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이강기 2015. 9. 11. 14:44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아시아주의와 국제주의를 중심으로

 

 

 


박 한 규


I. 서 론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직후 일본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룩해
국제사회에서 서구열강들과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당대의 가장 시
이 논문의 목적은 메이지유신이래 태평양전
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외교에 있어서 국제주의
와 아시아주의를 둘러싼 외교이념 논쟁의 주요
흐름을 분석하는데 있다. 탈냉전기 이후 오늘
날 일본에서 나타나고 있는 국가 진로에 관한
격렬한 논쟁의 근원도 전전 일본에서의 외교이
념 논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따라서 전전 일본에 있어서의 외교이념 논
쟁의 본질을 분석해 보는 것은 21세기 일본외
교의 방향을 보다 통시적이고도 객관적으로 이
해할 수 있는 단초(端初)를 제공해 줄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외교정책은 주요 정책결정자들
의 외교이념들이 주어진 국내적 조건들 및 국
제환경과 상호작용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
각이 출범한 이래 일본정부의 외교노선은 긴밀
한 대미협조를 바탕으로 해서 자신의 국제적
위상에 걸맞은 군사력을 갖추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적 국제주의적 외교이념에 바
탕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향후 일본외교의
방향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현재 일본의 신보수
주의 정치세력들의 대외적 야심을 일본국민들
이 어느 정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민주
적 역량을 가지고 있느냐에 우리의 관심의 초
점을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11d국가전략e2004년 제10권 1호
* 이 논문은 2001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KRF-2001-003-
C00091).
** 경희대 국제지역학부 교수
?? 요 약 ??
핵심어: 전전 일본외교, 외교이념, 국제주의, 아시아주의
급한 국가목표로 삼았다. 메이지 일본은 이러한 국가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서 대외적으로 때로는 구미열강들과 협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과 충돌
하기도 하였다. 또한 국내적으로도 전전(戰前) 일본 정치지도자들은 국가이
익의 달성을 위하여 서구열강들과 협조할 것인가, 아니면 이들에 대항할 것
인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전전 일본외교에서는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와 아시아주의
(Asianism)라는 독특한 외교이념(外交理念)들의 흐름이 있었다. 국제주의
외교이념이란 구미열강들과의 협조를 통해 주요한 정치군사적, 경제적 이익
을 달성하고자 하였던 시각이었던 반면, 아시아주의 외교이념이란 구미열강
들에 대항해 아시아에서의 일본 자신의 특수한 지위와 권익을 확대해 나가
고자 하는 시각이었다. 탈냉전기 이후 오늘날 일본에서 나타나고 있는 국가
진로에 관한 격렬한 논쟁의 근원도 이러한 전전 일본에서의 외교이념 논쟁
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탈냉전기 일본의 국가전략과 관련해서 대
표적인 논의로서 등장했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1)의‘보통국가론,’미
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전(前)수상과 후나바시 요이치(船橋洋一)의‘민간
대국론’(civilian superpower),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의 배타적
아시아주의론 등은 바로 전전 일본외교에 있어서의 국제주의와 아시아주의
의 논쟁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전전 일본에 있어서의 외교이념 논쟁의 본질을 분석해 보는 것은
21세기 일본외교의 방향을 보다 통시적이고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초(端初)를 제공해 줄 것이다. 우리가 향후 일본외교의 방향성에 대해 지
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전전 일본의 제국주의적 정책이 한국
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의 운명과 국가이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
니라, 전후(戰後)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일본의 대외정책은 동
아시아지역은 물론이고, 세계적 차원의 국제정치 및 세계경제에도 매우 중요
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전 일본외교에 있어서의 국제주의와
아시아주의의 외교이념의 연구는 21세기 일본외교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는
준거(準據)를 마련한다는 의미에서 정치현실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일본외교에 있어서 국제주의 또는 아시아주의 외교이념이 지배적으
76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1호
11) 이 논문에서의 일본인명은 처음 등장할 때는 한국어 음(音)과 괄호 안에 한자명(漢字
名)을 동시에 제공하였고, 동일인의 이름이 반복되어 나올 경우 한자명만 표기하였다.
로 등장하게 되는 요인들을 찾아 이들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국제정치
이론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 국가의 대외행위
를 설명하는 외교정책이론들은 다양한 분석수준들?개인수준, 국가/사회수
준, 국제체제수준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본 연구에서는 일본의 대외
행위는 주요 정책결정자들의 외교이념들이 주어진 국내정치적 조건들과 국
제환경과 상호작용하여 결정된다고 봄으로써, 국제정치와 국내정치의 상관
관계를 규명하는 국제정치이론 연구에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논문의 목적은 메이지유신 이래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외교에
있어서 국제주의와 아시아주의를 둘러싼 외교이념 논쟁의 주요 흐름을 분석
하는데 있다. 이 논문에서는 우선 전전 일본외교 분석을 위한 이론적 논의
들과 국제주의와 아시아주의 외교이념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살펴보고, 둘
째, 전전 일본외교사의 시기구분(時期區分)을 통해 국제주의 외교이념과 아
시아주의 외교이념들이 어떤 국내외적 조건들 속에서 어떤‘주요’요인들에
의해 지배적으로 등장하는가를 규명하는데 분석의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다.
즉, 여기에서는 각 시기 한 특정 외교이념의 등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
친 주요 국제적, 국내정치적, 사회경제적 요인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논문의 분량이 제한되어 있어서, 한 특정 외교이념의 등장
과 변동에 영향을 준 모든 국제적, 국내적 요인들에 대한 상세한 언급은 이
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론에서는 전전 일본외교에 있어서 국
제주의와 아시아주의를 둘러싼 외교이념 논쟁과 그 흐름을 통해 향후 일본
외교의 방향성에 있어서의 함의(含意)를 찾아보고자 한다.

 


II. 분석틀

 

1. 이론적 논의

 

1) 기존의 논의들

 

 


그 동안 일본 국내외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 전전 일본외교에 대한 다양한
분석들이 이루어져 왔다. 전전 일본외교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크게 다음
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77
첫째, 전전 일본의 군국주의 정책과 태평양전쟁의 원인을 특정‘악의 세
력’, 즉 전전 일본 군부의 비정상적인 일탈행위로 보는 시각이 있다.2) 이들
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 군부가 일본의 일반적인 국가이익을 저버리고, 편
협한 자신의 조직적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일본 국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
이 무모한 전쟁들을 일으켜 일본 사회전체를 패망의 길로 이끌고 갔다는 것
이다. 이러한 분석들은 특히 1930년대 일본 군부의 우월감, 독단주의, 비
이성, 무모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
본 군부에게 전쟁의 책임을 전적으로 돌림으로써, 전전“대동아전쟁”을 열
광적으로 지지했던 일본사회의 전체?천황, 민간 정치지도자, 여론형성 지
도층, 재벌, 지식인, 그리고 일반국민들?의 책임을 매우 희석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일본국민들은 태평양전쟁의 가해자(加害者)가 아니
라, 자신들도 무모하고 비이성적인 일본 군부의“피해자”(被害者)라는 의식
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런 일본 군부책임론의 역할이 크다고 볼 수 있겠다.
둘째, 전전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의 원인을 일본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지배연합(ruling coalition)세력들?메이지 원로(元老), 군부, 재
벌(財閥)?의 공모(共謀)로 규정하는 시각이 있다. 이러한 시각들은 전후
일본내 강좌학파(講座學派)와 노농학파(勞農學派)로 불리는 좌파적 진보학
자들에 의해 주로 제기되었다.3) 이들의 논의에 따르면, 전전 일본 지배엘
리트들은 국내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해외에서 새로운 상품시장과 자원
을 확보하기 위해서 대외팽창적 제국주의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4) 즉, 전전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은 일본 독점자본주의의 최종단계라
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좌파적 논의들은 제국주의 전쟁의 원인이 일본 지
배엘리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지배엘리트들을 산출한 일본사회의
구조적(構造的) 문제점이기도 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이
“미완의 혁명”(unfinished revolution)에 머물러, 구체제(舊體制) 하의
78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1호
12) 전전 일본의 군국주의적 외교정책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일본 군부의 비이성(非理性)적
행동으로 설명하는 연구들은 Pelz 1974; Butow 1961; Maxon 1973; Fujiwara
1973, 189-196; Ienaga 1978 등이 있다.
13) 전전 일본 제국주의전쟁 분석을 둘러싼 강좌학파와 노농학파의 논쟁은 장달중 1989를
참조.
14) 이러한 시각을 가진 대표적인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遠山筏樹외 1955; 井上淸1957;
安藤良夫외 1967~8; 井上淸1963~6. 근대일본을 마르크스적 입장에서 해석한 대표
적인 영문 저서로서는 Dower 1975가 있다.
정치 및 사회구조의 봉건적(封建的)이고 권위주의적(權威主義的)인 특징들
이 그대로 존속되었고, 바로 이러한 권위주의적 정치체제(政治體制)가 제국
주의적 성향, 즉 전쟁을 유발하기 쉬운 지배엘리트들을 낳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좌파적 분석들은 사회계급구조 결정론에 빠져 전쟁에 책임이
있는 개인 및 일반 국민의 역할을 간과하고, 복잡하게 이루어지는 역사현상
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5)
셋째,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의 선택은 그 당시 주어진 국제환경에 대한
대응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이러한 수정주의적 견해는 주로 미국의 일
본 전문가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들은 당시 약육강식의 국제정치의 특
성?노골적인 권력정치(power politics)가 난무하는 제국주의적 국제구
조?으로 말미암아, 일본도 국제사회에서 독립과 안위를 보전하기 위해서
는 제국주의의 길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1930년대 중국의
민족주의적 저항을 견제하고, 서구에 만연한 보호무역주의를 타개하기 위해
서는 일본이 새로운 아시아질서 창출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6) 메
이지시대 당대 최고의 국가주의(國家主義)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던 도쿠토미
소호(德富蘇蜂)는 당시 국제정세를“道理의 勢力이 貧弱하고, 腕力主義가
융성하는 진실로 절망의 시대”라고 묘사하였다(德富蘇蜂1975, 152). 즉,
그는“먹히지 않으려면, 먹어야 한다”라는 철저한 양육강식의 시대에서 군
사적 대외팽창주의는 일본의 유일한 선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국
제적 조건에 대한 대응이라고 하는 단일변수적 설명(single-factor
analysis)은 그 당시 일본 국내에서 제국주의적 팽창을 촉진하는 다양한
동인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약육강식의 현
실주의적인 국제정치 측면만을 강조한다면, 제국주의적 전쟁을 일으킨 일본
자신의 책임은 전혀 없다는 극단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79
15) 이러한 비판은 주로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에 의해 이루어졌다. 丸山眞男(마
1997, 45~245)은 일본의 제국주의전쟁은 계급적 원인보다는 청년장교 집단을 중심으
로 한 군부 및 과격한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이 일본적 가치, 주의 및 행동양식을 국
제관계에 재생산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고 주장한다. 즉, 그는 일본의 특수성, 우
월성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국가주의적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전쟁의 주요 원인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16) 이러한 수정주의적 논의의 대표적인 저서들로서는 Reischauer 1963; Butow 1954;
Crowley 1966; 入江昭1966 등이 있다.
2) 분석틀: 이념, 체제유형, 그리고 외교정책
외교정책 분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분석수준 문제(levels of
analysis problem)일 것이다. 전전 일본외교에 있어서 아시아주의와 국제
주의라는 외교이념들의 흐름을 결정하는 변수들은 대체로 개인적 수준, 국
가/사회적 수준, 국제적 수준 등 세 가지 분석수준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
이다.7) 개인적 수준의 변수들은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의 정치 및 외교정책
을 이끌었던 주요 지도자들의 정치관, 국제질서관, 대서양관(對西洋觀), 대
아시아관 등이 있을 수 있다. 국가/사회적 수준의 변수들은 당시 일본의 국
가(정부)와 민간 사회세력들 사이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즉, 국가는 다양한
사회적 압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웠는지, 아니면 어떠한 사회적 지배
연합(ruling coalition) 세력의 이해관계에 의해 국가 행동이 제약받았는
지 등에 그 분석의 초점을 맞추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제적 수준
에서는 우선 체제적 요인들로서 당시 국제체제의 극성(polarity), 열강간의
세력균형 및 동맹관계 등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국제체제의 안정성/불안정성
정도가 일본의 대외정책에 미친 영향을 살펴볼 수 있고, 또한 당시 국제체
제에서 주요 강대국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구미(歐美)국가들, 특히,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등과의 양자적 관계들이 당시 일본의 외교정책의
방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분석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위
에서 언급한 세 가지 분석수준의 변수들 모두 일본의 대외행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예상되나, 이 논문에서는 그 중에서도 개인적 수준과
국가/사회적 수준의 변수들에 더 많은 분석의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특히
개인적 수준의 변수 중에서는“이념”의 변수와 국가/사회적 수준의 변수 중
에서는“체제유형”(regime type)의 변수에 강조점을 두고자 한다.8)
최근 국제정치이론 연구에서 국제정치 현상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이념
80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1호
17) 월츠(Waltz 1959)는 국가간 전쟁 원인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개인, 국가, 국제체제라
는 세 가지 분석수준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로즈노우(Rosenau 1966)는 한 국가의
대외행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개인, 역할, 사회, 정부, 국제체제라는 다섯 가지의 분
석수준을 제시하고 있다.
8) 이 논문에서는 이념의 변수와 체제유형의 변수를 동시에 강조하고 있지만, 그 분석에 있
어서는 이념의 변수를 가장 중요한 변수로 취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정치체제는 기본적으로 권위주의 체제(authoritarian regime) 혹은 소수지배
형 체제(oligarchy)로 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주요 정책결정자들의 세계관, 국가이익
(idea)9)이라는 변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 구성
주의(constructivism)의 논의에서는 이념과 관련한 신현실주의
(neorealism)적 시각에 강한 비판을 제기하면서,10) 개별 국가의 정체성
(identity), 행위, 이익관계등은 물질적인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들의 공유된 이념들에 의해 사회적으로 구성(socially constructive)
되어진다는 것이다(Wendt 1999). 기존의 외교정책연구에 있어서도 주요
정책결정자들의 이념과 외교정책과의 인과관계(causal relationship)를 설
명하려는 시도들이 많이 있어왔다.11) 주요 정책결정자들의 개인적인 이념은
그의 세계관을 결정하고, 이러한 세계관에 따라 국가이익관이 형성되고, 국
가의 대위행위는 이렇게 형성된 국가이익관에 따라 결정되는 경향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최고 정책결정자의 이념은 외교정책 결과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게 된다. 외교정책 결정과정에 있어서 이념을
포함한 개인적 차원의 변수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논의들은 공통적으로 국가
라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하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외교정책 결정과정에 있어서 이러한 개인(정책결정자)의 이념 변수는 국
가/사회적 차원의 변수인 체제유형(regime type)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
지고 있다.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그 정치체제가 권위주의적일수록, 최고
정책결정자들에게 재량권(discretionary power)이 많이 주어질수록 개인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81
11) 관, 국제질서관 등의 형성과정과 변화 등이 전전 일본외교정책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의 연구목적상, 전전 일본 정치체제 성격에 대해
필요에 따라 부분적으로 언급이 되겠지만, 이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전전 일본 정치체제의 권위주의적 성격에 관한 연구는 각주6)에서 언급된 저
서들을 주로 참고하길 바란다.
9) 본 연구에서는 이념(idea)을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신념들(beliefs)로 정의한다. 이러
한 신념들은 개인들이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도덕적 원칙들로부터 시작해서 과학적
지식에 대한 구체적 적용(핵무기, 배아복제, 유전자 조작 등)까지 포함한다.
10) 신현실주의(neorealism) 논의에 있어서는 개인들?특히, 최고 정책결정자들?의 이념
이나 신념이 한 국가의 대외정책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즉, 무정
부 상태라는 국제체제 하에서‘합리적으로’행동하는 국가는 주요 정책결정자들의 개인
적인 이념이나 신념들과는 상관없이‘물질적인’것으로 규정되는 힘(power)이나 이익
(interest)의 극대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신현실주의에 따르면, 국가지도자가 자신의
이념이나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매우 비합리적인 것일 수 있다.
11) 여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문헌들은 다음과 같다. George et al. 1956; Jervis 1976;
Larson 1985.
적 성향이나 이념이 외교정책에 미치는 영향은 커진다. 즉, 독재체제나 권
위주의체제에서는 독재자들의 개인적인 판단과 결정에 대한 국내적 제약,
즉 조직화된 반대세력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개인적 의견이나 성향이
외교정책 결정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젠슨 1997, 34). 키
신저(Kissinger 1966, 503~529)는 카리스마적인 리더쉽을 가진 정치체
제 유형에서 개인적인 성향이나 신념 등이 외교정책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윌컨펠드(Wilkenfeld 1968, 56~69)는 내부적으
로 정치적 분쟁이 있을 때 국가지도자가 대외분쟁을 야기하여 국민의 관심
을 내부의 문제에서 외부의 문제를 돌리려 한다는 이른 바“관심전환 가설”
(diversion hypothesis)을 증명하면서, 정권의 기반이 개인의 권위에 의
존하고 있는 정치체제(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서 보다 유용한 정책수단으로
쓰이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논문에서는 위에서 언급된 이론적 논의들을 바탕으로 해서 전전 일본
에 있어서 주요 정치지도자들 사이의 외교이념?국제주의와 아시아주의?
논쟁들을 살펴봄으로써, 특정한 외교이념이 어떤 국내외적 조건 하에서 어
떠한 과정을 걸쳐서 외교정책으로서 현실화되었는가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
논문에서는 권위주의적인 정체를 가지고 있었던 전전 일본에서는 주요 정책
결정자들의 외교이념들이 당시 일본 외교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본 연구에서 구체적으로 살펴 볼 가설들은 다음과 같다.
82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1호
가설 1: 전전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일본의 국력이 구미국가들보다 열등하
고, 국력을 향상시켜 이들을 따라 잡아 동등한 일원이 되어야 한
다는 인식을 가지게 될 때, 구미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국가목
표와 국가이익을 달성하고자 하는 국제주의 외교이념이 지배적으
로 등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설 2: 전전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일본의 국력이 구미국가들과 대등하
고, 일본을 둘러싼 국제환경이 비우호적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될
때, 구미국가들에 대항해 아시아지역에서의 배타적인 지배권 혹
은 영향력 확보를 통해 국가목표와 국가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아시아주의 외교이념이 지배적으로 등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2. 국제주의와 아시아주의 외교이념에 대한 정의
일반적으로 외교정책 결정과정에서 정치세력들간 국가이익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물질적, 인적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그 우선순위를 둘러싸고 경합
또는 논쟁이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전전 일본외교에 있어서도 일본국가가
처한 국내외적 환경 속에서 대외적으로 국가자원을 어떤 목표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사용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정치세력간 첨예한 논쟁과 대립
이 있었다. 전전 일본외교에서는 바로 국제주의와 아시아주의라는 외교이념
12)을 둘러싸고 이러한 정치적 투쟁이 벌어졌다. 전전 일본외교에 있어서의
외교이념 논쟁의 흐름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여기서
는 국제주의와 아시아주의라는 외교이념에 대한 개념정의를 먼저 내리고자
한다.
1) 국제주의
전전 일본에 있어서의 국제주의 외교이념이란 일본이 서양의 문명과 문물
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구미국가들과의 협조와 정치적 이해를 통해 국가목
표와 국가이익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메이지 초기 많은 정치지
도자들과 지식인들은 국제사회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 즉“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표현되는 전형적인 약육강식의 세계로 인식하였다.
초기 메이지정부의 이데올로그(ideologue)로서 널리 알려진 이노우에 고와
시(井上毅)는“동양의 遺利財源은 바로 호랑이 무리 사이에 놓여진 고기덩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83
가설 3: 전전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지닌 외교이념들은 전전 일본의 권위
주의적 정치체제의 특성에 기인해 전전 일본의 외교정책에 결정
적인 영향을 미쳤다. 즉, 메이지정부는 국내적 제약--국민들이나
제사회세력들로부터의 반대--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
에,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한 정치지도자들의 외교이념들이 외교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12) 이 논문에서는 외교이념의 개념을“한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대외행위를 하는데 있어서
의 전반적인 목표와 수단에 대한 일련의 일관된 시각”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외교이념
의 개념은 이삼성(1992, 121~122) 교수의 외교이념 정의에 많이 의존하였다.
어리와 같다”고 말하면서, 일본이 먹지 않으면 다른 열강이 먹기 때문에 일
본이 먼저 먹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天兒慧1995, 26). 따라서 메이지
지도자들은 일본이 가능한 한 빨리 서구국가들의 문물을 배워 익혀 이들과
대등한 국력을 배양하여야만 힘의 논리에 의해 철저히 지배되는 냉혹한 현
실 속에서 국가의 독립과 자주성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들
은 정치적, 경제적 근대화를 통해 국력을 신장하고, 국제사회에서 서구열강
들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이들과의 협조와 정치적 이해가 필
수적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전전 일본외교에서 나타난 국제주의적 외교이념은 다시‘현실주의적’국
제주의와‘자유주의적’국제주의로 나눌어 볼 수 있다. 현실주의적 국제주
의 외교이념은 일본이 국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서구열강들의 협조와 정치
적 이해를 바탕으로 해 아시아에서 자신의 영토적, 경제적 이익을 획득해
나가고자 하는 시각을 말한다. 이러한 현실주의적 국제주의 외교이념에 충
실했던 메이지 지도자들 중에서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이토 히로부
미(伊藤博文)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이 주도했던 초기 메이지정부
의 외교정책은 이러한 현실주의적 국제주의 외교이념이 지배적으로 나타났
다. 반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외교이념이란 일본이 아시아에서 군사력에
의존한 영토적 팽창을 통해 권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서구열강들과, 그리고
중국과의 협상과 협력을 통해서 경제적 이익들을 우선적으로 추구하여야 한
다는 시각을 말한다. 이러한 외교이념의 대표적인 경우로서는 1920년대 시
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 외상(外相)의 미일협력을 바탕으로 한“경제중
심외교”가 있다.
2) 아시아주의
전전 일본 지도자들은 대체로 이웃 아시아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낙
후되어 있고, 서양의 위협에 의해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
고 보았다. 이들은 이러한 아시아관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분류
의 아시아주의적 외교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1) 구미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신속히 아시아를 일본의 지배(支配) 하에 둔다(日
本孟主論).
84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1호
(2) 구미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아시아와의 연대·협력(連帶·協力)을 강화한다
(아시아連帶論).
위와 같이, 전전 일본에 있어서 아시아주의는 (1)일본맹주론과 (2)아시
아연대론을 핵심적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일본맹주론은 1873년 정한론(征韓
論)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이타타게 다이스케(板垣退助) 등
에 의해 제기되었고, 그 후 1930년대에는 일본 군부에 의해 주도적으로 주
장되었다. 흑룡회(黑龍會), 현양사(玄洋社) 등과 같은 민간 우익단체들도
일본맹주론의 핵심적인 옹호자들이었다. 반면, 아시아연대론은 자유민권운
동(自由民權運動)을 이끌었던 민권파(民權波), 즉 재야 정치인, 지식인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아시아연대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들은 고노 히로나카
(河野廣中), 우에키 에모리(植木枝盛), 나카에 초민(中江兆民), 다루이 도
키치(樽井藤吉), 오이 겐다로(大井憲太郞) 등을 들 수 있다.
사실, 아시아주의 개념은 전전 일본에 있어서 많은 분류의 사람들이 매우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기 때문에, 아시아주의에 대한 일률적인 정의를 내린
다는 것은 어렵다.13) 따라서 아시아주의라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집단이나
개인에 의해서 정립된 사상이나 행동강령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일본인들의
아시아에 대한 전반적인 사고의 큰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전전 일본외교에 있어서 아시아주의의 외교이념의 발전 추세를 보면, 메이
지 초기 일본의 안보를 위해 아시아의 지배, 특히 조선반도에 대한 지배권
을 확보하고자 하는 전략적 사고에서 아시아에서 일본의 특수한 지위와 권
익을 유지하고, 이를 위협하는 서양에 대항하기 위해 아시아와 국가들과의
협력과 제휴를 강조하는 아시아연대론으로 발전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
서는 일본맹주론과 아시아연대론을 포괄하는 보다 큰 규모와 실천적인 의미
를 지닌“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대(大)아시아주의 외교이념이
등장하게 된다. 대아시아주의는 일본의 팽창주의적 아시아주의와 대일본주
의(大日本主義)라는 국가주의 사상이 결합하여 나타났고, 아시아대륙 침략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85
13) 전후 일본 아시아주의 연구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1977, 14)
는 아시아주의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시아주의란 다양한 개성을
지닌 사상에 의해 하나의 경향으로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독립해서 존재하는 개념
은 아니다. 그러나 (다양한 아시아주의적 사상들 사이에) 적어도 아시아연대(침략을 수
단으로 하는 것이냐 아니냐를 묻는 것을 떠나서)의 사고를 내포하고 있는 점밖에는 공
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
을 위한 이념적 기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아시아주의 외교이념도‘현실주의적’아시아주의와‘자유주의적’아시아
주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일본맹주론은 현실주의적 아시아주의 논의를
대표하고 있고, 아시아연대론은 자유주의적 아시아주의의 논조를 잘 나타내
고 있다.
III. 전전 일본 외교이념의 형성과 전개 (1868년~1945년)
1. 메이지유신 직후 국제주의와 아시아주의 외교이념의 등장과
대립
240여년간의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시대동안 쇄국(鎖國)정책을 취해
온 일본은 1853년 미국 페리(Matthew Perry) 제독의 흑선(黑船)에 의
해 마침내 개국(開國)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즉, 일본의 개국과 근대화
는 구미열강의 압력에 대한 대응으로서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서
양의 충격에 위기감을 느낀 바쿠후(幕府)의 젊은 지사(志士)들은 구미열강
들의 국력의 위세에 크게 자극받아 쇠락하는 바쿠후체제를 붕괴시키고 새로
운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유신(維新)을 단행하여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 젊은 지사들의 대서양관(對西洋觀)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국가체제 형성과 외교노선 확립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우선 메이지유신 지도자들의 대서양관은 다음과 같은 상반된 이미지를 가지
고 있었다. 첫째, 서양이란 일본국가의 존속을 위태롭게 하는 매우 현실적
인 위협의 대상이었다. 1858년에 체결된 미·일수호통상조약은 일본이 근
대적인 형식에 기초해 처음으로 외국과 맺은 국제조약이었으나, 사실상 영
사재판권을 제외하는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인정하여야만 하였고, 동시에
관세자주권(關稅自主權)을 상실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그 이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으로부터도 이와 비슷한 조약 체결
을 강요당했던 것 그 자체가 일본에게는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14)
86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1호
14) 5개 열강들과 맺은 조약들을“安政五條約”이라 불리며,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정부는
불평등조약 개정을 조선에 대한 지배권 확보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외교목표로 삼았다.
둘째, 서양은 일본에게 위협의 대상이기도 하였지만, 경외(敬畏)의 대상,
즉 일본이 배우고 따라가야만 하는 대상이기도 하였다. 많은 수의 메이지유
신 지도자들이 그들의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직접 구미대륙으
로 건너가 서양사회에 대한 직접체험과 유학을 시도하였다. 1860년에 미국
으로 유학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63-4년에 이탈리아에서 유학하
였던 伊藤博文과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또
한, 메이지정부가 들어서자마자, 岩倉具視를 단장으로 하고, 키도 고인(木
戶孝允), 大久保利通, 伊藤博文등을 부단장으로 하는 구미사절단을 조직하
여, 메이지정부 지도자들은 약 2년에 걸쳐 구미선진국을 시찰하였다. 이들
의 눈에 비춰진 서구사회의 자유와 개방성, 그리고 근대적 공업, 과학기술,
국가체제는 동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15)
당시 국제정세는 제국주의적 서구열강들이 급속히 동아시아로의 진출을
시도하고 있었던 형세였다. 긴박한 국제환경 속에서 메이지 일본의 국가지
도자들이 상정한 최대 국가목표는“구미열강을 따라잡아 어깨를 나란히 한
다”라고 하는 일본을 서구국가와 대등한 근대적인 초일류국가로 건설하는
것이었다. 초기 메이지정부의 중심인물이었던 大久保利通은 생애를 통해 그
자신이 지향했던 일생의 목표는 “皇國을 세계 第一等强國으로 건설하
고.....皇威를 해외에 떨치게 하는 것,”즉, 황위발양(皇威發揚)으로 정하
였다고 한다(佐藤誠三郞1974, 35).
서양의 충격으로부터 위협감과 경외심을 동시에 받았던 메이지정부 지도
자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국가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구미사회의 정치, 경
제, 법률, 군사, 사상을 포함하는 서양의 근대성(近代性)을 먼저 배워야 한
다고 생각했다. 大久保利通은“政府의 體裁에 관한 建白書”(1869년)에서
“작금 세계 각국에서 全盛하는 정치를 베풀어 文明開化의 교육을 실시하여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주장하면서,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佐藤誠三郞1974, 59~60). 大久保利通을 포함한 대부분의 메
이지유신 지도자들에게는 근대국가체제 확립과 경제적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의 후진성에서 벗어나“입구(入歐),”즉, 일본이 서구적 근
대화를 이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16) 또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87
15) 이와쿠라 사절단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久米邦武1978를 참조.
16) 탈아론(脫亞論)의 제창자였던 福澤諭吉(2002)은 일본이 아시아의 전통과 풍습에서 벗
한 그들은 이를 위해 낙후된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서양을
배우고, 이들과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1869년 岩倉具視는 국제
관계에 대해 세계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머리카락이 붉고 눈이 푸르
더라도 모두 같은 사람으로....함부로 야만인으로 경멸할 것이 아니라, 모
름지기 친구로서 예를 갖추어 대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국제평등 내지
국제협조적 관념을 나타내었다(이리에 1993, 32). 그의 이러한 생각은 당
시 일본사회에 깊게 박혀 있던 양이론(攘夷論)을 비판함과 동시에, 일본 스
스로도 한 국가로서 세계에서 평등한 지위를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였으며,
그렇기 위해서는 서양사회를 인정하고, 이들과 협력하여야 한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서양에 대해“위협과 경외”라는 이중적 이미지를
가졌던 메이지정부 지도자들은 매우 현실주의적이면서도 서구열강들과의
협력을 강조하는 국제주의적 이념을 바탕으로 외교정책을 수행해 나갔다.17)
초기 메이지정부의 당면한 최대의 외교과제는 불평등조약의 개정이었다. 그
결과, 일본은 단기간에 불평등조약을 철폐하기 위해서 부단한 외교적 노력
을 기울이게 되었다. 1871년 이와쿠라 구미사절단은 서구국가들과 불평등
조약의 개정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정열적으로 펼쳤으나, 오히려 구미열강
들로부터 냉대와 무시를 당하였다. 1876년 테라시마(寺島) 외상(外相)도
서구열강들과 관세자주권 회복을 위한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이번에도 성과
는 거의 없었다. 1879년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외상은 관세자주권보다
영사재판권의 철폐 및 법권회복을 위한 교섭을 시작하였으나, 이 역시 서구
열강들의 비협조로 성공하지 못하였다.18) 그러나 당시 재야의 민간(民間)세
88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1호
17) 어나지 못하는 한, 국가의 독립은 유지될 수 없고, 오직‘서양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일본을 안심하고 보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7) 메이지정부의 국제주의적 외교가 현실주의적이라고 함은 바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일
본이 살아남는 길은 국력을 배양하여 서구열강들과 같은 강대국이 되는 것밖에 없다고
단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 비로소 서구열강들이 동조하여, 1897년
에 드디어 일본은 외국인에 대한 법권(法權)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서구열강
들이 일본의 요구에 대해 타협적으로 나온 이유는 일본이 근대국가로서 발전하는데 성
공한 측면도 있었지만,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와의 대결에 일본을 이용하려는 서구열강,
특히 영국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이기도 하였다. 러일전쟁이후 1911년에 일
본이 관세자주권을 회복함으로써 비로소 불평등조약 개정이라는 외교적 목표는 완전히
달성되었다.
력들은 이러한 정부의 조약개정 협상을 망국외교 또는 굴욕외교라고 비난하
였다. 또한 그들은 서양을 따라 배워 대국(大國)인 체 하지 말고, 조선과
청국의 개혁을 지원하고 이들과 연대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에 대해“위협과 경외”를 동시에 느낀 메이지 유신
지도자들의 대아시아관은 어떠했을까? 그들 대부분은 대체로 아시아를 일본
의 지배 대상으로 여겼다. 이들의 이러한 대아시아관은 그들의 사상적 스승
이었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吉田松陰은『幽
囚錄』(1854년)에서“조선을 떠맡아 다스리고...북으로는 만주땅을 할양하
고, 남으로는 대만, 呂松諸島를 획득하여, 점차적으로 (일본의) 진취적 세
력을 보여주어야 한다....국력을 기르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조선, 중
국, 만주를 반드시 복종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天兒慧1995, 49).
이러한 대아시아관의 핵심은 서양에 대항하기 위하여 아시아에서 일본이 군
림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吉田松陰의 이러한 생각은 메이지정부 지도자들
사이에“정한론(征韓論),”이라는 대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였다.19) 당시 정한론을 주장한 西鄕隆盛와 板垣退助는 러시아가 일본에
대한 침략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이러한 러시아의 침략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본으로서는 조선과 대만을 병합하여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岡義
武1978, 165). 그러나 이들은 정한론 논쟁에서 근대국가체체 확립을 우선
시 한 大久保利通, 木戶孝允,20) 伊藤博文등에게 패배하여 하야(下野)하였
고, 그 후에 그들은 제야세력인 민권파(民權派)를 이끌게 되었다.
메이지 정부 초기 아시아주의 외교이념은 주로 당시 제야세력이었던 민권
론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다. 자유민권운동가였던 植木枝盛은 자유평등의 원
리를 국제관계로까지 확대하여 아시아민족이 진실로 평등한 입장에서 연대
하면서 구미열강에 대항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나아가 세계 여러 민족들
의 평등, 자유독립, 항구평화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만국공의정부론(萬國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89
19) 최초의 정한론자는 吉田松陰의 직계 제자인 키도 고인(木戶孝允)이었다. 그는 메이지유
신 직후‘內治의 수단으로서의 外征’을 주장하였다. 그 이후 본격적인 정한론은 1873
년 부산에 파견된 일본정부 관리에 대한 조선의“비례”(非禮)에 의해 야기된 감정적인
대립이 발단이 되었다. 이에 대해 西鄕隆盛와 板垣退助등과 같은 정한론자들은 조선의
무례함에 대해 매우 단호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0) 그는 처음에는 정한론을 주장하였지만,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서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伊藤博文등이 주장한 내치 우선론에 동조하였다.
共議政府論),”을 주장하기도 하였다(竹內好1977, 9). 또한 大井憲太郞은
『大東合邦論』(1885년)에서 서양의 침략에 대항해 평등의 입장과 정신 하에
서 한일(韓日) 양국이 하나가 되어 새로운 연방국가, 즉 대동국(大東國)의
수립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민권파의 아시아연대론 역시 정한론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일본의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한 강권적인 아시아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일본의 아시아주의 사상이 가지는 한계였다. 즉, 민권론자들의
아시아주의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장은 아시아의 우등국(優等國)이자
맹주(孟主)로서의 일본이“뒤쳐진 아시아”에 도움을 주자고 하는 우월의식
이었던 것이다. 대동합방론을 주장한 大井憲太郞도“조선의 풍속은 야만이
극도로 달한 아프리카와 비슷하다. 그 刑은 三族에 미치는 것과 같은 야만
국”으로 묘사하고 있고,“ 우리들은 나라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강하게 해 주는 것이다”라고 역설하고 있다21) (竹內好1977, 30). 아시아
연대론의 이념을 현실에 적용하고자 노력하였던 樽井藤吉도 “우리 일본
이...모름지기 선구자가 되어, 그리하여 友國의 迷夢을 타파하고, 이들을
富國開明의 땅(域)으로 인도해야만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竹內好1977,
115). 메이지 초기 민간에서는 현양사(玄洋社)와 같은 우익단체들은 노골
적으로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가 되어 아시아를 지배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메이지 유신 초기 아시아주의는 현양사의 주장과 같은 일본맹주론과 민권
파 지도자들의 아시아연대론이 서로 합류하기도 하고, 이반하기도 하면서
아시아주의 외교이념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아시아주의자들은 서
양에 대항해 동양의 단결을 강조한 점에서 정부의 국제주의적 외교정책과
정면으로 대립하였다(이리에 1993, 42~43). 이와 같이 메이지 초기부터
정부의 국제주의 외교이념과 민간의 아시아주의 외교이념 사이의 대립은 근
대 일본외교의 하나의 큰 특색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국제주의와 아시아주
의 대립과 논쟁은 전후 일본외교에서도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현재 일
본 정치지도자들 사이의 국가전략 논쟁의 시발점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90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1호
21) 아시아국가와 협력과 협조, 대등한 관계를 주장한 민권파의 아시아주의자들도 당시 메
이지유신 지도자들의 생각과 같이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
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보통 아이러니가 아닐 수가 없다.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 메이지정부의 현실주의적 외교정책과 국제주의 외교이념
(1890년대~1905년)
초기 메이지정부 지도자들 사이에는 근대국가체제 확립과 경제적 근대화
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이러한 국내적 목표들을 달성할 때까지는
외정(外征)을 자제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890년대에 들
어서게 되면서, 어느 정도 국내적 목표들을 달성하였다고 생각한 메이지정
부 지도자들에게는 이제 또 다른 주요 외교과제 중에 하나였던 주변 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 확보의 문제가 매우 현실적인 외교과제로 떠오르기 시
작하였다.
1890년대의 국제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때부터 이전에 주로 동
남아시아와 중국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던 서구열강들이 동아시아로 본
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아
시아에서 단순한 영토의 확보뿐만 아니라, 해외시장 개척, 이권 획득, 군사
요충지 확보라는 적극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급변하는 국제정세 하에서, 메이지정부는 서구열강들의 제국주의적 팽창에
대응해 아시아지역에서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을 외교적 급선
무로 삼게 되었다.
1890년 제1회 제국회의(帝國會議) 개회식 연설에서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수상은“일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主權線인 國境을 수
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위해서는 필히 利益線, 즉‘주권선의 안위(安
危)에 깊은 관계를 가진 지역’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주장하였다
(上山春平1972, 62; 井上淸1966, 20). 당시의 이익선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본과 접하고 있는 조선을 의미하였고, 조선을 보호
한다는 것은 당시 조선의 종주국(宗主國)을 자처하였던 청국과 일전(一戰)
을 불사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1894년 조선에서 발생한 동학혁명이 발단이
되어 일본은 드디어 조선반도에서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청국과의 전쟁에 돌
입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주권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익선,
즉, 조선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다는 일본의 군사안보적 이익을 최우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91
선시 한 매우 현실주의적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22) 이 당시 일본의 현실
주의적 외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일본 지도자들의 국제정세에 대한 관
념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伊藤博文은 서구열강들이 국력의 신장을 위해
치열한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이러한 경제전쟁의 중요한 장(場)은 아
시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본도 서구열강들의 외교노선에 공
동보조를 맞추어 이들과 협조해서 아시아에서 일본의 권익을 확충해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1897년 당시 프랑스 주재 일본 공사(公使) 구리노
신이치로(栗野愼一郞)는 본국 정부에“열국의 관심이 아시아 특히 중국에
있고, 조만간 그들이 (연합하여) 중국에 경제적으로 개입, 결국 청의 내정
에 간섭하게 될 것이다....일본은 이에 대응책으로써....중국 내지(內地)에
부설, 개척해야 할 철도 및 공업 등에 일본의 자본을 투자하거나 또는 중국
에 대해 일본의 채권을 만들어 둠으로써 중국에 대한 일본의 실력의 토대를
만들어 두고, 후일 중국문제가 발생할 때 일본은 구주 제(諸)강국의 연합정
책에 참가하여야 한다”라고 보고하였다(이리에 1993, 48).
이러한‘이익선의 확보’라는 생각은 청일전쟁 전후부터 러일전쟁까지 일
본의 핵심적인 외교목표가 되었다. 즉, 이 기간동안 일본은 근접지역에 대
한 우위를 확보하거나, 제삼자(第三者)에 의한 지배를 저지함으로써 아시아
에서 일본의 이익선, 즉 세력권(sphere of influence)을 확보하고자 하였
다. 즉, 정부 지도자들은 일본이 열강의 일원이 되어 국제정치의 권력정치
(power politics)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곧 국익을 지켜 나가는 것
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일본은 구미열강들과의 외교적 마찰을 최
대한 줄이면서, 가능한 이들과 정치적 협조관계를 맺어 일본의 세력권을 인
정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메이지정부 지도자들은 서구열강들이 아시아에서 일본의 세력권
을 어느 정도 인정해 줄 것인가에 대해 매우 민감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에서의 자신의 이권과 지배권 확보가 서구열강들의 일본
에 대한 경계심을 자극하여 이들이 공동으로 일본에 대해 간섭하는 것을 가
장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우려는 곧 현실로 다가왔다. 청일전쟁
92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1호
22) 당시 山縣有朋은 만약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를 완공할 경우 조선의 독립도 크게 위협
받게 되어 일본의 쓰시마 제도의 주권선은‘머리 위에 칼을 들이대는’것 같은 위협을
당하는 형세가 될 것으로 예측했다(이리에 1993, 46).
이후 일본이 중국의 랴우뚱반도(遼東半島)를 점령하자, 독일, 러시아, 프랑
스의 삼국간섭(三國干涉)이 이루어졌다.23) 삼국간섭은 당시 국제주의적 일
본외교에 있어서 매우 큰 좌절이자, 서구열강들의 간섭을 받는 최초의 사건
이기도 하였다.
삼국간섭이후 일본은 아직 서구열강에 비해 국력이 크게 뒤지는 상황에서
이들과 대결하여서는 자신 안전과 이익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러
한 현실인식 하에서, 일본은 서구열강들의 정치적 이해와 협조를 바탕으로
한 국제주의 외교노선에 기초해 스스로의 세력권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일본은 조선반도에서 독점적 지배권을 서구열강들로부
터 정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다각적인 외교를 펼쳤다. 그 결과, 일본은
1902년 제1차 영일동맹(英日同盟)을 성사시켰으며, 1905년 미국과 카츠라
(桂)-태프트(Taft)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제2차 영일동맹을 맺어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영국으로부터 다시 한번 더 확인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러시아였
다. 1903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기 위한 대러시아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이 확립된다면, 이는 분명히
남만주와 연해주에 있어서 러시아 이권을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러시
아는 일본의 요구를 들어 줄 수가 없었다. 1903년 4월 山縣有朋, 伊藤博
文, 가쓰라 다로(桂太郞), 고무라 주다로(小村壽太郞) 등과 같은 정부 지도
자들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 확립에 있어서 어떤 양보도 없다고 결정함으로
써, 러시아와 일전을 불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이리에 1993, 51).
1890년대 이후 민간의 아시아주의자들은 정부의 현실주의적인 외교정책
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더욱 더 높였다. 특히, 그들은 일본 정부가 서구열
강과 협조하여 중국에 대한 이권과 영향력 확보를 지향하고 있는데 대해 강
하게 반발하였다. 민권파의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는 일본이 솔선해서 청
일 양국간 제휴를 모색하여 서구열강에 대항하면서 아시아의 평화를 수립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93
23) 당시 서구열강들 사이에 어느 한 국가의 완전한 우위를 저지하려는‘세력균형’을 향한
지향성(指向性)은 매우 강하였다. 즉, 이러한 현상유지 원칙은 당시 동아시아뿐만 아니
라, 유럽대륙, 아프리카, 중동에서의 열강들의 세력관계에도 적용되고 있었다. 청일전
쟁 이후 일본의 랴우뚱반도의 할양은 이러한 서구열강들의 세력균형정책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였다(이리에 1993, 49).
여야 한다고 하는 청일제휴론(淸日提携論)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민간 우
익단체인 흑룡회(黑龍會)는 일본이 서구열강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적극적
으로 행동하여 중국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확립해야 한다는 일본맹주론을 주
장하였다(이리에 1993, 54). 그러나 일본맹주론이나 아시아연대론의 공통
된 입장은 일본이 아시아의 일원으로서 서양의 아시아 진출을 저지하고 아
시아인들의 각성에 기여해야 하며, 일본의 지도 아래‘아시아인에 의한 아
시아’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890년대부터 아시아주의적 주장들은“대일본주의(大日本主義),”
라는 국가주의적 사고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를 가지기 시작하였다.24)
특히, 청일전쟁이후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던 일본사회에서는 일본 국력의
신장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로서 대일본주의의 사상과 일본맹주론의 주장이
결합되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95년경 중국에서 일본의 대륙침략을 준
비하기 위해 중국에서 대륙낭인(大陸浪人) 생활을 하고 있었던 아라오 세이
(荒尾精)는“興亞의 대업을 성취하는 기초를 구축하여야한다....우리나라는
동양의 선구자로서 淸韓兩國을 부축하고 인도하여...항상 동방을 선도하
여....명예있는 힘찬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보아야 한다”라고 말하였다(升
味準之輔1988, 45). 荒尾精의 흥아론(興亞論)은 청일전쟁 직후 아시아대
륙으로 진출하여 일본의 우월성과 특수성을 떨치고자 했던 대일본주의가 아
시아주의와 하나가 되는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대일본주의적 발
상에 기초하여 드디어 일본은 아시아문명을 뛰어넘는 일본적 가치(價値),
주의(主義), 행동양식(行動樣式)을 과장하고 미화해, 그것을 외부로 확대하
여 이웃 아시아 국가들에게 강요하게 된다.
3. 외교정책으로서의 아시아주의의 대두와 일본의 제국주의 외교
(1905년~1910년대)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공략하는 적극적
94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1호
24) 대일본주의란 일본 본토 밖으로 영토와 세력범위를 확대하여 일본의 국위를 떨친다는
사상으로서, 경제력과 군사력을 사용한 해외식민지 개척을 적극적으로 시도할 것을 주
장하였다.
인 제국주의적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일본이 러일전쟁이후 본격적으로
대륙진출을 도모하면서 서구열강들과의 이권경쟁에 뛰어들게 된 것은 러일
전쟁이 가져다 준 결과들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러일전쟁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일본외교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첫째,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남만주, 남사할린, 조선
반도 등에서 영토와 이권을 획득하여 서구열강과 같은 강대국 대열에 명실
공히 합류하게 되었다. 둘째, 일본의 승리는 그동안 서구열강들에 대한 열
등감에 빠져 있던 일본인들에게는 무한한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던 반면에,
서양국가들 사이에 일본에 대한 시기심과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것은 중국 본토에 있어서 이권을 둘러싸고 일본과 서구열강들 사이에서
앞으로 일어날 갈등과 마찰을 예고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일본과 서구
열강들의 이익관계가 이제 아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러일전쟁 직후 伊藤博文과 같은 메이지정부 지도자들은 여전히 서구열강
들과의 협조를 통해 러일전쟁이후 일본이 획득한 이권들을 확보해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이 당시 일본정부 지도자들이 외교적으로 가장 두
려워했던 것은 바로 일본이 국제사회(그 당시 서구열강들과의 관계)에서
‘고립’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구미사회에서는 배일풍조(排日
風潮)가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었고, 만주에서의 일본의 이기적 행위는 서구
국가들의 일본에 대한 경계심과 의구심을 더욱 깊게 하였다. 따라서 이 당
시 일본이 당면한 국제정치적 현실과 서양과의 협조를 기조로 하는 국제주
의 외교이념 사이에는 심각한 모순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국제정치 현실과 국제협조주의적 외교노선 사이에 불일치
가 발생하기 시작하자, 일본정부 내에서는 아시아대륙에서의 일본의 지위와
이권을 본격적으로 확장하자는 주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외상
(外相)이었던 小川壽太郞은“최근 열강들은 극동 방면에서 각기 자신의 이
권 확장에 급급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도 그들에게 뒤지지 않도록 만주, 조
선, 연해주 지역에서 일본의 이권을 확장하여 국력의 발전을 도모하여야 한
다”라고 주장하였다(이리에 1993, 60). 小川壽太郞의 생각은 일본이 서구
열강들과의 협조하는 것을 우선시 하는 것보다는 일본의 상공업을 발전시키
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아시아대륙으로의 진출을 도모하여야 한다는 것이
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95
일본 육군은 대륙진출에 있어서 보다 적극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러
일전쟁 당시 천진군(天津軍) 사령관이었던 센바 다로(仙波太郞)는 만주에
“신일본(新日本),”을 세워야 하고, 이를 위해 청국의 위안 스카이(袁世凱)
정권과 협력하여 청일제휴를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당시 베이
징 공사관 주재 무관이었던 아오키 노부스미(靑木仙純) 대좌는 만주의 방위
는 일본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이리에 1993, 62).
이러한 육군의 국방관은 관동군(關東軍)의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해서
일본방위체제의 일환으로서 만주를 직접 지배하여야 한다는“만주경영”(滿
洲經營) 구상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러일전쟁 직후 육군참모본부 작전
과 장교였고,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던
1927년에 외상(外相)이 된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는 일본이 섬나라의 위
치를 벗어나 대륙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남만주와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도 일본의 세력을 확장하여야한다고 주장했다(이리에 1993, 63). 즉, 이
당시 일본 육군의 국방사상은 서양과의 협조보다는 아시아국가로서의 일본
의 특수성과 동양성(東洋性)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러한 육군의 국방사상에
서는 아시아주의와 대일본주의가 결합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25)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서구열강들의 관심은 자연히 유
럽에 집중되었다. 또한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발발하여, 러
시아는 내정문제에 골몰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급변은 일본에게는
대륙진출을 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호기(好機)를 제공해 주었다. 일본은 영
일동맹에 의거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독일의
조차지를 점령하였고, 적도 북방의 독일령 태평양 군도를 모두 점령하였다.
한편 1914년 일본은 중국에 대해 산동성, 남만주, 한예핑(漢冶萍) 탄광 등
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위와 이권을 포함하는“21개조 요구”를 중국에게
가하였다. 21개조 요구는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이후 혼란이 가중된
96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1호
25) 육군의 대륙진출론은 점차로 강경한 대외행동, 즉 아시아대륙으로의 진출을 주장하였
던 일본 우익단체들에게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우익단체로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현양사(玄洋社)와 흑룡회(黑龍會)가 있었다. 현양사는 西鄕隆盛의 정한론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자들에 의해 1881년에 설립되었고, 이들은 1884년 갑신정변과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하여 조선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려는 음모에 참가하
였다. 1901년에는 그들 중 정부의 고위층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와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는 흑룡회를 창설하였다.
중국에 대해 본격적인 침략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일본의 이러한 요구는
마침내 1919년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에서 열강들의 승인을 받게 되었다. 또
한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5대 강대국의 일원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을 결산하는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 참가하게 되어서, 서구
열강들로부터 명실공히 세계의“일등국(一等國),”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
로서“皇國을 世界第一等의 强國으로 만든다”는 것을 목표로 해서 국가형
성에 매진하였던 메이지 원로(元老)들의 염원이 거의 반세기의 세월이 지나
서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되었다.
1910년대에 있어서는 국제주의 외교이념과 아시아주의 외교이념이 현저
하게 대립하는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에서는 일본정부의 외교노선이 현실
과 많은 괴리감을 보이고 있는데 대한 반동으로서 보다 배타적이고 일본중
심적인 아시아주의 사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아시아주의 외교이
념은 육군의 대륙진출론과 결합하여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정부내 주요 지
도자 사이에서도 배타적 아시아주의적 외교이념을 공공연히 지지하는 경우
가 많이 생겨났다. 당시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던 국제정세는 정
부지도자들 사이에 동양과 서양은 근본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동기를 부여하였다.26) 즉, 일본이 아시아의 지도자가 되어 아
시아를 서양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아시아의 번영과 평화를 책임져야 한
다는 주장이 구체적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당시 해군장교였던 가토 간지
(加藤寬治)는“일본 민족은 동아시아의 구세주가 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라
고 주장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山縣有朋은 대전 종결
이후 백인종이 다시 제휴하여 아시아로 돌아와 공세를 취할 것을 우려하면
서, 이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과 중국은 협력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이리
에 1993, 84). 1930년대 수상이 되었던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는 그
의 논문“영미 본위의 평화주의를 배격한다”에서 영국인과 미국인들이 말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97
26) 당시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국문제를 둘러싼 마찰이 있었고, 미국과 영국간 형성된 긴
밀한 관계가 영일동맹을 약화시키기 시작하였고, 미국 서부에서 배일풍조가 고조되고
있었다. 특히,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서 일본이 국제연맹 규약에 인종평등에 관한 조항
을 제안하였으나, 서구열강들이 이를 거부하자, 많은 일본인들은 이를 서양인들의 동양
인들에 대한 인종차별로 받아들였다. 이 사건은 항상 서구사회에로의 편입을 시도하고
서구문명을 따라가고자 했던 일본인들에게는 엄청난 굴욕감과 좌절감을 동시에 안겨주
었다.
는 평화란 단지 그들의 이익에 유리한 현상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
고 주장하였다. 즉, 그는 서양에서 가장 강력하고 풍요로운 두 국가들, 영
미에 의한 현상유지를 거부하고, 현상 변동을 시도하는 것은 아시아인의 자
기방위라고 합리화하였다(이리에 1993, 84). 이러한 近衛文磨의 생각은 당
시의 고조 되어갔던 배타적 아시아주의적 사고의 경향을 가장 극명하게 표
현하고 있다.
정부 내부와 사회 일각에서 아시아주의적 외교이념이 고조되어갔던 것도
사실이지만, 여전히 서구열강과의 협조를 일본 외교의 기조를 삼아야 한다
는 생각도 존속되었다. 특히 외무성은 서양 국가들과의 이해와 제휴 아래
중국과 그 밖의 지역에서 일본의 권익을 지켜 나가려는 국제협조적 외교노
선을 견지하면서, 아시아주의를 표방하면서 일본의 독자적 길을 가려는 군
부와 대립하였다(이리에 1993, 85). 또한 1910년대부터 심화되기 시작한
미일 경제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룹도 있었다.27) 특히, 평민재상(平民
宰相)으로 인기가 높았던 하라 다카시(原敬) 수상과 당시 외무차관이었던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 등은 긴밀한 미일 경제관계는 일본의 국력의
신장, 특히 경제력의 발전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原
敬은 1918년 수상이 되자, 대미협조와 경제외교를 최우선 외교방침으로 삼
으면서, 대외 무역과 투자를 위한 평화로운 국제환경 조성이야말로 일본의
국가이익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28)
4. 국제주의 외교의 부활과 그 한계 (1920년대)
제1차 세계대전 종결이후 1920년대 후반까지는 국제적으로는“평화와 협
98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1호
27) 1910년대 들어서 일본의 대미수출은 격증하여, 제1차 세계대전동안 일본의 대미 수출
은 4배로 증가하였으며, 대미 수입도 5배로 증가하였다. 또한 주로 영국에 의존하고
있었던 자본 수입도 점차로 미국으로 전환되고 있었다(이리에 1993, 82). 이때부터 일
본경제는 미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28) 이러한 原敬의 외교방침에서는 전후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수상의 외교노선의
원형(原型)을 찾아 볼 수 있다. 요시다 수상은 경제발전에 전념하기 위해서 안보와 국
제문제에 있어서 미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일명“요시다 독트린”
으로 전후 일본을 전쟁의 폐허에서 오늘날의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건설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조”의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일본 국내적으로는“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가 고양된 시기였다. 이러한 국내외적 환경 속에서 대외팽창주의적인 아시
아주의적 주장들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가 한층 더 힘을 얻게 되었다.
당시 민간사회에서는 일본의 대륙 팽창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게 일
었다. 1920년대 자유민권운동의 지도자이자 사회주의자였던 요시노 사쿠조
(吉野作造)는『對支問題』(1930년)에서 일본이 중국에서의 행동에 대해 진
실로 반성하고, 중국에서의 반일의 표적은 일본의 군벌(軍閥), 관료, 재벌
(財閥)의 연합으로 대표되는“침략적인 일본”으로 향해 있으므로, 일본국민
은 무엇보다도 이들의 대중국정책을 견제하여 진정한 평화적인 모습을 이웃
국가의 친구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野原四郞
1966, 81~82). 吉野作造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일본 사회주의자들의 대아
시아관, 즉 아시아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조를 대변하고 있었다. 또한
자유주의적 관점에서의 호전적인 아시아주의적 사상과 대일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은“소일본주의(小日本主義),”를 주장한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을 들 수 있다.29) 石橋湛山은 1921년 여름『東洋
經濟新報』사설“大日本主義의 幻想”에서 대일본주의란“일본인이 백인과
함께 되어 백인과 같이 支那人, 臺灣人, 朝鮮人을 압박해 먹이감로 삼으려
고 하는 태도”라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松尾尊兌1984, 108~114).
이러한 국내외적 분위기 속에서 1920년대 일본의 외교는 다시 서구열강
들과의 협조를 강조하는 국제주의적 노선으로 회귀하였다. 앞서 살펴 본대
로, 原敬, 幣原喜重郞등과 같은 다이쇼 시대의 일본정부 지도자들은 외교
전략상 타국을 도발하여 긴장을 증대시키는 팽창주의적 정책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들은 일본과 미국이 대립관계에 들어가는 것
은 국가에 불이익이 된다고 하면서, 대미협조와 대중국정책의 전환을 적극
적으로 주장하였다. 또한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내대신(內大臣)을 지냈
던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顯)는“현재 국정의 급선무는 재정의 견실을 도
모하여 경제발전을 촉진하여 국부(國富)를 크게 증진하는 것에 있다....헛
되이 영토획득이라는 명분에 현혹되어, (대외팽창을) 경솔히....강행하는
것은 지금 무엇보다도 피해야만 한다”라고 주장하였다(細谷千博1975, 13).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99
29) 전전 일본외교에 있어서 대일본주의와 소일본주의의 논쟁에 관해서는 야가사키 2001,
233~255를 참조.
1920년대 일본외교를 주도한 사람은 幣原喜重郞이었다. 그는 1924~27
년과 1929~1931년 두 차례에 걸쳐 외무대신을 역임하는 동안 제1차 세계
대전이후 급변하는 국제질서에 보조를 맞추면서 다른 국가들과의 공존공생
의 정신으로 평화적으로 국가이익을 추구해나가야 한다는 외교노선을 견지
하였다. 그의 이러한 외교노선의 기초는 다음과 같은 그의 세계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1921년 워싱턴회의 총회에서“이제 국민적 복지를 파멸
시키고 국제평화에 유해한 해군 군비경쟁은 과거의 것이 되었다”라고 말했
다. 1924년 외무대신으로 취임해서는“이제 권모술수적인 정략 내지 침략
적 정책의 시대는 완전히 갔고, 외교는 正義와 平和의 大道를 걸어야 한다”
라고 선언했다(이리에 1993, 95). 그의 이 같은 발언에서는 이제 열강간의
국제협조에 바탕으로 한 진정한 세계평화가 도래했다는 다분히 이상주의적
이고 자유주의적인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 일본과 서구열강, 그리고 중국 사이에는 해결
되지 않은 많은 현안들이 있었다. 일본은 1차대전 당시 중국에서 획득한 영
토와 이권을 둘러싸고 미국, 영국과 외교적 마찰을 겪고 있었다. 또한 태평
양에서 미일간 극심한 해군 군비경쟁이 벌어져, 양국간 군사적 분쟁이 일어
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1921년 11
월 이해 당사국들은 워싱턴회의를 개최하였다. 幣原喜重郞는 일본정부의 전
권대사(全權大使) 자격으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워싱턴회의에서는 미
국, 영국, 일본의 주력함 보유 톤수를 5:5:3으로 결정한 5개국조약이 체결
되었다. 또한 4개국조약을 통해 영일동맹이 폐기되었고, 9개국조약에서는
중국에 대한 영토보전과 문호개방, 기회균등 등이 새롭게 명문화됨과 동시
에, 일본은 산동성 일대의 구독일의 이권 등을 포함하는 대중국 특수이권을
포기하는 것을 약속하였다.
幣原喜重郞가 워싱턴회의에서 대폭 양보하게 된 것은 그 나름대로의 현실
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 첫째, 그는 서태평양에서 해군력 우위를 확보하
기 위한 미국과의 건함경쟁은 일본에게는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안겨 줄 수
있고, 미국과 군비경쟁을 자제하여 서태평양에서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는
것이 군사적으로도 유리하다고 믿었다. 둘째, 일본이 영일동맹 파기에 동의
하게 된 것은 미국의 영일동맹에 대한 반대가 큰 원인이었다. 또한 미국과
의 분쟁시 당시 영미간의 친밀한 관계를 고려해 볼 때, 영일동맹이 효과적
100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1호
으로 작동하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셋째, 일본이 중국에서의 자신의
특수이권을 포기한 것은 당시 일본의 대중국정책이 미국과 심한 마찰을 일
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정치적, 경제적으로 현
실주의적인 고려를 거듭한 결과의 산물이기도 하였다(이리에 1993,
94~95). 워싱턴회의 이후 幣原喜重郞가 주도하는 일본의 외교는 미국, 영
국과 협조관계를 유지해서 일본의 모든 국력을 경제발전에 집중시키고자 하
였던 경제중심주의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였다. 그는 경제력이야말로 국력
의 원천이며, 해외시장 확보와 확장만이 국가이익을 증진하는 길이라고 믿
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幣原喜重郞의 외교는 군부의 격심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
다. 특히, 국방문제를 외교의 최우선과제로 삼고 있었던 군부는 여전히 미
국과 소련을 가상적국으로 삼고 있었다. 군부는 幣原喜重郞의 국제협조를
바탕으로 한 경제우선 외교에 대해“연약외교(軟弱外交),”로 강하게 비판하
면서, 일본의 안보는 영미와의 협조나 경제적 상호의존성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독자적으로 국내외적 개혁을 단행하여 일본 주도의 만
몽지역을 포함하는 자급자족체제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0) 즉, 군
부의 입장은 장차 미국과의 전면전을 대비하고, 나아가 일본이 초강대국으
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영토(lebensraum)를 충분히 확보하여야 한다는 것
이었다. 이러한 군부의 주장은 당시 민간 우익단체들과 다수의 국민들로부
터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31)
1929년에 시작된 세계대공황은 대미협조와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기반으
로 한 幣原喜重郞외교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대공황의 여파에 따라
모든 국가들이 강력한 보호주의 무역정책을 쓰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국제
협조를 통한 경제적 이익 추구라는 幣原喜重郞의 경제외교의 정당성은 완전
히 사라지고 말았다.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해서 만몽지배를 주장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101
30) 특히 해군은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미국이 일본의 주력함 톤수의 제한을 강력하
게 요구한 데 대해 강하게 반발하였고, 일본대표단이 미국의 압력에 의해 대폭 양보하
게 되자, 幣原喜重郞외교에 분노를 터뜨리게 되었다. 이때부터 해군은 장차 태평양에
서 미국과의 대격돌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31) 당시 많은 일본국민들은 중국과 관련한 국제정세가 거의 미국과 영국의 이익에 따라 움
직이고 있으며, 幣原喜重郞외교는 그 틀 안에서 영미를 추종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불
만을 가지고 있었다.
군부가 득세함에 따라, 국제협조를 바탕으로 한 국제주의 외교는 완전히 붕
괴되었고,“ 새로운 아시아”를 건설하기 위한 일본 군국주의의 움직임은 본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5. 대아시아주의의 등장과 태평양전쟁으로의 길(1931년~1945년)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해서 태평양전쟁 종결 때까지 일본은 본격
적으로 군국주의 노선을 채택하였고, 그 결과 대륙과 태평양에서 전쟁의 소
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 일본의 국제주의적 외
교이념은 완전히 상실되었고, 군부의 대륙진출론이 일본외교에서 우위를 점
하게 되었다. 1931년 12월 幣原喜重郞가 외상에서 물러나고 이누카이 쓰요
시(犬養毅) 내각이 성립한 이후부터는 일본정부의 외교정책은 군부가 해외
에서 일으킨 군사행동을 그저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게 되었
다. 따라서 1930년대 이후 일본의 외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일본의
외교와 정치를 주도하게 된 군부의 전략적 사고를 먼저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주사변의 주모자였던 이사하라 간지(石原莞爾)는 그의 논문“世界最終
戰爭”에서 세계는 결국“서양을 대표하는 미국과 동양을 대표하는 일본과의
爭覇戰에 의해 결정된다”는“최종전쟁론(最終戰爭論),”을 주장하였다(天兒
慧1995, 90). 그는 세계최종전에 대비하기 위해 일본은 만몽을 지배하여
국방의 안정을 도모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주사변의 또 다른 주역이
자 관동군 참모였던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는“만몽의 農産은 일본
국민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에 족하고....만몽의 각종 기업은 현재의 일본
실업자를 구하고 불황을 타개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경제적 이익도 제시하였
다(이리에 1993, 110). 이러한 군부의 전략적 사고는 만몽지역을 일본의
국운과 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거점으로 간주하여 이 지역에 대한 절대적
인 지배권을 확보하여야 한다는 만몽론(滿蒙論)에 기초하고 있었다.
당시 군부의 국방사상은 민간의 우익세력들로부터도 널리 지지를 받았다.
1936년 육군의 청년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였던 2·26사건에 사상적 토
대를 제공해 주었던 기타 잇끼(北一輝)는“國家改造法案大綱”(1926년, 제3
판)에서“우리 일본은 약 50년간 2배의 인구증가율에 따라 100년 후에는
102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1호
적어도 2억4~5천만명을 부양해야만 하는 대영토를 가질 수 있어야한
다....높고 원대한 아시아문명을 발전시키는데 솔선할 수 있는 자신의 정신
을 가다듬어 國家改造를 완성함과 동시에, 아시아연맹의 의로운 깃발을 휘
날리며 곧 다가올 세계연방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국가개조와
더불어 아시아로의 확장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高橋正衛1989, 10). 北一
揮의 이러한 주장에서는 단순한 일본의 팽창주의적 사고뿐만 아니라, 패도
(覇道)의 서양문명을 초월하고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아시아문명 창조라는
대아시아주의적 꿈을 꾸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일본에서 국제협조주의적 외교사상이 좌절되고, 군부의
대아시아주의적 국방관이 전면으로 부상하게 된 연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국내적 조건들을 한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당시 군부의
정치적 독단과 대아시아주의적 국방관을 견제할 수 있는 국내적 조건들이
존재하였다면, 일본을 패망의 늪으로 몰고 간 군국주의의 탄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사회는 총체적 위기를 맞이
하였다. 1929년 세계대공황 발생이후 전전 일본에 있어서 최대의 경제 위
기가 닥쳐왔다.32) 이러한 경제적 위기는 극도의 사회불안을 야기하여, 군부
를 위시한 민간 우익세력들의 국가주의와 대일본주의적 주장들이 무능하고
부패했던 정부와 기존의 정당정치에 대해 극도의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일
반 국민들에게 호소력을 지니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국내적 불안
속에서, 일본국민들 중에서는 국내정치와 국제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
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강하게 나타났다.
특히, 청년 장교들의 정부정책과 기존의 정당정치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103
32) 당시 일본에서는 1927년 지방은행의 도산으로 시작한 금융공황이 발생하였고, 세계대
공황이 발생한 1929년부터는 이전 시기와 비교해 국내생산이 30~70%, 수출은 37%,
수입은 40%가 감소하였고, 실업자 수는 수십만명에 이르렀고, 귀농자(歸農者)를 포함
한다면 300만명 이상이 사실상의 실업상태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만주사변이 일어났
던 1931년에는 대흉작이 발생하였고, 1933년에는 대지진이 일어났고, 1934년에는 냉
해에 의해 사상 초유의 대흉작이 계속되었다. 1934년의 대흉작이 일어났을 때는 동북
지역에 위치한 여섯 개 현(懸)에서 가출한 여자들이 여공, 게이샤(藝者), 창녀, 작부,
여승(女僧) 등이 되었는데, 그 수가 약 5만명을 헤아려, 이 수치는 전년도와 대비해 약
4배에 다다랐다고 한다. 또한, 농산물의 가격은 생산비 아래로 내려가 농촌도 극도로
피폐한 상황에 놓여져 있었다(天兒慧1995, 86~87).
가 높았다.33) 다수의 청년 장교들은 이러한 일본사회의 총체적 위기와 만연
한 사회적 부패를 일소하고, 황도(皇道)의 높은 도덕적 목표를 사회적으로
구현함과 동시에 일본의 전통적 가치를 회복하려는 국가주의적 국가개조운
동을 전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이들은 北一揮등과 같은 민간의
극우적인 국가주의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하였고, 국가개조 개혁을 실행하기
위해 군민합동 단체를 결성하기도 하였다34) (비즐리 2000, 215). 또한 그
들은 대외적으로는 일본 육군은 일본의 신비로운 국체(國體)의 수호자로서,
그리고 정의로운 전쟁을 통해 공산주의와 서구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세계를
구하도록 운명지어진 것으로 생각하였다. 특히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로서
부패한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미국에 대항하여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비즐
리 2000, 216).
이러한 배경 하에서, 당시 육군성, 해군성, 참모본부, 그리고 관동군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해서 1930년대 두 번의 군
부 쿠데타(1931년 3월 쿠데타 사건과 1936년 2·26사건)와 정치인, 고급
관료, 재벌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테러들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치적 테러
속에서 일본의 정치질서는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정당 지도자들의
권위는 암살과 위협에 의해 약화되었고, 국회와 정당정치의 역할도 무력해
졌다. 즉, 국내외적 위기 상황 속에서 이들의 극단적인‘구국적 충성심’을
통제할 수 있는 인물도 사회적, 정치적 제도들도 없었다. 따라서 1930년대
에 있어서는 일본의 대외정책 결정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국내정치에서의
104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1호
33) 당시 육군 장교들이 정치 및 사회현실에 극도의 불만을 품게 된 것은 그들의 성장배경
과 그 것에 의해 형성된 가치관에 의해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25년 가토(加藤)
내각의 행정개혁이후, 육군의 장교들 다수가 상인, 소지주, 하급관리의 가계(家系)로부
터 등용되었다. 또한 그들은 무능하고 부패한 정당정치가들에 의한 문민통제로 인해 군
의 위신이 저하되었고, 정부재정 삭감으로 인해 자신들의 직업이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
하였다. 또한 부유층, 특히 도시 부유층이 향유하는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은 자신들의
낮은 급여, 스파르타식 훈련, 그들 대부분의 출신지인 농촌, 중소도시 지역의 삶과는
너무나 대조를 이룬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이들은 그들만의 특유한 국
가에 대한 충성심과 정의감을 가지면서, 기존의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와 사회에 대해서
참기 어려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비즐리 2000, 215).
34) 이런 단체중 가장 유명한 것은 육군 중좌 하시모토 긴고로(橋本欣五郞)가 설립한 사쿠
라카이(樓會)였다. 1930년 9월에 설립되어, 한창 때에는 100여명의 회원을 보유하였
는데, 모두 육군 중좌 이하의 계급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육군성, 참모본부, 그리고 도
쿄(東京) 근교 주둔 부대에서 선발되었다.
중심도 민간 정치지도자들로부터 군부 지도자들에게로 급격하게 옮겨갔다.
1932년 이후부터는 내각의 수상(首相)들이 대부분 군부에서 나왔다는 사실
은 이러한 정치현실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35)
한편으로는, 이러한 군부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언론이나 국민여론도 부
재하였다. 정치권력을 억제하고 견제하기 위해서는 일반국민들의 정치참여
가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국민들의 정치참여는 주로 선거와 여론형
성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데, 당시에는 일반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정치
에 참여하는 것은 극단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36) 일반 국민들의 정치참여
가 매우 제한적인 상황에서 정치권력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은
여론 형성을 담당하는 지식인들, 즉 여론 선도층과 언론이 담당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平民新聞』,『 社會新聞』,『 新紀元』등과 같은 사회
주의적 신문이나,『 東洋經濟新報』와 같은 자유주의적 신문을 제외하고는 언
론이나 지식인들 중에서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적 논조를 펼치는 경우는 극
단적으로 적었다. 오히려『國民新報』(德富蘇蜂이 주간(主幹)이었음)와 같은
대부분의 주요 신문들은 어용신문화하여 정부 내에서의 대외팽창을 주장하
는 강경파들의 주장을 외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거나 동조하는 역할을 주
로 하였다(天兒慧1995, 97). 즉, 당시 일본에서의 팽창주의적 대일본주의
의 앙양(昻揚)과 일반 여론의 움직임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
다.
또한 당시 일본 언론들의 국가주의적이고 대외팽창주의적 선동에 단순히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105
35) 1930년대 군부 출신의 수상들은 해군대장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1932~34년), 해군
대장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1934~36년), 육군대장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
1937년), 육군대장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1939~40년), 해군대장 요나이 미쓰마사
(米內光政, 1940년 상반기), 육군대장 도조 히데키(東英機, 1941~44년), 육군대장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郞, 1945년 여름) 등이다. 1932년 이후 히로타 고키(廣田弘毅,
1936~37년),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郞, 1939년),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
1937~39년, 1940~41년) 세 차례만 제외하고 전원 군부 출신 수상들이 재임하였다
(비즐리 2000, 230~231).
36) 1889년 중의원 선거법이 공포되어 처음으로 시민들의 선거에 의해 의원들이 선출되었
다. 그러나 당시 이 법은 선거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어서 유권자는 전인구의
1.24%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1925년 3월 大正데모크라시의 분위기 속에서 처음으
로 보통선거법이 제정되었으나, 동시에 노동정당, 사회주의정당 등을 탄압할 목적으로
같은 회기내 치안유지법도 통과되었다. 또한 당시 일반국민들의 정치의식 수준도 상당
히 낮아 선거를 통해 정당정치제도를 확립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고 한다(오카 1996,
48, 78~91).
영합하고 추종하였던 신민적(臣民的)인 국민의식도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일본이 표면적으로는 산업화를 이룩했으나, 일반 서민들은 여전히 고달픈
삶을 살고 있었다.37) 당시 궁핍한 삶을 연명하고 있었던 다수의 일본국민들
도 자신의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해외 식민지 확장을 심정적으로 지지하였
다. 따라서 해외 영토팽창의 욕구는 메이지유신 이래 정치권력자, 군인, 여
론 지도층들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새로운 삶과 직
장을 찾아서 조선이나 대륙의 신천지로 이주하고자 하는 상당한 욕구를 가
지고 있었다(天兒慧1995, 99). 따라서 1930년대 들어서 일본 대외정책이
국제주의적 외교노선을 포기하고, 급격하게 아시아에서 군국주의 노선을 채
택하게 된 요인을 일부 군부세력의 일탈행위만으로 규정하는 것은 당시 일
본사회의 특질을 너무 단순화시키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일본이 급속하게
군국주의화하고, 마침내 미국과의 전쟁의 길로 치달은 데는 1930년대 이후
일본이 직면하고 있었던 다양한 국내외적인 조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
다고 볼 수 있다.
1930년대 초반의 국제환경도 일본이 대아시아주의를 표방하면서 중국대
륙으로의 군사적 진출을 본격화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당시 소련은 볼
셰비키 혁명이후 국내 산업화와 내정문제를 우선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
국에서 일본군과의 충돌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영국도 동아시아정책에 있어
서 주로 경제문제를 중심으로 하였고, 일본과의 분쟁에 말려들기를 원치 않
았다. 미국은 처음에는 일본의 침략을 비난하고 국제연맹을 통한 제재를 생
각하였지만, 일본을 상대로 하여 싸울 정도로 극동문제를 절실하게 생각하
지는 않았다. 즉, 각국들은 내정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동아시아에 개입하여 일본의 아시아대륙 침략을 견제하기까지
는 이르지 않았다(이리에 1993, 117). 일본은 이러한 서구열강들의 동아시
아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아시아에서 군국주의적 팽
창을 적극적으로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106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1호
37) 산업의 비약적 발전의 이면에는“여공애사(女工哀史),”라든가 노동쟁의(勞動爭議)가 잇
따랐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특수가 가져다 준 호경기에도 불구하고, 1918년에는 전
국적인 쌀소동이 일어나 테라우치(寺內) 내각이 붕괴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927
년부터 시작한 금융공황, 1929년의 세계대공황에 이은 심각한 경제불황에 따라 서민들
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1933년 2월 일본은 만주국(滿洲國)의 불승인을 문제 삼아 국제연맹에서
탈퇴하였는데, 이것은 다른 국가들이 중국에서 일본의 특수한 지위와 이권
을 인정해 주지 않을 경우, 일본은 이제 독자적인 길을 찾아가겠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천명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국제연맹 탈퇴이후 일본외교를
주도했던 히로다 고키(廣田弘毅) 외상은 일본은 중국에 대해 서구국가들과
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아시아의 평화와 질서유지는 일본의 사명이
고, 일본의 중국에 대한 목표에 대해 서구열강들이 개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38)(이리에 1993, 115). 이러한 廣田
弘毅의 외교노선은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특수한 위치를 강조하는 대아시아
주의가 마침내 일본의 외교정책에 현실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후부터 미국은 동아시아문제에 적극적으로 개
입하기 시작하였고,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한 제재수단을 강구하기 시작하였
다. 이제 미국은 일본이 대외정책을 수행해 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
돌이 되었다. 반면,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면 될수록, 일본의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져갔다. 왜냐하면 만몽지배를 통한 자원과 영
토의 확보라는 자급자족(自給自足)의 목표는 여전히 달성되지 못한 가운데,
면화, 철, 석유, 구리 등과 같은 주요 원자재 대부분은 미국, 그리고 영국
과 네덜란드의 동남아 식민지로부터 수입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일본의 동남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수록, 다시 미
국, 그리고 서구열강들과의 충돌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지고 있었다.
1938년 11월 近衛文磨수상은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국제질서,“ 동아신질
서(東亞新秩序),”건설 구상을 발표하였다. 그는“동아시아에서 신질서 건
설의 염원은 일본의 건국정신에 있으며, 이를 완성하는 것은 현대 일본국민
들에게 부과된 책무이다....이 신질서 건설은 일만지(日滿支) 3국이 손을
잡고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 걸쳐 상호연관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다”라고 밝혔다(이리에 1993, 124). 이러한 정책은 바로 일본이 중심이 되
어 동아시아에서 서양세력을 몰아내고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건
설하겠다는 의지를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일본의 동아신질서론에 자극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107
38) 이를 아모성명(天羽聲明)이라 부른다.
받은 미국은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1938년 이후 중국에 대한 경제적 지원
을 강화하기 시작하였고, 일본에 대한 수출금지품목 리스트를 확대해 나갔
다. 이와 같이 미국의 압박이 한층 더 강화되자, 일본은 동남아 자원의 확
보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1940년 봄 나치 독일이 유럽에서 파
죽지세의 승리를 이어가자, 일본은 이것을 호기로 판단하고 동남아시아에
대한 본격적인 남방공략을 개시하였다.
1940년 8월 近衛文磨수상은 드디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구상을 발표하였다. 대동아공영권은 1938년 동아신질서의 일본, 만주, 중
국 3국의 지역통합 개념에다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포함하는 보다 확대된
아시아 지역통합의 개념이었다. 당시 일본국민들은 대동아공영권을 서양과
대립하고 있는 일본의 자급자족체제를 완성하는데 있어서 모든 문제들을 일
거에 해소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이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러한 대동아공연권 구상은“팔굉일우(八紘一宇),”즉, 일본민족의 사명과
일본정신의 진수(眞髓)를 전면에 내세워 서양에 대항하는“일본적인”새로
운 아시아질서를 구축하겠다는 것이었다.
1941년에 들어서자 미일관계는 최후를 맞이하였다. 일본의 남진정책이
계속되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佛印)까지 점령하자, 마침내 미국은 미국내
일본의 자산을 동결하고, 석유와 군수물자 수출을 금지하였다.39) 아직 네덜
란드령 인도차이나(蘭仁)의 석유와 고무가 확보되지 않은 시점에서 미국의
대일본 석유 금수조치가 단행되자, 일본은 더욱 더 남방공략을 강화하였다.
이제 미국의 대아시아정책과 일본의 대아시아정책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1941년 육군과 해군 수뇌부에 의해 결정된
“帝國國策遂行要領”에서는“帝國은 自存自衛를 완수하기 위해 대미(영국,
네덜란드) 전쟁을 불사한다는 결의 하에 대략 10월 하순을 목표로 전쟁준
비를 완결”한다고 결정하였다(이리에 1993, 134). 당시 참모본부도“미국
의 대일정책은 현상유지의 세계관에 입각하여 세계제패를 위해 일본의 발전
을 저지하려는 데 있으며, 일본과 미국의 정책은 근본적으로 상반되어 양국
108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1호
39) 미국이 일본에 대해 이러한 초강경수를 두게 된 것은 그 당시 미국의 전략적 판단에 기
인하고 있다.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전체주의적 독재자들을 저지
하지 못한다면, 미국대륙 양면에서 이들의 침략에 직면하게 되어 자신의 안보도 크게
위협받게 될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을 하였던 것이다.
의 충돌이 결국 전쟁으로까지 발전하는 것은 역사적 필연성을 가진다”라고
주장하였다(이리에 1993, 135). 이제 남은 것은 미국과의 전쟁이었고, 마
침내 1941년 12월 진주만에 대한 선제공격을 단행하게 되었다.
일본은 자급자족의 국방체제라는 개념에다 동아시아의 안전은 일본의 책
무라는 대아시아주의적 이념을 가지고 미국과 맞섰다. 그러나 이러한 대아
시아주의적 외교이념은 결국 일본을 국제적 고립에 빠트렸고, 미국이라는
초강대국과의 전쟁에 이르게 하였다. 전전 일본에 있어서의 대아시아주의
외교이념은 많은 아시아인들과 자국민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의 참화를
안겨다준 채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Ⅳ. 결론: 21세기 일본외교의 방향성에 대한 함의(含意)
이 논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이후부터 태평양전쟁 종결까지 일본외교에
있어서 국제주의와 아시아주의라는 주요 외교이념들의 흐름을 분석해 보았
다. 또한, 전전 일본외교사의 시기구분을 통해 이러한 외교이념들이 어떤
주요 국내외적 요인들에 의해 지배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는가를 규명해 보았
다.
메이지유신이래 일본에 있어서는 일본국가가 처한 국내외적 조건들 속에
서 국가목표의 달성을 위해 국가자원을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사용할 것인
가를 놓고 주요 정치세력들 사이에 지속적인 논쟁과 대립이 있어 왔다. 이
러한 외교노선 논쟁은 국제주의 외교이념과 아시아주의 외교이념을 둘러싼
경쟁과 대립으로 나타났다. 메이지정부 초기부터 1920년대 말까지 일본 정
치지도자들은 일본의 국력이 아직 구미국가들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국력을
향상시켜 이들을 따라 잡아 동등한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
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당시 일본 정치지도자들은 구미열강들과
의 협력을 통해 국가목표와 국가이익을 달성하고자 하는 국제주의 외교이념
을 지배적으로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국제주의적 외교이념들은 당시 일본
외교에 충실하게 반영되어 나타났다. 반면, 1930년대 초부터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 정치지도자들은 일본의 국력이 구미국가들과 어느 정도 대
등하게 되었고, 일본의 국익달성을 위해서 이들과의 경쟁과 대립이 불가피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109
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일본 정치지도자들
사이에는 구미국가들에 대항해 아시아지역에서의 일본의 배타적인 지배권
혹은 영향력 확보를 통해 국가목표와 국가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아시아주
의 외교이념이 지배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전전 일본 정치지도자들
이 가진 외교이념들은 전전 일본의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의 특성에 기인해
국내적 제약으로 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전전 일본 외교정책에 결
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일본 외교정책에 관한 대부분의 기존 연구들에서는 전전 일본과 전후 일
본을 단절된 역사로 봄으로써, 일본 근현대 외교사를 통틀어 지속되고 있는
외교이념을 둘러싼 논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한계를 보여 왔다. 따
라서 본 연구는 이러한 역사적 관점에서 전전과 전후의 일본외교에 있어서
지속되고 있는 아시아주의와 국제주의 외교이념들을 결정하는 주요 변수들
을 파악함으로써,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본질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국가목표
와 국가이익관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전전 일본외교에서 나타난 외교이념에
대한 논쟁은 21세기 일본의 국가전략의 방향을 둘러싼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초 냉전체제가 붕괴되고 난 뒤, 극변하는 국
제정세 속에서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국가진로를 둘러싸고 또 한번 격심한
논쟁을 벌였다.40) 이들의 논쟁은 전전 일본외교에 있어서의 국제주의와 아
시아주의 외교이념 논쟁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小澤一郞와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의 보통국가론은 군사력 강화와 이를 통한
국제공헌 및 대미협조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메이지 원로들이 추구한
현실주의적 국제주의 외교노선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또한 宮澤喜一와
船橋洋一의 민간대국론은 군사력보다는 국제협조를 통한 경제력 발전을 강
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외교이념을 바탕으로 하였던
1920년대 幣原喜重郞의 경제중심의 외교노선과 닮아 있다. 반면 오늘날의
아시아주의자들의 논의를 살펴보면, 현재 대표적인 극우보수 정치인으로 유
110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1호
40) 탈냉전기 이후 일본내에서 국가진로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서는 다음의 저서들을 참조
하기 바란다. 김준섭 2000, 159~180; 윤정석 1998, 123~149. 또한 21세기 일본의
국가진로에 대한 각각의 주장들은 다음의 저서들을 참고하길 바란다. 일본총리실 산하
21세기위원회 2000, 221~252; 小澤一郞1993; 中曾根康弘2000; 船橋洋一1993;
マハティ-ル외 1994.
명한 石原愼太郞의 배타적 아시아주의는 미국을 배척하고 다른 아시아국가
들을 폄하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전 현실주의적 아시아주의 외교이념이었던
일본맹주론의 논의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일본이 아
시아에서 독자적인 경제협력체 건설을 통해 일본과 아시아국가들의 공동 번
영을 추구하자는 동아시아 경제협력주의자들의 논의는 전전 일본에 있어서
의 이상주의적 아시아주의 외교이념인 아시아연대론의 주장과 유사한 면이
있다. 전전 일본과 전후 일본에 있어서 이러한 외교이념을 둘러싼 논쟁들의
유사성을 정리해 보면 <표 1>과 같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이 출범한 이래 일본정부의
외교노선은 현실주의적 국제주의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지난 3
년 동안 일본은 국제정세 변화, 특히 북한의 미사일 및 핵 위협을 명분 삼
아, 테러지원특별법(2001년 11월), 유사관련3법(2003년 6월), 이라크부흥
지원특별법(2003년 7월)을 제정하면서 적극적으로 군사력을 증강시킴과 동
시에, 자위대의 국제적 역할을 확대하였다. 또한 2004년에는 미군지원 등
을 명분으로 자위대를 언제든지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에 파견할 수 있도록
하는 해외파병 영구법안(海外派兵永久法案)이 국회에 제출될 것으로 예상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45) 111
<표 1> 일본외교에 있어서 국제주의와 아시아주의 외교이념의 분류
현실주의
전전 전전
메이지정부 지도자(伊藤博文, 井上
馨, 岩倉具視, 大久保利通)
1930년대 일본 군부와 이들과 결
탁한 민간우익세력 (日本孟主論)
전후 전후
보통국가론(小澤一郞, 中曾根康弘)
현 일본정부의 신보수주의 외교
(小泉純一郞)
극우보수주의자(石原愼太郞)
자유주의
(이상주의)
전전 1920년대 경제외교(幣原喜重郞) 전전
민권파를 중심으로 한 이상주의
적 아시아주의자 (아시아連帶論)
전후 전후
요시다 외교 (吉田茂, 通商國家論)
탈냉전기 국제협조주의자(宮澤喜
一, 船橋洋一)
전후 동아시아 경제협력주의자
국제주의 아시아주의
고 있다. 小泉純一郞수상은 집권 자민당 창당 50주년인 2005년 11월까지
평화헌법 제9조 개정을 핵심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바
도 있다(동아일보 2003/08/25). 현재 일본은 긴밀한 대미협조를 바탕으로
해서 자신의 국제적 위상에 걸맞은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한국과 주변국들에서는 벌써“일
본의 재무장화,”“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일본정치의 우경화”등과 같은
상당한 우려의 목소리가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일본이 전전과 같이 다시 급격하게 팽창주의적 군국주의로
회귀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제2차대전 이후 일본은
성숙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어떤 특정
정치세력의 주장이나 외교이념이 일방적으로 일본사회 전체를 규정하거나
지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일본정치의 우
경화와 군사력 증대에 대한 우려를 완전히 거둘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왜냐
하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군정의 대일정책에서는 미완의 과제를 남겨두
었기 때문이다. 1940년대 말경 냉전체제가 심화되기 시작하면서 미군정 하
에서의 이루어진 역 코스(reverse course)정책들은 전전 일본의 전범자들
을 다시 일본 사회와 정치계로 복귀시키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즉, 일본은
전전 군국주의와 관련해서 완전한 인적 청산을 하는데 실패하였던 것이다.
전후 일본정치에서 기본적으로 보수우익 성향의 정치세력들이 주류를 이루
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으
로 국제환경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형성되고, 국내적으로 심각한 정치적, 경
제적 위기가 닥쳐온다면, 일본의 보수우익세력들이 전전과 같이 일본국민들
을 선동하여 주변국을 자극하고 위협하는 대외정책--물론 과거와 같은 영
토팽창을 위한 군국주의적 대외정책은 아니겠지만--을 펼쳐 나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향후 일본외교의 방향을 예측하는
데 있어서 가장 주목해야할 부분은 이러한 우익보수 성향의 일본 정치가들
의 대외적 야심을 일본국민들이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민주적 역량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112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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