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韓.中關係

중국조선족

이강기 2015. 9. 3. 17:05

중국조선족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은 1990년 현재 총 1,920,579명으로, 주로 길림성(1,181,964명) 흑룡강성(452,398명) 요녕성(230,378명)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 나머지는 내몽고자치구와 북경 천진 상해 항주 성도 제남(濟南) 서안 무한(武漢) 등지의 대도시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 중 전중국 조선족의 40% 이상이 집중되어 있는 길림성 연변(延邊) 조선족자치주(朝鮮族自治州)는 중국 내 조선족의 최대 거주 지역으로 약 80만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다.

조선족은 대부분 알타이어계에 속하는 한국어와 한글을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사는 극소수의 조선족들은 중국어와 중국문자를 사용하기도 한다.

중국의 조선족은 300여년 전에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한반도로부터 몇 차례의 대규모 이주를 거쳐 중국의 동북지구에 정착한 후에 서서히 형성된 하나의 새로운 민족 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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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 만족 조상 노이합적(努爾哈赤: 누르하치)이 여진의 각 부족을 통일한 후 후금(後金)을 세우고 그 세력을 요동(遼東)과 요서(遼西) 등지로 확장해나갔다. 1636년 그의 아들 황태극(皇太極)은 국명을 청(淸)으로 고치고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명왕조와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을 침공하였다. 무력에 못이긴 조선의 국왕은 청나라에 화의를 청하여 강화도에서 동맹을 맺고,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양국은 각자 자기의 영토를 지키면서, 영원히 우호관계를 유지할 것을 강조하였다.

1604년 청나라 군대가 중원으로 쳐들어가자 이때 여진의 각 부락도 그들을 따라서 함께 남하하여 여진인들이 살던 지역은 텅 비게 되었다. 통일 초기에 청나라 통치 계층은 이 지역의 개발을 돌아볼 틈이 없었지만, 충분한 논의를 거친 다음 1677년에 강희제(康熙帝)는 명령을 내려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수천리 지역을 금지구역으로 정하고, 이 지역 안에서 작물 재배, 인삼 진주 채취, 벌목 수령 등을 엄격히 금지시켰으며, 많은 금산(禁山)에 황제의 사냥터를 설치하여 다른 민족의 이주 정착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고 조선왕조의 학정에 시달린 조선의 빈곤한 농민들은 사방을 떠돌아다니다가 그들 중의 일부는 생존을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금지구역 안으로 몰래 들어와 정착하였다. 이러한 난민들의 끊임없는 유입은 청나라 정부와 조선 사이의 외교 분쟁을 유발시켰으며,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양국은 협의를 거쳐 공동으로 몇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1712년 5월 양국은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웠다. 청나라 정부는 국경 지대에 성벽을 쌓고 초소와 검문소를 설치하였으며, 봄 가을에 국경 지대를 순찰하여 법을 어기고 들어와 몰래 경작하는 자가 발각되면 집과 전답을 몰수하여 없애고 국경 밖으로 추방하였다. 조선정부에서도 국경 지대에 군대를 배치하여 국경을 봉쇄하고 그곳을 넘어가는 자에 대해서는 극형으로 다스렸다.

조선의 빈곤한 농민들이 금지구역에 몰래 들어와 정착하는 것을 양국 정부 모두 엄격한 방법으로 통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잠입은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 처음에 금지구역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무역상들이었다. 청왕조 초기에 압록강 상류의 평안도와 함경도는 토지가 척박한 데다가 잇따른 자연재해로 흉년이 계속되어 생활필수품도 매우 부족하였다. 이에 궁지에 몰린 조선의 농민들은 생존을 위하여 압록강 상류를 몰래 건너 중국 동북의 장백(長白) 임강(臨江) 집안(輯安) 및 외남북로(外南北路) 일대로 들어왔다. 같은 시기에 두만강 남쪽에 살던 조선 빈민들도 무산(茂山) 회령(會寧) 종성(鍾城) 등지에서 두만강 상류를 건너 중국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처음에는 아침에 들어와 경작을 하고 저녁에 돌아갔으나, 뒤에는 매년 청명절을 전후하여 농기구와 종자를 가지고 들어왔다가 가을에 작물을 수확하여 그것을 가지고 돌아갔으며, 마지막에는 아예 전가족이 이주하여 오랫동안 집을 짓고 살면서 농사를 지었다. 이에 대하여 청정부에서는 그들을 추방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였지만 결국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1845년(道光 25년) 이후 양국 정부의 통제가 다소 느슨해진 틈을 타서 국경을 넘어와 정착한 조선 빈민들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1840년의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중국은 점점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전락하였다. ≪중러애휘조약(中俄愛琿條約)≫ ≪북경조약≫ 등의 불평등조약의 체결로 동북 지역은 세계 자본주의 열강의 상품 판매 시장이자 원료 약탈지가 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조선왕조도 러시아 미국 영국 등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국력이 쇠약지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하였다. 1860년부터 1870년에 이르는 10년간 조선의 북부 지역에는 수해와 한해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여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죽음의 기로에 선 조선의 이재민들은 생존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 중국의 동북 지역으로 들어왔다. 기록에 의하면 1870년을 전후하여 집안현(輯安縣, 지금의 集安市)으로 이주해 온 조선 이재민의 수는 무려 1000호를 넘어섰다. 그리하여 임강(臨江) 집안과 혼강(渾江) 유역에는 모두 조선의 이재민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청왕조와 조선 정부에서는 국경 봉쇄 조치를 취하였지만 끊임없이 들어오는 조선 이재민들을 더 이상 막을 방법이 없었으며, 청왕조의 지방 관리들도 어쩔 수 없어 그들의 정착 생활을 묵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극도로 피폐해진 청나라 정부에서도 고갈된 재정 상황을 만회하기 위하여 많은 논란을 거친 끝에 광서(光緖) 원년(1875년)에 이르러 봉천성(奉天省, 지금의 요녕성과 길림성 동남부)의 봉쇄령을 해제하였다. 그 이듬해는 이 지역에 봉황직례청(鳳凰直隷廳)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안동현(安東縣, 지금의 丹東市)을 두었다. 1877년에는 관전현(寬甸縣) 회인현(懷仁縣, 지금의 桓仁)과 도씨현(道氏縣) 등을 증설하여, 안동현과 관전현을 변외남로(邊外南路)로 삼고 봉황직례청에 예속시켰으며, 회인현과 통화현(通化縣)을 변외북로(邊外北路)로 삼고 흥경청(興京廳)에 예속시켰다. 이와 동시에 무민국(撫民局)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개간을 지원하였다. 청왕조는 봉쇄령을 해제하고 변방 이민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조선의 이재민들이 중국의 동북 경내로 이주하는 데 합법적인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1883년 3월 청나라 정부에서는 동쪽의 무역로 활성화라는 측면에서 조선 정부와 ≪봉천동변민교역장정(奉天東邊民交易章程≫을 체결하였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이 장정의 체결은 양국의 국경 무역을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의 동북 이주로를 더욱 확장시켰다. ≪조선족간사(朝鮮族簡史)≫의 통계에 의하면, 1897년 통화 회인 관전 흥경(興京, 지금의 요녕 新賓縣) 등지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8722호, 37000여명으로 모두 28개의 면(面, 지금의 鄕級 행정단위) 단위에 소속되었다. 1903년 봉천성에서는 압록강 북쪽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촌(村)과 영(營)을 향(鄕)과 갑(甲)으로 개편하고 향약제(鄕約制)를 시행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중국으로 이주해 오는 조선인들의 수는 더욱 증가하였다. 1911년에 이르러 변외북로(邊外北路)의 장백 임강 집안 등지에 정착한 조선인들의 수는 12100여호, 52100여명이었고, 변외남로(邊外南路)의 안동 봉성(鳳城) 관전 등지에 정착한 조선인들의 수는 1490여호, 6850여명이었다.

흥경은 조선인들이 비교적 일찍 이주해 온 지역의 하나이다. 그들은 대부분 집안 회인과 통화 등지에서 이주해 왔으며, 그들 중의 일부는 다시 무순(撫順) 본계(本溪) 청원(淸源) 등지로 퍼져나가 정착하였다. 동북의 대도시 봉천(지금의 沈陽) 지역 내의 조선인들은 주로 1906년 이전에 한반도 북부에서 이주해 왔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후에 일제의 학정에 시달린 농민들과 애국 독립투사들이 다시 봉천 일대로 많이 들어왔다.

연변은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지역이다. 19세기 중엽부터 한반도의 정세는 대내외적으로 혼란에 빠지고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아 많은 빈민들이 재난을 피하여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왔다. 1875년 청나라 정부에서 봉쇄령을 해제하고 이민정책을 시행하였다. 1881년 길림 장군 등은 남강(南崗, 지금의 延吉市) 등의 황무지에 이민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에 혼춘(琿春)에 초간총국(招墾總局)을 설치하였다. 1882년 돈호지현(敦化知縣)을 설치하고 조선인들을 모집하여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1885년 청나라 정부에서는 두만강 이북의 길이 700리, 너비 45리에 이르는 지역을 전간구(專墾區)로 삼았다. 그리고 1883년에 설립한 화룡욕(和龍 , 지금의 龍井縣 智新鄕) 광제령(光霽嶺, 지금의 龍井縣 光開鄕) 서보강(西步江, 지금의 琿春縣 三家子鄕 古井村) 등지의 통상국잡(通商局 )을 월간국(越墾局)으로 고치고 조선인의 이민 업무를 겸하도록 하였다. 1891년 길림 장군은 혼춘 이민총국과 월간총국을 월간총국으로 통합하고 남강으로 이전하여 하얼바령(哈爾巴嶺) 이동의 광활한 지역을 남강 초간국 관할로 편입시켰다. 이러한 조치들은 연변 지역 개발에 대하여 많은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정부에서는 전문 기구를 설립하여 조선인들을 모집하고 황무지를 개간함으로써 국고 수입을 늘린 동시에 지방 관리들과 지주들도 갖은 방법으로 재원을 늘려나갔다. 그들은 숙식과 농기구 종자 등을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조선인들을 고용하거나 황무지를 그들에게 임대하여 개간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좋은 조건으로 조선인들의 이민은 갈수록 더욱 늘어났으며, 그들은 두만강 유역 등지에 촌락을 세우고 중국 경내의 고정적인 하나의 민족 성원이 되었다.

1890년 중국의 동북 지역에 일찍부터 눈독을 들인 제정러시아는 의화단운동이 동청철로(東淸鐵路)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것을 구실로 군대를 동원하여 중국을 침략하였으며, 이로써 연변과 조선 북부 지역은 제정러시아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조선 북부의 많은 조선인들은 외세의 치욕과 착취를 견디지 못하고 연변 지역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1909년에 이르러 연변에 정착한 조선인 수는 34133호, 184867명으로 늘어났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 점령한 후에 많은 파산한 농민들과 항일투사들이 연변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1910년 9월부터 1911년말까지 이주해 온 사람만 19000여명에 달한다.

봉쇄령의 해제와 함께 조선인들은 시베리아와 연변에서 북만주로 이주하여 동녕(東寧) 영안(寧安) 해림(海林) 목릉(穆 ) 등지에 조선 간민촌(墾民村)을 세웠다. 1900년 동청철로를 건설하기 위하여 제정러시아는 시베리아와 조선에서 많은 조선인 근로자를 모집하였다. 철로가 완공된 후에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하얼빈 일면파(一面坡) 횡도하자(橫道河子) 목릉 등 동청로 동쪽의 모단강(牡丹江)과 목릉하(穆 河) 유역에 거류하였다. 우수리강 연안의 무원(撫遠) 요하(饒河) 호림(虎林) 보청(寶淸) 밀산(密山) 등지의 조선인들은 먼저 시베리아에서 이주해왔고, 그 후에 다시 계속하여 동만주 남만주 한반도에서 이주해왔다. 치치하르(齊齊哈爾)의 조선인들은 한반도 북부로부터 시베리아를 거쳐 이주해왔고, 만주의 조선인들은 19세기말 영고탑(寧古塔)에서 눈강(嫩江) 유역을 거쳐 이주해왔다.

빈번한 이주와 왕래를 통해서 조선인들은 중국 동북의 만족 한족 등과 함께 다양한 모습으로 섞여살게 되었다. 이주 초기에 조선인들의 생활은 매우 비참하였으나, 만족과 한족을 비롯한 주변 민족의 도움과 자체적인 노력으로 점점 생활은 개선되어 나갔다. 이로부터 오랜 풍파를 거치면서 그들은 동북의 각 민족 백성들과 함께 생존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조선족이라는 새로운 하나의 민족공동체로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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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은 풍부한 투쟁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반제 반봉건과 관료자본주의 투쟁을 하면서 많은 생명과 선혈로써 중국사의 한 장을 수놓았다.

1930년대부터 동북의 강산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이 지역에 살고있던 조선족들도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1933년부터 1935년 사이에 연길현(延吉縣)에서만 2만여명이 일제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다. 이와 동시에 일제는 중국 항일세력과 조선족의 연합을 막기 위하여 강제 수용소 정책을 추진하자 조선인들을 삶의 터전인 집과 땅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일제의 잔혹한 통치 앞에서 영웅적인 조선족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고, 중공연변구위(中共延邊區委)와 함께 항일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1930년 봄부터 1932년 봄까지 그들은 연변지구에서 "5 30폭동" "8 1길돈(吉敦)폭동"과 추수(秋收) 춘황(春荒) 등의 투쟁을 연속적으로 전개하여 일제의 오만한 기세에 많은 타격을 가했다. 유명한 항일부대인 동북항일연합군 속에서 조선족 지휘관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11개의 군급 편제 단위 속에는 모두 조선족 항일지사가 있었다. 그 중에서 제1군과 제7군은 절반 이상이 조선족 항일지사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백두산과 흑룡강 사이에서 일본군을 맞아 생사를 돌보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다. 그들의 이러한 영웅적인 투쟁은 중국항일혁명사상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 외에도 조선족들은 의복과 식품을 제공하거나 정찰 통신 업무를 맡는 등 다른 방법으로도 항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항일전쟁 중에 조선족들은 다른 소수민족들과 함께 일제를 물리치기 위하여 공동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서로를 지원하면서 감동적인 사적을 많이 남겼다. 예를 들면, 1931년 3월 하순, 중공 동만특위(東滿特委) 서기 동장영(童長英)의 병세가 위독한 상태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적에게 발견되었는데, 그때 동장영이 잘 걷지를 못하자 그의 간호사이던 조선족 여인 최숙정(崔淑貞)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은 채 동장영을 업고 이리저리 피해다녔으나 결국 혼자의 힘으로 역부족이어서 두 사람은 최후의 탄알을 쏘고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그리고 1938년 가을, 냉운(冷雲) 안복순(安福順) 등 8명의 조선족과 한족 항일연합군 부녀단의 여전사들은 극악무도한 적군들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일어났다가 탄약과 식량이 다하자 함께 오사혼하(烏斯渾河)로 몸을 던져 영광스럽게 목숨을 바쳤다. 이 8명의 여인이 강물에 몸을 던진 비장한 이야기는 대대로 전해오면서 각 민족이 일제에 대항하여 함께 싸운 상징이 되었다.

≪조선족간사(朝鮮族簡史)≫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족들은 항일전쟁에 물질적으로 최대한의 지원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적으로도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 10여만명의 조선족들이 어렵고도 힘든 전투에 참가하여 만여명의 조선족 전사들이 항일전선에서 목숨을 바쳤는데, 연변 조선족자치주만 하더라도 1713명의 조선족 항일 열사가 있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후 중국에는 다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에 5만여명의 조선족들이 중국인민해방군에 가입하여 해방전쟁에 참가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연변지구에서만 참전 용사가 52051명에 이르렀는데 그 중 85%가 조선족이었다. 그들은 이 전쟁에서도 용감하게 선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전선의 지원과 구호 활동 등에서도 조선족들은 눈부신 활약을 하여, 연변지구에서만 전선을 지원한 사람들이 222300명에 달했다.

(이 글은 '연변통신' 독자투고란에서 2012년 2월 25일에 퍼 온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