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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성(홍성)
안의 조씨 패루
연암은 다시 남하해 영원에 당도했다. 명나라 선덕 3년(1428)에 축성된 영원위성(寧遠衛城)에서
명나라 장수 조대수가 창건한 절 영녕사(永寧寺)를 비롯 청 태종 홍타이치가 영원을 공략하려다 원숭환에게 전패하고 피를 토했다는 구혈대(嘔血臺)
성안에 세워진 조대락(祖大樂)과 조대수의 패루를 둘러보았다. 그중에도 서슬이 퍼렇던 청 태종이 피를 토했다는 길가의 높은 봉우리, 중국 북부와
요동지방에서 장수 집안으로 명성이 높던 조(祖)씨 일가의 기념적인 패루를 눈여겨보았다.
연암은 조씨 일가가 그 공적을 천추에 누리려고 흰 돌이나 오색 돌로만 정교하고 웅장하게 패루를
세웠건만 결국엔 하나같이 청군에 생포되거나 투항함으로써 웃음거리밖에 되지 못했노라고 통탄했다. 조씨 일가의 금석(今昔)을 서술한 7월19일자
일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이날 밤 천둥과 소낙비가 새벽까지 그치지 않았다’고. 얼마나 속이 뒤틀렸을까. 구겨진 영웅에게 침을 뱉고 싶었을
것이다.
그 다음 다음 역참이 산해관이었다. 만리장성의 기점인 산해관에서 연암은 온갖 회포를 풀었다. 단숨에
‘강녀사당기(姜女廟記)’ ‘장수대기(將臺記)’ ‘산해관기(山海關記)’ 세 편의 산문을 남겼다. 앞에서 심심찮게 들먹였던 역사나 전쟁의 화두가 이
세 편 글에 골고루 등장한다.
뒤질세라 오르면 외롭고 위태로울 뿐
‘강녀사당기’는 열녀의 화석담(化石譚)이다. 만리장성을 쌓으러 갔던 남편이 죽자 손수 옷을 짓고,
천리를 걸어 그 유체를 찾다가 울며불며 돌이 됐다는 애절한 이야기다. ‘장수대기’는 산해관 밖 장수대의 험준하고 돌올한 외관을 그림으로써 장수의
위엄을 상징했지만 그 까마득한 층층대에 올라 벌벌 떠는 사람을 보고, 올라갈 때는 남에게 뒤질세라 올라가지만 높은 자리에 서면 외롭고 위태로울
뿐 아니라 물러설 한 치의 자리가 없는 낭떠러지에서 끝내 절망한다며 벼슬아치의 최후를 아프게 경고한다. ‘산해관기’는 점입가경이다. 산해관의
지리적 환경과 구조, 그리고 산해관 마을의 현황을 서술하지만 결론은 이제까지의 화두를 총결하는 섬뜩한 것이다.
‘오호라! 진(秦)나라 몽염이 만리장성을 쌓아 오랑캐를 막으려 했지만 진나라는 그 집안에 진나라를
망친 오랑캐를 길렀고, 서중산(徐中山) 또한 산해관을 쌓아서 오랑캐를 막으려 했지만 오삼계라는 명나라 장수가 관문을 열어 청군을 맞기에 틈이
없었다. 천하가 지금처럼 평온할 적에 한갓 장사치나 나그네들의 힐난거리가 될 줄이야! 난들 산해관을 두고 무얼 말하랴!’
연암은 이처럼 만리의 성곽과 4층의 망루, 그리고 삼첨(三?)누각의 관문이 제아무리 웅장하고 강인해
오랑캐를 막고 오랑캐와 중국의 경계를 삼기에 넉넉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미필적인 방어용이란 담론을 펼친다.
연암은 요서회랑, 그 명·청 격전지를 조선의 필마로 달리면서 고뇌에 잠겼다. 전쟁을 처참하게
묘사하면서 명나라의 패망을 슬퍼했고, 조씨 일가 장수의 지략과 용맹을 물거품 또는 웃음거리로 보았다. 충렬을 추어올리면서 고독한 영웅과
벼슬아치를 희화화했고 심지어 만리장성 같은 성곽의 미필적 방어론도 슬며시 내밀었다. 여기서 실학자이면서도 성리학의 여운을 뿌리치지 못한 연암의
인격, 그리고 청나라의 실체를 인정하면서도 명나라를 섬기는 조선적 정서를 숨기지 못했다.
연암이 탁월한 시인임을 입증하는 것은 그가 청석령 고개에서 요동 벌판을 굽어보며 ‘아, 울 만한
자리로구나! 한바탕 울어보자’ 했던 멍울진 그 한마디로 족하다. 그게 지평선에서의 감격이었다면 수평선에서의 감격은 어땠을까. 그의 미적 체험을
들어보기로 하자.
연암이 7월20일 새벽에 영원을 출발, 지금의 조장(棗莊)으로 가는 중에 그 중간지점인
청돈대(靑墩臺)에서 일출을 보게 됐다. 그는 그날따라 늑장을 부렸다. 그도 그럴 것이 기왕 조선의 동해안 총석정, 옥천, 석문 등지서 일출을
본답시고 안달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나가보아도 해는 필경 운무에 가리곤 했다.
연암은 이색적인 일출론을 갈파했다. 보통 사람들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두둥실 뜨는 해를 최상의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거야말로 가장 무미(無味)한 일출이라 했다. 구리쇠 쟁반만한 붉은 해가 저 밋밋한 바다에서 뛰어나오는 것이 무슨 장관이냐고
반문했다. 해를 비록 임금의 상으로 받들지만 해가 돋기 전이나 돋아서도 많은 구름과 안개가 수천수만의 수레와 말을 탄 군사가 옹위하거나 오색
깃발들이 용틀임하듯 그 태양을 에워싸거나 모여드는 장면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날이 샐 무렵 구름을 뿜고 안개를 토하면서 해가 그 속에
가리는 장면을 차라리 그것들이 서로 원망하거나 수심하는 표정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구름 한 점 없이 구리 쟁반만한 일출은 몰풍정하다는
심미론인데 민중이나 군사, 수레, 말, 깃발 같은 옹대(擁戴) 없는 군주의 정치론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다.
말꾼의 도둑질, 상인의 외화 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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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룡두.
만리장성이 바다로 자맥질한다는 곳이다.
실사구시를 갈구하는 연암은 제 살을 꼬집는 아픔도 서슴지 않았다. 7월18일자와 7월22일자 일기
대부분을 할애하는 장문에 그러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날, 고교보에 들렀을 때 그곳 주민들은 뜻밖에도 조선 사람을 원수 보듯 냉랭했다. 뉘 집을 가도
대문을 꽁꽁 걸어 잠그곤 조선 사람을 상대해주지 않았다. 글쎄 조선 사람이라면 신물이 난다면서 밑도 끝도 없이 돈 천냥에 지방 관리는 물론
조선인이 숙참했던 점방집 주인을 포함 네댓 명이 심문을 당했고 그 길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공금 분실 사건에서 발단한 일이었다. 연암이 여길 들르기 4년 전인
병신년(1776), 조선 영조 부고 사절이 북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여기서 공금 천냥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당시 천냥이면 거금이었다. 별수없이
관가에 분실신고를 했다. 그 신고는 건륭 황제에게까지 전달됐다. 오랜만에 조청(朝淸) 관계가 호전된 때인지라 황제는 당장 지방 국고로 변상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그 책임을 물어 관련자들을 즉결 처형했으니 당시 주민들이 조선 사람을 원수 보듯 한 까닭을 알 법했다.
연암은 황제의 부당한 처사를 탓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의 썩은 살을 까발렸다. 사실을 밝히기 위해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았다. 연암은 의주 말꾼들의 소행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북경을 제집 드나들 듯하면서 심부름을 했다. 그들은 노자가 따로
없었다. 그러자 연도에서 도적질을 했고, 몰골은 귀신을 방불케 망측했다. 역참의 주인들도 온갖 꾀를 부려 도적질을 막았지만 별수없었다. 연암은
몹시 걱정했다. 저들이 창궐하면 국방마저 망가진다고 경고했다.
사건이 또 있었다. 요즘 말로 ‘경제사범’이었다. 동관(東關) 역에서 10km쯤 남하해
중후소(中後所)에서의 일이다. 시가와 민가가 성경 다음갈 만큼 번화했다. 거기엔 조선 사람들이 애용하는 털모자 점포가 세 군데나 있었다. 한
점포가 40~50칸이나 될 만큼 대형 상장이었다. 조선 의주 도매상들이 우글거렸다. 먼저 매점했다가 귀로에 실어갔다. 제품은 단순했다. 양털만
있으면 쉽게 꿰맬 수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 상인들은 은을 쏟아부어 그것들을 구매해서는 겨우 한겨울 쓰고 버리기 일쑤였다. 말하자면 투자에 비해
그 용도가 너무 소비적이었다. 그러니까 조선의 은화, 그 절반이 여기 중후소의 털모자 집에서 녹을 판이라 했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 얘기다.
산에서 캐내는 유한지물(有限之物)을 한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는 땅으로 보내는 것, 곧 은덩이를
남의 나라에 뿌린다는 것은 나라의 큰 우환이라고 야무지게 꼬집었다. 연암은 여기에 덧붙이기를, ‘그렇게 거래를 마친 의주 장사치들은 모자가게
주인에게서 술대접을 거나하게 받았노라’고 했다. 왠지 씁쓸하다.
연암은 여기에 두 가지 씁쓸한 얘기를 남겼다. 하나는 국경을 들락거리는 말꾼들의 도둑질이요, 다른
하나는 털모자 같은 사치성 소비품에 외화를 낭비함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두 사건이 모두 국경도시인 의주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었다. 연암은
걱정으로 애가 탔다. 저들의 장난이 더 심하면, 국방이나 경제마저 금이 갈 것이라고 염려했다.
점술은 모두 허탄한 것
연암의 형안(炯眼)은 도처에서 번쩍였다. 중국인, 중국문화 그 어느 것도 놓치지 않았다. 순간적인
직관임에도 오늘에 미치는 그 내력을 간파했다. 동관 역에 묵을 때 산동(山東) 등주(登州)의 점쟁이를 만나 이러쿵저러쿵 담론을 벌였지만 끝내
태을(太乙)이나 자미(紫微) 같은 점술법이 모두 허탄(허망)한 것이라고 면박함으로써 새삼 조선의 실학자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중국의
으슥한 골목길 어귀엔 ‘성상(星相)’이나 ‘복서(卜筮)’ 같은 간판이나 등롱이 불멸의 인습으로 남아 있다. 하긴 ‘주역’의 후예들이 그 의발을
쉽게 버릴 수 있을까.
연암이 중후소에서 겪은 일이다. 관제묘에 참배객이 많았던 모양이다. 연암의 일행조차 전폐를 드리며
꾸벅꾸벅 절을 했다. 연암의 마부인 창대가 빠질 까닭이 없었다. 참외 한 개를 공양하고 절을 여러 번 올렸다. 그들은 절을 하더니만
추첨(抽籤)해서 길흉을 물었다. 추첨이란 문자 그대로 제비를 뽑는 일인데 추첨은 중국 도처의 사원이나 도관에서 지금도 목격할 수 있는 풍습이다.
중국 절에 가면 본전 앞에 커다란 향로가 있다. 그 향로 언저리에는 촛농이 덕지덕지 엉겨 있고,
가느다란 향이 들쑥날쑥 꽂혀 있게 마련이다. 향로 앞쪽 커다란 나무 상자에 마치 투호의 화살 같은 대쪽이 촘촘하게 서 있다. 그게 바로 첨이다.
그 제비를 뽑으면 복괘의 번호가 적혀 있다. 복권 판매대에서 그 번호와 같은 복사(卜辭)지를 사서 보면 그날의 운수를 점칠 수 있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매캐한 향 냄새 속에서 추첨하고 복사지를 까보던 추억이 필자에게도 있다.
산해관에서 연도의 분묘를 보았는데 특기할 만했다. 무덤에 반드시 담장을 둘렀고 주위에 수백 보씩,
소나무·전나무·버드나무를 줄 세워 심었다. 망주나 문인석말고도 묘문이나 패루, 석교 등을 건축해 자못 화려하고 웅장했다. 왕조의 귀족들임에
틀림없으나 그 규모나 품격이 우리의 장중하고 검소한 묘제와 크게 달랐다. 오늘의 중국 장묘제도는 매장과 봉분을 불허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중국에서 연암이 보았던 것과 같은 분묘를 보기는 어렵다. 다만 동남아 여러 군데 화교들의 호화 분묘 중에 담장과 화초, 수목은 물론 정문,
패루, 심지어 정자까지 지은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마술구경, 중국인 연구
연암의 눈에 든 또 한 가지 이색 풍경이 있다. 역시 산해관에서의 일인데, 여자아이들이 호마를 타고
재주를 부리는 마상재(馬上才)다. 소녀들이 머리에 초립을 쓰고 말 위에서 재주를 넘는데 마치 나비가 훨훨 날고 눈발이 펄펄 휘날리듯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연암은 중국의 한족 여인들이 생계를 위해 동냥 아니면 이런 노릇을 해왔노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중국
사람은 예부터 괴상한 요술, 곧 기상천외한 걸 좋아했다.
연암이 뒷날 열하에 가서 쓴 ‘마술구경(幻戱記)’을 보면 그 유래가 소상하게 나와 있다.
하(夏)나라 때 유루(劉累)란 사람이 큰 용을 길들여 그 나라 제14대 임금인 공갑(孔甲)을 섬겼고, 주나라 목왕 때 언사(偃師)란 사람은
인형을 만들되 살아 있는 형용을 다했고, 또 춘추 때 묵자는 군자임에도 나무로 솔개를 만들어 그걸 하늘에 날렸다는 예를 들었다. 요컨대 인간의
사고나 능력을 뛰어넘는 술법으로 사람을 놀렸고, 제왕까지 호려서 속였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연암은 그 글에 스무 가지 기기괴괴한 마술을 본
대로 기록했다. 그 안에는 마술쟁이가 길가에서 환도를 던져 그걸 손바닥으로 받더니 다시 높이 하늘에 던졌다가 입을 딱 벌리고 그걸 받아 삼켜
마치 성난 두꺼비처럼 배가 불룩거리더라는 이야기도 포함돼 있다.
이런 서커스 또는 마술을 지금 중국에선 ‘마시(馬戱)’ 또는 ‘짜지(雜技)’라고 부른다.
송(宋)나라 맹원로(孟元老)는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 당시 성행하던 마시나 짜지를 기록해놓았다. 지금 중국은 그것들을 민간 예술로 간주하고
장려 지원하고 있다. 필자도 여러 군데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구경한 일이 있다. 수백 길 낭떠러지 사이에 동아줄을 매고 거기서 나비처럼,
다람쥐처럼 훨훨 날거나 벌뚝벌뚝 뛰어가는 장면들을 보면서 손에 흥건한 땀을 쥐었던 기억이 있다.
위에 열거한 것들이 당시 청나라의 습속을 스케치한 것이라면 연암의 7월17일 일기는 중국인에 대한
집중연구라 하겠다. 연암이 집중연구한 중국인은 조선 사절을 호행(護行)하는 통역관 쌍림(雙林)이란 사람이다. 그는 조선수통관의 아들로 호행이란
직책과는 어울리지 않게 태평차라는 수레를 타고 하인을 넷이나 거느리고 다니며 거드름을 피웠다. 조선말을 잘 구사해 조선의 양반을 중국어로
‘이량우쳰(一兩五錢)’, 서자(庶子)를 서(庶)자에 붙은 넉 점을 따서 ‘四점’이라고 곁말을 쓸 정도로 되바라졌다.
쌍림은 내심 연암을 좋아했다. 주련(柱聯)을 청하거나 청심환, 부채 등도 부탁해왔다. 연암은 그런
김에 쌍림을 꼬드겨서 쌍림의 수레에 슬쩍 편승해 편안을 즐기기도 했다. 쌍림은 연암의 하인인 장복이를 멍에채에 앉히고 조선어와 한어(漢語)로
허튼소리를 지껄였다. 조선 의주의 기생을 탐문하기도 했다. 그런데 연암 생각에 장복의 한어가 쌍림의 조선어보다 능란했다. 동시에 한어 배우기가
조선어 배우기보다 쉽다고 내다보았다. 이 점은 연암이 중국어를 민족적인 차원에서 ‘한어’라 하고, 정책적인 차원에서 ‘관화(官話)’라 호칭한
일과 함께 매우 주목할 만하다.
연암의 풍자가 귓전을 치는 듯
‘열하일기’ 저작 연대로부터 시간은 벌써 230년이 흘렀다. 필자가 십삼산을 떠난 지 겨우 20분
만에 훤칠한 대교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대릉교(大凌海橋)임을 직감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연암은 1780년 음력 7월17일 밤을 저 다리 건너서
묵었다. 2km쯤 돼 보이는 대교를 필자는 두 번 건넜다. 한 번은 2006년 11월25일, 추적추적 가을비에 옷을 적시며 혼자 걸었고, 또 한
번은 지난 5월14일 답사팀과 함께 대형 버스로 달렸다.
내몽골 바오궈투에서 발원한 이 강은 발해만 최북단으로 흘러든다. 명·청의 대치가 가장 치열했던
최북방의 강이다. 이 강을 건너면 격전지 능해, 송산, 고교, 행산, 탑산, 흥성이 차례로 널려 있었다. 지금은 연해지역의 경제개발로 흥청거리는
곳이다. 어쩌다가 산등성이에 남아 있는 초소나 봉화대가 400년 전의 한을 증언하고 있다.
새로운 해양 산업도시인 호로도(葫蘆島)시를 오른편에 끼고 계속 달리자 오랜만에 해발 300여 m의
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바로 수산(首山)이다. 이제 전국에서 가장 온전한 명대의 고성 도시인 영원(寧遠·지금의 興盛)이 지척에 박두한
것이다. 수산은 바로 영원의 천연 보호벽이었다.
영원은 성이요 촌락이다. 1428년에 축조한 남북의 길이 826m, 동서 길이 804m, 높이
8.8m, 그래서 성 둘레가 3274m의 성냥갑 같기도 하고, 바둑판 같기도 한 작은 국방 도시요, 행정도시다. 사방에 문이 있고 문밖에는
옹성, 성 안으로 동서남북의 십자로가 반듯하게 뻗은 데다 그 한복판에 종고루(鍾鼓樓)가 좌정해 있다. 동문에서 종고루까지 연휘가(延輝街)에는
1631년 당시 정료사령(征遼司令)인 조대수(祖大壽)의 무공을 기리는 패루, 그리고 1638년 역시 토벌사령인 조대락(祖大樂)을 기리는 패루가
각각 세워져 있었다.
필자는 영원을 그보다 50여 년 전 산서(山西) 평요(平遙)에 건축된 명대 성곽과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평요의 것보다 크고 높을 뿐이었다. 다만 평요의 것이 영원보다 방어적인 데다 상가와 은행가가 즐비한 것이 특색이었다. 필자가 영원성의
동문에 올라 동북 모서리에 있는 적루에서 영원성을 굽어볼 때 마침 발 아래로 올망졸망한 초등학생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을 보면서 여기가 일찍이
누르하치를 격퇴한 380년 전 격전의 땅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거리에 있는 패루에서도 묘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거기 패루에
‘등단준열(登壇駿烈)’ 같은 송덕의 문자는 여전히 새겨져 있건만 연암이 퍼부었던 풍자와 홍소가 귓전을 치는 듯했다.
성곽에 화살 하나 꽂지 않아도
연암이 일출론을 제기한 청돈대는 지금의 흥성에서 조장으로 가는 그 중간점이었다. 바로 건너편에
국도(菊島)가 커다란 박처럼 둥둥 떠 있었다. 차라리 그 섬이 아름다웠다. 물론 일출의 때가 아니라서 그러한 흥분을 체험할 수 없었지만 그
자리서 일출을 본다 해도 연암의 붓끝에 묘사된 운무 속의 일출만큼 아름다울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신수필’에서 마지막 정거장은 산해관이었다. 산해관은 융하(戎夏)의 경계였다. 바로 오랑캐와
중원의 경계다. 중국인의 마지막 방어선이요 자존심이었다. 태항산이 북으로 달려 그 기운이 의무려산, 송령흑산으로 나뉘는데, 송령흑산이 끝나고
다시 연산(燕山) 산맥이 일어나는 접경으로부터 머리를 치켜든 인공의 만리장성, 그 기점이 산해관이다. 연암은 1381년 기공한 산해관이 역사의
풍운을 400년이나 겪은 뒤에야 비로소 발을 디뎠다.
연암은 또 그 불행한 기억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산해관에서 또 한 차례 입국심사를 받았다.
문무관을 따로 세우고 세관과 입국관리 관원들이 관문 양쪽에서 명단대로 사람의 인적 사항과 소지품을 일일이 점검했다. 맨 처음은 책문에서, 두
번째는 심양, 그리고 벌써 세 번째다.
첫째 관문은 지금의 동문으로 옹성이 있다고 했는데 당시에는 누각이 없었던 게다. 두 번째 관문은
4층의 망루, 셋째 관문이 삼첨 누각, 당시 이미 오늘의 편액 ‘천하제일관’이 있었던 게다. 당시의 명필 소현(蕭顯)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썼다는 그 다섯 글자. 그 글씨를 쓰기 위해 편담(扁擔·중국인이 지게 대신 어깨에 걸치는 막대)으로 팔뚝의 힘을 길렀다는 일화를 남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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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 ● 1934년 전북 임실 출생 ●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졸업, 대만 사범대 대학원 석·박사(중국문학) ● 1961년 중국시단
데뷔 ● 한국외대 중어과 교수, 고려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정년 ● 現 한국외대 대학원
초빙교수 | |
당시 연암은 ‘강녀사당기’ ‘장수대기’ ‘산해관기’ 3편의 명문을 남겼다. 그 글을 통해 연임이 세
군데를 구경한 것으로 보인다. 산해관은 그 뒤로 융성하는 국력과 함께 수차의 확장을 거쳐 오늘의 웅장한 면모로 발전했고, 강녀의 사당 또한
강녀의 고사를 부연해서 마치 우리나라의 ‘춘향전’과 ‘광한루’처럼 애정 스토리와 함께 희생의 비극으로 포장했다. 더욱이 산해관은 관광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하려는 중국 당국이 새로 ‘노룡두(老龍頭)’를 증축해 만리장성의 기점을 발해로부터 틀었고, 만리장성의 동단인 각성(角城)을 보수하고 또
확장했다.
그러나 성을 바위로 아무리 쌓아도 정치가 무너지고 인화가 바스러지면 그 성곽에 화살 하나 꽂지
않아도 망하거나 승리한다는 율법,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연암이 외치지 않았던가.
(끝) |
(신동아 2007년 6-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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