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戰時作家日記 - 金八峰, 李孝石, 蔡萬植, 鄭飛石, 桂容默

이강기 2015. 9. 2. 18:02
戰時作家日記 - 金八峰, 李孝石, 蔡萬植, 鄭飛石, 桂容默    
 
 
잡지명 대동아 제14권 제3호
호수 제14권 제3호
발행년월일 1942-03-01
기사제목 戰時作家日記
필자 金八峰, 李孝石, 蔡萬植, 鄭飛石, 桂容默
기사형태 문예기타

 

 

新世界史 첫 章」쓰든 날


金八峯


2월 11일


紀元節. 大東亞戰爭의 도가니속에서 마지하는 2,602년의 빗나는 紀元節이었다. 英國이 數億의 돈과 15년의 세월을 두고 築造한 要塞 新嘉坡가 그 金城鐵壁을 세계에 자랑하고 東亞의 咽喉를 扼한지 120여년, 마츰내 運이 盡하여 無敵皇軍의 馬蹄에 蹂躪되고야 마랐다. 초저녁부터 「라듸오」앞에서 「뉴-쓰」를 듯다가 「스위치」를 끈치 말고서 重大放送이 있을것을 드르라는 豫告를 받고는, 자리ㅅ속에 드러가서도 「아직 머렀나...아직 머렀나...」하여가며 귀를 「라듸오」에 기우리고 있을지음에 열시 반경이나 되었을가? 「皇軍은 마츰내 新嘉坡市街의 一角에 突入하였습니다.」하며 흥분된 어조로 「아나운서-」가 大本營發表의 「뉴-쓰」를 몇 번이고 거듭 읽는 것이었다. 나와 나의 안해는 부지중 「萬歲」를 불렀다. 「여보! 祝盃를 안드루?」하는 안해의 말에 「올치! 한잔 드러야겠군」하고서 나는 술병을 끄내가지고 찬술을 조고만 곱부로 석잔을 마셨다. 그리고는 쓰다가 둔 新嘉坡 陷落 祝賀詩를 마저 끝맺기로 작정하고서 午前 한 시 반까지 자지않고 이 詩를 썼다. 表題를 「新世界史의 첫 章」이라 하였다. 밤이 밝으면〈164〉 일즉이 朝飯을 먹고서 방송국으로 갖다주리라 하였다. 부탁을 바든지 10여일동안 절반 이상을 써놓고서도 끝을 맺지 못하든 이 詩를 이 밤에 완성하고나니 心身이 유쾌하다. 오늘 이밤의 이 감격을 영원한 것으로 맨들기 위해서 나는 더 많이 붓을 들고 일해야하리고 마음먹었다.



「豊年歌」보든날밤

李孝石


2월 15일 日曜 晴


종일 집에 눕다. 겨울동안의 怠惰는 불건당의 탓이니 나는 이것을 깊이 허물하지 않고 한가한 시간에는 반다시 몸의 保溫을 도모하기로 하고있다.
음력 초하로라 쓸쓸히 지나지도 멋해 저녁 호텔에서 S와 晩찬을 같이 하다. 식탁의 접시가 얼마 전 보다 한가지 줄고 사과쨈들도 버석버석한 것이 도모지 범절이 검박하기 짝없다. 흰식탁보와 꽃묵굼만이 변치않고 호사스럽다.
시간이 조금 느젔으나 東寶에서 조선영화 『豊年歌』를 보기로 하다. 또 하나의 ?作, 지금까지의 조선영화다, 거개 그러햇듯이 한 편의 민속적인 風俗圖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발서 영화다운 영화를 맨들어도 조흘때가 아닌가. 웨그리 상상력이 貧困하고 構成이 설필까. 영화인들의 一段의 분발을 바라마지 않는다. 金信哉의 演技는 個性的이여서 그것으로서 좋은 것이나 좀더 線을 정리했으면 한다. 가량 쓸데없는 몸 신융이라든지 번거러운 표정같은 것은 애낌없이 버리고 가급적 簡潔한 표현을 가지기를 바란다.

映寫의 도중에서 畵幅이 끈허지고 ?內에 불이켜지드니 라우드·스피이커가 싱가폴 陷落의 특별 『뉴으스』를 일너준다. 아나운서의 聲導로 觀衆이 萬歲를 和唱하다. 거리에 나서니 어듼지 없이 騷然한 기색이 떠돌며 축하의 裝飾 등이 발서 눈에 띄인다.

S와 헤여저 바로 집으로 향하다. 찬바람을 쏘인까닭인지 몸이 좀 거북하다. 밤이 지나면 다시 회복될 몸이언만.〈165〉



?兒는 나다

蔡萬植


3월 5일


감기로 社에 나가지 못했다.

정오경, 아침 열시에 男兒를 순산하였다는 기별이 나왔다. 기쁘다거나 반갑다는 생각보다, 一種의 마음 어두믈 느꼈다.

밤에, 「아름다운 새벽」 2회분. 疲困한 것을 무리하면서 오전 세 시까지 쓰다. 몸이 지탕치 못할줄 알면서도, 無可奈何다. - 일곱 시부터 세 시까지니 凡 7,8시간이다. 이 7,8시간을 겨우 2회분을 쓰느라고 고생을 하는 것이다. 대예술을 낳기위함이 아니요 한 갖 말과 문장을 가다듬는것 뿐이다. 딱한 노릇이다.

3월 6일
社에 나오는 길, 病院에 들어보니, 昨日 産後의 「子宮血腫」으로 출혈이 심했고, 手術을 했다고 한다. 「랑게루」注射까지 하고, 위험 상태인 모양이다.
新生兒의 생깁새는 그리 탐탁한 것이 아니었다.

3월7일
産母 經過 如前. 다행히 발열은 없다.
「半島之光」에의 繼續原稿 4월호 분을 熊超(揷畵)에게로 즉접 넘기다.

3월 8일
밤 늦도록 執筆. 몹시 疲勞하여가지고, 두 시에 자리에 눕다.
「文은 苦로다!」
이런 말을 문득 생각 - .



어떤날의 情熱

鄭飛石

 
X월 X일


오늘도 날씨는 따수워질 줄을 모른다. 立春이 지나고 雨水가 지나고,〈166〉 인제 驚蟄도 머지 않었는데 웨 日氣는 봄 다워질 줄을 모를까. 봄이 봄답지 않는 오직 그 한가지만으로도 나는 꽤 우울하다.
먼 산밑에 아지랑이가 끼고 양지짝 담밑이 장글장글 다사롭고 - 그런 날이 나는 얼마나 그리우랴!
社에 나와, 대강 일을 마치고나서 來日안으로 꼭 주기로 約束된 「綠旗」의 和文原稿의 게속을 썼다. 각까수로 끝은 막어놓았으나 통히 자신이 없어 내놓기가 무척 마음에 꺼리었다. 退社무렴에 鎔?兄이 茶집에서 기대린다고 전화해서 그리로 허둥지둥 달려가다가 도중에서 石薰兄은 맛나 같이갔다.
셋이 한자리에 모여앉고보니, 한자리에 모여앉었다는 오직 그 한가지만으로도 마음이 행복스러웠으나, 그것도 얼마 안해서 이번에는 셋이 모여 앉으므로해서 비로소 생겨나는 야릇한 분위긔에 우리는 다 같이 애수로웠다.
별로 이익도 해도 되지 못할 文學談을 오랜동안 주고받든 끝에 내가
「文學이고 뭐고 다 집어치고 아모 생각없이 산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스러울까」
하고 말했드니 石薰兄은 대뜸
「그럴지 모르지! 그러나 文學을 위하여 時間과 돈과 차지할 수 있는 모든 榮譽를 죄다 희생한 우리니, 우리는 끝내 文學의 길을 닦어나가면서 그것과 情死라도 해야지」하고 말하였다.
文學과 情死할 수 있는 그 情熱이 얼마나 귀여울가! 열시 가까이 되여서야 셋을 서로 激勵하는 말로 헤어졌다.
金華莊의 어두운 고개를 혼자 터벅터벅 거러올러가면서 나는
「나도 文學과 情死하자!」
하고 미친사람처럼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벼락편지 받든날


 

桂鎔묵


2월 24일


몇을동안 한 장도 없든 片紙가 오늘 마츰따라 마치 그 補充이나 하랴는것처럼 大門안이 하이얗게 片紙 배락이다. 엽서가 석장, 封書가 넉장 -
참말 벼락같은 편지들이다.

내 딸이 방금 XX校에 受驗중인데〈167〉 連히 用力을 좀 해달라.

隨筆原稿를 今明間으로 火急히 보내달라.

戰時作家日記를 26일까지 쓰라.
그러지 않아도 바쁜 마음이 더욱 바버진다.
隨筆은 鐵石같이 言約해 놓은 원고다. 督促의 깨우침에 期日이 밧작 닥아 왔음을 께다랐다. 그 자리로 붓을 잡았다.
한참 쓰노라니 열한시를 친다. 열한시면 九空炭이 드러오는 시간이다. 옷을 가라입고 薪炭가개로 나갔다.(下略 - 원문)〈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