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術, 敎育

역사의 진실, 최승희

이강기 2015. 8. 30. 17:38
역사의 진실, 최승희    2012/03/30 10:31
 
 

역사의 진실
최승희 편 - 제1화

 

                김용범 교수


문학이야기를 두개 정도를 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좀 재미있는 한 무용수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장안동 녹음실에서 마지막 녹음이라서 좀 쓸쓸합니다. 지금부터 옛날이야기처럼 구수하게 들려드릴 이야기는 조선의 여자 최승희입니다. 이 최승희는 여러분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모르시는 분이 더 많으실 겁니다. 젊은 분들은 잘 모르실텐데...바로 일제하에서 조선여성으로서 전 세계에 이름을 떨쳤던 대단히 유명한 무용수이기도 합니다. 지금 제가 최승희의 책을 펴놓고 있는데요, ‘춤추는 최승희’라고 중앙대학 정병우 교수가 쓴 책입니다.

사진만 봐도 이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웠는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또 일본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할 정도로 무용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던 사람입니다. 이 최승희의 이야기를 할 생각입니다. 오늘은 최승희가 누구인가, 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최승희는 1960년까지 평양에서 살게 됩니다. 최승희를 이야기하게 되면 평양에서 평양음악무용학원이 생겨지게 된 배경, 또 평양에서 국악기를 개량하게 되는 국악기 개량사업, 또 ‘조선무용표기법’이라는 ‘무용 동작의 기본’이라는 책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한국 전통 무용의 틀을 잡는 과정, 그리고 혁명가극 “피바다”가 나오게 되는 배경까지가 쭉 설명이 되는 대단히 중요한 여성입니다.

북한에서 사람 이름을 넣어서 국립화 시켜준 연구소가 2개 있는데요, 처음으로 만들어진 연구소가 ‘국립 최승희 무용 연구소’입니다. 이 국립 최승희 무용 연구소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월북한 최승희는 김일성과 직접 상대할 정도로 권세가 당당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도 의외의 일들이겠죠. 그 다음에 만들어진 연구소가 ‘윤이상 연구소’입니다. ‘윤이상 연구소’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죠. 북한 정권하에서 최승희는 1960년대까지...그 뒤에는 어떻게 됐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죽었다 하기도 하고, 극장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다고 하기도 합니다만, 나중에 최승희가 많은 비판을 받습니다. 비판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이 최승희가 세워놓은 북한문화의 기틀은 지금까지도 대단히 중요한 기본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최승희 이야기를 하면 반드시 나와야 할 사람이 ‘안막’이라는 사람입니다. 안막은 최승희의 남편입니다. 평론가인데,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부터 상당히 중요한 일들을 하게 됩니다. 안막이 카프 계열의 작가였지만 작품 활동을 중단하게 됩니다. 일제하에서 작품 활동을 중단한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의 이야기이겠지만, 안막은 스스로 최승희의 매니저로서의 역할만 수행을 하죠. 최승희가 멕시코고 파리고 미국이고... 공연을 다닐 때 일본 전지역을 따라 다니면서 최승희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아주 외조를 잘 해주는 남편에 속합니다. 똘똘한 청년이었고 그 당시로는 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 문학 활동을 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안막입니다. 이 안막과 최승희의 만남이 오늘날의 최승희의 역할과 이런 것들을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아니면 최승희라는 여자 뒤에서 자신의 일을 숨기고 마누라의 예술 활동을 도와주는 역할로 자처한 안막의 희생이 없이는 무용수 최승희가 없었다, 머 그럴 정도의 위치를 갖게 됩니다.

오늘 이야기가 바로 다음주부터 제가 슬슬 이야기할 내용들의 한 부분들입니다. 안막과 최승희가 만나게 되는 과정, 그가 반도 21살의 나이로 일본 무용계를 완전히 평정하게 되는 과정, 또 그 당시에 미국의 메크로 폴리탄에서 공연하고 멕시코에서 공연하고 불란서에서 공연하는 1940년대 이야기입니다. 이러면서도 일본여성이 아니라 반도의 무희라는 말로써 그가 스스로 반도의 여성임을 당당히 밝힌 사람입니다.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하고도 만나게 됩니다.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하던 날 기뻐하면서 그와 찍은 사진이 나올 정도로 이 한국 내에서는 또 조선 내에서, 그리고 일본 내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적으로 최승희의 역할이 크죠. 그런데 왜 이 사람이 월북을 했을까? 지난 시간에도 잠깐 이야기 했지만, 1947년 46년을 두고 작가들은 자신이 선택한 사상에 따라 남과 북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죠.

해방이 되자마자 안막과 최승희는 중국에 있다가 들어옵니다. 북경에 머물고 있다가 인천으로 들어오는데 안막은 월북을 합니다. 월북을 하게 되는 이유는 연안파 쪽에 속하는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죠. 김두봉을 모시게 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안막이 먼저 올라가 있고 서울에 자리 잡은 최승희를 부르러 내려옵니다. “올라가자” 안막이 부르러 내려가면서 최승희의 북한생활이 시작되죠. 재미있는 것은 최승희가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처음 김일성이 만났다는 것입니다. 김일성이 최승희에게 “최여사, 여기 살러왔어 아니면 다니러 왔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평양에 잠깐 놀러 왔느냐 살러 왔느냐 이 이야기죠.

그러자 최승희는 살러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파격적인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김일성이 최승희의 생활비 일체를 대주라 하면서... “최여사가 평양을 돌아다니면서 마음에 맞는 집을 하나 골라서 거기에 입주에 사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때 문비서라는 사람을 붙여줍니다. 최승회가 돌아다니면서 (대동강변에 경제리라는 곳에 있습니다.) 대동강변이 내려다보이는 기가 막힌 집을 찾게 됩니다. “나 여기서 살래” 하니, "그럼 이집 가지십시오“ 이제 최승희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최승희가 가져온 무용복이나 일체의 도구 등이 소련군에 의해서 날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자료에 의하면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여기가 내가 꿈꾸는 동양 무용 창조의 산실이 되겠다’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김일성과 최승희의 만남입니다.

김일성은 최승희를 철저하게 뒷받침 해주라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최승희가 들어오게 됩니다. 남쪽에서 월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데요. 소련군들과 함께 김일성이 평양에 진주하자마자 보니까 평양에는 이렇다 할 예술가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김일성이 조직적으로 남쪽에 있는 공산주의 철학을 가진 작가들을 올라오게 만드는 것이지요. 북한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김억, 박세영, 또 북한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이면상 이라는 작가 정도이고 그 나머지는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 남쪽의 사람들이 대거 월북을 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문학 쪽에서는 임하, 이기형, 이태준, 갑오농민 전쟁의 이태준, 이원조, 윤기정 이런 사람들 한 150명 정도가 월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음악에서는 작곡가인 김순남, 바이올리니스트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백고산이 월북을 하게 되죠. 이건우, 안기형, 최동선. 그리고 연극 배우로는 황철, 심영, 심고성, 이백산, 이렇게 남쪽에서 유명한 배우들이 올라오게 되는 거죠. 문예봉도 월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만담가 신불출 올라오게 되죠. 국악에는 안기호, 무용에는 최승희. 그중에서도 엄청나게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바로 최승희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 최승희가 북한에 연구소를 평양에 차리면서 최승희의 북한 생활이 시작됩니다. 이 북한 생활이 시작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자기가 하고 싶던 일들을 모두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일제하에서도 자기가 하지 못했던 모든 일들을 거기서 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6.25 전쟁을 겪게 되고 50년대를 겪게 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것들이 무슨 드라마 같이 엮어집니다. 제가 왜 최승희로 이야기를 시작하는가 하면 바로 최근의 북한 예술을 보면서 교류를 통해서 “이게 바로 최승희 무용의 기본 틀이었구나” 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최승희의 무용은 북한에서 추는 춤의 거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바로 최승희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하던 무용수이기 때문에 파리나 미국에서 보고 온 모든 것을 북한에다 쏟아 넣게 되였다는 것이죠.

북한 예술이 이 사람에 의해서 상당히 많은 부분 발전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최승희가 실종되고, 사라지게되죠. 당연히 안막도 북한의 현장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왜 사라지게 되겠습니까? 간단한 일이지요. 정권을 자리 잡을 때 김일성은 이제 군부터 먼저 장악을 하고 그담에 이제 제일 먼저 척결하는 쪽이 남노당 계열입니다. 박헌영 계열의 남노당이 척결되죠. 거기서 월북했던 작가들도 일시에 정리되는 과정을 겪게 되고, 두 번째로 중국의 연안파를 제거하게 되죠. 그러니까 남쪽에선 남노당 계열의 사람들이 ‘미제의 앞잡이’ 라 해서 제거해 버리고 그리고 중국 연안에서 활동하던 조선사람들, 김두봉 계열의 사람들을 또 제거해 버리게 되고 1960년대에 들어서게 되자, 비로서 김일성 중심의, 소련파 중심의 북한정권이 성립되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남쪽에서 온 사람들이 제거되고,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 제거되면서 김일성은 60년대에 북한을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60년대 이후 지금까지 승계되고 계속되는 것이니까 바로 그러한 과정에 있기 전까지 북한 문화의 틀을 잡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겠느냐...그것이 바로 최승희를 통해서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문학만 가지고 보면 재미가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문학은 재미가 없죠. 라디오 방송이라 여러분께 최승희가 추는 춤을 보여줄 수도 없고 또 다큐멘터리로 최승희 이야기는 2.3년 전에 방송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최승희가 남겼던 흔적들, 최승희가 춤추는 모습들, 모양들을 다 알고 있었을 것으로 전 판단합니다. 보여줄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여인의 삶을 통해서 북한의 문화를 한번 바라보자, 그러한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뜻에서 최승희를 선택한 것입니다.

최승희 이야기는 4번에 나누어서 여러분께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4번에 걸쳐서 하는 이야기 속에는 바로 북한 정권이 만들어 지면서 문화정책이 어떻게 만들어져 갔는가, 그리고 김일성은 어떻게 북한을 장악해 갔는가, 하는 것들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최승희를 논하거나 문학하는 사람들을 논하지 않고 이야기 하게 되면 방송이 정치적인 방송이 됩니다. 그러니까 무슨 조선 공산당 성립사, 발전사 뭐, 이런 모습이 되기 때문에 딱딱하고 재미 없을것 같아서 최승희 이야기로 일단 이야기를 끊습니다. 오늘 장안동 녹음은 여기서 마칠까 합니다. 최승희 이야기에는 새로운 스튜디어에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최승희편 (제2화)


역사의 진실 김용범입니다.
오늘은 예고한대로 최승희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최승희가 태어나서 종적을 감추게 되는 60년대까지의 기간은 우리나라근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했던 시기였습니다.

지금 북한이야기를 하면서 왜 갑자기 최승희의 이야기가 나오는지 궁금해 하시겠습니다만 지금 한반도의 북녘 땅에 공산주의가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정치, 외교 학을 전공한사람처럼 이야기하면 딱딱하고 재미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최승희라는 여인의 예술적 삶을 가지고 북한정권이 정착되는 과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최승이의 삶은 세계적인 예술가로서 잘 알려진 삶이고 그의 삶 자체가 우리 예술사에 끼쳐온 공헌도 대단히 크다고 할수 있습니다. 최승희의 남편 안막역시 우리 예술사에 중요한 역할을 해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최승희의 삶과 함께 북한의 정권 정착과정을 살펴본다는 관점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제가 없는 오늘이 없고 오늘이 없는 미래가 없습니다.
지금 북한의정권이 대를 이어가면서 자리를 잡기 까지는 앞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희생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소위 이야기하는 숙청, 축출과 같은 과정을 격으면서 김일성체제 를완성시키는 그런 과정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최승희 역시 그 체제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 중의 한 사람 이라는 것입니다. 서론은 여기서 정리 합니다.

최승희라는 사람이 왜 우리나라 공산주의 정착 사에 큰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옛날이야기처럼 여러분들이 편안하고 구수하게 들을 수 있게 3~4회에 걸쳐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역시 한 아름다운 예술가의 삶이 이 땅의 근대사에 이만큼 중요한 역활을 했었구나 하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최승희가 본격적으로 무용에 부딪히는 시기는 1920년대입니다. 20년대는 3.1운동이 끝난 시기이고 그 뒤 한국 사회는 일제의 침략...일제가 우리나라에 쳐 들어와 10년 정도 자리를 잡은 때입니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민들은 ... 3.1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이전의 세계는 봉건사회였고 봉건사회가 무너지면서 자리 잡게 된 것이 바로 식민지, 제국주의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무렵 무용이라는것은 예술의 한 장르라기보다는 바로 광기들이 1907년에 없어지면서 갈 곳을 잃은 기생들과, 이씨왕조가 무너지고 왕가로 바뀌게 되고 궁중의 장화고원의 악사들이 음악하는 사람들과 기생들과 만나게되면서 하나의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 후 그들의 삶은 무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요정이라는 요릿집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광기를 양성하던 교방이 무너지면서 기생 양성학교로 불리우게 되며
무용, 음악등은 기생들이나 하는 예술장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시기에 무용은 한 예술로서 요릿집이 아닌 극장의 무대로 옮겨지게 되는데 이 장본인이 최승희입니다. 최승희가 무용과 마주치는 첫 번째 계기는 그 당시 일본 사람이었고 세계적인 신 무용가인 이시바꾸와 만나게 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은 바로 경성일보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 최승일 자체가 자기 동생 최승희의 재능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
경성일보에 나온 이시바꾸의 한국공연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시바꾸가 우리나라에 도착한 것은 1926.3.21일인데 이날 우리나라에서는 기생들이 추는 무용이 아니라 무용수가 추는 무용이 처음으로 선 보이게 되며 일본이나 세계적인 신무용가인 이시바꾸의 무용이 경성일보 주체로 경성 공예당에서 열리게 됩니다.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은 자기 동생을 데리고 공연을 보러갑니다.
어린 최승희는 그때 숙명여고에 다녔는데 최승희는 그 자리에서 공연을 관람하면서 자기가 전혀 모르는 새로운 세계에 접근하게 됩니다.
그때의 공연 내용은 “산에 오르다 사로잡힌 사람들” 이라는 제목의 무용이였는데, 이 공연을 보고 최승희는 자신도 무용수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최승일은 최승희의 입에서 바로 그 말을 듣고 싶었던것이죠. 그러자 경성일보에 근무하던 최승일은 이시바꾸의 분장실로 최승희를 데리고 가고 이시바꾸는 중학교학생의 어린최승희로부터 빼여난 몸매와 용모 아름다움에 매료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최승일은 최승희가 무용을 하고 싶어 한다고 제안을 했고 이시바꾸는 이를 받아 들이게 됩니다. 경성일보사장인 마스보까의 보증으로 최승희를 연구생으로 받아 들이게 되는것입니다. 3년간만 무용을 배우자고 오빠 최승일은 약속을 하게 되며 여기서 이시바꾸는 참 중요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무용예술이라는 것은 조선사람들의 천한 술자리에서 추는 것이 아니라 극장에서 추는것이 무용이다. 이것이 그때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면서 최승희는 일본으로 갈 준비를 하게 되는데 최승희는 모교인 숙명여고에 찾아가 선생님들에게 동경에 무용연구를 떠난다고 하자
선생들은 그 얼굴도 예쁘고 머리 똑똑한 최승희가 왜, 기생처럼 무용을 배우려 하는가하고 반문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최승희는 결심을 했고 오빠인 최승일도 자기 동생이무용수로서 이름을 날리게 될 것을 바랬고, 술자리의 잡부가 아닌 무용수로서 이름을 날릴 것을 기대하면서 이시바꾸의 손에 동생을 부탁하여 일본으로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시바꾸의 문화에 들어간 최승희는 차분하게 신무용을 배우게 되고 신무용의 기법들과 동작들을 배우게 됩니다.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현대무용을 배운다는 것이 한국 여성에게는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부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당시 한국여성들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보통학교가 아닌 중고등학교를 여성이 다닌다는 것 자체도 상당히 대단한 것이고 또 무용예술을 선택한 것도 대단한 것 이였습니다.

그 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16살 이였습니다.
최승희가 이시바꾸의 무용을 배우면서 하루하루 실력이 늘게 되는데...그것은 뛰어난 자질이 있었기 때문이고, 자기의 역량을 키워준 이시바꾸에의해 훈련받고 다듬어지면서 최승희는 점차 무용수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다가 최승희는 1927년9월에 한국에 와서 공연을 하게 됩니다.

1927년 9.27일자 매일신보에서는 최승희양이 한국에 와서 공연을 한다, 우리나라에 “돌아온 무용가 최승희”와 같은 보도를 내게됩니다.
이시바꾸 무용단에 한국인 무용수 최승희가 있다는 것은 대단한 화제 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최승희는 1927년 10월 24일, 이시바꾸로부터 맹훈련속에 다듬어진 기량을 가지고 경성역에 도착하고 식구들도 나오고 기자들과도 인터뷰를 하게됩니다.

25일과 26일에 걸쳐 경성공예당에서 이시바꾸무용단의 한 단원인 최승희의 공연이 최초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날 모교인 숙명여고는 이 공연을 후원하게 되는데...공연시작은 7시인데 6시30분에 대 만원을 이루어 성과적으로 끝내게 됩니다. 공연이 끝나고 우미관에서 앵콜공연을 하게 되는데 다시 시카코에서 공연을 하게됩니다. 그러면서 최승희는 이 시대의 새로운 무용수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간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시바꾸무용단의 조태권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우리나라 무용의 첫 문을 연 사람인데 그 역시 우리나라 신흥고등학교 출신이였습니다. 이 이시바꾸 무용단의 조태권과 최승희가 1920년대 우리나라 무용에 자리 잡게 되는것입니다. 자, 이렇게 되여 최승희는 19살에 자기의 기량을 선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빠 최승일은 약속한 3년이 되였으니 동생을 돌려보내 달라는 의견을 냅니다. 이시바꾸자체는 그 시기 상당히 심각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시바꾸의 아내가 메니저로 일하던 문화생들이 상당히 많은 반발을 하게된 것입니다.
이시바꾸자체도 병환에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최승희가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이시바꾸는 말리게 되는데 그것은 이시바꾸 무용단에서 두각을 드러낸 최승희가 간다고 하자 그 무용단이 위기에 빠지게 되는상황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최승희는 약속한 3년이 지났으니 돌아가겠다고 하고 매정하게 스승을 뒤로한 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경성으로 돌아온 최승희는 오빠들의 도움으로 무용연구소를 개설하게 되는데 당시의 남산기슭에 자리를 잡게됩니다. 최승희의 오빠는 그때 경성신문사에 다녔는데 경성방송국이 그 뒤를 밀어주고 하면서 한국인 최초로 최승희 무용단을 조직하고 성공적인 정착을 하게 됩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20살입니다. 얼마나 개척 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무용하는 사람들은 20살이라면 대학교 2학년정도밖에 안 되는데그러한 최승희가 경성에 와서 무용단을 조직했다는 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일이 됩니다. 또 우리나라무용사에 기록적인 일이기도 한다.

최승희는 그후, 연구생으로 15명을 모집 하게 되는데 김은숙, 김정애 조정애, 장기성 같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최승희 무용단이 설립되고 최승희 무용 연구소가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발표회가 시작되고 31년에 최승희의 화려한 전성시대가 시작됩니다. 바로 한국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 했던 무대위에서의 무용예술이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모든 사람들은 공연장이 아닌 술집에 가서야 무용을 볼 수 있었지만 무용수로서, 예술로서 무용을 하는 시대가 열렸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본격적인 최승희의 성장기에 대해 이야기했고 다음시간부터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 정착사가 시작되는 “카프”의 맹원 이였던 안막과 최승희의 필연적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최승희편 (제3화)  
역사의 진실에 김용범교수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안막과 최승희가 일본이라는 곳으로 떠나서 세계로 진출하는 과정을 설명드렸습니다. 세계공연을 하면서 최승희는 대단히 큰 성과를 올립니다. 그당시에 파리고 멕시코고 남미를 주름잡으면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있겠습니까.

바로 최승희의 명성은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고 반도의 무희라고 이름지으면서 한국여인의 이름으로 자존심을 많이 세우죠. 그다음에 이제 3년동안의 기간동안 안막은 충실하게 최승희의 후견인으로서, 행정가로서 뒷바라지를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일본은 파국으로 다다르게 되죠. 2차대전이 마지막으로 간다 뭐 이런 얘기가 됩니다. 1944년에 일본에서 공연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최승희의 일본에서의 마지막 공연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죠.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 일본사람들이 열광을 하는 이유가 뭐냐면, 그가 반도의 여성이다 그런 것 보다는 최승희가 가지고 있는 창조적인 힘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당시의 관동군을 위문하기 위한 황군위문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최승희도 황군위문에 안나갈 수가 없게 되는 것이죠. 이게 바로 최승희가 친일 행동을 했다는 문제로 야기 됩니다. 뭐 친일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당위성도 있겠지만, 안할수도 없었던 상황이었으니까 아마도 했겠죠. 그래서 적극적으로 황군위문을 나가게 됩니다.

관동군위문을 나가게 되면서도 관동군들도 이제 그 최승희의 명성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최승희와 안막이 묘한 일들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안막의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인데, 이 시간이 끝나면 북한으로 넘어오는 안막의 얘기가 나오기 시작할텐데 황군을 위문하는 과정에서 조선병사들을 볼 경우 안막은 관동군 위문을 가면서 조선출신 병사들에게 연안으로 넘어가라고 충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연안은 그당시 모태통과 주울래같은 팔로군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지역이죠. 장계석군이 아니고 연안으로 넘어가라고 하는 안막의 얘기는 안막이 넘어갔던 북한에서의 삶을 많이 유지시켜주는 그런 틀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기록이 보여집니다. 최승희가 돈을 받고 공연을 했는데 안막이 살짝 들어와서 돈을 가지고 어디로 갔다. 훗날 이것이 연안에 있는 독립동맹으로 보내진 것이다라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이제 지영희가 한 말인데 바로 연안에 들어갔다는 것이 입을 통해서 전해지게 되는 것이죠. 황군위문이라는 것을 몇 번 다녀온 최승희는 일본이 멸방해 가는 것을 보고 몇가지의 작전을 짭니다. 작전을 짠다는 것은 뭐 별다른 다른 얘기는 아닌데 이것이 일본에 대해 미군에의한 공습이 시작이 됩니다. 그러니까 공습이 시작이 되고 동경에 공습이 있게 되니까 안막이 최승희에게 여기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얘기를 하죠.

그러면서 아주 묘안을 냅니다. 무슨 묘안을 냈는가 하면 중국에 있는 일본군 위문을 가면서 동양무용을 위한 임시 북경연구소를 개소하자라는 묘안을 내죠. 그얘기는 일본을 탈출하겠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일본을 탈출하겠다는 얘기는 뭐냐하면 북경으로 가겠다는 얘기죠. 자 그러니까 1944년 최승희는 북경시에 있는 삼자대로, 지금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삼자대로에 집을 마련하고 최승희 동방무용연구소라는 것을 개소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최승희의 북경생활이 시작되게 되는 것이죠. 지금도 남아있는 조선족 무용수들은 바로 이 동방무용연구소에서 있었던 제자들이 꾀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안막의 행동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막은 북경생활을 하는 동안 그 이전까지는 성실하게 행정처리를 하고 최승희의 뒷바라지를 하던 것과 달리 매일저녁 술을 먹고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이것이 안막의 위장이겠죠. 그렇게 술을 먹고 방탕한 생활을 하던 사이에 바로 김두봉을 만나게 됩니다. 연안에 있는 독립동맹의 김두봉을 만나게 되는데, 김두봉을 만난다는 것은 워낙 안막이 또 카프의 작가였고,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최승희는 이러한 안막에 대해서 대단한 불안감을 느낍니다. 제발좀 그러지 말아달라고 얘기를 하지만 안막은 본격적으로 연안의 독립동맹의 일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독립동맹의 일을 보게 되면서 연안에 있는 중국공산당과 연계가 되는 것이죠.

오빠 최승일을 불러들일 수 밖에 없어요. 남편대신 일을 맡게 하고 자기 제자인 김백봉(김백봉은 안막의 동생인 안제승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과 함께 일을 하면서 조선춤과 중국무용을 가르치는 그런 과정을 하게 됩니다. 예술사적으로도 이 지역에서 최승희는 상당히 중요한 일들을 벌이게 됩니다. 공산주의와 연결되는 예술사 적으로 최승희가 연결이 된다는 것은 바로 경거라는 매란방하고 연결이 되죠.

그러면서 최승희의 시야가 확 넓어집니다. 동방적인 무용을 만들겠다. 그래서 자기가 지금 동경에 와 있고 연구소를 꾸미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거기서 매란방하고 얘기를 해서 무용 기초방법과 경험을 중국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다. 동방무극을 창조하는 것이 자기의 꿈이다. 이런 것을 얘기하죠. 경극의 대가인 매란방은 최승희에게 당신같은 세계적인 천재가 북경에 와서 연구소를 꾸민다는 것은 참 행운이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것이 44년~45년 전쟁 말기의 일이죠.

자! 그런데 문제는 최승희가 북경서 815를 맞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북경에서 8.15를 맞게 된다는 것은 일본을 탈출했고 북경에서 8.15을 맞게 됨으로써 최승희로서는 자기가 원했던대로 일본을 탈출했고 북경에서 8.15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제 우리가 815를 맞게 되자마자, 이것은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들 중 하나인데, 한국은 815가 되자마자 이제 해방이 ?榮쨉? 중국은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이죠. 동북삼성 지역에는 소련군에 의해서 해방이 됐고, 그 나머지 지역에서는 무슨일이 벌어지냐하면 공산당과 공민당의 장재석이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국공내전이 이제 벌어지게 되는 것이죠. 국공내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조선사람들, 중국에 있던 조선사람들은 한국으로 귀국을 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미 이제 한국에서는 건국준비가 시작이 되고 이럴 때 이니까 말입니다. 자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상당히 중요한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 뭐냐하면 바로 안막입니다. 44년부터 북경으로 넘어와서 김두봉과 연계를 짓고 있던 안막은 본격적으로 독립동맹과 연계를 시작을 한 것이죠. 8.15가 되자마자 독립동맹 그러니까 김두봉과 함께 평양으로 떠나버립니다. 그때 뭐 배편이 있었겠어요. 뭐가 있었겠어요. 그러니까 안막이 뭐 걸어가고 당나귀를 타고 가고 어떻게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평양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남편은 들어가 버리고 이렇수도 저럴수도 없게 되버린 최승희는 한국행을 결심을 하게 되죠. 그때 누구냐하면 김백봉과 결혼한 안재승이 북경에 도착하게 됩니다. 일본군에 탈출을 해서 이쪽으로 도망을 오게 된거죠. 바로 이 세사람, 김백봉, 안재승, 최승희가 이제 바로 해방이 되자마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는 데에도 이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죠. 왜냐하면 최승희가 일본군들의 그러니까 황군위문을 하면서 친일 행동을 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 있던 것이니까 또 남편은 북한으로 들어가서 북한정권의 창설에 깊이 개입을 하게 되고 최승희는 서울로 간다 말이죠.

이제 어쩔수 없이 한국으로 귀국을 하게 되는데, 최승희가 귀국을 하는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죠. 배를 타고 귀국을 해야 되는데 거기에서 도움을 받습니다. 이 누구냐 하면, 쑨리엔쫑이라는 사령관인데 군인이죠. 이 군인이 최승희를 알아보는 겁니다. 무슨 최승희의 공연을 봤던 모양이죠. 그래서 최승희가 귀국하는 편을 완전히 준비를 해 줍니다. 최승희는 미군이 제공한 귀국선을 타고 들어오죠. 그 배가 3척이 청진에 있었는데, 하나는 인천, 또 하나는 군산, 세 번째는 부산으로 가게 되는 배죠. 이 배 세척에 나눠타서(귀국선)들어옵니다.

최승희는 인천가는 배를 탔습니다. 묘한게 세대중에 한 대는 누가 타고 있었느냐 하면 박정희가 타고 있었죠. 그때 만주군의 장교를 하던 박정희는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쑨 장군은 장계석을 따라서 대만으로 가게 되는데, 이제 최승희의 뒤를 봐준거죠. 최승희가 가져가는 무용복까지 챙겨주는 것이고... 이 최승희가 귀국을 시작을 합니다.

최승희가 귀국한 것은 해방되고 1년 뒤인 1946년 5월29일 이었습니다. 그가 이제 누구인가 하면 화북지역에 있는 동포 1500명과 함께 최승희가 인천에 들어오는 것이죠. 자 그런데 이제 연안의 독립동맹에 남편은 가담을 하고 있었고, 남편은 북에 갔고, 인천에 도착한 최승희는 담담하게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동안 일본에서 자의든 타의든 친일을 한 것은 부인하지 않겠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최승희답게 얘기를 한 것이죠. 해방된 조국에 와서 뭘 가지고 소극제를 하겠느냐. 난 춤을 추는 사람이기 때문에 코리아발레로 이바지를 하겠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기자들이 물어보는,아픈 것을 물어보게 됩니다.

아픈 것을 물어볼 수 밖에 없는데 남편인 안막은 북한으로 갔는데 너는 왜 서울로 왔느냐라고 얘기를 할때 최승희는 예술은 서울서 하지 않겠느냐라고 얘기했습니다. 이 부부가 서로 헤어지게 되는게 남편은 평양에 가 있고 자신은 서울에 와 있는 이러한 형상이 됐습니다.

안막도 평양의 건국에 참여하게 되는데 핵심적으로 할 말이 뒤에 얘기를 하겠지만 그당시에 평양에 모이는 예술가들이난 사람들이 이제 제가 이념에 따라서 평양에 모여든다 이렇게 얘기를 했었는데 계열들이 여러 가지 계열들이 있다는 거죠. 첫 번째는 갑산파, 즉 항일 빨치산 계열의 김일성 동방항일련군출신들, 88여단 출신들이 들어오고, 두 번째 계열은 허가이, 조기천과 같이 러시아, 소련쪽에서 살던 소련파들이 들어옵니다. 그다음이 이제 남로당 사람들이 올라오게 되죠.

47년을 전후해서 대거 올라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박헌영과 임화 같은 사람들이죠. 지난시간에 제가 얘기를 드렸지만 자기 이념체계에 따라서 남북이 갈리면서 북쪽을 선택하는 예술가들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계열이 무엇이냐하면 독립동맹의 김두봉을따라 들어온 계열들입니다. 중국에서 공산주의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평양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초창기 그러니까 45년부터 50년사이 북한은 바로 이러한 계열,계층의사람들이 묶여져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6.25가 발발하고 김일성이 남침을 하죠. 그랬을 때 김일성이 제일먼저 했던 것이 뭐냐하면 정치나 이런쪽에 관여를 하지 않고, 조선인민군 창설에 제일먼저 힘을 기울입니다. 그 얘기는 묘하게도 그가 전면에 나서지 않고 군대 편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되는데, 제일먼저 김일성이 장악한 것은 군권입니다. 군사력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죠. 그 다음에 정치투쟁에 나서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는 후일, 그러니까 김정일역시, 김정일이 시작을 뭘 하냐하면 노동당 선전선동부의 비서부터 시작을 하는데 그때서부터 문화예술사업에 직접 관여를 하게 됩니다. 훈련이죠. 그다음에 이제 자기가 김일성의 그것을 받고 나서, 김일성의 후계를 받고 나서 그가 맡은것도 결국은 뭐냐 ,아버지하고 똑같은 일을 해요. 군권장악을 시작합니다.

지금도 위원장이라는 말이 국방위원장이라는 얘기죠. 군권을 장악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자기가 살아남는 것이라고 믿었겠죠. 아버지가 하는 것을 아들이 똑같이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45,46,47,48년에 이제 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형체가 나오기 전까지 김일성이 완전히 북한의 군사권을 장악하게 되는 문제가 되게 됩니다. 군사력을 장악하는 사이에 제일 앞장섰던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연안 독립동맹의 김두봉입니다.

김두봉과 함께 뒤늦게 참여했지만 카프의 출신인 안막이 참모로 함께 관여하게 되죠. 이 과정이 바로 안막이 평양에 들어가서 평양에 정착하는 과정입니다. 그러고 안막은 서울로 내려옵니다. 서울에 있는 최승희를 만나러 오게 된 것입니다. 부부가 재회를 하게 되는 것인데 최승희에게 안막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북으로 올라가자. 최승희는 고민이 되는 거죠. 최승희의 고민은 다음 시간에 얘기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