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연산군은 정말 폭군이었나?

이강기 2015. 9. 17. 22:10
연산군은 정말 폭군이었나?

폐비는 약그릇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으셨다. 원삼 소매에 달린 한삼을 부드득 뜯었다. 새빨간 피눈물이 하얀 삼팔에 아롱아롱 물들었다. “동궁이 무사히 자라나거든 부디부디 이 한삼을 전해서 주오. 지원극통한 이 말씀을 전해서 주오!”(박종화 <금삼의 피> 중에서)

생모의 죽음이 평생의 한(恨)으로 남아 폭정(暴政)으로 분출된 군주. 두 번에 걸친 사화(士禍)로 숱한 선비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던 임금. 설혹 그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이 있었을지언정, 연산군(燕山君·재위 1494~1506)이 한국사상 최악의 ‘폭군’이었다는 점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듯했다. 조선조의 또 다른 폐주였던 광해군이 ‘자주적 외교를 펼친 현군(賢君)’으로 복권되는 분위기와도 사뭇 다르다.

하지만 그를 ‘폭군’으로 규정한 사서(史書)인 ‘연산군일기’는 과연 누가 쓴 것인가? 그를 옥좌에서 몰아낸 반정(反正) 세력이 편찬한 것이라면, 당연히 그에 대한 사료비판이 가해져야 하지 않은가?

최근 연구서 ‘연산군을 위한 변명’(지식산업사)을 낸 신동준(申東埈) 21세기정치연구소장은 “어느 누구도 성리학적 잣대를 벗어난 사료비판을 가하지 않았다”는 데서 출발, 놀랍게도 연산군을 ‘태평성대 속에서 왕권 강화에 힘썼던 군주’로 재평가한다. 역사는 쓰는 이의 해석에 따라 이렇게 달라져도 되는 것일까?

신 소장의 ‘비판적 사료검토’는 우리에게 낯선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어려서부터 난폭하고 부왕(父王) 성종과 갈등관계에 있었다는 연산군의 유년부터 유년부터 왜곡의 실록을 면밀히 검토하면 오히려 효성이 지극하고

총명했다는 것. 스스로의 인내와 노력으로 보위를 이은 연산군은 시(詩) 130여편을 지을 정도로 제왕으로서의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낭만주의자였으나 의외로 미색(美色)에는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덕(德)보다 힘을 중시한 패도(覇道)주의자였고, 신권(臣權)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은 왕권주의자였다. 이 점을 지목해 폭군이라고 한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군신 간의 위계질서를 확립하려던 세종과 성종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런 시각에서 그동안 연산군에게 씌웠던 오명(汚名)들은 다시금 해명의 기회를 얻는다. 즉 무오·갑자사화의 본질은 신진 사림들의 도전에 대한 정당방위로 볼 수 있고, 폐비사건은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했다는 해석이다.

그가 ‘패륜아’였다는 기록들에도 새로운 해석이 가해진다. 백모와의 간통설은 시중에 떠돌던 항설이 각색됐을 가능성이 높고, ‘생모의 복수를 위해 성종의 두 후궁을 몽둥이로 쳐 죽였다’는 기록도 정황을 맞춰보면 날조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할머니 인수대비에게 불효했다는 기록은 뒤집어보면 지극히 보살폈다는 내용이 되며, ‘요부’로 알려진 장녹수는 그저 ‘재주 많아 총애받은 후궁’에 불과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연산군은 결국 실패했다. 그는 자신의 치세를 너무나 과신했고, 과민반응으로 사태를 악화시켰으며, 소인배들을 충신으로 착각했다. 그 결과 믿었던 신하들의 ‘명분 없는 반정’으로 하루아침에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폐위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급사하는데, 사망일이 기록에서 혼선을 빚는 것은 독살 가능성을 말해준다는 것.

연산군의 몰락은 그 뒤 조선왕조의 역사에서 신권이 왕권을 누르는 군약신강(君弱臣强)의 풍조를 낳았고, 이는 유교 성리학이 이상정치 형태로 봐 왔던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영역을 넘어 당파정치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연산군은 왕도정치를 추구하는 성리학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제왕의 신분으로 풍류를 즐기면서 패도를 추구했다’는 이유만으로 만고의 폭군으로 낙인찍혔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연산군은 힘의 논리에 의한 역사적·이념적 희생자였다는 말인가? 반정의 칼날 아래 폐주의 신세가 됐던 그가 사관(史官)의 붓끝에서 또 한번 끌려나와 부관참시당했던 것이란 말인가?
(조선일보 유석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