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의 軍史世界
東西文明衝突史
충돌로 이뤄진 東西교류사 지중해 연안 북부 아프리카를 포함하여 유라시아대륙을 東과 西로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딱히 정의를 내리기가 곤란함 점은 있습니다. 다만 관습적으로 우리는 이전부터 세계를 동양과 서양으로 나누어 볼 때 다음과 같은 암묵적인 기준을 적용 하곤 하는데...이 또한 생각의 차이가 조금씩 있습니다. 백과사전을 인용하면...
서구인이 생각한 orient 인더스강 서쪽에서 지중해 연안까지 펼쳐져 있는 지역으로 이란,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및 아라비아와 이집트를 포함한 지방을 가리킨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에서는 지중해의 동쪽에 있는 여러 나라의 의미로 특히 동부아시아 (동양) 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중국인이 생각한 東洋 터키의 동쪽에 있는 아시아 여러 나라를 통틀어 일컫는 말로 東洋과 西洋의 구별은 중국인이 南海에 대한 지식이 한층 깊어졌던 13세기에 생겨난 것으로, 명나라 때 중국에 건너온 유럽 선교사가 세계지도에 漢字로 설명을 하여 나타났다. 현재는 西洋 (유럽) 에 대응되는 말로서 사용되며, 대체로 터키 동쪽의 아시아 전 지역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이를 바탕으로 저는 동과 서를 유라시아 대륙의 유럽권 대 비유럽권으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 때로는 단지 동쪽과 서쪽이라는 지리적인 개념으로도 인용 하고자 합니다. ) 역사가 쓰여진 이래 인류는 유라시아라는 커다란 하나의 땅에 같이 있으면서 때로는 협력을, 때로는 경쟁을 통하여 역사에 커다란 획을 긋습니다. 아쉽게도 우리가 배워온 역사책을 살펴보면 협력의 내용보다 경쟁의 기록이 난무 (?) 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 합니다.
이러한 과정 중 경쟁의 최고점인 전쟁이 수없이 발생 하였고 그러한 전쟁은 진행과정에 있어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 전투 " 가 있었으며, 이러한 전투들의 결과로 세계사는 역사에 커다란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대로 ( ? ) 세계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되는 11개의 전투를 선정하여...여기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보고 그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자 합니다.
아직까지 내려오는 이야기
* BC 490 년 마라톤 전투 Battle of Marathon
페르시아는 BC 6세기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소아시아 연안에 있는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도시들의 반란을 진압한 당시 東西를 통일한 세계제국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 는 발칸반도 진출을 시도하였고...때문에 이곳에 정착하여 문명을 개화하고 있던 그리스 도시국가들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페르시아는 거의 100년에 걸쳐 전쟁을 치루었는데...저는 이것을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東西文明衝突 로 보고자 합니다. 페르시아 전쟁은 크게 3차례 ( 학자에 따라 2차례 ) 에 걸쳐 벌어졌는데, 이는 동방의 진출을 서방이 성공적으로 방어한 형태의 전쟁이자 전제군주국의 침략을 민주 ( 당시 기준으로 ) 연합이 물리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 아테네, 스파르타 등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의 동맹의 이합집산이 이뤄지며 그리스문명을 꽃 피우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러한 페르시아 전쟁중 제 2 차 전쟁의 분수령 마라톤전투는 그 잔영이 아직까지도 내려오는 뜻 깊은 전투라 할 수 있습니다.
* 전쟁기간이 길고 전투도 많아 테르모필레 전투, 살라미스해전, 플라타이아 전투 등을 놓고 고민했으나 그중 아직도 역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마라톤전투를 선정하였습니다.
다리우스1세의 원정군은 델로스섬 등을 정복 후 아테네를 공략하기 위하여 마라톤에 상륙하였고 이에 아테네는 여기에서 적을 맞아 싸울 작전을 세우고 밀티아데스 지휘하에 약 1만의 중장보병군을 마라톤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포진하여 기회를 엿보다 공격으로 나서 페르시아군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그리스의 용사 페이디피데스 가 마라톤 전장에서 아테네까지 약 40 km 를 달려 승리를 알리고 운명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하여 오고, 이를 기념하여 마라톤이 유래 되었다는 것은 다들 알 고 있으리라 생각 됩니다.
패전국 페르시아의 후예 이란 은 마라톤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1974년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제7
회 아시안게임때 마라톤 종목을 삭제하였던 적도 있습니다.^^
* BC 333 년 이수스 전투 Battle of Issus
같은 그리스 도시국가 이면서도 왕따 (?) 를 당해왔던 마케도니아 는 필리포스2세 등장이후 그 힘을 서서히 키워 그리스 도시국가 대표인 헬라스 연맹 의 맹주로 뽑혀 그리스의 패권을 잡게 됩니다. 그후 20세 ( 으흠...어이쿠 ) 에 등극한 알렉산더 는 변방의 반란을 진압하고 백여년이상 그리스를 압박한 페르시아에 대한 원정을 나갑니다.
이것은 그리스 및 오리엔트지역의 통일을 이루려는 두 세력간의 세계대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견해로는 서방세계의 최초 東方進出 이라고 생각 합니다.
당대의 지성 아리스토텔레스 등으로 부터 학문을 전수받고, 父王 필리포스2세로부터 전술 및 행정등의 실제적인 일을 배운 뛰어난 지략의 소유자 알렉산더대왕은 BC 323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기 직전 까지 끓임 없는 정복 전쟁을 하였고...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거대 제국을 이루게 됩니다.
당시 그리스의 기준으로 西北쪽은 야만인이 사는 황무지 였고, 東으로는 인더스강이 세상의 끝이라 생각 하였으며, 南으로는 끝없는 사막지대라...알렉산더가 세계를 정복 한 것으로 인식 되었습니다. 즉, 세계통일을 이룬 것입니다. 만인동포관을 가졌던 알렉산더는 정복지의 피지배인들을 차별하지 않음으로써 훗날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친 헬레니즘 문화 라는 문화사적 업적을 세계사에 기록 합니다. 영웅의 눈물
* BC 202 년 자마 전투 Battle of Zama
그리스의 문화와 문명을 계승 발전하여 세계제국으로 성장한 나라가 있으니..그것이 바로 로마 였습니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감에 있어 해양 세력으로 부를 모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던 카르타고 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둘러싼 동서 결전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역사가들은 BC 3세기 중엽에서 BC 2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3차에 걸쳐 있었던 고대전쟁을 포에니 전쟁 이라고 칭하는데...승자 로마가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전체에 걸친 세계제국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중 역사적 분기점이 된 것은 한니발전쟁 이라고도 불리는 2차 (BC 218∼BC 201) 전쟁 이었습니다.
[ 한니발 과 스키피오 ]
후대에 두고 두고 불운한 영웅으로 회자되는 한니발은 피레네산맥과 알프스산맥을 넘어 북에서 로마를 공격하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전략으로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으며, 후대 군전략가들이 아직도 교범으로 삼는 깐네 전투 를 통하여 소수지만 기동화된 집중전력으로 대군을 포위 섬멸하는 놀라운 작전을 선 보였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바꾼 것은 깐네전투가 아니라 한니발의 주력을 이탈리아반도내에 묶어두고 오히려 카르타고 본토를 침공하여 승부를 내었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의 전략에 의하여 세계사가 결정 됩니다.
본토 방위를 위해 급거 귀국한 한니발과 건곤일척의 대회전을 벌인곳이 자마인데 한니발의 전술을 역으로 이용한 스키피오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제1차전쟁 패전의 수모를 갚기 위하여 절치부심하여 승리를 목전까지 두었던 위대한 명장 한니발은 신이 카르타고를 외면 하였다며 눈물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후 기력이 쇠한 카르타고는 3차 (BC 149∼BC 146) 전쟁에서 철저히 파괴 당함으로써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됩니다.
* BC 31 년 악티움 해전 Battle of Actium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로마제국의 서부를 맡아 통치하였고, 안토니우스는 소아시아와 이집트 지역을 맡는등...분할 통치로 서로간의 충돌을 피하면서 혼인등을 통하여 화해의 시도도 (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누이동생 옥타비아와 결혼 ) 하여 보았지만 하나의 하늘 아래 두개의 태양이 없는 법처럼 그들은 로마의 패권을 놓고 마지막 자웅을 겨루게 됩니다.
* 내전 성격이 강한 전쟁 이었지만 옥타비아누스가 대륙의 로마를 대표 한다면, 이집트와 연합하여 대항한 안토니우스가 오리엔트지역을 발판으로 하였으므로 동서문명의 충돌로 보고자 합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오리엔트의 왕국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결혼하였고 이를 기화로 로마 제국의 실권을 놓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간에 대결을 이뤄집니다. 이들이 자웅을 겨룬 곳이 그리스 북서부 안부라키아만 앞에 있는 악티움 근처입니다.
최초 육전을 주창한 안토니우스가 해상 결전을 고집한 클레오파트라의 의견을 받아들여 ( 여자의 미모에 속지 맙시다 ^^ ) 해상에서 옥타비아누스 함대와 격돌하게 됩니다. 양 진영은 각각 500척 이상의 함선과 10만여명의 병사를 동원합니다. 이때 옥타비아누스의 부장 아그리파 가 바람의 방향을 계산한 기묘한 전술로 기선을 제압하여 이집트-안토니우스 연합함대를 격파 합니다. 이것으로 승패는 결정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로써 수천년 역사를 간직한 오리엔트의 마지막 왕국이며 알렉산더가 이룩한 헬레니즘 문화를 계승하고 있던 이집트가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자살로 종말을 고하고 로마는 옥타비아누스의 일인 독제체제가 성립됩니다. 로마의 원로원은 군사권과 속주 통치권을 옥타비아누스에게 부여하고 존엄한 사람 이라는 뜻의 augustus 라는 존칭을 부여합니다. 이때 그라니코스전투, 가우가멜라전투 처럼 페르시아와 건곡일척의 승부를 겨룬 전투가 많이 있었지만 후대에 벽화등으로 기록 될 정도로 유명한 이수스전투야 말로 동서 세력균형의 중심이 서쪽으로 기울게 된 기념비적인 전투였습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 의 대군을 소아시아 반도 끝의 이수스에서 쳐부수게 됨으로써 알렉산더는 동방원정의
교두보를 확보하였고 대제국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 방향으로 후퇴를 하여 결국에는 패망에 이르게 됩니다.
중국 25史 의 제1권이라 할 수 있는 사마천의 史記 에 등장하는 匈奴 가 훈 (Hun) 이라고 보는 견해가 맞다면...中原에서 漢-흉노의 혈투가 전세계 역사 ( 특히, 유럽사 ) 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앞의 이론이 맞다면 漢武帝 에 밀려 ( 한이 흉노를 이겼다고 보지 않는 견해도 있습니다. ) 코카서스로 이동한 훈족의 압박으로 그곳 원주민인 게르만이 서유럽으로 대이동을 하고 이로 인하여 결국 로마 ( 서로마 ) 가 멸망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훈의 기마병과 아틸라 대왕 ]
서기 375년 아시아로부터 온 기마집단이 동유럽을 유린하자 로마 세계권은 공포의 도가니에 빠지게 됩니다. 당시 유럽인들은 기마병과 말이 그렇게 혼연일체가 된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훈족중 아틸라 ( 434 ∼ 453) 가 이끄는 훈의 일파가 5세기 전반에 지금의 헝가리인 트란실바니아를 본거로 하여 주변의 게르만족과 동고트족을 굴복시켜 동쪽은 카스피해에서 서쪽은 라인강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이들은 동로마를 위협하여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으며, 갈리아 ( 지금의 프랑스 ) 까지 침입하였습니다. 이때 서로마의 장군 아이티우스 는 451년 로마군과 게르만 제부족의 연합군을 이끌고 북프랑스의 카탈라우눔 평야에서 이를 무찔러 격퇴시켜 아틸라의 로마정복의 꿈을 단절시킵니다.
[ 카탈라우눔 전투 ]
하지만 전투는 비록 로마가 승리 하였지만 세계사적 흐름으로 볼때 훈의 서진을 일시나마 정지시킨 작은 사건에 불과 하다고 하겠습니다. 즉, 승자인 로마도 결국 얼마 못가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453년 아틸라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대제국이 급격히 분열 쇠퇴하여 훈족은 다뉴브강 하류지방으로 후퇴하여 타민족과 혼혈,동화되어 소멸되며 유럽은 훈의 공포로 부터 해방이 됩니다.
* Hungary 라는 국명에서도 알수 있듯이
훈족의 영향이 아직도 유럽에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틸라 사후 800년뒤 훈족과 사촌지간이라 할 수
있는 몽골 의 내습시 유럽의 최일선에서 이를 막아내느라 고생한 나라가 바로 헝가리라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7세기에 발흥하여 동으로는 인도서부까지 ( 13세기 중반까지 ) 서쪽으로는 이베리아반도에 이르는 ( 15세기 말까지 ) 지역을 무대로 흥망한 사라센 이라 불리는 이슬람 왕조가 있었습니다. ( 사라센이라는 국호를 가진 왕조가 존재한 것은 아니고, 이슬람제국의 통칭 또는 타칭으로 봅니다. )
유럽일부 및 중근동에 이르는 대제국을 활동 기반으로 하여 이슬람을 전파하였으며, 유럽이 중세의 암흑기에 빠져 있을 동안 그리스-로마시대의 앞선 과학 문물과 문명을 보존 발전시켜 차후 르네상스시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어쨌든 이들의 등장으로 東西라는 구분이 그리스트교를 믿는 유럽세계 와 이슬람을 믿는 비유럽 세계 로 구분이 되어...인류사에 현재 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또한 祭政一致 사회 형태를 가지고 있던 관계로 중세유럽과 사라센 이슬람의 충돌은 피 할 수 없었습니다.
[ 사라센의 창기병 ]
지금의 프랑스와 스페인을 가르는 자연국경인 피레네 산맥 남쪽을 차지한 이슬람 세력은 에스파냐 총독 압둘 라흐만 의 지휘로 900 여년전 한니발이 그랬던 것처럼 산맥을 넘어 유럽의 한가운데로 진격하였습니다.
로마 멸망후 흥망성세한 여러 게르만 왕국중 두각을 나타내던 프랑크왕국 이 이러한 이슬람의 서진을 막는데 앞장서게 됩니다. 프랑크의 宮宰 칼 마르텔 은 보르도를 함락시키고, 아키텐을 격파한 후 서프랑스 근방으로 무적 진군하는 이슬람세력을 투르- 푸아티에 사이에서 치명적 타격을 주어 ( 라흐만 전사 ) 이슬람을 피레네 남쪽으로 밀어 냅니다.
이 전투는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를 이슬람화의 위기에서 구출한 것으로 유럽역사에서 중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이 서유럽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된 것은 나스르왕조 ( 그라나다 왕조 ) 가 1492 년 정복되고 부터이고 동유럽은 보스니아나 아제르바이잔 처럼 이슬람세력이 아직도 일부 남아 있습니다.
만일 투르-프와티에 전투에서 이슬람이 승리하였다면 현재 유럽은 이슬람세계였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사가들도 있을 정도로 크리스트교의 기념비적
전투라 할 수 있겠습니다. 혹시, 이슬람화 되었다면 지금의 중동문제도 없지 않을까 상상 해 봅니다. 세계사에 등장한 Korean
( 앞전에는 사라센이 동양의 대표로 소개 되었지만...이곳에서는 극동 唐나라의 서진으로부터 서양을 최일선에서 방어하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 )
당나라는 유사이래 우리역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중국 왕조 였고 백제 와 고구려 의 멸망에 커다란 흔적을 남깁니다. 최근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미명하에 고구려를 자국의 지방사로 편입하려는 간교하고도 흉악한 범죄행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즉, 고구려 - 수/당 전쟁을 내전으로 규정하려고 합니다. 이런 공작에 조선족 역사학자들이 많이 참여 하였다는 뉴스를 듣고 할말이 없더군요.
어쨌든 747년 서쪽으로 팽창하던 당나라 세력을 견제하려 토번 ( 티벳 ) 과 사라센제국이 동맹을 맺자, 行營節度使에 발탁되어 토번족의 정벌을 위하여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신강을 거쳐 토번의 군사기지 연운보를 격파후 파미르를 향한 서역 정벌에 나선 위대한 장군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고구려 유민 2세인 고선지 ( 高仙芝 ) 입니다. 고선지는 중국의 사서 뿐만 아니라 이를 인용한 영문 사서에서도 korean 으로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서역 정벌의 대미는 빙하로 덮여있는 해발 4,580미터의 힌두쿠시산맥 탄구령을 군사를 이끌고 넘어가는 것 이었습니다. 20세기초 이 고개를 실제 등반한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대탐험가인 스타인은 고선지의 원정은 한니발이나 나폴레옹의 알프스원정을 능가한다라고 기술하였습니다.
실크로드의 천산남로, 천산북로, 서역남로의 세 길을 모두 장악한 지배자로 떠오른 고선지는 동진하던 사라센제국의 30만 호라산군대 와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의 패권을 두고 카자흐스탄 탈라스평원 에서 정면으로 맞붙게 됩니다. 중앙아시아의 운명을 결정한 5일간의 대전투로 기록되고 있는 탈라스전투가 바로 이것 입니다.
그러나 고선지는 예하 돌궐족의 반란으로 최초의 패배를 하게 되며 오늘날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서역이 이슬람권으로 굳어진 것이 바로 이때 이후부터 입니다. 고선지 이후 지금까지 중국의 중앙아시아지역으로 진출이 좌절 됩니다. 이 전투로 제지술이 아랍을 통하여 유럽까지 전해지게 되며 이는 르네상스의 뿌리가 되게 됩니다. 종이문명을 접하게 된 아랍과 서양은 학문을 일으키고 오늘날의 기록문명이 있게 한 밑거름 된 것 입니다.
하지만 명분과는 달리 이슬람이 순례객을 박해하였다는 구체적인 증거도 없었고 유럽각국 ( 특히, 이탈리아 제후국 ) 의 경제적인 이해타산 및 로마 교황청과 비잔틴 제국 ( 동로마 ) 의 교권 투쟁등의 추악함이 배경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십자군 원정기간동안 수 많은 도적질, 학살등은 과연 십자군운동이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 의해서 이뤄 졌는지 많은 의문을 갖게 합니다. 십자군전쟁으로 동서문명간에 많은 전투가 벌어 졌지만...결론적으로 이슬람세력의 승리로 귀결 지을 수 있겠습니다.
1회 십자군을 제외 한다면 나머지 원정은 실패하였다고 생각 됩니다. 또한 세계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던 전투도 사실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의 전쟁중에 영웅이 등장 하는법...제3차 십자군 전쟁에 있었던 예루살렘 전투의 두 영웅 리차드1세 와 살라딘의 우정은 후세에 길이 남아 있습니다.
[ 학살의 침략전쟁 십자군과 두영웅의 모습 ]
사자왕 리차드1세는 父王 을 내쫓고 잉글랜드 왕이 되었으나 재위 10년중 본국에는 반 년밖에 있지 않고 전쟁터에서 전사 할만큼 정력적인 대외 활동을 펼친 관계로 국내 정치는 무능하였으나, 전장에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영웅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중세기의 전형적인 기사로서좋은 평을 받았습니다.
유럽인들도 높게 평가하는 살라딘은 현재 국가 없는 최대민족이라는 쿠르드족 출신으로 전투지휘에 뛰어난 용장, 맹장, 덕장 ( 갖출 것은 다 갖춤 ) 입니다. 1회 전쟁때 빼앗긴 예루살렘을 2차 전쟁때 회복 하였지만 1차 전쟁때 이슬람들이 대학살 당한 것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던 부하들 에게 살상을 금지하였고 이곳에서 항복한 크리스트교인들을 자유롭게 풀어 주었습니다.
그는 이슬람 강경파에 맞서 타종교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관용의 미덕을 갖춘 인물이었으며,
전리품들을 자신과 함께 싸운 전사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사리사욕적인 축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을때 친지들이 돈을 빌려 장례를 치루었다고 할
정도로 청렴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영웅들의 전설도 있지만...계속되는 크리스트교의 침략은 이슬람세계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원래 이슬람은 관용의 정신이
풍부했으나 십자군의 공격을 계속 받게 되자, 점차 비관용성과 민족의식이 고취되었으며 聖戰에 대한 정열만 높아지게 되어 아직까지
이러한 반목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점령지를 汗國으로 분리하여 통치하였으며 19 세기 중반 인도대륙의 무굴제국 이 영국에 점령 당할때 까지 세계 각지에 그 흔적을 남깁니다. 조선을 정벌한 淸태종은 몽골의 차하르를 정복하여 명목만 남아 있는 元의 옥새를 얻고 나서야 황제로 즉위 하였을 정도로 몽골울루스의 지배자는 곧 세계의 지배자를 의미 하였습니다.
이러한 몽골 울루스의 유럽 진출 선봉장은 칭기즈칸의 장자 주치의 둘째 아들인 바투였습니다. 1237년부터 시작된 바투의 유럽 대원정은 900 년전 훈의 서진 만큼 유럽사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 왔습니다. 후에 킵착한국이 되는 초원지대에 전진지기를 조성후 볼가강변의 볼가르공국 점령을 시작으로 북진하여 키에프공국까지 차례로 점령하여 러시아를 정벌 하였으며 러시아는 250년간 타타르의 멍에를 쓰게 됩니다.
특이하게 바투의 원정은 겨울에 진행됐었습니다. 몽골원정군은 겨울에 연전 연승함으로써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이루지 못했던 위업을 이루었던 것 입니다. 이들은 겨울에 러시아를 패퇴시킨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것입니다. 그리고 몽골 침략군에 저항한 도시는 말그대로 도시민 전체가 학살당하는 참화를 입었고 이러한 몽골의 잔인함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전유럽은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 리그니트 전투 미니어쳐 ]
러시아 정벌후 몽골은 동유럽 쪽으로 말발굽을 돌립니다. 1241년 4월 리그니트 평원에서 리그니트공국과 독일 기사단의 저항을 받았으나 몽골군은 대승을 거두었고 같은 시기에 헝가리로 공격해 들어간 또 다른 일파는 헝가리군를 초토화 하였습니다. 그리고 1241년 얼어붙은 다뉴브강을 건너게 되자 전체 유럽이 몽골의 지배로 들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고 많은 역사학자들도 이에 별다른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때 절망 상태의 유럽을 구한 것은 몽골울루스의 대칸 오고타이의 죽음 이었습니다. 그러자 몽골울루스의 대권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바투는 회군을 하게 됩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에 오고타이가 좀더 오래 살았던지 아니면 바투가 대권에 욕심을 갖지 않았다면 서유럽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
* 1453 년 콘스타티노플 공방전 Battle of
Constantinopole
2,000 년 역사를 간직한 제국답게 그 동안 유스티아누스 같은 현제의 출현으로 로마제국의 영광을 일시 재현 하기도 하였지만...그리스 정교의 본산으로 근근히 명백을 유지 하면서 끓어 질듯 하며 버텨온 제국 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이름을 따서 창건된 이도시는 당대 유럽 최대의 도시로 비록 비잔티움 으로 이름이 바뀌긴 하였지만, 이 곳의 점령은 곧 동로마제국의 종말을 뜻하게 되는 것 이었습니다.
많은 정복자들이 꿈꾸었지만 번번히 실패한 이도시를 노리는 야심가가 있었으니 그가 오스만의 술탄 메흐멧 2세 였습니다. ( 현재 보스포러스해협을 가로 질러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대교의 이름일 정도로 터키의 영웅입니다. 우리도 진해만을 가로지르기로 예정된 거가대교의 이름을 이순신대교로 바꾸는 것은 어떨지요 )
이 현명한 정복자는 해협을 두고 비잔티움과 마주한 소아시아의 요충지에 루멜리 히사르 성채를 건축하여 보스포러스 통행권을 장악후 흑해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가는 길목을 차단 합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비잔틴제국도 방어 준비를 하여 성문을 수리하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입구 해안인 골든혼 양쪽을 쇠사슬로 연결하여 선박의 진입을 봉쇄하였고 로마 교황과 유럽 각국에 군대의 지원을 요청합니다.
[ 오스만군대의 비잔티움 입성과 루멜리 히사르 성 ]
하지만 오랜 기간 분열과 내분으로 사기가 저하된 비잔틴 군대가 오스만 제국의 군대를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천년 ( 동서로마 분리후 ) 을 지켜온 비잔틴 제국의 수호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흑해 보급로가 차단되자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명백을 유지하던 고대왕국이 역사의 뒤로 사라집니다.
어렵게 쟁취한 비잔티움을 오스만투르크는 이스탄불 개명하고 이를 발판으로 발칸반도에 대한 대 진공을 개시하였으며 쉴레이만
1세 치세에 영토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3대륙에 걸쳤으며, 그 군대는 한때 오스트리아의 비엔나까지 육박하게 됩니다.
서양시대의 개막 * 1571 년 레판토 해전 Battle of Lepanto
지중해를 제압하고 있던 투르크가 사이프러스섬을 빼았자 이것이 이슬람 서진의 기운이라고 생각한 교황 피우스 5세 호소에 가톨릭 수호자를 자임 하고 나선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베네치아, 제노바와 함께 300여척의 유럽 연합 함대를 결성하고 ( 사가에 따라서는 펠리페2세는 이에 대해서 적극적이지 않았다고도 함 ) 그의 이복 동생 돈 후안 에게 이를 지휘하여 투르크를 공격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오스만투르크는 코린트만에서 알리 파샤 가 250여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지휘하여 이 두함대는 레판토 앞바다에서 대회전을 벌이게 입니다. 즉, 에스파냐 주도의 가톨릭 유럽 연합과 무어인, 아라비아인등이 합류한 오스만 투르크 주도의 오리엔트 연합 함대의 역사적 대결 이었고 이는 1,600 년전 악티움해전의 재현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만투르크는 개전초반 지휘관이 전사하고 연합 함대의 포격에 압도당함으로써 함대 전체가 초반에 지리멸렬 당하여 참패를 기록하고 유럽서진에 대한 꿈을 접게 됩니다. 오늘날 터키의 교과서에 레판토 패배기록을 수록하지 않을 만큼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으며 이것을 정점으로 오스만투르크의 국운이 내리막길로 접어들게됩니다.
이로써 역사의 중요한 흐름을 좌지우지 했던 오리엔트가 세계사의 주류에서 서서히 밀려 나게 됩니다. 16세기까지는 유럽중심의 서구가 중근동이나 동부 아시아보다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특별히 앞선 것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전투의 주역으로 무적함대 ( armada ) 로 대표되는 에스파냐의 제해권 확보와 뒤이은 신대륙 진출의 확대등으로 유럽의 세계진출은 가속화 되었고 이 여파는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고대로 부터 내려 오던 갤리선이 주력이 되어 벌인 마지막 대해전 으로 역사에 기록 됩니다.
지금까지 제 마음대로 (?) 세계사의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되는 11개의 전투를 선정하여 간략하게 그 과정과 역사적 의의에 관하여 알아 보았습니다.
충돌은 있었고 이로 인하여 싫든 좋든 역사의 굴곡을 가져왔으며 인류 문명과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종이의 전파와 같이 긍정적인 것이든, 침략자의 욕심에 의한 침탈과 대학살이었든, 이미 지나간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 긍정적인 제지술 전파와 부정적인 학살 ]
물론, 앞에서 선정한 전투 말고도 많은 사건이 있으리라 생각 되며, 근현대사에도 이러한 전투가 있었다고 생각 됩니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 과 롬멜의 아프리카 원정 ( 이것은 무대만 빌렸지 유럽제국간의 전쟁으로 제외 합니다. ) 러일전쟁중 대한해협해전 ( 우리의 침탈이 주목적 이었던 관계로 기분 나빠 제외 ^^ ), 일본의 몽골진출이 좌절된 노몽한 전투 ( 이것은 역사적 의미가 미미하여 제외 합니다. ) 단일 전투로서는 최대의 동서충돌이라 생각되는 스탈린그라드전투 ( 러시아를 유럽으로 보는가 동양으로 보는가의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만 ) 와 최대의 해전이었던 미드웨이 해전 ( 워낙 많이 소개되어 제외 하였습니다. ) 등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인류사가 충돌로 진보 할 수도 있다는 모순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충돌보다 대화와 협력으로 발전이 이뤄 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그리고 아직도 이러한 충돌이 계속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 800 년전 서로를 존경하던 리차드1세 와 살라딘이 결국 대화와 타협으로 칼을 거두어 둘다 역사의 승자로 기록 되지 않았습니까 [ august 의 軍史世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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