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처녀뱃사공’조작…의혹 투성이
국민 애창곡 '처녀뱃사공' 진원지를 주장하며 노래비를 세우고 2년째 전국 규모의 기념가요제까지 개최하고 있는 경남 함안군이 노랫말에 맞춰 유래를 억지로 짜맞춘 사실이 곳곳에서 드러나 물의를 빚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 자신이 진짜 노랫말 속 '처녀뱃사공' 이라고 밝힌 의령출신이필남(72)씨와 함안.의령군에 민원을 제기한 정옥진(72) 향토연구가, 의령군, 함안.의령지역 주민들의 증언과 자체 조사에서 속속 확인되고 있다. 함안군은 2000년 10월2일 처녀뱃사공 노래비를 세우면서 '1953년 9월 유랑극단 단장인 고 윤부길(가수 윤항기, 윤복희의 부친)씨가 6.25 피난시절을 끝내고 서울로가면서 함안 가야장에서 대산장으로 가던중 대산 악양나루터에는 군에 간 뒤 소식이끊긴 박기준(6.25 전쟁 중 전사)씨를 대신해 여동생 등이 오빠를 기다리는 애절한 사연을 들은 윤씨가 1959년 노랫말을 지어 '처녀뱃사공'이 발표돼 국민 애창곡으로 널리 불려지게 됐다'고 유래를 빗돌에 새겼다. 하지만 이같은 군의 주장은 곳곳이 허위로 판명됐는데 우선 비문에 새겨진 처녀뱃사공의 오빠 박기준씨는 확인결과, 6.25전쟁 중 전사한 것이 아니라 전쟁 발발 훨씬 이전인 1949년 2월15일 당시 함안 법수 대동청년단장을 지내다 좌익들에게 참살된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 박씨가 6.25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살해된 사실은 당시 상황을 잘알고 있는 함안과 의령지역 주민들은 물론 심지어 박씨 친척들도 "처녀뱃사공 비문에 새겨진 '박기준'은 잘못된 것"이라며 이구동성으로 증언하고 있다.
또 의령과 함안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당시 함안 악양나루의 경우 강이 아닌 작은 수로에 불과할 만큼 폭이 좁고 얕아 상시 사공을 두고 노를 젓는 나룻배를 띄우지 않고 줄배나 장대를 이용했다는 주장이 훨씬 더 설득력있다. 정씨는 "강이 아니라 함안수로로 지적한 부분에 대해 함안군에서 아무런 언급이없고 제대로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며 "내가 생생히 보고 경험했던 진실을 그대로 지적하는데 행정이 이렇게 눈가리고 아웅해도 되는 것이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정씨는 또 처녀뱃사공이 있었다는 악양나루 근처 박씨 일가의 경우 머슴들을 둘만큼 부유한 집안이어서 당시 천한 업으로 여긴 사공일을 집안의 어린 여자들에게 시키거나 직접 나서서 할리가 만무하다는 것. 또 함안군이 당시 전쟁이 끝난 그해 윤부길씨 등 유랑극단이 가야장터에서 대산장터로 가기 위해 배를 탔다고 하지만 실제 대산장은 이 시기보다 훨씬 이후인 1962년부터 섰기 때문에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점도 의혹이다. 자신이 '처녀뱃사공'이라고 밝힌 이씨는 "당시 함안군의 노래비 제막식날 행사장에서 내가 진짜 주인공이라고 말했더니 군 관계자가 '다 안다.하지만 다 된 밥에 이렇게 하면 곤란하다'며 만류해 집으로 쫓겨 나다시피 했다"고 불쾌했던 그때를 회상했다. 이씨는 "당시 남자들도 꺼린 뱃사공을 어린 처녀가 홀어머니와 함께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내가 바로 그 험한 운명을 받아들였다"며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더이상 진실이 왜곡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함안군의 침묵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의령군 관계자는 "최근 민원을 제기한 의령출신 정씨와 처녀뱃사공이라고 밝힌 이씨의 주장이 거의 사실로 확인되고 있는 만큼 함안군측의 사실유무에 대한 공식적인 답변을 지켜본 뒤 조만간 입장을 밝힐 계획"이라고 말했다. (함안.의령=연합뉴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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