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3년 3월 12일 새벽, 내시 몇 사람의 인도를
받으며 궁궐 담을 넘어 다급하게 도망치는 사람이 있었다. 15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조선의 왕이었던 사나이, 광해군이 바로 그였다.
창덕궁으로 진입한 쿠데타군의 체포를 피해 담을 넘은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왕이 아니었다. 민가로 잠입하여 몸을 피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은 단
하루뿐이었다. 쿠데타 진압을 위해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그는 체포되었다. 그의 이름은 이제 '폐주(廢主)', '혼군(昏君)'이 되었다.
'쫓겨난 임금', '어리석은 임금'이란 뜻이다. 참으로 허망한 추락이었다. 그리고 유배지 제주에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19년. 그는
'인생무상', '권력무상'을 처절하게 곱씹어야 했다. 물론 죽은 뒤에도 그는 철저하게 매도되었다.
광해군은 애초 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정비(正妃)의 몸에서 난 적자도 아니고, 그나마
맏이가 아닌 둘째였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친형 임해군도 있었고, 배다른 동생이 열한 명이나 있었다. 모두가 그의 잠재적인 경쟁자들이었다. 아버지
선조 역시 광해군을 특별히 총애했다는 기록도 없다. 따라서 평화가 지속되었다면 광해군은 아마 왕자로서 평범하고 순탄한 일생을 마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광해군의 나이 열여덟 살 때였다. 일본군은 무섭게 밀고
올라왔다. 불과 보름 남짓 되는 사이 천리 길을 주파했다. 피난 보따리를 싸는 황망한 풍경 속에 광해군은 왕세자로 지명되었다. 그야말로 얼떨결의
일이었다. "총명한 광해군이 어떠냐?"라는 선조의 한마디에 신료들은 군말이 없었다. 아마 종묘사직이 곧 망할지도 모른다는 체념이 그들에게서
'논란'을 빼앗아갔을 것이다.
최후의 피난지 의주까지 이르는 동안 선조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더 이상 후퇴하지 않겠다"며
백성들을 안심시켰던 평양에서 몰래 빠져나왔을 때 백성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선조의 행방을 일본군에게 알려주려고 관아의 담벼락에 낙서를 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아예 노골적으로 물러나라고 종용하는 간 큰 사족들도 있었다. 삼남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소식도 있었지만 그들은 사실상 선조의
통제 바깥에 있었다.
광해군의 활동은 눈부셨다. 그는 아버지와 떨어져 적이 우글대는 평안도, 함경도를 거쳐 강원도 땅까지
들어갔다. 만나는 사족과 백성들에게 의병을 일으키라고 종용했다. "왕세자가 노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사람들을 움직였다. 아니
광해군의 존재 자체가 백성들에게는 '비빌 언덕'이 되었다. 선조가 궁벽진 의주로 들어간 이후 백성들에게서 조정이란 존재는 이미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자연히 광해군의 신망은 높아갔다. 적어도 왜란 초반 백성들에게 조선의 왕은 광해군이었다.
1593년 1월, 명군은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전세는 역전되었다. 일본군은 남으로
후퇴를 시작했고, 선조는 다시 통치권을 회복했다. 권력이란 본래 비정한 것이다. 선조는 이제 광해군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명나라 역시 '왕세자
광해군'을 승인하지 않았다. 승인해달라고 요청할 때마다 번번이 거부했다. 광해군이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이댔다. 곧이어 재혼한 선조에게서
아들이 또 태어났다. 영창대군이 그였다. 어쨌든 그는 적자였다. "광해군은 이제 끝났다". 향후 대권의 향방을 놓고 쑥덕이는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왕세자 광해군을 둘러싼 상황은 이래저래 꼬여가고 있었다.
1608년 선조는 세상을 떠났다. 17년을 '기다려온' 광해군은 비로소 왕이 되었다. 왕이 되었다는
안도감도 잠시 뿐 조정 안팎엔 난제들이 널려 있었다. 왜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백성들은 죽는다고 아우성이었고, 조정의 정치판도
뒤숭숭했다. 광해군이 왕이 되는데 적극 협력했던 북인들은 무엇인가 '보상'을 바라는 눈치였고,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남인과 서인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역시 광해군을 쳐다보고 있었다. 광해군은 과감하게 당파를 초월하여 연립정국을 구성했다. 남인 이원익과 서인 이항복이 정승이 되어 국정을
이끌었다. 북인들은 그것이 불만이었지만 광해군의 의지는 단호했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능력과 경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전후 복구의 첫 과업은 대동법이었다. 현물로 거두던 공물을 쌀로 대신 내도록 했다. 비록
경기도에서만 실시했지만 백성들은 열광했다. 대동법 덕분에 민생이 펴진다고 좋아했다. 그것은 분명 백성들에 대한 정권 차원의 양보였다. 하지만
현물 체제에서 이익을 보았던 부류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개혁이란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다. 이어『동의보감』을 찍어내고, 사고도 정비하고 왜란의
후유증 수습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들을 펼쳤다. 그럭저럭 전란의 상처는 아물어 가는 듯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조정의 정쟁은 그치지 않았고 여기저기서 역모가 터졌다. 역모 때마다 형제들의
이름이 거명되었다. 물론 그 중심엔 적자인 영창대군의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17년 동안이나 왕세자로서 전전긍긍했던 악몽이
떠올랐다. 광해군은 소심한 인물이었다. 그 틈을 대북파 이이첨 등이 파고들었다. 자신의 권력을 지켜야겠다는 조바심이 커지면서 광해군은 서서히
이이첨 등에게로 기울어갔다. 연립정국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영창대군은 살해되었고,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대비는 덕수궁으로
유폐되었다. 남인과 서인들은 조정에서 쫓겨났다.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조바심은 또 다른 형태로 표출되었다. 광해군은 신료들에게 서울을 옮기자고
했다. 서울의 왕기가 다했다는 것이다. 신료들의 반발 때문에 여의치 않자 이제 새로 궁궐들을 짓기 시작했다. 인경궁과 경덕궁이 그것이었다.
거대한 토목공사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다. 재원 조달을 독려하기 하기 위해 특별 관원들을 지방에 파견했고 벼슬도 팔았다. 백성들은 죽겠다고
아우성이었고, 쫓겨난 서인과 남인들은 눈을 흘겼다. 토목공사를 중단하라는 신료들의 요구에 광해군은 귀를 막았다.
나라 밖에서도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해 있을 무렵 만주에서는 여진족 추장
누르하치가 뜨고 있었다. 주변 여진족들을 야금야금 통합하여 명나라를 자극하더니 1618년엔 아예 노골적으로 명나라에 도전했다. 만주의 요충인
무순(撫順)을 점령해 버렸던 것이다. 아예 나라의 명칭도 후금(後金)이라고 정했다. 명 조정은 경악했다. 누르하치를 손봐줄 원정군을 편성하면서
조선에도 손을 내밀었다.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거의 망할 뻔했을 때 우리는 원군을 보내 조선을 구원했다. 이제 조선이 그 은혜에 보답할
차례다." 그러면서 명은 2만명의 원군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광해군은 한마디로 안 된다고 했다. "사나운 후금과 노회한 명의 싸움에 끼여들면 망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그는 명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사신을 줄줄이 북경으로 보냈다. 명의 조야를 설득할 생각이었다. 조정의 신료들은
들고일어났다. "명은 우리에게 부모의 나라이며 구원해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아우성이었다. 명 역시 거부하는 조선을 먼저 손봐주어야 한다고
위협했다. 광해군은 결국 군대를 보냈다. 하지만 박박 긁어모아 보낸 1만 3천여명의 조선군은 1619년의 '심하 전투'에서 누르하치군에게
참패했다. 총사령관 강홍립을 비롯한 생존자들은 누르하치에게 항복하고 후금 땅에 억류되었다.
조정의 신료들은 강홍립의 가족을 잡아들여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광해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염을 토했다. "거봐라. 나는 이 전쟁의 승패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농사꾼들을 호랑이 굴로 밀어 넣었으니 패한 것은
당연하다. 이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그러면서 이후에도 계속된 명의 원조 요구를 일축했다. 때로는 사신을, 때로는 첩자를 보내 끊임없이
명과 후금의 동향을 파악했다. 그만큼 '정보 마인드'를 지니고 국제정세 변화에 대처하려 했던 군주는 일찍이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도 사자는
왕래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 같은 지론을 바탕으로 그는 명을 주무르고 후금을 다독여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냈다. 왜란을
몸으로 겪은 체험에서 우러난 절묘한 생존술이자 외교술이었다.
하지만 그는 1623년 인조반정을 맞아 쫓겨났다. 그를 왕위에서 끌어내린 세력들은 "어머니를
유폐하고 동생을 죽인 것", "명의 은혜를 배신한 것", "거대한 토목공사를 일으킨 것" 등을 거사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가 강상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명분인 셈이다. 하지만 명분만으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거사를 감행 할 수는 없는 법. 거기에는 반정 주체들의 권력욕과 같은 실존적
욕망이 스며들어 있었다.
광해군의 일생은 극적이다. 영욕과 부침으로 점철된 한편의 드라마 같기도 하다. 왜란 중에 왕세자로서
보인 활약이나 명과 후금을 요리했던 절묘한 외교술은 그 인생의 빛이었다. 하지만 그림자도 만만치 않았다. 끝내 '적장자에 대한 콤플렉스'를 벗어
던지지 못하고 당파 사이의 정쟁을 추스르는데 실패했던 것, 토목공사를 그만두라는 외침에 귀를 막았던 독선과 아집은 그를 결국 파멸로 이끌었다.
"외교는 내정의 연장"이라 했던가? 그의 빛나는 외교는 끝내 그늘진 내정 때문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그를 부정했던 인조반정의 주체들 역시 그를 뛰어넘지 못했다. 광해군대가 남긴 부정적인 유산을
청산하는데도, 산적한 개혁의 과제들을 해결하는데도 실패했다. 병자호란의 참담한 항복은 그 귀결이자 상징이었다. 광해군의 극적인 일생을 더듬을
때마다 자꾸 오늘의 현실이 오버랩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