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기 서울사람들의 여가생활 최 인 영(서울시립대학교 박사과정) 주5일 근무제가 보편화된 요즘, 금요일 저녁이 되면 도심에 있는 영화관에는 심야영화를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한편, 도심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로 도로 곳곳은 밤늦은 시간까지 정체현상을 빚기도 한다. 이러한 교통정체는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면서 스스로를 재충전하기 위해, 그리고 또 추억을 만들기 위해 자신만의 여가활동을 찾아 나선 사람들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가활동의 종류는 다양해지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분주해지고 있다. 사실 여가활동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욕구는 인류 역사와 늘 함께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 이전에는 여가활동이 일부 계층에 한정되거나 생산활동에 부수된 것이었다면 근대인의 여가활동은 좀더 대중적이며 여가 그 자체가 독립된 문화유형으로 형태를 갖추었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근대적 도시화가 진행되던 일제시기 서울에 공원이 생기고, ‘스포츠’로써 운동경기가 열리게 되면서 사람들은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운동경기를 관람하는 것이 마치 근대적 행위인 것처럼 생각했다. 또한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 사람들은 봄과 가을에 꽃구경과 단풍놀이를 즐기면서 자연의 정취를 만끽하기도 했다. 과거 도보생활과 달리 이 시기에는 이미 전차가 대중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지하철과 버스노선을 확인하고 목적지까지 가는 것처럼 당시 사람들도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전차노선을 확인한 후 전차에 올라탔다. 따라서 꽃놀이 철이 돌아오는 4~5월이 되면, 전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전차를 운영하던 경성전기주식회사(이하 경성전기)에서 수리 중인 전차까지 모두 운행하였으며, 특히 유원지를 지나가는 노선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전차를 운행하여 여가생활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다. 사람들의 여가활동은 교통수단, 특히 전차를 통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경성전기에서는 사람들의 여가활동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제시기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놀이장소로는 지금의 창경궁을 꼽을 수 있다. 창경궁(1911년 창경원으로 개칭)은 1909년에 개방된 이후 일반사람들의 출입이 가능해졌는데, 봄의 진풍경인 벚꽃이 만발하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창경원을 찾는 사람들은 낮에만 공개하는 아쉬움 때문에 밤에도 개장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러한 요구에 힘입어 창경원의 야간개장은 1924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창경원의 야간개장은 해방 이후 7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는데, 그때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가끔 당시를 회상하면서 즐거웠던 때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창경원에는 이밖에도 식물원과 동물원, 박물관이 있어 유원지로써 큰 규모를 자랑했기 때문에 서울사람들 뿐만 아니라 지방에 사는 사람들도 가장 선호하던 곳이었다. 물론 궁궐이 유원지가 되었기 때문에 그 식민성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근대적 유원지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더구나 몰려든 사람들을 구경하기 위해, 또 야간개장 때 밤의 화려함을 제공하는 조명(불)을 구경하기 위해, 밤이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창경원을 찾았다. 이로 인해 사람이 가장 많던 봄철에는 아이를 잃어버리고 애타게 찾는 부모의 모습과 소매치기를 당한 사람들의 모습이 종종 신문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서울에서 여름철에 가장 인기가 많았던 곳은 역시 한강이다. 지금도 여름 휴가철이 되면, 산보다는 바다를 찾아 해수욕하는 사람이 많고, 밤의 열대야를 피해 한강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 강바람 때문이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한강에서 어른들은 낚시를 하고, 아이들은 인도교 부근에서 수영을 하면서 물장구를 쳤고 또 연인들은 뱃놀이를 하면서 여름날의 무더위를 식혔다. 당시 한강은 서울 사람들이 가장 시원하게 여름을 보낼 수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한강은 빈곤을 한탄하며, 또 연애에 실패한 사람들이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던 자살의 장소이기도 했다. 한편 남산은 봄부터 겨울까지 항상 서울시민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봄에 파릇파릇 돋아나던 새싹들은 여름이 되면 숲을 이루었고, 가을과 겨울에는 단풍구경과 눈구경을 하기 위해 남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구나 1930년대 들어서는 ‘하이킹’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남산은 산책코스로, 또 가벼운 등산코스로 한층 더 친근해졌다. 더불어 서울의 북한산, 북악산, 인왕산, 관악산 등도 단풍놀이나 등산코스로 유명해졌다. 또 1930년대 눈에 띄는 것은 경성의 주요 명소와 고적을 한 번에 둘러볼 수 있는 유람버스의 등장이다. 당시 유람버스는 지금의 서울시티투어 버스와 비슷한 것으로, 불과 3시간 30분이면 서울 시내를 한 번에 돌아볼 수 있었다. 일단 이 버스를 타면 가장 빨리 서울구경을 할 수 있었던 셈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하루에 2번 운행한 유람버스는 지금의 서울시티투어 버스가 주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달리 지방에서 서울구경을 온 사람들이 즐겨 찾던 관광코스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유람버스가 관광객을 실어 나른 코스를 보면, 창경원, 경복궁, 덕수궁 등의 궁궐을 비롯하여, 서울을 대표하던 경성제국대학과 파고다 공원, 그리고 미쓰코시(三越 : 지금의 신세계)백화점과 총독부, 부민관, 조선신궁 등이었다. 유람버스의 코스는 조선왕조의 정치적 중심이던 궁궐과 함께 총독부 등의 관공서를 관람하면서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을 느끼게 했으며, 또 조선이 일본의 지배하에 놓여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당시에는 서울이 아니었던 청량리와 동구릉, 뚝섬유원지, 그리고 인천의 월미도유원지 등도 서울 사람들이 많이 찾았던 곳이다. 이 가운데 월미도유원지는 당시에도 서울에서 약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로,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인천역에 내려 버스로 5분 정도 가면 도착할 수 있었다. 월미도유원지에는 바닷물을 막아서 만든 수영장과 숙박시설, 오락시설, 음식점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우리는 ‘일제시기’라고 하면, 먼저 일본인에게 억압받고 굴욕적인 삶을 살았다는 암울한 풍경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틀에 박힌 각박한 일상을 벗어나 생활의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여가 활동을 추구하였다. 식민지시기에 형성된 도시문화는 일본의 도시에서 먼저 자리잡은 것이 수입되면서 일본색이 가미된 것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이 시기의 도시문화가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까닭은 근대적 도시문화가 처음 자리잡아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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