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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中日 漢字 三國志·上│中國편]

이강기 2015. 8. 30. 17:32
[韓中日 漢字 三國志·上│中國편]

대전(大篆)개혁, 백화(白話)운동, 간자화(簡字化)로 맥 이은 종주국 문자혁명

 

김정강 이데올로기 비평가 gumgun@naver.com

예부터 한국·중국·일본을 관통하는 문화 전령사였던 한자(漢字). 태곳적 한배에서 태어났으되, 나라마다 다른 문화와 역사를 거쳐 지금은 다양한 형태로 남았다. 화이부동(和而不同), 동이불화(同而不和)의 세 나라를 배경으로 한 흥미진진한 한자 이야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그 첫 번째로 한자의 본향, 중국으로 떠나자.

 

 

 

보통 한자를 중국 문자라고 생각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한자는 중국어를 기록한 문자가 아닌 한어(漢語)를 기록한 문자다. 한어는 중국 내 다수 족속인 한족(漢族)의 언어일 뿐, 그 자체가 중국어는 아니라는 뜻이다. 중국은 다종족·다언어 국가로, 중국어는 중국 영토 안에 거주하는 모든 종족의 언어를 총칭한다. 물론 중국 둥베이(東北)지방 조선족의 언어인 조선어도 중국어의 일종이다. 다만 한어와 흡사한 베이징어가 보통화(普通話), 즉 표준말로 지정돼 있다. 이것이 중국의 공식 어언노선(語言路線)이다.

따라서 중국 스스로도 정확히 말할 때에는 한족의 언어를 한어라고 하지 중국어라고 하지 않는다. 한족은 고대에 지금의 중국 중앙부인 허난(河南)성, 허베이(河北)성, 산시(山西)성, 산둥(山東)성 등 황하 유역, 즉 중원(中原) 일대에 거주하던 족속이다. 지금은 중국 대륙 전역에 거주하며, 지난해 13억을 돌파한 중국 인구의 95%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실질적인 의미에서 한어를 중국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중국 영토 안에는 자기 종족 고유의 어문생활을 영위하는 수천만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또 중국의 공식 어언노선도 한어를 중국어의 일종으로 규정한다. 물론 조선족도 둥베이 조선족 자치구역에서는 조선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한자의 놀라운 생명력

인류가 최초로 발명해 사용하기 시작한 고대 문자는 모두 상형문자(象形文字)이다. 그런데 한자를 제외한 고대의 여러 가지 상형문자는 현재 모두 사라졌다. 이를테면 고대의 이집트 문자나 수메르 문자도 모두 상형문자다. 이집트 문자와 수메르 문자는 3000∼5000년 전의 것인데, 그 뒤로는 쓰이지 않아 음독(音讀)조차 불가하다가 19세기에 겨우 해독에 성공했다. 고대의 인도 문자나 크레타 섬에서 발견된 미노아 문자, 남미 인디오의 마야 문자도 모두 사문자(死文字)가 됐다. 인도 문자는 오래 전부터 읽을 수 없었고, 지금껏 해독법이 밝혀지지 않았다.

많은 고대 문자 중 한자만이 도도하게 흘러온 수천년 인류사를 뚫고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진화의 과정을 거쳐 살아남았다. 현대 중국에서 일어난 한자의 간화혁명(簡化革命)도 일시적인 혼란은 있으나 결국 한자의 생명력을 재활성화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세계의 여러 문자 중 오직 한자만이, 원시시대에 연원(淵源)을 두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사용된 유일한 문자라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한자가 오랫동안 폐기되지 않고 사용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실용에서 경쟁력이 뛰어나다는 점이 결정적 이유일 것이다. 또 고대 문자를 발명한 여러 민족이 멸족해 문화가 단절돼 이를 계승할 수 없었음에 비해, 한자를 발명한 한족은 계속 번성해 그 문화를 계승할 수 있었던 역사적 조건도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동시에, 문명의 기본 도구인 문자가 우수했으므로 경쟁력 있는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고, 그 결과 한족이 번성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까지 발굴된 유물을 근거로 고고학적으로 증명한 자료에 의하면, 이집트 문자나 수메르 문자의 원형인 상형문자가 처음으로 발명된 것은 5000년 전인 기원전 31세기경이었고, 한자가 처음 발명된 것은 3000수백년 전인 기원전 14세기경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일 뿐이고, 앞으로의 발굴과 연구에 따라서 한자의 발명 연대는 더 오래 전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신석기시대, 한자의 萌芽

중국의 전설 중에 ‘한자는 5000여 년 전인 삼황오제(三皇五帝) 때, 황제(黃帝)의 사관(史官) 창힐(蒼?)이 모래와 진흙 밭에 새겨진 새와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그 모양에서 힌트를 얻어 창안했다’는 부분이 있다. 현재까지 중국에 전해지는 가장 오랜 체계적인 글자 모음이라고 하는 후한(後漢)의 허신(許愼)이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도 “황제의 사관인 창힐이 새와 짐승의 발자취를 보고, 그 모양이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데 유의하여 처음으로 서계를 만들었다(皇帝之史倉? 見鳥獸之跡 知分理之可相別異也 初造書契)”는 내용이 있다. 실제 한나라의 수도였던 장안(長安) 근처에 창힐의 무덤이 있다. 중국 이전의 구 중국 시절, 습자(習字)를 시작하는 아동은 창힐의 무덤에 참배하는 관습이 있었다. 구 중국에서는 습자를 중요시했는데, 습자를 시작하는 아동이 창힐의 무덤에 참배하면 그 아동의 습자 수준이 높아진다는 미신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창힐이 한자를 창제했다는설은, 황제가 곡식을 익혀 먹는 화식(火食)의 기술을 발명했다거나, 우물을 파고 의복을 제정했다는 것과 같이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한자는 원시시대에 중국의 한족 대중에 의해 맹아(萌芽)가 싹튼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수억만 대중에게 공유되면서 발전해온 동아시아 대중 문자다.

베이징(北京) 교외의 저우커우톈(周口店) 유적지에서 50만 년 전에 생존한 것으로 추정되는 베이징 원인(原人)의 고대 유골이 발견됐다. 유골의 뇌를 조사한 결과 언어중추 및 청각령(聽覺領·청각작용의 중심을 이루는 부분)이 현저히 발달한 것으로 드러나 원인은 그때 이미 상당한 수준의 단어와 말(言語)을 사용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북중국 대륙에서 문자가 사용된 것은 이로부터 수십만년이 지나서였다.

중국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문화는 양사오(仰韶) 채도문화(彩陶文化)인데, 이 양사오 채도문화의 토기에는 그림과 그림으로부터 유도된 추상적인 부호가 새겨져 있다. 양사오 문화 뒤에 오는 룽산 흑도문화(龍山 黑陶文化)의 흑색 토기 바닥에서는 한자의 연원으로 보이는 부호가 발견됐다. 양사오 채도문화에 이어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전 2200년까지 계속됐을 것으로 추측되는 룽산 흑도문화는 양사오 채도문화보다 한 단계 발전된 신석기 문화였다.

1959년, 신석기 룽산문화에 이어 청동기 얼리터우(二理頭) 문화의 유적이 발굴됐다. 여기서는 토기, 골기, 석기와 청동제 칼, 화살, 방울, 잔을 만들던 수공업장의 유적지와 묘지가 발견됐다. 장방형 수혈묘(竪穴墓)에선 묘주와 솥·식기·잔, 그리고 단수(斷首)에 의해 신체와 목이 분리된 순장자(殉葬者)의 유골이 발견됐다. 이 문화는 청동기문화로 고대 노예제 사회를 상징한다. 중국의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2200년경에서 기원전 500년까지로 추정되는데, 청동기시대 전기에 고대 노예제 국가인 하(夏)왕조가 기원전 2200년부터 기원전 1750년까지 존속한 것으로 보인다.

얼리터우 문화는 은대(殷代) 초기의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하왕조의 기반이라고 보는 것이 대세다. 여러 고전 기록과 중국 창건 후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토대로 볼 때 얼리터우 문화는 하왕조의 기반이라는 설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얼리터우 유적지에서 나온 주둥이가 넓은 술그릇에서는 갑골문자의 선조 문자로 추정되는 ‘井’ ‘勿’ 같은 부호가 발견되기도 했다.

 

‘武’ 해석의 변천사

상형 표의문자(表意文字)인 한자는 문자의 상형 속에 지배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다. ‘좌전(左傳)’에는 중국 전국시대 전쟁 이데올로기의 변천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진(晉)과 초(楚)가 싸워 초가 크게 이겼다. 신하가 초왕에게 ‘진이 전장에서 버리고 도망간 시체를 모아서 경관(京觀)을 만들자’고 주청했다. 그러자 초왕은 무(武)자는 과(戈, 베기도 하고 찌르기도 할 수 있는 창의 일종으로 중국 고대 육박전의 주 살상 무기)자와 지(止)자의 합인데, 이것은 창으로써 포(暴, 사나움)를 멈추게 한다는 뜻이다. 무위(武威)를 시위하기 위해 시체를 쌓아 경관을 조성하는 행위가 포(暴)인데, 그러므로 이것은 진정한 무도(武道)가 아니다’라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때 ‘경관을 만든다’함은 적의 시체를 쌓아 개선문을 만든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때까지 전쟁에 이긴 자가 흔히 하던 자축(自祝) 습관이었다. 경(京)자는 원래 단수형(斷首刑)에 의한 적의 머리나 시체로 구축한 개선문을 나타내는 상형이었다. 나아가 이에서 유래한 ‘경사(京師)’라는 표현이 군(軍)의 기지를 의미하게 됐다.”

무(武)자를 ‘경관을 폐지하다’ ‘무(武)가 과(戈)를 멈추게 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이 일화에서, 고대 노예제 국가에서 야만적인 살육이 무용(武勇)의 자랑이 아니라 비인간적 악행으로 경원시되는 것으로 미루어 전쟁 이데올로기의 중세 봉건제적 진화를 엿볼 수 있다.

한자의 원천인 은대 갑골(甲骨)에 나타난 무(武)는 사실 창을 멈추게 하는 회의(會意·둘 이상의 한자를 뜻으로 결합시켜 새 글자를 만드는 방법)자가 아니라, 무사가 전투를 위해 창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양을 그린 것으로 살육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武)를 회의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武)자의 기원을 토대로 할 때 틀린 해석이다.

그러나 중국사회가 고대 노예제에서 중세 봉건제로 바뀌면서 정치권력이 인간을 지배하는 방법도 변한다. 노골적인 살육 대신 피지배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설득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된 것이다. 이것은 정치의 발전이며, 사회적 인간에 대한 정치적 지배 기제(機制)의 고도화다.

한자학의 고전인 ‘설문해자’에도 ‘止戈爲武(창을 멈추게 함을 무라고 하나니)’로 되어 있어, 무(武)자를 창을 멈추게 한다는 뜻의 회의 문자로 보고 평화의 수단으로 해석했다. ‘설문해자’는 총 15편으로 당시 통용된 9353자의 한자를 540부(部)로 분류했다. 친자(親字)에는 소전(小篆)의 자체(字體)를 싣고 각 글자에 자의(字義)와 자형(字形)을 풀이했다. ‘설문해자’가 나온 것은 한자의 창출기인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무(武)자가 창제된 한참 뒤인 중세 봉건제 사회 때의 일이다. 사회 발전단계상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진보함에 따라 무력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해석도 진보됐음을 시사한다.

 

가부장 뜻 담은 상형자 ‘祖’

중공(中共) 과학원 원장이던 궈모뤄(郭沫若)는 갑골문 해석의 개척자다. 그는 조(祖)를 차(且)와 시(示)의 합성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차(且)는 남성 성기의 모양을 본뜬 자이고, 시(示)는 제단(祭壇)을 본뜬 자로, 조(祖)자는 차(且)를 시(示) 위에 받들어 우뚝하게 표현한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조(祖)는 씨족의 한 무리가 남성을 조상으로 받들어 경배하는 초월적인 생명의 근원자로서 가부장적 존재를 표현한 것이다.

원시 종족이 여성 중심의 모계사회를 넘어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부계사회를 확립하면서 강력한 남근숭배 신앙으로 진입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공통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에 비춰봐도 조(祖)의 상형은 정상적인 문자 발전 코스였다고 하겠다. 다른 측면에서 조(祖)자의 창출은 남성이 지배하는 가부장적 씨족 사회의 확립을 문화적으로 추인한 것임과 동시에 중화적(中華的) 가부장제 질서의 최고 상징을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인육(人肉)으로 만든 요리를 가리키는 단어는 문명국 언어에서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원시 이후의 모든 사회적 잠재의식까지 보유한 한자에는 이것이 해(?)라는 형태로 남아 있다. 이뿐 아니라 ‘철경록(輟耕錄)’이라는, 인육 요리법을 상세히 기록한 저술도 있다.

한자에 이런 글자와 저술이 남은 것은 원시시대부터 있던 식인(食人) 습속이 수·당시대는 물론이고 청대 말까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수·당시대에 시장에서는 약용과 식용 목적으로 식육뿐 아니라 내장도 거래됐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천복(天復) 2년(서기 903)에 당대 인육시장에 대한 기록이 있다. 또한 중국 근대 군벌의 시조인 증국번(曾國藩)의 일기에는 당시 장쑤(江蘇)지방에서 평소 인육 1근이 90문(文)에 팔렸는데,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는 바람에 190문으로 폭등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류가 야만과 미개의 단계에 머무르던 때 식인은 중국만의 특이현상이 아닌 인류사의 보편적 현상이었다. 엥겔스는 그의 저서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 중 ‘야만의 중간단계’에서 “오로지 수렵만으로 생활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렵의 수확물이 매우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식량 사정이 항상 불안정했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식인이 시작된 듯한데, 그것은 그후 장기간 계속됐다. 오스트레일리아인과 폴리네시아인은 현재에도 이 야만의 중간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썼다.

 

또 ‘미개의 중간단계’에서는 “아리아인과 셈인이 육류와 젖을 풍부하게 섭취하게 된 것, 특히 그것이 아이들의 발육에 좋은 영향을 준 것이 아마 이 두 인종이 다른 인종을 압도할 만큼 발전을 이룬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인디언은 거의 채식만 했기 때문에, 미개의 낮은 단계에 있으면서도 육류와 어류를 더 많이 섭취한 다른 인디언보다 뇌의 크기가 작았다. 이 단계에 들어서면서 식인 풍습은 점차 없어지고, 단지 종교적 행위 또는 주술로서만 유지되었다”고 했다. 즉 인류사의 야만단계에서는 식량이 모자라 보편적이던 식인 습관이 상대적으로 식량이 풍부해진 미개의 중간단계에 들어와서 소멸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엥겔스의 이러한 기술(記述)은 증국번의 주장과는 달리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 원시 사회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결론으로 나온 것이다.

인육요리를 뜻하는 해(?)의 표현에 대응하는 영어 단어는 ‘cannibalism’인데 이는 식인습속(食人習俗)이라는 뜻으로, 구체적인 인육요리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식인 관습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다.


 

한자의 과학적 구조

한자는 각각의 글자가 복잡한 그림에서 단순한 그림으로, 복잡한 상형에서 단순한 상형으로, 간단한 회의에서 구조적 회의로 발전해왔다.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수억만 대중의 지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기에 글자가 지닌 뜻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다. 국(國)자를 분해해 음미해 보아도 근대의 과학적 정치학의 국가 개념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가장 바깥의 큰 口는 일정한 토지를 울타리로 둘러싼 모양인데, 이것은 국가를 보위하는 울타리와 국가의 영토를 뜻한다. 다음으로 울타리 안에 있는 작은 口는 식구(食口)라고 할 때의 口로서 국가 영토에 거주하는 국민을 뜻한다.

인간은 물질대사의 필연성을 존재의 형이하학적 기초로서 구비하고 말을 통해 사회적 존재로 변전됐으므로, 신체 기관 중 이 두 가지 기능을 발휘하는 입(口)을 인간의 대표 부위로 본 것은 과학적이다. 국경 안에서 국민을 보호하거나 위압하는 모양으로 배치된 과(戈)는 고대 중국 대표적 군사무기로, 대내적으로는 국민을 강제하고 대외적으로는 외적의 침략에 맞서는 주권의 폭력성을 상징한다. 주권에 대한 이처럼 리얼한 인식은, 주권의 본질이 국민을 강제할 수 있는 폭력이라고 갈파한 마키아벨리 이후 근대 정치학의 구명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국(國)자는 ‘국가의 3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이라는 근대 정치학의 국가에 대한 정의와 같은 맥락에 있다.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국(國)자는 그 글자가 제작된 은대(殷代) 노예제 도시국가의 본질을 회의로 상형한 것인데, 고대 노예제 도시국가라는 국가 발생의 원초(原初) 속에는 이미 근대 국가 제반 요소도 본질적으로는 구비되어 있었다.

미개시대 말기 씨족사회의 분해 결과 탄생한 은대 노예제 도시국가는 혈연이나 기타 정서적 요인에 따른 공산주의적 공동체가 아니었다. 거주지역을 단위로, 군사력으로 거주지 국민 전체를 강제로 통합해 폭력적으로 지배하는 계급적 권력 체계였다. 그러므로 국(國)자에는 이러한 국가의 본질이 단순 명료하게 응축돼 있는 것이다. 영어와 비교하자면, 국가를 의미하는 단어 ‘state’는 라틴어 ‘etat’에서 유래한 것인데, etat는 원래 ‘상태’ ‘형태’ 등을 의미한 단어로, 한자의 국(國)이 나타내는 국가의 정의에 비해서는 상당히 소박한 의미에 불과하다.

 

國家에 담긴 이념적 지향

지금의 국가(國家)라는 단어는 원래는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 국(國)과 가(家)라는 두 단어를 연용(連用)한 숙어였다. 오랜 기간 상용한 결과 현재에는 하나의 단어로 인정받고 있다. 중국 고전에서 국가(國家)라는 숙어가 처음 나오는 곳은 ‘상서(尙書)’의 입정편(立政篇)이다. 상서보다 앞서 창작된 주대의 시(詩)에는 국가 대신 같은 의미로 ‘방가(邦家)의 기(基)’ ‘방가(邦家)의 광(光)’ 등과 같이 방가(邦家)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상서’에서 국가를 사용한 뒤 ‘좌전’, ‘맹자(孟子)’에서도 사용했으며, 전국시대를 지나면서 보편적으로 사용됐다.

이와 같이 국(國)과 가(家)가 결합된 국가라는 숙어가 창출됨으로써, ‘영토·국민·주권을 구비한 인민에 대한 폭력적인 지배를 관철하는 물리적 존재로서의 나라’에서 중국 봉건국가 지배체제의 이념적 가치인 가부장적 ‘인(仁)’이 지도이념으로 주어진 것이다. ‘인(仁)’이 부과됨으로써 ‘충(忠)’의 당위성이 나왔다. 다시 말하면, ‘국(國)’이라는 지역적 이해공동체와 ‘가(家)’라는 혈연적 이념공동체를 변증법적으로 통일해 현실적이고 이념적인 윤리체인 국가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런 극적인 이념 대립과 지양의 드라마는 영어 state나, 그 원천인 라틴어 etat에는 없다.

 

백화문 운동의 소용돌이

한자 발전사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 세 번의 문자 변혁으로, 고대 진시황(秦始皇)의 대전(大篆)으로부터 소전(小篆)으로의 개혁과 문자 통일, 한문(漢文)과 한어(漢語)를 일치시킨 근대 천두슈(陳獨秀)의 백화(白話)운동, 공농병(工農兵)의 문자 운동인 마오쩌둥(毛澤東)의 간자화(簡字化) 운동을 꼽는다. 그중에서도 중국 현대 문화사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문학혁명의 기폭제는 역시 백화문(白話文) 운동이었다. 백화문 이전에는 한자로 한어의 단어는 정확하게 기록했지만, 한어의 구어와 한문은 일치하지 않았다.

현대 중국의 문학혁명은 천두슈가 1904년 최초로 백화문으로 쓴 신문을 발간하면서 시작됐다. 천두슈는 중국공산당의 창건자로 중공당 제1전국대회에서 서기장으로 선출됐다. 천두슈가 주재한 잡지 ‘신청년(新靑年)’이 백화문혁명의 거점이었다. 천두슈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사람으론 훗날 중국 자유주의 사상의 기수가 된 후스(胡適)와, 마오쩌둥에 의해 ‘중국공산당원이 아니었으나, 사회주의 중국의 이념적 지도자’ ‘공자(孔子)는 구 중국의 성인이요, 루쉰(魯迅)은 신 중국의 성인’으로 칭송된, 노벨 문학상 수상자 루쉰이 있다.

당시 후스는 천두슈에게 전적으로 호응하면서 문학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한 8개 강령을 제시했다. ‘고문(古文)을 인용하지 말 것, 죽은 문구를 사용하지 말 것, 병렬문을 사용하지 말 것, 백화언문(白話諺文) 사용을 기피하지 말 것, 문법을 따를 것,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아프거나 슬픈 듯한 글을 쓰지 말 것, 고문을 흉내내지 말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써 나타낼 것, 진실하고 본질적인 것을 쓸 것’ 등이다.

천두슈는 후스의 8개항을 지지했다. 후스는 이에 고무되어 8개항의 사상을 상세하게 전개한 ‘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芻義)’를 썼다. 여기서 그는 “중국 미래의 살아 있는 문학을 위해서는 반드시 백화문이 수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7년 2월 천두슈는 ‘문학혁명론’을 발표하면서 후스의 중국 문학에 대한 혁명사상을 지지하고 스스로 ‘문학혁명군의 기치를 올린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혁명군은 ‘소수 귀족의, 분식된 모호한 문학을 추방하고, 명백하고 단순한 인민의 문학을 창조한다. 사문화되고 가식적인 고전주의 문학을 추방하고, 신선하고 진실한 리얼리즘 문학을 창조한다. 현학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은자(隱者)의 모호한 문학을 추방하고, 대중적인 다수의 문학을 창조한다’는 3항의 슬로건을 내건다고 선언했다.

1919년 5월4일 중국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받들고 일어난 5·4 운동은 천두슈 일파의 진보 사상과 그들의 선전지 ‘신청년’ 주도로 이뤄졌다. 이 운동을 계기로 신청년의 문장 방법인 백화문이 전국에 파급되면서 백화문은 중국 문장 생활의 주류가 되었다. 이에 당국은 현장의 문장 변혁을 그대로 받아들여, 1920년 봄 초등학교 교과서를 고전 문체에서 백화문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고,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도 백화문이 적용되면서 공식적인 중국 국문으로 인정받게 됐다.


한자는 박물관으로…

당시 후난(湖南) 성립(省立) 제1사범학교 학생이던 마오쩌둥은 1918년 4월18일 장사(長沙)에서 8명의 동지와 함께 신민학회(新民學會)를 결성했다. 마오쩌둥은 당시 사정에 대해 “이러한 학회의 대부분은 규모와 관계없이 천두슈가 편집한 문학 르네상스의 유명한 지도자인 ‘신청년’의 영향 아래서 결성됐다. 이 잡지를 읽기 시작할 무렵 나는 사범학교 학생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천두슈와 후스의 글을 존경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오쩌둥은 “그들은 이미 나를 실망시킨 량치차오(梁啓超)와 캉유웨이(康有爲)를 대신해 나의 모범이 됐다”고 했다. 이후 마오쩌둥은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사범학교 시절 스승으로 당시 베이징대 교수이던 양창지(楊昌濟)의 추천을 받아, 1918년 9월 리다자오(李大釗)가 관장으로 있던 베이징대 도서관의 사서(司書)가 됨으로써, 중국 공산주의 운동의 본류로 들어가게 됐다. 당시 리다자오는 베이징대 안에 마르크스주의연구회를 조직했다. 마오쩌둥은 1919년 봄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上海)를 거쳐 장사로 갔다.

 

장겅(張庚)은 1934년 “한자는 죽은 글자, 문언문(文言文)의 글자, 봉건의 글자”라고 했고, 루쉰도 “漢字不亡, 中國必亡(한자가 망하지 않으면, 중국이 반드시 망한다)”이라며 “한자와 대중은 세불양립(勢不兩立)이다…대중어의 보급은 라틴화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당시 중국의 대표적 진보 사상가였고, 특히 루쉰은 ‘아큐정전(阿Q正傳)’으로 동아시아에선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들은 한자가 익히기 어렵다는 점을 문제시했지만, 근본적으로는 한자를 중국 봉건사상의 축적·전달 도구로 보았다. 그래서 중국의 뿌리 깊은 봉건사상을 섬멸하기 위해서는 한자를 폐기하고 중국 문자를 라틴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중공(中共) 문자개혁을 주도한 궈모뤄는 그 자신이 한자학의 대가로 은·주대(殷周代) 갑골문과 금문 연구에서 최고의 권위자였다. 1933년에는 갑골문 연구의 고전인 ‘복사통찬(卜辭通簒)’을 편찬한 바 있다. 이는 갑골문을 중국 사회경제사 연구의 기초 사료로 분류해 집성한 의미 있는 시도였다. 궈모뤄는 당시 입수할 수 있었던 고고학적 실증과 갑골문의 복사(卜辭)를 종합하고 분석해 베이징대에서 ‘중국 노예사회’라는 제하의 강연을 했다. 이 강연 초고를 정밀하게 보완해 1952년 노작 ‘노예제시대(奴隸制時代)’를 출간함으로써, 고대 중국의 사회 발전사에 노예제 시대가 존재했음을 논증했다.

이와 같이 중국 고대사 연구, 나아가 중국사 일반과 중국 현대사 연구 및 문학과 문필 일반에서도 발군의 업적을 세운 궈모뤄였지만 한자 문제에서는 시대 풍조에 영합해 큰 착오를 범하고 말았다. 그는 1964년 5월3일 ‘인민일보(人民日報)’에 발표한 논문 ‘일본의 한자개혁과 문자의 기계화’에서 “한자는 우리 중국 이외에 월남, 조선 및 일본에서도 사용됐다. 그런데 베트남은 벌써 19세기 말에 라틴화를 실현했다. 조선에서도 북조선에서는 1948년에 한자 사용을 전면 폐지하고 조선 고유의 글자로 고쳤다. 1958년 말 내가 중국 인민대표단에 참가해 북조선을 방문했을 때 북조선 지도자는 ‘조선어의 로마자화는 쉬운 일도 아니지만, 남북이 아직 통일되지 않았으므로 지금 당장 실시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북조선과 월맹, 두 형제 국가는 이미 한자의 일반적인 사용을 폐지해 문맹을 없앴다. 그리하여 중국·일본과 남조선만이 한자를 아직 사용하게 됐다”고 했다. 이어 ‘인민일보’ 기자의 “한자는 장차 어떻게 되겠느냐?”는 질문에 “영원히 보존된다”고 답했다. 다시 “어디에?”라고 질문하자 “박물관에”라고 했다.


 

‘간화(簡化)에서 성화(聲化)로!’

이에 앞서 1951년 마오쩌둥은 ‘文字必須改革, 要走世界文字共同的 音方向(문자는 반드시 개혁해야 하며, 세계문자 공동의 표음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방침을 발표했다. 이 방침에 따라 중국은 1952년 중국문자개혁위원회를 발족하고 문자개혁에 돌입했다. 이때 중국은 한자 개혁의 방향을 궁극적으로 한자 폐기로 정하고, 순차적으로는 한자의 간화(簡化), 한어의 병음화(?音化), 보통화(普通話) 보급이라는 3항 운동으로 정했다. 간화는 한자를 형체와 획수를 줄여서 간단하게 하는 것이고, 보통화 운동은 한어를 어문일치의 표준어로 발전시키는 운동이다.

보통화라는 용어를 공식화하면서, 장시뤄(張奚若) 교육부장은 1955년 제1차 전국문자개혁위원회에서 “보통화의 보(普)는 보편성(universality)을 뜻하고 통(通)은 모두의 공동소유(common possession)를 뜻하는 것이지, 결코 평범(ordinariness)이나 통상적 습관(usual habits)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보통화는 보편적인 중국 무산계급의 공동어(共同語)라 규정했다. 또 1959년 라틴 자모 26개를 택해 만든 병음화를 문자개혁의 필연적 방향으로 내세웠다. 당시 중국이 궁극적 목표로 삼은 것은 표의한자를 소멸하고 순수 표음문자에 도달하는 것(병음화)이었다. 따라서 이때의 한자개혁 구호는 ‘간화에서 성화(聲化)로!’였다. 한자개혁은 간화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화, 즉 표음문자화가 궁극적 목표라는 것이었다. 단순한 한자 개혁이 아니라 한자의 전면 폐기와 한어의 로마자화를 추구한 것.

1955년에 열린 현대한어규범문제학술회의는 “민족의 공동어인 보통화는 ‘첫째 베이징어를 발음체계의 표준으로 한다(以北京語音爲標準音), 둘째 북방 방언을 기초 방언으로 한다(以北方言爲基礎方言), 셋째 모범적인 현대의 백화문 저작을 어법의 규범으로 한다(以典範的現代白話文著作爲語法規範)’”고 규정했다.

중공 문자개혁 운동의 진행방법은 ‘군중으로부터 나와서 군중 속으로 들어간다’ ‘인민은 바로 혁명의 무한하고 풍부한 원천이다’라는 군중노선에 의거했다. 이러한 원칙을 토대로 군중이 사용하는 간화자(簡化字)를 널리 수집해 정리한 다음, 이를 기초로 초안을 작성·공포해 공농병(工農兵) 및 각계 인사의 토론에 부쳤다. 토론을 통해 이들의 의견을 종합·수정한 후 조정을 거쳐 의견이 통일되면 이를 새 간자로 확정하는 방식을 따랐다.

중국은 1952년 마오쩌둥의 노선에 따라 중국문자개혁위원회를 발족했다. 1955년 이체자(異體字) 정리 과정에서 1053자를 폐지하고, 1956년 ‘한자 간화 방안’을 발표했다. 그뒤 4단계에 걸쳐 간자화(簡字化)를 추진해오다가, 그 성과를 결집해 1964년 ‘간화자 총표(簡化字總表)’를 확정해 간체자 체계를 확립했다. 한편 1957~58년에는 ‘한자 병음 방안’을 확정해 한자의 음을 알파벳 철자로 표기할 수 있게 만들었다. 1977년 말에는 유엔이 중국 지명의 중공식 알파벳 표기를 국제표준으로 인정했다. 이렇게 중국의 한자 개혁 작업은 1952년에 시작해 1964년에 일차적으로 완료됐다.


 

읽고 쓰기 편한 간체자(簡體字)

1964년의 간화자 총표 중 사용빈도수가 낮은 137자를 1977년 폐지해, 폐지된 한자는 1955년의 1053자에서 1190자로 늘어났다. 1977년 만들어진 간화자 총표는 1986년에 다시 조정됐다. 조정된 간화자 총표에 수록된 간자는 총 2235자. 중국은 한자개혁 작업에서 뜻과 음이 같고 글자의 형태만 다른 이체자 등 1000여 자를 폐지했다. 또한 필획수가 많아 학습과 사용에 불편한 번잡자(煩雜字)의 필획을 줄여 2000여 자를 간화했다. 이 과정을 거친 간자는 읽고 쓰는 데 훨씬 간편했다. 이런 작업은 군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권력을 가진 혁명정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중국은 1956년부터 간체자를 사용하는 동시에 맹렬한 문맹퇴치 운동을 시작해 1982년에는 문맹률을 23%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1950년대 문맹퇴치운동을 시작할 때 문맹률 80%와 비교하면 대단한 성과였다.

중국의 문자 간화 개혁은 공농병 대중의 군중투쟁·계급투쟁·무산계급전정(無産階級專政,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고화 투쟁과 더불어 진행되었는데, 우여곡절을 겪으며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예컨대 1975년 산둥사범학원 중문계(中文系) 74급 공농병학원 및 교사의 이름으로 된 글은 재(戴), 대(帶), 대(袋)자를 일일이 구분해 쓰는 것이 번거로우니 대(代)자로 통일하자고 했고, 장쑤성 타이싱(泰興)사범학교 실습조는 자형이 복잡한 농작물과 농기구의 이름을 공농병이 번거로워하니 부족한 점이 있어도 무조건 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6년 8월1일 신장(新疆)성 자치구의 소수민족인 위구르 족과 허사커 족은 쭉 써오던 아랍 정통문자를 폐기하고 중국어 라틴 문자를 채용했다. 이 두 소수민족은 병음화 방침에 따라 중국식 라틴화를 실행한 것이다. 싱가포르는 1967년 교육성이 간화자를 공식 승인하고 1975년에는 사용을 확대했다. 그 결과 지금 싱가포르의 간화자는 중국 대륙의 것과 같고 사전도 번안한 대륙판 신화사전(新華字典)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 문자개혁의 지나친 일방화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1978년 6월16일자 ‘광명일보(光明日報)’에서 문자개혁위원 저우유광(周友光)이 주장한 내용이다. “1978년 2월 이래 내가 만난 공농병 및 각 방면 인사들은 한결같이 새 방안이 많은 결함을 갖고 있어 그 시행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1차 방안을 20년간 시행하는 동안 문맹은 사실상 퇴치됐으므로 이제 인민 군중은 구태여 모르는 문자를 다시 만들어 익히기를 싫어한다. 그들은 이제 문자의 변화가 아닌 안정을 원하고 있다”는 것. 동시에 그는 6000자의 한자 중에서 3000자를 선택해 표준 상용문자로 정하고 병음 자모를 보조언어로 쓰는 방법을 제의했다.


 

한중일 한자의 변증법적 종합

1952년 마오쩌둥의 발의로 중국문자개혁위원회가 발족되고 30여 년의 혼란과 개혁을 거친 뒤 1986년, 이를 총결산하는 ‘전국어음문자공작회의(全國語音文字工作會議)’가 열렸다. 이 회의 폐막식에서 한자의 표음문자화안(案)은 무효라는 선언을 한다. 이로써 마오쩌둥이 중국 문자개혁의 목표라고 선언했던 성화(聲化)는 한자병음자모(한자의 로마자음 표기체계)의 확립으로 끝맺게 된다.

중국 근대화 운동과 더불어 휘몰아친 한자 폐기 운동과 중국 문자의 라틴화 운동은, 중국 민중의 저항과 국가 지도부의 이성적 수정에 의해 제동(制動)됐고, 간자화로 종결됐다. 만일 라틴화 노선이 채택되어 중국이 한자를 완전히 폐기하고 베트남처럼 알파벳을 사용했다면 동아시아 문화에 큰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동아시아 문화의 뿌리인 중국 고전문화 전통이 초토화됐을 거라는 말이다.

원래는 한뿌리였던 한국·중국·일본의 한자는 중국의 간자화, 일본의 일본식 약자 채용, 한국의 한국식 특수 한자 창출로 차이가 생겼다. 이것은 한중일의 사상·학술·문화 교류에 있어 약간의 장애로 작용한다. 오늘날 세계는 민족의 주체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이미 협애(狹隘)한 국수주의의 세계는 아니다. 이미 세계화에 대한 적응은 생존 조건이 됐고, 그 세계화의 전제요 가교는 민족 주체를 기반으로 한 지역화다.

金正剛
● 1940년 경남 진주 출생
●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중 6·3한일회담반대운동과 불꽃회 사건으로 제적
● 노동현장 위장취업 14년, 국가기술자격증 10종 취득, 국가보안법위반 복역, 통일민주당 총재(김영삼) 특별보좌역, 신민당 당무위원, 월간 ‘선택’ 상임고문

세계화와 세계화의 전제인 동아시아 지역화에 조응(照應)해 한중일 동양 3국간에는 정치·경제·군사뿐 아니라 사상·학술·문화의 교류와 그 변증법적 종합이 필수다. 이를 위해서 3국이 상용하는 한자 자형의 통일이 요구된다. 한자의 통일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은 중국의 간자화를 폄하하기보다 긍정적인 성과를 본받아야 한다. 중국도 그간의 업적을 고수하겠다는 독단을 버리고 간자화의 부정적인 측면은 합리적으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간자화에는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이 훨씬 많으며, 문자를 간단명료하고 알기 쉽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민주시대의 과학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