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뭔지 좀...] - 야마도, 백제사람들이 세운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왕국

이강기 2015. 9. 17. 19:07

야마토 왕국의 시조, 창건 년도:
4세기말에 백제사람들이 세운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왕국


홍원탁 (서울대 교수)


야마도 왕국의 시조: 호무다 (褒武多, 品陀, 譽田, 應神)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호무다(應神)를 제1대가 아니라 제15대 왕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본 사학자들은 야마도(倭) 왕국이 호무다로부터 시작 한다고 믿는다. 1 어째서 그들이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이제 일본 사학계에서 거의 정설의 위치를 확보한 쯔다(津田左右吉)의 학설을 소개 한다.

20세기 초, 와세다 대학의 쯔다 소오끼치(津田左右吉, 1873-1961) 교수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호무다 이전의 왕들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은, 야마도 왕족을 태초로부터 내려오는 지배자로 만들기 위해, 모두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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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다가 첫 번째로 제시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시조 진무(神武) 이후 신공왕후의 남편이라는 주우아이(仲哀) 왕까지의 (즉 2대부터 14대 왕까지의) 13명의 왕들은, 단지 죽은 다음에 만들어서 부여된 시호(和風諡號)로만 기록이 되어 있다. 그 명칭들을 검토 해 보면, 전혀 각자의 고유성이 없다. 반면, 15대 왕이라는 호무다(應神) 부터는, 각기 왕자 때부터 실제로 사용된 특유한 이름을 그대로 왕의 시호로 기록했다. 오오진(應神)의 왕자 때 이름은 호무다(褒武多, 品陀)이고 (和風)시호도 호무다 (譽田)이다. 진무나 오오진이라는 중국식 명칭들은, 고사기와 일본서기 원본에 기록된 명칭들이 아니라, 8세기 후반에 오우미 미후네(淡海三船, 721-85)라는 학자에 의해 새삼 중국식(漢風)으로 만들어 부친 시호들이다

쯔다가 두 번째로 제시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14대 왕이라고 하는) 주우아이 왕까지의 왕위 승계 형식을 보면, 단한번의예외도없이, 전적으로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고대 중국왕조의 전통인] 부자간의 왕위 승계란, 7세기 후반 덴지(天智, 626-72) 이후에도 제대로 확립이 안 되었던 것이다. 오오진(應神) 이후 덴지 이전의 왕위 승계는 대부분 부자간이 아니라 [투르코-몽골 유목민족의 전통인] 형제간의 승계이었다.

쯔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매우 설득력이 있다. 3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2대 왕부터 9대 왕까지, 또 13대 왕에 대해, 기록이란 것이 거의 없다. 14대 왕 주우아이(仲哀) 기록은 거의 전적으로 신공(神功)왕후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다수의 전후세대 일본 역사학자들은, 6세기 초에 편찬된 제기(帝紀)에는 호무다(應神)로부터 게이타이(繼體)까지 12명만 기록이 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나는 야마도 왕국이 오오진(호무다)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를 (쯔다가 제시하는 근거에 추가해서) 네 가지 더 제시하려 한다.

첫 번째의 추가 근거. 쯔다는 오오진 이전의 왕위승계가모두 부자간의 승계라는 특이점에 의혹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왕위승계가 아주 “평화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오오진 이후를 보자. 오오진에서 닌토쿠(仁德)로 승계될 때, 한바탕 골육상쟁 유혈극이 있었다. 닌토쿠에서 리츄우(履中)-한제이(反正) 형제로 승계되어가는 과정에서도 골육상쟁 유혈극이 있었다. 한제이에서 닌교오(允恭)로 승계될 때, 유혈극은 아니지만, 아주 특이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닌교오에서 안코오(安康)-유략쿠(雄略) 형제로 승계되는 과정에서도, 또 한바탕 골육상쟁의 유혈극이 있었다. 유략쿠-세이네이(淸寧)에서 겐조오(顯宗)-닌켄(仁賢) 형제로 승계될 때에도, 또 닌켄-부레츠(武烈) 에서 게이타이로 승계될 때에도, 아주 특이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형제간의 왕위승계가 대부분이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왕위승계가 항상 순탄치 못했다는 점이 오히려 오오진 이후의 고사기-일본서기 기록을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두 번째의 추가 근거.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14대 왕이라는 주우아이가 죽었다는 해(200)로부터 15대 왕이라는 오오진의 즉위(270)까지 장장 70여년에 달하는 공백 기간(201-69)을, 자타가 공인하는 가공의 존재인 신공왕후가, 섭정을 하며 채우고 있다. 신공왕후는 3세기에 쓰여진 위서 왜인전(魏書倭人傳, 233-97년 간에 생존한 陳壽가 편찬한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왕 비미호(卑彌呼)라는 존재로부터 영감을 받아 창조한 가공의 인물로 간주된다. 4 따라서 오오진(호무다)부터가 실존 인물이라는 주장이 더욱 합리적으로 보인다

세 번째의 추가 근거. 712년에 고사기가 편찬 완료되자, 야마도 조정은 즉시 전국에 명을 내려, 각 지방의 토산품, 특이한 동식물, 토지 조건, 지명의 유래, 구전돼오는 이야기 등을 조사하고, 기록을 해 올리도록 했다. 이들 기록은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를 편찬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들 중 지금까지 전해지는 하리마 풍토기(播磨風土記)는, 713-715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믿어진다. 이 하리마 풍토기를 보면, 독자로 하여금 호무다가 야마도 왕국의 시조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수많은 기록들이 있다. 예컨대, 호무다는 수없이 순행과 사냥을 하고, 수많은 지명들이 호무다의 사소한 언행들과 연관 지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다른 왕들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언급이 없다. 5

네 번째의 추가 근거.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모든 왕들 중에 유독 공식적 시조 진무와 15대 왕인 오오진(호무다) 만이 큐슈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했다. 진무는 황족의 조상신인 천손 니니기(邇邇藝)가 하늘에서 내려 온지 얼마 후에, 또 오오진은 모친(신공왕후)이 한국으로부터 배를 타고 와서 큐슈에 상륙한 직후에 각기 태어난 것으로 기록된 것이다. 진무는 큐슈에서 동정(東征)의 위업을 이루는 장도에 오르는데, 갓난 아기 호무다는 큐슈로부터 모친(신공왕후)과 함께 축소판의 동정을 수행한다. 공식적 시조인 진무와 15대 왕으로 기록되어 있는 호무다(應神)만이, 오로지 야마도 지역의 무뢰한들을 정복하기 위하여, 큐슈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은, 이 두 개의 존재가 바로 야마도 왕국의 시조 한 사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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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도 왕국의 창건 연대

일본서기는 야마도 왕국이 기원전 660년에 수립 되었다고 기록을 하고 있지만 일본 사학자들 조차도 이를 믿지 않는다. 이는 곧 야마도 왕국이 언제 세워졌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일본서기에는 호무다(應神)가 270년에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와 삼국사기를 비교해보면 호무다가 왕위에 오른 것은 390년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시대의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들 사이에 120년(2周甲)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컨대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전지(直支) 왕자가 오오진 8년(277)에 야마토 조정에 온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전지왕자가 야마토 조정에 보내진 것이 397년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다. 이 경우, 이 시대를 연구하는 세상 모든 사학자들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연도를 택한다. 또, 일본서기에는 백제 아신(阿花)왕이 오오진 16년(285)에 죽었다고 기록이 되어있으나, 삼국사기에는 405년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이 모든 기록들을 보면, 시조 오오진이, 270년이 아니라, 390년에 왕이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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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390년경에 야마도 왕조를 수립한 일본 천황가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도대체 야마도(倭) 왕국은 어떻게 창건이 되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일본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내용의 해답이 있다. 우선 “일본인”이란 이 세상의 어느 민족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고유한 민족”인데, 야마도 왕국은, “수천 년에 걸친, 점진적인 정치적 사회적 발전단계”를 거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순수한 토착 지배세력”인 천황가 선조들의 노력으로, 야마도 지역을 본거지로 해서 성립된,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국가라는 얘기다.

수많은 일본 사학자들은, 과거에도 또 현재에도, 이 모범답안을 다양한 형태로 포장해서 일본 국민에게 제공을 해오고 있다. 수요가 공급을 창조한다는 고전적 경제 법칙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에가미(江上波夫)-Ledyard-洪元卓: Model의 진화

동경대의 에가미 (1948) 교수는, 일본열도의 고분들에서 4세기 말 이후에 말뼈, 말 안장, 말 등자, 말 재갈 등이 갑작스럽게 출현하는 등, "고고학적 단절"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일단의 기마민족이 대륙으로부터 건너와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도 왕국을 세웠다고 주장하였다. 컬럼비아 대학의 Ledyard (1975) 교수는 350-380년 기간에 해당하는 혼란스런 일본서기의 기록을 분석한 다음, 346년에 부여가 모용선비에게 깨진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 기마민족 정복자가 부여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홍원탁(1988, 1994, 2002)은 고사기와 일본서기 전편에 흐르는 기록 내용들, 특히 호무다(應神) 이후의 기록들에 초점을 맞추어,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도 왕국을 수립했다고 주장한다.

필자의 모델(Model)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일본열도의 신석기 죠몬(繩文, 10,000-300 BC) 문화는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사람들이 이룩한 것이지만, 청동기-철기 야요이(彌生, 300 BC-300 AD) 문화는 한반도 남부의 가야 사람들이 건너가 아이누-말라요 폴리네시안 원주민들이 함께 이룩한 것이다. 8 원시 일본어를 사용하는 원시 일본인은 야요이 600년 기간 중에 형성되었다. 고분(古墳)시대 초기(c.300-375)는 야요이 문화의 연장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고분시대 후기(c.375-675) 문화는 4세기 말경에 백제사람들이 세운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 왕국이 이룩한 것이다. 9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를 정복 한 것은 370-390년 기간 중이며, 야마도 왕국의 시조 호무다(應神)는 390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정복이 시작되는 시점과 정복자들이 거창한 고분에 각종 마구와 함께 매장되는 시점 사이에는 얼마간의 시차가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 미천왕이 313년에 낙랑군을 정복할 즈음, 백제는 대방군을 점령하였다. 369년경에 백제의 근초고왕은 한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마한의 모든 국가들을 정복하였으며, 371년에는 평양 지역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였다. 광개토대왕(391-412)이 출현하기 이전의 4세기는 백제가 이웃 국가들과의 무력충돌에서 지속적으로 공세를 취한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에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토 왕국을 세운 것이다. 상무적인 근초고왕(346-75)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375-84) 재위 중, 백제의 군사력과 영토 확장은 최고조에 달했던 것이다. 앞으로 연재될 필자의 주장의 핵심적인 근거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전편에 흐르고 있는 내용 이다. 보완적인 성격의 근거는 신찬성씨록, 속일본기, 풍토기, 삼국사기, 중국 왕조의 정사(正史) 등의 기록들, 다양한 고고학적 물증들, 그리고 여러 전문가들의 연구결과 등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1 (2005. 4. 9)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BIBLIOGRAPHY



[각주]

1.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倭”혹은 “日本”이라고 한자를 쓰고 “야마도”라고 읽는다.
夜麻登(倭) (K: 162) 日本 此云耶麻謄 (NI: 81) 

2. 쯔다의 논문이 잘 요약되어 있는 것으로 井上 等 編, 日本歷史大系 1: 原始古代 (山川 1984: 271-3) 참조

3.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 천황과 천황제도는 초법적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승화되었기 때문에, 감히 천황과 황실의 원류에 대한 정통적 서술에 의문을 제기 하는 행위는 반역죄를 범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940년에 쯔다의 주요 저술 네 권이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고, 1942년에는 황실의 존엄성을 훼손한 죄목으로 3개월간의 금고형을 언도 밭았다.

4. 日本書紀 神功皇后 攝政元年是年也 太歲辛巳 卽爲攝政元年 (NI: 349)
神功 攝政三十九年 魏志云 明帝景初三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斗米等 詣郡 求詣天子朝獻 (NI: 351)
神功 攝政六十六年 是年 晉武帝泰初二年 . . . 十月 倭女王遣重譯貢獻 (NI: 361)
神功 攝政六十九年 . . . 皇太后崩 . . 時年一百歲 . . . 是年也 太歲己丑 (NI: 361)
三國志 魏書 卷三十 烏丸鮮卑東夷傳 第三十 倭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求詣天子朝獻 . . . 其年十二月 詔書報 倭女王曰 制詔親魏倭王 卑彌呼 . . . 正始. . . 八年. . . 倭女王與狗奴國 男王卑彌弓呼素不和. . . 相攻擊 . . . 卑彌呼以死.

5. Aoki (1974: 35-39)는 “하리마 풍토기 등에는 호무다(應神)의 공격적인 품성과 전투적인 생애의 기록이 가득 한데도 불구하고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호무다의 호전적인 행동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다. ... 이것은 호무다의 바람직하지 않은 면을 감추기 위한 노력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사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은, 호무다가 야마토 왕국의 지배자로서 등장하는 시기를 전후로 한 그의 호전적 행위를 감추려고 무척이나 애를 쓴 것으로 보인다 .. 편찬자들은, 호무다가 태어날 때 팔에 궁사(弓士)들이 사용하는 가죽 팔찌 모양의 굳은살이 있었다고 기록을 함으로서, 호무다가 강한 전투적 체질을 소유한 인물임을 암시했다. ..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호무다의 호전적인 측면에 대해 침묵을 하는 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한다. 어쨌든 간에, 오늘날 일본열도의 25,000여 개의 하찌만(八幡)신사에서 전쟁의 신으로 받들어져 오는 것은 진무가 아니라 오오진(호무다)이다.

6. 天照大神之子 . . 娶高皇産靈 尊之女 (N1: 135) 而生 . . 次生 天津彦根火瓊瓊杵根尊 及至奉降 (N1: 161) 天神之子 則 當到 筑紫曰日向高千穗??觸之峯 (N1: 149) 後遊幸海濱 見一美人 (N1: 155) 於是 . 日子番能邇邇藝能命 於. . 遇麗美人 . 一宿爲 婚 . . 所生之子. . .次生子 . . 弟火遠理命. . 海神之女. 見感目合而. . .卽今婚其女. . 於是海神之女 . . .乃生置其御子而. . 卽塞海坂而返入 . . . 是…日子. . 娶其姨 . . 生御子名 五瀨命. . 次. . 次. . 次若御毛沼命. . .亦名神倭伊波禮毘古命 (K: 130-146)
整軍雙船 度幸時. . 押騰新羅之國. . 其政未竟之間 其懷妊産 卽爲鎭御腹 取石以纏於裳之腰而 渡筑紫國 其御子阿禮坐 阿禮二字以音 (K: 230- 232)
神功 攝政前紀 皇后從新羅還之. . 生譽田天皇於筑紫 (NI: 341)

7. Aston (1889: 51-65) 참조

應神 八年 春三月 百濟記云 阿花王立... 是以 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NI: 367)
應神 十六年 春二月 是歲 百濟阿花王薨 天皇召直支王謂之曰 汝返於國以嗣位 (NI: 373)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三 阿莘王 六年 王與倭國結好 以太子?支爲質 (S2: 45). ?支王 或云直支..阿莘在位第三年立爲太子 六年出質於倭國. . 十四年王薨. . 國人. . 迎?支卽位 (S2: 46)

8. 소 빙하기의 시작과 같은 기후의 급작스런 변화가, 기원전 300년경에, 한반도 남부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로 하여금 좀더 온화하고 강우량이 많은 땅을 찾아 대한해협을 건너게 했을 수 있다 기원전 400년경에 북극 빙산들이 남진하기 시작하면서 기온이 저하 했고, 그 상태가 AD 300년경까지 지속되었다. 이 소 빙하기의 시작은, 유라시아대륙 서쪽 끝에서는 캘트족의 대이동과, 동쪽 끝에서는 전국시대(403-221 BC)의 시작과 일치한다 Mayewski and White (2002: 121), Lamb (1995: 150), K W. B, ed., “Climate Variations and Change,” The New Encyclopedia Britannica, Vol. 16 (1986: 534) 참조

9. 소 빙하기시대(400 BC-300 AD)는 따뜻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던 로마제국과 중국대륙 한족 제국의 전성기를 창출하였다. 소 빙하기가 끝난 직후인 AD 300-400년 사이에는 지중해 주변, 북아프리카, 그리고 멀리 아시아의 동쪽에 이르기까지 가뭄이 최고조로 달하였다. 이 시기는 유라시아대륙의 서쪽 끝에서의 훈족에게 밀린 게르만민족의 대이동과 동쪽 끝에서의 5호16국 시대(304-439)의 전개와 일치한다. Lamb (1995: 150)은, 이 같은 가뭄은 정교한 수리시설의 도움을 받아 농경생활을 영위하던 지역을 황폐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기후의 급격한 변화는 한강유역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백제사람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즉, 소 빙하기의 뒤를 이은 긴 가뭄 때문에 한반도 남부 연안에 살던 가야 농부들 중 일부는 4세기가 시작되면서 새삼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들의 먼 야요이 친족과 합류하여 초기 고분시대(c.300-375)를 전개 했을 수 있다. 반면, 전투적인 지도자의 영도 하에 한강 유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던 백제 사람들은,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으로, 우선 한반도 서남부에 위치한 마한의 여러 성읍국가들을 정복하고(369 AD), 그 일부는 곧 이어 일본열도로 진출해 후기 고분시대(c.375-675)를 전개 했을 수 있다. 하지만 동서를 막론하고 정통 역사학자들은 직업의식에서인지 기후변화에 의한 접근방법을 아주 꺼리는 것 같다.

 

입력 : 2005년 04월 07일 16:38:50 / 수정 : 2005년 04월 07일 16:53:05
(업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