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念.思想.思潮

[시론] 마르크스주의 비판

이강기 2015. 9. 18. 10:37
[시론] 마르크스주의 비판


[오병헌 | 전 성균관대 정치학과 교수]

 

 시대정신 2014년 겨울호

 

1.  머리말
 
멀쩡해 보이는 나라가 ‘위기에 놓여있다’고 말한다면, 공연한 걱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분배의 문제가 있기는 하나 경제는 그런대로 돌아가고 있으며, 국민의 1인당 평균소득이 불원간 3만 불이 되리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발 물러서서 조용히 관찰해 보자. 그 커다란 물결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두 개의 저류(底流)가 주류(主流)를 거슬러 흐르고 있으니, 하나는 좌파의 끈질기고 맹목적인 방해이고, 다른 하나는 사정을 다 알면서 행동을 취하지 않는 우파의 습성화된 무위(無爲)의 연속이다. 특히 입장이 서로 다르면서도 국정을 같이 논의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임에도,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같이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가 좌파의 경우에는 유난히 심하니, 선진국에서는 보기 힘든 이와 같은 상황은 어디에 기인(起因)하는 것일까?

 

필자는 좌파 인사들이 어떤 관념(觀念)을 공유하는데서 나오는 현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공통된 관념이란, 국가정통성 부인,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불신과 그 장래에 대한 비관론,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지복천년(至福千年)의 이상사회를 내용으로 하는 혁명관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좌파’란,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에 반대하는 세력을 칭하기로 한다.) 이와 같은 역사관을 내세우는 이론가는 칼 마르크스(Karl Marx)이다. 일제시대에 들어온 마르크스 이론은 6.25전쟁 이후 지하로 잠적했다가, 다시 1980년대에 지금은 486이 된 386세대 사이에 널리 침투하였지만 이들이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1990년대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한 후 마르크스 이론은 한국에서 힘을 잃었다.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와 2009년 유럽의 재정위기로 전 세계적으로 시장경제 상황이 불안해지고 소득불평등 현상이 심해지면서, 다시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마르크스’라는 검색어만 쳐보면 된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검색결과, 2014년 10월 말 기준 국내서적이 1,087권, eBook이 59권이고, 지난 36개월 내에 출간된 국내서적만 160권, eBook이 50권이다. 여기에 검색어로 ‘엥겔스’와 ‘공산주의’를 치면 또 적지 않은 책이 추가된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를 다룬 책은 훨씬 적고, 그 내용도 비판이 반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동구권이 붕괴되고 20년 만에 마르크스주의가 다시 한국 지식사회를 휩쓸고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다시 유행하기 시작한 마르크스 열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런 이론적 비판도 하지 않고 있다. 필자는 2011년 졸저 『한국의 좌파』에서 마르크스주의 비판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자료를 발굴하여 시도한바 있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의 이론이 원래 정연(整然)하지 않았고 적지 않은 혼란이 있음을 밝혔지만 충분하지 않다.  더 뛰어나고 더 많은 지식인들에 의한 이론적, 경험적, 역사적 차원의 마르크스주의 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글은 일제시대에 태어나 해방 후 청년시절 좌우익의 격돌을 체험하고 6.25전쟁의 참상을 겪은 한 노(老) 정치학도가 현대사의 폭풍을 헤쳐 나온 한국이 저 불행했던 이념갈등의 소용돌이에 다시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일념에서, 어쩌면 생의 마지막 작업으로 쓴 것이다.    

 

2. 마르크스 이론의 몇 가지 오류

 

가) 마르크스주의의 배경


칼 마르크스(1818-1883)는 독일연방(Deutsche Bund)의 가장 크고 강력한 왕국인 프로이센에서 태어났다. 유대교를 버리고 개신교로 개종하여 공무원이 된 아버지는 아들도 같은 길을 택하여 법학을 공부하고 안정된 장래를 보장 받기를 권유하였지만,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쳤다.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역사학과 철학을 공부하면서 헤겔좌파 지식인과의 교분을 통하여 급진적인 행동을 주동하는 집단에 가입하게 되면서 사회 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러나 신문과 잡지에 정기적으로 과격한 이론을 담은 글을 쓰면서 프로이센 정부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결국 마르크스는 국외로 추방되어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거쳐서 급진주의자에게 관대한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런던에서의 그의 생활은 한 마디로 돈에 쪼들리는 나날의 계속이었다. “자기는 돈이 없으면서 남(자본가)의 돈 이야기를 한다”고 자조(自嘲) 하였지만, 미국 신문에 아시아에 관한 원고를 써서 받는 고료(槁料) 가지고는 생활이 되지 않았다. 부인이 결혼 때 가지고 온 패물을 때때로 팔아서 썼으나 물론 큰 도움은 되지 못하였다. 다행히 맨체스터의 방적공장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공장을 경영하던 엥겔스(F. Engels 1820-1895)가 때때로 생활비를 대주었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에 매일 나가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영국의 경제에 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24세의 엥겔스가 자기 공장의 주변에서 전개되는 노동자의 생활을 관찰하면서 쓴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1844년)를 읽고 나서부터였다. 갑자기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던 공장주(工場主)들은 농촌에서 일자리를 잃고 흘러들어오는 빈농(貧農)과 부랑자들을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낮은 임금으로 고용하여 하루 18시간 이상 혹사했다. 19세기 전반에 아일랜드에서 극심한 가난을 피하여 영국으로 이주해 온 난민은 모두 공장으로 밀려갔다. 이들의 수는, 런던 12만 명, 맨체스터 4만 명, 글라스고 4만 명, 리버풀 3만 4천 명, 브리스털 2만 4천 명 등이었다. 엥겔스의 보고서에 의하면 농촌에서 일자리가 없어 도시로 흘러들어온 농민과 그 가족은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공간에서 잠을 자면서 공장의 위험한 작업장에 나가서 하루 종일 일을 해야만 했다. 이처럼 비참한 생활을 하는 노동자 계급의 상태는 24세의 젊은 엥겔스로 하여금, “혁명이 와야 한다.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은 때가 늦었다”고 부르짖게 하였으며, 2년 후에 이 글을 읽은 마르크스도 평생 지속되는 깊은 영향을 받았다. 결국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년에 『공산당선언』을 공동으로 집필하게 되었다.

 

“일거리를 찾을 수 있는 동안에만 생명을 유지하고 또 그들의 노동이 자본을 늘리는 동안에 한해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일단의 노동자들인 프롤레타리아”의 출현이라는 『공산당선언』의 구절은 명백히 1844년에 발표된 엥겔스의 보고서에서 따온 것이었다. 1867년에 나온 『자본론』 제1권도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에 관하여는 이 엥겔스의 보고서를 전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엥겔스의 1844년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쓴 『공산당선언』은 자본주의 사회는 그 내부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노동자 계급에 의하여 전복될 것이라는 예언을 처음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당시의 영국 사회와 공장의 실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침 농경의 대규모화로 말미암아 농촌에서 퇴출된 실업자와 부랑자를 싼 임금으로 고용하고 하루 18시간이나 노동을 시키고,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의 숙사(宿舍)에 가두어 넣고 노동자를 혹사하는 것이 정부의 공장규제가 시작하기 전의 자본주의 생산제도의 실태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류 역사에서 처음 겪는 현상을 인류역사의 종말인 것 같이 느꼈다. 그들은 자본가의 노동자 착취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계급 간의 대립을 해결하고 착취가 없는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기 위하여 무산계급에 의한 혁명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였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후에 자본가가 노동자로부터 착취하는 것은 노동에 의해 창출된 잉여가치(剩餘價値)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잉여가치 착취론과 함께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은 변증법에 입각한 유물사관(唯物史觀)에서 설명되어야 한다는 점은 『공산당선언』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다.    

    

이 당시 마르크스가 이 이론들의 기본적인 개념, 또는 구상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는가는 명백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마르크스가 그의 경제이론과 역사관을 확립하는 데 그 후 10년을 소요하였다는 사실이다. 『자본론』(제1권 1867년)을 쓰기 위한 준비로서 작성한 『집필안개요(Grundrisse)』와 『경제학비판』은 1859년에, 그리고 『잉여가치론』은 1862년에 내놓았다.   다시 말하면 잉여가치와 노동착취에 관한 정확한 수리적(數理的)인 개념을 완성하지 못한 채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에서 무산계급 혁명의 불가피성부터 먼저 주장했다는 말이 된다.
          
나) 국가론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에서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자기의 체포영장이 기다리고 있는 조국 프로이센을 죽기 전에 한 번 방문하려는 희망은 접은 지 오래 되었으나, 노동자를 노예와 같은 상태로 방치하고 자본가의 편을 드는 국가는 그에게는 증오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때 영국정부는 때마침 증기(蒸氣)기관의 발명으로 일어난 제2차 산업혁명의 결과로 출현한 대규모 공장에서의 노동조건, 위생문제 등의 새로운 관리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으며, 여러 번에 걸친 공장법(工場法)의 개정을 통하여 작업환경, 근로시간, 미성년자의 고용 조건, 임금 등에 관한 규제를 정하였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작업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는 마르크스는 1844년의 상태만을 알고 그 후의 변화에는 둔감한 채 1867년에 『자본론』 제1권을 출판하였고 1883년에 사망하였다.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앞으로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점차로 모든 자본과 생산 수단을 빼앗은 다음, 몇 가지 색다른 정책을 시행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 제안의 대부분은 영국 국회가 ‘공장 입법’을 통하여 마르크스의 생존 시에 이미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한 바 있어 새삼스러운 관심사(關心事)가 되지 못하였다.
     
19세기 유럽은 민족주의가 대두하면서 국민의식도 동시에 발달하여 근대 민족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을 겪는 시기였고,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변화의 시대에 산업자본주의 초창기의 양극화 문제 역시 개선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한 듯하다. 특히 영국에서는 노동조합이 발달하여 결국은 노동당으로 탈바꿈 한 것이 19세기 말의 일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노동자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전선(戰線)으로 달려갔다. 제2차 대전이 끝나고 노동당은 집권당이 되어 그들이 원하는 노동정책을 실행하는 데까지 갔다. 마르크스가 꿈도 꾸지 못한 사태가 나타난 것이다. 한국의 경우도, 노동조합의 세력이 커져서 ‘노동귀족’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무계급사회에서는 국가의 역할이 소멸된다고 보았다. 국가 소멸의 필요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런 입장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회가 아닌 경우, 국가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이나 애국심의 강조를 국가주의 혹은 자본의 착취를 호도하려는 의도와 동일시하는 좌파 지식인 특유의 냉소적 태도를 만들었다.

 

1926년에 태어난 필자는 일제시대에 일본인으로 부터 받은 모욕과 차별 대우를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다행히 해방과 대한민국의 수립을 직접 체험한 사람으로서 그 소중한 감격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하면서 상당수의 무직자들을 포함한 70만 명에 달하는 일인(日人)들이 한반도에 이주하여 왔다. 총독부는 이들에게 수많은 특혜를 베풀었고 이것이 바로 한인을 착취하는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참다못하여 간도(間島)로 떠난 한인은 부지기수였다.

 

간교(奸巧)한 방법으로 차별하는 제도는 고등교육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중학교부터 규모를 줄여서 학생을 수용하였으며, 그 이상의 고등교육은 독립(獨立)사상을 키운다는 위험성 때문에 설립을 극히 제한하였다. 그런 속에서도 일인 교수는 한국인을 멸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어떤 역사 교수는 세계의 언어를 분류하여, “독립 국가는 국어를, 독립을 하지 못한 민족은 민족어를 가지고 있는바, 조선인은 ‘집단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조선 민족을 업신여기는 풍조가 사회 전체에 깔려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이 된지 70년이 지났지만, 한국의 좌파는 일제와 자본주의와 친일을 한편으로 묶고, 계급투쟁과 항일독립운동을 다른 하나로 묶어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이념갈등을 조장하고, 정작 김일성의 주체사상, 경제적 파탄, 반인륜적 범죄에는 눈을 감고 있다. 현대사에 대한 좌편향 역사교과서들이 바로 그 증거물이다. 한때 자본가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국가를 자본가의 사유물로 간주하는 것은 역사 발전의 큰 흐름을 보지 못하는 편견이다.  국가를 악용(惡用)한 선례만을 보지 말고 자본가들에게도 제재를 가하는 기능과 권한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좌파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은 앞으로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국가의 출현을 염원(念願)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가 자본가의 사유물이 되는 것이 잘못인 것과 같이, 노동자의 전유물이 되어도 국민을 위해서는 불행이 온다. 북한과 레닌 및 스탈린의 러시아가 어떤 괴물(怪物)이 되어 버렸는가를 보면 국가는 특정계급이 아닌 보편적 국민을 위한 권한과 기능을 행하는 조직이 되어야 함을 절실히 느끼게 될 것이다.

 

다) 잉여가치와 착취


인간의 노동이 경제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마르크스의 공헌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근대 경제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공산당선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노동자에게 사용되는 비용(노임)은, 거의 노동자가 자신의 생계와 자신의 종족의 번식을 위하여 필요한 생활수단의 대금에 한정된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엥겔스에 의하면 노동자는 공장에서 기계와 경쟁을 해야 하며, 기계의 유지-보수비용과 노동자의 임금이 동일하게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인용문이 마르크스주의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엥겔스는 기계와의 경쟁으로 인한 단순노동과 최저임금으로 인해 노동자의 생산성은 계속 떨어지고, 따라서 임금 역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계급모순으로 확대되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이어져야 함은 물론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노동자의 임금이 오른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해야 하며, 현실적으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른 한편, 위 인용문에서 마르크스-엥겔스가 그 어떤 이유에서이든 노동자가 더 받아야 할 ‘무엇’을 전제하고 있음도 명백하다. 결국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받아야 하지만 자본가가 가로채는 ‘그 무엇’을 찾아냈다. 바로 잉여가치가 그것이다. 1867년에 출판된 『자본론』 제1권, 제10장의 '노동시간'(The Working-Day)에서 마르크스는 그의 유명한 ‘잉여가치의 이론’을 제시하면서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수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⑴ 어떤 공장에서 한 노동자가 어떤 물건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이 6시간이라고 할 때, 이것을 ‘필요노동’이라고 부른다.
⑵ 만약 이 노동자가 3시간을 더 일한다면, 이 추가 노동은 자본가를 위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잉여노동이 된다.
⑶ 만약 작업시간이 총 12시간이 되면, 자본가는 노동자로부터 6시간 분의 잉여가치를 빼앗게 된다.
⑷ 전체 노동시간이 얼마나 긴가에 상관없이 자본가는 노동자에게는 6시간 분의 기초 임금만을 지불한다.
⑸ 이 임금은 노동자가 그의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하여 필요한 만큼의 액수이며, 그 금액은 자본가가 결정한다.

 

만일 노동자가 이 임금을 받기를 거부하면, 자본가는 빈 일자리를 기다리는 다른 노동자들, 즉 산업예비군 중에서 원하는 노동자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므로, 노동자는 선택의 여지없이 자본가가 제시하는 조건에 따라 노동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착취이론의 핵심이자, 마르크스주의의 정당성과 도덕성의 원천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임금에 관하여는 어느 곳에서나 금액으로 표시한 적이 없었다. 『공산당선언』에서는 노동자는 ‘최저임금’을 받고 일한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금액은 표시 되지 않고 있다. 『자본론』에서는 노동 시간 또는 비율로 표시되고 있다. 실제로 노임이 금액으로 얼마 되고, 식품이나 의류의 가격이 얼마인가를 알면 노동자의 생활이 얼마나 궁핍한 지를 알 수 있는데, 그런 실감나는 비교를 해볼 도리가 없다.

 

 생산활동의 진행과정에서 노동자에게 지불해야할 임금 외의 잉여가치에 해당하는 부분을 역시 『자본론』 제1권, 제10장의 ‘노동시간’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력 역시 그 가치에 따라 사고 팔린다는 가정을 갖고 시작한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만일 노동자의 존재를 매일 가능하게 해주는 평균적 수단을 생산하는 데에 6시간이 걸린다면, 노동자는 매일 그의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하여, 혹은 노동력의 판매 결과로서 받게 되는 가치를 재생산하기 위하여 하루 평균 6시간을 일해야 한다. (…) 이제 A B는 필수노동시간의 길이를 표현하고 6시간이라고 하자. 만일 노동이 AB를 넘어 1, 3, 6시간 연장되면 다른 3개의 선을 갖게 된다.

 

A-B: 임금을 받고 일하는 시간(필수노동시간).
B-C: 임금을 받지 않고 일하는 잉여노동의 시간으로 보는 경우,  


작업일 I      A- - - - - -B-C
작업일 II      A- - - - - -B- - -C
작업일 III      A- - - - - -B- - - - - -C

 

위의 세 작업일의 경우,  정상노동의 시간에 대한 잉여노동의 시간은 작업일 I의 경우 BC ÷ AB = 1/6 = 16⅔%, 작업일 II의 경우는 50%, 작업일 III의 경우는 100%이지만, 이것으로부터는 노동자가 필요노동시간, 즉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에 대한 최저임금만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필자는 2011년 『한국의 좌파』(기파랑)를 펴내면서 영국의 수리경제학자 알랭(Robert C. Allen)의 『세계적 조망 하에 영국의 산업혁명(The British Industrial Revolution in Global Perspective)』(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을 참고하면서, 알랭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과거의 각종 통계 자료를 비교한 결과 얻은 1688년 당시의 노동자의 임금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수치를 기반으로 하고, 필자 자신이 영국 경제사에 관한 학술잡지를 뒤지면서 당시의 노동자 노임의 동향을 유추한 결과, 노동자의 보수가 결코 마르크스가 말하듯이 최저생활을 겨우 유지하는 정도의 비참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1760년의 제1차 산업혁명에 이어 1840년의 2차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영국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가 입에 풀칠할 정도의 임금을 계속 받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상식을 거역하는 논리에 불과하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자 자신의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 즉 필요노동 시간에 해당하는 최저 생활비에 불과하다고 말하였으며, 필요노동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은 모두 자본가에게 돌아가는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부분이라고 규정하였다. 예컨대, 필요노동시간이 6시간일 때, 하루에 9시간을 일하면 3시간은 착취를 위한 노동이라고 정의하였으며, 노동자는 6시간 분의 임금밖에 받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위의 표는, 농촌이나 도시에서 흘러들어오는 빈농/빈민/부랑자는 최저임금을 받고 있었으나, 정규 노동자는 최저생활비의 2.8배(₤5.6÷₤2.0)에 달하는 임금을 받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이 표에 나타난 수치는 1688년 당시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므로,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위한 자료를 수집할 당시, 즉 1850-60년대에 이르러서는 노동자의 임금은 훨씬 더 높은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표를 보면,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수입만을 가진 층은 정부의 원조를 받는 빈민, 즉 빈농, 빈민, 부랑자뿐이었다. 산업혁명이 시작하기도 전의 숫자가 이러하였으므로 산업혁명으로 생산력이 증가한 이후에는 (초기의 혼란기를 지난 다음에는) 노동자의 몫이 점점 더 커졌으며, 노동자의 일부는 후에 중산층이 되기도 하였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자본가에 의한 착취가 더 심해지고 노동자는 더욱 빈곤해진다는 마르크스의 예언이 완전히 빗나간 이유는, 이상과 같은 구체적인 숫자를 마르크스가 갖고 있지 않으면서 막연히 노동자는 최저생활을 위한 임금만을 받는다고 단정해 버린 데 있었다. 착취건 이윤이건 간에 자본가가 상품을 판매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임금이 최저생활비 밖에 안 되도록 고정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위의 표는 말해준다. 만약 마르크스가 이 표와 같은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의 결론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가 과외로 받아야 할 초과 임금을 모두 잉여가치로 분류함으로써, 자본가 몫으로 돌아가야 할 투자 자본에 대한 정당한 대가 내지는 보수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으니 자본주의 경제의 근본원리를 부정하는 이론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여기서, 만약 마르크스가 노동자가 받아야할 적절한 임금을 산출하여 잉여가치의 크기를 줄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나, 노동자가 최저임금을 받고 일한다는 신념에 사로잡힌 마르크스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라) 마르크스의 관념적 학문관

 

그러면 마르크스는 왜 공장에 가서 노동자와의 직접 대화를 통하여 임금의 실태를 파악하지 않았던가? 필자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하나는 헤겔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역사적인 원칙을 기준으로 하여 가치판단을 해야 한다는 관념 때문에 금전적인 기준을 운위(云爲)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증(實證)주의를 배척하던 그가 한풀 꺾인 것은 생물학자 다윈(Charles Darwin)의 『종(種)의 기원』이 1859년에 발간되면서였다. 1831년에서 1836년에 이르는 5년 동안 지구를 한 바퀴 돌면서 관찰하고 수집한 자료와 표본을 바탕으로 수많은 식물과 동물의 계보를 세운 다윈은 역사상 처음으로 생물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진화하였는가를 밝힘으로써, 유전학의 기초를 이루는 저술을 펴내고, 역사적인 실증주의적 위업(偉業)을 발표하였다. 『종의 기원』에 감탄한 나머지 마르크스는 자기의 저술을 다윈에게 헌정할 것을 마음먹기까지 했다고 하나, 결국 헤겔에게서 배운 역사 발전의 법칙인 변증법을 인류 경제 사회의 발전을 설명하는데 적용하여, 새로운 경제사를 서술하려고 시도하였다. 여기서,

 

(1) 그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2) 이 토대위에 법률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형성되며, 이 토대가 상부구조를 지배한다.
(3) 생산력이 발전하면, 어느 단계에 이르러서는 낡은 생산관계는 발전의 질곡(桎梏)으로 변한다. 이때 사회혁명의 시기가 시작하여 상부구조가 변혁된다.
(4) 생산관계에는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근대 부르주아적 생산관계가 있다.
(5) 근대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는 최후의 적대적 생산관계이다. 발전하는 생산관계는 적대를 해결하는 여러 조건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붕괴와 함께 인간사회의 전사(前史)는 끝난다. 

 

『경제학비판서설』에서 마르크스가 주장한 이상과 같은 유물사관의 공식은 유물변증법의 역사관이라 할 수 있으며, 엥겔스는 1883년의 『공상에서 과학으로서 사회주의의 발전』에서, 유물사관과 잉여가치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적 사회주의가 되었다고 칭찬하였다. 유물사관에 관한 마르크스의 새로운 견해가 어느 정도의 새로운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 우선, 역사적 발전단계를 아시아적, 고대적, 고대적, 봉건적, 근대적 생산관계가 있다고 말한 마르크스의 분류를 엥겔스는 그 후의 역사적 연구의 결과로 나타난 의견(Haxhausen, von Mauer, Henry Morgane의 연구의 결과)에 따라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제외하고, 종족적, 고대, 봉건적, 자본주의적의 4종류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1888년의 『공산당선언』에 대한 제2차 각주에서) 인류 사회의 역사를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막연한 개념으로 파악하려는 동기 자체가 무모할 뿐만 아니라, 이미 실증된 발견을 참고로 하지 않은 것도 과학적인 태도라고 말할 수 없다. 

 

여기서 소개하는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단계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미국의 경제학자 로스토우(W. W. Rostow)가 1960년에 발표한 경제발전단계론은, 마르크스와는 달리, 기존의 경제제도를 비교하면서 경제성장은 다음 다섯 가지의 기본적인 단계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1) 전통적 사회
(2) 도약을 위한 전제 조건
(3) 도약
(4) 성숙한 단계를 향한 발전
(5) 고도 대중 소비의 시대

 

로스토우의 경제발전단계에 관한 이론을 여기에 소개한 까닭은 마르크스의 무책임한 역사발전단계론과 비교해 보기 위한 것이다. 그의 이론이 ‘비공산주의 선언(A Non-Communist Manifesto)’라고 불리는 까닭은, 구체적 설명이 이루어져야할 사건을 추상적으로 기술하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논법에 반하여, 구체적인 사실(史實)을 거론하는 실증적인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 있다.
        
마) 마르크스의 본태(本態)


마르크스가 잉여가치를 논하면서 언제나 ‘최저임금’ 또는 ‘비율(%)’만을 내세울 뿐, 임금을 금액으로 제시하는 일이 없었다는 사실은 마르크스주의의 결정적 약점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문제를 마르크스는 풀지 않았을까? 필자는 결국 여러 작가의 마르크스 전기(傳記)를 찾아보는 길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의 생활을 묘사한 글을 찾는데 한동안 시간을 소비하였다. 다행히 필자의 주의를 끄는 다음과 같은 책 두 권을 발견하였다: (1) Sylvia Nasar, Grand Pursuit: The Story of Economic Genius(New York: Simon & Shuster, 2011), Chapter I. “Perfectly New: Engels and Marx in the Age of  Miracles”, (2) Jonathan Sperber; Karl Max: A Nineteenth Century Life(New York: Liveright Publishing Corporation, A Division of W.W. Norton & Company, 2013)

 

박력(迫力) 있는 글을 쓰는 실비아 네이자 교수(Columbia대학교, 경제학)에 의하면, “경제학자 사이에서 있어온 산업혁명의 효과에 관한 오랜 기간에 걸친 토론 결과, 노동자의 실질 임금이 1840년대에 가서는 결국 상승하기 시작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p.41)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스가 자본가에 의한 잉여가치 착취를 주장하면서 왜 노동자의 실제 임금을 고려하지 않았는지, 혹은 고려할 수 없었는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유럽에서 노동자의 임금은 1840년대 이후 계속 증가하여 왔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집 밖으로 나가보는 일이 별로 없었으며, 영어를 잘 배워보자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의 세계는 같은 생각을 가진 소수의 이주민(移住民) 집단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그의 영국 노동계급 지도자들과의 교제는 피상적인 것이었다.


1862년이 되자 이제까지 인도에 관한 마르크스의 글을 게제하여 왔던 이 중단을 통고해 왔음으로 그는 새로운 수입원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실은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기사를 쓰고 원고료는 마르크스가 가져갔던 것인데, 갑자기 수입이 없어지자 취직을 하려고 철도국 직원을 지원했다. 그러나 글씨가 엉망이고 영어를 할 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퇴자를 맞았다. 미국으로 건너갈 것도 구상 해보았으나, 역시 영어 문제로 포기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행운이 찾아왔다. 엥겔스로부터 년 ₤375의 보조금에 더하여 뜻하지 않던 유산이 굴러 들어와서, 곧 1년에 ₤500에서 ₤600을 쓸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이 금액은 당시 영국 가계의 98%가 꿈도 못 꾸는 금액이었다. 결국 그는『자본론』의 출판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원고 마지막 완성판을 출판사에 보내면서, 발자크의 소설 이야기를 언급하였다고 한다: 어떤 화가가 몇 해 걸려 심혈을 기우려서 그린 그림을 걸작이라고 믿고 펼쳐놓았는데, 한참 보고 난 다음에 “허무하다. 허무하다. 10년 걸려서 그린 그림인데” 하고 통곡하였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의 이론이 이에 비유되는 것을 걱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20세기의 위대한 경제학자 케인즈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과학적으로 틀렸을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 적용하수 없는 퇴화된 경제학 교과서”라고 혹평하였다.
            
미조리(Missouri) 대학교의 유럽 역사 교수인 스퍼어버의 마르크스에 관한 최신 전기인 Karl Marx : A Nineeenth Century Life는, 그 부제(副題)가 가리키는 바와 같이, 마르크스는 현재 21세기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구성하는 이념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는 멀리 떨어진 역사적 시점에 속한 사람, 다시 말하면 프랑스 대혁명, 헤겔의 철학, 영국의 초기 산업화 시기, 그리고 이 시기에 형성된 영국의 정치・경제의 틀 속에서 생활하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사태에 관하여 마르크스의 이론을 적용하려는 태도나, 그를 급진적인 민주주의자로 보는 것은, 다 같이 그를 잘못 보는 태도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주요한 특징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19세기가 시작할 무렵의 자본주의였으며, 21세기에 들어서서 나타난 전혀 다른 종류의 자본주의는 아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낸 것으로 흔히 이해되고 있으나, 사실은 정치회동에도 꽤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유럽 여러 나라의 좌익 운동에 상당히 깊게 개입하였다. 노동자들이 자본가의 착취에 못 이겨서 자발적으로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그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선동과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였으며, 그런 활동을 하면서도 자기가 우두머리가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정치활동을 하면서 항상 자리다툼을 하였으며, 남의 밑에서는 일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그의 정치활동은 평온한 날이 없었다.

 

결국 마르크스의 행적은 과오와 혼돈의 연속이었다. 그는 자본주의의 질서 없는 활력(活力)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아 가지게 된 미래에 관한 낙관(樂觀), 즉 산업사회가 과학적인 개명(開明)의 문턱에 서 있으며, 과거의 종교와 혼돈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이성적으로 근거가 없는 환상이었다. 인류가 더 화평한 상태로 전진하고 있다는 믿음은 많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해 준다. 그러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19세기적인 신념을 버리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자본은 죽은 노동이다. 흡혈귀(吸血鬼)와 같이 노동을 빨아먹고 살며, 더 많은 노동을 빨아 먹으면 더 오래토록 산다. 만약 노동자가 자기의 사용가능한 시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경우에는 그는 자본가를 수탈(收奪)해 버린다.(『자본론』 1권) 

 

이 독기서린 저주의 말은 마르크스가 그의 『자본론』의 10장에서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비율 만을 이용하여 노동자가 착취되는 과정을 설명한 직후에 내 뱉은 것이다. 자본가를 증오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는 마르크스는 만약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고 이득을 얻는 경우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우리의 이야기는 프랑스로 간다. 2007년에 정부가 창립한 연구-교육 기관인 <파리경제학연구원>은 세계의 일류 연구 기관과 연계하여 공동 또는 단독으로 연구활동을 진행하였다. 최근까지 MIT에서 머물렀다 돌아와서 원장을 맡은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가 발표한 『21세기 자본론 (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Belknap Press/Harvard University Press, 2014)는, 최근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회 상층 1%의 신흥 갑부의 부(富)가 노동자의 노동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이를테면 불로소득에 속하는 부이며,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 사회적 불평등은 더 심해질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다른 대학교의 경제학자와 공동으로 새로운 통계기술을 개발하여, 미국과 영국의 경우에는 20세기 초, 프랑스의 경우에는 18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수입과 부가 집중되어 있는 상황을 밝혀냈다. 피케티의 주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있겠지만, 만일 그의 주장이 실증적 근거에 확실히 바탕을 두고 있다면 불평등이 자본가에 의한 잉여가치의 착취가 아니라, 가족에 의해 세습되는 부의 역사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고, 이 현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3. 한국 좌파의 좌표(座標)

 

필자는 위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점을 적고 그의 이론이 어떻게 21세기의 현실과는 맞지 않는지를 지적하였다. 19세기 사람이 그의 좁은 시야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전 세계적이며, 시간을 초월한, 초역사적인 사태로 확대 해석한 것은 누가 보아도 비현실적이다. 무산계급 혁명이 일어나서 사회가 뒤집어 지고, 계급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가 나타난다는 몽상은 꿈에 그쳐야지, 그것을 역사적 필연으로 선전하는 것은 죄악에 속한다. 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저명인사가 마르크스의 허황된 유물변증법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다음에 오는 무계급 사회를 자기가 실현시키겠다거나, 진보파(進步派)의 영도자를 자처하여 행동하는 작태는 젊은이들이 제발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다음에 오는 무계급사회는 실제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프랑스의 거리 혁명, 영국의 산업자본기의 초기시절 그리고 헤겔의 관념철학을 뒤섞어 만든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의 몽상(夢想)이었다. 중요한 점은 정치적, 경제적 가치 이외에 수많은 가치와 능력, 인격과 성품을 인정하는 다가치사회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좌파가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은 높다.


여기서 유럽의 야당들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를 참고로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지옵 일리(Geoff Eley)의 『민주주의의 단조, 1850-2000의 유럽좌파의 역사(Forging Democracy, The History of the Left in Europe,  1850-2000)』(Oxford University Press, 2002)는 유럽의 야당들이 제2차 산업혁명이 시작한 후에 자본주의의 뒷받침을 받아서 자유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자, 야당들이 어떻게 자유민주주의의를 같이 단조(鍛造)하였는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야당이라고 하여 무조건 반대하지만은 안했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이런 상생의 과정을 통해 유럽 좌파는 집권을 상시적으로 할 수 있었다. 한국의 야당도 통합진보당과 같은 급진적인 정당과의 이른바 야권연대를 통해 정권을 잡고 북한정권과 국가연합을 하겠다는 망상을 이제 버려야 한국의 민주주의가 성숙해지고 발전하는 추진력을 얻을 것이다. 우파 내지 여당의 개혁도 필요하나, 야당의 불투명한 이념이 앞을 가로막아 꼼작 달싹 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 정치의 현주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