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투르크 제국
1. 개요
본래 중앙 아시아에 살던 터키계의 부족은 방목하기 위해 점차 서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들 부족은 유목 생활을 했기 때문에 활쏘기와 말달리기에 능숙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기동성이 있었고, 부족이 곧 군대와 같이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더구나, 중앙 아시아의 부족은 인종적으로 볼 때 여러 인종이 섞여 있어서 일부는 황인종의 용모를, 또 일부는 남부 러시아의 코카서스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터키 몽고 계통의 부족은 모두 비슷한 사회 조직, 문화, 관습 및 언어 등을 가졌다. 오스만 씨족은 오구즈(Oghuz) 부족에 속하였으며, 그 일부는 7세기 중에 이미 중근동의 변경지방에 머물고 있었다. 이들의 일부는 압바시야조('Abb?siya朝) 시대에 맘룩(Maml?k)으로 칼리프의 근위병이 되었다. 그 후 터키계 부족은 무슬림 세계의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하였으며, 마침내는 셀주크조(Salj?q朝, 1038∼1194)를 창설하여 그 정치적, 군사적 우위성을 확보하였다. 이 셀주크조의 통치 하애서 터키족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어 소아시아 반도에까지 진출하게 된 것이다.
1) 오스만조(Osman朝)의 등장
오스만조의 기원은 신비에 쌓여 있다. 몽고족이 침입했을 때 쫓겨난 터키 부족의 일파가 소아시아 반도에 들어왔다. 그 지도자인 에르토그릴(Ertoghril)은 이 반도의 북서쪽에 룸의 셀주크조의 말기 술탄에 의하여 영지를 받았다. 그의 아들인 오스만('Osm?n, 1300-1324, 아랍어의 'Uthm?n에서 유래)은 1288년에 비잔틴 제국의 영토를 잠식하는 정책을 실행하였다. 이 확장 정책은 그의 후계자에 의해서도 지속되어 이 술탄 조는 650년 이상 유지될 수 있었다. 당시 오스만은 룸의 셀주크가 망한 자리에 나타난 수많은 터키의 영주 가운데 가장 미약한 존재였다. 그러나, 불과 100년 만에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일한국의 말기인 1355년 이후, 중근동은 혼란상태에 빠져들어갔다. 이러한 정치적인 진공상태를 메워 주고, 이슬람 문명을 파멸의 위기에서 구해 준 세력은 오스만조 뿐이었다. 오스만조가 성공하게 된 가장 큰 정치적 이유는 그 근거지가 지리적으로 반도의 서북쪽에 비잔틴 제국과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1071년 반(Van) 호수 근처의 만지케르트(Manzikert, 터키명 Malazird) 전쟁 이후 위축상태에 들어가 허약해진 비잔틴 제국을 쉽게 잠식할 수 있었다.
한편, 몽고인이 침입했을 때 중앙 아시아에서 몰려온 수많은 터키계 부족, 공예인 및 서사들은 소아시아 반도에서 안정된 직업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비잔틴 지역의 침입이 가장 높은 수입을 올릴 수 있고, 또 사회적으로도 성전(Jih?d)에 참전하는 전사(Gh?zi)라는 떳떳한 구실을 세울 수 있었다. 더구나 오스만조는 여러 종단 조직과 수많은 공예인단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아마도 오스만조의 선조는 스스로 이 종단과 공예인단에 속하여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정복 사업은 종교적 사명과 더불어 수행되었고 또 새로 정복한 지역의 행정에는 서사도 필요하였다.
1326년, 오스만의 후계자 오르한(Orkh?n, 1324∼1360)은 부르사(Bursa)를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 이 때부터 오스만조는 실질적인 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행정 체계도 비잔틴 제국의 것을 기초로하여 발전시켰다. 한편, 기독교도들을 용병으로 받아들여 터키계 부족군에 대한 의존도를 줄였다. 결국, 1366년까지 오스만조는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비잔틴 세력을 일소하고, 또 남부 발칸 반도에도 착실히 세력을 길러 발칸 반도에 있는 비잔틴 제국 제2의 도시인 에디르네(Edirne, 그리스 명 Adrianople)도 정복하여 수도로 삼았다. 이 정복은 무라드 1세(Mur?d Ⅰ, 1360∼1389)의 통치 중에 달성되었고, 이 일로 인해 비잔틴 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플 주변에 국한된 도시 국가로 전락하여 풍전등화와 같은 제국의 운명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바예지드 1세(B?yezid Ⅰ, 1389∼1402)가 티무르의 침략을 받아 앙카라 전쟁에서 대패하고 자신도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은 반 세기나 늦어져, 1453년에 이르러서야 메흐메드 2세(Mehmed Ⅱ, 1451∼1481)의 영도 아래 달성되었다. 이와 함께, 메흐메드 2세는 무슬림 세계에서 가장 명성 높은 통치자가 되었으며, 또 이교도와의 전쟁에 있어서 최고 지도자로 인정되어 스페인, 중앙 아시아 및 인도 등지에서 그의 총애와 지원을 얻기 위해 많은 인사가 모여 들었다. 즉,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3개 대륙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무슬림에게는 성전의 전사(Gh?zi), 터키족에게는 한(Kh?n), 기독교도에게는 황제가 되어 전세계를 통치하려는 야망에 사로잡혔다. 그는 이 야망을 이루기 위한 단계로서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이라 개명하였으며, 또 그의 명칭은 술판 파티(F?ti, 정복자) 메흐메드로 불렸다.
오스만군은 1516∼1517년 사이에 시리아, 팔레스타인 및 이집트를 정복하였으며, 이 때 술탄 셀림 1세(1512∼1520)는 카이로의 압바시야조의 허수아비 칼리프로부터 칼리프 칭호와 그 세습권을 오스만조에 양도하도록 하였다. 그의 아들 술레이만 2세(Suleiman Ⅱ, 1520∼1566)는 이라크에서도 제국의 세력을 확장하여 오늘날의 이란-이라크 국경에까지 이르렀으며, 또 1521년에는 유럽 쪽의 벨그라드를, 1541년에는 헝가리를 정복하였다. 더구나, 하이렛딘 바바로사(Khayreddin Barbarossa) 대제독(Qapudani dery?)의 지휘하에 함대를 조직한 오스만 해군은 1540년에 베니스를 위시한 유럽 연합 함대를 프레베사(Prevesa) 근해에서 무찔러 지중해의 해상권을 획득하였다. 이와 함께, 알제리 지역도 오스만 제국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또 이러한 정복 사업의 계속적인 성공으로 오스만 제국은 1683년에 절정에 달한 영토의 확장으로 빈(Wien) 근처에서 이란 국경까지,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페르시아만 지역의 북부 해안 지대와 홍해안 지역을, 아프리카에서는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역을 통합하였다. 또, 흑해 연안을 모두 정복하여 수도인 이스탄불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대정복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오스만조의 지배층이 스스로 엄격한 규율과 자제 속에 살았다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무슬림은 모두 단결해서 하나의 움마(Umma)를 건설해야 한다는 욕구에 있었다. 무슬림은 압바시야조 중기 이후에 분열되어 왔으며, 또 몽고족의 침입 이후 무슬림 단결의 상징인 칼리프조차 없어졌다. 비록 카이로의 허수아비 칼리프는 존재했으나, 맘룩 이집트의 영토 밖에서는 그 존재가 인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혜성과 같이 나타난 오스만조는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느끼던 무슬림의 욕구를 채워 주었다. 게다가 발칸 반도의 기독교 지역에서는 기독교 정교회(正敎會, Orthodox Church)가 농민들을 너무나도 심하게 수탈하였으므로, 농민들 스스로가 오스만 정복자에게 구원을 청할 정도였다. 비잔틴 제국은 카톨릭 세계와의 분쟁과 발칸반도 내에 있는 여러 인종 간의 갈등 때문에 국력이 소모되어 무너지고야 말았다.
2) 오스만 제국의 관료 조직과 관료 양성 제도
거대한 오스만 제국의 영내에는 종교적, 민족적 및 언어적으로 다른 수많은 인종군, 즉 터키, 타타르, 투르크만(Turkman), 아랍, 쿠르드, 베르베르, 맘룩, 보스니아, 알바니아, 그리스, 불가리아, 헝가리, 남 슬라브, 루마니아, 아르메니아, 콥트(Copts), 조지아(Georgia) 및 유대인 등이 살고 있었다. 이 잡다한 인종군을 다스리는 데에는 오스만 제국의 우수한 관료 조직이 필요했다. 이 관료 조직의 정상에는 술탄 칼리프(Sultan-Khalifa)라는 종교적 상징이자 세속적인 통치자가 있었다. 술탄은 본래 원시적인 전사의 우두머리로, 그는 부족의 이동을 지도하고, 약탈을 목적으로 하는 기습을 지휘 조직하며, 부족법을 준수할 것을 시행하는 강력한 권력자였다. 이 부족적 조직체는 그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내부의 규율은 엄격하였다.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한 후 칼리프가 되었다. 이슬람의 정치 원로, 즉 순니에 의하면 칼리프는 오직 예언자 무함마드의 부족인 쿠라이쉬족의 자손만이 될 수 있었으나, 이러한 요구 조건은 이슬람의 장로, 즉 울라마('Ulam?')의 모임에서 간과되었다. 그들은 오스만 술탄이 당시 무슬림 세계의 가장 유력한 지배자이기 때문에 칼리프 자리의 최적임자로 판단하였다.
술탄의 황실, 즉 세라이(Seray)는 모든 관료 조직의 심장부였다. 이 궁성은 술탄의 영예 뿐만 아니라, 사저도 관리하는 행정 요원의 양성소가 되었다. 세라이에는 술탄의 사저뿐만 아니라 집무 및 회의실, 말 사육장, 요리실, 목욕실 및 궁성요원을 위한 숙식소, 미래의 최고 행정요원을 위한 수재 강습장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용도에 따라 작은 성벽으로 구분된 세 구역에 독자적인 건물이 세워졌으며, 또 그 전체는 높은 성벽으로 둘러 쌓았다. 외부 성벽에는 전시처가 있어서 부정을 저질렀거나 술탄의 노여움을 산 관료의 참수된 머리를 걸어 두었다. 또, 술레이만 1세(1530∼1561) 때에는 하렘(Harem, 아랍어로는 Har?m, 즉 금지, 신성에서 유래)이라는 술탄의 여성 가솔과 궁녀를 수용하는 별개의 네 번째 구역이 궁성 내에 세워졌다. 비록 하렘의 여자들은 특별구역에 제한되어 있었지만, 술탄을 통하여 그들의 친지를 고관직에 임명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또 심지어는 환관들도 상당한 역할을 행하였다.
술레이만 1세 때 완성된 후 수백년간 지속된 관료조직은 술탄이나 그의 대리인(공식명칭 al-Sadr al-azam, 즉 최대의 지도자)인 와지르를 정점으로 하여 피라밋식으로 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효율적 운용은 술탄의 성격에 달려 있었다. 이 와지르는 곧 수상에 해당하며, 또 그는 오직 술탄에게만 책임을 지고 있었다. 와지르의 집무 영역에 어느 정도 관여할 것인가 하는 것은 오직 술탄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 술탄은 그를 임의로 해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술탄의 권위를 대행하는 강력하고 독자적인 와지르에게는 때때로 굽격한 권력의 몰락도 있었다. 술레이만 1세 이후 대부분의 술탄은 하렘을 정사보다 더 좋아했기 때문에 와지르의 중요성은 증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적의 책략에 걸려 제물이 되는 수도 있었다. 좋은 예로 메흐메드 4세(1648∼1687)가 통치한 초기에는 일년에 3명의 와지르가, 5년에 13명의 와지르가 임명, 또는 해임되었다. 와지르의 밑에는 아시아와 유럽을 분리 담당하는 2명의 재정 담당 대신(Defterdar), 2명의 사법 대신(Kadiasker), 2명의 총독(Beylerbey), 특수 보병대인 예니체리(Yenicheri, 영어 Janissary)의 사령관(Agha), 해군 사령관(Kaptan Pasha) 및 총무 비서관(Nishanci) 등이 내각을 이루어 일주일에 4번 정도 각료회담을 열었다. 초기에는 술탄도 이 모임에 참석했으나, 후기에는 와지르에게 이 업무를 맡겼다. 와지르는 이 각료회담을 궁성 내에 있는 자기의 특별 관저에서 개최하였고, 술탄의 참석 아래 개최되는 각료 회의는 이례적인 경우에서, 또는 순전히 의식적인 경우에만 하게끔 되어 있었다. 이들 술탄의 고위 행정관은 국내치안의 유지, 세금의 징수, 영토 등의 확장 또는 최소한의 보전 등을 주임무로 하였다. 각 각료는 자기 부서 안에 거대한 행정 기구를 가지고 있어 각 지방의 지사, 재정관 및 군 사령관을 임명할 수 있었다.
군은 경찰 임무도 담당하였는데, 이 관료 조직이 특수성은 거의 모든 관료가 군 출신이라는 점에 있다. 이들 정예관료는 10대의 어린 나이에 이미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실지로 술탄이나 와지르의 지휘 아래 전쟁에 참여하였다. 본래 이 관료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무슬림들을 기용했으나,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후 메흐메드 2세는 궁성 안에 특수학교를 만들어 8∼18세 정도 된 기독교 집안의 소년을 학생으로 받아들였다. 이 소년들은 새로이 정복된 땅의 포로 가운데서, 또는 독특한 소년 징집 제도(devshirme)에 의하여 뽑혔다. 이 소년 징집 제도는 매 5년마다, 또는 필요할 때에는 해마다 실시하였으며, 이 때 관료들이 발칸 지방을 순회하면서 총명하고 신체건강한 기독교 집안의 소년을 뽑아 이스탄불로 데리고 와서, 다시 최종 검사를 한 후에 궁성 내의 각종 학교에 입교시켰다. 이 소년들은 제국의 군인, 술탄의 근위병, 재상 관저의 기병 또는 예니체리의 대원을 만들기 위한 목적에서 교육되었으며, 학교의 규율은 오늘날 사관생도들의 교육처럼 엄격하였다.
2개의 사법 부서를 제외한 모든 각료는 기독교 집안 소년, 즉 특수 징집 제도를 통하여 선발된, 궁성 내의 특수학교 출신이었다. 이들은 등록과 함께 이슬람에 개종하였고, 이슬람 성법(Shar?'a), 아랍어, 페르시아어 및 터키어의 문법과 문학을 공부하였으며, 또 수학, 음악, 터키 역사, 서예 및 직업 훈련이 이 학교의 교과목이었다. 이 궁성 내의 학교에도 등위가 있어서 정예 고급관료는 상위 학교 출신에서 양성되었고, 중위에서는 예니체리 대원과 포병, 기병 및 근위병 장교 등이 나왔으며, 하위에서는 행정 기구에 소속된 중견 직급의 관료들이 나왔다. 이들은 모두 굉장한 후대를 받았으나, 잘못을 저지르면 벌이 엄하여서 대개는 그 벌로 사형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궁성학교 출신과는 별도로 봉건 기사와 유사한 지방 영주격인 시파히(Sipahi)가 있었으며, 이들은 전장에서 공훈을 세워 그 상으로 일종의 봉토를 받았으며, 이 봉토에서 세금의 징수가 허용되었고, 세입에 따라 일정 수의 군인을 양성하여 명령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출병해야만 했다. 이 시파히의 임무는 자기 봉토의 경찰 업무와 또는 영내나 가까이 있는 도로의 보수가 주였다. 그러나, 시파히는 자기 봉토의 소작인을 추방할 수는 없었다. 궁성학교 출신과는 달리 이들 시파히는 대체로 자유인이었다. 이들의 봉토를 모두 합쳐도 영토의 과반수에 이르지 못했으며, 이론상으로는 술탄의 관용에서 봉토를 관할하고 있기 때문에 증감하거나 처분할 수도 없었으므로 술탄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궁성학교 출신은 비록 관료조직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신분은 술탄의 노예였다. 물론, 우리말의 노예라는 개념 자체가 이 경우에 적합한 용어는 아니다. 이들은 이론상으로 모두 무슬림이었으며, 그들의 자식들은 출생시부터 무슬림이었으므로 궁성학교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고급 관료조직에 참여하기 위한 다른 일반 무슬림들의 압력이 계속적으로 술탄에게 가해져서, 17세기 말에는 특수한 소년 징집제도가 폐지되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그 때부터 오스만 제국이 망할 때까지 무슬림으로 태어난 사람만이 궁성학교에 입교할 수 있었다.
궁성학교 가운데 중위에 속하는 예니체리는 14세기에 생긴 것으로, 기독교 집안 소년을 이슬람으로 개종시켜 군사훈련을 가르쳤기 때문에 유럽에서 가장 잘 알려졌으며, 16세기 후반기까지 그들의 수는 1만∼1만 5천명 정도였다. 그들은 현역에 있는 동안 결혼도 금지되었고, 또 군율이 엄한 대가로 세금을 면제받았으며, 예니체리의 사령관 외에는 아무도 그들을 처벌할 수 없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거의 200년간에 걸쳐 나타난 그들의 업무수행 능력은 매우 뛰어났으며, 16세기 초에는 그들의 권력이 막강해져서 술탄 자리를 보다 호전적인 아들에게 양위하도록 강요할 정도였다. 또, 술탄이 즉위할 때에는 현금으로 특별보상을 내리게 하였다.
16세기 말에 무라드 3세(Mur?d Ⅲ, 1574∼1595)는 이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현역의 결혼 허용, 신병 교육 훈련의 완화, 인원의 대폭 증가 등 군율을 늦추어 주었다. 그 결과 그들의 병영은 텅 비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역효과가 나타났다. 즉, 외적에 대한 전투력은 줄어들었으나 술탄을 핵으로 하는 음모 정치에는 커다란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그 때문에 수도인 이스탄불에서 몇 명의 술탄이 그들의 제지시키려다 폐위되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결국 이 예니체리의 폐지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되어 1826년에 폐지되고야 말았다.
3) 종교 조직체와 밀라 제도
이와 같은 관료조직에 버금가는 것이 곧 종교 조직이었다. 그 정상에는 이스탄불의 무프티(Mufti, 이슬람 율법가), 즉 세이훌 이슬람(Sheikhul-Islam, 이슬람의 원로)이 있었다. 이론상으로는 세이훌 이슬람은 술탄의 결정이 이슬람 성법에 어긋날 때에는 언제나 거부할 수 있었으므로 그 권력이 더 강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세이훌 이슬람은 술탄이 임명하고 어느 때나 해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이훌 이슬람의 파트와(fatw?, 터키어 fetwa, 즉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법적인 견해)는 항상 존중되었다. 어떤 술탄도 세이훌 이슬람의 파트와를 받기 전에 새로운 법률(qanun)을 제정할 수 없었다. 종교 조직의 모든 요직은 무슬림으로 태어난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었다.
그 아래 이슬람학의 원로들의 모임인 울라마('Ulam?')가 있었는데, 이 모임의 구성원은 이슬람 성법의 올바른 시행과 교육에 종사하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무슬림은 쿠탑(Kuttab, 이슬람 성원에 부설된 초등 학교) 과정과 마드라사(Madrasa, 일종의 신학교) 과정을 거치면 울라마의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시인, 학자, 왕실의 사가, 점성가, 성원의 관리인,교사 및 재판관 등은 울라마의 구성원이 된다. 이들 가운데서 두 명의 사법 대신이 뽑혀 관료조직에 참여한다. 관료조직의 요원과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 시민은 모두 이슬람 성법의 지배를 받는다. 이 성법을 관리하는 법관은 카지(Q?di)라 하는데, 중요 직책의 카지는 세이훌 이슬람이 직접 임명하였다. 부대 안에서는 사령관만이 사법권을 행사하는 예니체리를 제외하고 모든 관료와 군인은 사법 대신의 재판을 받았다. 사법 대신과 그 산하 요원은 관료 조직체의 재원에서 봉급을 받고 경비를 충당했으나 종교 조직체의 카지는 그 직무의 보상을 소송 당사자에게 수수료를 부과한 금액에서 받았다. 비무슬림은 무슬림과 분쟁하는 경우에만 이슬람 성법의 관여를 받게 되었다. 종교 조직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와크프(Waqf, 종교 재단)이다. 여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교사와 성원 관리인의 봉급을 지불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의 시민은 종교적 바탕에서 4개의 밀라(Milla, 터키어 Millet, 원뜻은 민족이나 공동체로 쓰임.)로 구분된다. 즉, 무슬림, 그리스 정교도, 아르메니아 기독교도 및 유대교도 등이다. 무슬림 밀라의 우두머리는 세이훌 이슬람이며, 그리스 정교도 및 아르메니아 기독교도의 우두머리는 각각 그들 교회의 총사교장(Patriarch)이고, 유대교도의 우두머리는 최고 랍비(Rabb?, 유대 교회의 목사)이다. 아르메니아 기독교도의 밀라에는 그리스 정교도에 속하지 않는 다른 모든 기독교도들이 포함된다. 이 밀라 제도는 정복자 메흐메드 2세(Mehmed Ⅱ)가 1453년에 이스탄불을 함락한 후에 규정하였다. 각 밀라에는 종교, 문화 및 교육 활도에 있어서 광범위한 자치가 허용되었다. 무슬림과 관련된 공사 외에 각 밀라는 자기 스스로의 사업권의 관할 아래 그들 고유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비무슬림은 딤미(Dhimmi)라 불리며, 인두세(Jizya)를 지불하였다. 비무슬림 밀라의 우두머리는 각각 자기 관할 하에 있는 교도들로부터 인두세를 징수하여 술탄에게 송금할 의무가 있었다. 비무슬림 밀라에 속하는 딤미의 세 우두머리는 수도인 이스탄불에 거주하며, 오스만 정부는 이들을 통하여 제국 내 딤미 백성들과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딤미는 정부 기구의 어떤 직책도 맡을 수 없으며, 또 군대에 복무할 의무도 권리도 없었으나, 그리스 정교도는 기들의 청소년 가운데에서만 특수징집 제도로 인하여 고급관료직을 맡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득과 손해를 같이 보게 된 것이다.
술레이만 1세의 통치기간 중에는 다섯 번째 밀라가 생겼는데, 이들은 모두가 외국인이었고, 주로 천주교도였다. 이 밀라는 1536년 술레이만 1세와 프랑스왕 프랑스와 1세(Francois Ⅰ, 1515∼1547 재위) 사이에 맺은 치외법권적 협정(Capitulation)에 따라 이루어졌다. 즉, 오스만 제국 내에서 상행위를 목적으로 여행하거나 거주하는 프랑스 시민들은 과세 대상에서 제외하고 치외법권을 누리는 것이었다. 오스만 시민도 프랑스 국내에서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즉, 프랑스 대사가 다섯 번째 밀라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16세기 말에 영국과 네덜란드도 비슷한 협정을 맺었으나, 그 우두머리는 프랑스 대사였다. 이 현상은 나폴레옹 1세가 등장할 때까지 그대로 있었으나, 그 후에 많은 유럽 국가와 협정을 맺음에 따라 각국 대사는 자기나라의 국적을 소유한 시민만을 관할하게 되어 이 다섯 번째 밀라는 분산되었다.
4) 술탄의 계승
오스만 제국 정부조직의 효율성은 오직 한 사람, 즉 술탄의 성격과 결의에 따라 좌우되었다. 물론 재상이 술탄의 권한을 대행하기도 했지만, 이것도 술탄의 동의나 전체적인 지지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술탄 자신이 뇌물을 받거나 다른 관료가 받는 것을 허용하면 이것은 곧 예외적인 행동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관행이 되는 것이다. 술탄은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기 때문에 무엇보다 술탄 계승 문제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였다. 더구나, 오스만 제국이나 그 이전의 터키족이 세운 나라인 가즈나조(Ghazna朝)와 셀주크 투르크 국가에 있어서는 여러 왕자가 주지사 내지 총독이 되어 술탄이 죽은 후에 항상 계승 전쟁을 치르거나 또는 국가가 분열되기 십상이었다. 즉, 하렘(Harem) 제도 때문에 술탄은 수많은 아들을 두게 되었지만 장자 상속 제도가 없어서 계승전쟁은 더욱 치열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메흐메드 2세는 법전(Q?n?nn?me)을 만들어 술탄은 자기의 형제를 모두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게하여 술탄이 세습적으로 계승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이 법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을 주진 못했다. 셀림 1세(Selim Ⅰ, 1512∼1520)는 심지어 자기 형제뿐만 아니라, 7명의 조카와 5명의 자기 아들 가운데 4명을 죽임으로써 계승전쟁의 혼란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
셀림 1세는 아버지인 바야지드 2세(Bayazid Ⅱ, 1481∼1512)가 자기의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하여 반란을 일으켜 결국 폐위시키고 즉위하였다. 계승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오스만 제국은 내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까지 왕자들은 지방 정부의 요직을 맡아 정사를 경험하고, 또 술탄은 유능한 왕자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그 후에 형제간의 살해와 왕자의 정부 요직 임명이 금지되고, 그 대신 왕자들은 궁성 내에 각자 별궁(Kafe)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 결과 장자가 자동적으로 술탄을 계승했으나 즉위할 때까지 정치에 대한 경험은 조금도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주로 하렘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왕자들보다는 오히려 속세에서 성장해서 들어온 하렘 여성들이 정사에 커다란 영향력을 휘둘러 정부 요직의 인사문제에까지 관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하렘 여성의 정사 관여는 부패를 낳게 되어 관료 조직체 뿐만 아니라 종교와 군사 기구에까지 파급되었다. 즉, 중앙 정부의 부패는 변경에 있던 주들, 즉 이집트, 예멘, 아라비아 반도, 쿠르드 족의 거주지역 및 심지어 몰다비아(Moldavia)와 왈라치아(Wallachia, 現 루마니아의 일부) 지역 등의 반독립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레바논 지역의 드루즈(Durse)파는 17세기에 한때 실질적인 독립을 이룩하여 1585년부터 1635년 사이에 유럽 열강과 외교 협정을 독자적으로 해결하였고, 유럽의 기독교 선교사와 기사를 불러들여 각각 학교를 세워 교육과 지역 개발에 힘쓰게 하였다. 이집트에서는 오스만 제국 총독의 명목적인 감시 아래 맘룩들이 행정기구를 장악하게 되었다. 몰다비아와 왈라치아의 토착 통치자들은 자치달성을 뜻대로 이루지 못했는데, 그것은 유럽 국가의 침입이 이 지역으로 들어와 오스만 정부의 감시가 예리해졌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의 쇠퇴는 유럽 국가의 번성과 거의 때를 같이 하였다. 17세기 말까지 오스만 제국은 유럽 국가의 연합공격에 시달렸다. 그 후, 유럽열강은 서로 경쟁하고 견제하였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이 연명하는 데에는 오히려 큰 도움이 되는 편이었다.
5) 국경 분쟁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막아 보려는 노력도 나타났다. 술탄 오스만 2세('Osm?n Ⅱ, 1618∼1622), 무라드 4세(Mur?d Ⅳ, 1623∼1640), 특히 술탄 메흐메드 4세(Mehmed Ⅳ, 1648∼1687) 치하에서 재상 가문으로 유행했던 쾨프륄루(Koprulu)家의 메흐메드(Mehmed, 1656∼1661 재직)와 아흐메드(Ahmed, 1661∼1676 재직)에 의한 부패 제거와 개혁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메흐메드 쾨프륄뤼의 5년에 걸친 재상 재임 기간 중에 약 3만명의 장교, 관료, 신학자, 법관 등을 부정 부패라는 죄목으로 처형하거나 파면하여 행정 기구의 능률을 높이는 한편, 정직한 공무원의 사기 함양에 힘썼다. 이러한 행정 기구의 정화운동은 1593∼1606년 사이에 걸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고전한 결과 일어난 것이다.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 루마니아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였으나, 시트바 토록(Sitva Torok) 조약에서 원상회복 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이 술탄과 오스트리아 황제가 대등한 지위에서 최초로 체결됨으로써 유럽 열강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사라졌다. 한편 쾨프륄뤼 가문의 재상들이 노력한 결과, 오스만 군은 1645∼1669년 사이에 베니스와의 오랜 전쟁에서 크레타 섬을, 1676년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포돌리엔 지역을 정복하고, 1683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두 번볁로 포위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699년까지 계속되는 전쟁에서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는 일시적으로, 트란실바니아는 영원히 빼앗기게 됨으로 해서 결국에는 오스만 제국의 허약성이 노출되고 말았다. 더구나, 18세기 초부터 러시아가 발칸 반도로 진출하게 되어 오스만 제국은 더욱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한편, 제국의 동부 국경에는 쉬아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이란의 사파위조(Safawi朝, 1500∼1722)가 등장하였다. 특히, 샤 아바스 1세(Sh?h 'Abb?s Ⅰ, 1587∼1629)는 1603년에 아제르바이잔, 코커서스 및 이라크 지역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4세(1623∼1640)는 사파위조와 싸워 이라크를 다시 빼앗았으나, 1638년에 있은 카스르 에쉬린(Qa?r-i-Shirin) 조약에서 아제르바이잔과 코커서스 지역을 이란에 넘겨 주기로 하는 최종적인 국경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후 18세기 초에는 사파위 조가 붕괴 직전에 처하게 되어 발칸과 지중해 지역에서 고전하는 오스만 제국에는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더구나, 아프가니스탄의 압샤르(Afsh?r) 부족의 침입으로 사파위조가 1722년에 망하게 되자 이란에는 무정부 상태가 나타났다. 술탄 아흐메드 3세(Ahmed Ⅲ, 1703∼1730)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하였다.
6) 서방의 진출과 개혁 기운
17세기 말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도층은 무슬림 세계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이것은 14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는 거의 3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이 기독교 세계를 침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자만심 때문이었다. 17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와 유럽 기독교 세계는 양대 세력 간의 균형이 잡혀 팽팽한 상태였으나, 무슬림 세계는 그 때까지도 유럽인을 열등한 인종 또는 기독교를 열등한 종교로 보고, 이 지역의 발전상에 주의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두 세계의 접촉은 전쟁을 통해서나 유럽 국가의 외교관과 상인들이 일방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들어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18세기부터는 입국하는 외국인의 수가 급증하였고, 또 일부 오스만 제국의 외교관과 상인들이 유럽 지역으로 진출하여 점차 그 곳 사정이 일부 지도층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프랑스의 베르사이유(Versaille) 궁전 생활 양식이 알려지면서 의자와 탁자가 수입되고, 또 궁전 건축과 공원 양식 등도 도입되었다. 이러한 궁전 생활양식의 모방은 재상 이브라힘 파샤(Ibr?him Pasha, 1717∼1730 재직)와 코자 라기브 파샤(Qoja R?ghib Pasha, 1756∼1763 재직) 때에 절정에 달하였다. 더구나, 이브라힘 파샤가 재직할 때에는 이스탄불 상류 계급의 모임에서 네덜란드로부터 수입한 튜울립을 즐겨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 기간을 '튜울립 시대'(Lale Devri)라고 불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에 대한 인식은 일부층에만 제한되었고, 일반 서민들에게는 생소하였다. 또, 유럽의 새로운 행정 기구, 세제, 교육 제도 등의 개혁에는 거의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물론, 1728년에 아랍 문자로 된 인쇄물이 처음으로 도입되었으나, 그 때까지도 기독교 세계에 대한 무슬림 세계의 우월감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768∼1774년 사이에 있었던 오스만-러시아 전쟁, 1787∼1792년 사이의 오스만-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군이 참패를 당하고, 곧이어 1798년에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1세(Napoleon Ⅰ, 1821 사망)가 불과 일 주일 만에 이집트를 완전 장악하자, 유럽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그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도층은 유럽의 우월성은 과학기술에 있다고 보았으나, 사회제도 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즉, 오스만 제국의 기존 사회 질서에 새로운 과학 기술만 도입하면 곧 유럽의 군사력에 버금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 개혁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술탄은 셀림 3세(Selim Ⅲ, 1789∼1808)로서, 그는 제국의 정부(Divan)를 12부처의 내각으로 개편함으로써 재산의 권한을 축소하는 행정 기구 개편을 단행하였다. 또, 인쇄소의 도입, 유럽 서적의 번역과 발행, 런던, 파리, 빈 및 베를린 등에 대사관을 설립하여 유럽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러나, 술탄이 개혁 조치를 통하여 유럽식 제복, 무기, 전술 등을 군대에 도입하자, 정예군인 예니체리가 1807년에 반란을 일으켜 결국에는 다음 해 술탄을 퇴위시켰다. 그 뒤를 이는 마흐무드 2세(Ma?m?d Ⅱ, 1808∼1839)도 역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보다 조심성 있게 개혁을 추진하였다. 즉, 그는 자기의 지지세력을 충분히 확보한 후에 군의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더구나 다시 반란을 일으킨 예니체리는 말할 것도 없고, 전국에 걸쳐 그들의 지지자를 수색하여 무자비하게 처단하였다. 그 후, 프러시아 장교단이 이스탄불에 와서 군사 교육을 담당하고, 또 오스만 군의 장교를 영국으로 파견하여 유학시켰다. 1834년에는 변경 지방의 각 주에도 민병대를 조직하여 군사훈련을 받게 하고, 또 외국의 원조를 받아 사관 학교도 설립하였다. 그는 세로운 군 조직을 바탕으로 총독의 권한을 축소하여, 처형은 반드시 중앙 정부의 동의를 받아 시행하도록 하는 등 거의 200년간 자치를 누려 온 지방 정부도 장악하였다. 그와 함께, 도로 및 우편 제도도 개혁하여 제국의 통신망도 개선하였다.
7) 개혁 운동
이 개혁 운동은 대체로 3단계로 구분되는데, 제1단계는 기존 오스만 제국의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단순히 구 관료 조직체가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참신한 인사를 등용하여 부정과 족벌주의를 제거하고, 지방의 호족을 중앙 정부에 복종시키는 것이었다. 때문에, 기존의 군대 조직은 그대로 두고 유럽의 군대 조직에 따라 별개의 군 조직을 만들었다. 따라서, 두 개의 군 조직은 서로 경쟁하게 되어 결국 충돌하게 되었다. 이 기간 중에도 반란과 외세의 침입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즉, 세르비아에서는 두 번이나(1804년과 1805년) 반란이 일어나 자치가 허용되었고, 그리스에서는 독립전쟁(1821∼1830)이 일어나 자치를 이루고 말았다. 한편, 1802년에 영국군이 이집트와 이스탄불을 침입하고, 또 러시아 군도 베사라비아(Bessarabia), 몰다비아 및 왈라치아(1806∼1812) 등을 점령함으로써 더 이상의 개혁은 불가능하였다. 더구나, 예니체리 등의 기존 군 조직이 개혁에 반대하였으므로 개혁을 위해서는 이들을 완전히 제거해야 되었기 때문에, 결국 1826년에 이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을 반대한 예니체리의 제거에도 불구하고 1833년까지 외부의 간섭으로 새로운 개혁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유럽 열강이 1829년의 에디르네(Edirne) 조약에서 그리스의 독립과 세르비아, 몰다비아 및 왈라치아 들의 자치를 강요하자 어쩔 수 없이 이를 허용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집트의 총독 무함마드 알리(Mu?ammad 'Ali, 1805∼1848 재직)의 군대가 아라비아 반도, 시리아 및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남부를 정복하고, 1832년의 코냐(Konya) 전투에서 오스만 군을 패퇴시켰다. 술탄은 결국 1833년의 휜카르 이스켈레시(Hunk?r Iskelesi)에서 맺은 러시아 황제와의 조약을 통해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무함마드 알리의 침입을 저지하고, 또 시리아, 아라비아 반도 등의 점령 지역에서 알리 군을 철수시킬 수 있었다. 이 때, 영국과 프랑스 등의 유럽 열강들도 무함마드 알리가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다시 제국을 통일시킬 것을 염려하여 그의 철군을 강력히 요구하여 마흐무드 2세를 도왔으므로, 술탄은 다시 여유를 얻게 되어 개혁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셀림 3세가 시도하였고, 마흐무드 2세가 시작한 개혁운동은 1839년부터 탄지마트(Tanzim?t-i Khayriyye, 개선 재정비)라 불렸는데, 여기에는 광범위한 법률 제정이 포함되었으며 이와 함께 개혁운동은 제2단계(1826∼1876)에 접어들었다.
이 탄지마트 운동은 대체로 네 분야에 중점을 두었다.
첫째, 프랑스의 정부조직을 모형으로 삼아 중앙 집권제를 강화하여 통치영역 내의 모든 지역에, 또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 그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종래의 주요한 세입 원천이었던 무카타아(Muq?ta'a)와 티마르(Tim?r) 제도를 폐지하였다. 전자는 술탄의 권익을 분배하여 현직 고급 관료에게 관할권을 위임하여 그 수입을 일부를 술탄에게 지급하고, 나머지를 각 관료에게 지급함으로써 관료들이 생계를 도모할 수 있도륵 하는 제도였다. 이것은 전답, 공예업 및 상업 등의 산업 영역을 술탄이 보호하고 지배한다는 이론적 바탕에 근거하였다. 즉, 고급 관료는 술탄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수익에 술탄과 더불어 참여하고 분배받는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특정한 직책에 특정한 수익 원천이 결부되는 것이었다. 후자는 상설 단위 부대에 일정한 토지를 주어 그 수입으로 부대 비용을 충당하는 일종의 세금 징수 청부(tax farming) 제도이다. 이 두 제도를 폐지하고 정부의 모든 관료와 고용원은 일정한 급료를 받도록 개혁하였다. 즉, 행정 기구와 세제 개혁이었다.
둘째, 법의 테두리 안에서 술탄의 거민은 인종, 종교 및 재능에 관계없이 각자의 생명, 재산의 보호와 인격을 존중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탄지마트의 법률 개혁에는 여전히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분과 종교에 의한 밀라의 구분은 그대로 존속하였으나, 다만 피지배층의 무슬림과 비무슬림은 법 앞에 평등하고, 각 종교의 우두머리가 종래 누리고 있던 독선적인 자치 체제를 폐지시켰다는 점이 새로운 점이다.
셋째, 군 조직의 대폭적인 개혁이 가장 긴요했으므로 종래에 없었던 군 보급부대를 창설하여 순수한 전투 부대에서 분리하였다. 또, 술탄이 지닌 모든 오스만 군의 지휘권을 각 지역별로 세분화하여 지역군을 창설, 그 지역의 특수성과 필요성에 맞도록 조직과 무장을 정비하고 전략도 독자적으로 펼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종래까지 비무슬림은 인두세(Jizya)를 내는 대신에 군 입대를 금지시켰는데, 이것을 폐지하고 군 복무를 의무화하였다.
넷째는 교육제도의 개혁이었다. 종래까지 종교 원로('Ulam?')가 맡아 온 마드라사(Madrasa, 이슬람 성원 부설 신학교)를 통한 교육 대신에 유럽의 세속적인 학교 제도를 도입하고, 1845년에는 내각 내에 교육 전담 부서를 설치하였다. 특히 기술 교육에 중점을 두어 실업 학교가 많이 생겼다.
이러한 탄지마트 운동은 마흐무드 2세의 두 아들인 술탄 압둘 마지드('Abdul Majid, 1839∼1861)와 술탄 압둘 아지즈('Abdul 'Aziz, 1861∼1876)의 통치 아래서 계속 추진되었다. 더구나, 이 탄지마트 운동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지식인은 유럽의 자유주의 문헌을 접하게 되었으며, 특히 정치, 역사, 철학 및 정부에 관한 서적이 보급되었다. 더구나, 프랑스 혁명(1789)의 여파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이 들어와 발칸 반도의 기독교도들 가운데 널리 확산되어 오스만 제국의 개혁 운동에 커다란 짐을 안겨 주기도 하였다. 또, 1853∼1856년 사이에 일어난 크리미아(Crimea) 전쟁으로 탄지마트 운동은 더욱 촉진되었다. 이 전쟁의 원인은 무슬림과 비무슬림, 특히 발칸 반도의 그리스 정교도들에 대한 차별대우 때문이었다. 즉, 그리스 정교도의 보호자 역할을 주장하는 러시아가 그들의 남하 정책의 구실로 이 문제를 내세웠던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러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하여 오스만 제국의 개혁운동을 지지하고 촉진시켰다. 더구나, 유럽의 영향을 받은 청년층도 울라마 등의 보수 세력과 대결하면서 개혁을 주장하며 이를 추진하였으나 그 속도는 매우 느렸다.
결국 보수세력과 개혁세력의 틈바구니에서 낭비벽이 심한 술탄 압둘 아지즈의 태도가 우유뷰단하자 재상 미드핫 파샤(Midhat Pasha, 1876∼1877 재임)를 비롯한 개혁파는 술탄을 퇴위시키고 압둘 하미드(Abdul Hamid, 1876∼1909)를 옹립한 후, 벨기에와 프랑스 헌법을 바탕으로하여 1876년에 헌법을 제정하고 양원제의 국회를 열었다. 이 때부터 오스만 제국은 입헌 군주국이 된 것이다. 이 헌법은 제국의 모든 국민에게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였으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구절은 없었고 이슬람은 여전히 국교로 남게 되었다. 술탄은 국가 원수로서 칼리프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개혁 운동의 제3기(1876∼1918)는 압둘 하미드의 술탄 즉위와 헌법 제정으로 시작되었다. 상원(majilis-i a'y?n, 귀족원) 위원은 술탄에 의하여 임명되고, 하원(majilis-i mab'?th?n, 민의원) 의원은 국민 직선이었다. 그러나, 미드핫 파샤와 그 추종자들의 개혁은 왕실 재정의 통제, 노예 무역 정지 및 무슬림과 기독교도간의 共學制의 허용 등과 같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술탄과 보수 세력은 이에 반대하였다. 보수 세력들은 마침내 1877∼1878년에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일어난 위기를 이용하여 마드핫 파샤를 유배시키고 의회를 정회시켰다. 그러나, 술탄은 개혁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의 중점을 헌정에서 군 조직 개편으로 옮겼다. 또, 술탄은 과학 기술의 발전이 필요하다고 확신했지만, 정치 권력만은 그의 손에 집중시켰다. 그래서, 전국에 정보 조직을 강화하여 국가 전복 음모를 사전에 탐지하였으며, 언론 통제를 강화하고 자유와 평등 사상에 기울어진 작가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하였다. 그러나, 일부 작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발행한 저작품을 몰래 터키로 반입하였다.
한편, 술탄은 자신의 억압 정책에 대한 원성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이슬람의 부흥을 통한 민족적 감정을 고취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때문에 스스로 칼리프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범이슬람주의의 핵심 인물로 자처하며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리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이미 유럽의 자유 사상을 접한 젊은 지식층의 늘어만 가는 불만을 해소시킬 수는 없었다. 또, 제국 내의 소수 민족, 특히 발칸 반도의 기독교도와 아르메니아인의 분리 독립 운동은 점차 폭력화하여 제국의 안정을 흔들고 있었다. 이러한 기독교도의 민족주의에 대한 대항 세력으로 범 터키 민주주의도 당시 러시아에 병합된 중앙 아시아의 망명 지도자를 축으로 해서 일어나고 있었으나, 제국의 집권층은 민족주의를 이슬람에 어긋나는 인종주의로 보고, 이슬람을 통한 무슬림의 단결과 제국 영토의 보전을 목적으로 하는 오스만 주의에 충성심을 바치고 있었다. 이 집권층은 젊은 장교, 교사 및 기술자에게 유럽의 기술발전 등을 논하면서 그 곳의 사회 및 정치 제도를 숨길 수는 없었다. 결국 보수 세력은 반대 세력을 분열시킴으로써 정권의 안정을 지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 세력은 1889년에 학생을 중심으로하여 '오스만 통일 발전 위원회'('Osmanli Ittih?d ve Terraqqi Jem'iyeti)를 결성하였다. 이 당은 일반적으로 청년 터키당으로 알려졌다. 한편, 1892년의 술탄에 대한 암살 기도와 1896년의 쿠데타가 모두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 당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져서 많은 당원이 체포, 처형되거나 국외로 망명하였고, 국 내에서의 활동은 지하로 잠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지하 활동은 살로니카(Salonika) 市에 주둔하고 있는 군 부대 안에서 매우 활발하였다.
이들은 1905년에 일본이 일·러 전쟁에서 승리하자 이에 크게 고무되어 1907년에 모든 반대 세력을 집결시킨 새로운 정당, 즉 통일 발전 위원회(Ittihad ve Terraqqi Jem'iyeti)를 결성하고, 1908년에 발칸 주둔군 부대의 지지를 받아 술탄에게 1876년의 헌정 회복을 요구하는 최후의 통첩을 보냈다. 결국, 술탄은 불리한 전세를 뒤집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일시적으로 굴복하여 통일 발전 위원회가 수락할 수 있는 내각을 임명하고 해산된 옛 오스만 의회를 소집하였다. 이것이 곧 청년 터키당의 집권이다.
한편, 1908년에 불가리아가 독립하는 등의 오스만 제국에 있어서 수치스러운 사건이 발생하자, 술탄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 반동 세력이 일어났으나 軍部가 혁명을 지지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이와 함께, 오스만 제국은 청년 터키당의 지배(1908∼1918) 아래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는 세속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다. 이 당의 지배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터키가 패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2. 오스만조 치하의 아랍 민족
1) 17세기 경 중근동의 아랍 지역
1517년, 술탄 셀림 1세(Selim Ⅰ, 1512∼1520)의 이집트 점령, 1534년 술탄 술레이만 2세(Suleiman Ⅱ, 1520∼1566)의 이라크 및 '비옥한 초생달 지역'(Fertile Crescent)의 정복 등으로 중근동의 아랍인 거주 지역은 거의 16세기 전반기에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나 순니 이슬람 공동체를 이루어 4세기 가량 지속되었다. 이 공동체에서 아랍어 사용 인종은 피지배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동료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즉, 관료 조직체에 버금가는 종교 조직체의 우두머리인 세이훌 이슬람(Sheikhul-Islam)은 대체로 아랍인이었다. 또, 오스만가는 통혼으로 피가 많이 섞여 있었고, 스스로도 오스만 투르크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 명칭은 유럽 학자들이 붙인 것이다. 아랍인 거주 지역은 술레이만 2세 때 제정되어 1525년에 공포된 법전에 따라 여러 주로 나누어졌으나, 다양한 행정체제 아래 있었다. 이집트는 행정권과 사법권의 일부를 가진 총독(W?li), 재정권(Defterdar) 및 6개 군관구(Ojag)로 나누어져 있었다. 총독의 임기는 1년이며, 연장이 가능하엿삳. 한편, 6개 군관구는 총독의 관할 아래 있지 않고 이스탄불에서 직접 임명되는 사령관(Agha)의 지휘 아래 있었다. 재정관도 이와 비슷하였다. 오스만군이 1516년에 이집트의 맘룩군을 무찔렀을 때 일부 맘룩 배신자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이 배신자가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므로 맘룩 제도는 그대로 존속될 수 있었다. 그래서 맘룩의 지도자들은 이지브 내 각 지역의 최고 행정관(Q?'im maq?m), 재정 담당관 및 순례 집행관(amir al-hajj) 등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그 후, 맘룩 지도자들은 이스탄불의 중앙 집권이 허약하게 된 17세기 중엽에 잃었던 세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토착민은 고위 관료층에 거의 발탁되지 않고 단순히 세금 내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17세기 전반기에 이르러,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여 발칸 반도의 영토를 잃게 되자, 그 영향이 중근동 지역에도 미쳤다. 바그다드는 1623∼1638년 사이에 다시 사파위조의 이란에 점령당하고, 1635년에는 예멘에 대한 종주권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이스탄불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여러 지역에서도 지방 토후들가느이 권력 다툼이 일어나 무정부 상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1605년에는 이집트 총독에 대한 군부의 반란이 일어나 총독이 살해되었고, 1609년에는 나일강 하류 지역이 반란군에게 한동안 점령되었다. 비록 이 반란의 진압을 제2의 이집트 정복이라 불렀지만, 그 후에도 오스만 총독의 통치는 확고하지 못하였다. 새로운 맘룩 지도층은 17세기 중엽에 총독과 이집트 주둔 예니체리의 지휘관들과 함께 권력을 나누어 가졌으며, 또 제국의 중앙부에서 멀거나 오스만 군이 접근하기 힘든 지역에서는 지방 토후의 세력이 서서히 형성되었다. 하이렛딘 바바로사(Khayreddin Barbarossa) 대제독에 의하여 1520년대에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 들어온 튀니지와 알제리도 각각 알제(Algier)의 데이(Dey, 오스만 국의 직위명, 즉 총독의 칭호)와 투니스의 베이(Bey, 오스만 국의 직위명, 즉 총독의 칭호)가 세습적인 準왕조로 발전하였다. 또, 바스라(Basra)주에서는 1597년 경에 아프라시얍(Afrasiyab)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여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것은 드루즈(Druz)파의 수장(Amir) 파르훗 딘(Fakhr al-Din)으로서, 그는 1590∼1635년 사이에 레바논을 휩쓸었다. 그는 레바논 지역의 다른 수장을 제압하여 그 세력을 팽창하였으므로, 한때는 오스만 제국의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 대한 통치도 위협하였다. 파흐룻 딘은 유럽 열강과의 독자적인 무역 관계 수립 및 다른 종파에 관용을 베푸는 정책으로 19세기 중근동의 통치자들에게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파흐룻 딘의 반란은 술탄 무라드 4세(Mur?d Ⅳ, 1623∼1640)의 노력으로 진화되고 바그다드도 회복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재상 메흐메드 쾨프륄뤼(Mehmed Koprulu, 1656∼1661 재직)와 그의 아들 아흐메드(Ahmed)의 끈질긴 노력에 의하여 반란 지역에서 중앙 정부의 권위는 완전히 확립되지는 못했지만 무정부 상태는 저지되었다.
2) 18세기의 동향
18세기에 들어와서도 오스만 제국의 쇠퇴는 계속되었다. 그와 함께 이집트와 비옥한 초생달 지역의 대도시에서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주의 총독, 주둔군 사령관 및 세금 징수 청부인(tax farmer) 사이에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 이들은 주로 자기의 사병을 동원하였는데, 이 가운데서 가장 지속적인 지방 권력자는 바그다드 총독인 하산 파샤(Hasan Pasha, 1704∼1723 재직)였다.
무라드 4세 때 체결한 조약에 의하여 안정된 오스만-이란의 국경은 사파위조(Safawi朝, 1500∼1722)의 붕괴로 인해 근본적으로 뒤흔들렸다. 1722년, 아프간 족의 침입으로 사파위조가 멸망할 때부터 나디르 샤(N?dir Sh?h, 1736∼1747)가 죽을 때까지, 25년간 오스만 술탄과 이란의 통치자 사이에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바그다드에는 강력한 행정부, 즉 총독이 필요하였다. 이런 중대 상황에 있어서 1723년 하산 파샤가 죽자 그의 아들인 아흐메드 파샤(A?med Pasha, 1723∼1747 재직)가 그 뒤를 이어 총독이 되었다. 이들 부자 총독은 조지아(Georgia) 출신의 맘룩을 양성하여 전투병과 행정 관료로 기용하였다. 결국 이들 맘룩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 1749년에 권력을 장악하자, 오스만 술탄도 이를 묵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즉, 맘룩 총독 제도가 확립되어 1831년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서쪽의 지중해 연안 지역의 다마스쿠스는 해마다 메카 순례객이 집합하여 출발하는 곳이기 때문에 중요한 지점이었다. 순례객의 행렬은 종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중요한 행사여서 이들의 안전은 곧 술탄의 위신과 직결되어 있었다. 더구나 17, 8세기에 오스만의 권력이 허약해지자 북부 아라비아와 시리아 사막의 유목민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또 다마스쿠스 주둔군이 양 파로 갈라져 권력 투쟁을 하고 있어서 순례객의 안전이 크게 위협당하고 있었다.
이 혼란의 틈바구니 속에서 아즘가('Azm家)가 일어나 권력을 장악하여 순례객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아즘가의 전성기는 1725∼1757년 사이이며, 시리아 지역의 대부분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시리아는 소아시아 반도에 가까이 있었고, 이집트 및 아라비아 반도의 홍해 연안을 연결시키는 요지이므로 아즘 가의 통치는 세습제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아즘 가는 이라크의 경우와 달리 맘룩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으므로 지방의 자주 독립 세력으로 존속할 바탕이 허약하였다. 또, 알렙포(Aleppo)를 중심으로 한 시리아 북부 지역은 상업상으로도 다마스쿠스 및 소아시아 반도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므로 양 지역의 정치 변동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서쪽의 레바논 산악 지역에서는 쉬하브가(Shih?b家)가 일어나 동족이 파흐룻 딘(Fakhr al-Din)의 영역을 점령하여 1697년에 토후국(Amirate)을 세웠다. 또, 남쪽의 갈릴리(Galilee) 지역에서는 세금 징수 청부인인 자히르 알 우마르(??hir al-'Umar)가 세력을 확장하여 1746년에 해안 도시 아크레(Acre)를 점령하고 근거지로 삼았다. 그의 권력 바탕은 안정과 세금 완화를 통한 농업 인구의 호감, 유럽 상인들과의 선린 관계에 의한 아크레의 융성, 종교차별의 철폐에 의한 비무슬림들의 지지 획득, 그리고 사병의 효율적인 관리에 두었다. 그리하여, 그는 술탄의 권력이 간섭하지 않는 한 시리아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버틸 수 있었다.
18세기에 들어와서 이집트 내의 권력 투쟁은 더욱 복잡하였다. 이것은 인물 중심이 아닌 파당 간의 분쟁이었다. 가장 유력하고 오래된 파당은 세공인과 부족을 바탕으로 한 니스프 사아드(Nisf Sa'd)와 니스프 하람(Nisf Har?m)이었다. 이 두 파당은 17세기부터 경쟁 관계에 있던 파카리야(Faqariyya)와 카심야(Qasimiyya) 맘룩 파당과 각각 결합하여 18세기 초에도 세력 확장에 몰두한 세력이었다. 이들 세력 외에도 오스만 주둔군 세력이 있었다. 6군관구로 나누어진 주둔군 가운데 예니체리 관구와 아잡군은 서로 대결하였으며, 나머지 관구군은 후자에 지원을 주는 경향이 있었다. 결국 1711년에 이 분쟁을 제거하기 위하여 한 부대로 통합되었으나 만족한 해결은 보지 못하였다. 17세기 말엽에 시작된 이집트 내의 권력 분쟁은 18세기에도 계속되어 총독은 유명무실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실권자는 군관구의 고급 장교와 행정 고위직이나 군관구 외 지역운의 사령관직을 지니고 있는 맘룩 출신의 베이(Bey)들이었다.
이들 맘룩 출신 베이의 한 무리인 카즈두글리야(Q?zdughliyya)는 17세기 말경에 생겨나서 파카리야 맘룩 그늘 밑에 세력을 길렀으나 1748년에 이르러 다은 세력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력한 파당으로 성장하였다. 이 파당의 고위 구성원은 영주에 유사한 베이가 되어 19세기 초에 총독인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1805∼1845 재직)에 의하여 제거될 때까지 이집트의 지배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지도적인 베이는 토후장(Sheikhul-balad)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왕위로 발전하는 경향도 있었으나 카즈두글리야 파당의 내부 분쟁으로 성립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외래 인사들이 지배층이 되어 이집트의 토착민을 통치하는 시기에 그 중개 역할을 담당한 계층이 종교계의 원로인 울라마('Ulam?')였다. 울라마는 토착민의 존경을 받았고, 또 그들의 어려움을 지배층에 전달하는 중개 역할의 대가로 지배층은 울라마에 면세의 특전을 주었다.
18세기 후반기는 지중해 연안의 중근동에 처음으로 유럽의 군사력이 나타나서 지금까지 존속하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는 유럽 열강에 의한 오스만군의 패배로 잠식당했으나, 한편으로 중근동에 대한 방패의 역할도 하여 제국의 아랍 영토에는 외부의 간섭없이 정치 발전이 이루어졌다. 18세기 전반기까지 유럽 열강은 오스만 제국의 아랍 영토에 상인과 선교사를 파견하여 지방 호족의 보호를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방패는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1768∼1774년의 러·터 전쟁) 중에 지중해에 함대를 보내어 오스만군을 쳐부수고 반란의 깃발을 올린 아크레의 자히르 알 우마르와 이집트의 토후장인 알리 베이(Ali Bey)에게 원조를 제공했을 때 뚫렸다. 더구나 1798년에 나폴레옹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자 이 방패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알리 베이는 본래 조지아(Georgia) 출신 기독교도였으나 맘룩이 되었다. 그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합되어 있었던 옛 맘룩 왕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토후장 자리를 이용하여 카즈두글리야 체제를 그의 개인 왕조로 바꿀 야심을 가지고 1770년에 군대를 다마스쿠스로 보냈다. 그는 이 작전에 자히르 알 우마르와 러시아의 원조를 약속받았으나 동료 맘룩들의 배신으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꿈은 무함마드 알리에 의하여 18세기 초에 일시적으로 실현되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지방자치 세력의 아성을 부수어 주권이 미치는 영토 내에서 행정 체계도 잡아야 했다. 특히, 러·터 전쟁기간 중에 알리 베이와 자히르 알 우마르의 세력 향상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허약한 제국 정부는 이간책을 사용하였다. 즉, 알리 베이의 두 부장, 즉 맘룩 출신인 아붓 다합(Abu'l-Dhahab)과 보스닝 출신의 아흐마드 앗 자자르(Ahmad al-Jazz?r)에게 접근하여 회유책을 폈다. 시리아 원정을 이끌었던 아붓 다합을 다마스쿠스에서 1771년에 이집트로 돌아가게 하여 알리 베이를 죽이고 토후장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도 1775년에 자히르의 평정에 나가 전사하였다. 한편, 앗 자자르도 1768년에 알리 베이와의 관계를 끊고 자히르의 토벌에 공헌을 세워 시돈(Sidon, 레바논의 도시)州의 총독이 되었으나, 자히르의 옛 수도인 아크레에 거주하였다. 앗 자자르의 총독 정치는 1804년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지방 호족 정치의 전통적 본질인 술탄에 대한 충성심으로 일관하였다. 아크레가 1799년 나폴레옹 군에 포위당했을 때 그는 굴하지 않고 저항하여 충성심을 보여 주었다. 오스만 정부의 아붓 다합과 앗 자자르에 대한 정책은 자립적인 총독의 측근을 회유하는 전통적인 정책의 일단면을 보여 준 것이다. 아붓 다합이 죽은 뒤 이집트는 이브라힘 베이(Ibr?him Bey)와 무라드 베이(Mur?d Bey)의 양두체제 아래 들어갔다. 오스만 정부는 이집트의 지배를 재확립하기 위하여 회유책을 썼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786년에 자히르의 반란에 공훈을 세운 제독 하산 파샤(Hasan Pasha)를 파견하여 카이로와 나일강 삼각주를 점령하였으나, 두베이는 상류로 도피하여 계속 저항을 했으므로 할 수 없이 다음 해 철수시켰다. 그 후, 이집트는 양두 체제가 회복되어 1798년 나폴레옹 1세의 원정시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오스만의 통치가 제대로 미치지 않는 아라비아 반도의 나즈드(Najd) 지방에서는 1744년에 소영주(Amir)인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Muhammad ibn Sa'?d)가 당시 이슬람 계율의 이완을 개탄하여 엄격한 한발리 법학파의 계율을 주창한 신학자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Muhammed ibn 'Abd al-Wahh?b)과 결합하여 수피(S?fi, 이슬람 신비주의자)의 성인 또는 성지 숭배를 배척하고, 초창기 이슬람의 순수한 관행과 믿음에 돌아갈 것을 호소하였다. 1792년, 이븐 압둘 와합이 사망했을 때 사우드가는 중앙 아라비아 전역에 그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와하비(Wahhabi) 운동을 인도 지역에 전파시켰다. 이 운동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 있는 홍해 연안의 히자즈(?ij?z, 즉 이슬람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지역)와 남부 이라크 지방을 위협하였다. 1802년에 이 와합의 추종자는 시아파의 성지인 카르발라(Karbal?')를 점령, 약탈하였다. 이 약탈 전쟁은 수 년 동안 남부 이라크 지방에서 계속되었다.
와하비 운동은 오스만 제국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며, 무슬림 공동체 안의 종교적 권외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제기시켰다. 백성들은 전통적으로 오스만 술탄은 가장 위대한 무슬림 통치자이고, 또 이슬람의 두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의 보호자로서 알라의 가호를 받는 것으로 믿었다. 더구나, 17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의 쇠퇴기에 술탄은 이슬람의 칼리프로 전세계 무슬림을 지배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무슬림의 원칙이 1803년, 1805년, 1807년에 일시적으로 메카와 메디나가 와합의 추종자에게 점령당하고, 그 후 몇 년 동안 계속하여 당시 와하비 운동의 지도자 사우드 이븐 압둘 아지즈 왕이 순례객을 괴롭히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아가서, 이 운동은 오스만 제국의 종교 체제인 울라마와 이의 보호를 받는 수피 종단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공인 이슬람 성법인 샤리아(Shari'?) 및 일반 관습에 의한 법률(qanun)의 법 체계에 바탕을 두고, 수피 종단의 믿음과 관례를 인정하였다. 수피 종단은 몰아적인 신비주의를 믿어 창조주의 뜻에 창조물이 맞추는 것으로 신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와하비즘은 결국 이슬람 공동체와 무슬림 개개인의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었으나, 한동안 외면당한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다시 문제삼아 새로운 긴장을 일으켰다.
3) 무함마드 알리의 등장
프랑스가 동방진출의 교두보를 만들기 위하여 1798년에 단행한 나폴레옹 1세의 이집트 원정은 비록 3년 3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무슬림 세계에 심각한 파문을 가져왔다. 프랑스의 이집트 점령으로 영국은 자신의 동방진출에 장애가 될 것으로 우려한 나머지 1801년에 오스만군과 함께 프랑스군을 몰아내자, 이집트 내 맘룩들의 정치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는 알바니아 여단을 이끌고 프랑스 군을 격퇴하는데 큰 공훈을 세웠다. 프랑스군의 축출에 성공한 영국군이 1801년에 철수하자, 이집트에는 다시 오스만과 맘룩군만 유일한 세력으로 남게 되어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점령 기간 동안 혁명 사상의 영향을 받은 이집트 국민은 무자비한 맘룩의 통치나 현지 사정을 외면하는 오스만 통치를 거부하고 자립하려고 하였다. 울라마를 위시한 이집트 민중은 1804년 3월에 조세의 납부를 거부하고 들고 일어나 그동안 원한을 가져왔던 맘룩 베이들을 카이로에서 몰아내고 울라마를 통하여 오스만 정부의 이집트 총독에게 조세 감면과 정책 결정에 이집트인의 참여를 요구하였다. 총독이 이를 거절하자 무장한 민중세력이 그를 제거하고, 1805년 5월에 알바니아 여단의 사령관이었던 무함마드 알리를 총독으로 선임하니, 이집트 역사상 민중의 권력 참여가 성공한 최초의 중대한 사건이 되었다.
오스만 정부는 세르비아 반란에 시달려 허약해졌으므로 그의 총독직을 어쩔 수 없이 인준해야만 했다. 무함마드 알리는 그의 정권이 민중의 신임이나 맘룩의 협조나 술탄의 지지에 바탕을 두면 오래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교육 제도, 행정 체계 및 군 조직의 강화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1811년에 술탄과 영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맘룩 지도자를 아라비아의 와하비 운동을 진압시키는 문제를 상의한다는 구실 아래 카이로성에 초대하여 몰살시켜 버리니, 이것이 곧 1250년대 이후 이집트 정치의 핵심역할을 해 온 맘룩 세력의 근절이다. 그는 광범위한 권력을 장악하자, 서방 문물을 받아들여 많은 개혁을 단행하고, 또 총독직을 세습제로 바꾸었기 때문에 현재 이집트의 아버지로 불리우고 있다. 나폴레옹 1세의 이집트 원정은 영·프간의 경쟁을 일으켜, 그 후에도 계속 이 지역을 둘러싼 양 세력의 충돌은 결국 1904년의 영·프 협정(Entente Cordiale)에 의하여 해결될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이와 같은 경합관계 때문에 결국 무함마드 알리는 유럽 열강의 대 이집트 정책 범위 내에서 대처방안을 만들어 그의 야심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집트에서의 그의 지위와 독립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행한 경제개혁 가운데는 조세와 토지 소유 제도의 변혁이 중요하다. 맘룩 베이들을 제거한 후 그들의 봉토(Iltiz?m?t)를 왕실 소유로 만들어 최대의 지주가 되었고, 또 종래까지 면세 혜택을 받아 온 종교 기관의 재산(Waqf)과 공유 토지(Wasiya)에도 과세를 부과하였으며, 또 무역의 국가 독점을 꾀하여 세입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산업 혁명을 달성하려는 그의 시도는 시기 상조였기 때문에 실패하고야 말았다. 맘룩 군대가 터키인과 코카서스 등지의 외국인으로 구성된 데 비하여 무함마드 알리는 이집트 농민 출신을 중심으로 군대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이집트 민족 세력의 바탕이 되었다. 또, 행정기구를 유럽식의 부처로 개편하고, 국가 예산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 행정 기구와 군 조직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유럽식 교육을 받은 인재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많은 학교를 세웠으며, 또 우수한 학생은 유럽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 학교의 교과서용으로 유럽의 책을 번역하기 위하여 정부 산하에 번역 기관을 설립하였으며, 그 결과 이집트는 유럽의 문물이 중근동에 들어가는 중요한 통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유럽식 교육이 정부 관료가 되는 유일한 수단이 됨에 따라 전통적인 종교 교육 기관과 울라마의 지위는 위축되었다. 신속한 개혁을 통하여 무함마드 알리는 자기의 세력 범위를 확대시키고, 또 이집트의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다. 그의 군대는 1811∼1818년 사이에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와 나즈드를 점령하여 와하비 운동에 치명타를 입힌 결과, 이 지역은 1840년까지 그의 영역으로 남게 되었다. 총독의 신식 군대는 1822년과 1827년에 일어난 그리스의 독립운동을 술탄의 요청에 따라 진압하려 하였으나, 1827년 터키·이집트 연합 함대가 영·프 연합 함대에 의하여 그리스의 나바리노(Navarino) 근해에서 참패 당하여 그리스는 독립을 얻게 되었다. 한편, 무함마드 알리는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하였다.
그 후, 무함마드 알리가 함대 재건을 위한 재목 획득과 세력의 확장을 위하여 1831년에 시리아 정복을 단행하자, 술탄 마흐무드 2세(Mahm?d Ⅱ)와 정면 충돌하게 되었다. 총독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의 지휘 아래 이집트군은 시리아를 점령하고, 1832년 12월에 오스만군을 코냐(Konya)에서 패퇴시켰다. 그 결과, 무함마드 알리는 술탄으로부터 시리아를 양도받아 아들인 이브라힘을 시리아 주지사로 임명하였다. 이브라힘은 레바논의 아미르(Amir)인 쉬하브가(Shih?b家)의 바쉬르 2세(Bashir Ⅱ)의 협조를 받았으나, 이 혼란을 이용하여 강성해진 각 지역의 호족 세력을 꺾고 중앙 집권을 확립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이집트의 개혁 정책을 시리아에도 적용하여 일반서민의 과세 부담을 경감시키는 조치를 취했으나, 너무나 급진적이었고, 또 유목 생활을 하는 베두윈 족을 강제로 정착시켰으므로 1834년 이후 계속 이브라힘 체제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집트의 시리아 점령에 끝장을 가져온 것은 이러한 반란이 아니라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의 간섭 때문이었다.
술탄 마흐무드 2세는 유럽식 신식 군대를 사용하여 조급하게 이브라힘을 힘으로 시리아에서 몰아 내려는 시도에서 전쟁을 일으켰으나, 1839년 6월의 네집(Nejib) 전투에서 참패당하고 며칠 후 사망하였다. 또, 오스만 함대도 알렉산드리아에서 무함마드 알리에게 항복하니, 오스만 제국은 붕괴 직전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사태에서처럼 무함마드 알리의 성공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자,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열강들이 간섭하였다. 지방 반란군의 공격뿐만 아니라, 영국과 오스트리아 연합 함대의 침입을 받자 이브라힘은 1840년 겨울에 시리아에서 철수하였다. 그와 함께, 이집트에 협조하였던 바쉬르 2세도 그 정적의 압력을 받아 퇴위하였다. 비록 그가 쉬하브가의 마지막 아미르는 아니지만, 그의 후계자도 일 년 뒤에 폐위당하여, 이 가문의 세력은 끝나고 말았다.
1841년에 영국의 주도 아래 열린 런던 협정에서, 유럽 열강(프랑스 제외)은 무함마드 알리에게 이집트와 수단 이외의 지역에서 이집트군의 철수와 오스만 제국에의 반환을 결정하였으며, 또한 이집트군의 수를 1만 8천으로 제한하였다. 더구나, 이집트도 술탄의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되었고 무함마드 알리는 단지 총독직의 세습권만 인정받았다. 술탄 마흐무드 2세, 무함마드 알리, 바쉬르 2세 등은 각각 자기의 영역 안에서 전제정치를 행하여 쇠퇴기에 접어든 오스만 제국의 낡은 행정기구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 개혁 정책을 단행하였다. 비록 이브라힘의 시리아 통치가 성공적이라고 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기존 특권층의 아성을 부수어 중앙 집권적인 오스만 제국의 탄지마트(Tanzim?t) 정책에 공헌함으로써 제국이 재통합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실제로 무함마드 알리와 이브라힘은 술탄을 대신하여 시리아의 개혁을 단행한 셈이지만, 레바논은 이 때부터 그 특성을 살린 셈이다. 레바논은 1842년 쉬하브가의 몰락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 때부터 몇 년 동안 레바논은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의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쉬하브가의 전제에서 벗어난 레바논의 호족은 그들의 세력을 다시 주장하게 되었으며, 특히 로마 교황청과 연합한 마론파(Maron派) 기독교도는 전통적으로 레바논 산악 지역을 지배해 온 드루즈파(Druze派) 교도와 동등한 신분을 가지고 권력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거의 20년 동안 계속되어 온 양 교파 간의 반목 끝에 1860년 드루즈파와 무슬림은 레바논과 다마스쿠스에서 오스만 당국의 묵인 아래 기독교도를 학살하였다. 이 사건은 결국 열강의 간섭을 불러들여 1861년 6월 레바논에 대한 새로운 통치 大綱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결과, 레바논은 시리아 주에서 분리되어 모든 거주민은 종교적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였다. 그 후, 레바논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안정되어 평화롭게 발전하였다.
한편, 바그다드의 맘룩 출신 파샤들은 무함마드 알리가 이집트에서 쟁취한 형태의 자치권을 이미 오래 향유하고 있었다. 즉, 그 정권이 안정되었기 때문에 술탄 마흐무드 2세의 중앙 집권적 개혁에는 장애물이 되었다. 즉, 무함마드 알리의 반와하비 작전으로 이라크 맘룩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던 남쪽으로부터의 위협을 힘 안 들이고도 제거하였으며, 또 1826년 바그다드에 주둔하고 있었던 예니체리 여단이 술탄의 칙령이 해산되어 유럽식의 신식 군대에 재편성되어서 그 위협이 둔화되었다. 그 결과, 맘룩의 세력이 다시 생기를 찾았으나 마흐무드 2세는 1831년에 군대를 보내어 페스트의 유행으로 약화된 바그다드시를 점령하여 맘룩 출신의 총독을 제거하였다. 이 사건은 이브라힘 파샤의 시리아 원정 직전에 일어나 이라크는 오스만 제국에 다시 통합되었다.
4) 영국과 프랑스의 이해 관계
이집트에 대한 영·프의 경쟁은 나폴레옹 1세의 이집트 원정으로 시작되어 중근동에서 100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팽창 정책에 뒤늦게 뛰어든 독일이 19세기 말에 추구한 3B 정책, 즉 베를린-비잔틴(이스탄불)-바그다드의 철도 부설 정책에 따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Wilhelm Ⅱ, 1888∼1918)가 1898년에 이스탄불을 방문하자 이에 위협받은 양국은 1904년 영·프 협정(Entente Cordiale)을 체결하여 이 지역에 대한 양국의 필사적인 경쟁심을 다소 식혔다. 그렇지만, 상당히 긴 여운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남아 있었다. 중근동에 있어서 영·프 양국의 이해 관계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프랑스는 지중해의 동쪽과 남쪽 연안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목적이 있었다. 즉, 심자군 전쟁 당시의 전통적 목적에만 국한되었다. 그러나 영국에게 이 지역, 특히 이집트는 인도라는 거대한 식민지와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교두보로서, 무역과 군사적인 요충지였다. 또한, 프랑스는 1830년에 알제(Algiers)시를 점령하였고, 계속 인근 지역에 그 세력을 확대하여 마그리브(북서 아프리카) 전역을 정복하였으며, 또 19세기 중에는 끈질기게 레바논의 마론파 기독교도 사이에 그 영향력을 쌓아 올렸다. 이에 비하면, 영국의 중동지역 경영은 1822년 이전에는 매우 소규모였다. 1839년에 아든(Aden)을 기습 점령하였고, 1854년에 무스카트 오만(Musqat Oman)의 술탄으로부터 쿠리아 무리아(Kuria Muria) 섬을 양도받는 정도였다. 그러나, 영국의 근본 목적은 인도 지역으로 가는 전략적, 상업적으로 중요한 통로의 안전을 유지하여, 그 인근 지역을 근거로 움직이는 해적 및 노예 무역 활동을 억제하는데 있었다. 영국은 이 목적을 끈질기게 추구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영·프 경쟁 관계의 초점이 되어 온 이집트는 무함마드 알리와 그 후계자들, 특히 이스마일(Ism?'il, 1863∼1867)의 통치 기간 중에 국가 행정 기구가 프랑스식으로 개혁되었기 때문에 그 행정 양식이 오늘날까지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는 주로 이집트에 큰 관심을 두어 그 후견인 역할을 하였지만, 영국은 이스탄불의 술탄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이집트의 농업 생산물-초기에는 콩 종류, 다음에는 면화-의 수입국으로 등장하여, 이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 카이로를 경유해서 알렉산드리아와 수에즈를 연결하는 육로를 건설하였으며, 나중에는 압바스 1세('Abb?s Ⅰ, 1848∼1858)와 무함마드 사이드(Mu?ammad Said, 1854∼1863)의 통치 때 이 세 도시를 연결하는 중근동 최초의 철도를 부설하였다.
5) 무함마드 알리의 후계자
이집트를 경유하는 국제 통로에 대한 영국의 통제는 1854년에 무함마드 사이드가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Delessps)에게 수에즈 운하 건설권을 주었을 때 위협받게 되었다. 이 운하 건설이 영국의 위신에 손상을 줄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영국 정부는 외교적인 압력을 통하여 이 계획의 실현을 지연시키려 하였다. 이 운하는 계획보다 훨씬 늦게 1869년 이스마일 치하에서 개통되었다. 그러나, 이스마일은 이 공사 때문에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외세의 간섭만 더욱 불러들이게 되었다. 즉, 그는 1875년에 수에즈 운하 회사의 주식 가운데 이집트 지분인 44%를 영국에 팔게 되었다. 따라서, 이스마일의 통치 기간은 세습적인 총독제의 황금기와 파탄기가 동시에 교차하고 있었다.
1867년, 그는 술탄 압둘 아지즈('Abdul 'Aziz, 1861∼1876)로부터 케딥(Khediv, 페르시아 어로 군주)이라는 칭호를 받아 오스만 제국의 지방 총독 가운데 그의 지위가 우뚝함을 보여 주었다. 그보다 일년 전에 이스마일의 자손 가운데 장자 상속 제도에 의한 총독직의 계승을 술탄으로부터 허락받아 그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제2의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 이스마일은 이 대가로 술탄에 대한 조공액을 배로 늘였으며, 그 대신 독자적인 국제협정의 체결, 국제 차관의 조달 및 군대의 수적 제한 철폐 등의 혜택을 받았다. 그는 할아버지 무함마드 알리가 추구한 이집트의 개혁 정책과 팽창 정책을 추진 계승하였다. 그는 비록 전제 군주였지만, 1866년에 유럽 국가의 의회 제도를 본받아 간접 선거를 통하여 구성된 자문 의회를 만들었다. 이 자문 의회는 정치 의식이 강한 부유한 농업인과 상인의 발언 무대가 되었다.
미국의 남북 전쟁(1861∼1865) 중에 이집트의 농업과 경제는 커다란 전환기를 맞아 면화 단일 재배로 발전하여 상당한 득을 보았다. 그러나, 남북 전쟁이 끝나고 미국의 솜이 다시 세계 경제 시장에 등장하자, 이집트의 농민과 정부는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더구나, 이스마일은 무분별하게 외국의 차관을 받아들여, 1876년에는 거의 1천만 파운드의 부채를 지게 되었다. 이러한 부채는 곧 외세의 강화를 뜻하였다. 즉, 국제 차관단(Caise de la Dette publique)이 조직되어 2명의 조정관-영국인과 프랑스인 각 1명-이 이집트의 세입과 세출을 감시하게 되었다. 영·프 양국의 간섭은 극에 달하여 세출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심지어 4만 5천명의 군대를 1만 8천명으로 감소시켰으며, 이러한 외세의 간섭에 자극받아 군부 내의 민족 세력과 진보 세력이 들고 일어나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였다. 이 기회를 포착하여 영·프 양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은 종주인 술탄 압둘 하미드 2세('Abdul Hamid Ⅱ)에게 압력을 넣어 이스마일을 퇴위시키고 장남인 무함마드 타우피크(Mu?ammad Taufiq, 1879∼1892)가 그 뒤를 잇게 하였다. 그 결과 케딥조의 위신을 떨어지고 이집트 사태는 더욱 혼미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영국과 프랑스는 경쟁보다 오히려 협조하여 양국의 공동 이익을 추구하기에 급급하였다. 그러나, 군부 내에는 여전히 강력한 터키-서카시아(Turkey-Circassia)계가 중심 세력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적대적이고, 또 케딥에 대한 기대도 잃은 민족주의 세력도 도사리고 있었다. 민족주의 세력은 자문 의회 내에도 상당히 강력하였고, 또 국민의 지지도 받았다. 이 세력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 분노하여 아흐마드 우라비(Ahmad 'Urabi) 대령을 지도자로 삼아 케딥에게 당정과 위회 선거를 요구하여 관철하였다. 결국 애국당(al-hizb al-Watani)이 이끄는 민족주의 세력이 의회를 장악하고, 우라비 대령은 국방장관이 되었다.
이런 돌발적인 사태 변화에 놀란 영·프 양국은 최후 통첩의 형식을 빌어 공동 각서(AngloFrench Joint Note)를 1882년 1월에 발표하여 민족주의 세력의 제거를 요구하고, 케딥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으나 민족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오히려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영국 해군이 그해 7월에 알렉산드리아항을 점령하니, 케딥은 곧 영국군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9월에는 영국 육군이 우라비 지휘 하의 이집트군을 섬멸함으로써 우라비 운동은 끝나고 말았다. 비록 민족주의 세력의 집권은 1년도 되지 못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울라마를 비롯한 전 국민의 지지를 받았고, 오스만 제국 내의 아랍인 거주지역의 도시, 즉 다마스쿠스, 베이루트, 알렙포 등에서도 대중적인 지지를 받아 오스만 군이 16세기에 아랍 지역을 정복한 후 최초로 아랍족의 단결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영국의 이집트 점령은 장기화되어 이 나라는 실질적으로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6) 아라비아 반도
이슬람의 두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가 위치한 히자즈(Hij?z) 지역은 이슬람의 요람지이고 아랍주의의 발생지이기 때문에 무슬림, 특히 아랍 무슬림에게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이 반도의 중앙부인 나즈드(Najd) 지방에서 일어난 와하비 운동은 1810년대에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에 의하여 치명타를 입어 한동안 사라지는 듯했으나 1830년대에 사우드가의 등장과 함께 재기하였다. 그 후, 오스만 술탄에게 조공을 보내지 않았으므로 술탄은 다시 이집트 총독에게 이의 분쇄를 명령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술탄은 직접 통치를 도모하고자 1845년에 왈리(W?li, 총독)를 보내어 메디나를 점령하였으나, 나즈드에는 그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우드 가에서도 내분이 생겨 그 세력이 위축되었고 새로 일어난 샤마르(Shammar) 부족의 수장인 이븐 라쉬드(Ibn Rashid)의 세력이 서서히 확장되어 1870년대에 들어와서 중앙 아라비아에 확립되었다. 1891년에는 사우드가의 본거지인 리야드를 점령하자 그 일족은 쿠웨이트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2년, 현 사우디아라비아의 창건자인 압드 알 아지즈(Abd al-Aziz)가 20세의 나이로 약 200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리야드를 탈환한 사실은 이제 거의 전설화되어 있다. 그는 와하비 운동을 재건하여 형제단(Ikhw?n)을 조직하였고, 점차 세력을 회복한 그는 1913년에 터키군의 점령하에 있는 알 하사(al-Hasa, 바레인과 마주 보고 있는 페르시아만의 해안 지역)를 점령하여 영국의 영향권에 들어 있는 연안의 아랍 토후국가와 접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시기에 사우드가와 아라비아 반도에서의 주도권을 다투었던 경쟁자는 북쪽의 라쉬드가와 히자즈 지방의 후세인 이븐 알리(Husayn ibn 'Ali)였다.
한편, 예멘 지역은 본래 쉬아의 한 분파인 자이드 파가 8세기 후반부터 이 곳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 파는 계속해서 그 명맥을 이어 오다가 1633년에 이 파의 이맘 카심(Q?sim)의 영도 아래 오스만 투르크 군을 사나(S'ana)에서 추방하여 독립하였다. 그 후, 그의 자손은 때때로 중단되었지만 1849년에 터키 군이 다시 사나를 점령할 때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 후, 약 50년 동안 터키의 총독(W?li)이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예멘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골몰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터키 군은 고립되어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예멘은 에티오피아를 발판으로 하는 이탈리아와 아든(Aden, 남 예멘의 항구 도시)를 근거지로 하는 영국 세력의 각축장이 된 것이다.
('카타르시스' 블로그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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