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
해방후 조선공산당의 혁명론과 국가구상, 그리고 노동운동
진보평론
제7호
김무용(고려대강사/ 한국사)
1. 머리말
해방후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일제시기 비합법 공간에서
벗어나 ‘해방’이라는 ‘열려진 공간’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활동하였다. 해방직후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공산주의운동은 한국에서 현대 국민국가가
수립되는 시기에 좌파운동?대중운동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해방공간의 정치지형을 주조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공산당에 대한 이해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과거만이 아니라 그 미래를 전망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선공산당에
대해서는 70년대 들어 점차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였지만, 당시 남한사회의 냉전분위기 속에서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웠다. 자연히 해방후
조선공산당에 대한 초기 연구는 운동의 사실을 복원해 냈다는 제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반공적 관점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다. 조선공산당에
대한 이해는 80년대 후반 들어 노동운동?대중운동의 성장에 힘입어 해방공간의 좌파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보다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주로 민중적 지향에서 기존의 반공적 관점을 극복하고, 공산주의운동의 존재를 확인하고 복원하려 는 차원에서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었다.*주)
*주) ??해방직후 조선공산당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사 정리는 다음과 같다. 윤덕영, ?조선공산당 남로당의
변혁노선과 활동?, ?한국현대사? 1, 풀빛, 1991 ; 김무용, ?조선공산당과 대중운동?,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연구?, 아세아문화사,
1997.??
조선공산당에 대한 기존의 이해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첫째로 접근방식의 문제이다. 기존 연구는 주로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이념, 활동에 관심을 기울여 해방직후 좌파운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으나, 조선공산당의 활동을 공산주의 세력의 혁명노선, 그리고 당과
대중, 당 운동과 대중운동의 융합이라는 두 가지 수준에서 근본적으로 접근하지 못하였다. 당 운동과 대중운동의 결합이라는 문제는 해방직후
조선공산당의 노선이 대중운동과 어떻게 관계맺고 있는가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둘째는 평가의 관점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좌와 우,
또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분법적인 구도에서 접근하였기 때문에, 해방직후 조선공산당의 활동을 논의할 수 있는 시야를 제한시켰다. 보다
다양하고 근본적인 접근을 위해서는 사회주의 자체의 의미와 전망속에서 조선공산당의 활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새로운 대안과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 글은 이러한 점들을 주목하면서 해방후 조선공산당의 재건과정, 정세인식과 혁명론, 국가건설의 전망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의미, 그리고 당과 대중운동의 관계를 살펴보려 한다. 이를 통해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의 활동에 대한 긍정 또는
부정이라는 단순한 구도를 뛰어넘어 오늘날 시점에서 공산주의운동의 과거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새로운 운동의 미래를 논의할 수 있는 수준을
확대시키려고 한다.
2. 조선공산당의 재건과 혁명론
1) 당 중앙의 재건과 대표성
일제말기,
비합법적으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은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해방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당을
재건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재건운동을 시작한 쪽은 과거 서울파 공산주의자인 이영?정백, 경성제대 그룹의 최용달,
화요파의 이승엽?조동우, 상해파의 서중석 등이었다. 이들은 8월 16일 서울 종로 장안빌딩에 모여 보통 장안파 공산당이라 불리는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고, 8월 17일부터 지방당 조직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주에서 은거하고 있던 박헌영은 서울로 올라와 당의
재건작업에 나섰다. 박헌영은 8월 20일 과거 경성콤그룹과 화요파 중심인물들을 모아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8월테제’라 불리는
당의 테제를 잠정적인 정치노선으로 제시하였다. 박헌영이 창당이 아닌 당 재건준비위원회라는 이름을 쓴 것은 1925년에 결성된 조선공산당의 전통과
연결시켜 당 운동의 정통성을 계승하겠다는 의도였다. 박헌영 중심의 당 재건준비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하자, 장안파 공산당은 동요했으며, 내부에서
당을 해체하고 재건준비위원회에 합류하자는 의견이 일어났다. 결국 장안파 공산당은 8월 24일, 분위기에 눌려 당의 해체를 결정하고,
재건준비위원회와 당의 통일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9월 8일에는 서울 계동에서 당 결성을 위한 열성자 대회가 열렸다.
국내의 다양한 공산주의그룹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이 대회에서는 첫째, 당 중앙의 선출은 노동자?농민의 기초조직을 가진 공산주의 그룹과 협의하여
결정하며, 각 그룹과의 연락은 박헌영에게 일임하며, 둘째 당 건설 뒤에는 당의 강령과 전략전술을 규정하기 위해 당 대회를 소집한다는 결정*주)이
채택되었다. 박헌영은 이 대회를 계기로 당 재건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며, 김형선?이현상?김삼룡?이관술 등 핵심측근들과 당 조직 작업에 착수하여,
9월 11일 기존의 재건준비위원회를 해체하고, 자신을 총비서로 하는 조선공산당 중앙을 재건하였다.
*주) ???熱誠者大會의
經過-分裂派의 行動을 批判하자-?, ?해방일보? 1945.9.25.??
조선공산당은 재건되었지만,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당의 재건에서 당 중앙의 선출은 공산주의 각 그룹과 협의하며, 당의 강령과 전략 전술을 규정하기 위해 당 대회 소집에 노력한다는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열성자대회의 결정과는 달리, 조선공산당의 중앙기관, 곧 정치국?조직국?서기국 등 중요기관의 요직은 경성콤그룹과 화요파 등 과거
박헌영과 직간접으로 관계를 맺었던 인물들이 장악하였다. 또 박헌영 세력은 당의 강령과 전략전술을 당 대회를 열어 결정하기로 했지만, 당 대회
개최에는 계속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조선공산당의 대표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에 박헌영 반대세력은 당 중앙의
분파성?파벌성을 비판하며 줄곧 당내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다. 반대세력은 조선공산당 중앙의 대표성을 문제삼으면서 독자적인 모임을 조직하여 의견을
제출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당 대회를 열어 중앙간부를 새롭게 인선하고 당의 전략전술을 새로이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박헌영을
비롯한 주류세력은 당시의 정세에서 전국적인 당 대회가 불가능하다는 상황론을 들고 나왔다. 이는 조선공산당 내부에서 중앙 간부파와 반대파가 서로
대립하는 지형을 장기화하면서, 조선공산당 중앙의 분파성을 쟁점화하고, 궁극적으로 당의 대표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요인이
되었다.
조선공산당의 대표성은 당 중앙 간부의 인선에 따른 분파성 때문에 출발부터 의심받고 있었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조선공산당의 대표성과 이에 대비되는 분파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먼저 현실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는 조선공산당의 대표성 문제를
해방직후 다른 공산주의그룹과 비교하는 것이 필요하다. 해방직후 재건된 조선공산당 중앙은 완벽한 것이 아니었고, 제한적인 권위를 갖는
조직*주1)이었다는 점에서 한계는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일제말 국내 공산주의 운동의 조건과 해방직후 정세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고려가 당
중앙의 재건이 지닌 오류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되지만, 당시의 시대적 조건도 시야에 넣을 필요가 있다. 박헌영 중심의 재건그룹은 전국적
수준에서 전체 공산주의 운동은 대표하지 못하였더라도, 해방직후의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공산주의자 써클이었으며, 장안파와 대비되는 조직과
투쟁경력, 그리고 ‘8월테제’라는 운동방침, 투쟁경력에 따른 명망성과 권위 등을 갖고 있었다.*주2) 곧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 재건파 계열은
다른 공산주의 그룹에 비해 상대적인 차별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주1) ??신주백, 1991, ?8.15해방과 조선공산당
재건?,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 한길사, 265쪽.??
*주2) ??정병준, ?박헌영·남로당 노선 무엇이 문제인가??,
?역사비평? 1989년 여름호, 286-287쪽 참조 ; 신주백, 앞의 논문, 254-256쪽 참조 ; 윤덕영, 앞의 논문, 148-149쪽
참조.??
해방후 재건된 조선공산당 중앙의 대표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파벌 또는 분파문제와 맞닿아 있다.
분파문제는 조선공산당의 대표성이 제한적으로 이해되는 요소지만, 여기에는 분파 자체에 대한 부정적 사고도 반영되어 있다. 공산주의 운동에서 분파는
원천적 도덕적으로 용납되어서는 안된다는 시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북한에서 해방직후 조선공산당을 평가하는 관점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분파는 항상 존재해 왔으며, 당내외 민주주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오히려 당 운영에서 중앙의 권위와 논의의
집중을 내세워 분파를 금지하는 공산주의 운동에서 당내 민주주의가 억압되는 경우가 많았다. 공산주의 운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분파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당내외에서 분파가 어떻게 기능하고 작동하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분파문제만을 가지고 재건그룹의 대표성을 비판하는 것은 여전히 제한적
의미를 지닐 뿐이다.
나아가 조선공산당의 대표성을 바라보는 문제에서 중요한 점은 평가의 기준과 범위이다.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 중앙이 전국적 수준에서 대표성을 획득하지 못하였음은 분파문제, 특히 조선공산당 재건그룹의 인적 구성에 집중되어 왔는데, 이에 대한
시야를 더 넓힐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정치노선의 문제가 여전히 중요한데, ‘8월테제’로 대표되는 조선공산당의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이 당시
좌익세력의 지향과 전망을 얼마나 담아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조선공산당의 혁명론은 당시 공산주의자들 내부에서, 특히 장안파의
프롤레타리아혁명론에 비해 우월성을 지니고 있었다. 장안파 공산당은 비록 원칙적이고 계급적인 입장은 표명했지만, 해방직후 공산주의 세력 내부에서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하였고, 현실에서 대중운동과 결합하지 못했다.*주)
*주) ??김무용, ?해방직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공장관리운동?, ?역사연구? 4호, 1995, 155-158쪽 참조.??
그럼에도 조선공산당의 혁명론이 지니는 우위가 절대시 될
수는 없다. 좌익운동 전체의 입장에서 조선공산당의 혁명론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해방직후 공산주의 분파 가운데, 이정윤 중심의 ML계열,
영등포지역 사회주의 그룹 등은 조선공산당의 혁명론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조선공산당 중앙의 구체적인 정세 인식과 운동방침에 대해
비판적이었다.*주) 조선공산당의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이 지니는 대표성은 전체 공산주의운동 수준에서 제한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주) ??같은 글.??
2) 정세인식과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
조선공산당은 1945년
9월 20일, 중앙위원회를 열어 ‘8월테제’라 불리는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당의 정치노선으로 결정하였다. 조선공산당은 ‘8월테제’의
국제정세인식에 따라 소련과 함께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인식하고 미소협력에 의한 평화적 정권수립을 전망하였다. 조선공산당은 지금과 같은
세계혁명 발전과정에서 조선과 같은 나라는 평화적으로 혁명의 성공이 가능하다는 실례를 보여주었다고 주장하였다.*주)
*주)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1945.9.20) ; 김남식 엮음, 1988, ?남로당연구? II, 돌베개, 20-21쪽
; ?조선혁명의 국제적 연관성?, ?해방일보?, 1945.10.31.??
조선공산당의 정세인식에 대해서는 미국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입장과 소련의 국제노선을 수용한 결과라는 견해*주)로 나눠지고 있지만, 보다 중요한 문제는 대미인식이 좌익 내부에서 생산되고
하나의 방침으로 굳어지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조선공산당의 정세인식에 따른 전술 운용이 국가건설운동?대중운동의 전개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점이 제기된다. 해방후 상황에서 미군정의 존재는 객관적으로 좌익운동?대중운동의 전망과 대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공산당의 정세인식은 해방후
당이 대중운동과 결합 또는 분리될 수 있는 하나의 지점이었다.
*주) ??김남식, ?박헌영과 8월테제?, ?해방전후사의 인식?
2, 한길사, 1985, 11-113쪽 ; 이철순, ?해방직후 좌익세력의 대미인식에 관한 연구?, 서울대 정치학과 석사논문, 1988,
18?44쪽.??
조선공산당은 전후 미국과 소련이 평화와 민주주의 발전에 동일한 역할을 하며, 이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정권수립이
가능하다는 정세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공산당의 평화혁명론은 세계혁명에서 차지하는 소련의 역할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방후 사회주의세력들의 소련에 대한 의존성을 드러내고 있다. 조선공산당의 인공 수립도 미군의 남한점령에 따른 다양한 정치적 상황이
고려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평화혁명론을 바탕에 두었다.
평화혁명론에 따른 낙관적 전망은 대미?대미군정 협조전술로 나타났고, 이는
인공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국가건설운동, 사회주의운동과 대중운동의 기본적인 전술로 구체화되었다. 물론 조선공산당의 정세인식이나 평화혁명론이
미군정 자체에 대한 인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박헌영은 미군정에 대한 협력을 조건부 협력*주)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조선공산당은
평화혁명론?협조전술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미군정에 대한 태도는 애매하였고, 미군정이 지방 점령정책을 실시하면서 인민위원회를 탄압 해체하는
상황에도 수세적으로 대응하였다.
*주) ???中央 及 地方同志 聯席懇談會會議錄?,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조선공산당문건자료집?(1945~1946), 1993, 172쪽.??
조선공산당의 평화혁명론과 협조전술은 해방후 정세인식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미?소의 정책, 특히 남한에서 미군정의 정책에 따라 방향이 결정되는 의존적인 성격을 지녔다. 평화혁명론과
협조전술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미군정의 협조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러나 남한에서 미군정이 사회주의운동을 탄압하는 조건에서 평화혁명론과
협조전술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것이었다.
평화혁명론과 협조전술은 미군정의 정치질서와 객관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좌파운동이
반제반미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을 공식적으로 억제하면서 운동의 흐름을 왜곡하는 역할을 하였다. 자연히 사회주의진영 내부에서도 비판이 제기되고
있었지만, 조선공산당은 흔들리지 않고 평화혁명론에 따른 협조전술을 꿋꿋이 추진하였다. 해방후 미소가 남북한을 분할점령하고, 조선공산당이 처음부터
미군정과 전면대결을 벌일 수 없는 상황에서 평화혁명론과 협조전술은 현실적인 대안일 수가 있었다. 조선공산당의 평화혁명론과 협조전술이 지니는
문제도 미국?미군정에 대한 협조 그 자체가 아니었다. 문제는 평화혁명론과 협조전술이 사회주의운동과 대중운동의 다양한 선택이나 가능성을 현저하게
축소시켰다는 점에 있었다.
조선공산당은 이러한 정세인식을 바탕으로 해방후 조선혁명을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으로 설정하였다. 조선공산당은
‘8월테제’에서 조선의 혁명단계를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고, 기본과제로서 민족의 완전독립과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을 내놓았다.*주1)
조선공산당의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에 대해서는 주로 토지국유화 강령과 민족부르주아지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둘러싸고 논란이 제기되었다.*주2)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반식민지 지역의 공산당들은 대부분 반제반봉건 과제의 해결을 목표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을 정치노선으로
채택하고 토지국유화를 내세웠다. 이론적으로 반제반봉건과제를 해결하고 자본주의 발전을 억제하면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전망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에서 토지정책의 최고강령으로 토지국유화를 주장하는 것이 혁명의 단계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민족부르주아지 문제에서도 조선공산당이
‘8월테제’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한 부분은 일제와 협력한 반동적 자본가?지주?고리대금업자였다. 조선공산당은 민족부르주아지?지주에 대한 문제를
민족통일전선 차원에서 접근하였다. 조선공산당은 통일전선에서 계급동맹의 범위를 넓히려는 차원에서, 전농과 전평을 비롯한 대중운동 방침에서는
민족부르주아지?지주에 대한 구체적인 배려방침을 마련하였다.*주3)
*주1)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 앞의 글, 김남식 엮음,
?남로당연구? II, 돌베개, 1988.??
*주2) ??김남식, 앞의 논문, 116-17쪽 ;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238-39쪽. 608쪽.??
*주3) ??현훈, ?노동자 공장관리에 대하여?,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결성대회회의록?(1945.11), 97쪽 ; ?조선인민보?
1945.11.25?27?12.12.??
조선공산당은 민족통일전선에서 노동자 농민의 헤게모니를 인정하였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은 반제반봉건 과제를 우선과제로 설정하기 때문에 노동계급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형태는 처음부터 제한적이었다. 조선공산당은 특히
사회경제적 이유보다 정치적 차원에서 민족통일전선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전선을 현실에서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헤게모니 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공산당이 현실에서 그 존립이 부정되고 있는 민족부르주아지와 지주를 정치적 차원에서 통일전선의 동력으로 포함시킨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조선공산당은 민족통일전선에 의한 인민정권 수립이라는 목표 아래 정치적으로는 미군정에 협조하고, 경제적으로는 양심적
지주나 민족자본가와의 협력을 중시하는 우경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조선공산당의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에 대한
이해는 주로 토지문제나 민족부르주아지, 민족주의세력과의 통전문제에 머물러 있지만, 보다 중요한 문제는 조선공산당의 혁명론 자체가 지니는
성격이다. 조선공산당의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은 2단계 혁명론이었다. 제1단계인 반제반봉건 혁명을 해결하고, 노동자 농민의 독재, 궁극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향하는 혁명이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은 반제 반봉건과제의 해결을 통해 자본주의를 일정하게 발전시키는
자본민주혁명이었다. 다만, 조선공산당의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론은 반제반봉건 과제를 해결하는 자본민주주의 단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전망하고 성장전화하는 연속혁명론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조선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에서 혁명의 2단계인 프롤레타리아혁명,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이를 위해 전제조건인 반제반봉건 투쟁으로 그 자유발전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주)
*주)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 앞의 글, 김남식 엮음, ?남로당연구? II, 돌베개, 1988,
33쪽.??
따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의 이행전략은 1단계인 반제반봉건 과제를 해결하여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국면을 창출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조선공산당의 노선에서 이러한 이행국면의 창출이 어렵다는데 있다.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을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과 프롤레타리아혁명을 구분하는 성장전화론?단계론에 따라 혁명론을 이해하고 있었다.*주1) 조선공산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에서
토지개혁을 전제조건으로 사고하여 조선에서 토지문제를 해결한 뒤에야 반자본주의 과제의 해결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요컨대, 조선공산당은
혁명론에서 반제반봉건 과제와 반자본주의, 사회주의 과제를 기계적으로 구분*주2)하여 단계론적으로 사고하고 있었다.
*주1)
???조선인민보? 1945.10.11.??
*주2) ??이기수, ?백남운씨의 ?연합성 신민주주의?를 박함-민주주의 조선건설에
옳은 노선을 위하여?. ?신천지?, 제1권 5호( 1946.6), 44-3쪽.??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조선공산당의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에 따른 성장전화노선이 문제되는 것이다. 곧 조선공산당이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에 바탕한 단계론적 인식에 따라 반제반봉건 과제를
반자본주의?사회주의 과제를 분리하고, 대중운동의 수준을 조절할 경우, 해방직후 좌파운동?대중운동이 지닌 다양한 전망을 제대로 결합시켜 내지 못할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는 조선공산당이 반자본주의 과제와 결합된 노동자 공장관리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따라서 조선공산당의
혁명론은 노동운동의 가능성을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틀안에 묶어두어 규격화하고, 노동운동의 영역에서 당과 대중, 당 운동과 대중운동을 분리시킬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주)
*주) ??김무용, 앞의 논문(1995), 98-00쪽.??
3. 조선공산당의
국가건설 전망
1) 인민전선 정부론과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해방후 조선공산당의 국가구상은 일제시기 코민테른의
혁명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코민테른 7차대회에서는 계급혁명보다 파시즘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반파시즘 인민전선전술이 강조되면서, 소비에트
국가권력에 이르는 과도단계로서 인민전선정부가 새로이 설정되었다. 인민전선전술에 따른 반제통일전선이 조선에도 일정하게 수용*주)되면서 기존
소비에트 국가건설론이 수정되고 있었다.
*주) ??임경석, ?일제하 공산주의자들의 국가건설론?, ?대동문화연구? 27집,
1992, 221-23쪽 참조.??
해방후 사회주의자들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당면주장과 투쟁목표에서 혁명적 민주주의적
인민정부를 확립할 것을 내걸었다. 조선공산당은 ‘8월테제’에서도 민족통일전선을 통한 인민정권, 곧 인민정부 수립구상을 밝혔다. 인민정부는
대지주?고리대금업자?반동적 민족부르주아지를 제외한 모든 인민대중이 참여하는 통일전선 정부로서 반제반봉건 혁명을 목표로
하였다.*주)
*주) ???조선인민보? 1945.9.15 ;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 앞의 글, 김남식 엮음, 앞의 책,
32쪽.??
1945년 9월 6일 수립된 조선인민공화국은 해방직후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자들의 인민정부론, 곧
국가건설 전망이 현실에서 구체화 된 형태였다. 인공은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을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였다.*주1) 조선공산당은 통일전선전술
차원에서 인공 수립에 조직적으로 개입하였다. 당시 조선공산당 내부에서도 건준을 기계적으로 인민위원회로 전환시켰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인공
결성을 주도한 지도부가 당시 혁명세력의 다수를 대표하고 있다는 당위성 때문에 묻혀 버렸다. 인공의 결성은 아래로부터 자생적으로 조직되던
국가건설운동이 위로부터의 국가권력의 형성을 시도한 조선공산당의 방식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무엇보다 조선공산당의 국가권력 전망을
구체화하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주2)
*주1) ??최상룡, ?미군정과 한국민족주의?, 나남, 1988, 86쪽 ;
스칼라피노?이정식(한홍구 옮김), ?한국공산주의운동사? 2(해방후 편, 1945~53), 1986, 323-24쪽 ; 심지연,
?조선혁명론연구?, 실천문학사, 1987, 154쪽.??
*주2) ??김무용, ?해방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조선인민공화국?(1945.8-1945.12), ?한국사학보? 제9호, 2000, 345-46쪽.??
특히 조선공산당입장에서
인공의 수립은 해방이라는 혁명적 상황속에서 대체권력의 수립을 통해 이중권력(dual power) 상황을 창출한 것이었다. 이중권력 상황은 혁명적
상황에서 2개의 정부가 존재하면서 국가권력에 대한 통제력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인공수립의 의미는 무엇보다 부르주아 정치와는 새로운
정치질서를 주장하며, 대안적인 국가권력의 형성을 시도한다는 점에 있다. 조선공산당은 인공수립을 통해 앞으로의 국가권력 장악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미군정에 대항하는 인공?인민위원회라는 근거지를 마련했다. 인공 중앙은 수립되자 마자 좌파정치의 상징적 거점으로 기능하면서 국가권력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미군정과 격렬한 경쟁관계에 돌입하였다.*주)
*주) ??김무용, 앞의 논문(2000),
347쪽.??
인민정부로 수립된 조선인민공화국은 총선거를 통해 정식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의 과도정부로서의 위상을 지녔지만, 많은
한계를 드러냈다. 인공내각에 포함된 이승만?김구?김성수를 비롯한 국내외 인물과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결정되었고, 선임된 인물들도
취임하지 않았다. 사실 인공의 내각에는 정치적 고려에 의해 우파 보수세력이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요지위에는 조선공산당의 핵심인물들을 대거
포진시켜 좌파적 성격이 과도하게 노출되었다. 이는 통일전선정부로서 인공의 대표성과 정통성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인공의 대표성은 미군정이
실시되고, 다양한 정치집단이 운동이념과 노선에 따라 대중의 지지를 분할하고 있는 해방직후의 상황에서 설득력을 갖기 어려웠다. 과거 운동에 대한
정통성이 일반대중들에게 대표성을 이끌어 내는 수단이 되지 못했다.
조선공산당은 이에 인공지지를 대중운동으로 발전시켜 인공의 대표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조선공산당은 당과 대중운동의 수준에서 인공을 인민정부로 규정하고, 대중운동을 국가형성운동에 결합시켜 나갔다. 조선공산당의
권력장악 전망을 구체화하는 인민정권 수립은 사회주의운동과 대중운동의 목표였다. 인공수립과 함께 ?정권은 인민의 손으로???인민공화국 만세?를
슬로건으로 하는 인공지지운동은 노동운동?농민운동의 주요한 슬로건이 되었다.*주)
*주) ???조선인민보?
1946.9.14?12.5?9?10?24.?? 93;
좌파 대중조직을 동원하여 인공의 지지기반을 확대하려는 전술은 사회주의세력의
전통적인 방식이지만, 조선공산당은 당과 연계된 각종 대중조직에서 우익에 비해 우위에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이러한
방식은 국가건설운동과 대중운동, 이 양자의 관계를 어떠한 수준과 방식으로 결합시켜야 하는가 하는 점에서 많은 의문점을 제기하고 있었다.
조선공산당의 인민정권 건설운동이 지니는 문제점은 대중운동의 다양한 가능성을 모두 인민정권 수립에 종속시키는 지점에서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공산당의 인공수립 운동은 남한에서 인공?인민정권만 수립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인민정권 만능론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는 인민정권
수립이라는 조선공산당의 공식노선에 대중운동을 규격화하고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좌파 대중조직이나 운동으로 인공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전통적 방식은 인공의 대표성을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조선공산당은 전평?전농?부인총동맹?청년동맹 등 소속 좌파 대중조직에게
인공지지를 유도하였지만, 이들의 인공지지는 ‘박헌영 동무만세’=‘조선공산당 절대지지’=‘스탈린명예의장 추대’와 등치되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공산당의 지도는 대중단체에 좌경적 행위를 강제하는 극좌적 오류로 비판받으면서, 일반대중들에게 인공의 상징성을 오로지 좌익정부로 이해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조선공산당은 인공의 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해 1945년 11월 총선거라는 근본적인 방안을 확정하였지만,
이는 처음부터 실현불가능한 것이었다. 미군정이 선거의 중지를 요구하고 있고, 선거를 담당할 주체인 인공과 인민위원회의 대표성이 형성되지 않은
조건에서 실시여부가 유동적이었고, 그 결과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인공의 선거구상은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사회주의세력이 추진한 국가건설운동?인민정부
수립운동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 혁명적 임시정부라고 주장했던 인공의 대표성을 대중적 운동으로 획득하지 못하고, 투표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 확보하려는 지점에서 양자의 모순이 발생하고 있었다.*주)
*주) ??김무용, 앞의 논문(2000),
360-63쪽.??
조선공산당의 국가건설운동이 지니는 한계는 민족주의 우파세력과의 통일전선에서도 반복되었다. 조선공산당은 인공의
외연을 확대하려고 민족주의세력과의 통일전선을 추진했다. 인공의 취약성은 해방정국에서 차지하는 정치세력의 역학관계에 의해 규정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공산당은 현실정치에서 힘을 갖고 있던 우익정치 거두와의 통일전선에 주력하였다. 조선공산당이 민족통일전선의 이름으로 추진한 이러한 상층통전은
우익의 대표주자인 이승만?김구가 대중의 지지를 분할하고 있는 상황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협상에 가까왔고, 정치적 정략적 성격이
강했다.
조선공산당은 이승만?김구세력과의 개별적인 통일전선운동이 차례로 좌절되자, 마지막 카드로 사회주의 정당을 대표하는
조선공산당과 민족주의세력을 대표하는 상해 임정이 좌우 연립정권을 수립하는 구상을 내놓았지만, 이것마저도 성사되지 못했다. 이제 조선공산당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공산당의 전통적인 지지기반인 대중조직이었다. 1946년 들어
조선공산당이 좌파 대중조직을 기반으로 인민정부를 수립하려는 전술로 다시 회귀하는 것은 당시의 정치지형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2) 조선인민공화국의 체제구상과 성격
조선공산당은 당과 권력기구라는 차원에서 통일전선 조직인
인민위원회를 기본으로 권력을 수립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인민위원회 정치체제는 인민대표회의를 통해 형성되었다. 조선인민공화국도 전국의
인민위원회 위원들로 구성된 인민대표자회의에서 수립되는 방식을 거쳤다. 인공주도세력은 1945년 9월 6일 1차 전국 인민대표회의를 소집하고,
임시국가 조직법안을 상정하여 통과시키고, 국호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결정하였다.*주) 인민정부 정치체제에서 인민대표회의는 정부, 곧 중앙권력을
창출하는 최고의 주권기관이자 제헌권을 가진 민중의회적 성격을 띠는 기구로 기존의 부르주아 의회를 대신하여 새로운 정치구조를 창출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만, 중앙에만 인민대표회의가 구성됨으로써 지방수준에서 아래로부터 대중들의 민주주의 열망을 흡수하는 대의기관을 마련하지 못한
한계는 지녔다.
*주) ???해방일보? 1945.10.18 ;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의사록?, 김남식 엮음, ?남로당연구?
III(자료편), 돌베개, 1988, 33쪽.??
인민대표회의 체제에서 중요한 것은 인민대표회의를 통해 형성된
중앙인민위원회였다.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는 헌법제정, 내각구성과 함께 중요정책을 결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된 인민위원
55명은 중앙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중앙인민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인민정부인 인공의 주석을 비롯하여 내각의 부서는 중앙인민위원이 중앙인민위원
자격으로 겸임하는 형태였다. 이러한 정치체제에서 중앙인민위원회와 인민정부, 곧 조선인민공화국은 상호 결합되어 있었다. 인민정부체제 내에서
중앙인민위원회와 인공내각은 인적?조직적으로 서로 결합되고 분리되는 이중의 권력구조를 형성하였던 것이다.*주)
*주)
??김무용, 앞의 논문(2000), 372-73쪽.??
전체적으로 인민위원회 정치체계는 인민위원회-인민대표회의-인민정부라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인민위원회를 기본으로 한 인민정부 정치체제는 첫째, 도?시?군 대표 인민위원 선출→인민대표자대회 구성→중앙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헌법제정과 정부조각 등을 담당하는 의회적 주권적 정치체제, 둘째 면?구→군?시→도 단위 인민위원회가 중앙인민위원회=인민정부 내각 부서로
연결되는 권력 또는 행정적 정치체계로 나누어졌다. 인민정부의 정치제제는 인민대표회의와 인민위원회라는 이원적 체제로 구성되어 있지만, 둘 다
중앙인민위원회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중심은 중앙인민위원회였다.
인민위원회 조직을 기초로 한 정치체제 구상은 일제시기
공산주의자들의 궁극적 노선이었던 소비에트 국가건설론과의 공식적인 단절이자 새로운 전환을 의미하였다. 생산조직이나 계급조직이 아닌 행정구역
단위에만 조직하는 한계는 있지만, 전국적인 수준에서 인민이 직적 선출하는 중앙주권기관인 인민대표회의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소비에트 조직의 형성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다만, 조선에서는 노동자 중심인 생산단위의 계급조직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권력조직을 행정?거주단위로
편성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위원회가 소비에트 조직과 달리, 처음부터 행정이나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도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나아가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체제는 조선공산당이라는 당과 인공이라는 정부(국가)권력이 결합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인공 내각부서에 공산당 조직에서 전통적으로 중요한 선전부·서기국이 설치된 것은 당 조직과 국가의 정부조직이 융합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인공형성의 모태이자 가장 핵심적인 기구인 중앙인민위원회에는 조선공산당계열 인물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주1)
조선공산당 내부에서도 박헌영중심의 경성콤그룹이 인공정부를 독점하여 중앙인민위원회는 ‘경성콤그룹 파벌의 독재’*주2)가 되고 있다는 비판이 생겨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인공의 내각구성에서는 비사회주의 계열의 명망가를 포진시켜 인공의 대표성을 확대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당
차원에서 중앙인민위회를 통해 인공이라는 정부, 장래의 국가를 통제할 수 있는 기제로서의 당의 국가지배라는 구조를 마련했던
셈이다.
*주1) ??이정식, ?조선공산당과 인민공화국?, ?한국현대사와 미군정?,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1,
94-5쪽.??
*주2) ???黨 中央部의 宗派主義에 對한 批判?,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앞의 책, 31쪽 ;
영등포노동동지회, ?建議書?, 한림대아시아문화연구소, 앞의 책, 35쪽.??
이러한 점에서 인공은 사회주의 국가권력에서
전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당-국가’(party-state)*주1) 체제, 곧 당과 국가가 융합되어 국가기관에 대한 당의 우위성이 제도화되는
체제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사회주의운동의 전통이지만, 사회주의 국가의 일당체제와 같이, 해방후 조선공산당도 일국일당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조선공산당과 인공의 관계도 그러하지만, 일반적으로 일당체제에서 정부(국가)의 일상적인 기능이 당의 지도와 분리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인공에서는 당이 곧 국가라는 ‘당-국가’체제의 전면적인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가능성은 출발부터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주2)
*주1) ??Timothy Cheek, “The Making and Breaking of the Party-State in
China”, ed. Timothy cheek and Tony Saich, New Perspectives on State Socialism in
China, An East Gate Book, 1997, p. 4.}}
*주2) ??김무용, 앞의 논문(2000),
377쪽.??
인공은 이러한 정치체제를 바탕으로 전체적으로는 반제반봉건 민주주의과제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경제와 사회체제 구상을
제시하였다. 인공의 국가체제 구상은 큰틀에서 반제반봉건 과제를 해결하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성격을 담고 있지만, 전반적인 국가상을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많다. 이는 인공의 국가체제를 구성하는 제도들이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측면과 함께, 사회주의세력의 국가권력에 대한 이해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사회주의세력은 전통적으로 기존 국가의 사멸과 새로운 국가로의 이행, 곧 국가권력의 장악에는 적극 노력하였지만, 장래 수립될
국가상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조선공산당이나 당 이론가들의 전략전술도 인민정부로 대표되는 국가권력에 대한 당의 지배와 국가권력에
대한 통제를 획득하는데 집중되었고, 국가권력을 장악한 뒤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문제에 대해서는 소흘히 하였던 것이다.
4.
조선공산당과 노동운동
1) 조선공산당과 전평, 노동운동
해방직후 조선공산당은 재건과정부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조선공산당과 전평, 그리고 전평 노동운동과의 관계는 해방직후 당
운동과 노동운동의 수준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조선공산당은 인적 정치적으로 전평?전평 노동운동과
결합되어 있었다. 조선공산당의 활동가들은 전평 결성을 주도하였고, 전평은 결성대회에서 박헌영?김일성 등을 명예의장으로 추대하고, 긴급동의
형식으로 이영 등 박헌영 반대파에 대한 박멸을 선언하였다. 정치적으로도 전평은 조선공산당의 정세인식과 혁명론에 따른 운동방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때문에 일찍부터 전평은 조선공산당의 외곽조직으로 이해*주1)되거나, 노동조합의 중립성을 고려치 않고 좌익내 특정집단의
충실한 지지자로 선언함으로써 분파투쟁을 일으키고 전체 노동계급의 단결을 방해*주2)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은
조선공산당과 전평의 이러한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조선공산당이 전평의 결성과 노동운동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지만, 중요한 문제는 조선공산당과 전평의 관계, 그 자체가 아니라, 이것이 당 운동과 대중운동의 수준에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주1) ??스칼라피노?이정식, 앞의 책, 336-337쪽 ; 김남식, ?남로당연구? I, 돌베개, 1984,
71쪽.??
*주2) ??전현수, ?해방직후 전평의 조직과 활동?, ?한국사연구? 81집, 1993,
107쪽.??
조선공산당과 전평의 관계는 먼저 당 운동과 대중운동으로서 노동운동이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당
운동과 대중운동의 결합이라는 차원에서 당과 대중조직의 관계, 그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관계가 당과 대중운동 영역에서
상호간의 독자적인 결합을 방해하고, 당에 의해 대중조직과 그 운동이 수동적인 위치로 전락하는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전평은 물론 당과
노동조합이 독자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주) 해방직후 조선공산당과 전평은 당 운동과 노동운동의 관계에서 상대적인 독자성을
유지하는 수준에서 결합되지 못하였다.
*주) ??김양재, ?노동조합의 독자성?(1946.3.22), ?노동조합교정?, 돌베개,
1987, 55쪽.??
전평은 조선공산당 중앙, 특히 조선공산당 내 박헌영세력의 지지기반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영등포 사회주의
그룹은 전평을 경성콤그룹의 아성*주1)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전평 집행부는 대부분 조선공산당 중앙 재건파인 경성콤그룹과 정치적?인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특히 해방직후 노동운동에 관계하던 전평 집행부는 대부분 경성콤그룹의 핵심인 김삼룡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김삼룡은 조선공산당 중앙의 정치국원이자 서울시당부 책임자로서 해방후 노동운동, 전평의 조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주2)
김삼룡과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던 인물은 전평 위원장 허성택, 전평 부위원장 박세영, 전평 조직부장 현훈 등이었다. 이들과 함께 전평 서기부장
한철, 전평 조사부장 문은종 등도 경성콤그룹 계열로 분류되고 있었다.*주3)
*주1) ??조선공산당 서울시
영등포임시지구위원회, ?報告?, ?조선공산당문건자료집?,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3, 220쪽.??
*주2)
??고준석 지음?정범구 옮김, ?해방?1945~50?, 한겨레, 1989, 96쪽 ; 정희영, ?박헌영동지에게 서간?(1946.1.25),
?조선공산당문건자료집?,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3, 103쪽.??
*주3) ??김무용, 앞의 논문(1995),
139쪽.??
조선공산당 중앙의 경성콤그룹 계열과 전평 집행부의 관계는 전평이 노동운동 전국조직으로서 조선공산당과 결합하는 방식
또는 수준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공산당과 전평이 결합하는 과정에서 전평 집행부는 인적?정치적으로 전국적 수준에서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중심으로서가
아니라 주로 조선공산당 중앙의 재건파와의 관계속에서 자리매김되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속에서 조선공산당 중앙, 특히 재건파에게 전평의 존재는
‘자기세력’의 의미가 강조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전평은 독자적인 대중조직의 기능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조선공산당 중앙의 노선과 방침을 전달받아
대중조직 차원에서 수행하는 수동적 기구로 전락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당과 대중운동의 관계에서 당의 능동성과 노동운동의 수동성을
나타내는 특징이며, 전평 노동운동이 조선공산당의 성패여부에 달려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주)
*주) ??김무용, 앞의
논문(1995), 140쪽 ; 김무용, ?해방직후 조선공산당과 대중운동?,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연구?, 아세아문화사, 1997,
275?302쪽.??
조선공산당 중앙과 전평 집행부의 관계는 당 운동 차원에서 노동운동을 결합하는 방식과도 관련을 지니고 있다.
조선공산당 중앙이 노동운동과 결합하는 방식은 노선과 정책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하는 속에서 지도권을 확립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조선공산당 중앙의
재건파는 ‘박헌영의 경성콤그룹만이 국제노선의 직계이며 정통’이라고 선전하면서, 중앙의 권위를 내세워 다른 분파와 그룹을 흡수하거나 해산시켰다.
조선공산당 중앙의 재건파가 당 운동 차원에서 노동운동?공장관리운동에 개입하는 형태도 국제노선과 정통을 강조하며 자기세력을 확보하는 이른바 ‘대중
또는 노동자를 전취(戰取)’하는 방식이었다. 조선공산당 중앙의 재건파와 영등포 사회주의 그룹은, 영등포 공장지대에서 ‘대중의 전취’ 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이들은 조선공산당 중앙이 대중을 전취하도록 지령하여 대중운동을 분열시키고, 당과 대중을 분리시켰다고 비판하였다.*주)
이처럼 대중을 전취하는 방식에서는 당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파세력의 확보가 강조되기 마련이었고, 당과 노동운동이 올바른 관계와 수준으로
결합되기 힘들었다.
*주) ???조선공산당문건자료집?,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3, 33?134?149-150,
156-158?167쪽.??
조선공산당과 전평의 관계는 노동운동의 방침과 전술에서도 그대로 재연되었다. 해방직후 전평의
운동노선과 방침은 조선공산당의 정세인식과 노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전평의 노동운동 방침은 조선공산당의 혁명노선이 노동운동 영역에서 구체화된
형태였다. 하지만, 조선공산당이 당 운동과 대중운동 차원에서 노동운동을 결합시키려는 수준은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이라는 틀’에 강제되어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해방후 노동운동은 미군정과 객관적으로 대립하였다. 미군정이 지니는 현실적인 규정성을 고려할 때, 조선공산당과 전평의
정세인식과 태도는 크게는 당 운동과 노동운동이 융합할 수 있는 하나의 요소였다.
그러나 노동자 공장관리운동이 대표적이지만,
전평은 조선공산당의 정세인식에 따른 협조전술을 채택하면서, 노동자 투쟁이 전투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제한하였다. 협조전술을 유지하려면, 노동운동은
미군정이 이해하는 수준에서 조절되어야 했다. 전평은 이러한 차원에서 공장관리운동을 현실적으로 포기하고, 산업건설운동을 공식적인 운동노선으로
채택하였다. 이는 노동자 공장관리는 인민정권 수립 뒤에 가능하다고 보고, 공장관리운동을 산업건설과 경제부흥, 나아가 인민정권 수립에 종속시키는
지점에서 구체화되었다.*주) 이는 노동운동의 발전전망을 자신들의 판에 박힌 공식에 가두어 놓고, 노동운동이 미군정과 대립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을 억제하는 일이었다.
*주) ??김무용, 앞의 논문(1995) 가운데 (2) 공장관리운동에 대한 공식방침
참조.??
이에 공장관리운동은 인민정권 수립 뒤에 실현될 미래의 방안으로 상정되었고, 1946년 들어 현실 운동노선은
산업건설운동으로 공식화되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미소공위가 개최되고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전망속에서 미군정의 통치방침에 대립할 이유가
없었다.*주1) 조선공산당이나 전평은 노동운동의 목표를 인민정권 수립에 두었기 때문에, 미군정과 마찰할 가능성이 있는 공장관리운동보다는
산업건설운동이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전평의 산업건설운동노선이 채택되는 과정은 바로 해방직후 노동운동의 다양한 가능성이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과
결합하는 과정인 동시에 이러한 틀속에서 왜곡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주2)
*주1) ??정해구, ?미군정과 좌파의 노동운동?,
?경제와사회? 2권 1호(1989), 129쪽 ; 전현수, 앞의 논문, 125쪽.??
*주2) ??김무용, 앞의
논문(1995), 137쪽.??
여기에서 영등포지역 사회주의그룹이 조선공산당 중앙의 정세인식과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에 대한
비판적 이해 아래, 당 운동과 대중운동을 결합하는 차원에서 계급적인 전망을 가지고 공장관리운동을 주장한 사례는 일정한 시사를 주고 있다.
영등포지역 사회주의그룹은 분파투쟁과 관련을 맺고 있는 한계는 있지만, 반자본주의 전망 아래 공장관리운동을 결합시켜 나갈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해방직후 조선공산당 중앙과 전평 집행부, 그리고 영등포지역 사회주의 그룹의 대립은 당 운동과 대중운동의 차원에서 노동운동?공장관리운동을
결합시켜 냈던 방식과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며, 이는 본질적으로 해방직후 사회주의운동?노동운동 내부의 이론적 실천적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주)
*주) ??김무용, 앞의 논문(1995), 168쪽.??
2) 신전술의 채택과
노동운동
해방직후부터 조선공산당은 미군정과 협력하면서 평화적 정권수립을 기대하였으나, 1946년 들어 미군정의 좌익 탄압정책이
중앙과 지방 수준에서 전면화되면서 어려움에 빠졌다. 특히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과 미군정의 대립이 전면화되고,
미소공위도 휴회되면서 미소협력을 전제로 한 협조전술은 현실적인 대안으로 기능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조선공산당은 1946년
중반까지 미군정의 정치질서 구축에 따른 좌익탄압 정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협조전술을 계속 유지하였다. 조선공산당은 협조전술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조선공산당의 협조전술은 당과 대중운동 영역에서 합법성을 고수하면서 현실과 괴리되어 나갔고,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협조전술이 당운동과
대중운동의 전술로서 기능하지 못하면서 협조전술에서 이탈하는 흐름도 조직되고 있었다. 이는 당과 대중운동을 분리시킬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주)
*주) ??김무용, ?해방후 조선공산당의 신전술 채택과 당면과제?, ?역사연구? 제5호, 1997,
250쪽.??
조선공산당은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1946년 7월 26일 신전술을 채택하였다. 조선공산당의 신전술은
좌익내부의 정치적 요구만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제기되는 대중운동의 내재적 전망과 요구를 일정하게 반영한 것이었다. 조선공산당은 미소공위 휴회 이후
정치적 전망을 회복하고 당과 대중운동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신전술을 채택하였다. 이때 신전술은 미소공위 연기와 미군정의 탄압으로 구체화되는
불리한 정치 지형을 극복하고, 공세적 정치지형을 창출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자연히 수세적 상황에서 채택된 전술인 만큼, 앞으로의 전망은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지만, 당시의 정치지형에서 좌파운동의 방향을 전환시킨 의미를 담고 있다.*주)
*주) ??신전술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는 김무용, 앞의 논문(1997)(4. 신전술의 정세인식과 당면과제), 285-305쪽 참조.??
먼저 신전술은 8월테제에
따른 정세인식과 이에 근거한 협조전술을 수정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선공산당은 신전술에서 미국?미군정을 제국주의로 규정함으로써 협조전술
하에서 억제되었던 반제반미운동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조선공산당의 신전술 채택에 따라 대중운동은 미군정과의 대결국면을 창출하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었다. 또한 신전술은 ‘8월테제’에 근거한 평화적 정권수립 노선을 수정하여 비평화적 방법에 의한 권력장악 전망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의미를
지닌다. 다음으로 신전술은 공세전술?대중동원전술과 결합되어 있으며, 이는 기존 협조전술의 수세적인 대응을 철회하고 미군정?우익에 적극 대응하는
방침이었다. 특히 공세전술은 대중동원 방식으로 수행되기 때문에, 비록 자위적인 수준이라 하더라도, 미군정과의 대결로 발전하여 비합법 운동을
창출할 가능성을 지녔다. 조선공산당은 공세적인 신전술의 무게중심이 합법영역을 벗어나 비합법적인 지하운동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예상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공산당은 신전술을 채택함으로써 전술적으로 기존의 협조전술속에서 분리되고 있던 당과 대중, 당 운동과 대중운동을
다시 결합시켜 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조선공산당은 신전술에서 반제반봉건을 내용으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과제를 당면과제로 설정하였다.
조선공산당이 제시한 당면과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을 당과 대중운동의 과제로 전면화 한 것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이를 바탕으로 아래로부터
대중운동의 정치 경제 사회적 요구들을 제기하면서, 다시 대중불만의 조직자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신전술의 채택은 협조전술 하에서
분리되고 있던 당과 노동운동이 다시 결합하는 과정이었고,*주) 이는 9월 총파업에서 구체화되었다.
*주) ??김무용, 앞의
논문(1997), 317-318쪽.??
1946년 9월 총파업은 조선공산당의 전술이 변화되는 국면에서 발생*주1)하였기 때문에,
조선공산당의 새로운 정세인식과 노동운동 전망이 결합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처음의 목적과는 다르게, 조선공산당은 총파업 과정에서 그에 걸맞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박헌영을 비롯한 조선공산당 중앙지도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진 가운데 총파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조선공산당은 당 운동의
중심으로서 노동자 파업운동과 효율적으로 결합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9월 총파업은 전국적이고 조직적인 수준에서 투쟁을 조절하면서 파업역량을
극대화하지 못하고, 각 지역별 산업별 노동운동의 역량에 의존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주2) 9월 총파업이 10월 들어 노동자만이 아니라
일반대중이 참여하는 인민항쟁으로 발전해 나간 것은 기본적으로는 아래로부터 자연발생적인 대중투쟁의 폭발성이 작용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조선공산당과
전평 중앙 수준의 통제력 이완을 드러낸 일이었다. 특히 9월 총파업은 3당 합당문제를 둘러싼 조선공산당 중앙과 반대파 사이의 분파투쟁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투쟁을 집중적으로 전개하지 못했다.*주3)
*주1) ??김남식은 1946년 7월의 조선공산당의 신전술 지령에
입각하여 당과 군중이 준비없이 9월 총파업이라는 무모한 투쟁과 모험주의적 폭동을 일으켰다고 주장하고 있다.(김남식, 앞의 책, 236쪽)
정해구는 전평은 신전술 채택에 따라 전평내의 우경적 경향을 비판하고, 집단적인 대중적 파업, 곧 9월 총파업을 계획하였다고 파악하였다.(정해구,
앞의 논문, 134쪽)??
*주2) ??9월 총파업의 지역별 수준과 역량에 대해서는 김무용, ?해방후 9월 총파업의 지역별
전개와 성격?(?역사연구? 제8호, 역사학연구소, 2000) 참조.??
*주3) ??정해구, ?10월인민항쟁연구?, 열음사,
1988, 105-106쪽 ; 전현수, 앞의 논문, 141쪽.??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선공산당의 신전술과 9월 총파업의
발생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공산당의 신전술이 9월 총파업을 생산해 내는 차원에서 이해될 가능성도 경계해야 하고, 총파업이 지니는
노동운동의 내재적 성격도 고려해야 하지만, 신전술에 따른 전술변화가 노동운동의 전망과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가 하는 점은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1946년 중순까지 노동자 파업투쟁은 조선공산당 전평의 협조전술, 산업건설운동의 틀속에서 자제되어 왔다. 9월 총파업은 조선공산당이
그 동안의 우경적 노선을 철회하고 노동운동과 결합하는 하나의 계기였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공산당으로 대표되는 당 운동이 총파업 과정에서
노동운동과 어떠한 수준으로 결합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는 일은 일정한 의미가 있다.
5. 맺음말
조선공산당은 해방과
함께 당을 재건하고, 좌파운동의 중심을 형성하면서 해방공간에서 사회주의 정치를 시도하였다. 조선공산당의 활동은 적어도 1945년 말까지는
상대적인 우위를 유지하였다. 우파 민족주의 세력이 분열되어 있었고, 김구?이승만을 비롯한 우익 정치지도자들은 해외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국내에서
확고한 지지기반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특히 우파 민족주의세력 일부는 과거 일제 식민정책에 협력하여 친일파로 비난받고 있는 상황에서 대중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는데 한계가 많았다. 나아가 일제 식민지배에 지친 노동자?농민 등 기층 대중들이 급진적인 성향을 표출하는 조건도 근본적인 수준의
혁명을 주장하는 조선공산당에 유리하였다.
조선공산당은 이러한 조건에 힘입어 해방직후 다른 정치집단과의 경쟁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무엇보다 체제모순을 청산하고 대중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정치적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에 적극
개입하여 새로운 국가형성운동의 흐름을 장악하였다. 특히 조선공산당은 계급운동?사회주의운동의 중심이 되는 대중?대중조직과의 관계에서도 우익에 비해
앞서 있었다. 박헌영을 비롯한 조선공산당의 지도자들은 공산당은 지지세력은 4백만명에 이르며, 조선에서 최대의 정치세력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조선공산당이 사회주의 정치를 펼치기에 상대적으로 유리하였던 해방직후의 정치지형은 미군정의 점령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점차
해체되어 갔다. 해방이라는 정치상황에서 미국?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의 사회주의운동 전망을 왜곡시킨 중요한 요소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외세라는 외부적 요인 못지 않게, 내부적으로 조선공산당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운동 자체의 의미와 한계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해방직후
사회주의운동의 결과를 모두 외부적 요인으로 환원시키는 태도로는 과거 운동속에서 미래를 사고할 수 없다. 해방 후 사회주의운동 자체의 오류와
한계가 미군정을 비롯한 외부적 요인이나 객관적 조건 때문에 정당화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운동의 주체들이 해방이라는 상황에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검토하는 일은 중요하다. 해방후의 상황은 일제로 상징되던
과거 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박헌영을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시기에 일제시기의 비합법적인 ‘닫힌 공간’에서
해방이라는 ‘열린 공간’으로 나왔다. 해방은 조선공산당 주체들의 창조성을 요구하고 있었고, 주체의 대응에 따라 해방후의 정치지형을 새로운
수준으로 변화시킬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이 해방후의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도식적이었다.
조선공산당은 해방 후 ‘8월테제’라는 정치 프로그램 아래, 반자본주의?사회주의로의 이행 전망을 제시하였지만, 자신들의 정세인식과 혁명노선에 따른
공식에 갇혀 있었다. 조선공산당이 당 운동의 수준에서 대중운동과 결합하는 방식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발전시키는 형태가 아니었다.
조선공산당은 해방직후 다양한 대중운동을 자신들의 정세 인식과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노선이라는 틀안에 묶어두고 규격화하려고 하였다. 조선공산당
중앙은 대중운동의 가능성을 발전시키거나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을 찾지 못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공식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해방직후 아래로부터 조직되는 다양한 운동의 가능성과 창의를 틀에 박힌 교훈에 종속시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결국 조선공산당은
해방 후 사회주의운동의 중심을 형성했다는 역사적 실천적 의미와 함께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다. 현재의 시점에서 조선공산당의 역사를 바라볼 때,
과거 계급운동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만 만족한다면, 새로운 논의지형을 이끌어 낼 수 없다. 특히 공산주의운동의 주체들이 내세우는 이념적
당위만으로는 ‘지나간 운동’속에서 새로운 운동의 미래와 가능성을 찾기 어렵다. 해방 후 상황에서 조선공산당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새로운 논의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자본주의와의 비교속에서 관성적으로 접근하던 시각에서 벗어나
과거 사회주의운동만이 아니라 현실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사고가 요구된다.
출처 : [기타] http://nessaranga.najun.net/bbs/view
' 理念.思想.思潮'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서양 사상비교] 푸코와 동양의 '성의 역사' (0) | 2015.09.18 |
---|---|
앙리 메쇼닉과 현대성 (0) | 2015.09.18 |
Proposed Roads To Freedom by Bertrand Russell (0) | 2015.09.18 |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10가지 차이점 (0) | 2015.09.18 |
하이에크의 자유주의 정치사상 (0) | 2015.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