哲學

밀턴 프리드먼의 생애와 학문

이강기 2015. 9. 18. 08:54
[논단] 밀턴 프리드먼의 생애와 학문


[김영용 | 전남대학교 교수, 경제학부]
1. 머리말

20세기 초 강력한 정부에 매력을 느꼈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실패한 체제라는 인식 아래 더욱 크고 강력한 정부 역할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인의 자유가 강조되었던 19세기와는 달리 20세기 시작과 함께 정부는 家父長的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에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견인차 역할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지지와 사랑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숱한 비판을 받아왔다. 지금은 20세기 중반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대중들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해 敵對感을 보이고 있다. 특히 근래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자유시장 경제에 대해 예전보다 더 적대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에 한국의 미래가 밝지만은 않은 이유가 있다. 이런 시점에서 5피트 2인치의 작은 키였지만 경제학계에서는 6尺長身의 면모를 보여준 밀튼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의 학자로서의 생애와 학문적 업적을 돌아보고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을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2. 프리드먼의 생애

밀튼 프리드먼은 1912년 뉴욕에서 태어나 럿거스(Rutgers) 대학과 시카고 대학을 거쳐 콜롬비아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정부의 분석 부서에서 잠깐 근무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시카고 대학에서 보냈다. 1977년 그의 나이 65세에 시카고 대학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스탠포드 대학 후버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하였으며, 2006년 11월 16일 94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프리드먼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카고학파의 형성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카고학파는 미국의 동부학파와 더불어 현대 경제학의 兩大山脈으로 1930년대의 초창기, 1940년대와 1950년대 초기의 공백기, 1950년대 중반 이후의 시기를 거치면서 경제학과와 법과대학을 중심으로 발전된 학파다. 오늘의 시카고학파는 나이트(Frank Knight)의 사상과 바이너(Jacob Viner)의 연구방법론을 계승한 프리드먼, 스티글러(George Stigler), 베커(Gary Becker), 뷰캐넌(James Buchanan), 코스(Ronald Coase) 등에 의해 형성되었다. 시카고학파를 관통하는 두 가지 신념은 사람들의 경제 행위를 가장 잘 설명하는 분석도구는 가격이론이며 자유시장경제가 자원배분은 물론 소득분배를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때문에 정부의 시장개입은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시카고 교수들은 이와 같은 학문적 신념을 공유하며 어느 분야를 연구하든 ‘작은 정부’라는 결론에 이르는 학파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시카고학파의 형성과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 바로 프리드먼이다. 하이에크(Friedrich Hayek)도 1950년부터 10여 년간 시카고대학에 머무르면서 당시 시카고의 지성들과 교류했지만, 合理的 構成主義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여 독일의 프라이부르그(Freiburg) 대학으로 돌아갔다.1)

프리드먼은 시카고학파에서 中樞的(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1930년대 대공황을 계기로 온 세계가 이른바 케인즈 혁명에 휩싸였을 때, 이에 맞서 싸우면서 시장경제를 옹호하고 주창하여 1980년대 시카고혁명을 일으킨 시장경제학자다. 그는 스스로를 자유인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고, 無政府主義者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국가나 정부는 없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 즉 그런 사회구조는 실행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정부가 민간 경제에 개입하는 일은 最少에 그쳐야 한다는 ‘작은 정부’ 입장을 고수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프리드먼은 유년시절과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경제적으로 어렵게 보냈지만, 경제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당대의 석학들을 두루 만난 幸運兒였다. 럿거스 대학에서는 나중에 미국 연방준비이사회장을 지낸 번즈(Arthur Burns)를 만났고, 시카고대학에서는 존스(Homer Jones)를 만나 수준 높은 경제 이론과 연구를 접할 수 있었다. 1932-33년 시카고 대학원에서는 나이트, 바이너, 슐츠(Henry Schultz), 민츠(Lloyd Mints), 사이먼(Henry Simons) 등의 교수와 후일 평생 학문적 동지였던 스티글러, 디렉터(Rose Director) 등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1937년에는 국립경제연구원(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에서 쿠즈네츠(Simon Kuznets)를 도와 전문가 집단의 소득 연구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 때의 연구와 1935년 국립자원위원회(National Resource Committee)에서 수행한 소비자 예산에 관한 연구는 그의 소비함수 이론의 기초가 됐다. 특히 시카고 대학에서는 그의 평생 반려자이자 학문적 동반자인 로스 디렉터를 만나 결혼하는 행운을 얻기도 하였다. 또한 1950년 가을에는 마샬 플랜(Marshall Plan)을 집행하는 미국 정부기관의 자문역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3개월 동안 근무하였다. 이 때 공동시장(common market)의 前兆(전조)가 된 슈먼 플랜(Schuman Plan)을 연구하면서, 후에 유명한 논문이 된 ‘변동환율의 경우(The Case for the Flexible Exchange Rates)’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였다.

1960년대 전반기부터 프리드먼은 公共政策 분야에 깊숙히 개입하기 시작했고 1964년에는 공화당 상원의원으로서 대통령에 출마한 골드워터(Goldwater)의 경제 자문역, 1968년에는 역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닉슨(Nixon)의 경제 자문역을 맡았으며, 1980년에는 레이건(Reagan)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경제 자문역과 그의 대통령 당선 후에는 대통령 經濟諮問委員會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가 도왔던 정당이 모두 공화당이라는 사실이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1988년에는 대통령자유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과 국가과학메달(National Medal of Science)을 받았다. 또한 1966년부터 1983년까지 18년 동안 사뮤엘슨(Paul Samuelson), 웰리스(Henry Wallis)와 함께 뉴스위크(Newsweek)지에 3주마다 경제 현안에 대한 칼럼을 집필하였다. 그동안 미국 정부로부터 수많은 자리를 제의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고집스럽게 학자의 길을 걸었다.

프리드먼은 그의 나이 65세에 시카고대학에서의 강의를 접고 스탠포드 대학의 후버연구소로 자리를 옮기면서 또 다른 차원의 정력적 활동을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활동은 그의 부인인 로스와 함께 이루어진다. 현재 세계 각국에서 경제학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選擇의 自由(Free to Choose)’는 프리드먼이 시카고 대학에서 은퇴한 후 그의 경제․사회 철학을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보자는 치테스터(Robert Chitester)의 제안에 따라 빛을 보게 되었다. 1978년 3월부터 미국을 비롯한 홍콩, 일본, 인도, 그리스, 독일, 그리고 영국 등지에서 촬영하면서 만들어진 비디오 및 오디오 테이프의 총 길이는 무려 6마일을 넘는 것이었다. 선택의 자유는 ‘시장의 위력(The Power of Market)', ‘통제라는 이름의 폭군(The Tyranny of Control)' 등, 총 10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각 비디오테이프는 주제마다 프리드먼의 설명을 곁들인 30분간의 도큐멘터리와 30분간의 토론으로 구성되어 있다.2) 모든 주제에서 자본주의와 자유시장이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고,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번영을 약속할 수 있음을 명쾌한 논리와 각국의 역사적 실증을 바탕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이한 것은 프리드먼의 강의는 미리 원고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 메모를 기초로 한 것이었으며, 책은 나중에 그의 부인인 로스가 강의 내용을 재구성하여 출판한 것이라는 점이다.

3. 프리드먼의 학문적 업적

프리드먼의 학문적 업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통화주의(monetarism)로 표현되는 통화이론을 들 수 있다. 그는 통화이론과 소비함수 이론에 관한 업적으로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특히 케인즈 이후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폐기됐던 貨幣數量說(화폐수량설)을 부활시켜 다시 경제학 교과서에 수록시켰다. 또한 인플레이션과 실업 사이에는 상반관계(trade off)가 있다는 필립스 곡선의 통설을 반박하였다. 통화공급이 증가하여 총수요가 증가하면 근로자들이 착각을 일으켜 노동공급을 늘리므로 일시적으로 실업률을 낮출 수 있지만, 근로자들이 이를 깨닫는 장기에는 그러한 상반관계가 성립하지 않고 실업률은 다시 제 자리(자연실업률)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즉, 장기 필립스 곡선은 垂直(수직)이므로 통화의 공급 증가를 통한 총수요의 증가는 실업률은 낮추지 못하고 인플레이션만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는 1970년대의 세계적 인플레이션이 도래하기 전에 당시 정통 경제학의 잘못을 지적한 것으로서 그의 학문적 卓越性(탁월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통화적 현상이다’라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임으로써 중앙은행은 재량(discretion)이 아닌 엄격한 準則(rule)에 의거 통화신용정책을 실시할 것을 주창하였다. 한편, 그는 중앙은행의 능력을 불신하고 중앙은행은 물가를 標的(target)으로 하여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것보다는 통화량을 통제하는 것이 더 쉽게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통화량을 통제하는 일이 실제로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많은 나라에서 중앙은행이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물가를 표적으로 하는 정책의 목표가 근사하게 달성되는 것을 목격하고, 중앙은행의 능력을 과소평가했음을 시인한 바도 있다.

둘째, 프리드먼의 소비함수 이론은 ‘항상소득가설(permanent income hypothesis)이다. 이 이론은 프리드먼이 국립경제연구원에서 쿠즈네츠를 도와 행한 전문가 집단의 소득 연구와 국립자원위원회에서 행한 소비자 예산에 관한 연구가 기초가 됐다는 사실은 위에서 기술한 바 있다. 케인즈는 소득이 올라가면 저축률이 증가하여 경제가 장기 불황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실제 자료를 보면 부자들의 저축률이 가난한 사람들의 저축률보다 높은 것은 사실이나 소득이 증가해도 경제 전체의 저축률은 증가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프리드먼은 사람들은 현재의 소득만이 아니라 장래의 예상 소득을 모두 고려한 이른바 恒常所得(항상소득)에 따라 소비 행위를 하며, 항상소득에서 벗어난 임시소득(transitory income)은 소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설명함으로써 실제 자료에 대한 답을 제시했다.

셋째, 프리드먼은 위의 연구들이 전문적 지식을 활용하여 얻은 성과라고 평가한 반면, 정작 그 스스로 더 높게 평가한 업적은 공공정책에 관한 저서들이다. ‘자본주의와 자유(Capitalism and Freedom)’, ‘선택의 자유’, ‘현상 유지의 폭군(Tyranny of the Status Quo)’, ‘화려한 약속, 우울한 성과(Bright Promises and Dismal Performance)’ 등, 개인의 자유와 책임, 그리고 시장경제에 대한 저술을 훨씬 더 높은 업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통화이론과 소비이론은 과학적 연구의 技術的 副産物이며 직업을 통해 얻은 분별력으로 정책에 영향을 준 것이라면, 더 광범위하게 세상에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위의 저작들이라는 의미다. 이 책들에서 프리드먼은 경제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의 근간이 되며, 경제적 자유를 근간으로 하는 시장경제가 어떻게 개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가를 차분한 어조로 설명하고 있다.3)

‘선택의 자유’와 함께 경쟁적 자본주의가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임을 강조하는 대표적 저작인 ‘자본주의와 자유’는 하이에크가 쓴 ‘노예의 길’이 볼커 재단의 주목을 받으면서, 1947년 미국과 유럽의 자유주의 지성 39명이 스위스에서 회합한 ‘몽 펠레린 소사이어티(Mont Pelerin Society)’의 활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볼커 재단은 1950년대 중반, 자유시장제도의 주장과 주제에 관심이 있고 호의적인 청년학도들을 대상으로 여름 세미나 프로그램을 주최했는데, 여기에서 프리드먼이 가르친 내용을 재구성하여 1962년에 펴 낸 책이 바로 ‘자본주의와 자유’이다.

또한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주장하는 自由主義者답게 그는 공공 정책 중 ‘의료 면허제 폐지’, ‘징병제 폐지’, ‘학교 교육의 민영화’, ‘약품 규제 철폐’, ‘소비자와 노동자를 가장 잘 보호하는 것은 시장’, ‘덤핑의 옹호’ 등의 논리를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 중 平時의 徵兵制(징병제)는 ‘노예의 군대’이며, 시장 임금으로 지원자를 고용하지 않는 것은 자유 사회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에 따라 1973년 닉슨 행정부 시절에 폐지됐다. 프리드먼은 징병제 폐지는 자신이 주장한 공공 정책 관련 활동 중 가장 만족할만한 것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반면에 평생 동안 학부모의 자녀 학습권 신장을 위해 수업료 쿠폰제(voucher)의 정착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자 1996년에는 밀튼-로스 재단을 설립하여 이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프리드먼의 현실주의적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으로서는 화폐제도를 국가가 유지하는 데 동의한 점과 복지정책인 陰所得稅制(음소득세제)를 창안한 점을 들 수 있다. 국가가 화폐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화폐공급에도 민간을 포함하여 경쟁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는 하이에크의 견해와, 국가의 화폐 독점을 강력하게 비판한 로스바드(Murray Rothbard)의 견해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음소득세제는 최저 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가구에는 부족액의 일정 부분(프리드먼은 미국 세율 중 가장 높은 50%를 주장)을 보조해주는 제도이다. 부족액의 100%를 보조해주는 복지정책이 가진 문제점인 일하지 않으려는 유인을 줄이고, 특정 집단이나 상품 구매자가 아닌 문자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리드먼은 음소득세제를 도입하는 전제 조건으로서 각종 사회보험 성격의 프로그램들이 가진 복지 요소를 제거하여 음소득세제에 통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래야 二重三重의 복지 혜택을 줄여 복지정책을 시행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도 한결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명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프리드먼이 제창한 경제학 방법론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현실에 대한 假定(가정)이 어떠하든 미래에 대한 豫測力(예측력)이 높은 이론이 좋은 이론이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다. 이는 특히 하이에크와 같이 자생적 질서를 주장하는 논리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기본적으로 無知하므로 우리 인간이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별로 없고, 더구나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고 하이에크는 주장한다. 또한 가정은 현실적이어야 하고 예측의 정확성을 경제학 이론의 준거로 삼아서는 안 되며, 표준적 경제학 이론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가정은 활용 가능(manageable)해야 한다는 코스의 주장과도 다른 것이었다. 활용 가능한 가정이 비현실적인 것밖에 없다면 불가피하게 현실성이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코스의 주장이다.

4. 케인즈와 프리드먼

케인즈 경제학을 지지하고 이의 전통을 이어받은 케인지언과 프리드먼을 비롯한 시장경제학자 간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그들의 경제관에 있다. 사상적으로 케인즈가 New Liberalism에 속한다면 프리드먼은 Neoliberalism에 속한다. New Liberalism은 신자유주의(I)로 번역되는데, 사유 재산권을 옹호하면서도 시장경쟁은 불공정하며 실질적인 자유를 위한 평등을 위해 정부개입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기본적으로 불안정한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적절히 개입하여 경제를 微細調整(fine tuning)해야 한다는 정부개입주의 사상으로서, 이는 사실상 자유주의라고 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I)은 17-18세기 로크(John Locke), 스미스(Adam Smith), 스펜서(Herbert Spencer), 그리고 밀(John Stuart Mill) 등에 의해 영국에서 胎動(태동)한 본래의 자유주의(liberalism)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로 명명되고, 신자유주의(I)이 마치 본래적 의미의 자유주의인 양, 자유주의라는 용어를 탈취하여 진보로 탈바꿈하였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의 좌파 운동의 이론적 근간이 되기도 하였다.4) 반면에 프리드먼이 속하는 Neoliberalism은 신자유주의(II)로 번역되는데, 정부개입의 반대 또는 최소화를 주장하는 사상으로서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기본적으로 안정적이므로 경제를 미세조정하려는 정부 개입이 오히려 경기순환을 유발한다는 경제관이다.

이러한 경제관의 차이는 1930년대 대공황에 대한 진단과 그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논쟁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국민소득은 가계의 소비지출, 기업의 투자지출, 정부지출, 그리고 수입에서 수출을 뺀 純輸出로 구성되는데, 케인즈는 재화와 용역에 대한 지출이 外生的으로 하락한 데서 대공황의 이유를 찾았다. 국내의 소비지출과 투자지출이 감소한 이유로서는 1929년의 주식시장 붕괴에 따른 소비감소, 1920년대의 주택에 대한 과열투자와 1930년대의 미국 내의 이민 감소에 따른 주택수요 감소, 부적절한 규제로 인한 은행 도산에 따른 기업 투자 자금 조달의 어려움 등이 원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소비지출과 투자지출이 크게 떨어진 상황에 직면하여 총수요를 증가시킬 수 있는 방법은 정부지출을 늘리는 것이라고 케인즈는 조언하였다. 이에 따라 루스벨트 대통령의 테네시강 유역개발 등을 통한 정부지출 증가 정책으로 총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대공황을 탈출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프리드먼은 대공황은 通貨管理의 잘못에서 비롯됐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한 마디로 중앙은행이 경제 상황을 잘못 진단하여 통화량을 25% 정도 급격하게 감소시킴으로써 소비지출과 투자지출이 감소해 대공황이 유발됐다는 것이다.5) 그러므로 지출이 줄어 대공황이 유발됐다는 진단은 케인지언과 같지만, 지출이 줄어든 원인에 대한 진단은 다르다. 대공황에서 빠져 나온 이유 역시 정부지출 증가가 효력을 발휘했기 때문이 아니라 통화가 원래 수준으로 회복됐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이후 케인지안과 프리드먼을 위시한 통화주의 학파는 재정정책과 통화신용정책의 유효성을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을 벌였으며, 그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사실 프리드먼보다 동시대 케인즈의 지적 라이벌은 하이에크였다. 케인즈의 배려로 영국의 런던경제대학에 교수직을 얻을 수 있었던 하이에크는 케인즈와는 전혀 다른 사상인 자유주의의 길을 걸었다. 대공황 이후 전 세계가 케인즈 경제학에 휩쓸려 그의 존재가 보이지 않았지만, 197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과 함께 그의 자유주의 사상과 경제학은 다시 살아났다. 하이에크는 케인즈의 ‘고용, 이자,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이 케인즈가 곧 철회할 당시의 시국선언문 정도로 생각하고 논평을 하지 않았는데 전 세계를 휩쓴 결과를 보고 매우 후회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하이에크의 유명한 저서로서는 ‘노예의 길’, ‘자유헌정론’, ‘개인주의와 경제질서’. ‘치명적 자만’ 등이 있다.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만큼 정부지출로 대표되는 정부의 크기를 줄여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지만, 프리드먼이 감세를 위한 조세개혁 프로그램을 명시적으로 제시한 적은 없다. 다만 그는 처음에는 낮게 책정됐던 세율이 저소득층에 대한 소득 재분배 목적으로 높아졌지만 조세 회피 등으로 그 실효성이 별로 없고, 불평등을 줄이고 부의 확산을 도모하려 했던 개인소득세는 실제로는 기업이윤의 재투자를 촉진함으로써 대기업의 성장을 도와주고 자본시장의 작동을 방해함은 물론, 새로운 기업의 설립을 좌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진단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예외나 減免이 없는 단일세제(flat rate tax system, 또는 줄여서 flat tax system)를 지지했다. 단일세란 累進稅(누진세)나 逆進稅(역진세)와는 달리 조세 대상이 되는 모든 소득에 대해 매기는 세율이 일정한 세제를 말한다.6)

프리드먼이 주장한 복지정책인 음소득세제도 일종의 단일세제다. 조세 감면 후 소득이 陰(음)이 되면 조세 대상 소득을 零(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음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단일세율을 적용하여 보조금을 산정하는 방식이다. 프리드먼이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만큼 국민소득 대비 조세 비중이 높지 않은 것을 선호하지만, 그가 단일세제를 지지하는 이유는 좀 다르다. 그는 세제의 평등성 확보와 개인의 인센티브에 방해되는 요소를 줄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의 매년 또는 2년마다 세법을 바꿈으로써 로비스트들로부터 선거자금을 모으는 일과 세법 변호사들만을 번영시키는 일을 종결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좋지 않은 세법이라도 5년 정도만 바꾸지 않으면 해로운 면은 많이 줄어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공황 이후 정부 역할이 강조됨에 따라 국민소득 대비 정부지출은 꾸준히 증가했으며, 국민의 조세 부담 역시 증가해 왔다. 미국에서 전쟁 때를 제외하면, 1800년부터 1929년까지의 정부지출은 국민소득의 12%를 넘지 못했으며, 이 중 2/3는 주정부와 지방정부가 의무교육시설과 운영비, 그리고 도로건설 및 유지비에 사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꾸준히 증가하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발표 자료에 따르면 1990년 국내총생산의 27.3%, 95년 27.9%, 2000년 29.9%, 2003년 25.6% 등, 매년 25%-30%를 점하고 있다(자료: OECD Factbook 2006: Economic, Environmental and Social Statistics). 2004년 미국의 국내총생산 11조 7천억 달러의 25%는 약 3조 달러로서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2,850조 원에 이르는 금액이다. 다 쓰기에도 벅찰 만큼의 금액을 정부가 세금으로 거두어들이고 있다는 것이 프리드먼의 지적이다.

5. 한국 사회에 대한 시사점

지금까지 우리는 프리드먼의 생애와 학문 세계를 조망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의 생애와 학문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본다.

첫째, 프리드먼을 비롯한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이 줄기차게 주장하는 것은 ‘작은 정부’다. 그러나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大恐慌 이후 각국의 정부 규모는 지속적으로 커졌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국민총생산 대비 정부 조세는 1990년 18.9%, 1995년 19.4%, 2000년 23.6%, 2003년 25.3%로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더구나 현 정부 들어 정부의 크기는 더 커지고 있다. 정부는 OECD 국가들의 2003년 평균 조세부담률 36.3%보다는 낮다고 하지만, 세금과 연금, 그리고 반강제적인 準租稅(준조세)를 합하면, 사실상 국민이 정부를 위해 부담하는 총 실질부담액은 OECD 국가들의 평균에 거의 육박할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고 보아진다. 더구나 정부가 2006년 8월에 발표한 미래전략 보고서 ‘비전 2030’을 실천하려면 앞으로 25년 동안 1,100조원이 필요하며, 그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서 세금을 내는 가구당 평균 6,650만원(매년 266만원)의 추가적인 조세 부담이 불가피하다는 추정이다. 또한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와 자주국방을 위해서도 15년 동안에 621조원이 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현 정부가 표방하고 있는 ‘크고 효율적인 정부’ 운영에 따라 앞으로도 국민들의 조세 부담은 더욱 가중될 것인데, ‘큰 정부, 작은 시장’을 사회 운행의 기초로 삼은 경제는 논리적으로 작동할 수 없고 이런 경제는 모두 몰락했다는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볼 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단일세제 도입을 논의한다면 지금까지의 정부 지출 규모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 ‘작은 정부’의 역할을 명확하게 한 다음, 재정 수요를 예측하고 이를 충당할 수 있는 단일세율을 정해야 한다.

둘째, 나이트, 바이너, 프리드먼, 코스, 스티글러, 베커 등의 석학들이 시카고학파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의 시카고학파에 대한 기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들은 모두 시장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가졌다. 그 결과, 어느 분야를 연구하든 항상 결론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시장의 자율’과 ‘작은 정부’였다. 이론과 실증에 바탕을 둔 학문적 동질성을 강하게 유지할 수 있었고, 자유시장 경제를 주창하는 사상적 뿌리를 함께 하여 하나의 학파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의 대학과 시카고학파를 비교할 수준은 아니지만, 우리의 경제학과나 대학은 대부분 그 正體性마저 불분명하다. 구성원들의 다양한 분포는 일견 다양한 학문적 스펙트럼을 반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상적 뿌리를 같이 하는 학자들로 구성된 대학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 대학들의 정체성이 없다는 말과 같다. 당연한 결과로서 구성원들 간의 시너지 효과는커녕 오히려 갈등이 다반사다. 따라서 사상적 발전을 이어갈 수 있는 후학을 제대로 양성하지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지금부터라도 학교별로 사상과 철학의 뿌리를 같이 하는 학자들이 함께 모여 지식을 발전시키고, 지식 간 우열은 학회를 비롯한 지식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가리는 학문 풍토의 조성이 절실하다.

셋째, 각종 정부 직책을 거부하고 오직 자유주의적 학문의 길을 걸었으며, 대학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정력적으로 활동했던 프리드먼의 생애가 한국의 학자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일부 한국의 학자들이 성실한 학문 활동보다는 정․관계 진출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는 점과, 많은 학자들이 早老하는 현상과는 정반대이다. 한국의 학자들이 직면하는 사회․경제적 여건을 고려하더라도 최근 들어 이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는 것은 우려할만한 사항이다.

마지막으로 훌륭한 학자를 식별하고 그들이 가진 사상과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비영리 재단들의 활동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이러한 재단들은 흔히 기업들의 경제적 도움을 바탕으로 설립된다. 물론 사상과 철학을 전파하는 일은 기업의 돈벌이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 그러나 한 사회를 떠받치는 사상과 지식 체계가 잘못되면 그 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대표적인 것이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다. 그런 점에서 기업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돈벌이의 場(장)을 보호하는 일에 무관심할 수만은 없다.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은 쿠어스(Coors) 맥주 회사 사장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보수주의 씽크-탱크(think-tank)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이런 기업이나 재단이 아직 없다. 이른바 씽크-탱크 산업이 매우 뒤져 있으며, 따라서 사회의 운용 根幹(근간)이 되는 사상과 지식의 공급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미래의 건강한 사회 건설을 위해 건전한 사상과 지식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씽크-탱크의 설립이 시급하다고 하겠다.

참고자료
Friedman, Milton, Capitalism and Freedom,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2

---------------- and Rose Friedman, Free to Choose, Harcourt Brace Jovanovich, Inc. 1979

http://nobelprize.org, Milton Friedman-Autobiography

Special Report Milton Friedman, A heavyweight champ, at five foot two, The Economist, November 25th, 2006

1 합리적 구성주의는 인간의 이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설계할 수 있다는 사고를 말한다. 사회주의는 합리적 구성주의의 극단이다. “자유란 우리 모두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신과 같이 전지전능한 인간이 있다면 자유는 의미가 없다”는 하이에크의 사상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2 처음 만들어진 ‘선택의 자유’ 비디오테이프는 10개인데, 자유기업원에서 번역하여 현재 여러 대학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은 5개로 줄여 만든 것이다. 10개의 주제를 5개로 압축한 것이며, 토론 부분은 완전히 다시 제작한 것이다.

3 프리드먼은 처음 홍콩을 보고 경제적 자유가 정치적 자유의 근간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을 경험하며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는 별다른 관련이 없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4 현재 미국에서 ‘liberal’이 진보로 인식되는 이유다.

5 이는 곧 프리드먼이 재량보다는 준칙에 의한 통화신용정책을 펼 것을 주장하는 실증적 근거가 되기도 한다.

6 조세 대상이 되는 소득의 종류 및 예외와 감면 여부에 따라 각 개인이나 가구가 내는 세금이 다르므로 진정한 의미의 단일세율을 적용하고 있는 나라는 찾기 힘들다. 1990년대 중반부터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각각 특정 액의 조세 감면 후 24%, 25%, 33%의 단일세율을 채택하고 있고, 2001년 1월부터 러시아가 13%의 단일세를 개인소득에 적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등도 단일세를 도입하였다.(시대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