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檀君朝鮮 實在했나?

이강기 2015. 9. 17. 22:07

檀君朝鮮 實在했나?


기자동래설은 漢代의 조작,단군은 평양 일대 주민들의 祖上


이희근<역사학자>

오늘날 한국사 관련 교과서나 통사류 등은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국가는 고조선이며 그 시
조는 단군, 그후 역대 왕조는 모두 이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이런 통설이
지닌 근본적인 한계는 고조선 멸망 직후가 아라
무려 1,500여년이 지난 고려 후기 이후 편찬된
역사서들의 기록을 토대로 이루어졌다는 데 있다.
그 기록이 실려 있는 현전 최고(最古)의 문헌은 13
세기 후반에 편찬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이
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다. 과연 고조선은 한국
사의 출발점인가?

朝鮮의 등장

“삼국유사”는 “고기”(古記) “단군기”(壇君記) 등의 문헌을 근
거로 하여 고조선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천신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하늘에서 태백산(太伯山)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하고, 풍백
(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신정(神政)을 펼쳤
다.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기원했는
데, 환웅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 곰이 웅녀(熊女)로 변신하는
데 성공하였다. 환웅과 웅녀가 혼인하여 단군왕검(壇君王儉)
을 낳았다. 단군왕검은 중국의 요(堯)임금 50년이 되는 경인년
에 평양성에서 조선을 건국했고, 그후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로 옮겼다. 재위 1,500년경에 중국에서 기자(箕子)가
옴에 따라 또 다시 장당경(藏唐京)으로 천도하였다. 단군은
후에 아사달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는데, 인간의 수명으로는
1,908세였다. 단군은 서하(西河) 하백(河伯)의 딸과 혼인하여
부루(夫婁)를 낳았다.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도 단군의 아
들이다. 이에 대해 “제왕운기”도 “본기”(本紀) “단군본기”
(檀君本紀)를 토대로 대략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상제(上帝) 환인의 아들 웅이 하늘에서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왔는데, 그가 바로 단웅천왕(檀雄天王)이다. 그는
손녀를 인간으로 변신시켜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게 했고 그
자식이 단군(檀君)이다. 단군은 중국의 요 임금 원년인 무진년
에 조선을 건국하고 왕이 되었다. 그는 1,038년 뒤인 은나라 무
정(武丁) 8년에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 단군은 비서갑
(非西岬) 하백의 딸과 결혼하여 부루를 낳았다. 시라(尸羅-신라)·
고례(高禮-고구려)·남옥저·북옥저·동부여·북부여·예(濊)·맥(貊)·
비류국(沸流國)은 모두 단군의 후예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를 비교해 볼 때 단군의 계보 등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중요한 점에서는 일치한다.

箕子 대 檀君

먼저 한국사는 고조선에서 시작되며 고조선의 시조는 단군이
라는 점. 그리고 단군은 신성한 존재로서 중국사에서 이상적인
제왕으로 꼽고 있는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개국했다는 사실이
다. 그리고 고조선 이후 등장한 역대 왕조는 모두 고조선을 계
승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 점은 “삼국유사”보다 “제왕운기”가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한국사의 출발점은 고조선이며, 그 시조가 바로 단군이
라는 견해는 13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부각되었다.

그렇다면 13세기 이전에는 한국사의
출발점을 어느 나라로 인식하였는가.
고려 중기까지는 한국사의 시작이 기
자조선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식하
고 있다. 이는 “고려사”(高麗史) 문종
9년(1055) 7월조에 실려 있는 거란(契
丹)
에 보낸 국서중에 나타난다.
‘우리나라는 기자지국(箕子之國)을 계승
했다.’
민족의 시조도 단군이 아닌 기자로 적고 있다. 인종 23년(1146)에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 연표상(年表上)의 기사다.
‘해동(海東)에 국가가 있은 지는 오래 되었는데, 기자가 주나라
왕실로부터 봉작(封爵)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비단 “삼국사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외
국에서도 고려가 기자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가령 “고려사” 태조 16년 3월조에 실려 있는 당의 태조 책봉 조
서 중에는 ‘권지 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 왕건은… 주몽의
건국한 전통을 계승하여 그곳의 임금이 되었고 기자가 번신(藩臣)
으로 있던 옛 사실을 본받아 나의 교화를 넓히고 있다’는 기사
가 등장한다. 인종 6년(1122)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
도 그의 저서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고려의 선조를 기자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12세기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사의 출발점은 고조선이 아
니라 기자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진 기자조선이고, 우리 민족의
시조도 단군이 아닌 기자로 인식하였다.

실제로 고조선 이후 등장하는 고대 왕조들은 고조선에서 비롯
했다는 계승 의식을 지니지 않았다. 고구려와 신라 왕실은 그
기원을 하늘에서 찾아 천손(天孫)임을 자처하는 독자적 건국신
화를 가졌고, 백제 왕실도 부여·고구려에서 그 기원을 찾았다.
이처럼 이들 왕조는 각각 독자적인 기원 신화를 가졌기 때문
에 이들 국가의 지배층에게는 자신의 나라가 고조선에서 비롯
한다는 계승 의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려 역시 고구려의 후
예를 표방했기에 지배층에서 고조선 계승 의식이 없었다. 오
히려 “삼국사기”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들은 기자조선 계
승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면 13세기 이전 우리
선조들에게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은 어떤 존재로 인식되고 있
었을까.

檀君은 평양 일대 주민들의 조상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
천왕 21년(247)조에는 단군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
다.
‘봄 2월 왕이 환도성이 병란을 겪어 다시 도읍할 수 없다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仙人王儉)의 집이다. 혹은 왕의 도읍터인 왕검이라고도
한다.’

이 기사의 선인왕검은 단군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단군은 평양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 된다. 이 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은 충숙왕 12년(1325)에 쓰여진 ‘조
연수묘지’(趙延壽墓誌)다. 여기서는 ‘평양의 선조는 선인왕검
인데, 지금까지 남은 사람도 당당한 사공(司空)일세. 평양군
자(平壤君子)는 삼한(三韓) 이전에 있었는데, 1,000년 이상 살
았다니 어찌 이처럼 오래 살고 또 신선이 되었는가. 땅을 나누
어 다스려 그 후예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네’라고 기록하여, 단
군을 평양의 조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단군은 평양
지역을 개척한 시조로 여겨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제왕운기” 내용 중 구월산(九月山)에 단군을 모신 사당
이 있었다는 기사가 주목된다. 여기서의 사당은 “고려사”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에 보이는 단인(檀因)·단웅(檀雄)
·단군을 모신 삼성사(三聖祠)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월산 삼성사는 “제왕운기”가 편찬된 13세기에 이미 존재했
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새나 사슴들조차 함부로 드나들 수
없고 비를 빌면 영험이 있었다는 점이나 그 지명이 성당리(聖
堂里)로 불렸던 것으로 보아 신성한 장소로 여져졌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할 때 단군은 평양의 시조임과 동시에
구월산 일대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받들었음을 알 수 있다. 따
라서 13세기 이전에는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가 아닌 평양
일대의 시조에 불과했다. 결국 단군이 건국한 것으로 알려진
고조선도 한국사의 출발점이 결코 아니었다는 점이다.
결국 한국사의 출발점은 고조선이며 그 시조가 바로 단군이라
는 견해는 13세기에 와서 비로소 부각됐다. 그러나 이런 인식
도 이 시기에 일반화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삼국유사”나 “
제왕운기”보다 늦은 14세기에 제작된 ‘조연수묘지’에서 단군을
한민족의 국조가 아닌 단지 평양의 조상이라고 규정할 정도다.

결국 한국사의 출발점은 고조선이고, 그 시조가 단군이라고
적은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 인용된 “고기” “본기” “단
군기” “단군본기” 등은 한민족 전체가 아닌 평양 일대에 거
주하던 고조선계 일부 주민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던 전승을
기록한 자료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연수묘지’에서 확
인할 수 있듯, 14세기까지도 평양에는 단군의 후손을 자처하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일연이나 이승휴 등이 평양 일대 주민들
의 전승을 기록한 “고기” “본기” 등을 토대로 한국사의 시작
이 고조선이고, 그 시조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내세운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월간중앙2001년 01월호 | 입력날짜 2001.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