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초부터 조선 초까지의 역사 서술의 경향,
"유교적 합리성은 무조건 옳은가?"
삼국시대 이전에도 역사기록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삼국사기에 언급되는 고구려의
『유기留記』라는 존재를 통해 그 여부를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국초부터 문자가 있었고, 역사의 기록에도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좀 더 상고해본다면, '유기'라는 제목이 떠도는 사실들의 기록이라는 뜻이고, 국초에 100권이 넘게 방대한 분량으로 편찬된
사실을 본다면 고구려 역사 기록이라기 보다, 고구려 이전 조선이나 부여 등의 사적, 그리고 기타 떠도는 설화나 신화등을 채집해서 기록했다고
생각된다. 좀 더 유력하게는 고조선의 기록이 그 주류를 이루었을거라는 추측 또한 해볼 수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또한 '국초'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건국 직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볼때 유기는 체계적으로 역사가 정리된 프로젝트라고 보기 보다는 새로운 국가의 정통성과 정체성과 관련해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채록이 이루어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유기는 잘 알려진데로 영양왕 때 태학박사 이문진이 『신집新集』이란 이름으로 체계있게
정리하였다. 영양왕 때는 수나라 양제의 사상최대 수-고구려 전쟁이 일어난 시기다. '신집'은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여 내부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추진되었다고 보여지며 이전 체계적이지 못한 '유기'의 단점을 보완해 역사서의 체계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는데, 100권이던 유기가 5권으로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간단히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론이 많지만 흔히 국가적인 성쇄기, 위기상황에서 역사서가 편찬되었다는데는 별다른 의문이 없다.
한민족의 고대에 있어서 역사서 편찬이란 더 그런 점이 부각된다. 중국의 경우는 사마천이 집대성한 『사기史記』이후 이전왕조의 역사를 그 왕조의
권력이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자부하는 왕조가 편찬함으로써 '25사'라는 방대한 분량의 전사全史 를 남길 수 있었으나 삼국시대에는 보통 해당국가가
해당국가의 역사를 편찬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이것은 역사의 객관성보다는 왕조의 정통성이나 국가적 정당성을 강조하는데 역사가 활용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에도 진흥왕때 『국사國史』가 편찬되는데, 내부 체제를 정비하고 외부로 세력을 확장했던 시기다.
다만 백제의 경우에는 의문이 많다. 일반적으로 근초고왕때 편찬된 역사서라고 알려진 『서기書記』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보통 근초고왕이 내부의 체제를 정비했다는데는 동의하지만 삼국사기에 근초고왕이 국외의 백제진출을 이끌었는지에 대해 나와있지 않고, 또 '박사 고흥을 얻어 이때부터 '서기'를 가졌다'라는 기록에서 과연 '서기'를 역사서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이론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즉, 보통명사로 여겨 백제가 이때부터 역사를 기록했다고 여길 수 있는 여지가 많다. 때문에 그 근거가 불확실한 '서기'를 역사서로 보는 것 보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와있는 『백제본기百濟本紀』, 『백제기百濟記』, 『백제신찬百濟新撰』등을 백제의 역사서로 생각하는 게 더 타당하다고 본다. '서기'에 대한 집착은, 어쩌면 역사학자들의 맹목적인 '일반론'의 오류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망국의 역사에 대한 말살, 당나라에 '사마천'은 없었다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 수도의 사고史庫 에 보관되어 있던 수많은
역사기록들이 불태워졌다. 망국의 역사는 기록될 가치가 없다는 사고방식은 당시로서는 그 국가의 정통성과 역사를 말살시키는 승자의 위대한
전리품이었지만, 우리 역사에서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오늘날 백제와 고구려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일본서기나 고구려 비문,
중국기록등을 많이 참고하고 있다. 역사에 대한 말살은 이때만이 아니었다. 후백제의 멸망직후, 견훤은 후백제가 수집한 역사기록들을 다시한번
불태운다. 물론 이렇게 불태워졌다고 해서, 역사기록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었지만, 이 '말살'은 좀 더 후대에 이르러 두 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는 데에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이후 신라는 내부체제 강화를 위한 역사서를 편찬하게 된다. 주로 8세기 이후 신라의 역사서는
관찬이 아닌 사찬이지만, 사찬이라 하더라도 김대문 등 국가적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서있는 사람들이 주도해 『화랑세기花郞世記』등의 역사서를
편찬하는데 주로 신라 내부의 특수적인 상황을 반영한 것들이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내용과 특징과 유사한 것들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화랑세기는
그 동안 현존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가 90년대에 와서 그 진면목이 알려진다. 주로 위작론에 서 있는 노태돈과 윤선태, 진본론에 서있는
이종욱과 김태식 간의 2대에 걸친 논쟁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진본론의 입장에서의 마지막 반격 이후 위작론에서는 반격이 없어 위작론의 입지가
사실상 학계에서 많이 약해지고 있다고 보인다. 이미 국어학계에서는 화랑세기를 진본으로 사실상 규정하고 있는 상태라서, 신라 말의 역사인식이나
서술을 참고하는데 화랑세기가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합리성'의 잣대에 말살된 소중한 역사기록들
우리나라에 유교사관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9세기 신라 말이다. 이른바 권력에서 밀려난 6두품 지식인 최치원등이 이를 주도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고려 초에 와서 본격화되기 시작했으며 그 유교사관의 결정판이 『삼국사기三國史記』다. 김부식은 묘청의 난에서 승전한 직후 국가의 중앙권력을 장악해 '삼국사기'를 저술하는데, 이전에 신라말, 혹은 고려 초에 쓰여졌다고 생각되는 구삼국사를 토대로 하여 쓰여진 이 삼국사기는, 합리성에 맞지 않는 '신이사적'이나 '괴력난신'등의 역사기록들을 '정사'의 범위 내에서 탈루시켜 버림으로써 역사서술의 합리성과 체계를 세웠다고는 하나 그 합리성의 이름에서, 서술되었어야 하는 많은 역사기록들이 누락되거나 정사의 범위에서 축출되는 결과를 가져 온다. 신채호는 국가의 중앙담론을 점유하고 유교 합리사관에 입각해 역사를 재단한 김부식이 국가권력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묘청의 난'을 1천년래 제 1대 사건이라고 안타깝게 칭함으로써, 김부식 이후에 우리나라의 특수성에 입각한 전통적 역사서술은 중앙에서 말살되어 버리고 말았다고 개탄했다.
사실 삼국시대의 역사서술은 그것이 국가의 정통성을 강화시키고, 건국자나 주요인물의 영웅적이고 신비한 면모를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호태왕비의 역사서술을 보아도 그것은 뚜렷이 드러나고, 가장 우리나라 고대의 역사관과 근접했다고 추측되는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경우에도 유교적 합리성으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없는 사적들이 많다. 이것은 당대의 역사인식을 반영하는 적나라한, 가장 유용한 도구인데, 이것이 유교적 합리성에 의해 재단되는 것은 우리 고대사를 사실상 절름발이로 만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유교적 합리성에 입각한 역사기록'은 국가의 중앙권력에서 '관학'이 되어버렸으며, '비합리적이고 괴이하며 난잡한 이야기'들은 국가의 권력에서 쫒겨나고 외부 변두리에서 근근히 먹고 사는 '사학'의 위치에서 명맥만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이것은 삼국사기의 화랑 열전과 신라 말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단적으로 비교해봐도 그 정도를 알 수 있는데, 이 유교적 합리성은 때문에 사실상 상황이 다른 우리 고대사의 '왜곡'을 불러왔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고려 무신정권기와 대몽항쟁기를 제외하고 그 이후 명나라와 고려말, 조선의 관계에서 유교적 합리성은 더욱 더 공고하게 역사서술의 첫번째 원칙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남송의 주자성리학을 거치고 이 주자성리학이 수입된 고려말, 조선에 이르러서는 유교적 합리성은 '대국에 대해 소국을 낮추는' 굴종의 자세로 변모하며 조선 세조 때 편찬된 『고려사高麗史』등에서 우리 역사를 중화의 변방에 위치한 제후국으로 인식하게 하는 데 골몰하게 만든다.
또한 세종 대에 이르러서는 패배한 '사찬' 사서들 또한 중앙권력이 다시 거둬들어 궁정의 비밀사고에 보관하게 함으로써 국가의 '정통성'과 '역사학 이데올로기'가 유교적 합리성에 있음을 강조하고, 괴력난신이나 신이한 사적들을 말살하려 했다. 이런 국가의 의도와 유교적 합리성의 변질은 역사서의 말살과 더불어 우리 역사 서술의 비극을 초래하는 원인으로 지속적으로 작용했다. 조선 중기까지 이런 경향은 계속되었다.
('바로잡아야 할 역사' 카페, 도성수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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