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國, 韓美關係

분노하는 미국인들

이강기 2015. 9. 12. 08:48

*아래 글은 미국의 모순을 파헤친 책 <미국개조론>(한울 아카데미 간, 2007)에서 옮겨 온 것임.

 


 

분노하는 미국인들

 

 

   - 폴 스태로빈(Paul Starobin, 저널리스트, 네셔널 저널지 특파원, 비즈니스 위크 지 모스크바 지국장 역임. 신문, 잡지에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분노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은 사회일까? 그래서 우리는 간혹 이런 말을 듣는다. 지금 분노하고 있느냐? 그렇다면, 분노로 어지러워진 우리의 정신을 진정시키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도록 애쓰고 있는 저 성실한 전문가들과 상의해 보라. 약을 먹어보라. 요가를 해 보라. 뉴욕타임스의 오페드(op-ed: opposite editorial page의 약어, 신문 사설란의 맞은편 지면, 보통 서명이 든 특집 기사나 칼럼이 실린다) 칼럼니스트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Nicholas D. Kristof)는 우리들에게, “공공 서비스가 억제될까 봐” 우려하면서 “비판을 삼가 해 주도록” 간청한다. 그러나 미국이 자신의 분노를 터뜨릴 줄 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저 난폭한 벼락부자들이 영국 차(茶)를 보스턴 항구 바다 속에 쳐 넣지 않았다면, 미국은 아직도 영국 통치 아래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노예제도를 그냥 두자고 부추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신랄하게 비판을 가한 노예폐지론자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노예기반 경제에 빠져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 나는 논점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논점은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 분노의 존재는 사회의 도덕적 정치적 안녕 척도를 나타내 보일 수 있으며, 분노의 부재는 우려되는 자기만족 신호일 수 있다. 실제로 민주개념은 정확히 겨냥된 시민들의 분노가 적절하고 쓸모 있는 변화의 방편이 될 수 있는 명제에 기초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다. “올바른 일과 올바른 사람들에게 분노하는 사람들이.....칭찬받고 있다.” 고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4권에 썼다.

 

 칭찬도 있지만, 미국의 사회적 분노 수은주가 올라가고 있다. 아니, 수은주의 눈금은 예전에 10년간 분노했던 1960년대 수준엔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 정치, 그리고 문화적 풍조에 대한 분명한 경고가 있다. 분노의 조건을 간단하게 정의내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나는, 교통체증으로 인한 운전자의 짜증에서 일어나는 교통사고, 또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외야석 건달들이 뉴욕양키스 외야수들에게 음란한 노래를 불러 약을 올리는 일을 “사회적 분노” - 이를테면 “공공의 분노” - 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나의 관심사는 정치, 법, 경제, 그리고 문화 권력을 향한 분노에 있다. 다시 말해 그런 기관들이 추구하는 정책과 그 실행에, 그리고 그것들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에 있다. 이것은 대체로 반체제적인 분노다. 분노하기에 알맞은 표적에는 펜타곤, 공화당, 조지 부시, 다국적기업, 캘리포니아 자동차세 징수자, 그리고 2003년 11월에 동성연애에 대한 주 정부의 금지조치를 무효화 한 매사추세츠 주 대법원 판사들이 포함된다.

 

 동성애자끼리의 결혼 전망은 종교적 동기를 가진 보수 전통주의자들을 격노케 하고 있다. 제조업 근로자들은 부활하는 중국으로 인한 자기들의 실직에 분노하고 있다.(“격렬한 정치적 분노가 미국의 산업 심장지대에서 치솟고 있다.“고 무역관련 신문인 매뉴팩쳐링 앤 테크놀로지 뉴스가 최근 대문짝 같은 제목을 달았다.) 아마도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는 미군이 점령한 이라크에서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 사상자 수일 것이다. 이것이 워싱턴에 있는 정권 담당자들을 향한 반전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이 분노의 일부는 깊은 개인적인 비탄에서 나온 것이며, 이라크에서 죽은 미군병사들의 가족들이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국에 분노를 표시함으로써 공공연히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한다. ”대통령은 (병사들의 죽음에) 관심도 없습니다.“ 이라크의 한 경찰서 앞에서 저항군들의 총에 맞아 죽은 앨라배마 터스키기 출신 아브레이 벨 병장의 사촌인 베시 윌리엄스가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그를 TV에서 봅니다. 그는 이것을 말하고 저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눈물 한 방울을, 한 방울의 눈물을 보고 싶습니다.“               

 

 활기찬 선거철이 되면 입후보자들은 우리들 앞에서 온갖 약속을 늘어놓는데, 당선은 분노의 표적이 되는 것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그 분노를 타진할 수 있는 그런 후보자들에게로 돌아간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 선두주자였던 하워드 딘(Howard Dean)은 어느 때고 가장 가까이 있는 넓적다리를 덥석 물것처럼 보이던 사람인데, (부시, 당신이 이름 붙인 이라크 문제와 경제에 대한) 선거에 “내가 몹시 분노한다”는 것에 그의 캠페인을 집중했다. 다른 민주당 주자들도 분명히 하워드의 으르렁거리기를 모방하느라 최선을 다했다. 베테랑 여론 조사원인 존 조그비는 이렇게 말했다. “분노한 유권자는 물러나 있다. 그들은 안식일을 맞고 있다.” 조그비는 그 안식일이 1990년대 중반에서 출발한 경제 붐에서 시작되었다고 했지만 그 경제 붐은 거의 3년 전에 끝났고 그 이후 갈등이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테러위협에 분개하는 열성적인 지지자들의 경쟁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워싱턴 소재 퓨 연구소(Pew Research Center)의 최근 조사결과, “국가적인 단결이 2001년 9월11일의 비참한 사건에 대한 최초의 대응이었지만, 그런 정신은 정치적 대립과 분노가 일어나는 와중에 사라져버린 것”으로 나타났다.

 

 공공의 분노가 순환하면서 절정과 저점을 향하는 경향이 있긴 해도 그것의 다양성은 친 체제적인 여러 습관이 된다. 건국 이래 이런 종류의 분노를 내보이기에 알맞은 번식지로 자라온 나라인 미국에서 새로운 종류의 반체제적인 분노는 전혀 없다. 그러나 그런 분노가 미국의 일정한 유전코드의 한 부분이라고는 해도, 변화하는 정치 사회 문화 환경에 적응하는 여러 변종을 만들어내는 돌연변이가 발생한다. 대개 2003년 미국에서 일어난 여러 형태의 분노목록은 궁극적으로 중산층 사회로서의 국가 발전을 반영했다. 공공의 분노는 집의 평균 규모(그리고 거실 폭이)가 확대된다고 해서 일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새로운 표적들에 주의를 쏟을 뿐이다. 일부 분석가들이 주장하듯이 아마도 유복한 탈산업사회의 분노는 아무래도 경제적인 불만 보다는 문화적 정체성에 더 큰 원인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생계에 물질적인 위협을 느끼는 미국인들의 분노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목록상에서 적어도 세 가지 형태의 분노가 한동안 표준적인 유형으로서 경신돼 갈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미국의 대중영합주의는 대초원에서 태어났다. 19세기 농부들이 급격한 공업화 경제, 즉 착취자들의 화물을 실어 나르는 철도와, 농부들을 볼모로 잡고 있는 월스트리트 은행들의 거대하고 이질적이며 비인격적인 힘에 그들의 분노를 집중하여 투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형적으로 분노하는 근로자는 일시 해고된 공장 노동자들이다. 1998년 3월 이후 미국 제조업 분야에서 31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블루칼라 제조부문이 1980년대 초반과 유사한 인원감축을 경험했지만, 지금은 화이트칼라 부문에 그 같은 경향이 증가하고 있다. 보잉, 마이크로소프트, 아이비엠과 같은 대형 회사들이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과 엔지니어링 일자리를 인도, 러시아 같은 저임금 천국에 “아웃소싱”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세계에서는 예컨대 보험 클레임과 같이 일반적으로 디지털화 한 데이터를 취급하는 거의 모든 업무를 외국과 계약하여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대중영합주의적인 분노는 앞으로 아마도 워싱턴 주의 레드먼드와 코네티컷 주의 하트포드를 기지로 삼게 될 것 같다. 경제적인 두려움과 불안정에서 태어난 이 분노는 “구조적 변화”가 불가피한 역동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 현재로선 그 분노가 시카고에서 자동차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한 때 번성하던 공작기계산업의 중심지였던 일리노이 주의 록포드와 같은 장소에 집중돼 있긴 하다. 록포드 지역은 지난 30년 동안 1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으며, 모토롤라, 텍스트론 등 많은 기업에 근무하던 수많은 근로자들이 해고되어 일반적으로 임금이 더 낮고 의료보험을 위시한 사회보장 보험혜택도 없는 다른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미국은 지금 제3세계 개발도상국가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1944년 록포드에서 태어나 1993년 이래 이 지역을 대변해 온 공화당의 도널드 만줄로(Donald Manzullo) 의원의 말이다. 만줄로는 변호사이지만 그의 아버지는 기계공이었다. 그는 자신을 자유무역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저가 공산품을 쏟아 붓고 있는 중국을 비난하고, 선거구의 많은 유권자들과 함께, 인위적으로 달러화를 절하하여 수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선거구 주민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들은 일자리를 잃은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그 일자리가 해외로 가고 있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며, 중국인들이 그러한 저임금으로 일을 하여 미국에 피해를 주고 있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포기하고 있다. ” 그 분노는 불황에 빠져 있는 국내를 향해 쏟아내기 시작한다.

 

 대중에 영합하는 분노가 토해내는 고통이 분명히 리얼하긴 하지만, 그 분노를 쏟아낼 대상을 잘 못 고르는 경향이 있다. 탐욕스러운 철도가 농촌에 손상을 입혔지만 그러나 중류농민층을 파괴한건 아니다. 그들은 기계화에 희생되었다. 기계화로 미국 농업의 생산성이 크게 높아져 많은 소규모 농장들이 이른바 기계농과 같은 수량으로 옥수수를 생산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오늘날 제조업 근로자들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는 근본이유는 자동화가 공장의 생산성을 크게 개선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유럽과 일본에서 엄연하게 일반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더욱이 대중에 영합하는 분노는 바람직한 사회적 목적에 이바지하는 경향이 있다. 농민들의 대중영합주의는 반트러스트 정치운동과 진보시대에 훌륭한 정부개혁을 이루는 정치적인 계기를 가져왔다. 분노한 미국의 제조업 근로자들은 많은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는 중국 등지의 노동 착취공장 상황에 대해 뒤늦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 논란은 이미 나이키와 다른 다국적 기업들이 그들의 해외 표준노동조건을 개선하도록 촉구했으며, 더 균형 잡힌 무역정책을 이끌어낼 지도 모르게 되었다(그렇게 되면, 록포드에 다시 산업 활력을 불어넣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의료보험 제도가 더 “간편해”지는 것(즉 근로자들이 자유롭게 그들이 원하는 직장으로 옮길 수 있게 되는 것)도, 일생동안 대 여섯 번 직장을 옮겨야 하는, 늘 불안에 싸인 근로자들의 입장에 대한 대중영합주의자들의 분노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건국 초기에, ‘분노한 미국 진보주의자(Angry American Liberal)’들은 새로운 공화국의 원죄, 즉 노예제도에 격노한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강력한 개혁운동을 전개하며 기독교적 인권을 부르짖는 열성 기독교도들이었다. 복음주의 프로테스탄트 전도사의 딸인 해리어트 비쳐 스토(Harriet Beecher Stowe)는 종교잡지에 글을 써 그의 가족들의 전도 사업을 도왔다. 스토는 반노예제도를 고취하는 그의 첫 소설인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Uncle Tom's Cabin, 1852)’으로 온 나라를 뒤흔들었지만, 기독교적 감상주의로 채워진 그의 작품은 현대 진보주의에 호소력을 가지기에는 불충분했다. 종교지도자들이 성서에 뿌리를 둔 의분으로 계속 진보주의 정치를 옹호하고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 바깥의 현대 진보주의 목소리는 거의 완전히 세속적이다. 백인들의 진보주의 가치를 북유럽 정치문화의 그것과 대략 일직선을 이루게 하는, 진보주의적 분노의 느린 세속화는 지난 세기에 있었던 정치적 분노의 가장 인상적인 순응 그대로이다. 사실 종교적인 열정은 이들 진보주의자들의 중요한 생명력이다. 이들은 임신중절과 공립학교 기도시간과 같은 편협과 불가사이 한(현대의 진보주의적 정신에) 보수적인 집념을 가진 사람들이다.

 

 아마도 1960년대 이후에는 진보주의자들의 분노가 그렇게 격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의 불평은 진한 양조주(釀造酒) 속에 혼합돼버렸다. 그들의 불평거리는. 처음엔 2000년 선거였다. 그들은 이 선거에서 조지 부시가 교활한 수단으로 득점했다고 믿는다. 그 다음에는 부시 행정부의 교토의정서 포기를 상징하고 있는 환경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지금은 이라크 전쟁이다. 이들은 이라크 전쟁을 부통령 딕 체니가 전에 고용주로 있던 석유공급회사인 핼리버턴(Halliburton)사를 포함한 여러 회사를 통해 사악한 정치적 연고이익을 취하기 위해 부시 팀이 조작해낸 것으로 널리 인식하고 있다. 공화당 자체를 악의 원천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분노의 소리를 들어보기 위해 나는 현대 미국 진보주의의 가장 분명한 - 그리고 인상적인 - 대변자인 소설가 제인 스마일리(Jane Smiley)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키가 6피트를 넘는 사람으로 정치에 분노하는 편지를 정기적으로 뉴욕타임스와 다른 언론기관에 보내고 있다. 스마일리의 소설들은 지금까지 정치적 주제를 명시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작품 “1,000 에이커(A Thousand Acres)"에서 가장의 분노를 현대적인 의미로 조명했다. 이 소설은 ”리어왕(King Lear)"의 줄거리를 느슨하게 이용하여 중서부지방의 한 아버지가 그의 세 딸들을 광포하게 다루는 이야기를 엮어나가고 있다. “나는 오늘아침 일찍 잠이 깼습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 누워서 정치 문제들을 생각하며 걱정스럽고 화가 났습니다.” 11월 초순 어느 목요일에 스마일리는 캘리포니아의 카르멜 벨리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전화로 나와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은 공화당이 켄터키와 미시시피 지사 선거에서 승리한 것을 그녀가 알고 난 다음날이었다. “나는 공화당원들을 미국인들의 특성 중 가장 나쁜 특징에 스스로를 맞추고 있는 사람들로 보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유독한 애국심, 유독한 종교, 유독한 인종주의를 가진 무시무시한 3인조로 부르고 있습니다.” 스마일리는 그녀의 분노가 어떤 의미로는 문제가 있음을 시인했다. 그것이 그녀의 잠을 설치게 하는 한 가지 이유가 되고 있었다. 그녀는 진보주의자들이 천성적으로 침착한 관대성을 더 좋아하는 것이 싫다고 했다. 그러나 대체로 그녀는 “나는 화가 나도 현실적으로 개의치 않습니다. 나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말했다. 

 

 이 같은 현재의 분노 물결은, 레이건 시대 이후 진보주의를 맹렬하게 공격해 온, 험한 입을 가진 보수주의 세대에게 결국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는 진보주의자들과 함께 오랜 시간에 걸쳐 생긴 것이다. 하워드 딘이 나타나기 이전에, 알 프랑캔(Al Franken)이 있었다. 그는 전에 ‘세터데이 나이트 리브’ TV 쇼의 작가 겸 진행자였으며, 1996년에 “러시 림보는 뻔뻔스런 얼간이, 그리고 다른 관찰결과(Rush Limbaugh Is a Big Fat Idiot and Other Observations)"라는 책을 냈다. 그 책은 1994년의 깅리치(Gingrich, 하원의장) 혁명에 대한 그의 분노를 쏟아낸 것이라고 프랑켄이 최근 내게 말했다. 그는 러시 림보(러시 림보는 미국에서 인기 있는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다. 보수적 경향을 띠고 있다)를 깅리치 혁명의 ”대변자“로 보았다. 프랑켄이 최근에 낸 반(反)부시, 반 공화당  베스트셀러인 ”거짓말과 그들에게 거짓으로 말하는 거짓말쟁이(Lies and the Lying Liars who Tell Them)"는 하버드대학(프랑켄은 하버드대학 케네디 스쿨의 ‘언론, 정치, 공공정책 소렌스타인 센터’ 특별회원이다) 학생들로부터 연구조력을 받아 준비한 것이며, 상대적으로 유머가 적고 정치활동가의 특징을 잘 그려낸 책이다. 이 책은 하워드 딘의 박식한 지지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들은 어울리지 않게도 민주당의 가장 부유하고 가장 교육을 많이 받은 쪽에서 끌어들인 사람들이다.

 

 현대 진보주의자들의 분노가 끼치는 해악은, 마치 모피제품이면 누가 입고 있던 반대하는 여러 사회단체들의 주장에 경도된 것처럼, 별로 중요하지 않는 이유로 엘리트를 물고 늘어지는 경향이다. 그러나 최선의 상태에서 그들의 분노는 가장 깊고 순수한 모든 것의 원천, 즉 사랑에서 나온다. 찰스 디킨스 보다 이런 종류의 분노를 더 잘 표현한 사람은 지금껏 없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수많은 제도적 불의 - 채무자들의 감옥에서 어린이 노동력에 의존하는 무시무시한 공장들에 이르기까지 - 에 대한 그의 통렬한 고발은 사회를 더 좋은 쪽으로 이끌고 개혁시켰다. 미국에서 일종의 디킨스적인 분노는 제도화된 인종주의의 불의를 폭로한 1960년대 인권운동에서 나타났다. 마틴 루터 킹이 마지막으로 써 놓은 설교문(그는 그 설교를 하기 전에 살해당했다)은 “왜 미국은 영락할 수 있는가(Why America May Go to Hell)"란 제목의 글이었다. 그러나 킹의 중요한 비전은 사랑의 동전으로 지불한 속죄의 여행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약속의 땅’이었다. 오늘날 분노한 진보주의자들은 야유와 풍자에 지나치게 치우치는 그들의 기호를 불식할 수 없는 한 그들의 호소는 널리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다. 야유와 풍자는 이른바 표적을 후려갈기는 옳지 못한 방법이다.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의 베스트셀러인 ”이봐, 내 나라가 어디지?(Dude, Where's My Country?)"는 거기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보수주의자들은 정확히 얼마나 오랫동안 화를 참고 견딜 수 있을까? 하버드, 헐리웃, TV 방송국들과 같은 오래된 표적들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분노는 1980년대 중반 러시 림보의 인기가 급상승하기 훨씬 전에 시작되었다. 그 뿌리는 1960년대의 골드워터와 닉슨의 선거 캠페인과 그 이전 대학 캠퍼스에서의 젊은 공화당원들의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다윈주의를 더 신선한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때인 그 이전 시대에, 보수적인 성서(聖書)지대(Bible Belt, 미국 남부의 근본주의 기독교 신자가 많은 지방)에서는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진화론 수업에도 분노를 드러냈다.

 

 보수주의자들의 분노는 영원한 종교적 신앙에 근거한 보수적인 세계관의 핵심요소가 사실상 끊임없이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에(그리고 적어도 H.L. 맨켄이 성서지대 사람들에게 예리한 비판을 가한 이후 조롱을 받아왔기 때문에) 존속하고 있다. 인종차별 폐지운동을 방해하려는(남부 민주당원들이 주도한) 보수주의자들의 노력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미시시피 주 출신 상원의원인 트랜트 로트(Trent Lott)와 다른 구식 보수주의자들은 오늘날 그들 대열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이 인종차별제도 유지투쟁에 지원한 일을 떠올리며 당혹해 하고 있다. 임신중절을 제한하려는 노력은 이따금씩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최근에 소위 말하는 불완전한 출생에 대한 임신중절 제한을 법률로 금지한 것과 같은), 전체적인 추세는 1960년대 베티 프리던 앤 컴파니(Betty Friedan & Co.)가 선언한 진보적인 남녀 동권주의적 시각을 다 함께 지지한다. 보수주의자들은 포르노 산업에 더없이 좋은 전달 루트가 되는 인터넷을 이용한 포르노의 가정침투를 차단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처럼 문화적으로 유동성이 강한 사회에서는, 항상 권리에 분노하는 새로운 원인들이 제공된다. 오늘날 동성애 권리는, 폭발성이 강한 동성결혼 문제에 아주 빠르게 분노의 박자를 높이고 있는 보수적인 분격에 초점을 맞춰, 한 때 인종차별폐지운동처럼 옹호운동이 거세게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투철한 신념으로 동성결혼을 반대해 온, ‘미국을 걱정하는 여성들(Concerned Women for America)' 모임 - 워싱턴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기도와 행동”을 좌우명으로 삼는다 - 회장인 샌디 라이오스(Sandy Rios)는, “진정한 예수 신봉자”라면, 누가나 가져야 하는 “정당한 분노”라고 주장한다. 남 일리노이에서 성장한, 두 아이의 어머니이며 올해 쉰 넷의 이혼녀인 라이오스는, 1960년대에 응석을 받아주던 자유방임적인 풍조가 얼마나 가정을 파괴하고 아이들을 손상시켰는지 그녀가 직접 보아왔다고 말한다. 특히 동성결혼에 대해 왜 그녀는 그토록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는 걸까? 왜냐하면, 남녀 사이의 전통적인 결혼은 “큰 집을 떠받치고 있는 대들보와 같은 것이며, 그 대들보를 뽑아버리면, 건물은 무너지고 말 것” 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최악의 경우, 보수주의자들의 분노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고, 어떤 경우엔 특정 그룹 사람들의 지겨운 이미지를 떠올리게 할 뿐 아니라, 오염된 근원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함으로써 가치의 일부가 손상되고 있다. 향수란 일반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보다 더 좋게 기억되거나 상상되는 사회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 근원이 오염돼 있다. 향수는 신랄한 풍자예술을 만드는 데는 쓸모가 있지만, 외고집에 비현실적인 정치를 생산해내는 경향이 있다. 1930년대에, 존 크로 랜섬(John Crowe Ransom)과 다른 “망명시인들”을 포함한, 벤더빌트 대학에 있었던 한 무리의 남부 작가들은, 그들이 당연히 포기한 정치적 선언인 ‘자립자조(I'll Take My Stand)'에 근거한 눈코 뜰 새 없는 현대적인 삶에 악담을 퍼부었다. 그 정치적 선언은 “미국재건”으로 가는 통로로서 “발전이 매우 느린” 남부를 염두에 두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최선의 경우, 보수주의자들의 분노는 엄격성의 강요였다. 현대의 진보적인 세속주의자들이 부주의하게 창도한 문제점들에 구약성서 같은 도덕률을 적용했다. 때때로 세속의 낭떠러지 너머로 전 속력으로 차를 몰고 가는 것과 거의 같아 보이는 미국은, 분노에 찬 완고한 사회적 보수주의자들이 임신중절과 안락사를 강요해 온 것을 논쟁하기에 아주 좋은 나라다. 동성결혼 문제에 흥분한 헌신적인 보수주의자들은 의회의원들과 법원, 그리고 확고한 자세를 갖지 않은 많은 시민들을 설득하여 결혼의 법적 도덕적 의미와 미국의 사회건강에 더 큰 해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골똘히 생각하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아마도 진보적인 세속주의자들이 이끄는 데로 가겠지만, 그러나 더 신중하고 사려 깊은 걸음걸이가 될 것이다.

 


 

모든 점을 고려할 때 사회적 분노는 실제로 공공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그 분노가 약간이라도 변형되면 전혀 장점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냉소주의 - 환멸을 느끼는 마음에서 나온 분노의 최소 부분 - 는 일반적으로 신랄하다. 대중이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지나치게 의구심을 갖는 것이 전체적으로 나쁜 일이 아니긴 하다. (경솔하게 믿어버리는 국민들 보다는 냉소적인 국민들이 더 낫다.) 미국인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을 혐오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때때로 배신감과 연결된다. 격렬하고 노골적인 혐오는 가끔 가장 끔직한 희생을 요구했다. 에이브람 링컨의 암살은 계속 상대방을 비방하는 유세 와중에서 일어났다. 유세 기간 중에 대통령을 증오하던 사람들은 링컨을 그의 종족(백인)에 대한 반역자로 몰아세웠으며 그의 캐리커처를 검둥이와 원숭이로 그렸다. 1990년대에도 대통령에 대한 혐오감이 고조돼, 빌 클린턴에 대한 인신공격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클린턴은 그의 고향 쪽 사람들인 남부인들로부터 지독하게 미움을 받았다. 그들은 클린턴의 진보주의와 그가 1960년대 반체제문화를 선택적으로 환영한 것(그것을 흡수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을 남부지역 고유의 보수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클린턴은 물론 잘못된 행동과 잇따른 거짓말로 남부인들을 화나게 하긴 했다. 그러나 혐오는 공격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많은 사람들을 다정한 친구들이라고 추켜세우며 공격하고 있는 현 조지 부시 대통령은 좌파들에게 혐오의 표적이 되고 있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기꺼이 그에 대한 증오감을 내보인다. “나는 조지 W. 부시를 증오한다.” 저너던 체이트<뉴리퍼블릭지 선임편집인>는 9월29일자 뉴 리퍼블릭지에 실린 “당신 때문에 미칠 것 같다"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에서 이렇게 시작했다. 혐오는 정치적 상징으로서 한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부시의 경우, 어께를 으쓱거리며 걷는 그의 걸음걸이가 특별히 사람들을 분개하게 하는 특징인 것 같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라크와 다른 문제들에 대한 그의 자세에서 그의 걸음걸이처럼 건방과 오만불손을 읽고 있다. ”그는 잘난 체 하는 개자식입니다. 그의 걸음걸이를 보면 여러분들은 내 말에 동의할 것입니다.” 서른다섯 살의 안마 치료사인 피터 넬슨이 하워드 딘을 치켜세우기 위해 보스턴의 페이닐 홀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 이렇게 대통령을 깎아 내렸다. 넬슨은 대통령의 걸음걸이를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가슴을 부풀리고 팔을 넓게 흔들며 카우보이처럼 어슬렁거리며 걷는 흉내를 내었다. 대통령에 대한 혐오감은 과감한 변화를 추구하는 데서 오는 어쩔 수 없는 부산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만큼 신랄한 비판에 직면한 대통령도 드물다. 명문가출신 동료들은 그가 뉴딜정책을 채택하는 것을 보고 그를 그의 계급에 대한 배신자로 몰아 세웠다. 온화한 성격의 캘빈 쿨리지 대통령에 대한 험담은 너무 많아서 기억하기조차 힘들다.

 

 사실 오늘날 미국의 사회적 분노는 버릇없는 꼬마 녀석들 사회처럼 조바심과 배은망덕을 너무 자주 드러내 보인다. 지구 구석구석에는 자기들의 일상적인 공분(公憤) 목록을 평균치 미국인들의 그것으로 바꾸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할 사람들이 수없이 살고 있다. 캘리포니아의 한가롭고 느긋한 이미지가 여러 해 동안 분노의 의제를 제기하는 선도자 역할을 하긴 했지만, 이곳에서만큼 멋진 생활을 해 본 곳이 또 있는가? 캘리포니아의 1인당 총생산액은 3만 2,702 달러로 영국과 독일, 프랑스를 앞지른다. 그러나 캘리포니아는 주의 자동차세를 3배로 올리는 법률을 제안한 것에 몹시 화가 간 나머지 주지사 그레이 데이비스를 리콜하고, ‘터미네이터’ 란 영화의 주연배우로 잘 알려진 전 보디빌더 아놀드 슈와즈네거를 대신 앉혔다. 주민들이 혐오했던 자동차세가 예정대로 인상되었다면, 소매가격 4만 665달러짜리 2003년산 4X4 시보레 서버번의 차주는 연간 $264.32 대신 $813.30를 세금으로 내게 된다. 소비자의 기호에 따라 따스해지는 가죽 시트, XM 위성 라디오 시스템, 어린이들을 위한 DVD 플레이어와 같은 옵션 제품들을 추가해도 어떤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은 변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물질적인 안녕에 약간이라도 위협이 되는 것에 대한 대응에서 발끈하는 분노는 결국 - 독립선언서에서 인정한 - 행복추구를 위한 미국의 특이한 결단력을 반영하고 있다.(주지사 역할을 하는 ‘터미네이터’ 출신 첫 관리는 말할 필요도 없이 자동차세를 원래 수준으로 되돌렸다.)

 

 물론,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자동차세 인상에 분노로서 뭉쳤던 것처럼 미국인들이 어떻게든 그렇게 뭉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것들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분노하는 세속적인 진보주의자들과 분노하는, 종교적 동기를 가진 보수주의자들 사이의 충돌은 때때로 중간 소음보다는 약간 큰 소음을 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증대하고 있는 미국 유권자들의 당파성은 아마도 긍정적인 발전으로 봐야할 것이다. 미국처럼 크고 다양한 나라는 공공정책 문제에 대해 이론이 분분하여 논쟁을 피할 수 없다. 대체로 좌파와 우파로 분류되는 미국 유권자들의 당파성 - 19세기의 격렬한 제휴로 되돌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 은 수많은 작은 정당으로 분열돼 깨지기 쉬운 연립으로 끼워 맞춰야만 비로소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유럽 스타일보다는 낫다. 격렬한 당파감정이 고조되고 있음을 - 쯧쯧 - 발견한 앞서의 퓨 연구소 조사는 또한 정부에 대한 냉소주의가 쇠퇴하고 있음도 우연히 발견해 냈다.

 

 말이 되는 소리다. 실용주의적인 미국인들은 상당한 이익이 생긴다는 보장이 없으면 당파적인 이유로 에너지를 - 그리고 분노를 - 쏟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분노를 실질적인 목적에 사용하기 때문에 분노하면서 동시에 일을 한다. 지금 미국은 다시 분노하고 있다. 아마도 큰 분노는 아닐 것이다.

 


 

(2007. 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