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러시아 10월혁명 90년 - 잊혀진 역사의 현장을 가다

이강기 2015. 9. 6. 17:59
러시아 10월혁명 90년 - 잊혀진 역사의 현장을 가다


 

 



세계 첫 사회주의 혁명… “이젠 기억하고 싶지 않다”

《제정()러시아 달력으로 10월 25일(현재의 양력으로 11월 7일)은 러시아 볼셰비키가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세운 이른바 ‘10월 혁명’ 기념일이다. 사회주의 혁명 9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러시아공산당은 11월 7일을 국경일로 정하자고 최근 주장했지만 러시아 하원인 두마는 이 안건을 아예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 혁명의 발상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페트로그라드) 시민 대부분도 “그 시대를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20세기 초 세계를 뒤흔든 10월 혁명은 사회주의 종주국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사가 됐다. 그렇지만 이 혁명에서 파생된 사회 경제적 독소는 아직도 러시아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의회 ‘국경일 지정’ 안건 상정조차 안해

“크렘린광장 레닌묘 옮겨라” 여론 비등

스탈린 초상화 훼손 우려 쇠창살 신세

시민들 “혁명이 남긴건 빵 아닌 빈곤뿐”

▽잊혀진 혁명=23일 기자가 찾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정치사박물관에 보존된 블라디미르 레닌의 집무실. 그의 집무실 건물은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정부() 발렌티나 크셰신스카야가 쓰던 저택으로 볼셰비키가 1917년 초에 빼앗아 10월 혁명을 준비하던 곳이다. 관람객들은 과거 공산당 간부들의 성지였던 집무실과 베란다 옆을 무심코 지나갔다.

단체 관람을 왔다는 러시아 대학생들은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황제 애인의 집을 뺏은 이유를 모르겠다”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들은 레닌이 쓰던 사무집기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한 대학생은 “교내에는 레닌을 박물관에서만 만나고 싶다는 의견이 널리 퍼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모스크바 크렘린 광장에 안치돼 있는 레닌의 묘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여론에 대해 “레닌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국민 여망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쇠창살에 갇힌 혁명’
사회주의 혁명의 발상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정치사박물관에 보존된 이오시프 스탈린의 초상화. 초상화를 보호하는 쇠창살의 중앙이 뜯겨 나가 독재자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정위용 특파원

레닌의 뒤를 이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초상화는 박물관 쇠창살에 가려져 있었다. 창살 일부는 이미 뜯겨 나갔다. 혁명 세력의 일원이자 대학살 주역에 대한 저주와 증오가 끝나지 않은 흔적이었다.

60세가 넘은 박물관 안내인은 “스탈린에게 탄압을 받았던 시민들이 이따금 몰려와 초상화를 찢으려고 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사회주의 원죄는 쉽게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1917년 10월 25일(구력) 오후 9시 40분 페트로그라드 네바 강변에서 혁명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순양함 오로라호. 이 배 주변은 요즘 자본주의 관광 명소로 변해 있다.

가이드로 보이는 러시아인은 기념품 좌판 앞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에게 “소매치기에 주의하라”고 소리쳤다. 지갑을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 챙기던 한 관광객은 “혁명 기념일을 쓰라린 추억으로 기억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지내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해 2월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된 뒤 임시정부 내각이 사용하던 겨울궁전도 역사적 사건을 냉대하고 있었다. 이 궁전은 혁명군이 1917년 10월 26일 오전 2시 10분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임시정부 총리를 체포하기 위해 포위 작전을 벌인 곳.

혁명군이 침입한 궁전 안 황실 식당은 혁명 기념일을 앞두고 수리에 들어갔다. 식당과 이어진 ‘어두운 통로’에서 만난 겨울궁전 안내인들은 “2시 10분에 멈춘 식당 시계도 이제는 걸려 있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다”고 말했다.

▽혁명의 유산과 독소=러시아 시민들은 세계 최초로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을 외면하는 이유로 혁명 구호에 담긴 독소와 혁명 세력이 후대에 남긴 후유증을 꼽았다.

혁명 세력은 ‘빵, 토지, 평화’를 앞세우며 노동자 농민을 혁명 주력군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혁명 구호는 혁명 동조 세력을 끌어 모으는 ‘주술’에 불과했고 결국 어느 것도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이 시민들의 생각이다.

볼셰비키들이 사용했던 혁명정부 청사(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청) 앞에서 만난 사람들은 “10월 혁명이 내세운 빵과 토지의 평등은 ‘만인의 빈곤’을 초래했다. 사회주의 말년의 소련은 지하자원을 팔아 식량을 구하느라 국력을 다 쓰는 바람에 껍데기가 됐다”고 비판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적혀 있던 청사 입구를 지나가던 니나 프롤로바(52·여) 씨는 “공산당 일당독재가 낳은 공포와 폭력 정치는 민주주의의 진전을 결정적으로 가로막았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도입 이후 명맥을 유지하는 러시아공산당은 최근 “사유제도를 청산한 10월 혁명이 산업화, 집단농장, 문화혁명을 꽃피웠다”고 선전했다. 이런 공산당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이제 소수에 불과하다. 올해 러시아공산당에 대한 지지율은 10% 미만으로 떨어졌다.

▼혁명으로 90년간 주인 잃은 땅 아직도 러시아 경제 발목 잡아▼

소련붕괴 후 토지사유화 도입됐지만

대부분 소유권 분쟁 휘말려 큰 혼란

“내가 땀 흘려 일구는 땅이 내 땅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볼셰비키 공산주의자들은 10월 혁명 당시 인구의 절대 다수였던 러시아 농민의 이 같은 여망을 혁명에 이용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지 9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볼셰비키의 토지 정책은 러시아 사회의 성장을 갉아먹는 크나큰 장애 요인이 되고 있다.

러시아 농민들은 10월 혁명의 전야인 1917년 9월까지도 지주의 토지를 빼앗아 자기들 방식대로 나눠 갖는 데 몰두했다.

토지 국유화를 구호로 내세운 볼셰비키 공산당은 같은 해 10월 혁명에 성공한 뒤 농민의 무단 토지 점유를 인정했다. ‘혁명의 우군’을 끌어 모으기 위한 술책이었다.

볼셰비키식의 토지 개혁은 ‘토지는 모두 국가 소유이지만 농민들이 토지를 사용할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런 토지 정책은 1927년 스탈린이 대토지 소유계층인 ‘쿨라크’ 박멸을 선언하면서 집단소유 및 국유화로 방향을 틀었다. 스탈린은 1937년 여름 토지 국유화에 반대하는 농민들을 반혁명 분자로 몰아 피의 숙청을 진행했다. 일부 학자는 당시 희생된 농민이 3000만 명이 넘어 인류 역사상 최대 참화였을 것으로 추산한다.

사회주의 정권에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1950년대 중반 이후 집 주위 부속 토지를 일궈 채소 감자 등을 심었다. 브레즈네프는 1965∼66년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 농가 부속지에 대한 사적 소유를 승인했다. 1977년의 경우 이 같은 부속지가 총경작지의 2%에 불과했지만 소련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무려 27%를 산출했다.

소련이 붕괴되고 4년 후인 1995년 토지 사유화 정책이 시작됐지만 12년이 지난 지금도 토지 문제는 여전히 러시아 사회와 경제의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가 소유지 위에 지은 사유 주택, 주민 분쟁으로 인해 경계가 불분명한 토지, 소유권을 이전하지 않은 농토 등은 지금도 러시아 법률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러시아 주민들은 재산권 행사를 위해 토지 분쟁에 휘말리며 국가는 주민들의 동요를 막는 데 행정력을 소모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부터 부속지에 대한 ‘사면()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토지 점유자가 서류를 갖춰 등기소에 제출하면 소유자로 인정한다는 정책이다.

그렇지만 이 정책이 나온 뒤에도 토지를 측량하지 않았거나 상속으로 받은 부속지의 경우엔 분쟁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 전문가들은 “90년이 지나도 주인을 만나지 못한 토지야말로 10월 혁명이 남긴 대표적 독소”라고 설명한다.



‘자본주의 찬가’ 부르는 혁명군의 후예들 

《러시아 10월혁명 기념일(율리우스력으로 10월 25일·양력 11월 7일)을 13일 앞둔 25일 오후 상트페테르부르크 바실리 섬 공장지대의 스레드니 거리를 찾았다. 이곳은 10월혁명 당시 노동자들이 공장 앞문과 도로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장기 파업과 정치 투쟁을 벌였던 곳. 10월혁명 이후 90년이 지난 이날 도로에서 만난 노동자 10명은 모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근로 체계를 비교해 달라’는 질문에 “사회주의는 낡은 이념의 껍데기에 불과하다”며 사회주의에 ‘X’자를 그었다.》

특히 50대 후반이 지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모두 겪은 고령의 노동자들은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예찬론자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 노동자를 고용한 외국인 기업주들은 사회주의의 희미한 그림자를 여전히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90년간 굴러온 비효율적인 노동 시스템과 관행이 공장 일부에 남아 젊은 노동자들의 근로 의욕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귀띔했다.

▽혁명 노동자 후예의 자본주의 찬양=이날 오후 5시가 되자 바실리 섬 공장지대의 키오스크(가판점)에는 작업을 끝내고 귀가하려는 노동자들이 몰려나왔다.

퇴근 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있는 국영기업 노동자들로, 1905년 1차 혁명 당시 한 달 이상 장기간 제정러시아 군대와 대치했던 노동자의 후예들이다.

20년간 도로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한 노동자에게 “사회주의 시절이 그립지 않으냐”고 물어 봤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나는 TV 한 대가 750루블 하던 1980년대 초 공장장과 맞먹는 월 3000루블의 월급을 받은 특권 노동자였다. 하지만 국가의 발전을 보장하는 자본주의 근로조직이 10배 더 낫다.”

국영기업 노동자들의 자본주의 선호는 그들이 겪은 사회주의에 대한 반발 심리와 맞닿아 있는 듯했다. 한결같이 “국가가 주는 할당량만 채우고 월급도 똑같이 나눈 시절이었지만 그런 체제로 사회주의가 망해 노동자들이 힘들어졌다”고 대답했다.

나이 들어 사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근로 체제를 비교하며 자신의 견해를 자신 있게 밝혔다.

자동차 부품업체에서 일하는 비탈리 테마페예비치(60) 씨는 “요즘 젊은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말기 집단적 빈곤을 경험하지 못해 잘 모른다”며 사회주의 생산체제의 비효율성과 자본주의의 장점을 얘기했다.

그는 “소련 시민들이 일한 만큼 보상받으며 장기간 일할 수 있는 조직은 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공장이라는 점을 깨닫는 데 70년 이상이 걸렸다”고 말했다.

40세 미만의 젊은 근로자들은 러시아에 자본주의가 도입된 이후 일자리가 많아진 상황을 반기고 있었다.

조립공으로 일하는 블라디미르 미냐예비치(39) 씨는 “사회주의 때는 군수 분야를 빼곤 평생을 바쳐 일할 자리가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원하면 얼마든지 더 나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혁명군에서 산업 역군으로=스레드니 거리에서 100m 떨어진 19리니 거리에 있는 한 선반공장은 오후 7시가 넘었는데도 강철을 깎는 기계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돌로 만든 공장 정문에 새겨진 ‘1910년 설립’이라는 표지만이 10월혁명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건물 옆에서는 비즈니스센터로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었고 공장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선박에서 나온 강철을 다듬느라 비지땀을 흘렸다.

공장장 세르게이 시묘노비치(59) 씨는 “지난해 생산량과 품질에 대한 인센티브제를 적용한 뒤 매출이 30% 올랐다”고 자랑했다. 혁명군을 조직해 10월혁명의 하부 조직으로 활동했던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도입 후 러시아 경제를 떠받치는 산업 역군이 됐다는 것이다.

올해 제조업 활황으로 산업 성장률이 급신장하고 있다는 러시아 정부의 발표가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러시아의 제조업 성장률은 지난해 4.4%에서 올해 상반기 12.5%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제조업의 빠른 성장 덕에 국민총생산은 7%를 거뜬히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희미한 사회주의 그림자=러시아 공장은 사회주의를 이미 잊은 듯하지만 외부 관찰자들의 눈에는 그 고질적인 병폐가 앞으로도 상당 기간 남아 있을 것으로 보였다.

러시아 사장과 공동으로 용접기 제조공장을 운영한다는 한 프랑스인은 “입사할 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도 전에 월급 액수를 높게 요구하고 업무를 맡기면 책임을 회피하는 자세가 대표적인 사회주의 그림자”라고 말했다.

또 다른 외국인은 “공장이 아직 연금과 같은 복지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근로자들이 틈만 나면 일자리를 옮기려 한다”며 “사회주의의 무너진 복지 체제가 고용의 불안정성을 부추기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렇지만 러시아 공장주들은 “근로자들이 정치 파업을 일삼던 사회주의 향수병을 치유하고 생산성을 조금씩 높여 나가는 것을 보고 희망을 찾는다”고 말했다. 러시아 노동자의 파업 참여 인원은 혁명 당시 100만 명 단위에서 지난해 1000명으로 줄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 러시아 내년 대선 어떤 선택할까

‘강한 지도력’ 1순위 덕목 2순위는 ‘시장경제 지향’

러시아인들은 내년 대통령으로 ‘강력하고 시장지향적인 인물’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러시아여론조사센터(VCIOM)가 지난달 러시아인 1800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의 53%가 ‘강한 국가를 이끌 수 있는 인물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대답했다.

강력한 대통령에 대한 선호는 집권당인 통합러시아당과 러시아공산당 지지 층에서 특히 많았다.

이 기관이 지난해 실시한 조사에서도 러시인의 과반수는 ‘러시아에 힘 있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강한 대통령을 희망하는 비율은 18∼24세 연령층(53%)보다 60세 이상(63%)에서 더욱 높게 나타났다.

러시아 유권자들이 ‘강한 지도력’ 다음으로 선호하는 차기 대통령의 덕목으로는 시장경제 지향이 꼽혔다. 시장경제 지지자들은 중도 정당 지지층에서 많았다.

이번 조사에서 공산당 지지자는 응답자의 4%로, 지난해 두 자릿수 지지율에서 한 자리로 떨어졌다. 공산당 지지자의 6%도 “시장경제를 추진하는 대통령을 인정하겠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러시아 정치평론가 예브게니 민첸코 씨는 “1991년 12월 소련 붕괴 이후 잃어버린 국가 자존심 회복을 자신의 생계보다 중시하는 경향이 여전히 강하다”고 설명했다.

한편 ‘소련 시대에 나라를 가장 잘 이끈 지도자’ 1위에는 브레즈네프가 올랐다. 브레즈네프는 지난해에도 소련 지도자 가운데 선호도가 가장 높은 인물로 꼽혔다.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러시아에서 브레즈네프는 소련이 상대적으로 안정기를 구가할 당시 권좌에 올라 나라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브레즈네프에 이어 선호하는 소련 지도자는 사회주의 혁명 정부를 수립한 레닌이 2위, 스탈린이 3위였다. 그러나 레닌과 스탈린은 ‘러시아 혁명 이후 국가를 잘못 이끈 지도자’ 순위에서도 1, 2위에 올랐다.

시장 경제 도입을 주도한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지도자 선호도에서 최하위권을 차지했다.

1917년 사회주의 혁명 후 지금까지 가장 성공적인 지도자를 묻는 질문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67%로 가장 높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2012/03/04 11:19 에 신동아에서 퍼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