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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 경찰의 40%가 조선인 |
광복 직후 한반도에는 2만6677명의 日帝 경찰관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조선인은 약 40%인 1만619명이었다. 직급별로는
지금의 치안감급에 해당하는 道 경찰부장에 조선인이 1명, 경시급(지금의 총경)에 21명(日人 48명), 경부급(지금의 경정)에 105명(日人
433명), 경부보급(지금의 경감)에 220명(日人 790명)이었다. 나머지 조선인 경찰관 1만272명(日人 1만4775명)은 非간부급인
순사부장과 순사였다. 尹鍾華(윤종화·당시 황해도 경찰부장)는 일제 통치시대를 통틀어 유일한 道 경찰부장이었다. 충남 출신인
尹씨는 규슈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경시로 출발했다. 그는 1944년에 경찰부장이 됐다. 광복 직후
한국인으로서 日帝 경찰의 경시(지금의 총경급)까지 올라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확인되는 이는 다음과 같다.
田鳳德(전봉덕·당시 경기도 보안과장, 광복 뒤 육군헌병사령관), 李益興(이익흥·당시 평북 박천서장, 광복 뒤 내무장관), 尹宇景(윤우경·당시
황해도 송화서장, 광복 뒤 치안국장), 孫錫度(손석도·당시 서울 성동서장, 광복 뒤 중부서장), 崔燕(최연·당시 경기도 형사과장, 광복 뒤
수도경찰청 고문), 盧德述(노덕술·당시 평남 보안과장, 광복 뒤 수도청 수사과장과 헌병중령), 崔慶進(최경진·당시 총독부 경무국 사무관, 광복
뒤 수도청 차장), 盧朱鳳(노주봉·당시 전남도 경시, 군정 때 전남 경찰부장) 1946년 1월12일자로 美 군정청 경무국은
경무부로, 각 課(과)는 局(국)으로 승격되었다. 趙炳玉(조병옥) 경무부장과 張澤相(장택상) 수도청장(서울시경국장에 해당)의 親日경찰 중용
소신이 드러난 것은 그 직후에 있었던 서울시내 8개 경찰서장 임명이었다. 서울시내의 8개 경찰서장 자리는, 반탁운동 때 8개 경찰서 서장들이
동조하여 해임됨으로써 비어 있었다. 중부서장으로 발령된 李九範(이구범)은 일제 때 경기도 경찰부 경부보로 있으면서 張澤相의 편의를 보아준 적이
있는 이였다. 용산시장으로 임명된 金亨鎭(김형진)은 일제 경부보 출신이었다. 광복 때 평북 박천서장이었던 李益興은 광복 뒤
남쪽으로 피신했는데, 동대문 서장으로 임명됐다. 일제 때 평남 영원서장을 지낸 李虎雨(이호우)는 마포서장으로, 경기도 경철부의 경부였던 尹箕炳은
수원경찰서장에서 서대문서장으로 임명되는 등 수도청은 親日派 일색으로 되었다. 한편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에는 광복 때
평남경찰부 보안과장이던 盧德述을 임명했다. 특별고등경찰(特高경찰·독립운동 및 좌익사범 전담부서) 고문경찰관의 대명사처럼 된
盧德述은 광복 직후 잠시 평양경찰서장을 맡고 있다가 공산세력에게 붙들렸다. 그는 몇 달간 구금되어 있다가 1945년 말에 풀려나 남쪽으로 왔다.
親日 경찰관들을 趙炳玉 군정청 경무부장과 張澤相 수도청장에게 주로 소개한 이는 경무부 차장으로 趙炳玉 부장을 보좌하던
崔慶進과 수도청 고문으로서 늘 張澤相 청장 곁에 있던 崔燕이었다. 崔慶進은 평남 보안과장으로 일한 경험이 있고(광복 당시엔 총독부 경무국의
사무관), 崔燕은 북한에서 무장 독립군을 붙드는 데 이름을 날린 최고참 고등경찰관(독립운동 탄압 담당)이었다. 盧德述
수사과장은 1946년 4월6일 宋鎭禹(송진우) 살해범들을 검거함으로써 경찰 수뇌부의 인정을 받게 됐다. 反民特委는 特高 출신들을 집중 수사 1948년
9월7일 국회는 「反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켰다.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 박해한 자와 이를 지휘한 자는 사형까지 시킬 수 있도록
했고, 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를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고, 고등관 3등급 이상 5훈 등 이상을 받은 관공리와
헌병·헌병보·고등경찰의 職(직)에 있었던 자는 이 법의 공소시효(2년) 경과 전에는 공무원에 임명될 수 없으며, 특별검찰부(특검)를 두는 등
서슬이 퍼런 법이었다. 이 법이 가장 중요한 표적으로 삼은 것은 일본인 경찰의 下手人으로서 동족을 탄압했던 特高경찰과 헌병 출신들이었다.
당시 수도청 사찰과 부과장 洪宅熹(홍택희)의 증언에 따르면 수도청 사찰과엔 약 60명의 형사가 있었고, 각 경찰서
사찰계에는 20~30명의 형사들이 있었는데, 자신을 포함해서 거의가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경찰 사찰과는 정보·공안기관의
기능을 겸한 권력 센터였다. 핵심 중의 핵심 자리인 수도청 사찰과장 崔雲霞는 일제 때 총독부 경무국과 종로경찰서 등에서
줄곧 고등계 경찰관으로 일하면서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자리에 있었다. 광복 때는 경부로서 종로서 고등계 주임이었다.
反民特委(반민특위)는 1949년 1월8일부터 反民法 해당자들의 검거에 착수했다. 1949년 1월31일까지 반민특위에 체포 구속된 사람은 21명.
金悳基, 李聖根, 盧德述, 河判洛, 李源甫, 劉徹, 노기주, 金泰錫, 崔燕 등 고등경찰 및 헌병 출신들이 被체포자들의 主流를 이루었다.
特高 출신들의 면면들 일제 때 경남도 보안과장이었던 노기주는 광복 뒤에도 경남도
경찰부장을 지냈고 체포 당시에는 부산 영도의 조선경질탄도기 회사의 관리인이었다. 金悳基(김덕기·당시 60세)는 평안북도
고등과장으로 있을 때 吳東振(오동진)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체포, 獄死(옥사)시킨 혐의로 구속되었다. 황해도 형사과장이었던 金克一(김극일·당시
62세)도 같은 날 구속됐다. 李聖根은 황해도 해주경찰서 순경으로 시작하여 평북 경찰부 고등과장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넣고
知事(지사)로 영전했으며, 광복 때는 매일신보 사장이었다. 그는 나중에 反民특재 공판에서 『평북 고등과장으로 6년간 재직하는 동안 매년 약
100건(연루자 약 300명)의 사상사건을 취급했으며 만주 안동에서 독립단 간부 12명을 체포, 압송하여 처형케 한 사실이 있다』고 진술했다.
그는 『당시엔 上海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국내로 잠입, 치안을 교란시키려는 자는 내란죄로 처단했다』고 실토했다.
金泰錫(김태석)의 공소장은 일제 때의 고등형사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가를 짐작케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이 기소장에 따르면 金泰錫은 1912년
조선 총독부 경찰관 통역생으로 출발, 함북 웅기경찰서, 평남 광양만 경찰서, 평양경찰서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1918년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로 轉職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게 되었다. 金泰錫은 1919년 9월17일 서울역전에서 사이토 신임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姜宇奎(강우규) 義士를 체포, 결국 사형을 받도록 했다. 이 사건에 연루된 許炯(허형) 등 애국투사들도 그가 검거, 투옥시켰다.
그는 이듬해 7월20일엔 밀정 金珍奎(김진규)를 이용, 밀양폭탄사건의 주동자인 李成宰(이성재), 尹小龍(윤소룡) 등을 체포하거나
혹독하게 고문하여 사건을 만드는 데 공을 세웠다. 그는 또 1921년 10월엔 조선의용단 사건 주동자들을 검거했다.
1923년 金泰錫은 한국인으로는 최고 경찰직인 경시(지금의 총경급)로 승진, 경기도경 형사과장으로 임명됐다가 곧 군수로 나갔다. 연천·부천군수
등을 거쳐 1938년엔 경남도 산업부장이 되었다. 여기서 그는 지원병 募兵(모병) 시험관을 겸무하면서 청년 25명을 출병케 했다고 한다.
정권의 走狗 역할 계속한 特高 출신들 親日 경찰관들 가운데 입이 열 개라도
변명을 못 할 이들은 고등계 형사 출신들이었다. 절도·강도 등 형사 출신들은 『우리는 독립투사가 아니라 일반 형사범들을 잡아넣었다』고 변명할 수
있었으나 오로지 동족을 감시 탄압하는 것이 직무였던 고등계 형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해도 고등계 형사로서의 존재 그 자체로써 이미
反민족자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광복 뒤에 경찰의 핵심부를 장악, 反民特委의 활동 때까지도 온존하고 있었던 것이
이들이었다. 反民特委는 日帝 고등계 출신인 수도경찰청 전 수사과장 盧德述을 반민법 해당자 및 중부서 고문치사 사건 피의자로 체포했다. 親日경찰의
간판격이면서 군정 경찰에서는 좌익색출에 공이 많았던 盧德述의 체포는 反民特委와 親日경찰의 대결이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日帝의 조선인 탄압에 심부름꾼으로 일했던 特高 출신들은 건국시기엔 李承晩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좌익소탕에 기여했다. 위대한
독립투사였던 李承晩 대통령은 反民特委가 反共이 최우선 과제인 시대 상황을 모르고 「반공기술자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룬다고 불만이 컸다. 이 뜻을
알아차린 경찰은 反民特委의 활동을 약화시키는 공작에 앞장섰다. 日帝 特高경찰 및 헌병 출신들은 李承晩 정부 시절, 경찰
사찰과와 軍의 특무대에 주로 포진하여 정치공작에도 복무했다. 5·16 뒤에는 高모씨 등 特高 출신자들이 정보부로 들어가 그 특기를 발휘했다.
이들은 건국 및 護國(호국)의 시대에 좌익검거에 공을 세웠으나 정권의 走狗(주구) 역할을 해야 생존이 가능하다는 한계로 해서 무리한 수사로 많은
피해자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때로는 이들이 독립운동가 출신 反독재 운동가들을 조사하는 사태도 벌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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