어찌 탁자 위의 백지 같으랴만 붓은 가늘고 먹은 메말라 서까래처럼 획을 굵게 쓸 수 없던 것을. 그리고 고북구 장성에다 이름 석 자 갈겨놓고 별빛 아래 기함을 토한 것을 스스로 대견스레 생각했다. 연암이 고난 속에 찾는 곳은 장안이나 낙양과 다름없는 천자의 도읍지 열하라는 것, 또 우리나라 선비로 장성 밖 막북까지 가본 사람은 아직 없었다는 것보다 더한 자랑이 있었다. 어릴 적 간이 작았던 겁쟁이 연암이 한밤중에 혼자 장성 밑에 우뚝, 아무런 두려움 없이 도깨비 같은 절벽과 짐승 같은 바위가 수두룩한 음산한 골짜기 속에 태연하게 서 있다는 사실이다.

말 몰기에 빗댄 인간사

둘째 편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는 백하를 건널 때 들리는 물소리의 묘사와 마부가 말발굽에 밟혀 뒷수레에 실려 오자 연암이 손수 고삐를 잡고 물에 들어간 체험을 기록한 산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객관적인 기록도 기록이거니와 주관적인 의식의 작용을 천착한 것이 글의 심도와 밀도를 더했다.

‘나는 고삐를 늦추고 백하에 맡겼다. 무릎을 구부려 발을 안장 위에 모았다. 까딱하면 강물이라, 물로 땅 삼고 물로 옷 삼고 물로 몸과 마음 삼았다. 마음은 벌써 물속에 빠진지라 귓속에는 물소리가 없었다. 무릇 아홉 번이나 물을 건너도 마음은 탈 없이 마치 의자나 돗자리에 앉고 누운 듯 아무렇지 않았다.’

이에 앞서 연암은 물소리는 듣기에 따라 퉁소 소리, 산이 찢어지고 절벽이 무너지는 소리, 벼락이나 천둥소리, 찬물이 끓는 소리로 바뀐다며, 마음의 눈을 감은 자는 귀와 눈이 그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요컨대 문을 닫고 문밖의 소리를 들으며 사물에 비교하는 것은 곧 가슴속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 때 그 생각이 소리로 들린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 유학계 큰 스승 소강절(邵康節)의 ‘사람을 본위로 삼고, 마음을 본체로 삼는(以人爲本位, 以心爲本體)’ 심학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리고 연암은 심재(心齋)에 다스리지 않고 다만 귀와 눈에 신경을 쓰는 자를 작은 총명이나 부리는 처세술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연암은 심재만을 절대 신봉하지 않았다. 넘실대는 물속, 그것도 코앞을 분간할 수 없는 삼경의 어둠을 말 타고 건너는 것은 소경의 도강이라 했다. 소경의 눈에 위기가 보이지 않으면 위기를 모른다는 현실 의식이다. 그날 일기 한 대목은 현실적인 연암의 절대 의지였다.

‘내가 이 밤, 이 강을 건넘은 천하의 모험이다. 그러나 나는 말을 믿고, 말은 제 말굽을 믿고, 말굽은 땅을 믿는다.’(余今夜渡北河, 天下之至危也. 然而我則信馬, 馬則信蹄, 蹄則信地.)

셋째 편 ‘우리나라 말 모는 사람들의 여덟 가지 위기’는 독립된 산문이 아니다. 그날 밤, 백하를 건널 때 모처럼 자기가 말을 몬지라 말 몰기의 어려움과 우리나라 말 몰기의 구조적인 모순을 털어놓은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가 입은 옷의 소맷부리가 너무 넓은 데다 안에 입은 적삼이 길게 늘어져 고삐를 잡고 채찍질을 하기에 거추장스러워 뿔다귀가 난 것이다. 그래서 단숨에 여덟 가지를 쪼아낸 것이다.

첫째, 마부의 복장이 거추장스러워 말 몰기에 불편하다. 둘째, 부득이 사람을 고용해 고삐를 잡혔지만 마부가 말의 한쪽 눈을 가림으로써 시야를 좁힌다. 셋째, 마부와 말이 서로 안전한 곳을 디디려는 갈등으로 말이 끝내 마부에게 노기를 품는다. 넷째, 말이 한쪽 눈은 마부에게 가리고, 다른 한쪽 눈은 주인의 눈치를 살피기 바빠 길을 살피는 데 전심할 수 없다.

다섯째, 안장과 마구들이 무겁고 끈과 띠가 많이 얽힌 데다 잔등과 아가리에 각각 사람을 태웠기에 두 마리 몫의 무게를 견디기 어렵다. 여섯째, 말 또한 사람처럼 오른쪽이 힘쓰기에 나음에도 오른쪽 아귀를 자갈로 잡아 눌러 목을 꺾고 옆걸음하지만 이는 말의 본성이 아니다. 일곱째, 말이 채찍에 맞는 부위가 오른쪽 허벅지에 집중되기에 지나친 통증으로 쓰러질 가능성이 높다. 여덟째, 문무를 불문코 벼슬이 높으면 다시 좌견(左牽)을 잡히는데 우견도 안전치 않거늘. 하물며 무관이 긴 고삐를 늘여 위의를 갖출 줄이야! 이는 제 손으로 올가미를 차는 격이다.

 

이렇게 여덟 가지 병폐를 들었는데 역시 넓은 소맷부리와 긴 적삼의 복장을 적극 경고했다. 그러한 차림, 그러한 어마법으로는 비록 말을 잘 부리는 백락(伯樂)이나 말을 잘 타는 조보(造父)의 도움으로 천하의 명마 팔준마(八駿馬)를 몰지라도 필경 승자도 마부도 말도 모두 죽고 말 것이라고 했다.

연암의 이 담론은 필자가 보기에 다만 어마의 법을 깨우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말의 승자-주인과 말을 모는 사람- 마부 그리고 말, 그 셋 사이, 곧 주(主)·복(僕)·말, 나아가서 군(君)·신(臣)·민(民) 간의 구족적·신분적 관계를 넌지시 갈파하는 실학적·인도적·민주적 시각의 정치 산문으로 보고 싶다. 특히 마부와 말, 곧 신과 민 사이의 갈등과 모순을 매우 절묘하게 묘사했다. 마부와 말이 길에 나섰을 때, 마부는 늘 편한 땅을 딛고 말은 늘 울퉁불퉁한 길로 몰아세우고, 말이 피하는 곳에 사람은 말을 밀어 넣고, 말이 딛고픈 땅은 사람도 좋아했다. 그래서 둘은 미워하면서 나란히 달리는 사이였다.

‘일야구도하기’의 현장, 백하

필자는 2004년 12월과 2007년 5월, 그리고 2007년 8월에 걸쳐 ‘막북행정’을 답사했다. 연암이 북경에서 순의(順義)·회유(懷柔)·밀운(密雲)을 거쳐 고북구에 이르는 1780년 8월5일부터 7일까지 사흘 동안 기록한 현장이었다. 그중 필자의 관심을 끈 곳은 ‘야출고북구기’와 ‘일야구도하기’ 등 명편의 현장이었다.

‘일야구도하기’의 ‘하’는 백하로 보인다. 당시의 백하·조하·황화진천 외에도 탕하(湯河)·흑하(黑河) 등이 모두 모여 밀운댐, 아니 파란 물 넘실거리는 호수로 변해 있었다. 그 댐에서 방출된 물은 다시 백하란 이름으로 밀운시를 뚫고 지나갔다. 그런데 ‘열하일기’의 기록을 따라 ‘일야구도하기’의 현장을 찾는다면 확실치 않다. 8월7일 일기대로라면 밤에 고북구를 빠져나온 뒤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조하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일야구도하기’의 산문대로라면 그 현장은 백하임에 틀림없다. 또 한 가지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밀운댐 남쪽에 위치한 회유댐 그 서쪽에 ‘구도하진(九渡河鎭)’이라는 지명이 발견됐다.

 

허세욱
1934년 전북 임실 출생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졸업, 대만 사범대 대학원 석·박사(중국문학)
1961년 중국시단 데뷔
한국외대 중어과 교수, 고려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정년
現 한국외대 대학원 초빙교수

고북구는 북경 시계(市界) 안에서 장성이 누워 있는 곳. 연암은 이곳의 시전 거리가 번화하다고 했다. 밤과 대추의 산지라는 것 외에 고북구 사람들, 특히 나이 지긋한 여인의 목엔 대부분 혹이 달렸더라는 스냅을 남겼다. 골짜기의 물이 급류라서 그 물을 오래 마시면 혹이 생긴다는 설법이 있다고 했다.

필자는 고북구에서 하루를 잤다. 어디쯤인지 몰라도 연암이 패도로 바위의 이끼를 벗기고 붓을 갈기던 곳을 찾고 싶고, 혹 있는 여인네가 지금도 많은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혹은 볼 수 없었다. 여관집 주인에게 스치듯 물었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혹은 없지만 고북구 사람들에겐 사마귀가 많다고.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성에 올라보았다. 모두 정연하게 보수돼 있었다. 별빛이 빛나는 삼경이라야 그런 벽돌이 보일지 몰랐다.

   (끝)

 

 

[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8]

 

“달 밝은 밤에 함께할 사람 없어라”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3000리 열하행의 종반 레이스다. 고북구에서 반간방을 거쳐 마침내 건륭의 고희연이 열리는 열하에 닿았다. 이곳에서 엿새 머무는 동안 연암은 청나라 사람들과 두 나라의 역사와 예속을 논하고, ‘태학유관록(太學留튽錄)’을 남겼다. 청나라의 거만함과 무례함에 사절단 일행이 진땀을 빼는 와중에도 연암은 두루 여행할 기회를 엿보고, 달밤의 정취에 빠져들었으니 기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지난 여름, 세 번째로 이 여정을 답사했다.

 

 
 

허세욱 교수가 뒤쫓는 연암의 연행도.

1780년 8월8일, 여기 고북구(古北口)를 벗어난 반간방(半間房)에서 종점 열하까지는 마지막 한 구간이 남았다. 연암 일행은 73일간의 물불 가리지 않은 고행에 지칠 대로 지쳤다. 두 손 두 발 다 들고 고꾸라지기 직전이었다. 특히 하인들은 북경에서 여기까지 무려 나흘간 눈 한 번 붙이지 못하고 가다가 멈추면 선 채로 꾸벅꾸벅 졸면서 여기까지 왔다.

내일이면 조선은 물론 아시아, 나아가서 세계의 관심을 모은 청나라 건륭황제의 이궁(離宮)에 도착한다. 멀리 조선 반도의 한양으로부터 바리바리 싸 온 공품을 올리면서, 우리 정사·부사·서장관 3사가 꾸벅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3배9고두(三拜九叩頭), 그 진하(進賀)의 예식을 준비해야 한다. 그 절을 위해 300명의 수행이 장마를 뚫고 일망무제의 들판을 건너왔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육체만 소진하는 싸움이 아니라 조선의 국력과 자존심을 쏟으면서 의식과 사상 그 모두를 투여하는 싸움이었다. 크게는 조선과 청, 두 나라의 정치·경제·풍속·문화·군사·제도 등의 두드러진 차이로부터, 작게는 현실 외교와 전통 외교, 성리학과 실학, 화이론(華夷論)적 명분론과 유정유일(唯精唯一)의 실세론, 훈척(勳戚)파와 서민파, 권위주의와 실용주의, 고문(古文)정통과 문체자유, 신분주의와 인간주의의 크고 작은 모순과 갈등을 연암은 도강(渡江)한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44일 동안 아프도록 삭여온 것이다. 말하자면 신체적 피로 외에도 겹겹의 스트레스와 갈등을 떠안았던 것이다.

연암은 그날 일기에 “눈시울이 구름장처럼 무겁고 하품이 조수 밀리듯 한다”고 했다. 안장에 기대니 포근한 잠이 엉겼고 아롱아롱 꿈속에 둥둥 흔들리면서 취중의 세계, 몽중의 세계를 즐기고 있었다. 얼마나 환상인가. 연암은 그 경지를 종교나 철학에 견주었다. 도가(道家)로는 내관(內觀), 곧 자기의식을 의도적으로 성찰하는 수행에 견주었고, 불가(佛家)로는 팔십일난이나 사백사병(四百四病) 등 중생이 도를 터득하기 위한 온갖 장애와 질병의 극복에 비유했다. 연암이 이러한 고난의 연속, 그 수렁을 차라리 장주(莊周)도 호접(蝴蝶)도 아닌 꿈나라로 여기면서 즐기는 여유는 초극(超克)적인 정열의 향연이랄 수밖에 없다.

청의 영악한 봉공체제

고행의 끄트머리에서 연암은 깔깔거리며 묘안을 꺼내 보인다. 때마침 길가에 뒹구는 돌을 보고 맹세했다.

“내가 어느 날, 연암으로 돌아가면 꼭 천일 하고도 하루를 더 자리라. 그래서 송나라 때 은사였던 희이(希夷) 선생보다 하루를 더 잘 것이며, 자다가 천둥처럼 코를 골아서 음식을 들던 영웅들이 그 젓가락을 떨어뜨리게 하리라.”

기상천외한 발상이다.

연암은 ‘막북행정록’을 마무리하는 노상에서 뜻밖에 반가운 사람을 만나고, 뜻밖에 아니꼬운 장면과도 맞닥뜨렸다. 이틀 전 깊은 밤,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건넜던 백하에서 자기가 모는 말 발굽에 밟혀 뒤처지며 통곡하던 창대를, 천하 만방의 조공이 모여들어 수레바퀴가 마치 비바람 치듯 쏴쏴 쿵쿵거리는 어도(御道)에서 만난 것이다. 하나는 이가 빠질 만큼 반가운 상봉이요, 또 하나는 눈이 비뚤어질 만큼 뒤틀리는 일이었다. 보라! 누구는 나흘 동안 뜬눈으로 죽자 살자 험한 강을 건너는데, 누구는 말, 낙타, 노새들을 총동원해 길을 꽉 메운 채 가고 있었다.

그 시절 청나라의 ‘종번(宗藩)관계’와 ‘봉공체제(封貢體制)’는 갈수록 영악스러웠다. 이웃 나라에 군신관계를 강요하면서 책봉을 비롯해 연호와 인장 등을 관장했다. 청나라의 주요한 경절은 물론 철따라 조공의 빈도를 늘려 딴에는 인방(隣邦·이웃 나라)과의 우의를 돈독히 한다는 미명을 붙였다. 저들의 궁궐이 북경에 있어 누런 기와의 물결을 구름처럼 일으키고 있음에도 새북 땅 먼 먼 700리 밖에 행궁을 떡 벌어지게 지어놓고도 그 궁궐 이름을 굳이 ‘피서산장’이라 붙여 내숭을 떠는 까닭, 더구나 황제가 그 피서산장에서 고희연을 베푼다며 온 천하 사절들을 불러들이는 까닭은 정말 알고도 모를 일이다.

8월9일 사시(巳時)에 마침내 열하에 도착했다. 쌍탑산과 봉추산을 먼발치서 보았다. 황실은 조선 경축사절을 태학(太學)에 배치했다. 겹처마에 누런 기와를 얹은 대성전(大成殿)과 대성문(大成門), 대성전의 우측 담 밖에 명륜당(明倫堂), 당 앞에는 행낭이 늘어서 있었다. 오른편에는 진덕재(進德齋)와 수업(修業)재, 왼편에는 일수(日修)재와 시습(時習)재가 들어섰다. 다시 명륜당 뒤로 벽돌의 대청이 있고, 그 좌우에 작은 재실이 있어, 우재에 정사, 좌재에 부사, 별재에 서장관을 들게 했다.

 

조선과 청의 역사·문물 비교

 

고북구 열하로 가는 중간지점에 새로 중수한 만리장성이 지나고 있다. 금산령(金山嶺)이라 한다.

여기서부터 ‘열하일기’ 제6장에 해당하는 ‘태학유관록(太學留·#53949;錄)’에 접어든다. ‘태학유관록’은 문자 그대로 태학관에 유숙하는 엿새 동안(8월9~14일)의 일기다. 다만 8월9일자 일기 중 오전 9시 이전의 것은 ‘막북행정록’ 편에, 오전 9시 이후의 것은 ‘태학유관록’편에 씌었다.

태학관 생활은 연암보다 먼저 유숙한 사람들과의 격의 없는 토론으로 시작됐다. 대리(大理)에서 온 통봉대부 윤가전(尹嘉銓)을 비롯해 조선에서 온 귀주(貴州) 안찰사 기풍액(奇豊額)과 왕거인(王擧人) 민호(民?) 등이 연암과 대담을 나눴다. 토론의 주제는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았다. 천문, 건축, 목축, 종교, 음악, 문학을 넘나들었다. 그중 17세기부터 조선에 일기 시작한 지전설 같은 천문학이나 황교(黃敎) 같은 새로운 종교 파문이 주의를 끌었다. 조선과 청나라의 역사나 문물 비교는 비록 단편적이긴 해도 두 나라 문화사 정리나 역사관 정립에 시사한 바가 적지 않다.

특히 연암은 상고사로부터 현대사까지 그 대강을 요약했다. 먼저 우리 고대사를 거론하면서 기자조선이 주나라 무왕(武王)의 봉강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만조선은 당시 진(秦)나라가 연(燕)족을 거느리고 조선에서 편거(偏據), 곧 일부 점거한 것이라고 했다. 그 국토 또한 요동땅을 포함 5000리에 뻗었던 것이 중고(中古)시대에 들면서 5000리 미만으로 줄었다가 고려 이후 연암 당시까지 3000리를 지켰노라고 했다.

그리고 연암은 당시 조선이 유교를 숭상하고 송나라의 문화와 예속을 따르는 ‘소중화(小中華)’임을 자인했으나 중국 역사에 기록된 조선의 문물이나 예술은 오늘의 조선이 아니고 기자·위만 때의 그것을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중국의 편견을 지적했다.

연암은 종착지인 열하에서도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갈등과 모순에 줄곧 시달렸다. 태학에 들어온 날, 군기(軍機·청나라 황제의 고문부)의 장경(章京·공문 수발을 관장하는 관원)이 와서 황제의 조서를 전달했다. 다름 아닌 건륭 고희연 자리에 참석할 조선 정사의 반열, 그러니까 외교 의전상 위치를 지정한 것이었다. ‘우반 이품말(右班 二品末).’ 그러니까 우열의 2품품관 끝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자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건지는 몰라도 청나라의 생색이 남세스러울 정도다. 조선 사절을 우반에 세우는 것은 전에 없던 특전임을 강조하고, 한술 더 떠 그 은총에 황감하다는 말씀을 예부에 올려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면 그 감사의 뜻을 황제께 상주하겠다는 것. 조선 사절이 머뭇거리자 독촉을 빗발치듯했다. 조선 사절은 할 수 없이 예부에 글을 올렸다. 황제의 은총에 감격한다고 말이다.

티베트의 성승은 중국인?

그렇게 뜻에 없는 감사를 올리고 속이 뒤틀린 판에 또 한번 벼락이 떨어졌다. 국책을 흔들 만큼 엄중한 일이었다. 8월10일, 건륭황제의 조찬에 초대받고 조선 정사와 부사가 궐내에 들어가 삼배구고두의 예를 갖추었는데, 그날 밤 군기대신이 정사를 예방해 또 황제의 명령을 전했다. “티베트의 라마 성승(聖僧)을 만나보지 않겠는가?” 하고. 날벼락이었다. 참모들의 불평이 들끓었다. 정사는 어이가 없었다. 청나라에 외교 사절로 와서 청나라 아닌 비방교국(非邦交國)의 지도자를 임의로 방문할 수 없었기에 말이다. 그런데도 군기대신은 “티베트의 성승은 중국인이나 다름없다”며 압박했다.

여기서 연암의 천의무봉한 상상이 또 한번 나래를 폈다. 만일 우리 정사가 라마 성승 만나기를 막무가내로 거절한다면? 청나라의 대(對)사절 조치는? 이 일로 우리 사절을 중국의 저 귀퉁이, 운남이나 귀주로 귀양살이 시킬지도 몰라? 그럼 나도 덩달아 구경 길에 오를지도 모르지! 의리로 보아 혼자 귀국할 순 없잖아? 강남땅은 물론 광동땅 월남땅 서쪽땅까지 밟아보리라고.

연암은 손가락으로 하늘에다 동그라미를 그리며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세상에, 사절단은 난제를 만나 끙끙 앓는데 연암은 철없이 구경할 생각으로 시근덕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튿날, 피서산장에서 황제를 알현한 뒤 라마를 예방하고, 그 답례로 금부처 하나 받는 것으로 날벼락은 마무리됐다.

 

봉건예속에 대한 비판

 

길상법희전. 1780년 반첸이 거처하던 곳.

청나라 선비들과의 대담은 연암에게 새로운 의식과 지식을 안겨주었지만 그만큼 공방도 뜨거웠다. 두 나라 예속에 관한 문제가 특히 그러했다.

이야기의 발단은 이렇다. 후당에서 곡정과 그의 친구 장성을 만나 두 나라의 혼례 얘기를 나누던 중 곡정이 난데없이 조선 자랑을 듣고 싶어 했다. 연암이 주저 않고 ‘사가(四佳)’, 네 가지 장점이 있노라 했다. 첫째는 유교를 숭상함이요, 둘째는 수재가 없음이요, 셋째는 물고기와 소금을 자가 생산함이요, 넷째는 아낙네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함이라 했다. 연암의 어조는 당당했다. 듣는 이들은 모두 “낙국(樂國)”이라고 찬탄했다. 그러면서도 네 번째 ‘여불경이부(女不更二夫)’ 조항에 대하여 의문을 나타냈다. “온 나라가 그런가?” 하면서 법령으로 금지하는지 물었다. 연암은 법령이 따로 없지만 명색이 선비 집안이면 삼종(三從)의 덕을 지키고 산 지 벌써 400년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곡정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불경이부’ 같은 관습의 폐단과 그 비인도성을 들고 나왔다. 그러면서 그보다 더 심한 예를 들었다. 옛날 중국에는 납폐를 하고도 성례를 안 했거나 성례를 하고도 합방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행한 일이 생기면 평생 수절을 했다고. 그것은 약과라고 하면서 친교가 두터운 집안끼리는 뱃속에 든 아이끼리 구두로 혼사를 정했다가 불의의 일로 사내가 죽으면 어린 색시가 독약을 마시거나 목을 매게 하여 한 무덤에 집어넣는 해괴망측한 일을 했다고도 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주검을 따라 바람이 났다 하여 ‘시분(尸奔)’이라 욕질했고, 절개 지키는 화냥질이란 의미의 ‘절음(節淫)’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이들의 봉건 예속에 대한 비판은 열렬했다. 눈 속에서 죽순을 캐고 얼음덩이를 깨 잉어를 잡아다 부모를 공양하는 효도로부터 자신의 가슴을 갈라 염통을 꺼내 어머니 병환을 치유했다는 희생적인 효도, 어린 임금을 등에 업고 바다를 건너다 빠져 죽거나 외군에 잡혀가 기름에 튀겨 죽임을 당할지언정 끝내 굴복하지 않은 충렬. 이러한 것들이 반인도적인 충·효라고 꼬집었다. 지나친 충·효는 오히려 천도를 문란케 한다고 힐난했다. 혼·상과 충·효에서 인간주의와 실학이 강조되는 건, 조선의 성리학적 예속사회를 흔들어 깨우는 물결이었다. 여기서 연암은 중국이 탈봉건·인간 회복의 의식운동에서 한걸음 앞섰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두액, 구액, 족액

다음 라운드에선 연암이 선공을 취했다. 중국 부녀들의 전족을 물고 늘어졌다. 중국 여인의 활 굽정이 같은 신발과, 바람도 없는데 넘어질 듯 뒤뚱거리는 걸음을 호되게 비꼬았다. 곡정은 솔직했다. 그 역시 전족을 비판했다. 오대(五代) 때부터 전래한 이 악습은 명나라 때 엄금했지만 없어지지 않는다면서. 오랑캐들은 한족 여인네의 전족이 남자들에게 음탕한 생각을 품게 한다거나,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구습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한족이 지닌 민족적인 긍지 때문이라는 등 억측이 난무했다.

이때 곡정은 ‘삼액(三厄)’을 지적했다. 연암의 ‘사가(四佳)’에 상대적이었다. 삼액은 이러했다. 머리카락을 그물 속에 갇히게 하는 망건은 두액(頭厄)이요, 천하의 독초를 태워 가슴과 머리를 자극하면서까지 무례한 몸짓으로 혼탁하게 연기를 뿜어내는 흡연을 구액(口厄)이라 할 것이요, 위에서 말한 대로 한족 여자들이 발을 싸매는 것을 족액(足厄)이라 할 것이다. 머리와 입 그리고 발을 구속하거나 마비시키는 일이다. 이 세 가지는 사고와 호흡, 행동의 자유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곡정의 ‘삼액’은 중국의 병증을 들추어내는 진단인 것이다.

연암은 여기서 장군 멍군했다. 곡정과 ‘사가’니 ‘삼액’이니 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했지만 무언가 굼실거리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내친김에 자신을 포함해 조선 사람의 껍데기를 벗겨 그 속살을 보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슬그머니 에피소드 두 토막을 꺼내었다. 그 하나는, 열하에 도착한 날 통봉대부 윤가전이 우리 정사를 만나러 의관을 갖추고 태학관에 왔을 때다. 윤씨는 명함을 전하면서 그 내의를 밝혔지만 정사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만나기를 꺼렸다. 나이 많은 윤씨가 밖에서 오래 서 있다가 돌아갔는데 연암은 이 기회에 조선 대관들의 오만한 뽐내기를 긁기 시작했다. 연암이 보기에 조선 대관은 중국 사람을 만나면 한족, 만주족 가리지 않고, 싸잡아 되놈 취급했다. 그렇게 멸시하고, 도시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들을 반겨 맞기는커녕 개나 염소 보듯 푸대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벼슬하는 양반들은 턱없이 교만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연암의 자기 비추기다. 8월11일 낮, 거리 구경을 나갔다가 과일가게 건너편 깃발이 펄럭이는 술집에 들어섰다. 그런데 웬걸, 몽골 사람과 회회교 사람 수십 패거리가 각기 민속 복장을 입고 시끌벅적했다. 중국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조선 갓에 수정 갓끈을 늘어뜨린 연암은 그 사납고 거센 분위기에 으스스했지만 찬 술 넉 냥을 주문했다.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잔 두개를 담뱃대로 휙 쓸어버리고 큰 보시기를 가져오라 소리쳤고, 그 보시기에 술을 따라 단번에 쭉 들이켰다. 그러고 일어서자 손님들이 술 석 잔을 따라 놓고 권했다. 연암은 단숨에 꿀꺽 마시고 너부시 절을 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주옥같은 소품, ‘낮술’ ‘달밤’

 

열하 시내 복판에 우뚝 서 있는 강희의 동상.

연암은 그렇게 객기를 부린 것이 용기가 아니라 겁이라고 했다. 당당하게 술집을 빠져나왔지만 머리털이 쭈뼛했노라 고백했다. 호탕한 일면을 보였지만, 연암은 자신을 희화화했다.

8월11일자 일기에서 이 대목 500여 자(한문)를 잘라내면 또 한 편의 명문이 된다. 필자는 ‘낮술’이란 제목을 붙여보았다. 열하에서 객기를 부리며 호탕하게 낯술을 들이켜는 조선의 나그네, 그 허와 실이 보인다. 어쩌면 조선의 얼굴일지 모른다. 건륭황제 대궐의 지척지간에서 컬컬하게 주욱 보시기를 비운 것이다.

필자는 ‘태학유관록’ 일기 가운데 ‘낮 술’과 같은 명문을 또 한 편 떼어낼 수 있었다. 연암이 열하에 도착한 날 밤 일이다. 달빛이 쌓이도록 교교한 밤이었다. 윤가전과 기풍액을 만나자 말문이 열렸다. 첫날부터 중국의 ‘시종(詩綜)’에 실려 있는 조선 시인의 작품을 토론하다 보니 어느덧 초경이었다. 태학에 돌아왔을 땐 일행이 모두 잠들어 있었다. 달빛 아래 낙타 울음이 들리고. 제독과 통관 무리는 탁자를 침상 삼아 깊은 잠에 빠졌는데 우악스레 코를 골기가 천둥소리요, 쏴 물병을 쏟아내는 소리였다. 연암은 그 광경을 이렇게 적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오니 개소리가 표범 소리처럼 장군부에서 들려왔다. 이경을 알리는 조두(?斗) 소리가 마치 소쩍새 울음 같았다. 나는 마당을 아장아장 거닐고 달리기도 하면서 그림자를 희롱했다. 명륜당 뒤뜰의 고목은 침침한데 방울방울 이슬에 아롱아롱 구슬들이 달빛에 반짝거렸다. 담 밖에는 삼경 두점의 조두. 이렇게 좋은 밤, 밝은 달을 함께할 사람 없어라. 이 밤 왜 우리 사람들만 쿨쿨 잠 속에 빠졌는가.”

열하에 왔건만 일행이 모두 고꾸라져, 흥분을 나눌 길이 없다. 이룬 자의 환희와 고독이 엄습해온 것이다. 필자는 시험 삼아 이 400여 자의 글에 ‘달밤’이라고 제목을 붙여보았다. ‘낮술’이 풍자라면 ‘달밤’은 서정이다. 하나가 자기 희화화라면 나머지 하나는 자기 고백이었다. 모두가 주옥같은 소품이다.

위의 두 편은 필자가 마름질한 수필인데 반해 당초 연암이 독립 집필한 것으로 ‘환희기(幻戱記)’가 있다. 8월10일부터 태학관에 머무는 동안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 밑에서 몇 차례 구경한 요술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열하일기’ 총 26편 중 한 편이면서, 그 소재가 요술 한 가지만 세심하게 관찰한 전제(專題) 수필이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요술을 조선 사람에게 알리겠다는 취지로 쓴 르포지만 그 기록과 묘사의 재주는 요술보다 더 오묘스럽다. 빈 손바닥을 비비면서 별의별 것을 만들다가 그것들이 손바닥 속으로 사라지는 요술을 얘기하는가 하면, 시퍼런 칼을 입으로 삼킨 뒤 두꺼비처럼 불룩거리는 배에서 다시 꺼내는데 그 칼끝에 묻은 핏방울에서 무럭무럭 김이 나더라고 했다. 연암이 ‘환희기’ 한 편에 기록한 요술만도 족히 스무 가지가 넘는다.

반간방, 삼간방

필자는 벌써 세 번이나 이 길을 답사했다. 고북구에서 열하까지. 지금은 버스로 두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길을 연암은 꼬박 하루가 더 걸려 갔다. 물론 잠도 자지 않고. 가히 필사의 노정이었다. 이틀 전 밀운에 닿았을 때 청나라 군기대신이 8월9일 아침까지 도착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고북구의 동서로 뻗은 장성 그 북쪽을 뚫고 지나가는 국도 101번을 따라 나서면 당장 조하(潮河)를 만난다. 이 강은 머지않아 밀운(密雲)댐으로 흘러든다. 조하를 건너 한참 북진하면 파커스잉(巴克什營) 톨게이트, 톨게이트를 지나면 반간방(半間房)·삼간방(三間房)이라 하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그리고 삼간방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관광지 안내판이 앞을 가로막는다. 바로 금산령(金山嶺) 장성 입구에 닿는다.

그런데 장성 안내판은 고북구 남방 10km쯤에서도 보였다. 바로 사마대(司馬臺) 장성의 입구인 것이다. 사마대장성이나 금산령장성은 우리가 산해관이나 북경의 팔달령(八達嶺)에서 본 장성과 그 건축 양식이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지방의 수입을 올리기 위해 지역에 따라 보수 공사를 벌인 뒤 관광지로 선포하는 듯했다. 따라서 파커스잉 톨게이트나 금산령·사마대장성 등은 연암이 볼 수 없었던 경물이다.

반간방·삼간방은 작은 두메였다. 연암이 8월9일 새벽, 여기서 밥을 지어먹고 쉬었다. 그때는 겨우 말이나 지났음직한 오솔길이었으리라. 더구나 삼간방은 지금 벽돌집 세 채만 남아 있어, 그 이름을 실감케 한다. 그 건너편에 호두산(虎頭山)이 솟았는데 거기 산꼭대기에도 뾰죽한 바위가 꽂혀 있었다. 그런데 밀운을 벗어나면서 가로질러 달리는 연산산맥 그 물결은 마치 깃대들을 세운 바위 같았다. 연산산맥은 물론 열하의 동서쪽에 자리한 봉추산과 쌍탑산에도 돌올한 바위가 마치 다듬잇방망이나 제주도의 돌하르방 같았다. 그리고 지명이 재미있다. 가옥 구조를 말하듯 반칸·두칸·세칸, 그랬다. 빙긋이 웃음이 났다. 현재 나와 있는 ‘열하일기’ 몇몇 번역판은 ‘반칸 방에서 밥을 지어 먹고 세칸 방에 와서 쉬었다’고 옮겼는데, 실제로 반칸, 세칸은 모두 고유명사다.

다시 삼도량(三道梁)과 왕영자(王營子)를 지나자 난하(?河)를 만났다. 이 강을 건너면 열하다. 저 서북쪽 전두산(轉頭山)에서 발원한 난하는 열하를 스쳐 발해로 흘러간다. 그래서인지 230m 강폭에 수심도 제법인 듯 푸르렀다. 연암은 그때 여기서 최후의 난관을 돌파했다. 조공을 싣고 가는 수레와 말이 구름처럼 모여든 데다 청나라 벼슬아치들이 쌍가마 여러 채를 어깨에 멘 채 배에 실려 가는 위세와 횡포를 목격했다.

 

 

태학관은 없고 부학만 있어

 

명륜당. 연암이 기숙했던 곳. 지붕은 230년 전의 것으로 보인다.

이른 아침 마침내 열하에 도착했다. 연암은 숙소가 태학관이라 했다. 필자는 마치 성지 순례하는 신도처럼 연암이 1주 머물렀던 그 객사를 찾는 데 진력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조급증은 빗나갔다. 현지 안내원에게 태학을 물었지만 모른다고 했다. 2차 답사를 마치고서야 그 이름이 ‘태학’이 아니라 ‘부학(府學)’임을 알았다. 연암이 태학으로 호칭한 ‘부학’은 지방의 학문을 육성하고 지방 서생을 교육하는 기구로 건륭 43년(1778)에 승덕부(承德府)의 문묘(文廟) 옆에 설치됐다. 그 정식 명칭은 승덕부부학이지만 그 역할은 태학과 같았다. 다만 태학은 중앙에 두었을 뿐이다. 연암이 태학으로 호칭한 까닭과 현지 사람이 태학을 모르는 까닭을 그제야 알아챘다.

필자는 8월11일, 세 번째로 열하를 답습하곤 열하 문물국(文物國)의 소장과 함께 부학을 확인했다. 올해 봄까지 승덕 제8중학교가 있던 자리다. 이사를 마친 뒤라 적적한 운동장만 휑뎅그렁했다. 그 문에는 아직도 조벽(照壁)이 낡은 채 서 있고 문묘는 중앙에 위치해 공자를 배향했다. 그 서쪽으로 부학, 동쪽으로 공자 배향 준비 부서인 희생정(犧牲亭)과 신주(神廚), 신고(神庫) 등이 모여 있다. 부학은 맨 위쪽에 명륜당(明倫堂), 명륜당에는 교수서(敎授署)를 두었다. 그리고 당 앞에는 진덕, 일신, 수업, 시습(時習) 등의 재방을 열립했는데, 생원들이 공부하고 교수가 강학하는 곳이다. 재방 좌우에는 재실을 줄줄이 세워 숙소로 쓰게 되어 있었다. 그곳이 바로 조선 사절과 연암이 기숙했던 곳이다.

연암이 열하에 도착한 날 밤, 잠 못 이루고 혼자 배회하고 달리기도 한 곳이 바로 명륜당과 그 앞의 재실이다. 그곳은 대체로 옛모습을 지녔다. 특히 명륜당의 지붕과 뜨락의 고목, 그리고 재실의 기와와 벽돌담은 200년 풍우를 견디고 있었다.

부학에서 나와 피서산장 정문 쪽으로 100m쯤에 광피사표의 패루가 울긋불긋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지금도 승덕에는 패루 세 개가 서 있는데 연암이 ‘환희기’를 썼던 패루는 문묘 쪽 패루가 아닐까 짐작된다.

필자는 연암의 발자취를 따라 230년 전의 그림자를 줍고팠다. 적어도 연암이 기숙했던 곳, 연암이 경축사절을 수행해 건륭으로부터 여지즙을 받아 마신 대궐의 뜨락, 그리고 반첸 라마를 예방했던 수미복수묘(須彌福壽廟) 세 군데에 내 발자욱을 남겨야 했다.

시적(詩的)인 명칭

강희42년(1703)에 기공해 건륭57년(1792)년에 완공한 564만km2의 피서산장은 크게 궁전구역과 비원구역으로 양분된다. 궁전마다 만학송풍(万壑松風)·운산승지(雲山勝地)·청음각(淸音閣)·연파치상(煙波致爽)·담박성경(澹泊誠敬)…, 시적(詩的)이요 종교적인 분위기의 이름이 붙어 있다. 그 건축은 장중하지만 소박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담박했다. 조선 사절이 8월13일, 건륭의 고희를 진하했던 담박성경전은 바로 정문 여정문(麗正門) 정북에 위치한 정전이었다. 정문과 정문에 씌어진 ‘避暑山莊’ ‘澹泊誠敬’은 모두 강희의 어필인데 녹나무 짙은 잎새에 묻힌 이 뜨락에서 매년 만수절 등 큰 행사 때 외빈을 접견했다.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만주족의 황제가 담박이란 중국 전통 도가의 처세명제와 성경이라는 중국 전통 유가의 덕목을 융합해서 이름을 정한 그 통일적인 발상이다.

 

허세욱
1934년 전북 임실 출생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졸업, 대만 사범대 대학원 석·박사(중국문학)
1961년 중국시단 데뷔
한국외대 중어과 교수, 고려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정년
現 한국외대 대학원 초빙교수

수미복수묘는 산장의 북쪽과 동쪽에 건립된 외팔묘의 하나, 이 사원은 건륭이 오직 1780년 자신의 고희연에 참석키 위해 오는 반첸 라마의 숙소로 지은 것이었다. 건륭이 얼마나 반첸과 티베트에 각별했는지 알겠다. 남향의 산자락에 열립한 수미복수묘는 남에서 북으로 오르며 지형에 맞게 지어졌다. 맨 아래에는 반첸이 설법하던 정전, 그 서쪽으로는 반첸의 침궁이던 길상법희전(吉祥法喜殿), 그 위로 반첸 제자들의 숙소로 금하당(金賀堂)이 좌정했다.

227년 전 8월11일, 조선 사절이 건륭의 요청을 뿌리칠 수 없어 억지로 예방했던 이곳을 필자가 방문한 날이 마침 장날이었다. 길상법희전 1층에는 ‘6세라마 반첸의 건륭황제 배알 사료 전람(六世班?朝覲乾隆皇帝展覽)’이 한창이었다. 반첸이 축수 사절로 오간 경로와 그 동기, 준비, 축수 내용 등을 사료와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청과 티베트의 정략적인 관계가 얼마나 중요했던지. 그러나 반첸은 그해 북경 여행 중 11월2일 끝내 입멸했다. 영화의 끝은 고작 한줌 재였다.

   (끝)

신동아 2007년 10-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