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새로운 이론과 사상] 앙리 메쇼닉과 현대성 |
도식 벗어나 ‘未知의 무엇’ 추구하는 과정 |
조재룡 _ 성균관대 강사/불문학 |
“현대성은 끊임없이 시작되는 일종의 투쟁이다. 이는 현대성이 주체, 주체의 역사, 주체의 의미가 무한히, 그리고 새롭게 생겨나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앙리 메쇼닉《모데르니테 모데르니테(Modernite modernite)》, Verdier, 1988, 9쪽.
‘현대성’이라는 전염병 “현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포스트모던의 시대’임을 자칭해 온 오늘날에 비추어 볼 때 매우 낡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질문은 계속해서 유효한 듯하다. 왜냐하면 이는 현대성에 관한 담론들이 다양한 만큼이나 이들이 서로 다른 세계를 꿈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현대성’이 아니라 복수로서의 현대성, 즉, ‘현대성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현대성에 관한 논의는 결코 중단되지 않는 것이다. 현대성 개념이 복수의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은 주로 소모적인 논쟁(polemique)의 원인이 되곤 하지만, 그러나 한편, 드물게는 인식론적 투쟁을 거쳐 생산된 진정한 비평(critique)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오늘날 제각기 독특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고 있는 현대성에 관한 담론들이 필연적으로 서로 침범할 수 없는 경계를 그으며 진행되거나, 혹은 갖가지 이데올로기라는 덧씌워진 필터를 통해서 현대성 자체를 다시 위치시키는 작업에 몰두하는 양상을 띠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이때, 현대성은 이를 주장하는 자의 이데올로기에 내포된 강점과 약점이 동시에 표출되는 연결고리이자, 이러한 것들을 외부로 드러내는 지표 역할을 한다. 한 마디로 현대성은 메쇼닉이 지적하고 있듯이, “예술·문학·사회를 함께 연결하는 고리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해당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생산된 여러 종류의 현대성들이 서로 통일된 논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은 자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물론 그들이 현대성만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와 동시에 그들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청사진, 즉, 유토피아를 함께 제시하기 때문이다. 낡은 박물관이나 갤러리의 한 구석에 진열되어 있을 뿐인 비엔나식 현대성, 세상의 종말을 알리고자 성급히 서두르는 현대성, 추상적인 진리(verite)의 추렴을 목표하는 하이데거식 현대성, 현대성의 한계를 인식하고 한 걸음 나아갔다고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성, 이성의 최후 방어선 앞에서 세상의 모든 불합리나 비이성과 맞서 싸우는 하버마스의 현대성, 18세기 계몽주의와 더불어 시작되어 칸트와 헤겔을 통해서 강화된 절대 이성의 현대성, 세상을 향해 부정과 파괴의 불꽃을 던진 20세기 초입의 다다이즘과 아방가르드의 현대성 등등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물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대성들은 ‘새로운’ 형태의 예술과 문학 작품의 도래에 맞추어 자신들의 고유한 알리바이를 확보하려 애쓴다. 1886년에서 1924년 사이만 해도 약 오십여 가지에 이르는 예술 운동과 더불어 현대성들이 난무했다고 메쇼닉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수많은 ‘이즘(isme)’이란 용어들은 바로 이렇게 해서 탄생한다. 그렇다면, 복수로서의 현대성을 전제로 성립되는 이러한 논리들은 과연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 걸까? 현대성에 관해 메쇼닉이 연구의 출발선으로 삼고 있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현대성 이해에 필요한 몇 가지 구분들 현대성과 동시대성 현대성에 관한 연구를 개진하는 과정에서 메쇼닉은 몇 가지 작업을 감행했다. 그 출발점은 무엇보다도 우선, 현대성과 동시대성(contemporainite)을 서로 구분해 내는 것이다. 현대성이 난해하고 복잡한 개념으로 자리잡게 된 주된 원인이 현대성을 ‘연대기적 연속성’처럼 사고할 때 발생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메쇼닉의 이러한 구분은 더 없이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 예컨대, 만약 우리가 현대성을 특정한 시대에 촉발된 문화적 결과물로 여기게 되면, 우리는 이러한 기준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특정 시대 이전의 무엇을 상정하게 되거나 불가피하게 이후의 것 또한 전제하게 되기 때문에 현대성이란 개념 자체는 ‘새로운 것’(le nouveau), 혹은 ‘새로움’(nouveaute)과 쉽사리 동의어가 되어 버린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는 마치 오늘이 곧 내일의 어제인 것처럼,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역시 언젠가는 과거의 지층 속에서 부식되고 마는 화석이 된다는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이치를 바탕으로 성립한다. 예컨대, 현대란 개념을 쉽사리 과거의 꼬리를 밟고 서 있는 무엇처럼 인식하게 되는 것과도 같은 논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성과 현대성은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그 까닭은, 메쇼닉의 논지를 빌리자면, 현대성이란 오히려 이러한 연대기적 차원을 벗어나는 무엇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동시대적인 것은 현대성을 뒤쫓기를 그치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성과 만나지는 못한다. 현대성은 동시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쪽에 있는 듯 보이다가도 다른 쪽으로 가버리고 만다. 따라잡기가 불가능하다.” 한 마디로 현대성은 시간적ㆍ연대기적 차원에서 발생한 몇몇 사건들에 국한되는 개념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현대성’과 ‘새로움’의 차이가 존재할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메쇼닉에 있어서 현대성(modernite)과 현대적인 것(le moderne), 모더니즘(modernisme)이란 용어 간의 관계를 구분짓는 작업은 현대성을 파악하기 위해 거쳐야 할 필연적인 수순에 해당된다. 현대성, 현대적인 것, 모더니즘 현대성과 모더니즘에 관해 메쇼닉은 전자가 “하나의 특성(caractere)을 나타낸다면, 후자는 전자의 과잉 상태를 의미한다”라고 기술한 바 있다. 다시 말해서, 현대성이란 어떤 상태를 관통하는 ‘특수성’(sepcificite)을 전제하는 개념이고, 후자는 이러한 특성들이 모여 형성된 집단성의 표출일 뿐이라는 것이다. 메쇼닉의 이러한 언급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도 후자가 ‘집단’의 양상을 띠는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나아가, 현대성이 집단의 양상을 띠게 될 경우, 현대성은 어떤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고 메쇼닉은 덧붙이고 있다. 이를테면, 현대성과는 달리 모더니즘이란 단지 “몇 년만 지나면 동일한 발현들의 집합을 정당화하고, 분류하고, 끌어모을 필요성을 느낄 뿐인 복고적인 운동”일 뿐인 것이다. 이렇듯, 현대성이 잠시 머물다간 자리에서 싹트고 만개한 모더니즘은 차츰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나아가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복고적인 성격, 다시 말해서, 어떤 정해진 도식(schema)의 양태를 띠게 된다. 하지만 현대성은 결코 이렇게 도식화된 특성들이 모여 만들어 놓은 자리에 안주하는 법이 없다. 오히려 현대성은 이러한 도식으로부터 벗어나 어디론가 향하는데, 그 양상은 이러한 도식을 ‘빠져나가거나’, 이러한 도식을 ‘사라지게 만들거나’, ‘이동시키는’ 모습으로 표출될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현대성이 떠나온 자리에는 결국 동시대성만이 남는다. 물론 이때 동시대성이 추구하는 것은 새로움이다. 메쇼닉이 ‘현대성’과 ‘현대적’이라는 형용사, 혹은 이 형용사의 실사(實辭)형인 ‘현대적인 것’(le moderne)을 서로 구분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현대성은 현대적이라는 형용사의 실사형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대성이라는 단어는 아주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현대적인 것이 현행적(現行的)인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고, 미(美)를 추출해 내지 못하는 동시대 예술을 지칭하게 될 때, 그 무엇인가가 ‘현대적인 것’이란 단어에 의해 파악되지 못하고 가려지는 것이다.” 나아가, 현대적인 것의 특성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첨언한 바 있다. “현대적인 것이 지니는 위험성은 전통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이 현대적인 것을 가장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은 현대적인 것으로 간주되거나 현대적인 것과 구분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은 지적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대적인 것’과 ‘새로운 것’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창출한 결과물이 바로 동시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모더니즘 역시 현대성의 일시적인 표출이 아니라, 현대성의 과잉으로 인하여 일정한 연대기적 특성에 갇히게 되는 제한적이고 복고적인 운동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메쇼닉은 이러한 구분을 보다 명확히 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용어들 간의 혼동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추적한다. 어원적인 의미에서의 모던, 모더니티, 모더니즘 수용미학자 야우스(H. R. Jauss)에 의하면, 우리가 주로 ‘현대’로 해석하곤 하는 ‘모던’이라는 단어는 ‘modo’에서 파생된 ‘modernus’를 어원으로 삼는다. 야우스에 의하면 이 용어는 앞선 시간과 구별된 무엇, 즉 ‘최근’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메쇼닉이 볼 때, 이러한 해석이 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메쇼닉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는 이 단어가 야우스의 지적과는 사뭇 달리, ‘최근’이라는 시간적 개념을 벗어나 한층 복합적이고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modo’(modus에서 온, 측정 가능한 단위(mesure), ‘이제 막, 적당한 상태로 남아 있는’)에서 파생된 라틴어 통속어로 ‘modernus’라 부르는 이 단어는 단어 자체의 어원만으로는 매우 미약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오히려 전적으로 문맥과 발화행위(enonciation)에 의존하는 ‘방금(juste)’이나 ‘이제 막(justement)’과 같이(예를 들어, “그는 막 떠났다.” “지금 막 도착한다.” “이제 막 떠나려는 참이다.”), 근접 과거에서 근접 미래로, 현재에서 이러한 미끄러짐 자체를 만들어내는 미끄러짐의 수행자처럼 파악할 수 있는 이 단어는 유동성과 불안정성을 간직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지적은 현대성의 개념이 한 곳에 머무르며 ‘도식을 생산하지 않는’ 개념, 혹은 이러한 도식이 만들어지는 그 순간 계속해서 이것으로부터 ‘미끄러지는’ 경향을 보이는 개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물음이 가능할 것이다. 대체 미끄러짐(glissement)이란 무엇인가? 아니, 무엇으로부터, 혹은 어디로 미끄러진다는 것인가? 예컨대, 메쇼닉의 논지는 현대성이 특정한 시기에 ‘순간적으로’ ‘막’ 도래하고 나면, 한편 이 현대성이란 그 자리에 안주하면서 이내 내적·외적 법칙이 정해져 우리가 그 법칙들을 파악할 수 있는 어떤 도식의 모습을 띠기 이전에 또 다시 어디론가 향한다는 것이다. 이때 도식이란 주로 ‘기호(signe)’의 형태, 즉, 기호가 만들어놓은, 혹은 기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분법적인 형태로 남게 된다고 메쇼닉은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메쇼닉의 관점에 의하면 “현대성의 유일한 의미”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데, 까닭은 현대성이 “기호를 벗어나기 때문이며, 기호의 능력 밖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성 그 자체가 기호가 만들어낸 도식을 벗어나 ‘미끄러짐을 수행하는 주체’이자, ‘미지의 무엇’(inconnu)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과정에서 늘 변화무쌍한 모습을 취하게 마련인 “의미의 추구 과정”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이다. 메쇼닉은 이러한 “의미의 추구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리듬(rythme)이라고 정의한다. 현대성의 징후들 보들레르와 벤야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메쇼닉이 현대성의 개념을 첫째로, “기호의 능력 밖”에서 형성되는 무엇으로 파악했다는 점, 둘째로, 현대성을 이분법적인 도식을 벗어나 ‘미끄러짐을 수행하는 주체’로 파악했다는 점이다. 메쇼닉의 현대성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보들레르의 현대성 개념과 산문시의 시도, 그리고 발터 벤야민의 역사나 아우라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성에 관한 보들레르의 언급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현대성, 그것은 일시적인 무엇(le transitoire), 달아나는 무엇(le fugitif), 우연적인 무엇(le contingent)으로서, 예술의 절반이며, 나머지 절반은 영원한 무엇(l’eternel)과 불변하는 무엇(l’immuable)이다.…당신은 매우 빈번하게 모습을 바꾸곤 하는 이 일시적이고 달아나는 요소를 비난하거나 무시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요소를 없애버리는 순간, 당신은 추상적이고 정의가 불가능한 미(美)의 공허함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보들레르의 현대성에 관한 이와 같은 주장이 모호한 성격을 벗어나게 되는 것은 보들레르 자신이 이러한 개념을 직접 적용해 보았던 《파리의 우울(Le Spleen de Paris)》, 즉, 산문시를 통해서 가늠해 볼 때이다. 만약 보들레르가 산문시를 통해서 무엇인가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산문과 시에 존재해 왔던 전통적·수사학적·이분법적인 도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보들레르가 “무시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은 이러한 요소”라 언급한 것들의 정체 역시 산문시 속에서 밝혀지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19세기 중반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대도시가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게 될 시기에 프랑스 사회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로 자리잡게 된 일상적이자 ‘기이한 흥분’을 느끼게 하는, 보들레르 자신의 산문시에서는 ‘군중’, ‘광대’, ‘늙은 여인’, ‘경찰’, ‘유리장수’, ‘행인’, ‘몰락한 왕’ 등등의 모습으로 등장한 바 있는, 전적으로 ‘성스러움(sacre)’의 반대편에 속하는 주제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산문시는 성스러움에서 ‘세속적인 것(profane)’으로의 이행을 예고하는 예술 작품인 것이다. 그리고 메쇼닉이 볼 때, 보들레르가 최초로 시도했다고 할 수 있는 산문시는 이분법의 도식을 뛰어넘는 과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때문에 현대성의 표출을 추적할 중요한 징후를 형성한다. 현대성은 예술과 삶, 이성과 비이성, 산문과 시 사이의 전투적인 대립에 반해서, 그것들을 구분하고 또는 그것들의 내적 통일성을 구분하는 이질성에 반해서, 뒤섞거나 혼합하는 기술을 발명했다. 현대성은 통일성의 비통일성을 드러낸다. 보들레르의 산문시를 예로 들 수 있듯이, 메쇼닉에 의하면 현대성이란 “장르의 혼용(混用, confusion)을 통해서” 잠시 도래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장르의 혼용을 통해서 바뀌기 시작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이성 대 비이성, 성스러움 대 세속성, 시 대 산문처럼 전통의 비호 아래 좀처럼 그 구분의 진의를 의심받지 않은 채 반복되어온 이분법적인 도식이다. 현대성은 바로 이러한 이분법적인 도식들에게 불안과 동요를 감염시키는 일종의 전염병인 것이다. 현대성은 이러한 도식이 자신의 이분법적 틀을 유지하지 못하고 잡음을 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잠깐 동안 얼굴을 내민다. 그리고 이렇게 잠시 도래한 현대성은, 특히 한 시대에 “연대기적 가치가 가장 강하게 부각되거나 유일한 것일 때, … 그 시대에 대한 전적인 거부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장르의 혼용을 실험한 구체적 예에 해당되는 보들레르의 산문시가 “현대성에 관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면서, 평범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힘, 그것도 천재성이다라는 모순도 함께 만들어내는” “의미 추구의 과정”이라고 메쇼닉이 지적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현대성과 보들레르와의 관계에서 관해, 메쇼닉은 보들레르 자신이 산문시의 집필 배경으로 수차례 언급한 바 있는 대도시라는 지리적 공간의 중요성보다는 군중(foule), 혹은 대중(masse)의 개념을 보다 중요한 요인으로 파악한다. 보들레르의 산문시가 필연적으로 산문과 시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을 붕괴시키는 과정 자체를 몸소 실행한 한 시대의 문화적 전염병이었다면, 벤야민 역시 메쇼닉과 마찬가지로 보들레르의 산문시에서 촉발된 현대성을 가늠해볼 한 요인으로 ‘일상성’과 ‘대중’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보다 단호하게 언급한 바 있다. “오로지 일상성만을 다룬 주제들을 보들레르가 자신의 시적 창조로 여기지 않았더라면 보들레르는 결코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벤야민에게 있어서 보들레르의 산문시가 지니는 현대성은 전통 예술의 ‘진정성’과 ‘통일성’을 의미하는 그만의 용어, 즉 아우라(aura)가 붕괴되면서(예를 들어, 정형률의 파괴, 성스럽고 형이상학적인 소재 대신 일상적인 테마의 선택), 이를테면, 일상성을 감싸 안으면서 형성된다. 이처럼 메쇼닉이나 벤야민에게 있어서 아우라의 붕괴가 현대성의 촉발 가능성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보들레르의 산문시가 측정 가능한 단위(예를 들어, 정형률)나, 미리 파악이 가능한 기법(예를 들어, 수사법), 혹은 미리 정해진 규칙(예를 들어, 시작법)에 바탕을 둔 산문시 이전의 프랑스 전통시에 대한 강한 비판의 고리를 형성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보들레르의 산문시는 바로 시의 미래를 향하는, 다시 말해서, 시의 관건을 ‘형식의 문제’에서 ‘의미의 문제’로 전환시킨 중요한 시도이자, 이분법에 대한 비판, 즉, 전통적인 이분법의 약한 고리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징후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현대성은 전통적인 것과 그것을 벗어나려는 힘 양자 간의 대립 구도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이 양자 간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어떤 지점을 향한다. 따라서 현대성은 연대기적 시간과 사건을 전제하는 역사주의(historicisme)를 바탕으로 성립되기보다, 벤야민이 언급한 것처럼 “지금이라는 시간”이 매 순간 새롭게 만들어내는 특수성들의 연속적인 모임, 즉, 역사성(historicite)을 드러내는 개념에 보다 가까운 것이다. 이성중심주의의 현대성 현대성에 관한 메쇼닉의 지적 중 언급해야 할 또 다른 점은 복수의 현대성, 특히 이분법을 토대로 한 도식 속에서 단지 한쪽의 패러다임만을 강화해 온 현대성들이다. 메쇼닉은 이러한 현대성을 주장한 자들의 논리가 “의미와 시대 결정에 의해 서로 약간씩 다른 몇몇 현대성들, 이들 간에는 밀접하고 생동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존재하는 한편, 결국 과거와 현대의 시기적 구분과 대립을 바탕으로 형성된 동시대성에 근거한 “현대성의 장례식”이라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버마스의 현대성이다. 하버마스의 현대성은 이성과 비이성의 대립적인 도식을 바탕으로 형성된다는 의미에서 “이성의 시대”와 동의어를 이룬다. 물론 이러한 현대성은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세기 말 칸트와 계몽주의자”, 즉 신으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문명 발전의 단초를 열어주었던 프로메테우스처럼 사제들의 세계관으로 뒤덮인 어두운 세상을 계몽이라는 밝은 빛으로 환하게 밝히는 작업을 개진하고자 했던 백과전서파(Encyclopedie)는 하버마스의 현대성 뒤에 존재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후광이다. 18세기 말, 눈먼 자를 일깨우고, 고정관념과 미신을 타파하려 했던, 볼테르와 디드로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누군가를 계몽한다는 것은 그 대상들을 무지몽매한 자들로 규정하고 이들에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질서를 납득시키는 작업, 이에 합당한 지식을 공급하는 작업, 나아가 이들이 신에 대해 비판적 태도로 무장할 수 있도록 반복해서 교육시키는 작업을 뜻했다고 할 때, 이러한 계몽주의의 현대성은 비이성의 억압을 전제하는 현대성을 의미할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내적 동력에 의해 미성년의 상태 밖으로 이행(移行, transition)하는 것을 의미하는 계몽주의는 “실재하지 않는 모든 형이상학적인 것들에 대한 회의를 바탕으로 형성된” 현대성을 만들어내었다. 하버마스에게 존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계승된 “이성의 순수주의”가 만들어낸 현대성이며, 한편, 하버마스 이전에 이러한 이성의 순수주의는 계몽주의 이후, 칸트를 통해서 완성된다. 한편, 메쇼닉에 의하면, 이러한 현대성은 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현대성과 훌륭한 짝패를 이루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현대성에 전적으로 비판을 가한 푸코의 현대성이라 말한다. 예컨대, 현대성을 사이에 두고 한편으로는 “자유·진리·이성과 같은 현대성의 지식형태로서의 계몽의 전통”이 존재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계보학자 푸코의 냉소적 시선”이 존재하는 것이다. “푸코가 교활한 지배의 힘이 작용하는 것을 본 칸트에서 시작하는 인문과학에 드리운” 냉소적인 시선에 의하면, “칸트의 현대성은 문제의 현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푸코가 정립하려 했던 현대성이란 이러한 하버마스식의 현대성이 “이성의 역사에 고유한, 특히 이성의 동시대적 역사에 고유한 지식과 힘의 결과”라고 파악한 순간 발생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메쇼닉이 볼 때, 이러한 푸코의 현대성 역시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단지 이러한 “하버마스의 현대성을 비판한” 반쪽짜리 현대성의 다름 아닌 것이다. 바로 여기서 현대성이라는 개념을 축으로 마치 끊임없이 헛도는 회전문 같은 이분법의 논리가 계속 반복된다. 푸코의 현대성은 하버마스의 현대성이 지니는 “사회적 효과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 자체인 반면, 하버마스의 현대성이란 “푸코의 현대성에 반하여 이성의 현대성의 명맥을 유지하려는” 현대성인 것이다. 물론 이 경우, 현대성은 결코 이분법적인 사유를 벗어날 수 없게 되며, 이성을 확신하려는 측과 이에 대해 반발하는 이중적인 패러다임을 기계적으로 왕복할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 비추어 볼 때, 양자가 구상한 주체(sujet)의 개념은 이성과 반이성이라는 대립적인 패러다임을 넘어서 ‘미끄러짐을 수행하는 힘’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패러다임 각각의 개별 축을 강조하며 양분되는 과정에서 오로지 ‘절반의 무엇’이 되고 만다. 비록 20세기 초에 등장한 프로이트가 후자에 좀더 무게를 실어준다 하더라도, 푸코의 현대성이란 결국 전통적 이성의 통일적인 주체, 즉, 하버마스의 주체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띨 뿐인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현대성 그런가 하면, 하버마스 비판을 통해서 성립하는 푸코의 현대성을 가장 반갑게 맞이한 현대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현대성은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으로 표출되는 현대성이다. 하버마스와의 논쟁을 통해서 주목받은 리오타르(J.-F. Lyotard)나 로티(R. Rorty)의 현대성은 ‘탈’이라는 수식어와 더불어 기꺼이 푸코의 손을 들어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포스트모던의 고유한 특성을 강조한다. 이들의 주장 속에서 우선적으로 목격되는 것은 이들이 현대성의 시기를 확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리오타르에 의하면 포스트모던이란 “19세기 말 이래의 과학·문학·예술들의 게임의 규칙들에 영향을 미친 변형 이후의 문화 상태”를 지칭한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변형’은 “서사의 위기 속에서 위치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때 서사란 다른 말로 이성을 의미한다. 이처럼 19세기 말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이성의 위기를 출발로 ‘포스트모던’은 반복해서 이성의 ‘위기’를 강조하면서, “이성―의미의 이성, 역사의 이성―을 메타 서사(meta-recit)로 축소”시키고, 나아가 “계몽주의자들의 서사를 현대적이라 부르기로” 과감히 결정한다. 여기서 리오타르가 주장하는 메타 서사란 역사가 진보하거나 합리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이성적 패러다임에 근거한 ‘거대 담론’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한마디로 포스트모던의 현대성은 이러한 거대 담론을 불신하는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리오타르가 고안해 낸 몇 가지 도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을 시기적으로 규정하기 위해서 ‘고전적인 것’(le classique)과 ‘현대적인 것’을 서로 구분해 낼 필요성을 인정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리오타르는 전자를 “담화들의 장르로 분할된 규칙들의 존중”으로, 이와 반대로 후자는 “이것들의 위반”처럼 정의한다. 이러한 구분에 관해 메쇼닉은 “이러한 짝패의 정의는 두 가지 타입의 작품만을 전제할 뿐이다”라고 언급하며 비판을 가한 바 있다. 즉, 리오타르의 이러한 관점은 다양한 예술 작품을 ‘규칙의 완성이 목격되는 작품’과 ‘규칙을 위반한 작품들’(혹은 새로운 규칙을 고안한 작품들)로 엄격히 절분하는 행위에 해당되며, 이때 이분법의 망령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구분은 “고전 시대 작품들을 아카데미즘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과 혼동”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기계적인 구분 외에도 포스트모던의 현대성이 지니는 보다 근본적인 모순은 또 다른 곳에 놓여 있다. 메쇼닉은 포스트모던의 넌센스가 바로 ‘탈(post)’이라는 접두사에 놓여 있다고 지적한다. 즉, 문제는 포스트모던 앞에 붙여져 있는 포스트라는 용어가 단순하게 후기(apres)만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데 놓여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메쇼닉에 따를 때, 단절과 연속이란 동전의 앞뒷면처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이 항상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경우, 포스트모던이 전제하는 포스트는 앞서 메쇼닉의 용어 구분을 통해서 살펴보았던 ‘새로움’, 즉 ‘현대적인 것’과 즉각적으로 동의어를 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포스트모던이 ‘무엇으로부터의 단절’을 ‘새로움의 추구’로 파악했다고 할 때, ‘포스트’라는 용어는 자동적으로 현대성이 아니라 ‘현대적인 것(le moderne)’과 동의어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포스트의 전략이기에 이전에 이미 현대적인 것, 즉 동시대성이 끊임없이 내비치는 항구적인 제스처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포스트모던은 현대적인 것과 단절하기 위해서, 현대적인 것을 반복해야만 하는” 결정적인 자기 모순을 바탕으로 성립된 논리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포스트모던의 현대성은 동시대성을 바탕으로 성립하는 논리이자, 동시대성 이상의 무엇을 추구하지 않는 논리라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커다란 착각을 바탕으로 지어진 허울 좋고 화려한 사상누각인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이 이성(거대 담론)의 위기론을 내세워 스스로 벗어났다고(혹은 벗어나자고) 주장하는 ‘현대적인 것’이야말로 포스트와 고전, 이 양자 모두를 공히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인 패러다임인 것이다. 포스트모던이 ‘현대적인 것’(모던)의 단순한 반복으로 머물고 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결과적으로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은 현대성을 창출했다기보다, 전적으로 “시대의 용이한 구분”(periodisation)에 할애된 지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포스트모던의 이러한 시대 개념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는데, 그것은 이러한 시대 구분조차 리오타르에 있어서 투명하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는 “19세기 말에 발생한 위기”를 언급하면서도, 정작 이러한 포스트모던의 징후를 “앎의 위상이 사회가 소위 후기 산업사회, 소위 포스트모던 시기로 진입하는 동시에 변화하기 시작하며, 이러한 과정은 적어도 유럽에서는 1950년대 말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리오타르가 언급한 부분에 드러나는 문제이다. 포스트모던이 주장하는 거대 담론의 위기란 결국 19세기 말에서 1950년이라는 긴 기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미끄러짐을 향하여 : 도식에 反하는 현대성 메쇼닉이 볼 때 이러한 현대성들의 구심점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오늘날 사방에서 힘을 뿜어내고 있는 기호의 이분법적 논리이다. 메쇼닉에 의하면,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뻗어 있는 기호의 촉수들은 적어도 서양에서는 이성과 비이성의 이분법이라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근거하고 있으며, 하나의 패러다임이 다른 하나를 지배하는 형태를 띤다. 비이성에 우위를 둔 이성의 현대성, 이성에 우위를 둔 비이성의 현대성, 형이상학에 우위를 둔 경험론의 현대성, 다수에 우위를 둔 정치적 현대성, 시니피에(signifie)에 우위를 둔 시니피앙(signifiant)의 현대성 등등은 이분법의 근간을 이루는 두 가지 패러다임 중에서 하나를 포기한 대가로 움켜쥐게 된 현대성이 만들어낸 문화적 산물들이다. 이러한 현대성들은 마치 비탈길에서 굴러내리며 점차로 불어나는 눈덩이처럼 이분법 자체를 변증법적 해소의 방향으로 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러한 패러다임 자체를 강화하는 일종의 악순환을 만들어 낸다. 메쇼닉은 사회 전반에 걸쳐 침윤되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우리의 의식 전반까지 이원론적 사고 방식으로 지배하고 있는 이분법적 패러다임에 관해 대략 여섯 가지의 형태로 구분하여 분석하고 있다. 기호가 전제하는 이러한 이분법적 패러다임은 1. 언어학적으로 ‘시니피앙/시니피에’, ‘형식/의미’, ‘시-형식어/산문-일상어’, 2. 인류학적으로 ‘육체/정신’, ‘삶/언어활동’, ‘자연/규범’, 3. 철학적으로, ‘단어들/사물들’, ‘기원/협약’, 4. 신학적으로 ‘구약/신약’, 5. 사회적으로 ‘개인/사회’, 6. 정치적으로 ‘다수/소수’라는 대립을 만들어내며 각 분야를 막론하고 ‘보편화된 담론’으로 위상을 굳히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성의 개념이 복수의 형태로 존재하는 까닭은 현대성이 이 양자의 패러다임 중 한쪽에만 속하는 이데올로기를 자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성들은 양자의 대립적 세계관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벤브니스트(Benveniste)가 지적하고 있듯, 이렇게 “기호라는 닫힌 세계” 안에서 일목요연하게 분류된 두 가지 패러다임은 이질적인 대립을 서로 전제하는 한, 변증법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채 한쪽에 종속되거나, 늘 자신의 정체성만을 확인하고 강요하는 방식으로 확장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기호의 논리, 정확히 말해 기호의 이분법적 패러다임을 근거로 형성된 현대성은 하나의 패러다임의 정체성만을 확장하려 들 때 나머지 패러다임을 지배하는 권력의 담론이 되는 것이다. 메쇼닉이 현대성을 도식을 벗어나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무엇이라고 파악했다면, 그 까닭은 바로 현대성을 어떠한 도식으로도 요약될 수 없는 개념으로 파악했기 때문일 뿐 아니라, 바로 이러한 도식에서 벗어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추구 과정”을 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성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포착되지 않는 무엇처럼 우리 앞에 잠시 몸을 내밀면서, 항상 미지의 무엇, 즉 도식을 벗어나 형성되는 유동적인 운동이자 이 운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 다시 말해서, 주체로서 우리의 내부를 움직이고 있는 힘인 것이다. 한마디로 현대성이란 “주체 개념을 연루시킬 근거를 확보하는 개념”, 운동이란 의미에서 “기호를 벗어나는, 기호에 반대되는 무엇”인 것이다. (NEXT 2005.1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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