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킨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최근 일본 산케이신문(産經新聞)은 ‘러일전쟁 100주년’을 맞아 시리즈로 특집 기사를 보도했다. 이 시리즈물에서 산케이신문은 100년 전의 일본과 현재의 일본을 대비하면서, 과거의 일본에서 배울 점을 자국민의 시각으로 조목조목 제시했다.
우리는 항상 세계가 한국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정부와 국민 모두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 수준이 터무니없이 낮다. 이라크전 파병과 북핵 문제, 한·미·일 삼각동맹, 주한미군 문제 등 생존과 직결된 외교 현안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정치권도 여기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다. 국제정세의 역학관계를 정밀하게 계산한 뒤 국익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 사안을 여론조사나 우격다짐식 시위로 밀어붙이려는 시도도 종종 벌어진다.
100년 전 러일전쟁이 벌어질 무렵의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현재 한반도의 상황이 당시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100년 전 해양국가 일본의 주적은 대륙국가 러시아와 청국이었고 한반도는 완충지역이었다. 일본은 당시 이 완충지역이 대륙세력에 장악되면 곧바로 자국 안보가 위협받는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100년 전 일본은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내부 논쟁을 벌였고, 전쟁으로 치달았다. 당시 대한제국은 이런 주변국 사정에 완전히 무지했다.
지난 50년 동안 한국은 해양세력인 미·일과 한·미·일 삼각동맹을 맺어 안보와 지역 안정을 유지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이러한 안보 환경은 현재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주변국 가운데 일본은 이런 환경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주시하고 있다. 100년 전 러일전쟁과 관련한 일본 내부의 시각을 살피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편집자>
‘삼국간섭’과 臥薪嘗膽
오(吳)와 월(越), 양국이 패권을 다투던 중국 춘추시대의 이야기다. 월왕 구천(勾踐)에게 패해 운명을 다한 오왕 합려(闔廬)의 아들 부차(夫差)는 그 분함을 잊지 않으려고 장작 위에 누워 잤다. 그리고 회계산(會稽山)에서 구천을 격파하고 아버지의 원한을 풀었다. 이번에는 그 구천이 쓴 쓸개를 맛보면서 복수의 뜻을 다짐해 미인 서시(西施)에게 정신을 잃고 있던 부차에게 이겼다. 이 두 고사에서 생겨난 것이 분함을 발판으로 재기를 기하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다. 이 4자성어가 돌연 일본사에 등장한다. 메이지(明治) 28년(1895)의 일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해 4월17일 청국과 강화를 위한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을 맺었다. 주된 안건은 (1)조선의 독립 승인 (2)요동(遼東)반도·대만·팽호도(澎湖島) 일본에 할양 (3)배상금 2억 냥(兩, 당시 돈으로 약 3억 엔) 지불이었다.
그런데 이 강화에 뜻하지 않은 간섭이 들어왔다. 조약을 조인한 지 불과 6일 후인 4월23일 러시아·독일·프랑스의 3개국이 자국의 주일공사를 통해 일본에 요동반도를 포기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른바 ‘삼국간섭’이다. 이 간섭을 이끈 리더는 러시아였다. ‘극동 영구 평화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유럽 열강이 극동에까지 그 식민지 수탈의 창끝을 돌리던 시대였다. 요동반도에는 여순(旅順)이라는 천연의 항구가 있다. 군침을 흘리던 요동반도를 일본이 취하는 것을 러시아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속마음을 일본은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같은 대륙국이라고 할 수 있는 3국은 때로는 격렬하게 싸웠지만, 이해가 일치되면 단결하는 일도 있다. 최근 미국·영국이 일으킨 이라크전쟁에 이 3국이 일치해 반대한 것은 ‘제2의 삼국간섭’으로 볼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이런 간섭을 받고 요동반도를 되돌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청국에 이겼다고 하지만 일본이 당시의 국력으로 러시아와 대립하는 것은 무리였다. 효고(兵庫)현 마이코(舞子)에서 요양중이던 외상(외무대신) 무쓰다 다미쓰(陸奧宗光)는 “거부하면 땅벌을 잡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 고뇌의 결단이었다.
그러나 당시 전승 기분에 빠져 있던 일본 국민은 이 굴복을 간단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요동반도 반환 방침이 정식으로 발표되자 신문들은 ‘연전연승 끝에 요동반도 반환’(東京朝日)이라는 제목으로 정부를 비판했다. 그 기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당시의 대표적 저널리스트였던 미야케 세쓰료(三宅雪嶺)가 ‘일본’(日本)이라는 신문에 2회에 걸쳐 ‘상담와신’이라는 제목으로 쓴 논문이었다.
세쓰료는 3국간섭을 받아들인 것을 ‘진정으로 원통할 만한 …’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여기서 꺾이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다른 곳에서 꺾인다. 여기서 꺾이는 것은, 즉 후일 대(大)를 이룰 계기가 된다’고 언급하며, 이 ‘차질’(蹉跌)을 약으로 후일을 기약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 와신상담론은 당장 많은 일본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세쓰료의 첫번째 논문이 실린 5월15일 이다카키 다이쓰케(板垣退助) 자유당 의원은 평의원회에서 반환 문제를 협의했다. 그러나 “담을 맛보고, 장작 위에 누워 국력을 키워 군비·항로 등을 확장해야 하며…”라고 서로 말했을 뿐이었다고 시사신보(時事新報)는 전했다. 그리고 3년 후인 메이지 31년(1898) 3월 러시아는 청국과 여순·대련만 조차 조약을 맺고 요동반도를 손에 넣었다. 이에 일본 국민은 ‘와신상담’을 표어로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나갔다.
전 태국대사인 오카사키 히사히코(岡崎久彦)는 지난 1월 본지(산케이신문)와 대담에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길 수 있었던 원인의 하나로 에도(江戶) 시대 교육의 우수성을 들었다. 이 ‘와신상담’이 표어가 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어린아이들까지 중국 문헌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 에도 교육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 후 미군은 신헌법 등으로 집요하게 일본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또 원수 갚는 것이 주요 줄거리인 ‘가부키’를 금지했다. 이는 미군이 일본인의 와신상담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 100년 전 일본인의 좌우명이었던 와신상담이라는 말은 잊힌 지 오래다.
러시아에 대한 항의, ‘다음은 한반도’라는 위기감
img2R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산케이신문 교토(京都)지국 기자 시절 대학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쇼와(昭和) 20년대(1960년대)에 한창이던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그것은 중국의 ‘의화단’(義和團) 같은 것”이라며 취재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고 한다. 의화단이란 메이지 33년(1900) 2월 서구 제국주의 타도를 내걸고 봉기한 청국의 신흥 종교단체다.
의화단은 서구 열강의 이권경쟁에 반발하는 민중의 지지를 배경으로 그리스도교회를 불지르면서 산동성에서 북경(北京)으로 북상했고, 청국 정부도 이를 지원했다. 이해 6월까지 의화단은 북경·천진(天津)을 장악하고, 북경의 각 외국공사관을 포위해 버렸다.
그러자 북경에 공사관을 두고 있던 일본·러시아·영국 등 11개국이 군사행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8월14일에는 일본 육군 제5사단을 주력으로 한 열강 연합군이 북경을 제압했다. 일본은 이를 북청사변(北淸事變)이라고 부른다. 그 결과 청국은 파병한 11개국에 배상금을 지불함은 물론 공사관 경비와 자유교통 확보라는 명목으로 각국 군대 주둔까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청국의 반식민지화가 한층 강화된 것이다.
시바(司馬)가 일본의 학생운동을 ‘의화단’이라고 부른 것은, 대학에서 소동을 일으킬수록 국가와 경찰의 개입을 초래해 오히려 대학자치를 상실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의화단의 난이 초래한 것은 열강의 발호만이 아니었다. 청국의 영토였던 만주 땅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전투를 벌인 러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계기는 러시아군이 만주를 제압한 뒤 눌러앉은 데 있다. 북청사변이 한창이던 메이지 33년(1900) 7월 의화단 세력은 만주에까지 이르러 러시아가 권리를 얻어 건설중이던 동청철도(東淸鐵道)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이를 기다렸다는 듯 시베리아에서 만주로 밀고 들어왔다. 러시아군은 청국과 11개국이 강화를 맺은 뒤에도 만주에서 나가지 않았다.
이에 일본은 미·영 양국에 호소해 러시아군을 철군시키려고 했지만, 미·영은 만주 문제 불개입을 이유로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은 부득이 1901년 3월, 단독으로 러시아에 항의했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북청사변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동양의 소국이었고, 따라서 대국 러시아에 단독으로 항의하는 것은 대담한 행위였다. 전 태국대사 오카사키 히사히코는 영국의 역사학자 이안 니슈의 말을 빌려 이 일을 ‘젊은 일본의 성인식이었다’고 썼다.(‘小村壽太郞과 그 시대’)
이는 근대 일본이 처음으로 자립국가로서 국가의 안전을 위해 움직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일본은 그 정도로 러시아의 만주 점령을 두려워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만주 다음으로 육지와 이어져 있는 한반도가 러시아 손에 떨어지는 것에 대하여 전신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잡지 ‘내일의 선택’(일본정책연구센터) 2004년 1월호 인터뷰에서 이구오 나카노구(入江隆則) 메이지대 교수는 20세기 초엽의 영국 지정학자 마킨더의 ‘해양국가론’을 소개하면서 러일전쟁에 이른 일본의 안전보장론을 설명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지중해 크레타 섬을 근거지로 한 해양국가인 고대 그리스가 대륙국가인 페르시아에 승리한 것은 페르시아와 마주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제압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같은 대륙국가인 마케도니아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장악하자 해양국가인 고대 그리스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해양국가로서는 대륙과 연결되는 반도가 중요한 것이다.
게다가 이구오는 “메이지 시대의 일본인은 해양국가인 일본이 번영하기 위해서는 일본에 적대할 가능성이 있는 (대륙국가인)러시아와 청제국이 한반도를 지배하는 것을 확고하게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면서 “경탄할 만한 안전감각”이라고 평가했다.
현재 한반도의 북반부에는 옛소련과 중국의 영향을 받는 독재국가가 들어서 있다. 이 독재국가는 현재 일본의 안전 보장에 가장 중요한 존재다. 따라서 100년 전 일본인이 가졌던 안전감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역사는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100년 전 러시아는 일본의 항의에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철수를 약속하지 않으면서 일본이 항의할 때마다 이를 무시했다. 그것이 삼국간섭에 대한 울분이라고 할까, ‘와신상담’이라는 표어로 겹쳐졌다. 일본은 점점 ‘러시아를 무찔러야 한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메이지의 국제전략 : 英日동맹
img3L1902년 1월30일, 일본과 영국 사이에 일영동맹이 맺어졌다. 그 때 런던에 체류중이던 일본 유학생들은 동맹 체결에 분주한 타다수(林菫) 주영 일본공사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기념품을 증정하기로 했다. 영국유학생 소세키(漱石)는 당시 돈으로 5엔을 냈다. 그는 당시 장인인 나카네 주이치(中根重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절약했던 유학 비용에서 이러한 임시 지출을 명령받아 야단’이라며 난처한 듯 투덜댔다.
유학생 소세키는 창끝을 일영동맹 그 자체로 돌렸다. 일본은 대단히 소란을 떠는 듯했지만, 그것은 “가난뱅이가 부자와 혼사를 맺게 되어 기쁜 나머지 종과 북을 치면서 마을을 도는 모습과 같은 것”이라고 비웃었다. 소세키다운 시각이지만, 당시 일본이 일영동맹 체결로 들끓은 것은 사실이었다. 각 신문의 사설은 일제히 이를 환영하고 나섰다.
이 동맹은 말할 것도 없이 만주에 눌러앉아 한반도를 넘보던 러시아를 의식한 것이었다. 그 조약에는 중국과 조선에서 일본과 영국 어느 쪽의 이익이 타국에 침범당할 경우 양국은 이를 지키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 명기되어 있었다. 일본 국민은 이 동맹으로 러시아의 위협에 대항할 수 있다는 기대가 높아진 것이다.
그 때까지 일본 정부는 러시아에 대응하기 위해 협상을 맺어야 한다는 일러협상파와, 러시아와 견줄 만한 세계 강국인 영국과 동맹에 의존해 러시아를 응징해야 한다는 일영동맹파로 나뉘어 있었다. 전자의 대표가 메이지 34년(1901) 6월까지 총리를 맡았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그 맹우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다. 일영동맹파의 대표는 이토의 다음 총리인 카쓰라 타로(桂太郞)와 그 후견인인 야마카타 아리모토(山縣有朋) 등이었다.
러시아를 둘러싼 협상파와 강경파의 대립에는 같은 죠슈(長州, 지금의 야마구치현) 출신이며 함께 메이지 유신의 원훈이라는 이토와 야마카타의 고집도 숨어 있다. 이는 100년이 지난 지금 북한에 대한 ‘대화’파와 ‘압력’파 사이의 대립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협상파도 러시아에 굴복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협상을 통해 영국을 동맹으로 이끌어 내자는 노림수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대러 협상파와 강경파 사이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카쓰라 내각의 외상에 기용된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였다. 고무라는 일러전쟁 종결 당시 강화조약 체결을 맡아 러시아측 요구를 대폭 받아들였다고 해서 유연파 혹은 저자세 외교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사실 그는 강경파였다.
메이지 34년(1901) 가을 이토 히로부미는 일러협상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고 미국과 유럽을 경유해 모스크바로 향했다. 이토 러시아 측과 협의가 끝날 때까지 정부의 결론을 미뤄 달라고 타전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하야시 공사와 영국 측의 교섭이 진전돼 영국과 동맹을 맺게 되자 이토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01년 12월7일 하야마(葉山)에 있던 카스라 타로의 별장에서 열린, 이토를 뺀 원로회의에서 카쓰라 내각의 외상 고무라는 드디어 국제정세에 대한 의견을 말했다. 여하튼 만주가 러시아에 점령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만주를 빼앗기면 조선도 스스로를 러시아의 손에서 지킬 수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고무라는 또 러시아를 힘으로 제압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영국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러시아와 협상에 대해서는 “러시아는 침략주의이기 때문에, 협상으로 평화가 오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이라고 단언했다.
고무라의 웅변에 눌린 듯 원로회의는 영일동맹을 승낙했다. 고무라의 인식은 그 후 러시아가 여러 차례 교섭에도 만주에서 철군하지 않고, 오히려 메이지 36년(1903) 5월 한국의 용암포(龍岩浦)를 점거하자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영일동맹이 체결되자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개전 후 영국은 동맹 조약에 따라 중립을 지켰지만, 정보나 무기 조달 면에서 여러 가지로 원조해 일본의 승리에 공헌했다. 100년 전 일본 정부는 단호하게 영일동맹을 맺었고 일본 국민은 이를 환영했다. 당시 국제정세를 이해하는 일본인의 수준과 깊이는 놀랄만한 것이다. 최근 일미안보조약을 개정할 때 그 의미도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한 야당과 언론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매스컴의 논쟁 : ‘전쟁 반대론’도 감정적이지는 않았다
메이지 후기부터 쇼와 초기(1900년대 초반)에 걸쳐 ‘요로주호’(万朝報)라는 일간지가 있었다. 최전성기에는 발행 부수가 9만 부에 이르렀으며, 도쿄에서는 최고 가는 신문이었다. 그 요로주호의 메이지 36년(1903) 10월12일자 1면 톱에 눈길을 끄는 기사가 실렸다.
무교회파의 기독교신자로서 알려진 우치무라 간소(內村鑑三)가 쓴 ‘퇴사에 즈음하여 루이카(漏香) 형에게 드리는 각서’라는 제목의 논문이었다. 또 2면에는 이 신문사 사장인 저널리스트 구로이와 루이카(黑岩漏香)의 ‘우치무라·코도쿠(幸德)·사카이(堺) 등 3명의 퇴사에 대하여’라는 기사가 실렸다. 같은 회사 사원이었던 우치무라와 코도쿠 슈수이(幸德秋水)·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가 사직하게 되었으며, 그 전말을 우치무라와 구로이와 쌍방이 독자들에게 변명한 것이었다.
‘소동’의 발단은 당시 최고 논쟁 대상이었던 일·러 관계를 둘러싼 의견 대립이었다. 요로주호는 처음에는 구로이와의 번안 탐정소설이라든가 스캔들 기사로 인기를 얻었다. 이후 노동 문제나 사회개혁 문제에 지면을 할애하면서 얼마간 좌(左)편향으로 보이게 되었다. 이 신문은 메이지 30년대(1900년 전후) 우치무라와 사회주의자인 코도쿠·사카이가 입사하면서 일러전쟁을 반대하는 논지를 전개했다. 특히 우치무라는 1903년 9월 5회에 걸쳐 반전 평화론을 썼다.
이에 대하여 구로이와는 동년 10월8일 ‘싸움은 피해서는 안 되는가’라는 논문을 썼다. ‘나는 5,000만 일본 국민과 함께 열렬한 평화 희망자다. 그러나 이미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정세다. 그렇다면 해군·육군의 전쟁이 아니라 전 국민의 싸움으로, 힘을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내용으로, 전쟁은 부득이하다는 논리였다. 이에 대하여 전쟁을 반대한 우치무라 등이 퇴사한 것이다.
메이지 시대의 언론계에도 기독교 신자와 사회주의자를 중심으로 반전 평화론은 커다란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러·독·프 삼국간섭과 러시아군의 만주 주둔 등 러시아의 위협이 점차 커지자 주전론이 득세했다.
‘국민신문’(國民新聞)과 잡지 ‘국민지우’(國民之友)를 발행하던 도쿠도미 소호(德富蘇峰)는 평민주의를 외쳐 당시의 진보적 문화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도쿠도미는 메이지 28년 청일전쟁으로 점령지가 되었던 요동반도를 방문중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요동을 반환한다는 뉴스를 듣고 경악했다. 자서전에서 도쿠도미는 ‘나는 정신적으로 거의 다른 사람이 되었다’며 ‘러시아 공격론’이라는 개전론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진보주의자 도쿠도미는 강경한 주전론자가 되었고, 그 영향력은 점점 커졌다. 이후 그는 ‘변절자’ ‘평민주의의 배신자’라는 비판도 덮어썼다. 요로주호의 논조를 ‘개전 불가피’로 바꾼 구로이와에게도 ‘배신’이라는 비판이 뒤따랐다. 그렇지만 우치무라 등이 퇴사한 다음날인 메이지 36년(1903) 10월13일 구로이와는 ‘요로주호는 싸움을 좋아하는가’라는 사설을 올리고, 결코 주전론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렇게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부부가 서로 싸우고 있는데 도적이 밖에서 엿듣다 문을 열고 들어가 재물을 약탈해 간다. 부부가 싸움을 잊고 힘을 합쳐 도적과 싸운다. 이것은 집안을 생각하는 지극한 생각이 아닐까. 설마 싸움을 좋아해 그런 것이 아니지 않은가. 러시아가 일본을 넘보는 때에 국내에서 논쟁하고 있을 수는 없다. 한덩어리가 되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려는 것이 ‘호전’이라는 말인가.’
무엇보다 우치무라의 ‘반전론’(反戰論)도 함께 실은 구로이와의 개전론과 나라 걱정에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10월12일 우치무라가 쓴 퇴사각서를 읽어 보면 ‘소생은 러일전쟁에 동의하는 것을 시점으로 일본국의 멸망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라고 씌어 있다. 어디까지나 나라를 생각한 비전론(非戰論)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 문장을 이렇게 잇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 모두가 한덩어리로 개전을 결정한 이상 이에 반대하는 것은 소생이 감당할 수 없는 곳에…, 개전으로 결정된다면 더 이상 반대는 하지 않겠다. 요로주호도 개전에 동의한 이상 반대의 논문은 올릴 수 없기에 논단에서 물러나겠다’고 쓰고 있다.
현재의 이라크 전쟁이라든가 그 후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에 대해 국익과 장래에 대한 논의를 빼놓은 채 감정적이고 관념적인 반대론을 주장하는 요즘 반대론자들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강화회담: PRO-JAPAN이라는 미국 대통령
img4R메이지 37년(1904) 2월4일 저녁, 당시 귀족원 의원이었던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는 추밀원 의장인 이토 히로부미에게 호출받아 도쿄의 의장 관사를 방문했다. 현재 주일 미국대사관이 있는 근처다. 이토는 잠깐 침묵한 다음 무거운 입을 열었다.
“오늘 어전회의가 열렸다. 그 결과 일러 관계는 전쟁으로 해결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전쟁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미국을 우방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미국을 가담시킬 수는 없더라도 러시아에 붙도록 해서는 안 된다. 자네가 도미해 미국의 원조를 얻어냈으면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토 총리의 비서관으로 근무하는 등 오랫동안 이토 밑에서 일해온 가네코는 그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가네코는 메이지 초기에 미국의 하버드대학에 유학해 당시의 미국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친구였다. 이토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가네코는 거절했다. “지금의 미국은 남북전쟁 때 러시아의 원조를 받기도 하였고, 미국의 부호는 대국 러시아의 귀족과 인척 관계에 있다. 때문에 얼마간 자기가 웅변을 하고 동정을 구걸하더라도 미국과 러시아를 갈라놓기는 불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토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자네는 성공하려고만 생각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생명을 걸고 하면 된다. 나도 러시아군이 큐슈(九州)로 내습한다면 생명을 걸고 싸우겠다”고 말했다.
가네코는 그 열정에 못 이겨 드디어 1904년 2월24일 미국으로 출발했다. 가네코가 훗날 강연에서 밝힌 비화에 따르면 “암흑의 땅으로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도착해 보니 자신의 예상과는 달랐다. 그는 이곳저곳에서 ‘미국은 러일전쟁에 대해 엄정중립’이라는 대통령 포고를 보았다.
3월 말 워싱턴에서 면회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왜 빨리 오지 않았는가” 하며 가네코를 환영했다. 게다가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인은 일본을 원조하는 연설을 하는 등 일본을 동정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대사가 귀찮게 항의하기 때문에 부득이 중립이라는 포고를 냈다”고 말하면서 “실은 (나는) PRO-JAPAN”이라는 놀랄 만한 말을 입에 담았다.(谷壽夫, ‘기밀 일러전사’)
루스벨트의 PRO-JAPAN은 전쟁중에도 변하지 않았다. 이유는 있었다. ‘문호 개방’을 외치며 중국 대륙에 대한 이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미국으로서는 러시아가 침략국으로서 마음에 들지 않는 존재였다. 또 미국은 전통적인 전제군주제를 혐오했다. 이러저런 이유로 미국은 러시아와 멀어졌다.
여하튼 루스벨트의 이러한 자세가 일본을 구했다. 이후 미국은 만주와 동해의 해전에서 패배해 전의를 상실한 러시아를 설득하고 강화를 바라는 일본의 뜻을 받아들여 자국의 포츠머스를 강화 장소로 제공해 조정하는 수고를 맡았다. 그 결과 메이지 38년(1905) 9월5일 일본의 전권대사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 외상과 러시아의 전권대사 위테 사이에 강화조약이 맺어졌다.
만주에서 러시아군 철수, 조선에서 일본 이권 승인, 미나미카라후토(南樺太)의 할양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이후 미국과 일본은 ‘카쓰라-테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의 조선 합병과 미국의 필리핀 합병을 서로 용인했다-편집자).
일본이 전승국으로서 강화를 맺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국 대통령의 일본에 대한 호의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국내의 혁명으로 급격히 전쟁 의욕을 상실했던 것 등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 내부를 보면 정치가와 군인 등 국가 리더들이 늘 피아의 전력과 국제정세를 냉정하게 보고 있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전쟁의 의의: 존망의 결단을 재촉받는 일본
img5L‘당연히 일본국은 항복할 것이다. (중략) 아마 열강의 균형역학을 이용해 꼭 전 국토가 러시아령이 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대마도와 함대 기지인 사세보(佐世保, 도쿄 근처 군항, 현재 주일미군 군항이 있음)는 러시아 조차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북해도 전역과 천도열도는 러시아령이 될 것이다. 이는 당시의 국제정치 관례로 보아도 아주 높은 확률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시바 료타로가 ‘언덕위의 구름’에 쓴, 일본이 일본해(동해) 해전에서 패했을 경우의 ‘상상’이다. 이 상상에 따르면 일본 육군은 만주 땅에서 고립되어 전멸한다. ‘상상’은 동아시아에도 미친다. 러시아군의 만주 주둔은 그대로 국제적으로 승인된다. 조선은 거의 러시아의 속국이 된다. 그 중 부산항은 조차지가 되고, 인천 부근에 러시아 총독부가 출현한다.
이상은 일본이 러시아와 싸워 패했을 경우를 상정한 것이지만, 러시아의 힘 앞에 굴복해 싸우지 않았을 경우에도 다소 시간은 걸리더라도 같은 상황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러시아의 동진 기세는 둑이 무너진 하천과 흡사했던 것이다.
시바가 쇼와 43년 본지(산케이신문)에 ‘언덕 위의 구름’의 연재를 시작할 때까지 러일전쟁을 전향적으로 취급하려는 움직임은 전후 일본에서는 많지 않았다. 한 가지 이유는 러일전쟁 36년 뒤에 일어난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얻은 국제적 지위를 모두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러일전쟁에서 이긴 것이 태평양전쟁의 국가괴멸적 패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확실히 일본은 러시아를 만주에서 쫓아내고, 이곳에서 이권을 얻었다. 이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웠다. 이 때문에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다. ‘조선반도를 러시아 지배 밑에 두지 않겠다’는 러일전쟁의 이념에서 그치지 않고 조선을 합병하는 바람에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국의 반발을 초래했다.
더욱이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얻은 남만주철도(러시아가 놓은 東淸철도의 남쪽 절반 부분)의 경영을 놓고 미국 실업가 하리멘의 공동 경영 제안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러일전쟁 강화의 중개자였던 미국의 반발을 불렀다. 이것이 일미전쟁으로 이어지는 최초의 계기였다는 시각도 있다. 일본 국내에서도 러일전쟁 이후 정(政)과 군(軍)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군부가 압도적 힘을 얻었다.
이 모든 결과가 전승에 의한 ‘교만’으로 간주된 것은 러일전쟁 당시 국운을 걸고 싸웠던 일본 국민에게는 너무 가혹한 것이다. 모든 것은 결과론이다. 그것을 두고 ‘싸우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현대적 의미다.
일본은 지금 이라크전쟁과 자위대 파견을 계기로 커다란 갈림길에 서 있다. 전후의 ‘일국평화주의’라는 껍질을 부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평화 건설에 공헌하는 방향으로 키를 돌리려고 하고 있다. 평화헌법 개정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상황은 100년 전 일본이 러시아라는 대국의 위협을 앞에 두고 그 공포에 겁을 먹으면서 극동의 껍질 안에 틀어박혀 살 것인가, 아니면 이를 뿌리치기 위해 싸울 것인가 하는 결단을 재촉받을 때와 흡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100년 전의 일본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국제정세를 냉정하게 그리고 적확하게 포착해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고 결단을 내릴 것인가 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