哲學

홉스의 사회철학 - 시장의 정치적 의무

이강기 2015. 9. 18. 10:26

홉스의 사회철학 - 시장의 정치적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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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세기의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인간의 생리적 본능,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의 특성'으로부터 절대군주의 통치권과 신민의 의무를 연역하는 사회철학을 전개했다. 그는 영국이 절대군주하의 완전한 절대주권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자신의 이론을 전개했다.  

1. 홉스는 인간의 생리학적 특성으로부터 모든 사람은 필연적으로 타인에 대한 좀더 많은 힘을 추구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홉스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소유적 시장사회에만 타당한 가정을 도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사회 속의 모든 사람이 필연적으로 타인에 대해 좀더 많은 힘을 추구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가설적 자연상태를 도입한 다음이었고, 그 결론으로부터 그는 절대주권국가의 필연성을 연역해 내었다.

2. 그의 '계약에 의한 국가'라는 개념은 역사적 가설이 아니라 논리적 가설로써,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종의 말장난이다. 홉스는 군주국가가 실제로 자연상태에 살았던 사람들의 동의에 의해 생겨났다거나 자연상태가 전 세계를 일반적으로 지배했던 때는 없었다고 믿었으며, 대부분의 군주국가는 계약이 아닌 정복에 의해 생겨났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데 편리하고 유리했으므로 그렇게 했다. 그는 '만약에 사람들이 그런 계약을 맺었더라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올 것이다'라고 어색하게 말하는 대신 리바이어던 18장 전체에 걸쳐 '사람들은 계약을 하였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라고 말했다. 어차피 정복에 의한 통치권과 계약에 의한 통치권은 동일한 효력을 가지며 신민들도 똑같은 의무를 지니므로 전제를 바꿔보자는 것이다. 자 계약에 의해 통치권이 확립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자연상태에 있던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자연권을 양도했으므로 군주에게 복종해야 하며, 군주에게는 절대적인 통치권이 주어져야 한다.

3. 홉스의 '자연상태'라는 개념은 흔히 원시상태의 인간 행동에 대한 서술로 오해받았다.1) 그러나 '자연상태'는 문명화된 사회에 살며 문명인의 욕구를 갖는 인간들이 그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법과 계약의 강제력에서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행동에 대한 서술이다. 홉스는 그렇게 강제력에서 벗어났을 때의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현존하는 사회의 개인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도출했고, 도출된 내용이 스스로의 내면에서도 발견되는지 고찰하는 방식으로 논증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자연상태'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 대신 '인간의 자연적 조건'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이 고찰로 그는 인간의 본성에 분쟁의 세 가지 원인인 경쟁심, 불신, 명예욕을 발견한다.2) 

홉스의 인간론

인간은 자동화된 기계와 흡사하다."감각은 신체외부의 충격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신경을 통해 뇌와 심장에 전달하고, 그로부터 다시 대응-충격을 전달한다. 상상력 내지 기억은 과거의 감각인상을 상기하여 그것을 경험과 혼합한다. '사고'나 '상상력'은 '현재와 과거의 결과의 원인 또는(...) 현재나 과거의 원인의 결과'를 규명하고 그에 따라 그 기계장치가 취하게 될 여러 가지 가능한 행동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언어는 기계장치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자신의 예측을 명령할 수 있게 한다. 추론은(...) 스스로의 방향제시를 위한 일반적 명제나 규칙에 도달한다." 이 기계는 자신의 운동을 계속하려 하는데, 이는 계속적인 운동에 도움이 되는 것을 지향하고 그렇지 않은 것에는 멀어짐으로써 이루어진다. 기계가 지향하는 운동은 욕구 또는 욕망이며, 멀어지는 운동은 혐오이다. 욕구와 혐오는 기계 내에 내장된 것도 있으나 대부분 경험에 의해 얻어진다. 욕구와 혐오는 서로 다른 기계사이에서도 다르며(기계들은 다른 경험을 갖기에) 하나의 기계 안에서도 시간에 따라 다르다(각각의 기계는 계속적인 변화에 있으므로). 따라서 그 기계가 욕구하는 것은 선이되고, 혐오하는 것은 악이 된다." 기계의 내면, 인간의 마음 속에서는 동일한 일에 관련된 욕구와 혐오, 희망과 공포가 교대로 일어난다. 어떤일을 행하거나 행하지 않거나에 대한 예측 가능한 효과를 계산한 결과가 계속해서 우리의 사고에 들어온다. 이렇게 어떤 일이 행해지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까지 계속되는 의욕, 혐오 및 희망과 공포를 통틀어 우리는 '심사숙고'라 부른다. 인간의 모든 자발적 행위는 이러한 숙고의 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인간은 자동적이며 자기지향적인 욕구기계이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

기계장치로서의 인간에 대한 설명을 마친 홉스는 사회적 관계의 단위로서의 기계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힘에 대한 정의에서 시작한다. 힘(권력)이란 미래의 확실한 선을 획득하기 위한 현재의 수단이다. 힘은 자연적 힘과 수단적 힘으로 나뉘는데, 자연적 힘은 보통을 넘는 강함이나 용기, 분별력, 기예, 웅변, 관유, 고귀함과 같은 신체와 정신의 능력의 우수함을 말한다. 수단적 힘이란 자연적 힘이나 행운에 의해 얻어지는 부, 명성, 친구 등을 더욱 획득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이다. 그런데 인간의 힘(권력)은 그 양에 있어서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어서, 인간의 권력은 타인과 비교해서 남는 개인의 능력의 잉여분과 그 잉여분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을 더한 것으로 구성된다. 다시말해 모든 사람의 힘(권력, 능력)은 다른 모든 사람의 능력에 대립한다. 똑같은 힘은 대립하고 서로를 파괴한다. 그러한 힘의 대립을 경쟁이라고 한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힘은 타인에 대한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힘이며, 타인들의 힘에 대한 지배력이며, 일부의 힘을 다른 이에게 양도한 결과이며, "타인에게 봉사를 명령하는 능력"이다. 

 획득된 힘에 대한 욕구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것이며, 그 힘은 양도할 수 있기 때문에 힘의 양도는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일어난다. 그에 따라 힘의 시장이 만들어진다. 한 사람의 힘은 상품으로서 시장가격을 형성하는 일상의 물품이 된다. 이 힘은 개개인의 인격과 인성에서 뗄 수 없이 속한 것이므로, 힘에 대한 시장에서의 가치평가는 곧 그 사람 자체에 대한 가치평가가 된다. 따라서 인간의 가치나 값어치는 그가 가진 힘의 가격이다. 그것은 절대적이 아니며 타인의 필요와 판단에 의존한다. 인간의 가치나 값어치 역시 다른 사물과 같이 파는 자가 아니라 사는 자가 그 가격을 결정한다. 이 가치의 표명은 일반적으로 명예와 불명예로 불리우는데,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에게 명예를 주는 것이고 낮게 평가하는 것은 불명예를 주는 것이다.(이것은 시장경제에서의 화폐와 같다) 모든 사람의 가치는 타인이 부여하는 명예에 의해 부여된다. 명예는 힘에 대한 평가이며 이 평가는 언제나 타인들의 힘과 비교한 것이다. 그가 쓸모있는 정도는 다른 이들의 유용성에 의존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존경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스스로와 비교해볼 때 자신을 능가하는 행운이나 힘의 여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존경한다는 것은 타인에게 자신의 그것보다 그 이상의 힘이 있음을 인정하는 표시이다.   

홉스는 이렇게 모든 사람의 힘은 다른 모든 사람의 힘에 대립한다고 결론 내림으로써 심리학적 전제로부터 사회적 전제로 넘어간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두 가지를 전제한다. i) 일부의 사람들은 현재 수준의 힘과 지속만을 욕구하는 반면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의 힘과 명예를 요구한다(생리학적 전제). ii) 사회가 유동적이고 분열적이어서 평균 이상의 욕구를 가진 이들이 나머지 모든 이들을 힘의 경쟁으로 나서게 한다(사회적 전제).3) 홉스는 이러한 필연적 행동이 사회 속의 인간에게서도 나타난다고 보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사회를 파괴하지 않고 평화롭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타인을 끊임없이 침해할 수 있는 사회를 가정한다. 따라서 그의 생리학적 전제는 사회적 가정을 필요로 한다. 이 사회 모형이 소유적 시장사회이다.

소유적 시장사회

단순시장사회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a) 노동에 대한 권위적 할당이 없다. 개인들은 그들이 에너지, 기술, 상품을 원하는대로 자유롭게 쓸 수 있다. 
    (b) 노동의 보상에 관한 권위적인 제공이 없다. 개인은 자신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국가나 공동체가 제공하는
보상/보증을 받지 않는다.
    (c) 계약에 대한 권위적 규정 및 강제가 있다. 
    (d) 모든 개인은 합리적으로 그들의 공리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e) 모든 개인은 자신의 노동을 부가함으로써 생계를 얻을 수 있는 토지나 다른 자원을 가질 수 있다.
    (f) 자신의 노동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만족이 고용 노동자로서의 임금과 예상되는 보상 사이의 차이보다 더 커야 한다.
단순시장사회가 소유적 시장사회와 구분되는 지점은 노동시장을 배제함으로써 노동력의 양도가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단순시장사회의 개인들은 자신이 가진 생산수단 내에서 얻어지는 보상을 추구하며, 이를 통해 얻는 보상과 만족이 타인에게 자신의 노동을 제공함으로써 얻는 보상과 만족보다 항상 크다. 모든 이들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생계를 얻을 수 있는 적절한 토지나 자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생산품 시장은 있으나 생산요소 시장은 없다. 생산품을 교환하는 행위 자체가 타인의 힘과 노동력을 간접적으로 전환하여 자신의 용도로 쓴다고 할 수 있으나 이 이상 직접적인 전환은 이뤄지지 않는다. 모든 개인들은 이익을 얻기 위해 시장에 참여하나, 어느 누구의 이익도 타인의 희생 위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을 양도한 것보다 더 많이 타인의 힘을 양도받을 수 없다. 그러나 단순시장사회는 현실의 역사에서 존재한 적이 없었다.  

소유적 시장사회는 단순시장사회의 처음 네 개 조건에 네 개의 조건을 첨가함으로써 도출된다. 
     (a) 노동에 대한 권위적 할당이 없다. 
     (b) 노동의 보상에 대한 권위적인 제공이 없다.   
     (c) 계약에 대한 권위적 규정 및 강제가 있다.
     (d) 모든 개인은 합리적으로 그들의 공리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e) 개인 각자의 노동력은 자신의 재산이며 양도할 수 있다.
     (f) 토지와 자원은 개인에 의해 소유되며 양도할 수 있다.
     (g) 몇몇 개인은 그들이 가진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공리와 힘을 원한다. 
     (h) 몇몇 개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 기술 또는 재산을 가진다. 
경쟁사회에서 다른 이들보다 우월한 기술, 에너지, 재산을 가진 이들은 노동을 효율적으로 조직하여 높은 생산성을 낳고, 그로 인해 생산품이 가격이 떨어지면 독립적인 생산이 불가능해지거나 이윤이 떨어진다. 독립적인 생산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내놓게 되며, 노동력을 포함한 토지, 자본의 생산요소시장이 형성된다. 근대 경쟁적 시장사회는 노동이나 보상의 권위적인 할당과 보상이 없는 대신 무수한 개인적인 결정에 대응하는 시장이 모든 것의 가격을 결정하게 된다. 시장의 가격결정장치를 통한 상품거래는 시장을 넘어(혹은 시장을 확장하여) 개인 상호간의 관계에도 침투하는데, 이는 시장에 있어서 사람의 에너지를 포함한 모든 소유물이 상품이기 때문이다. 삶을 영위한다는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모든 개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노동력을 포함한 팔 수 있는 상품의 소유자로서 타인과 경쟁하기 위해 계속해서 상품을 내놓아야 한다.

시장사회가 발전할 수록 재산이 적은 이들이 독립적인 생산을 유지할 가능성은 낮아지며, 자본화된 생산이 점점 필요불가결하게 된다. 인구가 늘어나면 토지와 자본은 점점 부족해지고, 일단의 사람들이 토지와 자본을 모두 소유하게 되면 생산품의 분배에 있어서 토지와 자본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불리한 변화가 진행된다. 재산이 없어서 독립된 생산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면서 자신들의 토지나 자본으로 생산했을 때와 동등한 양의 임금을 요구할 수 없다. 자본과 토지를 가진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다른 이들의 노동력의 순수한 양도를 얻게 된다.

인간은 뭔가를 생산하기 위해 노동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의 수단을 취득할 권리도 갖고 있다. 그런데 일단의 사람들이 생산수단을 모두 소유하게 되면서 나머지 사람들은 그러한 생산수단을 취득할 수 없게되고, 노동력만을 팔수 있게 된다. 이것이 단순시장사회와 소유적 시장사회의 차이점이다.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생산적 노동으로 전환시키는 수단을 취득할 권리를 상실한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을 생산적으로 전환시킬 수 없으므로 노동력의 여분을 토지나 자본을 소유한 이들에게 계속해서 팔게 되고, 생산물의 일부가 토지와 자본의 소유자에게 되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임금을 받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의 일부를 계속해서 타인에게 순수하게 양도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노동력의 양도를 착취라고 불렀다.

이러한 노동력의 양도는 모든 계층의 개인들간의 계속적인 경쟁에 의해 유지된다. 모든 사람은 노동력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노동력이라는 팔 수 있는 상품의 소유자로써 경쟁에 참여하며 경쟁을 통해 자신들의 값어치를 결정한다. 시장은 끊임없이 경쟁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재산수준에 만족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자신의 재산을 늘리려는 노력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의 경쟁적인 노력이 자기 노동력의 양도의 양이 많아지게 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자신에게 보다 많이 양도하게 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소유적 시장사회는 홉스의 조건을 만족시킨다. 그 사회에서는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타인의 힘을 자신을 위해 양도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노력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이로 인해 모든 사람이 권력경쟁에 나서게 된다. 이 모든 것이 공개된 합의와 강제된 규약에 의해 사회가 파괴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수행된다.  

시장의 정치적 의무

모든 사람의 일반적 성향이 타인에 대한 힘의 추구라는 것이 입증되면, 모든 사람을 위압할 수 있는 공권력이 없을 때 사람들의 삶은 극도로 비참하고 불안정할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인간은 반드시 삶을 추구하며 편리한 삶을 추구한다. 따라서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계산하는 합리적인 사람은 누구나 그들 모두를 위압할 수 있는 권력을 인정함으로써 그런 상황을 피하려 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계약을 맺는다. 이 계약은 욕망에 대한 제약이므로 강요할 힘이 없으면 효력이 없으며, 사람들은 계약을 통해 자신의 '자연적 힘'과 '자연적 권리'를 동시에 양도해야 한다. 따라서 통치권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홉스는 통치권에의 복종을 모든 사람의 정치적 의무로 연역한다. 

홉스가 제시한 연역한 정치적 의무는 타산적 의무에 가깝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장기적인 이익의 관점에서 통치권에 대한 의무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자기이익에 근거한 의무는 타당성있는 도덕적 의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홉스가 제시한 정치적 의무가 타산적 의무라면, 우리가 이런 의무를 받아들여야 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확실히 개명된 이기심에 근거한 의무는 근시안적인 자기이익과 대립될 때 구속력을 가질 수 없고, 타당한 도덕적 의무는 자기 이익을 넘어선 원리에 근거하기 때문에 이러한 약점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러나 홉스는 이러한 일반적인 생각을 거부한다. 도덕적 의무가 이익을 넘어선 원리에 근거하기 때문에 타산적 의무보다 우월하고 구속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단순히 정의상의 구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홉스는 도덕적 원리가 실제로 타산적 원리보다 더 확고하게 견지될 수 있는지 묻는다. 과연 그런가? 어떤 종류의 의무가 사람을 구속하는 능력을 갖는지의 여부는 현실적으로만 검증될 수 있다. 만약 도덕주의자들이 타산적 의무는 이익에 근거하므로 도덕적 의무보다 구속력이 떨어지고 열등하다면 그것의 입증책임은 도덕주의자들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홉스는 자기이익을 넘어선 어떤 것에 근거한 도덕원리가 이익에 근거한 것보다 더 광범위하고 견고하게 받아들여진다고 할만한 증거가 없다고 보았다. 

홉스가 제시한 의무는 인간의 자기이익에 근거하고 있다. 보다 노골적으로 말해 그것은 공포에 근거하고 있으며,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거짓되게 종교적 금기를 끌어들여 행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상상되고 알 수 없는 신과 같은 실체에 의지하는 것보다 자신의 이성에 의거하는 것이 더 도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것이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합리적인 판단하의 의무는 다른 어떤 것 못지 않게 도덕적인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생각을 받아들이면, 문제는 실제로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 의무를 받아들일만한지가 된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홉스는 평등의 전제를 든다. 

두 종류의 평등

홉스에 따르면 자연상태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의미, 1) 능력에 있어서 평등하고 2) 욕구만족에 대한 기대에 있어서 평등하다. 사람들이 평등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은 곧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논증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능력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평등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 약한 자가 가장 강한 자를 쉽게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다(다시 말해 이것은 서로 죽일 수 있는 평등한 능력이다). 사람의 생명을 뺏는 데는 아주 조금의 힘만이 필요하므로 어떤 사람도 자기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 그런 것을 주장함으로써 어떤 이익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사람들은 서로간에 동등한 권리를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 사이의 이러한 능력의 평등이 전제되면 욕구만족에 대한 기대의 평등도 자명해진다. 모든 사람은 자기에게 좋은 것을 욕구하고 나쁜것, 특히 죽음을 피하려 한다. 자연의 자극에 의해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돌이 아래로 구르는 것과 다를바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살 권리, 생명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이것이 자연상태의 평등이라면, 그가 제시한 사회모형 속에서 역시 사람들은 평등하다. 사람들은 소유적 시장사회에서 불안정성의 평등과 시장에의 종속의 평등에 속해있다. 시장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힘의 경쟁에 이끌려든다. 이는 모든 사람이 타인에 의해 자신의 힘을 끊임없이 침해받는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불안정성의 평등이다. 그러나 시장사회의 개인이 불안전하기는 하나 동등하게 불안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왜냐하면 소유적 시장사회는 본질적으로 토지와 자본의 불평등한 소유를 요구하기 때문이며 토지와 자본을 가진 계급과 가지지 못한 계급이 시장사회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공권력에 속박되는 의무를 인정해야 할 만큼 똑같이 불안정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제시한 것이 시장에의 종속의 평등이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소유적 시장사회에 속해있고, 소유적 시장가치의 지배가 불가피하다면, 우리는 시장체제를 유지하고 조정하는 권위를 상정하고 여기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시장사회에 대한 아무런 대안이 없고 또 있다 해도 그것이 무정부상태라면 시장사회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에서 볼 때, 그 사회를 정규적인 질서체제로 유지시켜줄 정치적 권위를 지지하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이 경쟁사회의 규칙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 정치적 권위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복종할 수 있고 그렇게 하지 않을 도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홉스에 따르면 이러한 의무는 타산적이라기보다 도덕적이다. 그것은 시장사회의 인간에게 최상의 가능한 도덕이기 때문이다. 

각주)

1)
이 오해는 홉스의 진술 방식에서 기인한다. 그는 인간을 분석하기 위해 갈릴레오에게서 이어받은 분해-구성적 방법을 사용하는 데, 이것은 현존하는 사회를 가장 단순한 요소들로 분해한 뒤 그 요소들을 논리적 전체로 재구성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그의 사회분해는 현존하는 사회를 현존하는 개인들로, 그리고 그들의 행동의 기본적인 요소들로 분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홉스는 분해의 과정은 보여주지 않고 그것의 결과에서 출발하여 재구성한 부분만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가 수행한 것은 17세기 영국의 개인의 행위를 분해하여 법과 계약의 강제력을 제거한 '자연상태'를 재구성한 것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어떤 사회모형을 참고했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곧바로 자연상태의 인간은 이러하다고 진술했던 것이다.

2)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만나는가의 문제는 그들이 만났을 때 그들이 행하는 일들을 관찰함으로써 해답이 가장 잘 구해진다. 거래를 위해 만날 때 모든 사람은 동료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사무적인 일에 주의를 기울이며, 어느 누구를 관직에서 해고할 때 사람들은 특정한 사적인 친분을 고려하지 않는다. (...) 사람들은 쾌락이나 마음의 휴식을 얻기 위해서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것에 탐닉하고(우스꽝스러운 것의 본성에 따라) 다른 사람의 결함과 약점을 비교하며 자신의 의견만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가끔씩은 순진하고도 남의 기분을 상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해도 그들이 사회라는 것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자신들의 헛된 명예에 대해서 기쁨을 느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이러한 종류의 만남에서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 험담을 한다. 그들의 인생 전체, 발언, 행동들이 검토되고 심판받고 경멸당한다. 그리고 참석자도 헤어지기 전에 한번쯤 날카로운 화살을 받긴 하지만, 이런 일은 극히 드문 일이어서 이성이 병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헤어질 때까지 끝까지 버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실로 우리의 사회적 기쁨이 되는데, 우리는 이런 기쁨을 모든 피조물에게 생겨나는 욕망이라는 본성을 통해 누린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을 조금이라도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자유로운 회합이란 상호간의 빈곤이나 헛된 명예욕에서 발생되는 것이며, 따라서 각 당파들이 만날 때 그들은 각기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서 또는 그들이 예전에 대화했던 사람들에 대해 동일한 평판이라는 판정을 내리기 위해 노력한다. 이와 동일한 것도 의지나 선, 명예, 이로운 것이라는 것의 정의 그 자체를 근거로 해서 수집된다." 

3)"사람들 사이에는 기질상의 상이함에 기인한 커다란 차이가 있는데, 이 차이는 자신들이 힘에 있어서 자신들의 동료들과 동등할 때뿐만 아니라 열등할 때조차도 몇몇 사람들은 얼마나 자신들이 그들보다 우월하고 탁월하기를 바라고 헛되이 기뻐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고찰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이 필연적으로 뒤따르는데, 즉 기질상 온건하며 자연적인 평등 이상을 추구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타인들의 힘에 혐오감을 가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인간에 있어서 일반적인 불신과 서로에 대한 상호공포가 시작된다. (...) 자연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은 욕망과 침해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똑같은 원인으로부터 시작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들 사이의 자연적 평등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만큼 타인에게 허용할 수 있다(온건하며 자신의 권력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사람에 대한 논리이다). 자신을 타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은 그가 욕구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것이며 누구에게 보다 먼저 자신에게 정당하게 주어져야 할 것으로서의 경의와 명예에 도전할 것이다(강렬한 정신을 가진 사람에 대한 논증이다). 침해하고자 하는 이 사람의 의지는 헛된 영광과 자신이 가진 힘에 대한 그릇된 평가에서 생겨난다. 다른 사람의 의지는 이 사람의 폭력에 대항해서 자신과 그의 자유 그리고 자신의 재화를 지키려는 필요에서 생겨난다." - Elements part i, ch. 14, sect. 3, p.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