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流! 일본으로 몰려가는 한국인
관광객들
-올해 1-5월 사이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은 104만3336명으로서 前年同期보다도 23.8%나 늘었다.
올해 전반기 6개월 동안 한국을 찾은 외국인은 301만5761명이었다. 같은 기간 외국으로 나간 한국인은 입국자의 두배가 넘는
647만767명이었다. 출국자는 前年同期보다 19.1%나 늘고 入國者는 1.8%만 늘었다.
올해 1-6월 사이 한국을 찾은
일본인은 108만3961명으로 前年同期보다 3.5%가 줄었다. 올해 1-5월 사이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은 104만3336명으로서 前年同期보다도
23.8%나 늘었다. 일본 엔의 환율이 약세가 되고 일본 物價가 낮아졌다. 이 2중효과로 일본을 여행하는 것이 제주도 여행보다 값이 싸게
먹힌다는 말까지 나온다.
지난 7월 하순 나는 북해도 항구도시 하코다데의 초밥 전문집에서 아내와 함께 맛있는 초밥을 배불리
먹었다. 생 맥주 한 잔씩을 더했다. 두 사람이 맛 있게, 배 불리 먹은 점심 값은 3500엔이었다. 환산하면 약2만5000원이다. 서울 강남의
일본식 음식점에서 그렇게 먹었다면 10만원 이상 나왔을 것이다. 한국 초밥이 네 배나 비싼데도 맛은 일본쪽이 더 좋은 경우가 많다. 한국의 음식
값은 때로는 이유 없이 비싸기 때문에 돈을 내는 쪽에서 억울한 것이다.
이 추세대로 나가면 올해 1300만 명의 한국인이
해외로 나가고, 약600만 명의 외국인이 한국을 방문한다. 관광수지가 크게 적자가 난다. 특히 일본으로 나가는 한국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한국을 찾는 일본인은 줄어든다. 우리가 일본의 韓流 붐에 흥분해 있는 사이 실속은 일본이 챙기고 있다. 일본이 물가는 싸고 친절하고 깨끗하고
편하니 한국인이 몰려 간다.
한국은 물가가 비싸고, 불친절하고, 맛은 없고, 화장실은 더러운데 손님이 오겠는가? 대통령까지
나서서 욕설에 가까운 막말을 시도 때도 없이 퍼붓고 있으니 돈 있는 한국인들이 머리도 식히고 맑게 할 겸 해외로 피신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좌파 10년이 찾아오고싶은 나라가 아니라 나가고싶은 나라를 만들었다.
도요다 자동차, 세계최대 제조회사로 등극
-도요다는 일본식으로 성공했다. 이젠 미국이 오히려 도요다식을 배우고 있다. 남의 방식을 모방하면 2등까지는 할지 몰라도 절대로 1등은
할 수 없다
매년 7월에 발표되는 미국의 경제잡지 포춘의 '세계500대 기업'의 올해 랭킹을 보면 高油價로 해서
석유회사와 자동차 회사들이 휩쓸고 있다. 매출액을 기준으로 한 세계최대 회사는 미국의 월마트 체인점 회사이다. 작년 3510억 달러를 팔았다.
2위는 미국 석유회사 엑슨(3472억 달러 매출), 3위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합작회사인 로열더치셀(3189억 달러),
4위는 영국의 BP(2743억 달러), 5위는 미국의 자동차 메이커 GM(2073억 달러), 6위는 일본의 도요다 자동차(2047억 달러),
7위는 미국의 세브론 석유회사(2005억 달러), 8위는 벤츠를 만드는 독일의 다임러크라이슬러 자동차 회사(1902억 달러), 9위는 미국의
석유회사 코노코필립스(1725억 달러), 10위는 프랑스 석유회사 토탈(1684억 달러)이었다.
어제 일본 도요다의 상반기
영업실적이 발표되었는데, 매출액에서 드디어 GM을 능가했다. 즉 세계최대 자동차회사인 것이다. 이는 세계최대의 제조업체라는 뜻이다. 일본은
영국에 비교하면 산업혁명을 약200년 늦게 시작한 지각생이다. 1868년에 명치유신으로 근대화를 시작했다. 그런 나라가 드디어 제조업의 세계
왕좌에 오른 셈이다.
유교-漢字문화권이 工業부문에서 세계 챔피언을 배출한 셈이다. 도요다는 일본식으로 성공했다. 이젠
미국이 오히려 도요다식을 배우고 있다. 남의 방식을 모방하면 2등까지는 할지 몰라도 절대로 1등은 할 수 없다.
오늘
북해도의 해안을 달리는 열차를 탔다. 支線 열차의 화장실이 한국 KTX 특실 화장실보다도 더 깨끗했다. 한국에선 공중화장실을 가는 것이 하나의
공포이다. 일본에선 화장실이 휴게실처럼 안온하다.
작은 데 최선을 다하는 정신이 도요다를 세계공업의 챔피언 회사로 만든
것이 아닐까? 일본과 같은 유교-漢字 문화권에 속한 것이 한국이고 인종적으로는 형제사이다. 일본인이 할 수 있는데 체력이나 지능지수에서 더 나은
한국인이 못할 리가 없다. 문제는 마음과 자세이다.
한국과 일본=유럽과 영국
영국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는 공통점이 많다. 두 나라가 다 대륙에 아주 가까운 섬나라들이기 때문이다.
대륙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대륙에 영향을 주는 행태에서 어떤 공통성을 느끼게 한다.
영국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는
공통점이 많다. 두 나라가 다 대륙에 아주 가까운 섬나라들이기 때문이다. 대륙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대륙에 영향을 주는 행태에서 어떤 공통성을
느끼게 한다. 일본사람들은 한반도로부터의 영향을 부인하는 데 반해 영국은 유럽의 영향을 받은 것을 자랑한다. 일본과 한반도, 특히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틀로서 영국의 역사를 살펴본다.
1. 로마의 침입: 시저가 서기 전 55년에 영국을
정복했다. 이때 원주민은 Celt(셀트 또는 겔트)족으로 불리는 인도-유럽계 사람들이었다. 겔트족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북부에도 살았는데 여기서는
골族이라고 불렸다. 비슷한 시기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북방 몽골인종이 건너갔다. 야요이 문화의 주인공들인 이들은 농경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의
원주민들은 조몬인들이라고 불리는 남방계 사람들이었다.
2. 유럽 대륙에서 훈族의 西進으로 촉발된 게르만族의 대이동 시대가
4-5세기부터 시작되었다. 그 영향은 영국에 미친다. 로마군단이 물러난 직후인 서기 428년부터 약70년간 독일지방에 있던 게르만族 앵글스族과
색슨族이 바다를 건너와 영국을 정복한다. 이들은 원주민들을 북쪽 스코트랜드 지역과 서쪽 웨일스 지역으로 밀어내고 동부와 중앙부, 그리고 남부를
정복한다. 잉글랜드란 말고 앵글로 색슨족이란 말이 이때 생겼다.
비슷한 시기 동아시아에서는 훈族과 같은 계통인 흉노-몽골계
북방유목민족들이 중국과 한반도로 밀고내려온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지배층이 된다. 이들 북방기마민족의 일단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로 건너간다. 가야출신은 규슈로, 신라계는 일본의 서해안(시네마 돗도리 등)으로, 고구려계는 동북지방으로, 맨 나중에 백제계는 나라
교토 지방으로 이주하여 각각의 부족중심으로 小국가들을 만들다가 5세기경에 통일정권을 세운다.
3. 서기 597년에 카톨릭 선교사들이
영국에 들어와 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킨다. 비슷한 시기 불교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가 확산된다.
4. 서기 9세기 초부터
스칸디나비아에 살던 바이킹들이 유럽 전체를 침략하여 약탈과 정복을 되풀이한다. 이들은 키에프, 시실리, 南이탈리아, 북부 프랑스를 정복하여
왕조를 세우고 정착한다. 이 민족이동의 흐름을 타고 덴마크에 있던 바이킹의 일족이 영국으로 쳐들어와 先住民들인 겔트족과 앵글로 색슨族을
정복해간다. 이때 알프레드 대왕이 원주민들을 통합하여 덴마크 세력을 저지하고 이들에게 영국의 동부지방을 영지로 떼어준다. 11세기 초 본국인
덴마크 왕국이 노르웨이까지 통합한 여세를 몰아 덴마크 세력은 영국 전체를 점령한다. 영국은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를 다스리는 거대한 제국의 일부가
된다.
7세기 말 중국대륙을 통일한 唐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백제구원군을 보낸 倭의 해군을 한반도 서해안에서
전멸시킨다. 일본은 羅唐 연합군이 침략할 것에 대비하여 대마도, 후쿠오카, 나라 근방에 방벽과 산성을 쌓는다. 신라가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唐에 대항하여 통일 및 독립전쟁을 벌이자 일본은 신라와 친선관계를 맺는다. 대륙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도 내전이 일어나 親백제 정권이 타도되고
親신라 정권인 天武天皇朝가 탄생한다. 이후 일본정권은 한반도에 대한 개입을 포기하고 일본내에서 고대국가를 완성하여 발전시켜나간다.
5. 11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덴마크 세력이 왕의 자리를 다시 앵글로 색슨族에게 넘겨준다. 색슨族 영국왕 해롤드는 노르웨이王이 왕위를 빼앗으려고
대군을 이끌고 상륙하자 이를 쳐부순다. 바로 이때 프랑스 북부 노르만디 지방에 있던 바이킹族 윌리엄公이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에 상륙한다.
윌리엄公의 바이킹 군대는 해롤드왕의 영국군대를 해스팅 전투에서 이기고 영국의 정복왕조로 새롭게 등장한다.
13세기 고려를 정복한
몽골의 元제국은 일본으로 두 차례 대규모 상륙작전을 전개하지만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 군대의 勇戰과 태풍 때문에 패배한다.
6. 영국이
노르만디公 윌리엄에 정복당한 이후 국내통합이 이뤄지니 영국은 그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프랑스를 쳐들어온다. 영국군은 한때 프랑스의 북부 및
서부를 점령하고 백년전쟁을 벌이지만 잔 다르크의 활약에 힘입은 프랑스의 반격으로 프랑스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최종적으로 포기한다. 영국은 그 뒤
유럽대륙에서 패권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저지하는 균형외교를 전개하면서 명예로운 고립을 지켜나간다. 민주주의와 산업혁명을 선도한 영국은 19세기에
들어가면 세계의 약4분의 1을 식민지로 만들고 해가 지지 않는 해양제국을 건설한다.영국은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루이 14세와 나폴레옹의
프랑스, 비스마르크와 빌헤름 2세의 독일, 그리고 히틀러의 나치를 효과적으로 견제, 무력화시키면서 세계사의 흐름을 이끈다.
한편
일본은 아시아 대륙에 대한 불개입 정책을 견지하다가 16세기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내를 통일하자 여세를 몰아 한반도에 침입했다가 명과 조선군의
반격으로 다시 섬으로 밀려난다. 그 뒤 도쿠가와 막부시절 약270년간 평화와 번영을 누리다가 제국주의의 東進시절에 주체적인 근대화 개혁인
명치유신을 성공시켜 아시아의 강국으로 등장한다. 일본은 뒤늦게 서구 제국주의의 국가모델을 따르면서 富國强兵에 성공하자 러시아와 결전하여
이김으로써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한다. 이들은 만주 중국으로 침략을 확대하다가 미국의 견제에 걸리자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망한 뒤
민주국가로 다시 태어나 非서구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求道者的 자세로 물건을 만드는
일본인
궁극적인 것, 초인적인 것, 절대적인 것, 완벽한 것을 갈구하면서 기도하는 심정으로 名品을 만든다.
趙甲濟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1%가 안된다. 약100만명. 거의 전부가 神道를 믿는데 이를 종교로 볼 수 있을지는
쟁점이다. 샤머니즘과 불교가 혼합된 인상을 수는 神道는 수많은 神社를 통해서 일본인의 생활속으로 파고 들었다.
武士道는 종교는 아니나
종교적 심성을 깔고 있다. 일본인이 물건을 만들거나 직장에 다닐 때 보여주는 집중력과 성실함, 여기서 나오는 완벽함의 추구엔 종교적 心性이
보인다. 종교적이라는 것은 궁극적인 것, 초인적인 것, 절대적인 것, 완벽한 것을 갈구하면서 거기에 도달하기 위하여 求道하는 정신이기도 하다.
이런 마음이 경제에 투입되면 名品을 만든다. 일본엔 求道者的 자세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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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칼 속에 살아 있는 것 같아요"
일본의 名劍을 만들고 있는 匠人의 말: 武士道를 '죽는 것'이라 定義하는데 뒤집어보면 '치열하게 사는 것'이란
뜻이다.
며칠 전 히스토리 채널에서 일본의 사무라이(武士)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 일본의 유명한 칼을 만드는
匠人이 소개되었다. 마사무네(正宗) 집안이 700년째 代를 이어 名劍을 만들고 있었다. 그 匠人은 이런 말을 했다.
"좋은
칼을 만들고 나면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옵니다. 이 칼에 내 이름이 새겨지고 내 정성이 들어갑니다. 1000년 뒤에도 저는 이 칼을 통해서
살아 있을 것입니다"
칼에 영혼을 불어넣은 사람의 이야기였다. 기능공이 철학자처럼 말했다. 匠人이기에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일본인들은 상품을 만들 때도 영혼을 쏟아붓듯이 정성을 다한다고 한다. 그러니 불량률이 세계에서 제일 낮은 제품이 나오는 것이다.
한 주제를 붙들고 거기에 魂을 쏟아붓는 정신, 이것이 사무라이 정신의 본질이다. 이것이 그들의 살아 가는 방식이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무식한 싸움꾼이 아니라 글을 아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武士道를 '죽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뒤집어보면 '사는 것'이다. 항상
명예로운 죽음을 생각하면서 치열하게 살아가려는 사무라이 정신이 일본의 모든 분야에 파고들어 있다.
미국의 건국정신, 서양의
기독교 정신(또는 신사도나 기사도), 조선조의 선비정신, 신라의 화랑도 정신 같은 것들이 살아 있어야 그런 사회는 타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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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정신
일본 北海道의
노보리베츠 온천마을 근방엔 에토 시대의 취락을 再現한 민속촌이 있다. 登別伊達時代村(노보리베츠 다데 지다이무라)이라고 한다. 그 안에
사무라이館이 있고 유키 료이치라는 사람이 썼다는 '武士道'(Spirit of Samurai)라는 글이 걸려 있다.
<인간의 투쟁본능은 보편적인 것이고, 또 자연스러운 것이다. 일본은 이 거친 투쟁본능에 제어장치를 붙여, 통제하려고 했다. 이를 武士道라고
한다. 이는 사회를 통제하고 또한 활력을 주었다. 그리고 투쟁본능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그 어떤 神聖한 것의 존재를 일본인에게 깨우쳤다.
봉건제도는 무너져도 그것을 지탱해준 武士道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를 體現한 이를 사무라이라고 한다.
武士道를
일본인의 독특한 관념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독특한 출생의 비밀에 있다. 무사도의 아버지는 禪이고 어머니는 유교이다. 禪은 불교에 있어서
명상이며, 深思默考에 의해 知의 영역을 넘어서서 절대의 영역을 지향하는 것이며, 유교는 祖先숭배신앙을 기초로 민족의 보전을 목적으로 하는 도덕적
규범이다.
따라서 상호모순된 개념을 가진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생긴 武士道를 體現한 인간, 즉 사무라이는 이 둘의
조합의 비율에 따라, 또 그 시대의 요청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나타난다. '사람의 人生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이며, 서두르지
말고 참는 것이 無事長久의 기본이다'라고 말한 도쿠가와는 일본 최고의 사무라이이고, 강함을 추구하면서 결투에 생애를 걸고 상대를 죽여간 미야모토
무사시도 사무라이이다.
이 두 사람간에는 공통된 삶의 방식이 없어 對局에 위치하는 듯하다. 단 하나 있다고 한다면
艱難辛苦의 한가운데서 각각 神에 다가가 체감한 것, 이것이 사무라이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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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士의
세계일주
인천 공항에서 오전 10시30분에 이륙한 아시아나 여객기(에어버스)가 2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일본 東北지방의
가장 큰 도시 센다이(仙台)에 내렸다. 미야기縣의 센다이는 인구가 약100만 명. 한때 일본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뽑힌 적이 있다. 센다이
근교에 마쓰시마(松島)라는 일본 3대 절경의 하나가 있다. 수백 개의 섬이 모여 있다.
센다이의 시립박물관에 가면 한 방이 온통
국보들로 꽉 차 있다. 하세쿠라 츠네나카(支倉常長)라는 일본 무사가 1613년부터 7년간 유럽을 왕복하면서 갖고 온 유물 47점이 3년 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하세쿠라는 일본에서 포교중이던 스페인 신부 소테로와 함께 범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지금의 미국 서해안에 기착한 뒤 다시
멕시코로 항해하여 아카풀코에 도착했다. 4개월이 걸린 대항해였다.
이들은 멕시코에서 배를 갈아타고 대서양을 횡단, 스페인에
도착했다. 일행은 멕시코를 떠난 지 여덟 달만에 마드리드에 나타나 펠리페 3세를 알현했다. 하세쿠라는 스페인에서 세례를 받은 뒤 로마로 간다.
1615년10월 하세쿠라는 로마의 성베드로 사원 광장으로 들어갔다. 축포가 터지는 가운데 기병이 안내하고 이 일본 사무라이는 말을 타고
들어갔다. 법왕청은 그를 잘 대우했다. 하세쿠라는 임진왜란 때 참전하여 항해술을 인정받았고 반란군 토벌 때는 외교술을 평가받아 센다이의 영주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에 의해 사절로 발탁된 것이었다.
그해 11월 하세쿠라는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했다. 그는 바오로
5세가 스페인에 부탁하여 멕시코와 센다이가 통상을 할 수 있도록 주선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세쿠라가 교황에게 제출한 서신에는 '奧州(지금의
동북지방)의 왕 伊達政宗'이란 표현이 있다. 당시 다테 마사무네는 막부의 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신하로서 복종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王운운은
터무니 없는 과장이다. 교황측에서 다테 마사무네는 일국을 대표할 외교권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다. 하세쿠라를 수행했던 스페인 선교사 소테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마사무네公이 다음의 막부 장군이 될 실력자입니다. 지금 일본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30만 천주교도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를 것입니다"
이런 무엄한 말이 막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몰래 전해졌지만 도쿠가와는 모른 척해버렸다고 한다.
마사무네는 배를 만들 때부터 막부의 허가를 얻었고 막부의 선박담당자를 항해사로 초빙했기 때문에 반역의 의사기 있다는 오해를 받지는 않았다.
교황청과 하세쿠라의 교섭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일본에서도 1620년부터 막부에 의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센다이
시립박물관에는 하세쿠라가 가져온 성경, 십자가, 그림들이 있다. 하세쿠라가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향하여 기도하는 초상화, 그에게 주어진
로마시민증서(羊皮紙에 금박글자가 쓰여 있다) 등은 國寶이다. 하세쿠라는 돌아오는 데 3년이 걸렸다. 그는 1617년 스페인의 세빌리아에서 귀국
길에 올랐다. 대서양을 건너 멕시코에, 멕시코에서 태평양을 건너 마닐라에, 마닐라에서 센다이로 온 것이다. 마젤란이 세계일주를 한 지 약100년
뒤의 일이었다.
하세쿠라는 귀국한 2년 뒤 52세에 죽었다. 그의 아들은 천주교를 믿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그가 가져온
물건들은 압수되어 명치유신 이후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하세쿠라를 수행했던 소테로 신부도 순교했다.
센다이를 큰 도시로
발전시킨 藩主(번주. 막부시대의 영주) 다테 마사무네의 숨결과 발자취는 이 도시 곳곳에서 살아 있다. 일본은 서구식 봉건제도를 거친 나라이다.
봉건제도란 영주가 번(藩)이란 영지를 거의 독립국가처럼 통치하고 다만 중앙정부인 幕府의 조정과 견제를 받던 제도이다. 이 제도하에서 영주들은
藩의 경제발전에 경쟁적으로 힘을 쏟았고 이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 약250년간 일본은 평화속의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축적되고
단련된 지식, 國富, 제도, 민족성이 명치유신의 물적인 토대가 되었다.
일본의 지방에 가보면 그 지방을 번성케 했던 옛
영주(藩主=大名)를 기리는 기념관이 많다. 중앙집권적인 조선조下에서는 지방관리들의 독자성이 허용되지 않아 기억할 만한 인물들도 별로 남아 있지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센다이에서는 '다테 오도코'라는 말을 쓴다. 다테 마사무네처럼 멋진 남자란 뜻이다. 그런데 다테 마사무네는
어릴 때 천연두로 오른쪽 눈이 실명된 애꾸였다. 그의 별명은 獨眼龍이었다. 다테 마사무네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雄이 천하를 놓고 대결하던 시절에 태어났다.
그는 젊었을 때는 일본의 동북지방을 근거로 삼아 천하의 패권을
노려볼 만한 인물로 꼽히기도 했으나 결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속한다.
1590년의 일이었다. 그 전해 마사무네는 지방 영주와
전투를 벌여 아이츠 지방을 손에 넣었다. 당시 이미 패권을 쥐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영주들에게 전투금지령을 내려놓았었다. 이 명령을 어긴
마사무네에 대하여 히데요시는 지금의 도쿄 근교인 오다와라(小田原)까지 와서 해명하도록 명령했다. 마사무네는 잘못했다가는 목이 달아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上京 명령을 거부하고 싸울 것인가, 천하쟁투를 포기하고 복속할 것인가. 마사무네는 후자를 택했다.
오다와라에서 10만
대군을 이끌고 攻城戰을 벌이고 있던 53세의 히데요시는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23세의 청년장군 마사무네의 목등을 막대기로 툭툭 치면서 "조금만
늦었더라면 여기가 위험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3년 뒤인 1593년4월 히데요시의 명을 받은 마사무네는 1300명의
부하병사들을 이끌고 대마도를 거쳐 부산항에 상륙한다. 그 1년 전 임진왜란이 시작되어 약14만 명의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작전중이었다.
마사무네는 후방군수지원을 담당했다. 그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했다. 1차 진주성 싸움(1592년10월)에서 참패했던 일본군은 1593년6월
제2차 진주성 싸움을 벌인다. "한 명도 살려보내지 말라"는 히데요시의 특명을 받은 일본군은 약9만 병력을 집결시킨다. 그 7년 뒤 전국시대의
막을 내리고 도쿠가와 시대를 연 대결전 세키가하라 전투 때 東西 양군은 각각 9만을 동원했으니 진주성 공략에 히데요시가 얼마나 집착했는지 잘 알
수 있다.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이긴 일본군은 진주성 안에 있던 5만의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다테 마사무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소, 말, 닭, 개까지 남기지 않고 죽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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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간의 일본인 중학생들
-한 시간
동안 관찰해도 휴대전화를 거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일본은 철도망이 시골 구석 구석까지 들어간다. 新幹線이
동맥이라면 전국 방방곡곡까지 스며든 支線은 실핏줄이다. 나는 지난 화요일 후쿠오카의 하카다역에서 新幹線을 타고 혼슈의 남쪽 야마구치縣의 아사에서
내려 나가토로 가는 支線 기차로 갈아탔다. 운전사 한 사람이 움직이는 한 輛(량)짜리 원맨카였다. 승객은 거의가 통학하는 중학생들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들을 한 시간 동안 관찰해보았다. 12명중 책 읽는 학생이 8명, 조는 학생이
3명, 한두 명은 휴대전화기를 열고 이리저리 누르고 있었다. 한 시간 동안 지켜보아도 휴대전화기로 통화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야기도
조용조용하게 했다. 잠을 자는 학생도 단정하게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인간이 되어선 안된다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현장이었다.
앉은 자세가 좋은 것은 학교에서 어릴 때부터 자세, 보행 교육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자세는 마음가짐의 반영이고
자세에서 마음가짐이 생기기도 한다. 요사이 한국 지하철 안에서 중고교 학생들이 소란스럽게 오고가고 전화 걸고 대화하는 모습과 대조되는
풍경이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인간이 되지 말라"라는 말 한 마디에 교육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신문
광고에 이시하라 신타로 동경도 지사가 쓴 책 광고가 실렸다. 제목은 '젊은이가 꿈을 갖지 않은 나라는 망한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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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新幹線의 평균 지연발차시간은
6초!
-43년간 60억 명 이상이 이용했는데 사망 사고가 한 건도 없다.
1964년 일본 고속열차
新幹線이 도쿄-新오사카역 구간에서 개통된 이후 약60억 명의 승객이 이용했다. 놀랍게도 승객이 사망한 사고는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新幹線安全神話이다. 운행중 탈선은 단 한번, 2004년 10월23일에 발생했다. 니이가타의 나가오카驛 부근을 시속 200km로
달리던중 强震(강진)이 일어나 탈선했으나 전복되진 않았다. 경상자뿐, 중상자도 없었다.
新幹線은 출발이 1분 늦으면
지연으로 분류한다. KTX는 10분 출발이 늦으면 지연으로 분류한다. KTX는 定時발차율이 90% 이상이라고 자랑한다. 일본 新幹線의 2002년
평균 지연발차 시간은 6초였다. 한국인들은 열차가 들어오면 시계를 보면서 "오늘도 10분이나 늦었군"이라고 이야기하고, 일본인들은 시계를 보면서
"오늘도 10초나 늦었군"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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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40년 전 일본보다 못한가?
5분이나 연착해도 사과 한 마디 없는 KTX. 왜 우리는 일본인보다 정직, 정확, 청결하지 못한가?
趙甲濟
오늘 부산에서 저녁 7시55분에 출발한 KTX 열차는 서울역에 예정보다 5분이 늦은 밤 10시46분에 도착했다. 중간에
두번 열차가 徐行(서행)했다. 안내방송은 "신호 대기를 위해 서행한다"고 했다. 5분 늦은 데 대해 미안하다는 방송도 없었다. 5분쯤은 문제가
안된다는 태도이다. KTX보다 40년 먼저 개통한 일본의 고속열차 新幹線(신간선)의 하루 全 열차 연착시간을 다 모아도 5분이 안될 것이다.
40년 뒤에 개통한 한국의 고속열차는 왜 이 모양인가? 우리가 도입한 기술이 40년 전 것보다 낡은 것이었나, 아니면
운행기술이 40년 전의 일본보다 못하단 이야기인가? 왜 우리는 40년 전 일본을 따라잡지 못한단 말인가?
열차에서 내려
서울역내 화장실에 들렀다. 두 사람이 세면대에서 발을 씻고 있었다. 근사한 화장실의 바닥은 물바다이고 휴지 천지였다. 우리는 왜 화장실을
일본인보다 깨끗하게 유지하지 못하는가? 축구는 거의 매번 일본에 이기는데 왜 열차와 화장실 부문에선 지는가?
대통령,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을 향해서 질서, 法治, 청결을 호소해본 적이 있는가? 내 기억으론 30년 전 朴正熙 대통령 이후 어느 정치인도 국민들의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 없다. 국민들을 至高至善한 존재로 우상숭배하는 아부성 발언만 한 기억이 난다.
왜 우리는 일본인보다
정확하게, 정직하게, 청결하게 일하지 못하는가? 지난 20년간의 민주주의 실천 시대가 국가엘리트層의 총붕괴를 가져온 때문인가?
[
2007-06-23, 23:39 ] 조회수 :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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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不法주차를 하지 않는 일본
-모든 집이 주차장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작은 집이라도 마당이나 건물 속을 주차장으로 내어놓고 있었다.
며칠 전 시모노세키의 뒷골목을 한 시간 동안 걸어다녔다. 한국의 거리풍경과 다른 모습이 하나 있었다. 거리에 자동차를 주차해놓은 것이
하나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모든 집이 주차장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작은 집이라도 마당이나 건물 속을 주차장으로 내어놓고 있었다. 좁은
길임에도 마음놓고 산책을 즐길 수 있었다. 일본인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 항상 강조하는 말이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인간이 되지말라"이다. 자동차를
거리에 세워두면 보행자와 운전자에게 폐를 끼친다.
서울의 거리 풍경은 어떤가? 차를 길 양쪽으로 세워버린다. 4차선이
2차선으로 줄어든다. 거리질서 확보는 불법 노점상과 불법 주차 단속이 열쇠이다. 거리질서가 혼란스러운 것은 단속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한
때문이다. 정권이 바뀌어야 해결될 문제이다. 좌파는 원래가 법치와 질서를 싫어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즐긴다.
잊을 수 없는 일본 택시 기사와 미국의 老교수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도 잘 아는 사람을
대하듯이 친절하다면 그는 一流시민이다.
趙甲濟
1975년 4월 어느 날 저녁 일본을 혼자서 여행하던 나는 유명한
해안 휴양지 아다미(熱海)의 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린 나는 근처의 여관에 들었다. 저녁을 먹을 겸 도시 구경에 나섰다. 택시를 타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여관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아차"했다. 여관 이름을 기억해두지 않았다. 명함이나 성냥 곽도 들고 나오지 않았다.
우선 택시를 잡아탔다.
"아다미에 여관이 몇 개입니까"
"400개입니다"
택시로 그
400개를 뒤지다간 날이 샐 것 같았다. 택시 운전자에게 여관을 잊어버렸다고 했더니 그는 흔쾌히 말했다.
"같이 찾아봅시다. 그런데
역으로 돌아가서 거꾸로 내려옵시다"
택시기사는 역에서 바다쪽으로 내려오면서 골목을 누볐다. 여관마다 들린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닌데요"
"혹시 바다가 보였습니까"
"기억이 안나요"
이런 식으로 한
시간 정도 헤맨 끝에 눈에 익은 한 여관 앞에 닿았다. 내 여관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쉬었다. 택시 기사도 "야, 참 잘 되었습니다"면서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요금도 더 요구하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 나는 첫 일본여행에서 만났던 이 택시 기사 이야기를 자주 한다. 그만큼 일본
홍보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 택시 기사가 나에게 베풀어준 好意가 몇 배의 효과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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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 전직 장관 K씨로부터
이런 체험담을 들었다.
1990년대 초에 일행과 함께 미국의 스탠퍼드 대학을 방문했다고 한다. 출발시간이 되어 버스로 돌아가기 위하여
교정을 걸어가다가 유학을 와 있는 친구를 만났다. 서로 손을 잡고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관광 버스 출발시간을 지나치고 말았다. 버스는 다음
행선지인 샌 프란시스코 호텔로 출발한 뒤였다.
난감해진 K씨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마침 책을 들고 지나가는 교수풍의
노신사를 붙잡고 물었다.
"택시를 부를 수 있습니까"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샌프란시스코입니다"
"여기선 곤란한데, 그런데 잠시 봅시다"
그 노교수는 팔목 시계를 보더니 "시간이 되겠는데"라고 했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요"라고
하더니 사라졌다. 그리곤 자신의 차를 몰고 오는 것이었다. 노교수는 K씨를 태우고 한 시간 이상을 달려 샌프란시스코 호텔에 도착했다. 미안하기
짝이 없는 K씨는 최상급 인사를 했으나 노교수는 무뚝뚝할 정도로 사무적이었다. 응당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처럼 간단한 인사를 남기곤
아무런 생색도 내지 않고 돌아가버리는 것이었다.
잘 아는 사람에게 친절하기란 쉽다.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도 잘 아는 사람을
대하듯이 친절하다면 그는 一流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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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陶工 李參平은 왜 일본에서 날렸나?
-납치되어간 그는 아리타에 磁器기술을 전해주었다. 일본은 이 기술을 발전시켜 유럽으로 수출했다. 李씨가 조선에 남았다면?
작년 봄 규슈의 사가현 아리타(有田) 마을에 가서 조선陶工 李參平의 자취를 보고 온 적 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붙들려간
조선陶工으로서는 가고시마에 정착한 심수관이 한국인에게는 더 유명한데 일본과 세계에 끼친 영향면에서는 李參平이 훨씬 크다. 李參平은 일본에 磁器를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주었고, 일본은 이를 산업적으로 발전시켜 17세기 중엽부터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를 통해서 유럽으로 수출했다. 李씨가 정착한
아리타는 그의 덕분으로 일본 磁器공업의 본산이 되었다. 이 산골마을의 인구는 1만4000명 정도인데 150개의 窯(요. 자기를 굽는 가마)와
250개의 판매점이 있다. 규슈陶磁문화관이란 박물관도 이 마을에 있다. 李參平을 기리는 神社에 가보니 자기로 만든 그의 坐像이 있었다.
공주사람인 그는 1598년 왜군이 철군할 때 지금의 사가현 일대를 영지로 하고 있던 나베시마 장군에 의해서 납치되어
끌려갔다. 나베시마는 이삼평으로 하여금 좋은 도자기를 만들도록 뒷받침을 잘해준 것 같다. 이삼평은 아리타에서 陶土를 발견하고 窯를 개량하여
일본에서 처음으로 磁器를 만들었다.
당시 세계에서 陶器를 만드는 나라는 많았으나 磁器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조선뿐이었다. 도기와 자기를 비교하면 이런 차이가 있다. 도기의 원료는 有色粘土이다. 자기의 원료는 백색粘土와 長石, 그리고 珪石과 陶石이
혼합된 흙이다. 도기는 색이 있지만 자기는 백색이다. 도기는 透光性이 없으나 磁器는 있다. 굽는 온도는 도기가 1200~1300도인 데 반해
자기는 1300~1400도이다. 두드렸을 때 자기는 아주 맑은 금속음이 난다. 여러 가지 점에서 磁器는 도기보다 한 단계 위의 고급품이다.
임진왜란 때 쳐들어온 왜군의 주력은 규슈의 영주들이었다. 이들은 그 전부터 陶器생산에 관심이 많아 철군할 때는 경쟁적으로
조선도공들을 붙들어갔다. 이 조선陶工들에 의해서 磁器를 만드는 기술(成形과 燒成)이 일본에 도입되고 개량되었다. 아리타가 일본 磁器산업의
출발지가 된 것은 이삼평이 이 마을의 泉山이란 곳에서 陶土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곳을 방문했더니 아직도 노란빛깔 흙을 캐냈던 坑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이삼평 등 조선도공들은 규슈 지방에 새로운 窯(가마)의 방식을 소개하여 확산시켰다. 산비탈을 따라
계단식登窯를 만든 것이다. 이 가마는 불을 때는 연소실에 이어 처음 빚어낸 그릇을 넣어 굽는 燒成室을 적게는 5,6개, 많게는 30개 연결한
모습이었다. 일본에선 이 燒成室을 처음엔 대나무를 쪼갠 것 같은 割竹式으로 만들었으나 李參平 이후 천장을 돔으로 한 連房式으로 개량했다.
연방식으로 되니 방이 커져 큰 磁器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시대에 들어가면 아리타에서는 길이가 100m,
폭이 8m나 되는 거대한 登窯도 만들어졌다. 1637년 아리타 등 지금 사가(佐賀)현 일대를 다스리던 나베시마藩은 너무 많은 窯가 난립한다고
판단하여 826명의 도공들을 폐업시키고 11개의 가마터로 통합하는 구조조정을 했다.
아리타 야키로 일컬어지는 이곳
磁器산업이 비약한 것은 중국의 정세 변화 때문이었다. 1644년에 명이 망했다. 그때까지 유럽에 자기를 공급했던 것은 중국이었다. 1656년
淸은 海禁令을 발표하여 중국 상선의 私的인 항해를 금지시킴으로써 磁器 수출이 어렵게 되었다.
이때 전성기를 맞고 있던
해양국가가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벌인 끝에 승리한 네덜란드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로 진출하는 사이 네덜란드는 동남아시아와
동북아로 눈을 돌렸다. 국민 전체가 장사꾼이고 선원들인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무역에 國運을 걸고 있었다. 그들은 무역이 금지된 중국
대신에 일본 北규슈의 磁器를 구입하여 유럽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타이밍이 맞은 것이다. 이삼평 등 조선도공에 의해 도입된 磁器 기술이 해외
시장을 맞아 대량생산 체제로 들어간다.
1659년에 동인도회사가 유럽에 가져간 북규슈 <히젠(肥前)> 磁器는
3만3910개나 되었다. 아리타의 磁器업체들은 이마리(伊万里)항구를 통해서 국내외로 물건을 내보냈다. 도쿠가와 막부는 폐쇄정책을 썼으나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항구에만 네덜란드 商館을 허용하여 무역을 할 수 있게 했다.
1684년 淸은 磁器수출을 재개했다.
1705년 프러시아領 베를린의 샤로텐부르그城에 '磁器의 방'이 만들어지는데 일본 자기들이 많이 들어갔다. 이때 아리타에서 만들어 수출한 자기는
유럽사람들의 취향에 맞게 화려한 문양을 그려넣은 것이었다. 담백한 조선磁器에서 연유한 기술이 국제시장에 적응하여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리타 일대의 窯에서는 이 무렵 중국의 자기 기술을 많이 참고로 하는데 유럽 사람들이 오랫동안 중국 자기를 썼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기
위함이었다.
1709년 독일에서 중요한 발명이 있었다. 독일의 강력한 영주인 작센의 選帝候(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할 때
투표권이 있는 영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磁器燒成法을 연구하도록 베트가라는 사람에게 시켰는데 그가 유럽에서 최초로 경질磁器를 구워내는
데 성공했다. 이런 변화에 따라 일본의 磁器는 해외시장에서 밀리게 된다. 명치유신 이후에는 日人들이 오히려 유럽의 자기 기술을 배워오게 되었다.
1870년 사가藩은 독일 과학자 와그네르를 초청하여 유럽의 선진 窯業화학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1873년 비엔나에서 있었던 만국박람회에
구경갔던 사가현의 두 도공들이 서양에서 배운 磁器기술을 일본에 소개했다.
李參平은 1655년에 죽었다고 한다. 일본에
붙들려 갔을 때 그의 나이가 20대였다고 해도 그는 80세 이상 장수했다는 이야기이다. 그가 끌려가지 않고 조선에 남았다면 그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도공을 알아주는 일본 武士에 의해 납치되어가 무사들의 적극적인 지원하에서 자기 기술을 산업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李參平은
일본 磁器의 元祖로 기록되고 있다. 플라스틱 공업이 발전하기 전 磁器공업의 비중은 생활속에서 아주 컸다. 당시의 도자기 산업은 지금의
전자산업이나 석유산업처럼 가장 기초적인 생활산업이었다. 이 분야에서 혁신적인 기술을 일본에 가져온 李參平에 대해서 일본인들은 대접을 잘 해주고
있다.
일본의 지방을 돌아다녀보면 수많은 동상과 기념관을 만난다. 인물을 기리고 역사를 소중하게 여기는 일본인들이
非유럽국가에선 유일하게 선진국 대열에 끼였다. 좋은 의미의 因果應報일 것이다.
일본 무사들은 전쟁도 잘했지만 원래 실용적인
생각을 가진 엘리트집단이었다. 따라서 전쟁을 하다가도 敵國 기술자를 만나면 이들을 죽이지 않고 우대하여 무기나 상품을 만들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領地를 윤택하게 했다. 한국의 창백한 선비들과 양반들에 눌려 지내면서 대접을 제대로 못받고 살았던 陶工들이 일본에 끌려가서 오히려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은 한국과 일본 지배층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실용파와 명분파의 차이이다. 조선과 일본의 차이는 기술과 장사를
경멸한 나라와 기술과 장사를 장려한 나라의 차이이다.
일본 네번째 첩보위성 발사
-韓美연합사를 해체하고
자주국방하겠다는 盧 정권은 뭘 하고 있나? 돈 안쓰는 자주국방은 말장난이다.
일본이 어제 네번째 첩보위성을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일본은 1998년 8월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일본열도를 넘어 태평양으로 날린 이후 첩보위성을 차례 차례 발사하기
시작했다. 이 네 개의 첩보위성은 한반도를 주로 정찰하게 될 것이다. 이 네 개의 첩보위성을 발사하고 운영하는 데 들어가는 예산은 100억
달러에 육박할 것이다. 일본은 또 잠수함의 침투를 막는 데 쓰는 對潛초계기 100대를 갖고 있다. 우리 나라는 10대도 안된다. 對潛초계기는 한
대에 1억 달러나 한다. 일본이 가진 100대의 對暫초계기 편대는 장비구입비로만 최소 100억 달러나 썼다는 이야기이다. 미국의 정보력에 상당
부분 의존하면서도 일본은 이 정도의 돈을 쓰고 있다. 미국은 10여 기의 첩보위성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은 韓美연합사를
해체하고 자주국방을 하겠다고 한다. 자주국방은 독자적인 정보수집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우선 첩보위성을 10개 이상 쏘아올려야 될 것
아닌가? 그런 데 돈을 안쓰겠다는 말은 미국의 정보에 계속 의존하겠다는 뜻이거나 對北종속적 입장에 만족하겠다는 뜻이다. 이는 자주국방이 아니라
事大국방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말하는 자주국방은 다 국민들을 속이는 짓이다. 자주국방은 돈 없인 불가능하다.
일본과
러시아의 차이
"불량품의 설계도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미국의 어느 자동차 회사가 러시아와
일본의 부품공장에 다음과 같은 조건을 붙여 제품을 발주했다.
<불량품은 1000개 당 하나를 기준함>
며칠 후 러시아 공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불량품을 1000개당 1개로 하라는 조건을 맞추기에 매우 어려움. 납기의 연기를
요망함"
며칠 후 일본의 공장으로부터도 연락이 왔다.
"납기에 맞추어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중임. 다만, 불량품의 설계도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조속히 보내주시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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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인권 선진국 일본, 후진국 한국
-한국 납북자 가족들은 盧정권 대신 일본 정부에 대해서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 12월14일 나는
일본 도쿄 히비야 공원에 있는 공회당에서 일본 정부가 주최한 북한 납치자 관련 대중집회에 참석했다. 지난 6월 성립된 북한인권법에 따라 일본
정부는 북한인권계몽주간을 선포하고 여러 행사를 벌이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많은 탈북자, 납북자 가족들이 이 행사에 초대받았다. 히비야 공회당에선
북한납치자 문제를 잘 다루어 총리가 된 아베씨가 연사로 나왔다. 그는 "내가 총리로 있는 한 납치자 문제 해결 없이는 절대로 북한과 수교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다. 이 대목에서 관중들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나는 북한정권에 의한 국제납치 문제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이 대회에 초청받았다.
일본 정부, 국회, 언론이 한덩어리가 되어 납치자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國力을 총동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중한
일본인들은 좀처럼 본심을 드러내지 않지만 느낌으로선 일본이 미국보다도 오히려 더 강력하게 김정일 정권의 붕괴나 무력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제세미나의 결론을 맺은 사토 가쓰미 구출회 회장도 "대량살상무기 그 자체인 김정일의 제거 없이는 납치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의 기준으로는 일본이 김정일로부터 대단한 양보를 받아낸 것 같은 데 일본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2002년
9월 평양회담에서 고이즈미 당시 수상은 김정일로부터 일본인 납치의 자백을 받았고 16명(지금은 17명으로 일본 정부가 확인)의 납치자중 생존자
5명을 데리고 왔다. 일본은 북한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한 납치자들이 살아 있다고 전제하고 북한에 대해서 진상규명을 압박하고 있다. 지난
10월9일의 핵실험 이후 일본은 사실상 對北경제봉쇄에 들어갔다. 세계에서 북한에 대해 가장 큰 소리를 치는 나라가 일본인 셈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한인권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이 선진국이고 일본은 후진국이었다. 1991년 7월호 月刊朝鮮은 북한공작원
辛光洙에 의한 일본인 하라타다아키 납치 사건을 현지 취재로 상세하게 다뤘다. 당시 편집장으로서 이 기사를 읽어본 나는 일본 경찰이 이 명백한
납치사건에 대해서 쉬쉬하면서 공개수사를 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북한에 의한 납치임이 안기부 수사로 밝혀졌는데도 북한당국에 대해서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무슨 이런 나라가 다 있나"라고 의아해 했었다.
그런 한국이 북한인권 문제에 관한 한
지금은 후진국이 되어버렸고 일본이 오히려 선진국이 된 것을 이번에 실감하게 되었다. 이런 逆轉은 어떻게 이뤄졌던가? 일본의 용감한 기자들,
현대코리아 그룹 인사들, 그리고 납치자 가족들이 약10년간 끈질기게 조사하여 진실을 밝혀내고 이를 근거로 일본 정치인을 움직이고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나서고, 드디어 김정일의 자백을 받아내고 그렇게 되니 일본의 여론이 움직이고 역사가 바뀐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 1977년 11월15일 니이카다 해안에서 북한공작원이 납치해간 13세 중학생 요코다 메구미 사건이었다. 요코다 메구미를
북한에서 보았다는 탈북 공작원 安明進씨의 증언이 돌파구였다. 요코다 소녀(지금은 40代)의 부모는 수상 이상으로 일본인들에게 잘 알려진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일본에서 천황, 수상 다음으로 기자들을 많이 끌고 다니는 인물이 요코다 시게루(아버지)-요코다 사키에(어머니) 부부일 것이다.
이 부모는 납북된 딸의 實名을 걸고 공개적으로 납치자 문제를 호소했다. 實名을 공개하면 북한당국이 딸을 죽일 것이라고
걱정도 했으나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14일의 집회에서도 요코다 부모가 나와서 한 시간 동안 조용한 강연을
했다. 어머니 요코다 사키에씨의 차분한 설명이 감동적이었다. 사키에씨는 일본 경찰이 일찍 공개수사를 했더라면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정부를 비판했다. 딸이 실종된 뒤 지옥 같은 하루 하루의 고통에 대해서 어머니 된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는 "김정일 이 놈이
정말 악마이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사키에씨는 경찰이 여자 시체가 발견되었으니 와서 확인해달라는 전화를 걸 때마다 온 몸이 떨리고 맥이
빠졌다고 한다. 20년 동안 깜깜한 속에서 보내다가 차츰 북한의 존재가 드러나고 그때부터 요코다 부모들과 납치자 가족들은 싸우기 시작했다.
이날 강연에서 요코다 사키에씨는 일본인 납치자 문제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았다. 6.25 때 한국에서 납치된 10만 명
이상, 휴전 후 납치된 500명, 그리고 북한 강제수용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강제수용소 출신 탈북자 강철환씨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들으면 참으로 부끄러워 해야 할 말이었다.
지금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다루는 일본의 공무원과
구출회, 그리고 가족회 사람들은 한국인 납치자와 탈북자, 그리고 북한내의 인권탄압에 대해서도 반드시 언급한다. 납치자 문제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이번 북한에 의한 국제납치 문제 세미나에서도 일본 구출회 사람들은 북한공작원들이 타일랜드와 마카오의 여자들을 납치해간 사실을
밝혀내고 타일랜드 납치자의 친척을 데리고 와서 증언하도록 했다.
마카오에서 납치된 '미스 홍'에 대해서는 이 여자를
북한에서 만났던 최은희씨의 비디오 증언이 있었다. 崔여사는 직접 와서 증언할 예정이었으나 수술을 하는 바람에 불참했다.
한국인 납치자 가족들은 일본 정부인사들을 만나면 "한국인 납치자 문제에 대해서도 국제사회에 호소해달라"는 취지의 부탁을 한다. 노무현 김대중
정부가 외면하니 이렇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조국이 버린 가족의 문제를 외국 정부에 대해서 호소하려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는가?
노무현 김대중 정권이 국가 체통을 얼마나 더럽히고 있는지 저주하지 않을 수 없다.
14일 오후 국제세미나 참석자들이 아소
외무장관을 만났을 때도 한국 납북자 가족 대표들로부터 그런 부탁이 나왔다. 아소 장관은 말했다.
"일본 정부는 외국과 정상회담,
외상회담을 할 때마다 반드시 납북자 문제를 거론하고 협력을 효청합니다. 이것이 내각의 확고한 방침입니다"
아베 수상이 취임
직후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중국총리에게 납치자 관련 팸플리트를 건네주면서 "북한이 중국사람도 납치해갔으니 관심을 가져달라"는 취지의 당부를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있으니 일본이 이스라엘 같은 나라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론
아라드란 이름을 안다. 유명 배우여서가 아니다. 그는 1982년 레바논 전선에서 격추된 뒤 실종된 공군 전투기의 항법사이다 . 이스라엘 정부는
아라드가 이란이 조종하는 테러단체에 의해 억류된 것으로 판단하여 지금까지 끈질긴 탐색 및 구출공작을 펼치고 있다. 이스라엘의 모든 외교관은 외국
외교관을 만날 때 『아라드에 대한 정보를 혹시 갖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의무가 되어 있다.
납치는 人生 말살
행위이다. 13세 소녀 요코다 메구미가 북한공작원한테 납치되어 가서 공작원 양성소에서 일본어를 가르쳐주는 선생이 되었다. 북한당국은 집으로
돌려보내달라고 사정하는 요코다양에게 "한국어를 배우면 돌려보내준다"고 속였다. 요코다양은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다고 한다. 북한은 2년 전, 죽은
요코다양의 유골이라면서 뼈가루를 일본 정부에 건네주었다. 일본의 과학자들은 그 뼈가루가 요코다양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요코다 부모는
더욱 딸의 생존을 믿고 있다.
70대에 들어간 이 부모가 살아서 딸을 만나려면 김정일이 하루빨리 제거되어야 한다. 김정일
제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한 인간으로 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토록 고통을 받고 있는데도 왜 하느님은 개입하지 않는
것일까? 기독교인인 요코다 어머니는 그렇게 한탄하고 있을 것이다.
김정일의 동족 납치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으면서 퍼주기만 계속하는 자들이 인권과 평화를 운운한다. 김대중씨는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자칭한다. 그는 김정일로부터 직접 구두지시를 받고
일본인 하라타다아키씨를 납치해간 신광수를 석방시켜 북한으로 보내주어 사실상 김정일의 범죄증거를 말살했다. 그 신광수에 대해서 일본정부는
국제수배를 내려놓고 있다. 김대중씨의 양심이 국제수배당한 셈이다. 동족을 납치해간 자, 이 문제를 알고도 외면한 자들이 죽어서 지옥으로 가지
않는다면 천당도 없다.
못난 상관을 잘 따르는 일본 무사들
-조선통신사가 본 일본: <太守(藩主.
大名)는 평범하고 다소 못나 보였지만 그 부하들은 태수의 명령을 받아 행하는 데 조금도 빈틈과 소홀함이 없었다. 부하를 불렀을 때 그에 응대하는
것이 메아리와 같고 일을 하는 데 전력을 다하며 보초 서고 차를 끓여오는 데 조금도 헛점이 없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감탄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시대 조선은 열두 차례에 걸쳐 조선통신사를
에토(지금의 도쿄)에 있던 幕府로 보냈다. 외교사절일 뿐 아니라 문화사절단이기도 했다. 조선통신사에 끼였던 기록관이 남긴 일본에 대한 관찰기를
지금 읽어보면 흥미롭다. 1719년 德川吉宗(도쿠가와요시무네)이 막부의 최고 실력자인 장군직에 오른 것을 축하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었던
조선통신사 일행에 製述官(제술관. 기록자)으로 동행했던 申維翰이 [海游錄]을 남겼다. 이 책을 읽으면 요사이 일본사회와 비교하게 되어 더욱 재미
있다.
申維翰은 일본사회가 무사들에 의해 잘 통제되어 보통사람들이 매사에 아주 절도 있고 성실하게 임하는 것을 극구
칭송한다. 그는, 조선 통신사가 탄 배를 마중나온 일본 배가 날렵하게 바다를 헤쳐가면서 인도하는 모습을 기록하면서 느려터진 조선 선원들과
비교하고 있다.
그는 일본사회가 兵農工商의 계급사회라고 보았다. 士農工商의 조선조 사회와 다른 점은 일본이 무사, 즉 兵에 의하여
지배되는 사회인 데 반해 조선조는 글을 아는 선비나 양반에 의해 통치된다는 점이다. 申씨는 특히 일본사회에서 유학자의 신분이 극히 낮은 데
유의하고 있다.
<兵(무사)은 안일하면서도 여유가 있고, 商은 부유하지만 세법이 무겁다. 工은 기술이 뛰어나지만 제품값이 너무
싸다. 농민들은 고생하지만 租稅 이외엔 다른 부역이 없다>
申維翰은, 비록 칼을 찬 무사가 지배하는 일본사회이지만
형식적인 계급차별은 조선조 정도는 아니라고 보았다. 하지만 명분이 정해지면 상하가 단결하여 일을 정연하게 처리하는 것에 감탄하고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太守(藩主. 大名)는 평범하고 다소 못나 보였지만 그 부하들은 태수의 명령을 받아 행하는 데 조금도 빈틈과 소홀함이
없었다. 부하를 불렀을 때 그에 응대하는 것이 메아리와 같고 일을 하는 데 전력을 다하며 보초 서고 차를 끓여오는 데 조금도 헛점이
없다>
申제술관은 보통 일본인이 보여준 질서정연함에 놀란다. 특히 조선통신사가 지나가는 거리로 몰려나와 구경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다.
<구경꾼들은 길 양쪽으로 갈라서 앉아 있는데 키가 작은 사람은 앞줄에, 큰 사람은 뒷줄에
앉는다. 차례대로 대열을 이루고 누구 하나 소란을 피우고 이탈하는 이가 없이 엄숙했다. 한 사람도 길을 넘는 자가 없었다>
申제술관은 서민들의 이런 질서가 兵이 군법으로 다스리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일본사람들이 총명하고 문자를 많이 알며 특히 출판이
왕성한 데 놀란다. 요사이 일본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일본인의 독서열에 감탄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대체로 총명하고 말을 잘
하는데 筆談을 해보면 奇言美談을 인용한 표현이 많다. 이 나라의 서적은 조선에서 가져온 것이 100이라면 중국의 남경으로부터 가져온 것이 천을
헤아린다. 고금의 異書나 百家의 문집이 출판된 양을 본다면 조선의 10배 이상이다.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니 書物을 먹는
紙魚처럼, 사람이 글자를 먹은 것처럼 보고 생각하는 안목이 밝다. 古事를 논하고 평하는 소견도 的確하기 짝이 없다>
申維翰은 "오사카에서 서적 출판이 왕성한 것은 일대 장관이다"고 평하면서 특히 [退溪集]을 읽고 공부하고 또 궁금해하는 일본사람들이 많다고
소개한다.
<그들이 묻는 항목을 보면 退溪集과 관련한 것이 가장 많다. "도산서원은 무슨 군에 속합니까" "선생의 후손은
몇명이며 무슨 직책을 맡고 있습니까" "선생은 생전에 무엇을 좋아했습니까"라고 묻는 것을 다 적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申維翰은
조선통신사 일행이 에토로 가는 旅路에서 목격했던 주점의 청결성도 기록하였다.
<주점의 여자종업원들은 반드시 화장을 하고 깨끗한
복장을 하며 그릇도 청결하다. 倭의 풍습은 그릇이 불결해도 먹지 않고, 주인을 보고 누추하다고 생각하면 먹지 않는다>
그는 또
일본인들이 상당히 개방적이고 남녀간에 서스럼이 없다고 썼다.
<여자들은 외국인한테도 손을 흔들고, 웃고 말하는 소리가 낭랑하며,
넓은 노상에서 남녀가 머리와 뺨을 만져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申維翰의 관찰에 대하여 일본의 국민작가로 일컬어지는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는 이렇게 평했다.
<막부 시대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국민의 비율은 70%나 되었다. 국민의 약10%는
士族, 즉 사무라이였는데 이들은 識者계급이었다. 農商工에 종사한 사람도 문자를 알았다. 維翰 선생이 보았다는 오사카가 그러했다. 이 도시의
私塾(사숙: 민간인이 운영하던 글방)에서 사용하던 초등교과서만도 1만 종류가 간행되었다. 그들은 聖賢의 道를 아는 데서는 모자람이 많았을지
모르지만 글자와 주판을 모르고서는 상점에서 일해도 간부가 될 수 없고, 상선을 타도 선장이 될 수 없었다>
막부 시대
무사들이 칼부림이나 하는 무식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일본을 잘못 보는 수도 없을 것이다. 무사가 다스리던 明治維新期의 일본 국민들은
양반이 다스리던 조선조의 백성들보다도 문맹률이 훨씬 낮았다. 지방 영주(大名. 다이묘) 등 무사들이 남긴 글과 그들의 취향을 보여주는
愛藏(애장) 예술품들이 일본의 지방 박물관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수준이 높아 이들이 全人的인 교양인이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무사계급의
사람들은 또 상공업에 대한 지식도 높았다. 당시 조선조에서도 실학파 유학자들은 실용적인 지식에 밝았지만 권력을 잡지는 못했었다.
시바료타로는 또 이렇게 申維翰을 비판한다.
<무사가 지배하던 막부 봉건사회에서는 동시대의 유럽보다도 정밀하고 왕성한
상품경제가 발달했다. 이는 前期(전기)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는 270개 정도의 藩(번. 일종의 지방 領地)이 있어 산업과
학문을 경쟁적으로 발전시켰다. 藩(번)에는 儒官(유관)이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의 주자학자들과 같은 이데올로그가 아니었다. 이들은 사물을 볼 때
宋學的 관념론을 따르지 않았다. 일종의 인문과학적 思考法으로써 있는 그대로 관찰하려고 했다. 이는 상품경제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상업은 인간에게 意外의 지혜를 주기 때문이다. 사물을 바라볼 때 質과 量, 그리고 유통의 측면에서 보는 습성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이런 습성이
돌고 돌아 학자나 사상가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시바료타로가 말한 商業의 중요성은 핵심적인 의미를 띤다. 조선조 사회의
신분질서는 다 아는대로 士農工商이었다. 글을 아는 선비가 돈을 아는 상인을 경멸하면서 끌어간 사회였다. 이런 나라에선 國富가 쌓이지 않는다.
국부가 약하면 强兵도 예술도 불가능하다.
朴正熙 대통령은 1960년대 근대화를 주도하면서 주변 참모들에게 "우리는
商工農士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자주 말했다. 대부분의 관료들은 工商農士가 맞지 않느냐고 반론했지만 朴대통령은 商을 우선시켰다. 물건을
사고팔아 이문을 남긴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主題일 뿐 아니라 인간사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장사하는 사람은 관념론이나 위선적 도덕주의의 포로가
되지 않는다. 사물을 계산적으로 본다는 것은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위선적이고 경직된 도덕론에서 해방되면 인간이 유연해진다.
상업은 그 핵심이 이동이다. 물건과 돈뿐 아니라 인간도 이동해야 한다. 이동은 모험이고 교류이며 여행이고 배움이다. 상인들이 종합적 인간능력에서
가장 뛰어나게 되는 이유도 이동에서 배우기 때문이다.
商人的인 민족이나 국가는 대체로 일류국가를 만들었다. 유럽에서 보면
10~11세기의 바이킹, 베니스, 15~17세기의 포르투갈과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미국이 상인적 기질의 나라였다. 동양에선 징기스칸 제국과
일본과 통일신라가 상업적이었다. 이들 나라는 國益의 핵심을 돈벌이와 무역에 두었다. 이 國益을 지키기 위해서는 强兵이 필요하다. 즉,
富國强兵이란 불멸의 국가목표가 등장하는 것이다.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운영하여 國富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내정치와 외교를
잘해야 한다. 상업적인 민족과 국가는 대체로 정치와 외교에 능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상업적이었던 나라 신라가 외교와 정치에서 특히 우수했다.
정치의 핵심은 권력승계의 제도화에 의한 국내안정이고 외교의 핵심은 동맹국 관리이다. 상인적 국가는 외교 군사(특히 해군) 무역에 능하다. 이들
나라는 대체로 商武국가이다(베니스가 전형적인 사례이다).
바이킹을 예로 들면 이들은 척박한 스칸디나비아에 살면서 장사에
종사하다가 여차하면 戰士로 돌변하여 약탈자 정복자가 되었다. 바이킹이 점령했던 시실리, 영국, 노르만디, 키에프 등은 상업적으로, 문화적으로
번성했다. 바이킹은 정복지를 다스리는 재주가 비상했다. 바이킹의 후예국가들은 전부 일류국가이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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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통계도 있다. 일본의 일간신문 구독수는
총5300만부로서 인구가 두 배인 미국의 5520만부와 거의 같다. 요미우리 신문은 발행부수가 1010만부이다. 미국의 USA TODAY는
230만부이다. USA TODAY 발행인인 알 뉴하스는 일본신문이 뉴스를 공정하게 보도하고 교양있는 표현을 쓰며 독자들을 예우하는 면에서
미국신문보다 낫고 이것이 일본신문의 성공비결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신문이 일본신문의 공정하고 겸손한 자세를 배우라고 충고했다. 申제술관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이미 에토시대에도 출판과 독서를 많이 했다는 것이다. 이런 독서의 전통 위에 일본의 신문이 서 있다. 일본신문들은 1면
광고는 반드시 책광고로 메운다.
그리스 로마 기독교 문화계통의 서구 열강을 빼고 後發 근대화 국가중에서 선진국에
진입한 非서구 나라는 지난 200년간 일본 하나뿐이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교양과 생산력의 축적이 장기간에 걸쳐 이뤄져 있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로마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는 말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류국민이 일류국가를 만든다. 일류국민이란
애국심, 교양, 전문성을 두루 갖춘 생산성과 창조성과 규율이 강한 사람들이다. 요사이 한국의 집권층이 하는 정책은 국민들의 교양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국가 선진화에 대한 비전도 정열도 없기 때문이다.
申제술관의 기록을 정리하면 18세기 초
일본인과 일본인사회는 이러하다.
1. 사람들이 책을 많이 내고 많이 읽는다.
2. 외국문물을 배우고 외국인에게
묻는다.
3. 군사문화의 지배로 해서 사람들의 행동이 절도가 있으며 능률적이다.
4. 깨끗하고 서비스 정신에 투철하다.
5. 남녀간 차별이 심하지 않다.
이상의 일본인 특징은 요사이 일본을 여행하는 한국인의 눈에 비치는일본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인과 일본사회가 선진적인 면이 있었고 이런 바탕에서 명치유신이 가능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민족성이란
것이 하루아침에 생기고 바뀌는 것이 아님을 알 ㅎ수 있게 한다. 요사이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약300년에 걸친 평화가 오늘의 번영을
만든 기초가 되었다고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이런 통계도 있다. 일본의 일간신문 구독수는 총5300만부로서
인구가 두 배인 미국의 5520만부와 거의 같다. 요미우리 신문은 발행부수가 1010만부이다. 미국의 USA TODAY는 230만부이다. USA
TODAY 발행인인 알 뉴하스는 일본신문이 뉴스를 공정하게 보도하고 교양있는 표현을 쓰며 독자들을 예우하는 면에서 미국신문보다 낫고 이것이
일본신문의 성공비결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신문이 일본신문의 공정하고 겸손한 자세를 배우라고 충고했다. 申제술관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이미 에토시대에도 출판과 독서를 많이 했다는 것이다. 이런 독서의 전통 위에 일본의 신문이 서 있다. 일본신문들은 1면 광고는 반드시 책광고로
메운다.
그리스 로마 기독교 문화계통의 서구 열강을 빼고 後發 근대화 국가중에서 선진국에 진입한 非서구 나라는
지난 200년간 일본 하나뿐이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교양과 생산력의 축적이 장기간에 걸쳐 이뤄져 있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로마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는 말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류국민이 일류국가를 만든다. 일류국민이란 애국심, 교양, 전문성을
두루 갖춘 생산성과 창조성과 규율이 강한 사람들이다. 요사이 한국의 집권층이 하는 정책은 국민들의 교양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국가
선진화에 대한 비전도 정열도 없기 때문이다.
일본쪽에서 바라본 東海 사태
-일본이 이 틈(韓美동맹의 약화)을 타고
對韓 압박을 강화해도 미국은 구경만 하거나 내심 日本편을 들려 할지 모른다.
우리의 영토인 獨島 근해에 대한
日本의 해양 조사선 파견 문제로 韓日 양국 관계가 어려워지고 있는 가운데 日本 서해안의 이시카와(石川) 지방을 여행하고 있다. 오늘(20일)자
일본 조간신문들은 해양조사 문제를 크게 다루었는데 특히 좌파여론을 대변하는 아사히(朝日) 신문이 균형있는 취재를 했다. 아사히 신문은 일본정부
內에서도 조사선 파견에 대해서 찬반 양론이 있다면서 특히 시마네(島根)현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시마네현은 경상북도와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작년에 이 縣 의회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교류가 단절되었다가 최근에 겨우 회복되는 기미를 보이고 있는데, 이번 사태로 다시
악화될까봐 주민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獨島·교과서·역사 문제에 있어서는 일본의 좌파가 비교적 親韓的 자세를
보이고, 북한인권 문제·납북자 문제·北核 문제에서는 우파가 親韓的이다. 인구 약 1억3000만명, GDP 세계 2위의 일본을 우습게 보는 세계
유일의 나라가 한국이라는 우스개도 있지만, 日本의 여론이나 일본인의 양식을 일본 정부의 정책과 동일시하는 것도 일본을 誤判하는 일이다.
韓日 문제는 민주화된 국가끼리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해결이나 타협이 가능하다. 韓中,南北관계는 민주화된 한국과 독재적인
국가(中) 또는 집단(北)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實用的이거나 합리적인 해결이 어렵다(黃砂나 납북자 문제처럼).
작년에
韓日관계가 정부 차원에서는 악화되었으나 민간교류 면에서는 여전히 활발했다. 올해 兩國 사이의 여행객은 500만명을 넘을 것이다.
日本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우파 정권이 계속(또는 영속)되는 나라이다. 天皇이란 우파의 中心이 있기 때문에 일본의 좌파도
한국처럼 反체제나 反국가적으로 흐르지 못한다.
新羅의 삼국통일로 한반도에 대한 야심을 접어야 했던 日本은 그 뒤 한반도에
敵對세력이 들어서는 것은 安保위협이 된다는 생각에 집착하게 되었다. 우파적이거나 民主的인 한국이 존재하는 한 일본이 獨島문제를 물리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겠지만, 남한이 赤化된다면 일본은 獨島를 점령해 버릴 것이다.
韓美日 삼각 동맹체제 안에서는 韓日 관계가
악화될 때 미국이 중재하든지 한국편을 드는 경우가 많았다. 1980년대 초 全斗煥 정권이 일본에 40억 달러의 '安保 차관'을 요구했을 때에도
레이건 정부는 우리 편을 들었다.
지금 親北反美 세력에 얹힌 노무현 정권은 韓美 동맹을 '심리적 와해 단계'로 몰고 있다.
일본이 이 틈을 타고 對韓 압박을 강화해도 미국은 구경만 하거나 내심 日本편을 들려 할지 모른다. 노무현 정권은 중국과 북한에 대해서는
유화적이고 때로는 굴욕적이다. 盧정권의 反美·反日 정책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親中·親北쪽으로 기울도록 만든다면 이는 국가적 자살 상태로 가는
길이 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나라(日)를 적으로 돌리고 세계에서 가장 못살며 잔혹한 집단(北)과 세계에서 가장
큰 一黨 독재국가와 친구가 되겠다는 자살충동을 억제해줄 세력이 한국에 과연 있는가? 日本이 태평양전쟁이라는 자살 코스를 걷게 된 것도 한때의
우방이던 영국과 미국을 적으로 돌리고 파쇼 국가인 독일과 이태리와 손잡았기 때문이다. 친구를 잘못 만나면 패가망신한다.
백제계
일본인의 신라 증오(3)
일본고대사의 正史로 분류되지만 왜곡과 조작이 심한 日本書紀(720년 발간)를 읽어보면
반 이상이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와 관련된 기사이다. 이 책의 집필진은 가야 백제를 자신들의 편으로, 신라를 主敵으로 간주하는 서술방법을
택하고 있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뒤에는 이런 적대감이 한민족에 대한 적대감으로 바뀌어 오늘날 韓日민족감정의 한 축이 형성되는 것이다. 일본
고대사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왜 일본 정권이 신라를 그토록 미워하게 되었는가이다. 이 비밀을 탐구하면 고대사의 진실이 드러난다.
日本書紀의 欽明천황 15년12월 기사는 백제 聖王이 신라와 싸우다가 전사하는 장면을 자세히 다룬다. 이런 대목이 있다.
<신라의 장군들이 백제가 지쳐버린 것을 알고 드디어 전멸작전을 하려고 하였다. 그때 한 장군이, "불가하다. 일본의 천황이
任那의 일로 자주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또 다시, 백제 관가의 멸망을 계획하면, 반드시 후환을 부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중지하였다>
이 내용은 물론 신라뿐 아니라 백제 가야(任那)를 일본의 속국 수준으로 격하시키기 위한 조작이다.
日本書紀는 신라, 백제, 가야, 고구려가 모두 일본에 조공을 바치는 관계로 설정했다. 일본이 동아시아의 小中華인 것처럼 왜곡했다.
欽明천황 23년7월 기사는 이렇게 말한다.
<신라는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그 사신은 신라가 任那를 멸하였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이는 천황의 은혜를 배반하였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돌아가지 않겠다고 청하였다. 그래서 본토에 돌아가지 않았다. 나라의 백성과
같은 처우를 받았다>
日本書紀는 일본이 가야와 백제를 연합하여 신라를 치게 하려고 했다는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이는
사실과 가까울 것이다. 일본서기 편집진과 이 편집진을 지휘한 당시 일본정권은 인맥으로서든지 정책으로서든지 가야 백제와 가까운 이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는 신라가 2중의 원수였다. 자신들과 연고가 있는 가야와 백제를 다 멸망시킨 것이 신라였기 때문이다.
日本書紀 欽明천황 23년7월 기사에는 任那를 도와 신라를 치려고 파견되었다가 신라군에게 포로가 된 調吉士(귀화 백제인氏族) 사람에 대한 내용이
있다.
<신라 장군이 칼을 빼어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억지로 바지를 벗겨 궁둥이를 내놓고 일본을 향하게 하고 큰 소리로 "일본
대장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말하게 하였다. 그는 그런데 큰 소리로 "신라왕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했다. 그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전과 같이
부르짖었다. 이 때문에 죽었다. 그 아들도 아비의 시신을 안고 죽었다. 그의 처 大葉子 또한 잡힌 몸이 되었다. 슬퍼하여 노래를 불렀다.
"한국의 城上에 서서 大葉子가 領巾을 흔드는 것이 보인다. 難波(나니와)를 향해서">
일본인으로 귀화한 백제인이 일본을
위해 싸우다가 신라군에게 잡혀 고문을 받으면서도 생명을 던져 일본에 충성을 바치고 신라군의 포로가 된 그의 아내는 천황이 있는 難波를 향해서
충성의 깃발을 흔든다. 이런 글을 쓴 사람들이 조국을 신라에게 빼앗겨 돌아갈 고향이 없어진 백제系 일본인이었다면 이해가 간다. 신라와 한민족
전체에 대해 원한을 가진 한반도 도래인들이 오랫동안 일본의 정치를 주도해가면서 일본인의 對韓 적대감으로 고착된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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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분단과 일본의 책임
1945년7월26일 독일 포츠담에 모인 미국 중국 영국 소련 수뇌부는 對日항복촉구 선언을 발표했다. 일본 지도부는 이 선언에 대해서 강경론과
유화론으로 갈라져 適期에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미국은 8월6일 히로시마에, 9일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소련은 8월8일
참전, 만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천황의 결단으로 항복을 결정했고 8월15일 항복방송이 있었다.
만약 이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전쟁이 오래 지속되어 소련군은 한반도 전체를 점령했을 것이고 그 뒤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미군의 일본상륙전은 미군측에만 100만 명의 전사자를 냈을 것이고 일본측은 그 몇배의 전사자를 냈을 것이다. 소련도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아키다-센다이線까지 점령하여 일본 열도의 분단이 이뤄졌을 것이다.
만약 일본이 원폭 투하 이전에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여 항복했다면?
소련의 참전 명분이 없어져 한국은 미군점령期를 거쳐 통일되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일본이 져야 할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있다. 전쟁은 시작하기보다 끝내기가 더 어렵다. 일본은 전쟁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다가 원폭도 맞고 한반도 분단도
허용하고 말았다.
일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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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1. 일본인과 한국인은 인종적으로 가장 가깝다.
2. 일본인과 한국인은 경쟁하면서 공존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운명이다.
3. 일본인과 일본정부를 동일시하여 적대시하면 안된다.
4. 오늘의 일본은 일제 시대의
군국주의 일본과는 다르다. 민주화된 일본이므로 군국주의화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
5. 韓日문제를 동북아, 그리고 태평양 전체의 구도
속에 놓고 생각해야 한다.
6. 일본의 우파는 과거사에 대한 인식에선 문제가 많지만 북한정권을 제거하고 북한주민들을 구출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다. 일본의 좌파는 과거사에 대해서는 한국 편이지만 남북관계 속에서는 북한정권 편이다.
7. 한일 兩國民 모두
정부의 주장을 비판 없이 추종하지 말고 주체적으로 잘 잘못을 검증하여야 한다.
8. 양국간의 물적, 인적 교류가 확대됨으로써 정부간
갈등을 완충시키고 있다.
9. 통일된 한반도의 강력한 국가가 등장해야 韓日관계가 건강해진다. 허약하고 분열된 한반도는 주변 강대국의
개입을 불러들인다. 강력한 한국은 일본을 당당하게 대하고 일본의 존중을 받는다.
일본의 재발견
尙美會는 9박10일의 유럽여행 중심으로 진행하다가 2년 전부터는 4박5일의 일본 여행도 곁들이고 있다. 나는 1945년10월에 일본
사이타마縣에서 났다. 生後 여섯 달도 되지 않아 부모님의 품에 안겨 귀국한 관계로 기억은 없으나 그 뒤 취재건으로 일본을 많이 다닌 축에 든다.
象美會 여행이 일본의 지방을 主대상으로 하므로 도시중심으로 일본을 보아왔던 나로서는 참으로 좋은 공부가 되었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을 자주 찾아갔던 눈으로써 일본을 보면 시시하게 느껴질 것이라고 速斷할지 모르나 나는 일본이 오히려 더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의 국토와 國力, 역사와 문화, 그 깊이와 다양성이 새롭게 다가왔다. 일본인들이 이 나라를 天下라고 보고 각 지방의
藩(번)을 國이라고 호칭했다는 것이 건방지게 보였으나 지방 여행을 한 뒤엔 그렇게도 할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은 면적이 37만7435 평방킬로미터이다. 프랑스의 55만1000평방킬로미터나 스페인의 50만5000평방킬로미터보다 작은데 다녀보면 더 크게
느껴진다. 일본 국토의 약80%가 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은 한국의 山비율(70%)를 능가하는 산악국가이다. 일본의 산은 가파르고 계곡은
깊고 물이 많다. 강우량도 한국보다 300밀리 이상 많은 연평균 1600밀리 정도이다. 일본의 국토는 한국이 노년기라면 청년처럼 느껴진다. 그런
토질에서 자란 나무도 크다.
일본의 국토는 혹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엄청 길다. 거의 칠레 정도이다. 동시에 여름과 겨울이
진행중이고 萬年雪이 있는 산들도 많다.
일본의 國力은 도시가 아니라 시골에서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인구 2000명의
작은 마을에 있는 음식점이 도쿄 수준이고 인구 5만의 소도시 호텔 서비스가 오쿠라 호텔 수준이다. 尙美會 여행은 溫泉鄕을 찾는 경우가 많고
자연히 여관을 자주 이용한다. 나는 천성적으로 대중목욕을 싫어했는데 일본 여행을 자주 하면서 온천의 사회적 역할을 좋게 보게 되었다.
일본인에게는 온천이 사교와 낭만과 창작의 장소이다. 일본인의 일상적 생활 한복판에 온천이 있다. 좋은 온천의 좋은 여관은 그 건축미가
가히 예술적이다. 바다, 호수, 산을 낀 온천향의 정갈하고 單雅(단아)한 여관은 일본인의 美的 감각을 축약한 것이다.
작은
것에 정성을 다함으로써 사소한 것이 위대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일본인의 모습은 도시보다는 지방에서 살아 있다. 일본의 지방은 도쿠가와 시대의 藩을
기준으로 발달하였기 때문에 개성이 뚜렷하고 기리는 인물들도 지방적이다. 센다이는 다데 마사무네, 요네자와는 우에스키 료잔, 가고시마는
시마즈式으로 그 지방을 발전시켰던 領主(大名)들을 모신 박물관과 기념관이 곳곳에 있다. 일본은 참으로 영웅이 많은 곳임을 알게 된다. 더구나
일본인들은 역사의 敗者에 대해서도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특징이 있다(뱀장어 추모비를 만들어 제사를 지내줄 정도이니까).
일본의 지방을 돌면 일본인의 主流가 한반도를 거쳐서 온 몽골인종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우리 조상은 백제사람" "우리 조상은 신라
渡來人"이라고 당당하게 실토하는 사람들도 많다. 일본의 西海岸, 즉 야마구치 시마네 돗도리縣엔 신라계통, 큐슈에는 가야계통, 나라 교토 근방에는
백제계통 사람들이 주로 건너가 정착했다는 사실도 비슷한 地理感으로 알게 된다. 신라도래인이 정착했던 곳은 경상도 같고, 백제 도래인들이 몰려
살았던 곳의 地理는 부여를 닮았다.
일본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은 '안심이 되고 편안하다'일 것이다. 속을 일도 없고,
치안은 잘 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정확하고 친절하다. 이것이 바로 선진국이구나 하는 실감이 유럽여행 때보다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람들은
우리와 같지만 하는 행동은 일류이기 때문일 것이다.
本家 한국과 分家 일본
조갑제
앵커우먼 출신의 일본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씨는 '세상은 의외로 과학적이다'는 책에서 이런 요지의 글을
썼다.
<혈연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민족은 일본인, 한국인, 몽골인이다. 한국인과 몽골인이 本家이고 일본인은
分家인 셈이다. 일본인은 本家에 감사해야 한다. 동시에 일본인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 땅에까지 와서 좋은 나라를 만든 조상들의 진취성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本家인 한국인들도 分家의 이런 업적을 평가해주었으면 한다>
지난 200년 사이 후발
非서양국가로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유일한 나라는 일본이다. 한국 대만 이스라엘 세 나라가 지금 선진국이 되려고 경쟁중이다. 일본이 선진국이
되는 과정에서 피해를 당했던 한국이 그 상처를 극복하고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는 것이 일본에 대한 가장 통쾌한 복수일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실력이 대등해질 때 진정한 친선관계가 이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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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신라에서 배울 때
'일본의 역사'(岩波新書. 이노우에 기요시 著)를 읽다가 재미 있는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서기
645년 일본 천황가에 쿠데타가 발생합니다. 지휘자 中大兄(나카노오오에)皇子는 皇極천황을 폐위시키고 孝德천황을 등극시킨 뒤 자신은 황태자가
됩니다. 그가 뒤에 天智천황입니다.
나카노오오에는 大化의 改新이라 불리는 일대 개혁을 단행합니다. 황족 및 지방의 귀족과
호족들이 갖고 있던 토지 및 백성들의 소유권을 천황의 公地 公民으로 만들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이들 땅과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한 중앙집권적
행정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전국에 통용되는 획일적인 세금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나카노오오에는 大化라는 年號를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쓰게 하였습니다.
연호를 정하는 것을 建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연호를 사용하는 백성들이 황제나 왕에 대해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연호를 이때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천황의 지배력이 일본 全土에 처음으로 미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출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大化 改新의 주도세력은 親百濟 정책을 썼습니다. 서기 660년에 백제가 唐과 신라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자 당시의
천황(齊明)은 직접 사령관이 되어 백제 복구파를 돕기 위한 구원군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천황은 중도에 사망하는데 실권자 나카노오오에는
바톤을 이어받아 약3만 명의 병정과 수백척의 군함으로 구성된 대함대를 금강 하류의 서해연안으로 보냅니다. 일본 역사에서 白村江의 해전으로 유명한
이 싸움에서 신라-당 연합군은 일본군을 전멸시켰습니다. 서기 663년의 일입니다. 일본 패잔병은 백제 유민들을 다수 싣고서 돌아왔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하여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개입을 완전히 포기합니다.
나카노오오에는 국내 문제에 전념하기로 하고 수도를
大津으로 옮긴 뒤 천황(天智)에 올랐습니다. 그는 백제로부터 건너온 지식인, 관료, 귀족들을 우대하여 그들로부터 선진 문화 및 행정술을 배웠고
이를 국내 개혁에 활용했습니다. 개혁자 나카노오오에, 즉 天智천황은 서기 671년에 죽고 弘文천황이 등극합니다. 이 등극에 불만을 품은
나카노오오에의 동생 오오아마(大海人)皇子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오오아마측에는 신라에서 건너온 渡來人들이 붙었고 천황측에는
백제 도래인들이 섰습니다. 한반도 통일전쟁의 축도판적인 싸움이 벌어진 것인데 신라 도래인들이 밀던 오오아마측이 이겨 홍문천황을 자살케 한 뒤
오오아마를 天武천황으로 추대했습니다. 親新羅 정권이 선 것입니다. 이 반란을 壬申의 亂이라 부릅니다.
天武천황은 14년간
집권하면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는 2 - 3년에 한번씩 대규모 사절단을 신라에 보내 신라의 발달된 제도와 문화를 배워왔습니다.
신라도 거의 매년 사절단을 일본에 보냈습니다.
일본 역사학계의 거두인 이노우에 기요시(井上 淸) 박사는 天武천황이 신라로부터 통일
국가 만들기에 대한 노하우를 열심히 배워 율령을 정비하고 고대 일본 국가를 완성했다고 했습니다. 天武천황의 통치 시기에 신라는 唐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670-676년 사이 신라는 唐을 상대로 일대 결전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唐이 평양에 두었던 안동도호부라는 일종의 총독부를 요동으로
철수시키게 했습니다.
그 뒤에도 신라와 당은 국교가 끊어진 상태로 냉냉했습니다. 天武천황 정권은 신라의 눈치를 보면서 한때
唐과의 通交를 중단했다가 신라-당의 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끝난 지 27년이 흘러서야 재개했습니다.
신라통일이 일본에서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를 완성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본 고대 국가가 그 체제를 정비하는 데 먼저 민족통일국가를 만든 신라의 지도를 받았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우리나라를 통해서 일본에 한자 등 여러 문물이 전해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국가 만들기의 노하우가 통째로 건너갔다는 것은
잘 모릅니다.
백촌강의 해전에서 신라군에 의하여 결정적 타격을 입은 일본은 그 뒤 한동안 신라에 눌려지내면서 많은 것을
배워간 셈입니다.
이 史實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 동아시아(당, 신라, 일본)의 공동 번영을 보장했다는 것을 잘 증명합니다.
한반도가 안정되면 주변국가들도 평화를 구가할 수 있고, 한반도가 지금처럼, 또는 삼국시대처럼 분렬되면 주변 국가들도 전쟁에 휘말려
들거나(삼국시대에 한반도엔 중국군대와 일본군대가 들어와 싸웠다. 임진왜란, 러일전쟁, 6.25전쟁의 경우도 그렇다) 불안정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김유신, 김춘추(태종무열왕), 문무왕 등 통일 3걸이 주도한 신라통일은 동아시아에 평화와 번영을 선물한 우리
민족사의 위대한 업적임이 이렇듯 분명한데도 엉터리 학자들과 못배운 자들의 위선과 환상, 그리고 신라통일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정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파괴하려는 좌익들의 선동에 의하여 폄하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개탄할 만한 일입니다.
한국과 일본이
사이가 좋으려면 한국의 실력이 일본과 대등하거나 우월할 때여야 할 것입니다. 7세기말의 통일신라처럼 말입니다.
CEO 비교: 늙은 일본, 젊은 한국
한국과 일본의 기업경쟁력을 이렇게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장 이하의 직원은 일본이 한국에 월등하다. 부장 이상 경영진과 중견간부진은 그러나 한국측이
우세하다>
한국의 기업간부들은 책임감이 강하고, 公私 구분없이 하루 24시간씩 회사 일에 몰두하며, 결단이 빠르고
투지가 세며 젊다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反기업정서가 가장 강한 곳이란 통계가 있다(액센추어社). 한국 기업 간부들의 경우 이런 反기업정서를
뚫고 경영-간부층에 올랐다는 것만으로서도 투지는 보증받은 셈이다.
일본의 주요기업 CEO(최고경영자) 평균 취임 연령은
58.4세이다. 평균 재임기간은 7.5년이다. 즉 일본 주요 CEO는 60대로서 활동한다는 뜻이다. 北美에서는 CEO 취임 평균연령이
49.1세, 평균재임 기간이 8.4년이다. 즉 미국의 주요 CEO는 일본보다 10년이 젊은 50대라는 이야기이다. 유럽의 경우는 평균 취임연령이
50세, 평균 재임기간이 6.6년이다.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평균은 평균 취임연령이 47.4세, 평균 재임기간이 7.3년이다.
결국
年功사열이 강한 일본의 사장들이 가장 나이가 많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三星의 경영층이 대기업중 가장 젊은 축에 든다. 이것도 三星의 경쟁력
요인중 하나일 것이다. 사회가 무섭게 정보화되어가고 있는 가운데 조직 사령탑의 기민한 적응력이 승패를 가를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을 우습게 보는 세계 유일國
기자는 月刊朝鮮이 매년 두 차례 진행하는 역사문화기행의
안내자로서 유럽을 자주 여행했다. 프랑스,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체코,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그 등지를 여행한 뒤 최근에는 일본의
지방을 자주 다닌다. 유럽을 많이 본 뒤 일본을 보면 일본이 작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거꾸로였다. 일본이 새삼 크게 보여지는 것이었다.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를 통해 보던 일본과 시골이나 지방도시를 통해 보는 일본은 많이 다르다. 일본의 저력은 시골이나 소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시고쿠(四國)의 작은 도시 이마바리(今治)는 인구 10만 명 남짓한 항구이다. 이곳의 호텔은 그 서비스나
음식이 도쿄의 일류 호텔에 못지 않다. 이 도시의 서점도 도쿄의 중심가 수준이다.
큐슈 미야자키縣의 작은 마을 南鄕村은 인구가
2000명이다. 이 마을이 한국 여성을 국제교류원으로 채용하여 이 마을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百濟 왕족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큐슈의 산골에 난 국도를 달려보면 차량과 인간의 통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길 양쪽에는
널찍하게 인도를 확보해놓았다.
시골의 음식점이 도쿄 긴자(銀座)의 음식점에 못지 않다는 것, 그래서 하체가 든든한 나라가
일본이다.
이런 일본이 明治維新(1868년)을 통해 갑자기 생겼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일본의 생산력은 그 역사가
오래이다. 16세기 초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서 조총을 수입, 국산화한 일본은 토요토미 시대에 들어가면 총생산 조총수가 유럽 전역의 조총수보다
많았다고 한다. 일본의 제도가 단기간에 외국의 선진문물을 수용, 발전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은 15만 명의 병력을
부산항에 상륙시켰다. 이는 당시까지 세계 역사상 최대규모의 상륙전이었다. 그 전의 기록은 13세기 말 元-고려 연합 14만 병력의 원정함대가
큐슈의 하카다에 상륙한 것이었다. 단기간에 15만 병력을 수송할 수 있는 함선을 만들었다는 것, 그 연장선상에서 일본의 해군 건설이 있다.
일본은 1920년대에 이미 미국 영국과 함께 세계 3대 해군국이 되었다. 1940년대엔 세계최대의 전함인 야마토와 무사시를
만들었고 세계최고의 전투기를 생산하였다.
일본의 근대화 혁명인 명치유신이 1868년이니, 근대화는 유럽보다 수백년이 늦었다. 그럼에도
그 뒤 100년만에 일본은 패전을 딛고 유럽의 쟁쟁한 선배국가들을 젖히고 세계 제2위의 경제력을 건설했다. 이 경제력은 국가의지만 있다면
단기간에 제2의 군사력으로 전환된다. 일본의 발전은 인류사의 한 기적이다. 일본 때문에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 사람들의 잠재력이 서구 사회에서
높게 평가되었고 한국사람들도 서양인들로부터 없신여김을 당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일본을 우습게 보는 세계 유일의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일본은
지난 10년간 경제의 장기침체를 경험했다. 일본의 시대는 이미 갔다라는 희망적 관측이 유행했지만 그 불황의 끝에서도 일본은 不動의 세계2위이다.
2002년 통계를 보면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약4조 달러이다. 세계경제3위인 독일은 약2조 달러, 4위인 영국은
약1조5천억 달러, 5위인 프랑스는 약1조4천억 달러였다. 즉, 유럽의 3대 경제국인 독일 영국 프랑스를 전부 합친 국내총생산이 일본것과 같다.
한국은 이해 5천2백 달러의 국내총생산을 기록하여 일본의 약8분의 1이었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잘 팔린다.
많은 한국인은 일본인의 친절함을 허약함으로 오해한다. 일본인의 정교함과 꼼꼼함과 섬세함을 포용력의 부족이니 축소지향으로 오해한다.
일본인의 정직, 친절, 섬세, 꼼꼼함이 조직되면 엄청난 스케일로 나타나고 무서운 생산력을 보인다는 것을 간과하는 한국인들은 오늘도 내일도 일본을
우습게 볼 것이다.
일본 해군이 내일 독도를 점령하고 주변해역을 봉쇄한다고 치자. 우리 해군 해병대 공군이 총동원되어도 독도 탈환은
불가능하다. 일본 자위대는 제해권과 제공권을 완벽하게 장악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독도 문제를 일부러 크게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본 자위대와 상대할 만한 戰力을 갖추기 전에는.
일본의 놀라운 생산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1. 일본 국민들의
평균 수준이 매우 높다. 교육수준, 도덕수준, 전문지식의 수준, 평균 수명(즉 건강)이 세계최고 수준이다.
2. 일본 지도층의 수준이
높다. 이들은 명분론보다는 실용적이다.
3. 일본의 인구가 많고 국토가 넓다. 일본의 국토중 산은 약80%로서 한국보다도 산이 많다.
산림이 울창하고 地力이 좋으며, 강우량이 풍부하다. 면적은 38만 평방킬로미터이지만 다리미질을 하여 산지를 펴놓으면 100만 평방킬로미터, 즉
프랑스의 두 배 정도가 된다. 그만큼 일본의 국토는 넓고 입체적이며 생산성이 높다.
4. 武士지배를 오래 받아 사람들이 잘 훈련되어
있고 행동에 절도가 있어 매우 효율적이다. 기업이든 군대이든 조직에 잘 순응하고 조직을 개인보다 중시한다.
5. 사회제도와 역사적
전통이 매우 실용적이고 생산적이기 때문에 외국에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면 단기간에 이를 자기 것으로 소화해낸 다음 한 차원 더 발전시켜 생산하기
시작한다.
신라의 삼국 통일로써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정리되어 안정되기 전까지 일본열도는 아시아의 신대륙이었다. 신라,
백제, 고구려, 가야,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으로 인구가 유입되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구성이 일본의 문화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인류역사상 최장기의 정치안정이 생산성을 축적, 온존, 발전시켰다. 미국이 유럽의 문화와 인종들을 다 받아들여 융합시킨 힘으로 굴러가는 것과
비슷한 체질의 나라가 일본인 것이다.
예컨대 이퇴계의 주자학은 한국에서는 선비들의 관념철학으로 끝나고 민중들의 생활을
순화한 생활철학으로는 발전하지 못했지만, 이퇴계의 철학을 뒤늦게 받아들인 일본은 이를 국민교육의 바탕정신으로 활용하였다. 선진문물의 原産地보다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소화력과 생산력을 일본은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도 일본에서 배울 것이 많은 나라가 한국이다.
일본 교수 부부의 친절
지난 5월22일 나는 일행 19명과 함께 일본 가고시마에 있었다. 현직
일본인 교수 부부가 종일 우리를 안내해주었다. 오후 늦게 그는 우리 일행을 가고시마 시내에 데려다 주었다. 우리는 전세 버스에서 내리면서 두
시간 뒤에 버스가 그곳으로 오게 한 뒤 시내 구경에 나섰다. 일본인 교수 부부와는 작별 인사를 했다.
오후 6시 우리는
내렸던 장소로 돌아와 버스를 기다렸다. 그때 두 시간 전에 헤어졌던 교수 부부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부부는 우리 일행이
시내에서 길을 잃지 않고 빠짐없이 재집합 장소에 모였는가를 확인한 다음에 귀가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교수 부부는 일부러 두 시간 동안 시내에
머물러 있다가 점검차 다시 들른 것이었다. 부부는 다시 헤어지면서 과자가 든 봉투를 선물로 주었다. 차중에서 이 과자를 나눴더니 1인당 하나씩
정확하게 스무 개였다.
생전 처음 만난 사이이고 다시 볼 일도 없는 외국인에 대한 이런 친절과 배려가 습관화된 것이 일본사람들이다.
알수록 무서워지는 사람들이다.
감탄! 일본의 목욕 문화
이번 일본 東北 지방 여행에서
새삼 일본인의 목욕문화와 한국을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온천탕에 들어가면 우선 시설이 간단한 데 놀랍니다. 샤워기가 앉은 키와 같은 높이에
붙어 있어 서서 할 수 없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몸에 먼저 비누칠을 한 다음 옆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물을 튀기지 않도록 조심조심 샤워기 물을
머리에 뿌립니다.
욕탕실로 들어올 때는 호텔방에서 가져온 얇은 수건 하나만 휴대할 수 있습니다. 이 수건이 특이합니다.
때를 미는 데도 쓰고 몸을 닦는 데도 씁니다. 아주 얇은 데도 흡수성이 좋고 빨리 마릅니다. 저는 이것 하나로써 다 처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공중 목욕탕에 들어가보면 한 사람이 평균 3장 이상의 수건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목욕탕에서는 물을
옆자리로 튀기는 사람도 많습니다. 일본인식으로 목욕을 하니 물도 줄여쓰고 조용하며, 또 수건도 덜 쓰니 얼마나 좋습니까. 문제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훈련받은 일본인과 목욕문화에 대해서 아무런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한국인의 차이입니다. 저는, 돌아올 때 하나에 200엔 하는 일본
목욕탕 수건을 몇장 선물로 사와서 나눠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조용히 목욕을 즐길 것인가,우리나라의 타월 만드는
분들도 좋은 수건을 만들어 건전한 목욕문화 만들기에 동참합시다.
일본 雪國 紀行
4박5일간 일본
東北 지방을 여행하고 왔습니다. 東北 지방이란 아키다(秋田), 이와데(岩手), 아오모리(靑森) 3개縣을 말하는데 일본 혼슈의 북단입니다. 바다를
건너면 북쪽에 北海島가 있습니다.
일본의 동북지방에는 10세기 전까지 에미시라고 불리는 미개 종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에미시]란 오랑캐란 뜻인데 이곳을 정벌하기 위하여 만든 목책을 따라 1戶, 2戶식으로 이름붙인 것이 지금은 지명이 되어 있습니다(또는 이
이름들이 牧馬場의 번호라고도 함). 여진족을 정벌하고 6鎭을 만든 것과 비슷합니다.
東北 지방 사람들은 영주들이 줄을 잘못
서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11세기 이곳을 근거로 하여 중앙에서 힘을 쓰던 후지와라 집안을 제압한 것은 신라 도래인의 후손인 武家집단
미나모토(源) 집안이었습니다. 이 집안이 12세기에 도쿄 부근의 가마쿠라에서 막부를 세웠고, 이 막부는 몽골과 고려 연합군의 두 차례 공격을
神風의 도움으로 막아냈습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戰國시대를 끝장내는 오다와라 대결전에 총동원령을 내렸을 때
이곳의 영주들은 참여하지 않아 영지를 몰수당했습니다.
명치유신 때는 이곳의 영주들이 도쿠가와 막부가 퇴진했는데도 막부 편을
들었다가 새 정권을 잡은 싸쓰마, 조슈번 출신들로부터 홀대를 당했습니다.
東北 지방은 아시아의 북방초원적인 냄새가 많이
납니다. 마치 몽골고원 지역을 여행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산과 대평원이 공존하고 있고, 덕분에 이곳은 좋은 牧馬場이었습니다. 많은 戰馬들이
여기서 공급되었습니다. 아오모리현에 하치노헤(八戶)라는 꽤 큰 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 한 가운데 長者山이란 야산이 있는데 높이가
약50미터입니다.
이곳에 [長者山新羅神社]가 있습니다. 新羅신사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 신사가 모시는 主神이
新羅三郞源義光이기 때문입니다.
源義光은 11세기에 동북지방에서 있었던 후지와라 가문과의 전쟁에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산출되던 금을 확보하여 그 뒤 源씨 집안의 자금원으로 만든 사람입니다. 그는 甲斐(갑비-일본어로는 가이라고 발음. 지명)源氏의 중시조가 되었는데
다케다 신켄은 그의 후손입니다. 義光은 자신이 신라도래인임을 자랑하기 위하여 이름 앞에다가 新羅三郞이라 붙였습니다.
이 집안
출신으로서 16세기 戰國 시대 때 유명했던 武將인 다케다 신켄은 軍旗에다가 新羅三郞이라고 썼다고 합니다.
다케다 신켄은
기마전술에 능했는데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源씨 집안도 기마전술에 뛰어났습니다. 신라 김씨는 흉노 기마민족 계통인데 그 피를 이어받은 도래인들도
기마전술에 능통했다는 것이 이해할 만합니다.
이 신라신사에 올라가 보았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다소 삭막했습니다. 이
신사에서는 매년 8월2일에 騎馬打毬(기마타구)라는 게임이 벌어집니다. 말을 탄 사람이 그물이 달린 막대기로써 공을 쳐서 특정의 장소에 집어넣는
게임입니다. 영국의 왕실이 즐기는 폴로(polo) 와 비슷합니다. 東北 지방에서 신라냄새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東北
지방의 위도는 한반도의 최북단과 비슷합니다. 눈이 아직도 많이 쌓여 있었고, 여행중 눈이 내리기도 했습니다. 雪國이었습니다. 동북지방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함경도, 미국의 서부와 비슷합니다. 변경의 역사이고 뉴프론티어의 역사입니다. 대자연을 배경으로 한 정복과 반란과 개척의 역사입니다.
희한한 전설도 많은 곳입니다. 源義經이란 젊은 勇者는 가무쿠라 막부를 연 兄을 위해 잘 싸웠으나 형의 질투심에 희생된
사람인데, 그가 죽지 않고 바다를 건너 몽골평원으로 가서 몽골민족을 통일했는데 그가 바로 칭기즈칸이란 전설이 그 하나입니다.
아오모리 新鄕村에는 예수의 무덤이란 게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동생이고 예수는 일본으로 도망하여
이 마을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헤라이(戶來)라는 地名도 히브류를 일본식으로 표기한 것이라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식의 전설인데, 그런 전설이
떠돌아다닐 만한 공간과 여유가 느껴지는 북방의 변경이 바로 東北 지방입니다.
요사이는 新幹線 열차가 이곳까지 들어오기
때문에 변경의 냄새가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후쿠오카에서 아오모리까지는 비행시간이 두 시간이나 됩니다. 일본은 큰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10년간의 침체기를 청산하고 다시 경제성장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先進, 한국의 後進, 한 사례
지난 주 일본의 시고쿠(四國: 막부 시대에 네 개의 藩이 있었기에 그렇게 불린다)에 있는 古都 高知의 400년
된 淸酒 공장을 방문했을 때이다. 우리 여행단은, 공장 구경을 끝내고 공장 간부와 인사를 한 뒤 골목에 세워둔 버스에 올랐다.
인사를 끝낸 공장간부가 갑자기 버스 앞을 지나 골목입구쪽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다른 차가 골목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아주려고 그러는
것임을 알았다. 차내에서 우리는 "저것이 바로 일본의 저력이다. 우리 같으면 인사한 뒤 사무실로 돌아가버렸을 터인데"라고 감탄했다.
이틀 전 자정 무렵 택시를 타고 제3한강교를 건너 남산 제1터널로 올라올 때였다. 터널로 들어가기 위하여 진입고가도로의 曲角지점을 막
돌려고 할 때 여성 운전기사가 비명을 질렀다. 1차선이 공사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전에 아무런 표지판도, 경고판도 없었다. 운전기사는
"대형사고 날 일이다. 이 나라는 도대체 상식이 없는 사회가 되어놓아서..."라고 혀를 끌끌 찼다.
선진국과 후진화되고 있는
한 사회의 차이였다. 한국인은 임기응변에 능해 위기 때 대처가 기민하다고 한다. 그 택시기사처럼. 일본인은 그러나 그런 위기 자체를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위기를 만들지 않는 경영법이 위기를 극복하는 경영법보다 한 수 위다.
일본 여행 감상-살인적 친절
-지난 주 일본 시고쿠를 여행하고 와서 느낀 점 몇 가지.
1. 일본은 지금 질적인 변화를 하고 있다. 건물들이
미적으로 고급화되고 있으며 도시도 유럽식의 아름다움을 더해가고 있다. 한국의 대도시가 규모면에서 일본을 따라잡는가 했더니 어느 새 일본은 질적인
탈바꿈을 시작했다.
2. 인구 10만 수준의 작은 도시에서도 도쿄 정도의 삶의 질이 보장되고 있다. 호텔의 수준, 점원들의
친절도, 식당의 서비스가 대도시에 비해서 손색이 없다. 지방과 중앙의 수준이 거의 평준화되어 있다.
3. 친절하고 성실하면서
정직한 일본인의 자세는 경제 불황기를 거치면서도 변하지 않고 있다. 일본에서는 친절과 정직과 청결은 전국적으로 평준화되어 있다고 한다. 대도시든
농촌이든 같다는 이야기이다. 이들의 친절을 [살인적 친절]이라고 평하는 한국인들이 있다.
4. 일본인처럼 각론으로 파고들어
작은 것에도 큰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각 분야에서 제1인자가 되어 저마다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민족은 일본 말고는 달리 없을 것이다. 그런 특성이
살아 있는 일본은 안으로 꽉 찬 나라이다.
5.일본에서 경영자, 고급 공무원, 정치인 등 엘리트에 속하는 사람들의 용모와
체구는 상당히 한국인들과 비슷하다. 반면에 사회 저변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체구와 용모는 작아지고 떨어진다. 4,5세기에 한국으로부터 건나간
기마민족이 일본의 토착민족을 점령하고 고대국가를 건설했다. 이런 신분관계로 해서 지배층과 피지배층 출신들의 외모가 지금도 구별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일본은 계급 혁명이 없었던 곳이기 때문에 피지배층과 지배층의 후손들이 지금도 상하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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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본인 기자의 부러움
어제 일본에서 만난
서울특파원 출신 한 기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1987년 주한 일본 대사가 6.29 선언 후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요. "한국 사람들은 정말로 대단한 민족이다. 휴전선을 두고 적과 대치하고 있는 조건에서 이렇게 민주화를 쟁취한다는 것은 위대한 민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일본으로서도 옆에 민주국가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고민을 나눌 수 있으니까."
일본의
민주주의는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쟁취한 것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저는 한국인들을
존경합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자신의 권리는 싸워서 지켜내고 남의 권리는 존중하는 자세입니다. 오늘 밤 저의 사이트를
찾아와서 열심히 토론하고 분노하며 걱정하고 기대하는 모든 분들이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 투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투쟁이며 어떻게 하면 그런 투쟁을 법치안에서 평화적으로 하느냐 하는 숙제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위대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안온한 생활을 보내고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위하여 흥분하고 싸울 수 있는 무대가 있으며 그것이 시대정신이 된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민족사 최고의 황금기 그 한가운데 있는지 모릅니다.
일본의 우경화: 일본의 戰後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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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의 사무실을 찾아온 일본의 한반도 전문가와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분은 일본인 납치자 구출
운동에도 관계한 분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최근 1년 사이 일본은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일본의 戰後가 비로소 끝났다는
느낌입니다.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국민들의 죄책감이 이제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고이즈미 정부가 취한 북한 만경봉호 입항
규제입니다. 일본 국민들의 절대 다수가 이 조치를 찬성하고 있습니다. 옛날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현상이지요. 이제는 한반도 문제도 객관적으로,
큰 죄책감 없이 바라보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 일본 여론을 대표한다고 자부했던 아사히 신문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요사이 일본과
미국 사이는 더욱 밀착되고 있습니다. 이 점이 재미 있습니다. 전후가 끝났다고 해서 군국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의 협조관계를 바탕으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자세로 변한 것입니다. 아주 실용적으로 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동안 우리가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제기할 때는 언론에서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우리가 일부 언론에 대해선 관심을 주지 않아도 될 만큼 변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변두리에서 중심에 들어온
느낌입니다."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제기하여 싸웠던 일본의 反共우익세력이 나라의 중심에 들어온 느낌이란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만큼 일본이 우경화되고 있으며, 김정일 정권을 얕잡아 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한반도 전문가는 "이제는 김정일 뒤를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머지 않아 김정일이 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김정일이 망할 때는 한국에서도 무게 중심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수구꼴통으로 몰리고 있는 세력이 다시 중심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다시 나라의 고삐를 쥐게 될 것입니다.
일본인이 잊지 못하는 안재홍의 8.15 연설
기자는 1984년8월호
月刊朝鮮에 '조선 총독부 고관들의 그 뒤'라는 르포 기사를 썼다. 그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기록이란 건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질 물증이다. 우리 민족이 말로만, 감정으로만 일제의 착취에 열을 내고 있는 동안 총독부 후예들은 착실하게, 우리의 주장을 뒤엎을
물증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타일 위에 사인펜으로 쓴 것 같은 우리의 기억과 감정을 씻어버리고 지나간 뒤 남는 것은 타일을 파고 새긴
저들의 기록일 것이며 역사는 이 기록만으로 일제 36년을 심판할지 누가 아는가. 우리는『일제 36년을 잊지 말자』고 하지만『패전 뒤의 고난을
잊지 말자』면서 한국 철수의 기록을 방대한 저작으로 남긴 것은 일본인이었다.
내가 가와사끼역 근방에서 만난 모리다
요시오씨(森田芳夫)가 바로 그 사람이다. 72세의 이 노인은 서울 성신대학교 일본어학과 교수로 있다. 여름방학을 틈타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그가 우방협회의 지원을 받아 쓴 「조선 終戰의 기록」(1964년 출판)은 1천38쪽에 달하는 대작이다. 패전 뒤 철수까지의 한국 사정을 이해하는
데 뺄 수 없는 자료로 이미 고전이 돼 있다. 몇 년 전에는 이 책을 쓸 때 모은 자료를 세 권의 자료집으로 내기도 했었다. 아주 얌전한 인상을
주는 모리다씨는 京城世話會 호즈미 회장의 한마디 말이 그를 이 필생의 작업에 몰두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모리다군, 장래를
위해서라도 철수관계 자료를 모아 두게』 북새통 속의 서울에서 이 말을 듣고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감동이 있었다는 거다. 모리다씨는 그 뒤 19년
동안 1천여명의 증인들을 면담, 이 책을 냈다.
『저 혼자 힘으로 된 책이 아닙니다. 수많은 철수민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기록을 해 놓았기 때문에 정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사망자, 수형자 명단을 깨알같이 적어 훈도시 속에, 또는 구두 밑창
속에 감추어 갖고 왔습니다. 가족에게, 이웃에게, 정부에게 무엇인가 알리고 싶었기 때문에 그 혼란 속에서도 그렇게 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알리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일제의 한국인 착취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한국인·미국인·소련인·공산주의자들로부터 당한 일들과 일본인들의 의연한 대응과 깨끗하고 질서 있었던 철수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모리다씨는 군산에서 났다. 합병 전에 벌써 한국에 건너왔던 아버지는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경성제대를 나왔으며 그의
아내도 한국에서 난 일본인이다. 경성세화회에서 철수 사무를 보다가 귀환, 일한 협회에서 잠시 일하다가 외무성에 들어가 패전 뒤의 철수관계
조사원으로 일했다. 그 뒤엔 극동아세아과에서 일하다가 한일국교 정상화 1년 전부터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근무하기 시작, 지난 75년에 참사관으로
퇴직할 때까지 줄곧 한국 생활을 했다. 퇴직 뒤 바로 성신대 교수가 되었으니 그의 한국 생활기간은 일본 생활의 세배나 된다.
『책을 쓰면서 저의 생각도 많이 정리되었습니다. 역시 힘에 의한 지배는 좋지 않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억지로
합쳐졌지만 헤어지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할린에 있는 한국인 문제, 한국에 남은 일본 여자들의 문제 등등 결별의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일본의 가장 큰 책임은 한반도의 분단입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게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만,
항복을 결정한 어전회의가 8월 9일이 아니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진 8월 6일에 열렸다면 소련은 참전의 시기를 놓치고 38선도 없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8월 9일 어전회의에서 결사 항전의 주장이 이겼다면 소련 기갑부대는 부산까지 남하했을 것이고, 미군은 인명손실을 막으려고
상륙을 포기, 한반도는 적화됐을 것입니다.』
모리다씨는 『우리 같은 식민지 세대는 패전으로 발판을 잃고 큰 손해를
보았다』면서 『그래도 한국이 좋다』고 했다. 한국에 가면 50년 전 친구가 있는데, 일본에는 어딜 가도 50년 전 친구끼리의 모임은 없다는
것이다. 모리다씨는 일본에서 잃은 근거지를 전후의 한국에서 다시 찾은 예이다. 모리다씨는 나에게 『왜 한국에는 귀환의 기록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추궁같기도 했다. 나는 도오꾜 근방 사이마다현에서 45년 10월에 났고 다음해 부모를 따라 귀국했다. 패전 철수의 기록은
있으되 승전 귀환의 기록은 없다―유행가는 있지만.
모리다씨는 이것만은 꼭 기사에 써달라면서 설명했다.
『책을 쓰면서 제가 감격에 못이겨 눈물을 흘린 자료가 있습니다. 8월 15일 오후 3시 경성방송국을 통해 안재홍 선생(건준 부위원장)이 한 연설
대목입니다.―
"끝으로 국민 여러분께서는 각별히 유의하여 일본 거주민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40년간의 총독
통치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조선·일본 양 민족의 정치 형태가 어떻게 변천하더라도 두 나라 국민은 같은 아시아 민족으로서 엮이어 있는
국제 조건 아래서 자주 호양으로 각자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일본에 있는
5백만의 조선동포가 일본에서 꼭같이 수난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조선에 있는 백수십만 일본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총명한 국민 여러분께서는 잘 이해해 주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격앙된 그 순간에도 이런
차분하고, 이성적인 연설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연설 덕분으로 수많은 일본인들이 수난을 면했습니다』
관동대지진때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와 해방때의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를 비교하면 우리의 도덕적 우월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국제관계에서는 그러나 힘과 줏대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도덕적 우월성은 자칫하면 「쓸개빠진 선심」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미국 탱크에 치여 죽은 두 여중생 사건을 反美 시위로 키운 세력들은 미국에 수백만의 동포들이 살고 있고
그들이 미국인의 배신감과 反韓감정으로 욕을 보게 될 것이란 걱정을 했을까.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안재홍 선생은 8.15 그날의 흥분을 삭이면서
먼저 일본에 있는 동포들의 안위를 걱정하면서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에 대한 보복을 견제했다. 이런 사려 깊은 생각과 김대중 노무현 세력의 얕은
생각을 비교하면 사람의 무게가 다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배려, 그것이 없는 운동은 아귀다툼일 뿐이다.
일본 수상 모리의 전화 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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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수상 모리(森喜明)가 최근 일본 월간지 문예춘추와 인터뷰한
자리에서 자신의 전화 거는 방식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비서를 통해서 전화를 거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전화번호를 직접 누르지요. 가끔 비서가 전화번호를 대신 눌러주지만 상대방이 나오기 직전에 내가 전화기를 들지요. '총리로부터 전화입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라고 하는 말은 안됩니다. 제가 '모리입니다'라고 하면 상대방이 모르는 경우도 있어요. '어느 모리 말씀입니까'하고 반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총리대신 모리입니다'라고 말하기도 뭣하고 해서 '모리라고 하면 알 겁니다'라고 하지요. 그러면 '회사 이름을 말씀해주시지
않으면 바꾸어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교환수도 있어요. 그러면 제가 이러지요.
'회사이름에 따라 연결해줄 수도 있고 연결안해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라고 따지면 그쪽이 당황하지요. '어쨌든 연결시켜준다면 귀하가 곤란할 일은 없을 거요'라고 달래지요. '총리 모리입니다'란 말을
쓰지 않으려고 하니까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北海道의 눈보라 속으로
-내린 눈도 문화재처럼 보존,
관리하는 일본인들!
北海道 삿포로 남쪽 30㎞쯤에 「시코쓰코」라고 불리는 호수가 있다. 한겨울에 이곳을 찾았다. 호수를 빙
둘러 눈덮인 산봉우리가 병풍이었다. 호수의 둘레는 약 50㎞이고, 15×10㎞의 사각형이다. 투명도 18m, 수심은 가장 깊은 곳이 약
250m로서 日本 호수 중 두 번째이다.
버스편으로 이 호수에 면한 마루코마(丸駒) 온천 여관에 도착하여 다다미 방에
들었다. 호수로 면한 창문을 여니 숨이 막힐 것 같은 장관이 펼쳐졌다. 이 호수는 뜨거운 물이 솟아올라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달밤에 눈덮인
산과 잔 물결치는 호수를 여관의 露天온천에 몸을 담근 채 바라보는 것은 최고의 사치이다.
다음날 尙美會 여행단을 태운 버스는 눈보라
속을 네 시간을 달려 北海道 한복판에 있는 아사히카와(旭川) 市에 도착했다. 시베리아의 겨울보다 더 눈이 많이 내린다는 北海道의 도로망은 잘
정비되어 있다. 버스는 눈길을 雪海의 배처럼, 때로는 슬로프를 타는 스키처럼 달렸다. 도로 양쪽으로는 높이 1∼3m의 눈이 쌓여 있고, 雪原과
도로의 한계선을 보여주는 ↓ 표시대가 빨갛게 신호등처럼 촘촘히 줄을 이었다.
大地가 온통 눈으로 덮여 어디서부터가 도로인지
알 수 없는 雪原에 전봇대처럼 박힌 이 표시대를 따라 달리는 버스는 등대불이나 나침반을 보고 항해하는 배이고, 눈을 밀어내는 와이퍼의 소리는 노
젓는 소리였다.
눈보라는 때론 눈먼지, 때론 눈안개로 변하고, 주변의 침엽수는 얼음과자처럼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눈의 무게에 눌려
뿌리째 뽑혀 넘어진 巨木들의 최후는 식물계에서 벌어지는 생존경쟁과 適者생존의 냉혹함을 보여주었다.
아사히카와市는 인구가 약
36만명. 北海道 두 번째 도시이고, 일본에선 가장 북쪽에 있는 가장 큰 도시이다. 이 도심지로 들어갔을 때는 눈이 멎고 파아란 하늘이 白雪을
뒤집어쓴 도시를 잘 조명해 주었다. 북해도는 인구가 적고(약 600만) 넓기(약 남한 크기) 때문에 고층빌딩이 적다. 도시나 건물이 미국식으로
낮고 길며, 겨울엔 스칸디나비아의 취락 풍경이다. 일본 본토와는 너무나 다른 자연과 도시의 모습으로 해서 가끔 ?여기가 일본인가, 미국인가?
하는 착각이 생긴다.
아사히카와 市內는 도로는 氷雪板이고 길가엔 눈이 제방처럼 쌓여 있었다. 눈이 문화재처럼 곱게 잘 보존돼
있었다. 눈은 내릴 때는 좋지만 쌓인 뒤에는 밟히고 더럽혀지는 법인데 이 도시의 눈은 쌓여서도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눈이 이렇게 깨끗하게 쌓여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대기오염이 거의 없어 눈이 원체 깨끗하고, 일본인들이 깔끔하게 눈을 치우는
데다가, 눈에 덮여 흙이 보이지 않아 눈을 오염시킬 물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사히카와 市의 숲 속에 있는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 문학관을 찾았다. 「氷点」으로 40대에 유명작가가 된 미우라씨는 아사히카와 市에서 죽을 때까지 살면서 이 도시를 배경으로
기독교 정신이 밴 9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2층의 아담한 기념관은 이 고향을 아낀 작가와 작가를 아낀 고향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만들어낸
「향기 있는 공동작품」이었다. 38명의 한국인들이 이곳에 와서 100만원쯤 쓰도록 만든 것도 그런 人情이었다. 善意야말로 최고의 관광자원이다.
이 전시관을 둘러보다가 1960년대의 한국 영화 포스터를 만났다. 한국에서도 氷点을 영화로 만들었던 것이다. 尙美會는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雪國'의 무대, 니이가다현의 유자와 온천을 다녀온 적도 있다. 雪國 기념관엔 나무판대기가 하나 있다. 이
소설을 영화로 찍을 때 주연 여자배우가 소설의 모델이 된 退妓(퇴기)와 대화를 나누면서 발을 녹였다는 물난로(고다츠)의 받침나무판이 국보처럼
전시되어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어도 소중하게 다루면 귀중한 것이 되는 모양이었다.
소설 雪國의 무대
니이가타의 유자와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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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47개 道 都 府 縣(도도부현)으로 되어 있다. 혹가이道와 도쿄都, 교토 및
오오사카府, 그리고 43개縣이다. 필자는 요사이 일본의 47개 도도부현(道都府縣)을 전부 한번씩 가본다는 목표를 세우고 4박5일씩의 여행을
해오고 있다. 현재 목표의 약60%를 달성했다.
非서구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선진국이 된 일본의 저력은 지방에서 실감할 수 있다. 인구
5만 정도의 작은 도시라도 숙박시설과 음식점의 질이 도쿄와 같다. 縣마다 근사한 기념관과 박물관 미술관이 있고 잘 정비된 사회기반시설이 있다.
축적된 富(부)의 위력이다. 일본은 한반도의 약 두배인데 여행하다가 보면 그보더 더 넓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는 산이 약70%인데
일본은 산이 약80%이다. 아마도 산악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가 일본일 것이다. 일본 산은 가파르면서 높고 계곡은 깊다. 일본은 국토가
좁고 길어 긴 강은 없다. 가장 긴 강은 니이가타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시나노가와인데 367km이다. 한강의 반 정도 길이이다.
일본은
평균 강우량이 연간 약1650mm로서 한국보다 약400mm가 더 많다. 일본의 지질은 한국보다 젊다. 화산과 온천이 많아 땅이 살아 숨쉬는 것
같고 나무가 아주 크게 자란다. 열대 정글지대를 제외하면 미국과 일본의 나무들이 가장 클 것이다.
필자는 요사이 우리나라
경상도 강원도와 마주하고 있는 일본의 서해안을 자주 다니고 있다. 시마네, 돗도리, 이시카와, 도야마, 니이가타, 아키다縣을 따라서 가다가보면
친근감이 생긴다. 신라에서 건너간 이른바 渡來人(도래인)들이 개척한 곳이라 그 흔적들과 자주 만난다. 신라도래인들이 만든 시마네縣의
이즈모(出雲)신사(神社)를 비롯하여 한반도 사람들이 만든 제철지(製鐵址), 온돌터가 있다. 일본의 지방 박물관에서는 중앙과 달리 한반도로부터 온
문화의 자취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전시를 하고 있다.
이 일본의 서해안을 따라서는 해안과 평야와 산맥이 나란히 달린다.
바다와 산맥 사이 평야가 매우 넓다. 일본의 가장 유명한 쌀생산지가 이시카와와 니이가타이다. 이곳 쌀은 맛이 있고 물이 좋다. 쌀과 물로
빚어지는 것이 일본 정종이니 술맛도 좋을 수밖에 없다. 일본의 지방을 여행하다가 보면 저마다 酒都(주도)라고 자랑하지만 니이가타의 정종이
최고급이라고 보면 된다.
올해 초 일본 니이가타의 유자와(湯澤) 온천을 가게 되어 있어 이곳을 무대로 하여 쓰여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雪國'을 읽게 되었다. 이 소설은 야스나리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한번 읽으려 했었는데 중단했었다. 줄거리가 너무 평범하여 재미가
없었다는 기억과 함께 소설의 첫 문장은 가슴에 오래 남았다.
<國境의 긴 터널을 빠져나가니 雪國이었다. 밤의 바닥이 하애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췄다>
여기서 國境이란 군마현과 니이가타현 사이에 있는 시미즈(淸水)터널을 가리킨다. 도쿠가와 막부시대에는
영주들이 다스리는 영지(藩)를 國이라 불렀다. 시고쿠(四國)는 4개 藩(번)이 있던 곳이다. 이 소설의 '국경'이란 이런 번의 경계선(그 뒤는
縣의 경계선)을 말한다.
'雪國'을 다 읽지 않는 사람들도 이 첫 문장을 기억하는 이가 많다. 여러 소설들의 첫 문장중에서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雪國'은 그 배경처럼 문장이 아름답다. 일본의 短詩(7-5-7자)인 俳句(하이쿠)를 닮은 문장과 대화가
많이 나온다. 짧게 끊어지는 문장에 일본인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을 담았다.
이 짧은 소설을 다 읽고나면 마음속에 많은 장면들이
殘影(잔영)처럼 남는다. 한 편의 詩를 읽은 느낌이다. 문장이, 특히 대화가 짧고 함축적이라 오히려 상상력과 애틋한 생각이 더 길게 오래 가는
모양이다.
남자주인공 시마무라는 시니컬한 성격의 무용평론가(기혼자로 추정된다)인데 유자와 온천향에 한가하게 놀러와서 기생(게이샤)을
불러 수작이나 걸려고 한다. 그래서 고마코를 만나게 된다. 그 장면.
<여자의 인상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청결했다. 발가락 뒤 옴폭
파진 데까지 깨끗할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첫여름의 산들을 보고 온 자신의 눈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가 하고 의심이 들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 소설에서 많은 것을 생략한다. 그 생략으로 해서 상상력이 자극된다. 야스나리는, 시마무라가 이 고마코와 처음 관계하는
장면을 이렇게 스쳐지나가듯이 썼다.
<"내가 나쁜 여자가 아니에요. 당신이 나빠요. 당신이 진 거예요. 당신이 약한 거예요.
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라고 중얼거리면서 기쁨을 누르려고 소맷자락을 씹었다. 잠시 힘이 빠진듯 조용했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날카로운 어조로,
"당신 웃었죠. 날 비웃는 거죠?"
"웃긴 누가 웃어?"
"마음 속으론 웃고 있는 거죠. 지금은 웃지 않아도 나중엔
반드시 웃을 거야">
야스나리는 이 소설을 1934년부터 쓰기 시작하여 3년 뒤 일단 완결했으나 1947년까지 고치고
다듬고 하여 마무리했다. 사와노라는 일본 평론가는 "이 소설만큼 상징적이고 아름다운 일본문장은 좀처럼 볼 수 없다. 慾情 같은 것도 눈 녹은
물처럼 淸潔하다"고 썼다.
'돌을 갈아놓으면 반들반들해지는' 것처럼 신경이 예민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이 소설을 붙들고 13년간이나
고치고 다듬고 했다는 것은 그의 '고독한 魂'에서 나온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사와노는 "그의 부드러움은 失意와 체념에서 나온 것이고 그의
엄격함은 사라지는 일본의 美를 마지막까지 버티어보려는 데서 연유한다"고 덧붙였다.
이 소설의 基調(기조)를 이루는 '사라져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생애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으면 早失父母(조실부모)한 천재 야스나리가 일본의 美的 감수성에 탐닉했다가
73세에 자살로 생애를 마감하는 것이 이해가 간다.
나는, 연일 눈이 내리고, 이미 내린 눈은 깊이가 2m를 넘는 곳도 있었던 유자와
온천에서 못다 읽은 이 소설의 남은 부분을 덮고 인적이 드문 거리로 나와보았다. 고마코를 닮은 여인과 마주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산비탈에
서 있는 듯한 유자와 온천의 역사는 약800년. 2000m를 넘는 連峰들이 달리는 주변에는 좋은 스키장들이 많다.
유자와가 속해 있는
니이가타는 면적이 1만2583평방킬로미터로서 경상남도 만한 크기이다. 인구는 약245만명. 지진이 자주 나기로 유명하고, 해안지역에 연간 산출량
약300만 배럴의 유전이 있다. 쌀 출하액이 연간 약2조원어치를 기록하여 일본제1이다.
니이가타의 나가오카라는 작은 도시는
금속洋食器(양식기)의 세계적 생산지이다.
인천 공항에서 니이가타까지는 비행기로 약 두 시간, 니아가타역에서 고속 신간선(新幹線)으로
유자와역까지는 약40분 걸린다. 도쿄-니이가타의 신간선은 산맥을 뚫는 공사로 해서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먹힌 철로라고 한다. 니이가타 출신 정계
실력자 다나카 전 수상 덕분에 가능했던 공사였다.
평자들이 소설 雪國의 클라이맥스라고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
<고마코는 약간 어색한 기색으로, 이를테면 아기를 한번도 낳아 본 적이 없는 처녀가 남의 아기를 안고 거북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들어 마치 아기의 잠자는 얼굴을 지켜보는 몸짓을 했다. 잠시 후 시마무라가 입을 열었다.
"넌 좋은 애다"
"왜?
어디가 좋아요?"
"좋은 애야"
"그래요. 짖궂은 양반, 무슨 애길 하는 거죠? 정신 좀 차리세요."
고마코는 외면을
하고 시마무라를 흔들면서 토막토막 쏘아붙이듯 말하고는 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혼자 입속으로 웃으면서 "당신 안되겠어요. 괴로우니까
돌아가 주세요. 이젠 입을 옷이 없어요. 당신에게 올 때마다 새 옷을 갈아입고싶지만 이젠 바닥이 났어요. 이것도 친구에게 빌린 거예요. 나쁜
애죠?"
시마무라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뭐가 좋은 애에요?"
"넌 좋은 여자야"
"짖궂은
분"
어깨가 간지러운듯 얼굴을 숨겼으나 무엇을 생각했는지 갑자기 한쪽 무릎을 세워 고개를 들고는, "그게 무슨 의미죠, 네? 무슨
애기에요?"
시마무라는 놀라서 고마코를 보았다.
"말해주세요. 그래서 찾아오신건가요? 당신, 비웃고 있었군요. 역시 비웃고
있었죠?"
고마코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시마무라를 노려보더니 어깨는 심한 노여움으로 떨리고 안색은 창백해지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분해라, 아이, 분해라" 하며 데굴데굴 구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돌아앉았다>
"넌 좋은 애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감격하면서 과거 심정까지 털어놓던 고마코가 "넌 좋은 여자야"라고 시마무라가 말을 바꾸는 순간 돌변한 이유는 일본인과 한국인은
알 것이다. '좋은 애'와 '좋은 여자'의 차이. 이 차이로 해서 고마코는 시마무라에 대한 꿈을 접고 배신감을 느끼며 소설은 파국으로 달린다.
평론가는 "낱말의 사소한 차이를 가지고 이렇게 많은 것을 암시하는 소설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유자와 온천에는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이 雪國을 썼던 여관과 방이 남아 손님들을 끌고 유자와 마을 민속박물관에는 雪國館(설국관)이 있다. 이 전시실에 가면 한 장의
나무판이 있다. 설명인즉, 雪國을 영화로 만들 때 고마코役을 맡은 배우와 야스나리가 소설에서 고마코의 모델로 삼았던 기생이 만났는데 그때 두
사람이 함께 발을 녹이며 이야기하던 온수통(고다츠)을 받치던 나무판이라고 한다.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일본인이다. 눈이 많이
쌓이는 니이가타의 도로는 거의 막히는 날이 없다. 일본의 도로정비능력은 이럴 때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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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하고 청결하고 성실하고, 그리고 문장력이 좋다. |
趙甲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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