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북부에 ‘만주국’을 건설한 일본은 마침내 중국과의 전면 충돌을 시작한다.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은 손을 잡고 대항했다. 일본의 침략 전쟁은 중국에 참화를 불러왔지만, 즉흥적인 진군은 일본 자신의 파국을 초래하는 길이기도 했다. 전선은 이윽고 중국을 넘어 확대되어 갔다.
전쟁 종결로부터 62년이나 지났으니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좀 더 노년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얼마 전 중국 공산당 대회에서 50대 2명이 최고 지도부에 들어간 것을 떠올리면 과연 여기저기에서 세대 교대가 진행되는 것 같았다.
항일 전쟁은 긴 세월에 걸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으며, 세계적으로도 평화를 실현시키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물론 리(李) 씨는 중국의 공식적인 견해도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이쪽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틀에 박힌 대답만은 아니었다.
항일전쟁에 동원된 중국 민중들의 모습을 실증적으로 더듬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은가라고 최근 일본에서의 연구서를 예를 들어 물었더니, 리(李) 씨는 필요성을 인정하며 “중국에서도 그러한 연구가 있는지 어떠한지. 일본에서 책이 나왔다면, 꼭 읽어 보고 싶네요”라고 말했다. 나쁜 것은 일본이라고 일축하지도 않고 빈정대는 말투도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사사가와 유지(笹川裕史) 사이타마대(埼玉大)교수들이 쓴 『후방의 중국 사회』였다. 지금까지 별로 주목받지 못 했던 일중 전쟁 당시 중국 측의 총동원 체제에 대해서 억지로 군인이 되거나 식량을 징수 당하거나 한 농촌의 실태를 역사 자료를 통해 세밀하게 조사하고 있다. 덧붙이면, 일본의 침략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역사적 사실로서 일중 전쟁의 전체 상을 만들어 가는 작업이다.
기념관의 전시가 2년 전부터 조금 변했다. 오로지 공산당의 전투로만 그려져 온 전쟁이었지만, 거기에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인솔하는 국민당 정부군의 설명이 조금 추가되었다. 리(李) 씨는 초등학교 시절, 국민당 정부군은 항일 전쟁에 소극적이었다고 배웠다며, “그 말은 옳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는 국민당 정부군의 역할은 적극적이었다고 평가되어 진다”고 말했다.
세대 교대 진행되는 중국 / 기념관도 새 단장
이러한 미묘한 변화는 난징(南京)에서 확장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둘러싸고도 마찬가지이다. “대학살 기념관”이 아니라, “평화 기념관”이라 개칭하자는 안이 내부에서 제기되었다라고 여러 관계자들은 말한다. 하지만, 학살이 있었던 것 자체를 부정하는 목소리가 일본에서 존재하는 한 당치도 않는 시기상조라며 없었던 일로 되었던 것이다.
새롭게 단장한 난징대학살 기념관은, 사건으로부터 70년이 되는 올 12월에 개관한다. ‘반일’강화로 보이기 십상이지만, 실제로는 ‘반전 평화’의 취지를 더욱 강조하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한다. 난징(南京) 사범 대학에서 만난 장리엔훙(張連紅) 교수는 “서로가 부의 유산을 제대로 응시하여 미래를 향한 평화적인 관계를 쌓아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 때에는 기념관의 명칭도 바뀔 것이다”라고 말했다. 덧붙이면, 난징대학살 연구 센터 주임을 맡고 있는 장(張) 씨도, 작년에 40살이 되었다고 한다.
‘세대교체’는 중국의 도시 그 자체에서도 현저하다. 내년 올림픽 개최를 향해 달리고 있는 베이징(北京)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인구 700만 도시가 된 난징(南京)에서도 가는 곳마다 고층 빌딩 건설 공사가 한창이다. 본디, 물과 녹음이 아름다운 고도이지만 시 중심부에서는 분진 때문인지, 길을 걷는데도 마스크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일본 기업들도 잇달아 진출해 난징시(南京市) 세수입의 3할을 외자가 차지한다.
국제도시에서 전투 / ‘일본의 횡포’에 주목
일중 전쟁의 계기가 된 사건이 부근에서 일어난 루거우차오(盧溝橋)=베이징(北京) 교외에서, 후쿠다(福田)가 촬영 |
생각해 보면, 정말 무모한 전쟁이었다.
발단은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盧溝橋) 부근에서 일어난 일중 양군의 소규모 충돌이었다. 지금은 베이징(北京) 중심부로부터 차로 40분 정도 걸리는 곳이다. 인민 항일 전쟁 기념관은 다리 부근에 있다. 그 다리 끝에는 베이징(北京) 올림픽의 마스코트 그림을 벽에 장식한 작은 가게가 있어, 과거와 미래가 함께 있는 기묘한 풍경이었다.
누가 먼저 발포했는지는 지금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확실한 것은, 중국에서, 일본군이 야간 연습을 끝냈을 쯤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일본은 1900년 의화단사건(북청 사변)에 열강과 함께 개입한 이래로, ‘지나(支那)주둔군’을 두고 있었다.
애당초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중국 등은 일격에 굴복할 것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으로, 근대화로 앞서 있던 일본은 전선을 끊임없이 확대해 결국은 파국을 향해 나아갔다. 통수권을 방패로 한 군부의 독주였다. 그 군내부에서조차 갈라진 의견, 눈앞에 사로잡힌 ‘점과 선’의 진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최대 요인은 중국에서 높았던 내셔널리즘과 국제 사회의 동향을 모두 오인했던 것이다.
청일, 러일 전쟁에서 이긴 이후, ‘대중국 21개조의 요구’로부터 만주 사변, 그리고 ‘만주국’ 건설등, 일본은 중국에서 제 마음대로 행동해 왔다. ‘만주국’뿐만이 아니라, 나아가 주변의 5성(省)을 지배하에 두려는 획책도 있었다. 일본 내에 있어서도 청일 전쟁 이후로 중국인에 대한 멸시가 두드러진 때였다.
누구든지 인내하는 데는 한도가 있다는 것을 당시의 일본은 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 같다. 뒤떨어진 사람들이라고 일본이 업신여겼던 중국은,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각 지역이 서로 다른 제도로, 지방 군벌의 지배를 지탱하던 화폐 제도 하나만을 보더라도, 영국의 도움을 받아 통일했으며,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격렬하게 싸우던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군과 공산당이, 거짓말로라도 ‘항일’로 발을 맞추게 된 시안(西安) 사건은, 일중 전쟁이 시작하기 전해였다. 국민당 정부에 의한 징병 제도도 시작되었다.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시작된 전쟁은 상하이(上海)에까지 이르렀지만, 중국측에서는 국제도시에서의 전투로 인해‘일본의 횡포’에 세계의 주목을 모으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미, 부전 조약도 있었고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는 9개국 조약=키워드=도 있었다. 제1차 대전의 엄청난 참화에, 세계는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회피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늦게 찾아온 제국주의 국가 일본은, 양쪽 조약에 가입해 있으면서도, 때 늦은 제국주의인 채로 돌진해 갔다.
전쟁 개시 당시, 수상은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였다. 국민적인 인기를 얻어 그 자리에 앉은 직후였다. 하지만, 고노에(近衛)는 불확대 방침이라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결국은 군부를 추인하면서 역주했다. 뒷날, 수기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당시 이러한 사건이 발발한 것은 정부 사람들은 당연히 알지 못했고, 육군 본성에서도 알지 못했던, 오로지 현장에 있었던 군의 책모에 의한 것이었다” “힘이 모자라서 중국 전부가 전란에 휩싸여, 국민들 또한 이유 없는 출사(出師)로 괴로워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출사(出師)란 출병을 말한다. ‘이유 없는’출병--. 게다가 상하이(上海)에서 난징(南京)으로, 더 나아가 한커우(漢口)로 뻗어가는 전선에, 보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현지 조달’을 했기 때문에,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주민들은 비참한 꼴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본에서 중국 전선에 참전한 병사를 만났고, 난징(南京)에서는 학살 사건에서 살아남은 노인을 방문했지만, 들어 보면 들어 볼수록 지옥 그 자체였다. 하지만, 신문에서는 황군의 진격을 날마다 부추기고 국민들은 전쟁의 결과에 취해 있었다.
전쟁 초에는 전쟁이 수렁에 빠지는 것을 피하려는 움직임이 일본에서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중국 독일 대사 트라우트먼을 통한 평화 공작의 시도는, 눈앞의 전과와 지워버리기 힘든 낙관 속에서 수포로 돌아갔다. “국민 정부를 상대하지 않는다”라는 성명을 발표해버리자 계획성도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접근하는 미국과 중국 / 초조해 지는 일본의 위험
일중 전쟁을 더듬어 보면, 일본이 무궤도한 행동에 암담해지지만, 이 전쟁을 정당화하는 주장도 일본에서는 끊이지 않는다. 특히, 정계에서는 지금까지 일중간의 불씨가 되어 왔다. 양국의 역사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이를 걱정하는 한 사람, 자민당의 노다 다케시(野田毅) 중의원 의원은, 아시아에 대해,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적어도‘대중국 21개조 요구’에서는 분명하게 일본의 침략적 행위가 전면에 나왔다”라고 말한다. 일본 측에서 할 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학문의 장에서 검증해 나가야 하며, 정치의 세계에서는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靖?神社) 참배 문제로 일중 그리고 한국을 포함한 역사 문제는 다시 불이 붙었다. 일본군의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으로부터도 비판을 받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을 거쳐서,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현 정권이 들어서서 이제 겨우 침착성을 되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앞으로는 어떠할까.
2 자릿수 성장으로 현저하게 대두한 중국은, 일전의 공산당 대회에서 앞으로의 5년 동안의 신체제를 정돈했다. 미국에서는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앞으로 4년간의 신체제가 정해진다. 유력한 후보,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은 “미국과 중국은 21 세기에 있어서 최대 중요한 2국간 관계”라고까지 단언하였다. 정치적인 혼미 상태가 계속되는 일본은 ‘초조함에 가까운 내셔널리즘’(노다(野田) 씨)을 한층 더 높이게도 될 지도 모른다.
베이징(北京)과 난징(南京)에서 내가 느낀 중국 측의 잘 알 수 없는 여유는, 단지 세대 교대에 의한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일중 전쟁을 둘러싼 인식은 중국에게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일부러 내세워 말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내부의 모순도 안고 있어 불필요한 자극은 피하고 싶은 것도 크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어쨌든 중국은 지금 바쁘다.
올해, ‘가치관 외교’라는 말이 자민당 속에서 나왔다. 하지만, 가치관이 다른 나라와 어떻게 교제를 하는가가 외교다. 내셔널리즘을 전면으로, 변해 가는 중국과 세계를 다시 일본이 오인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 전쟁의 교훈은 도대체 무엇이었냐는 얘기가 되어 버린다.
후쿠다 히로키(福田宏樹)
일본은 중국에서 뻗어 나간 전선을 더 한층 타국으로 넓혀 갔다. 거기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는, 다음에.
*한국에서는 중일전쟁이라는 표기하지만, 본 기사에서는 일본의 표기대로 일중전쟁으로 합니다.
【키워드】일중 전쟁
전쟁 중, 일본은 많을 때에는 약 100만 명의 병력을 중국에 주둔시켰다. 양국의 사망자 수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중국에서의 일본군의 사망자는 누계 약 45만 명이라 보고 있다. 중국 측은 1931년에 일어난 만주 사변으로부터 1945년까지를 항일 전쟁으로 간주하고 이 동안의 중국 군민의 사상자 수는 ‘3500만 여명’이라는 것이 중국 정부의 공식 견해다.
‘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남쪽의 화북 5성으로부터도 장제스(蔣介石)가 인솔하는 국민당의 영향을 제외하려고 분단 공작에 들어갔다. 한편, 중국 측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치 항일’로 내전을 중지하고 있었다.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이 일어나자, 당초에는 불확대 방침이었던 제1차 고노에(近衛) 내각이 군부 선행으로 파견 증가를 결정해, 중국 측은 철저한 항전 태세에 들어갔다. 일본은 처음에는 ‘북지(北支)사변’, 후에는 ‘지나(支那)사변’이라 부르며,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지만, 이는 미국의 중립법 적용을 초래해 군수물자의 수입이 막히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8월에는 상하이(上海)에서 전투가 시작되고, 승리한 일본군은 더 나아가 수도 난징(南京)으로 진격해 12월 13일에 점령하였다. 이를 전후로, 병사도 민간인도 구별하지 않고 난징(南京)대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이 뿐만이 아니라, 일본군은 이 전쟁에서 독가스와 세균을 사용하고, 인체 실험을 했으며, 성 폭력 등 비인도적인 행위를 거듭하였으며, 무차별 폭격도 가했다.
국민당 정부는 난징(南京)에서 충칭(重慶)으로 수도를 옮겨서 항전을 계속했다.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도 게릴라전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부전 조약과 9개국 조약을 개의치 않는 일본의 전쟁 행위는 국제사회로부터도 비난을 받았지만, 1941년에는 대미영 개전으로 전선을 확대해 갔다. |
【키워드】9개국 조약
1922년 2월, 미국의 요청으로 열린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포르투갈, 그리고 일중 양국의 총 9개국이, 중국의 영토 보전과 정치적 독립의 존중, 문호 개방, 기회 균등 등을 확인하고 합의한 조약이다. 무력으로, 중국에게 새로운 권익을 요구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일본의 진출을 견제하는 목적이 있었으며 동시에, 구미 제국주의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
【메모】고노에 후미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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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장제스 (蔣介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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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마을에 있는 작은 다리의 큰 역할
중국은 8년 간에 걸친 일본군의 공격을 견디어 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이 수수께끼를 푸는 하나의 열쇠가, 베이징(北京)과 난징(南京)에서 멀리 떨어진 윈난성(雲南省)의 조그만 한 마을의 작은 다리라고 한다. 나는 그 다리를 찾아갔다.
“지금은 건기입니다만, 어제는 비가 내렸습니다”
소수민족인 나시족 운전기사가 핸들을 잡으면서 말했다.
도로 곁의 종려나무와 고무나무, 바나나 잎이 흔들린다. 도로를 따라서 흐르는 시냇물의 바로 저 편은 버마이다. 지금은 군이 정권을 쥐었고, 국명은 미얀마로 바뀌었다.
윈난성(雲南省) 서쪽 끝에 있는 로이리시(瑞麗市). 원틴(?町)은 로이리시(瑞麗市)에 있는 인구 약 1만 명의 마을이다. 시가지에 원틴교(?町橋)가 있었다. 다리를 건너면 미얀마다. 낡은 다리와 새로운 다리가 나란히 가설되어 있다. 판자를 깔은 낡고 작은 다리는 통행금지다. 전쟁중 이 다리를 통하여 미국, 영국 등지에서 대량의 물자가 중국에 운반되었다. 장제스(蔣介石)가 이끈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원장(援蔣)루트’였다.
운명을 쥔 물자 루트 / 인도로부터 공수도
티엔미엔도로(?緬道路)의 중국 쪽과 버마(지금의 미얀마) 쪽을 잇는 원틴교(?町橋). 돌다리였는데, 나중에 철제 다리가 되었다. 다리 중앙에는 쇠사슬이 걸려 있어, “중국과 미얀마의 국경을 넘어서는 안 된다”라고 쓴 게시판이 서 있다. 다리의 저쪽 편으로 미얀마의 국기가 보인다. =중국 윈난성(雲南省)에서, 이카가와(五十川) 촬영. |
전쟁의 불씨는 북방에서 상하이(上海)까지 퍼져, 장제스(蔣介石)는 수도를 임시로 난징(南京)에서 충칭(重慶)으로 옮겼다. 내륙 깊은 곳을 거점으로 한 지구전을 펼치려고 한 것이다. 더 깊은 내륙 쪽에 있는 윈난성(雲南省)의 성도인 쿤밍(昆明) 주변은 병기 공장 등이 입주한 후방 기지가 되었고, 이러한 지역에 지원 물자의 원활한 운송 여부가 장제스(蔣介石) 정권의 존속을 운명 짓는 중요 문제가 되었다.
원장(援蔣)루트는 몇 군데 있었지만, 일본군은 태평양 쪽부터 하나하나 잘라 갔다. 1938년 10월에 광저우(?州)를 점령하여 홍콩 루트를 차단하고, 1940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현재 베트남 등) 북부에 진주하여, 중국으로 연결되는 철도 루트를 막았다. 그 결과, 티엔미엔(?緬)도로가 중국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었다. 군수품과 가솔린 등, 한 달에 수천 톤에서 1만 톤 이상의 물자가 운반되었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 발발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42년 1월, 일본군은 버마에 진군했다. 국민당 정부군도 버마로 원정군을 파견해, 영국군과 함께 맞서 싸웠다.
원틴마을에 사는 81세의 쉬이민쿤(石明坤) 씨는 버마로 향하는 원정군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질주하는 트럭 위에 회색 군복을 입은 남성 병사들이 앉아 있었다. 전송하는 마을 사람들은 담배를 병사들에게 던져 주었다. 많은 여성 병사를 실은 트럭이 오면, 따뜻한 수입품 커피를 내밀었다. 소녀였던 시민쿤(石明坤) 씨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주는 커피에, 여성 병사들은 기뻐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시민쿤(石明坤) 씨는 크게 목을 저었다.
“아뇨, 그렇지가 않아요.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슬픈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전쟁을 위한 출진이었기 때문이었죠.”
원정군은 패했다. 파견된 10만 명 가운데, 반수 이상이 사상 당했다고 한다. 버마 각지를 점령한 일본군은 윈난성(雲南省)에 쳐들어 왔다. 시민쿤(石明坤) 씨는 “두메산골의 소수 민족 마을로 도망쳤어요. 쭉 산에는 이것 저것 따서 끼니를 채웠어요.”라고 회상했다. 4년 가까이 중국을 지탱해 온 티엔미엔(?緬)도로도 마침내 끊어졌다.
그러나 미중 연합군은 새로운 방법을 썼다. 인도로부터의 공수였다. 히말라야 산맥의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를 곡예 하듯이 날아, 대량의 군사 물자를 운반했다. 하지만, 조종이 어려운 데다가, 악천후와 일본 군용기에게도 습격을 당해 약 600기를 잃었다고 한다.
1944년 봄, 중국과 미국, 영국은 인도 쪽과 윈난성(雲南省)의 양쪽에서 일본군을 조이면서 반격을 개시하였다. 전쟁을 하면서, 인도 동부의 레드와 원틴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도 건설하여, 또 하나의 새로운 원장(援蔣)루트가 생겼다. 연합군의 중국에 대한 보급은 계속 되었지만, 반대로 일본군은 충분한 보급이 닿지 않았고, 윈난성(雲南省)에서도 옥쇄(玉? 명예를 위해 포로가 되기보다는 죽음을 선택함)가 잇따라 비장한 결말을 맞이했다.
베이징(北京) 의 루거우차오(盧溝橋)사건으로부터 8년. 일본군은 끝내 원장(援蔣)루트를 다 끊을 수는 없었다.
원틴 마을 중심부에서, 당시의 저우언라이(周恩?) 수상과 버마 수상이 박수를 치면서 걷는 모습이 그려진 큰 간판을 보았다. 일중 전쟁 종결로부터 11년이 지난 1956년 12월, 중국 쪽에서 열린 양국 변방 주민의 친목회에 출석하기 위해, 두 정상이 원틴 마을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양국의 우호를 노래하는 시도 크게 쓰여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양국의 우호 기념관도 있다.
그것들을 보고 있으니, 최근 중국의 보도가 머리에 떠올랐다. 미얀마의 항구도시로부터 윈난성(雲南省)에 가스와 석유 파이프라인을 건설한다고 한다. 중동과 아프리카로부터 석유를 미얀마 경유로 윈난성(雲南省), 그리고 충칭(重慶)에까지 보낸다. 그렇게 하면, 어떤 나라가 말라카 해협을 봉쇄한다고 해도, 중국은 석유를 확보할 수 있다. 중요한 전략적 의의가 있다고 보도되었다.
원장(援蔣)루트는 아직 살아 있다. 그렇게 느끼면서 원틴마을을 떠났다.
국민당의 전투 / 평가하는 조짐
쿤밍(昆明). 표고 1891m 고지에 있는 약 600만 명의 도시다.
일중 전쟁을 연구하는 윈난(雲南)대학의 쉬이칸민(徐康明) 교수를 찾았다.
“(루거우차오(盧溝橋)사건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37년 8월 군사 회의에서, 윈난성(雲南省) 주석인 롱윈(龍雲)이 원틴 도로와 원틴 철도의 건설을 제안했습니다. 장제스(蔣介石)가 이에 찬동하고, (정부에) 윈난성(雲南省)과 상의하라고 명했습니다”
철도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도로가 오랜 기간에 걸쳐 나라를 지탱했다. 쉬이(徐) 교수는 윈난성(雲南省)의 공헌을 설명했다. 이상하게 원틴 마을도 윈난(雲南) 전투도, 중국에서는 의외로 알려지지 않았다.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국공) 내전의 관계지요”라고 쉬이(徐) 교수는 말했다.
국민당이 인솔하는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은 내전을 정지하고, 공동으로 일본과 싸울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국지적인 전투는 일어났으며, 항일 전쟁 후에 자웅을 결정지었다. 공산당에게 있어서, 국민당은 적이다. 역사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활약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이런 관계로 국민당 주체의 윈난(雲南)과 버마 전투에 관한 기억은 희미해졌던 것이다.
변화의 조짐이 있다.
재작년, 후진타오(胡錦濤) 국가 주석이 전후 60주년 연설에서 국민당의 공헌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지도하는 항일군은 각각 ‘정면 전장’과 ‘적후방 전장’에서의 작전 임무를 담당하여, 함께 저항하고 반격하는 전략적인 태세를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이에는 배경이 있다. 내전에서 패한 국민당은 타이완(台?)으로 옮겨갔고, 7년 전까지 타이완(台?)에서 정권을 잡아 왔지만, 지금은 야당의 입장에서, 여당인 민진당(民進?)에 의한 타이완(台?) 독립의 움직임을 저지하려 하고 있다. 공산당의 의도와 일치하여, 양당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윈난(雲南)과 버마 전투가 각광을 받는 날이 머지않은 시기에 올지도 모른다.
쿤밍(昆明)에는 전쟁 중에 많은 공장과 대학이 이사해 왔다. “동부에서 수십사나 되는 공장이 옮겨 왔기 때문에, 쿤밍(昆明)의 공업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윈난성(雲南省) 중국 근대사 연구회의 우어파오창(吳?璋) 회장은 말한다.
기계와 제철 등의 공장들도 왔다. 비행기도 조립했다고 한다. 윈난성(雲南省)은 지원 물자의 수송로였지만, 후방 기지로서의 역할도 컸던 것이다.
작곡가는 쿤밍(昆明) 출신 / 영화 주제가가 국가로
시가지와 접해 있는 호수, 연못. 이를 조망하는 서쪽 산에 니에얼(攝耳)의 무덤이 있다. 현지 출신의 음악가로, ‘의용군 행진곡’의 작곡으로 알려졌다.
이 곡은 1930년대의 항일 영화 ‘풍운아녀(風雲?女)의 주제가였지만, 항일 전쟁 중에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불려졌다. “……중화 민족은 가장 위험한 때에 이르렀다……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우리 모두 마음을 하나로 뭉쳐, 적의 포화를 돌파하여, 전진하자……” (티엔한(田漢) 작사)라는 내용이다.
이 노래가 중화 인민공화국의 국가로 선택되었다. “이제 가장 위험한 때는 지나지 않았는가”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당시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수상은 “평화로운 때에도, 위험에 대비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화대혁명 때에는, 티엔한(田漢)이 비판을 받아 일시적으로 연주만 하는 등,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지금도 이 가사로 계속 불리고 있다.
항일 전쟁을 한 것은, 공산당 정권의 존립 기반의 하나이자, 국가의 토대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항일 전쟁에 의해 태어난 국가는 이를 상징하고 있는 것 같다.
니에얼(攝耳)는 1935년, 일본을 경유하여, 유럽, 소련으로 유학하려 했다. 출발 직전에 작곡한 의용군 행진곡의 악보를 일본에서 고쳐 완성시켰다고, 중국 잡지는 전한다. 중국의 국가는 일본에서 완성한 것이 된다. 그 수개월 후에 니에얼(攝耳)는 쇼난(湘南)의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가 빠져 죽었다고 한다. 23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러나 그의 멜로디는 계속 살아 있다. 내년 베이징(北京) 올림픽의 회장에서도 반복해 연주될 것이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모두가 항일 전쟁을 떠올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체험들을 “풍화 시킬 수는 없다”라는 의지를 느낀다.
이소가와 도모요시(五十川倫義)
【키워드】원장(援蔣)루트
일본의 대미영 개전 후, 구미 열강의 식민지는 차례차례로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이미 유럽 전선에서 독일에게 항복하여, 미국과 영국으로서는 중국의 항전력 유지가 아주 중요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물자를 제공하고 작전 협력을 하면서 양면에서 중국을 지탱했다. 원장(援蔣)루트는 중국의 생명선을 쥐고 있었으므로, 미국과 영국은 이 수송로를 지키기 위해서 중국군과 힘을 합쳐 싸웠다. 그 최대 공방이 윈난성(雲南省)과, 버마에서 전개되었다.
1942년 장제스(蔣介石)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으로, 연합군의 중국전구 사령관으로 임명되고, 전구 참모장으로서 스틸웰 장군이 미국으로부터 파견되었다. 일본과 중국의 전쟁은 이와 같이, 일본 대 중국, 미국, 영국이라는 구도로 확대되었다.
소련 또한, 일소 중립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독자적으로 신장(新疆) 방면 등지에서 중국으로 지원 물자를 보냈다. 유럽에서의 독일 전에 전념하기 위해서, 일본군을 중국에 못 박아 두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현재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일대에 형성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을 말한다. 프랑스는 19 세기 중반부터 인도차이나에 출병해, 베트남 남부의 코친 차이나를 영유하고, 베트남 북부의 통킹, 중부의 안남, 캄보디아를 보호령으로 하여, 보호국화 했다. 베트남의 종주국이었던 청조와 전쟁이 일어나지만(청불전쟁), 그 결과, 청조는 프랑스에 의한 베트남 지배를 승인했다. 프랑스는 1887년에 이러한 영토와 보호령, 보호국을 묶어서 인도차이나 연방을 만들었다. 후일 라오스도 편입시켰다. 프랑스 대통령이 임명하는 총독의 통치 하에서, 쌀과 고무를 대규모로 재배하고, 수출하는 대농원과 석탄 생산에 힘을 썼다. 중국으로 연결되는 철도도 건설했다. |
【메모】니에얼(攝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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