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에서 만난 사람'의 歌辭(가사)
이야기
조갑제닷컴 |
2014년 10월31일
파란물이 잔잔한
호수가의 어느날
사랑이 싹트면서
꿈이 시작되던 날
처음 만난 그 순간
불타오른 사랑은
슬픔과 괴로움을
나에게 안겨줬네
사랑~은 어느덧 가고
가슴에는 재만 남아
눈물도 메마~른
허무~한~ 추~억
호수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 슬픈데
타버린 정열 위에
고독만 흐느끼네
사랑~은 어느덧 가고
가슴에는 재만 남아
눈물도 메마~른
허무~한~ 추~억
호수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 슬픈데
타버린 정열위에
고독만 흐느끼네
박춘석 작사, 작곡 '호반에서 만난 사람'이란 노래의 가사이다. 최양숙, 하춘화, 문주란, 패티김, Sweet Sorrow 등이 불렀다. 나는 패티김이 부른 것을 좋아한다. 가사가 너무나 감상적이다. 적확한 단어 선택에 감탄한다. 박시춘, 김희갑 등과 함께 가장 많은 유행가를 작곡한 박춘석 씨의 어휘력 또한 대단하였던 모양이다. 그는 '38선의 봄'을 대표작으로 생각한 듯하다. 생전에, "死後에 노래비를 만들면 '38선의 봄'을 새겨서 휴전선 가까운 곳에 세워 달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호반에서 만난 사람'의 가사에 유일하게 흠을 지적한 분이 있다.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을 설계한 류춘수 선생이다. 아래 대목이다.
"불타오른 사랑은
슬픔과 괴로움을
나에게 안겨줬네"
柳 선생은 "불타오른 사랑이라면 '슬픔과 괴로움'만 안겨주었을 리가 없다. '기쁨과 괴로움'이라고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불타오른 사랑은
기쁨과 괴로움을
나에게 안겨줬네"
이렇게 부르면 논리적이긴 한데 노래에선 논리적인 게 좀 딱딱한 맛을 주는 것 같다.
내가 아는 한 기업인은 이 노래가 18번이다. 그는 弔辭(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가슴에는 재만 남아/눈물도 메마~른'이란 표현을 빌려 썼다고 한다.
*38선의 봄(김석민 작사, 박춘석 작곡, 최갑석 노래)
눈 녹인 산골짝에 꽃이 피누나
철조망은 녹슬고 총칼은 빛나
세월을 한탄하랴 삼팔선의 봄
싸워서 공을 세워 대장도 싫소
이등병 목숨 바쳐 고향 찾으리
눈 녹인 산골짝에 꽃은 피는데
설한에 젖은 마음 풀릴 길 없고
꽃피면 더욱 슬퍼 삼팔선의 봄
죽음에 시달리는 북녘 내 고향
그 동포 웃는 얼굴 보고 싶구나
'''''''''''''''''''''''''''''''
안개 속에서 들은 ‘안개’
한국의 보통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은 노래입니다. 몇년 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약 3만 개의 노래방이 있다고 합니다. 매년 수억 명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노래방을 출입한다고 합니다. 노래방은 우리나라 최대의 오락장입니다. 요사이 골프가 인기지만 연출입 인원은 약 천만 명 정도입니다. 프로야구가 인기가 높다 한들 연중 관람객은 수백만 명입니다. 한국인들의 기분을 지배하는 것은 노래란 두 글자입니다.
한국인과 노래와의 인연은 요사이 몇년 사이의 관계가 아닙니다. 중국 역사서 가운데 삼국지가 있습니다. 위, 촉, 오 나라를 통일한 晉(진) 나라의 진수란 학자가 쓴 중국 삼국시대의 역사서입니다.
이 가운데 魏志東夷傳(위지동이전)이 있습니다. 여기에 한반도와 만주에서 일어났던 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루, 예, 마한, 진한, 변한 등 고대국가에 대한 기술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최초로 기록된 것이 서기 3세기에 나온 이 삼국지 魏志東夷傳입니다.
이 책에 보면 우리 민족, 즉 고구려, 옥저, 부여 등의 습속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한결같이 춤추고 노래하고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한번 놀기 시작하면 사흘 낮과 밤을 노래, 춤, 술로 보낸다고 했습니다. 이런 민족의 후예들인 한국 사람들처럼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은 세계에서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이탈리아, 스페인, 멕시코, 필리핀, 일본 정도가 우리나라에 필적할 만한 노래강국이 아닌가 합니다. 요사이 조수미, 신영옥씨 등 세계적인 성악가가 등장한 것도 워낙 우리나라의 노래인구가 많은 덕분입니다.
노래는 한 시대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그 시대의 대중들과 함께 웃고 우는 것이 대중가요이기 때문입니다. 가곡 같은 고전적인 노래도 시대정신과 따로 노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어린 시절 가장 먼저 따라부르게 된 노래는 1950년 가을 국군이 북진할 때 유행한 「전우여 잘 자라」는 노래였습니다.
1950년 가을은 온 국민들이
파죽지세로 북진하는 유엔군의 기세에 흥분하여 『이제는 통일이 임박했다』고 들떠 있을 때였습니다. 모두가 통일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가슴 설레던 그해 10월의 나날들을 떠올리면 자동적으로 되살아나는 멜로디가 바로 「전우야 잘자라」는 노래입니다. 그때 여섯 살이던
저도 믿음직스럽게만 보이던 국군들을 쫄쫄 따라다니면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의 작사가는 유호씨(兪湖ㆍ본명 兪海濬ㆍ77)였습니다. 그는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하고 있다가 한강을 넘지 못하고 적(敵)치하에서 숨어서 살았습니다. 9ㆍ28수복 뒤 신문사로 나갔더니 문화부는 당분간 일이 없으니 쉬라고 하는 통보였습니다. 그래도 회사에는 매일 나오고 있었는데 어느 날 거리에서 작곡가 박시춘(朴是春)을 만났습니다. 박시춘씨는 밀짚으로 만든 벙거지를 쓰고 있었는데 꼭 거지꼴이었습니다. 피란길에서 돌아온 박시춘과 유호, 두 사람은 명동에서 술을 한 잔 나눈 뒤 필동에 있던 박(朴)씨의 집으로 옮겨 통음(痛飮)했습니다. 피란살이, 후퇴, 낙동강전선, 국군, 북진 이야기를 하다가 즉석에서 유호씨가 노랫말을 만들고 박시춘씨가 기타를 쳐가면서 작곡한 것이 「전우야 잘자라」였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1절.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앞으로 앞으로 /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자라.
이 노래의 작사가는 유호씨(兪湖ㆍ본명 兪海濬ㆍ77)였습니다. 그는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하고 있다가 한강을 넘지 못하고 적(敵)치하에서 숨어서 살았습니다. 9ㆍ28수복 뒤 신문사로 나갔더니 문화부는 당분간 일이 없으니 쉬라고 하는 통보였습니다. 그래도 회사에는 매일 나오고 있었는데 어느 날 거리에서 작곡가 박시춘(朴是春)을 만났습니다. 박시춘씨는 밀짚으로 만든 벙거지를 쓰고 있었는데 꼭 거지꼴이었습니다. 피란길에서 돌아온 박시춘과 유호, 두 사람은 명동에서 술을 한 잔 나눈 뒤 필동에 있던 박(朴)씨의 집으로 옮겨 통음(痛飮)했습니다. 피란살이, 후퇴, 낙동강전선, 국군, 북진 이야기를 하다가 즉석에서 유호씨가 노랫말을 만들고 박시춘씨가 기타를 쳐가면서 작곡한 것이 「전우야 잘자라」였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1절.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앞으로 앞으로 /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자라.
2절.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 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3절. 고개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 한강수야 잘 있더냐 우리는 돌아왔다 /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주는 /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4절.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북진 장병의 주제곡이 되었던 이 노래는 중공군의 침입으로 후퇴할 무렵에는 육본에 의해서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육군에서는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란 대목이 불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휴전 이후에 이 노래는 복권되었습니다. 한편 국군은 그때 인민군 포로들을 잡으면 「신라의 달밤」을 불러보게 했습니다. 부를 줄 아는 포로는 남한에서 동원한 의용군, 못 부르는 포로는 진짜 인민군으로 분류되는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해방동이인 제가 국민학교, 중학교에 다닐 때인 1950년대 말에는 프랑스의 샹송이 유행했습니다. 에디 드 피아프, 이벳드 지로, 줄리엣 그레코 같은 가수들이 부른 「장미빛 인생」, 「파리의 하늘밑」 같은 노래들이 소년들 사이에도 귀에 익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1967년에 공군사병으로 지원입대하여 훈련을 받을 때는 「고향의 봄」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훈련소에서는 신병들에게 특별훈련을 시킨다든지 기합을 주고는 이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쯤 가면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부모와 고향을 떠나 배고픔과 싸우면서 고된 훈련을 받다가 이 노래를 부르면 두고 온 고향과 정든 얼굴들이 떠올라 더운 눈물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에 걸쳐서 팝송과 접촉하게 됩니다. 1960년대에 그런 시절을 맞이하였던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클리프 리차드와 비틀즈의 노래들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뽕짝들은 왠지 시시하게 보일 때였습니다. 길옥윤이 작곡하고 패티 킴이 부른 「서울찬가」는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정신없이 성장하면서 변화해가던 서울의 힘찬 모습을 상징하던 1960년대의 대표적인 노래일 것입니다.
1960년대 말 저는 동해안의 한 고지에서 공군 레이다 관측병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1200미터를 넘는 고지였는데 구름이 자주 깔리고 안개가 자주 끼였습니다. 이럴 때 부대 확성기를 통해서 매일 같이 흘러나오던 노래가 「안개」였습니다. 박현 작사, 이봉조 작곡, 정훈희 노래의 「안개」는 우리 부대의 주제곡이 되었습니다. 안개가 자욱이 깔린 고지 위로 흘러가던 정훈희의 청아한 목소리를 이 부대에 근무했던 군인들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나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 생각하면 무엇 하나 지나간 추억 /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 아아아 아아아아아 그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 안개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이 노래는 듣기는 좋은데 부르기는 참 어렵습니다. 1960년대에 미국에서 히피 문화가 일어나 기성세대에 도전하고 월남전에 반대하고 흑인차별에 반대하는 민권운동에 원동력을 제공했습니다.
존 바에즈, 봅 딜런 같은 가수들이 부른 「프로테스트 송」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왔습니다. 「위 샬 오버캄」「훠에버 올 더 플아워즈 간」이라는 노래들은 1970년대에 우리나라의 시위현장에 등장한 노래들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1970년대를 상징하는 노래는 김민기 작곡, 양희은 작사의 「아침이슬」일 것입니다.
일본식도 아니고 뽕짝도 아니고 팝송형식도 아닌 우리 식의 노래가 바로 아침이슬입니다. 시위현장에서 많이 불려 데모 송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이 노래의 가사에는 격한 표현이 없고 오히려 아주 서정적이고 상징적입니다. 이런 서정성이 바로 이 노래의 생명을 영원하도록 한 비밀일 것입니다. 최루탄 터지는 거리에서 울려 퍼진 이 노래가 있었기에 우리의 민주화투쟁은 그렇게 살벌하지만은 않았던 것입니다. 아침이슬보다 직설적으로 억눌린 사람들의 투쟁을 표현한 노래는 상록수입니다.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로 시작하여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로 끝나는 이 노래는 김민기씨가 야학을 하고 있을 때 결혼하는 한 노동자를 위하여 만든 곡이라고 합니다.
이 노래는 부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힘을 불끈 솟게 만듭니다. 김민기씨가 제대하는 하사관을 위하여 작곡, 작사했다는 「늙은 군인의 노래」도 분단국가에서 직업군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의 애환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김민기의 이런 노래들은 우리의 역사와 삶 속에서 살아 숨쉬었습니다. 아니, 그런 노래들은 역사의 일부였습니다. 김민기씨는 천진난만한 분인데 이런 영원한 유행가들을 큰 고민이나 연구없이 즉흥적으로 아주 쉽게 작곡했다고 했습니다. 천재들은 어려운 것을 쉽게 만들어내는 사람들입니다.
한 8년 전에 불후의 팝송 마이 웨이를 부른 프랭크 시나트라가 타계했습니다. 가수는 가도 노래는 남았습니다. 마이 웨이는 저의 18번이기도 합니다. 저는 후천성 음치였습니다. 아마도 국민학교 음악시간에 불려나와 처음 노래를 불렀을 때 실수한 것이 그 뒤 저의 입을 얼어붙게 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두 가지 공포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는 술, 다른 하나는 노래였습니다.
체질적으로 술을 못하는 저에게는 맥주 두병, 소주 석 잔 이상은 치사량입니다. 이 기준을 초과하여 마시면 몇 시간이나 위경련으로 고생해야 했습니다. 술 이상으로 저를 공포로 몰아넣는 것은 술자리에서 노래를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제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제가 아는 유일한 노래를 누가 먼저 해버렸을 때의 황당함이란 아마 음치였던 적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제 차례가 오면 이미 저는 제 정신이 아닙니다. 꿈을 꾸는 듯 몽롱해지고 가슴은 두근거리고 발악하듯 불러대는 그 2-3분의 노래 시간이 왜 그다지도 긴지.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음치인 제가 노래는 보통사람보다도 더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욕망과 능력의 이런 불균형은 보통 사람들을 불행하게 합니다만 저는 음치를 귀명창이라 불렀던 우리 조상들의 깊은 뜻을 알듯 했습니다. 귀명창, 즉 노래를 입으로는 잘 부를 줄 모르지만 귀로 듣는 데는 명창이란 이 말은 얼마나 여유가 있습니까. 거기에 비해서 영어로는 음치를 톤 - 데프, tone-deaf, 즉 음정귀머거리라고 인정사정없이 불러버립니다. 그래서 미국사람들은 좀처러 여러 사람들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노래를 듣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부르는 것은 전문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1978년 어느날 결심했습니다. 그리곤 테이프를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노래를 틀기 시작했습니다. 음치를 교정하려면 우선 귀를 뚫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듣고 듣고 들은 뒤 저는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에 대한 핍박은 가정에서부터 왔습니다. 저의 아내는 공식적으로 소음공해를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저의 두 딸은 『아빠, 거위 소리 그만두세요』라고 항의했습니다. 그런 항의를 무시했더니 저를 「조일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는 고향에서 핍박받는다」는 귀절에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노래책을 갖고 화장실로 들어가서는 욕조에 물을 틀어놓고 30분에서 한 시간씩 노래연습을 했습니다.
저는 노래를 불러야 할 때에 대비하여 여러 개의 18번을 준비해가면서 박수를 받는 요령을 알아냈습니다. 무엇보다도 곡목 선택이 중요한데 3절짜리 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가사를 다 외우는 성의에 청중들은 높은 평가를 해주고 중간에 다소 실수를 해도 회복할 기회가 있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다음에는 노래 끝이 소리를 한껏 내지르면서 드라마틱하게 끝나는 것이 좋습니다. 박수를 많이 받을 수 있으니까요. 노래는 아무리 잘 불러도 끝에 가서 박수를 받지 못하면 노래를 끝내고도 영 기분이 좋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조건에 딱 맞는 곡이 바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였습니다. 1980년대에 저는 친구들과 함께 예쁜 여가수가 나오는 신사동의 카페에 다니면서 이 노래를 배우고 연습했습니다. 여가수로부터 개인교습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마이 웨이를 시도 때도 없이 연습했습니다. 어느 날 택시를 타고 가는데 운전기사가 뒤를 돌아보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손님 교회다니십니까』
저는 대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고 저를 뺀 우리 집안에선 모두 교회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교인이 아니오라고 말하기도 뭣해서 말했습니다.
『왜 묻지요』
『손님께서 찬송가를 부르셔서 교회에 다니는 줄 알았습니다』
저는 마이 웨이를 흥얼거렸는데 운전기사는 찬송가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제가 못 불렀던지 운전기사가 귀명창이든지 아니면 신식 찬송가에 마이 웨이가 올라 있던지 세 가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이런 피나는 노력으로 저는 드디어 음치를 면했습니다. 음치 사정은 음치가 잘 안다고 저는 많은 음치들을 만나보고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었습니다.
음치가 생기는 이유중의 하나는 국민학교 음악시간입니다. 최초로 어린 아이가 노래를 불렀을 때 교사나 동료들이 조롱하면 그 아이는 마음에 상처를 입고는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에서 노래를 잘 부른 사람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씨였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구사범에 다닐 때 나팔수였습니다. 가난하고 고독한 소년기를 보내던 박정희 학생은 기분이 울적해지면 뒷동산에 올라가 나팔을 불었다고 합니다. 그는 문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일할 때도 아침 일찍 일어나 나팔을 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박선생의 나팔소리를 기상나팔로 생각하고 일어나곤 했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세 곡의 노래를 작사 작곡했습니다. 금오산아 잘 있거라, 새마을 노래, 나의 조국. 금오산아 잘 있거라는 1960년대 중반에 음반으로 나왔는데 청와대에서 판매금지처분을 내렸습니다. 전형적인 뽕짝입니다.
새마을 노래는 경쾌한 곡이고 나의 조국은 행진곡이지만 장중하고 비장한 맛이 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18번은 짝사랑과 황성옛터였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노래를 잘 불렀는데 그의 18번은 「사나이 결심」이란 노래였습니다.
유호 작사, 이봉룡 작곡으로 되어 있는 해방 직후에 유행했던 노래입니다. 몇년 전 조용필씨가 불렀는데 지구레코드에서 나온 그의 제9집에 실려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사나이 가는 길 앞에 웃음만이 있을소냐 / 결심하고 가는 길 가로막는 폭풍이 어이 없으랴 / 푸른 희망을 가슴에 움켜안고 떠나온 정든 고향을 / 내 다시 돌아갈 때 열 구비 도는 길마다 꽃잎을 날려보내리라 / 2절: 세상을 원망하면서 울던 때도 있었건만 / 나는 새도 눈 위에 발자욱을 남기고 날아가건만 / 남아 일생을 어이타 연기처럼 헛되이 보내오리까 / 이 몸은 죽어서 세상을 떠날지라도 이름만은 남겨놓으리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 노래를 아주 격조 높게 부른다고 합니다. 아주 남성적인 노래인데 보스기질이 강한 그에게는 딱 어울리는 18번이란 것이 목격자들의 증언입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노래에 소양이 있었습니다. 9사단가를 작곡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18번은 멕시코의 민요 베사메 무초인데 이분은 퇴임하기 직전에 자신이 부른 노래를 음반에 취입하여 선물을 하였습니다.
월간조선이 1999년에 이분의 노래를 담은 녹음 테이프를 부록으로 발간한 적도 있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두 분의 노래 실력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저는 세상살이가 아무리 짜증스러워도 우리나라 가곡이 있기에 그 짜증을 씻어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가곡은 한국인의 감수성을 나타냅니다. 저는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에 대한 절망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가곡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정서를 가진 민족인데 하는 말로써 위안을 삼습니다. 일본인들이 부러워하는 것이 가곡입니다. 아름답고 격조 높고 힘차고 청아하고 다소곳하며 포근한 가곡과 같은 장르의 노래를 일본인들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인기가 있는 가곡은 아마도 「그리운 금강산」일 것입니다.
통일의 그날이 올 때까지 이 노래는 우리의 한을 되새기게 하고 우리의 꿈을 이어가면서 우리의 심금을 울릴 것입니다. 가수들이 콘서트에서 부를 노래를 결정할 때 서로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겠다고 싸울 때도 있다고 합니다. 이 노래를 부르면 무조건 그날의 최고 박수를 받게 되니까 그러는가 봅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심성을 가장 잘 표현한 곡은 보리밭이라고 말하는 가수들도 많습니다. 이 곡은 윤용하씨가 6·25전쟁중 부산에서 피란할 때 피비린내 나는 전란을 비웃듯이 파아랗게 평화롭게 돋아나던 보리밭을 보고 즉석에서 작곡한 것입니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감성이 전쟁통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노래의 위대함을 증언하는 일일 것입니다. 하나 아쉬운 것은 1980년대 이후 새롭게 유행하는 가곡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인의 정서가 그만큼 각박해졌다는 증명이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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