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국사(國史)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

이강기 2015. 9. 19. 11:57

 국사(國史)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

::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머리말

“훗날 동아시아 사학사(史學史)에서 20세기란 국민국가의 거푸집 속에서 상상의 공동체를 창출하기 위한 이야기를 재생산한 ‘국사의 시대’로 자리매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성시(李成市)는 그의 저서 『만들어진 고대』에서 지난 20세기를 이렇게 회고한 다음, “그렇다손 치더라도 도대체 우리는 ‘국사의 시대’에 짜여진 이야기에서 언제쯤이면 해방될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

이 글이 ‘국사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라는 제목을 단 것은 이 같은 이성시의 지적에 공감하여 그가 희구한 ‘국사의 시대’에 ‘짜여진 이야기’로부터의 ‘해방’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한 취지에서이다. 국사가 본질적으로 ‘짜여진 이야기’로서, 곧 신화임은 비단 이성시가 전공하는 고대사만의 현상이 아니다. 고대사가 어디까지인지 잠시 제쳐두고, 필자가 보기에 10∼14세기의 고려사도, 15∼19세기의 조선사도, 심지어 20세기의 현대사조차도, 그저 신화로만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근대과학으로서 역사학은 고대로부터 물려받은 신화를 제거하고 사실의 객관적인 인과(因果)로써 그 자리를 채움을 기본 임무로 한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근대과학으로서 국사는 점점 더 짙어가는 안개 속만 같다. 고대 이래 한국의 문명이 어떠한 발자취를 걸어 왔는지, 국사의 이 책 저 책을 읽어 보아도 아리송하기만 하다. 이는 비단 국사의 위기만이 아니라, 한국의 지성과 학문의 위기이며, 나아가 오늘날 한국사회가 빠져버린, 쉽게 빠져 나올 것 같지 않은, 깊고 큰 함정의 역사적 근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국사의 신화성은 반드시 대한민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근대 국민국가가 그에 충직한 국민을 양성하기 위해 ‘짜여진 이야기’로 국사를 제작함은, 일본이나 중국도 그러하고, 바다를 건너 서양으로 가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대한민국과 국사의 관계를 자세히 살피면,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긴장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국사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논의를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대한민국과 국사

지난 3·1절 경축사에서 신임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우리의 근·현대사는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하였다”고 지적하였다. 비슷한 지적은 그의 대통령 취임사에도 있고, 대통령 후보자 시절의 연설 가운데도 있다. 그것들을 종합적으로 유추하면, 분단을 무릅쓰고 대한민국을 건국한 정치세력과 민주주의를 희생하면서 경제개발을 우선하였던 역대의 집권세력이 불의와 기회주의의 집단으로 지목되고 있는 듯하다. 전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집권 초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는 전국에 걸쳐 수만 명의 유력 인사가 참가한 ‘제2건국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그 같은 명칭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1948년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건국에 무언가 심각한 하자가 있었다는 비판이 아예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국내외에 자주 거론되고 있듯이 대한민국의 지난 55년간의 역사는 신생 독립국가로서는 매우 드물게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둘 다를 이룩한 모범사례에 속하고 있다. 그 국가의 성립과 전개에 무슨 하자가 그렇게 심각하기에 다른 사람도 아닌 헌법상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에 의해 그렇게 독한 어조의 비판을 받아야만 하는가? 거기에는 필경 다른 나라에서 찾기 힘든, 무언가 심상찮은 정신사적(精神史的) 배경이 있다.

눈을 돌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다루는 국사학자들의 사회를 관찰하면, 1987년 ‘민주화의 시대’가 열리면서부터 대한민국의 건국과정과 추진세력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은 세력으로 형성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한국의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역사학보(歷史學報)’가 연례적으로 기획하는 2001년 호의 「회고와 전망」에서 현대사 분야의 집필을 담당한 어느 소장 연구자는, 1945년 이후 이 땅에 들어온 미국에 대한 저항과 협력을 기준으로 ‘민족 대 반민족의 계선(界線)’을 그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그 기준에 따르면 미국의 후원으로 건설된 대한민국은 그 태생에서부터 ‘반민족’의 더러운 속성으로 얼룩져 있어 더 이상 돌아볼 여지가 없는 셈이다.

이 같은 반국가적 언설이 학계의 일각에 슬그머니 자리 잡고 나아가 차세대를 위한 공공교육의 현장에까지 꽤나 굳건한 진지를 확보하게 되었음은, 그 소장 연구자가 다름 아니라 대한민국이 국사를 편찬하기 위해 만든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라는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신분이라는, 보통 국가를 신성시하는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도무지 상상하기 힘든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증거가 충분할 것이다.

한국의 국사가 그의 국민국가를 비난하는 이상한 관계는 소수의 좌파 사론(史論)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중도 우파랄까 국사의 주류로부터의 비판은 보다 온건하지만, 그 “슬그머니 젖어드는 참소의 효과”(浸潤之讒)는 일층 음험하여 두렵기조차 하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근년에 출간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한영우(韓永愚) 명예교수의 『'다시 찾는 우리역사』를 들 수 있다. 이 개설서는 저자가 평생에 걸쳐 추구한 사론을 집대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제도권 학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특별한 지위를 통해 오늘날 한국사 연구의 수준과 동향을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한국인은 아득한 옛날 단군의 자손으로 태어난 그 때부터 특별히 우월한 도덕능력과 지성을 소지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인은 왕조를 거듭할수록 높은 수준의 문명을 건설하였으며, 15∼19세기 조선왕조에 이르러선 서유럽의 근대사회와 매우 ‘가까운’, 그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수준의 문명사회에 도달하였다. 조선왕조의 문민정치(文民政治)는 서유럽의 민주주의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공선(公選)·공론(公論)에 입각한 권력행사와 재정집행에 있어서 조선왕조는 서유럽의 근대국가에 못지않은 공공국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그렇게 ‘보석’과 같이 아름다운 민족의 역사가 그만 20세기에 들어와 망가지고 말았다.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을 문약했던 탓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비난은 마치 ‘강포한 도적’은 놓아두고 ‘선량한 주인’만을 탓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해방 후의 역사까지 포함하여 20세기를 총 정리하면, “얻은 것은 ‘물질’이요, 잃은 것은 ‘인간’ 그 자체이다.” 저자는 20세기의 좌절과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저 아름다웠던 조선왕조의 이념과 도덕을 다시금 친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일종의 문화사관에 있어서 20세기의 근·현대사는, ‘강포한 도적’이 들었던 그 전반기는 더 말할 나위도 없고, 국민국가의 성립과 발전을 본 그 후반기마저 좌절과 상실의 시대로 규정되고 있다. 국민국가가 물질생활의 풍요를 위해 기획한 일체의 공리주의적 정책과 그에 협력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달리 평가될 여지도 없이 ‘천민’적 존재로 내쳐지고 있다. 주지하듯이 대한민국이 국사에 보인 애정과 그에 들인 투자는 각별한 바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사는 그의 후원자를 비난하고 부정한다. 왜냐하면 사실상 완성된 형태의 근대사회와 국민국가가 역사의 저편에 정통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대한민국에 있어서 국사는 양부(養父)의 일족을 배신하는 명령지자(螟螟之子)와 같다.


방법으로서 문명

역사를 선과 악이, 정통과 이단이 주도권을 다투는 장으로 그리는 것은 중세 역사학에 고유한 현상이다. 근대의 역사학은 그러한 종교적 정신세계로부터의 탈출을 전제하여 성립한다. 필자는 한국의 근대사가 ‘선량한 주인’과 ‘강포한 도적’의 대립으로 묘사되고 있음에서 아직도 끊어지지 않고 있는 중세사학의 숨결을 느낀다. 역사에 대한 도덕적 비판은 그 주관적 선의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분열과 갈등의 도가니로 밀어 넣는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정의는 패배하였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선언이 화해와 통합은커녕 대립과 갈등만 증폭시켰던 저간의 사정을 보라. 근대사회에서 선과 악을 심판하는 절대자로서 신은, 니이체의 말대로, 이미 죽었다. 근대인들은 선과 악을 대신하여 효용과 비효용, 편익과 비용이라는 공리주의적 기준으로 제도와 규범을 창출하고 사회를 통합한다. 필자는 어느 사회에 내재한 그러한 통합 능력을 ‘문명’ 또는 ‘근대’라고 부르고 싶다. 필자는 그러한 의미의 문명이 한반도에서 발달해 온 역사적 과정에 대한 탐구를 ‘국사로부터의 해방’이 모색해야 할 대안적 과제라고 제시하고 싶다.

실은 문명이란 것만큼 애매하고 기회주의적이며 전략적인 개념은 없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스미스가 이야기한 대로 인간의 이기적 본성의 자연스러운 발로로 분업과 교환을 문명의 기본 요소로 신뢰하고 있다. 사회학자 뒤르켕은 프랑스 제3공화정의 민주주의가 초래했던 사회적 혼란을 목도하면서 사회의 자율적이며 유기적인 분업의 편성을 문명사회의 척도로 간주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사적 유물론을 정립했던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화폐와 시장, 국가 등을 문명의 지표로 거론하였다. 한편 사회학자 베버는 친족, 나아가 가족으로부터 개인이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립하는 것을 근대사회로의 진화를 위한 기본 요건으로 생각하였다.

숨기지 않고 말하건대, 필자가 학부 시절부터 선생과 선배로부터 배우고 또 스스로 읽어서 알게 된 이상과 같은 문명의 요소들은 모두가 근대 서유럽에서 활짝 핀 꽃들이다. 불과 백년 전 우리의 조상들이 간직한 문명관은 그와 달랐다. 그들은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본성인 인(仁)의 자연스런 발로로서 인륜, 곧 효(孝)·제(悌)·충(忠)과 같은 윤리 규범을 인간사회가 금수(禽獸)의 미개상태에서 개물성무(開物成務)의 문명사회로 진입하게 된 기본 지표로 간주하였다. 그 인륜으로 통합된 사회를 지지한 경제의 기본 형태는 균안(均安)의 이념으로 기획된 재분배경제였다.

그러했던 조상들의 전통 문명관이 부정되고 오늘날 형식적이나마 서유럽적 문명관이 지배적으로 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자연발생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20세기에 걸쳐 전개된 제국주의에 의한 폭력적 지배와 강압적 교육의 결과였다. 처음에는 동아의 소제국(小帝國) 일본으로부터, 나중에는 세계의 대제국(大帝國) 미국으로부터의 지배와 교육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상이한 두 문명이 교배하고 융합하는 과정이었다. 혼혈이라 하여 출생의 비밀을 부끄러워하거나 애써 감출 필요는 없다. 필자는 모든 문명은 그렇게 혼혈종으로 발전한다고 믿고 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유전자에는 이미 서유럽 기원의 문명소가 우성인자로 박혀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조상들이 열성인자만을 유전하였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제국주의 지배체제 하에서 수많은 피지배 민족과 문명이 소멸하고 말았듯이 유전자의 구조가 아주 다르고 또 열성이라면 융합은 불가능하거나 변종을 낳을 뿐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우리의 근·현대사가 그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전통 유전자 속에는 융합의 성공을 담보한 독자의 우성인자가 성숙해 왔으며, 그 복잡 미묘한 인자의 구조 속에는 근대 서유럽과 닮은꼴의 문명소가 실려 있었다. 그러한 전제에서 필자는 한국의 문명발달사를 추구함에 있어서도 자립적 개인, 가족, 사유재산, 분업, 시장, 사회의 자율적 편성 등을 문명의 보편적 요소와 척도로 수용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한 문명사적 관점에서 한국의 전통사회에 접근한 초기의 학자 한 사람을 들자면 1904년의 후쿠다 도쿠죠(福田德三)가 아닌가 싶다. 그는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상징시대(象徵時代) → 모형시대(模型時代) → 가설시대(假說時代) → 개인시대(個人時代) → 주관시대(主觀時代)’라는 발전단계론에 근거하여 근대적 개인시대가 성립하기 위해선 봉건제적인 가설시대를 교육기간으로 경과할 필요가 있지만, 그가 관찰한 러일전쟁 직후의 조선사회는 노예제적인 모형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가설시대가 성립하기 위해선 파밀리아(familia)의 성립이 요구되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고대적 씨족제의 공동담보가 경제단위의 기본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오늘날의 연구 수준에서 후쿠다가 범한 실증상의 오류를 지적하기는 어렵지 않다. 당시 그가 씨족이라고 보았던 것은 아득한 태고의 그것이 아니라 한참도 늦은 17세기 후반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종법원리(宗法原理)의 부계 친족집단이었다. 그 친족집단의 구성단위는 가부장적 직계가족이었다. 이 직계가족의 공동체적 결합을 두고 후쿠다는 태고의 씨족적인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러한 착각은 그 당시 제국주의 시대에 문명사회에 속한다고 자부하는 지식인이 자기보다 미개한 사회를 관찰할 때 통상적으로 범하는 오류이며 선입관이었다. 예컨대 조금 앞선 1884년에 엥겔스는 그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아일랜드에 대해 쓰기를 그 곳에는 “오늘날에도 인민의 의식 속에 씨족이 본능적으로 살아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는 후쿠다의 문제제기마저 모두 무효로 돌아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던진 질문의 기본 취지는 근대 문명의 주체로 자립적 개인이 성립하는 역사적 과정과 단계에 있어서 1904년 당시 한국인의 문명인으로서의 주소는 어디쯤 자리하고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그 질문에 훌륭히 대답하기 위해서는 한국사에서 씨족에서부터 개별 가경제(家經濟)가 자립하는 과정, 가경제와 친족 내지 촌락 공동체와의 상호연관, 그러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자립적 개인의 전망 등의 문제를 실증적으로 엄밀히 추구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근대 문명의 주체로서 자립적 개인이란 무엇인지, 또 자립적 개인만이 근대 문명의 주체인지, 그것은 과연 봉건제적 계약의 교육기간을 거쳐야만 성립되는지 등의 의심스런 가설을 해부하고 비판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수용하는 데까지 나아갈 필요가 있겠다.

그렇지만 지난 백 년간 그러한 방식의 진지한 답변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다 솔직히 지적하여 후쿠다의 질문은 일찍부터 기각되거나 무시되고 말았으며, 그는 악명 높은 식민사학의 원조로 단죄되었다. 그와 더불어 후쿠다가 제기한 문명의 요소들은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기원 전후의 국사에서부터 익히 존재해 온 것들로 너무나도 당연시되었다.

그러한 대응이 이루어졌던 데는 맑스주의 역사학의 공로가 가장 컸다. 1930년대부터 성립하기 시작한 이 역사학은,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편리하게도 모든 형태의 문명 요소를 계급과 국가로 간단히 치환해 버렸다. 계급과 국가가 모든 문명소를 총괄적으로 대변하는 문명의 상징이었다. 국가가 성립한 기원 전후부터 한국은 고대 그리스, 로마와 같이 노예제적 계급관계로 분열된 문명사회였다. 연후에 농노를 생산계급으로 하는 봉건사회와 국가가 발전하였다. 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체계에서 개인, 가족, 공동체, 시장과 같은 사회의 문명적 편성태(編成態)가 물어질 여지는 없었다. 맑스주의의 비극은 이 같은 문명론의 결여에서 그 진정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특히 해방 후 그들이 집권한 북한에서 그 병폐는 심각하였다. 그들은 제국주의에 의해 부식(扶植)되었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형태의 근대 문명을 파괴했다. 그 결과 주지하듯이 ‘수령체제’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기형적인 예속사회가 성립하고 말았다.

문명론을 결여하기는 근·현대사 연구에 있어서 또 하나의 축을 이룬 민족주의 역사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20세기 초 조선왕조의 패망과 식민지화의 위기 속에서 모색되기 시작한 이 역사학은 초창기 얼마간은 중세사학의 틀을 그대로 이어받아 민족사에 있어서 정통 왕조의 계열을 재구성하는 수준의 비과학성을 보였지만, 1930년대 이후 근대 역사학이 접목되면서 계급 간의 협동성과 개방적 국제주의를 가미한 이른바 신민족주의 역사학으로 전화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영향력 있는 사론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신구를 막론하고 민족주의 역사학의 기본 전제는 ‘한국인’ 또는 ‘우리 조상’은 유사 이래 혈연, 지역, 문화, 운명, 역사의 공동체로서, 곧 단일의 민족으로서 살아 왔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에서 계급이 수행한 역할을 여기서는 민족이 담당하였다. 다시 말해 여기서는 민족 또는 민족정신의 유기적 구현으로서 국가가 문명의 상징인 가운데 사회의 문명적 편성태가 고려될 여지가 전혀 없었음은 맑스주의 역사학에서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한국인이 유사 이래 단일의 역사공동체로서 단일민족이었다는 명제 그 자체는 아무래도 증명될 수 없는 신화에 속한다. 후술하겠지만 20세기 전반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자신의 대립물로서 그러한 신화의 성립을 유도하였다. 해방 후의 국민국가는 그 신화를 자신의 국사로서 수용하고 발전시켰다. 그러한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상, 신구를 막론하고 민족주의 역사학에서 종교적이라고까지 해도 좋을 강력한 도덕주의적 성향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앞서 소개한 바 일제 하의 근대사를 ‘선량한 주인’과 ‘강포한 도적’의 대립구도로 설정하고 있음도 이 계열의 역사학에서이다. 민족의 분단을 초래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도 이 계열의 역사학에서이다. 북한의 ‘수령체제’가 비록 세계사의 변종이라고 하나 언젠가는 다시 합쳐져야 할 동포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난은 삼가는 것이 예의바른 태도라고 여김도 이 계열의 역사학에서이다. 그렇게 민족주의 역사학은 대한민국을 초월해 있으며 궁극적으로 그 해체를 지향하고 있다.

문명사 개관

국사로부터의 체계적인 관심이 결여되어 있어 한국문명사의 이해에는 아직 너무 많은 공백이 있고 수많은 신화와 억측이 그를 대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하에서는 사회의 문명적 편성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가족, 사유재산, 시장의 세 분야에 한정하여 지금까지 필자 나름대로 정리한 한국문명사를 간략히 소개한다. 그밖에 촌락, 사회조직, 계급, 국가 등 다루어야 할 분야가 많이 있지만, 지면의 제약이 커서 다른 기회로 미룬다.

1) 가족

가족이라 하면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부모와 그 자식으로 이루어진 혈연공동체로서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로 알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그러한 가족 개념이 법제화되고 일반화된 것은 1910년대의 식민지기에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근대적 가족법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 19세기 말까지의 조선사회에서는 아예 ‘가족’이란 말이 없었으며, ‘가솔(家率)’, ‘가속(家屬)’, ‘가권(家眷)’ 또는 ‘식구’와 같은 말들이 그에 준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었다.

이들 생활용어가 함의하는 ‘가(家)’의 요소나 형태는 매우 애매하고 불확정적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순수 혈연관계만으로 구성된 가(家)는 오히려 드물고, 보통은 비혈연의 예속인이나 세대(世帶)를 포괄하는 복합적 구조였음이 전근대의 가(家)였다. 그리고 그것은 긴 역사에서 시대에 따라 그 구조를 달리하는 동태적 변화과정에 있었다. 기원 전후부터 19세기 말까지 국가에 의해 제도화된 가(家)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하면 1∼7세기의 연(烟), 8∼14세기의 정(丁), 15∼19세기의 호(戶)라는 세 가지 형태와 단계를 밟아 왔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 삼국시대의 연은 보통 6㎡ 전후의 타원형 반지하 움집에 사는 부부가족을 가리켰다. 민중의 주거가 반지하 움집임은 10∼14세기의 고려시대까지도 거의 보편적이었다. 3세기경 중국인의 관찰에 의하면 이들 연의 일상생활은 밤마다 집단 가무를 즐기는 등, 꽤나 원시적이었으며, 남녀 관계는 무질서하고 유동적이었다. 가족제의 그러한 특질은 이후 12세기에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의 사자에 의해서도 거듭 지적되고 있다. 삼국시대 연의 생활권역은 직경 10㎞ 전후의 읍락(邑落)이었다. 읍락에는 수장층인 호민(豪民)과 일반 성원인 하호(下戶)가 있었는데, 중국인의 관찰에 의하면 호민은 하호를 노복처럼 지배하였다. 이외에 연과 읍락 사이에 어떠한 사회조직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연이 상호간에 안정적인 관계와 조직을 보유하게 되었음을 알리는 최초의 증거는 7세기 말의 이른바 ‘신라촌락문서(新羅村落文書)’에 나오는 공연(孔烟)에서 찾아진다. 공연의 실체에 대해선 몇 개의 연들이 주로 혈연관계를 매개로 결합한 일종의 가(세대)공동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그러한 사회조직을 정(丁) 또는 정호(丁戶)라고 규정하였다. 대체로 말해 3년에 한 번 휴경하는 농법으로 평균 12결(結) 면적의 들판을 공동 점유하고 있는 평균 8개 연의 결합이 정이었다. 14세기 말의 고려왕조까지 국가는 이 정을 단위로 하여 세(稅)·공(貢)·역(役)을 수취하였다. 정은 반드시 혈연의 친족만으로 구성되지는 않았다. 비혈연인도 포함되었는데 이를 백정(白丁)이라 하였다.

다음 15세기 조선왕조부터는 호(戶)의 시대이다. 조선왕조는 독특하게도 인구와 토지를 분리하여 지배하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구래의 정을 파괴하였다. 새롭게 제도화된 호는 부부와 그 자녀, 그리고 노비와 고공(雇工)의 인적 구성으로 규정되었다. 구래의 정에 포함되었던 제(弟)·매(妹)·질(姪) 등의 방계친(傍系親)은 배제되었다. 오늘날 한국인의 지배적인 가족형태인 직계가족의 원형이 이렇게 성립하였다. 이 점에서 15세기 초 호 성립의 획기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단 한 가지, 아직 사위가 호의 구성원으로 인정되는 차이가 있었다. 그 때까지, 아마도 삼국시대부터, 친족집단을 구성하는 원리가 부계·모계·처계의 세 방면으로 다 열려 있는 가운데, 사위를 데리고 사는 솔서혼속(率壻婚俗)이 매우 광범하였다. 부계 친족집단이 성립하는 것은 성리학의 종법(宗法)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는 17세기 중반부터이다. 이윽고 18세기 전반에 이르러 사위가 호의 구성원에서 배제되었으며, 이로써 가부장제적인 부계 직계가족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 상당수의 노비와 비부(婢夫)·고공·투탁인(投託人) 등의 비혈연 예속인이 호 내에 협호(挾戶)로 편입된 경우가 많아 호 그 자체가 근대적 형태의 가족은 아니었다. 19세기 말 충청도 7개 군의 양안(量案)에 의하면 농촌 인구의 1/3이 여전히 비자립적인 협호의 처지에 있었다.

가(家) 성립의 전제가 되는 남녀의 성적 결합의 형태와 윤리에서도 단계적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12세기 초의 고려왕조는 헤어지지 않고 30년 이상 동거한 부부를 국가적 포상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렇게 그 때까지만 해도 평생해로의 동거율은 그리 보편적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 가운데 남녀가 복수의 배우자를 두거나 근친 간에 결합하는 혼속이 상하 계층을 막론하고 꽤나 광범하였다. 근친혼이 금지되는 것은 14세기 초 고려 충선왕에 의해서이며, 복혼(複婚)이 금지되고 단혼(單婚)이 법제화되는 것은 15세기 초 조선 태종대의 일이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꽤나 오랫동안 복혼의 유습은 끊어지지 않았으며, 상층 양반신분에서는 처첩제라는 변형으로 오히려 확산되는 추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유교적 교의와 가례가 사회 밑바닥에까지 침투하는 18세기 이후가 되면 단혼에 상응하는 정조율과 동거율은 상당한 수준의 성숙을 보여, 최하층 노비 신분에서조차 단혼으로 시종한 부부가 근 2/3의 비중을 점하였던 사례가 확인되고 있다.

18세기 이후에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가부장적 직계가족 형태의 가(家)가 하나의 경제단위로서 얼마만큼 안정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참으로 이야기하기 조심스럽다. 일례로 1856년 경상도 남해군 삼동면(三東面) 용동궁장토(龍洞宮庄土)에 속한 244개 농가 가운데 1881년까지 호명(戶名)을 유지한 농가는 스물이 못 되었다. 그렇게 변방 후진지대에서는 19세기 말까지도 소수의 상층 양반신분의 가(家)만이 한 곳에 오래 붙박이 하였고, 여타 서민의 가(家)는 여러 계기와 경로에 따라 자주 유동하는 불안정성을 특징으로 하였다. 18세기 이후의 가경제라 하더라도 지방별 및 계층별로 그 안정성에 큰 차이가 있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2) 사유재산

연(烟)이 가(家)의 기본 형태를 이룬 아득한 상고시대부터 토지가 사유재산이었다는 학설만큼이나 국사의 신화로서의 속성을 잘 보이고 있는 예를 달리 찾기는 힘들다. 고대국가가 토지를 자신의 것으로 간주했음을 알리는 최초의 증거는, 6세기 중엽 점령지의 농민을 ‘전사(佃舍)’라고 기록했던 신라의 한 비석에서 찾을 수 있다. ‘전(佃)’은 원래 중국 삼국기의 위(魏)나라에서 발생하였는데,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둔전을 나누어 주고 소작료를 수취한 관계를 말한다. 그 ‘전’이 한반도에 들어와서도 비슷하게 국가적 소작관계를 대변하였음을 ‘전사’의 ‘전’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이후 7세기 말의 ‘신라촌락문서’에서 공연의 경지가 ‘연수유답(烟受有畓)’으로 칭해지고 있음은, 통일신라가 이미 전국 토지의 상당 부분을 국가의 소유로 장악하고 있음을 잘 대변하고 있다. 이윽고 722년 통일신라는 전국의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로써 최초로 토지국유제가 공식화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정전이란 전술한 정호(丁戶)의 경지를 말한다. 그렇지만 이후 9세기의 두 비석문은 토지가 제도적으로 왕의 소유이긴 하나 동시에 자신의 소유이기도 함을 강하게 주장하는 두 귀족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그렇게 8∼9세기의 토지국유제는 왕권과 대립하는 귀족세력의 강세로 인해 아직 여러모로 미숙함을 보이고 있었다.

고려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토지국유제는 재차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전국의 토지는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으로 나뉘었는데, 공전은 왕에게, 사전은 귀족, 관료에 수조권(收租權)이 속한 토지를 말하였다. 그렇게 공과 사는 수조권 레벨에서 대립한 왕과 귀족의 관계를 대변하였으며, 토지에 대한 일반 백성의 관습적 권리는 아직 사적인 권리로 인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고려왕조는 토지의 자유로운 매매, 증여, 경작을 법률로 금하였다. 고려시대에 토지국유제가 확립되는 것은 왕권이 훨씬 강화된 12세기 초 예종대의 일이다. 당시 전국에 걸쳐 공,사전의 농민은 ‘전호(佃戶)’라고 규정되었다. 원래 그 말은 중국 송(宋)에서 사적 소작농의 뜻으로 성립한 것이다. 그 말이 고려로 넘어와서는 국가 지배 하의 백성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였으니,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중심과 주변 간에는 상당한 낙차가 있었던 셈이다.

주지하듯이 한국 토지제도사의 연구가 본격화한 1950년대 이래 근 50년간 이 고려의 전호는 중국 송에서와 같은 사적 소작농의 뜻으로 잘못 이해되어 왔다. 돌이켜 보면, 그로 인해 빚어진 역사상의 혼란과 도착(倒錯)은 그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던가? 그 점이 백일하에 더없이 명확하게 폭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사는 사유설을 정통으로 받들고 다른 이설을 용납하지 않고 있다. 원래 신화란 그러한 종교적 교의와 맹신에 가까운 집착으로 짜여지는 법이다.

토지, 곧 농지가 비인격적인 재화로서 매매, 상속, 증여되기 시작하는 것은, 다시 말해 토지가 사유재산으로 성립하는 것은 조선왕조의 초기인 15세기부터이다. 그에 관한 다른 무엇보다 훌륭한 증거로써 토지 관련 고문서가 전해 오는 상황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전하는 가장 오래된 토지의 상속문서는 1440년대의 것이며, 매매문서가 전하기 시작하는 것은 1490년대부터이다. 토지의 매매가 국가에 의해 공인되었던 것은 그보다 좀 앞선 1460년대의 일이다. 16세기가 되면 국가가 정한 토지매매의 절차마저 무시되기 시작하였다. 18세기가 되면 토지는 오늘날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일지일주(一地一主)의 사유재산으로 성숙하였다. 1720년대에 제작된 국가의 토지대장에는 왕조의 백성들이 ‘主’라는 자격으로 표기되었다. 이 단계에 이르러 토지를 국가의 소유로 간주하는 전통적인 통치 이데올로기는 거의 해체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19세기 말까지 조선왕조 하에서 사유재산제도가 성립한 정도를 과장해서는 곤란하다. 전술한 대로 왕조는 독특하게도 인구와 토지를 분리해서 지배하였다. 그 때문에 토지의 소유자가 누구든, 그들의 소유권리가 어떠하든, 그런 것들은 토지로부터 일정 양의 조세를 징수함에 만족하였던 조선왕조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유재산제도의 발전 정도는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경제주체들이 발생시킨 경제적 수익이 그들의 사적 권리로 귀속되는 정도를 결정하는 인민과 국가권력과의 정치경제적 관계에서 평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국가의 과세 권리가 세의 다과를 불문하고 자의적으로 행사된다면, 그리고 사적 경제주체들이 그러한 국가권력을 제어할 어떠한 수단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 사회에서 사유재산제도의 체제적 성립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실제로 19세기 말까지의 조선사회에서 유무형의 경제재(經濟財)에 대한 백성들의 권리는 국가와 관료의 자의적 침탈 앞에서 매우 불완전한 상태에 있었다. 재산을 모으는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은 관료가 되는 것이었는데, 이를 두고 19세기의 대학자 정약용(丁若鏞)은 관료들이 백성을 밭으로 갈아먹는다고 하였다. 국가와 백성 간의 그러한 관계가 온갖 장식을 벗어 던지고 벌겋게 그 정체를 드러낸 적이 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과세지조사(1898∼1904년)에서 고종황제는 일반 농민을 ‘시주(時主)’라 하여 토지의 ‘임시적 주인’으로 규정하였다. 당시 그는 국가의 주권자가 누구인가를 묻는 정치적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자 여지없이 토지국유제의 전통적 이념을 되살려 황제 자신이 전 국토의 본 주인임을 주저하지 않고 선포한 결과가 다름 아닌 ‘시주’였던 것이다.

3) 시장

10∼14세기 고려는 개경에 집주한 왕족·귀족·군인 등의 지배세력이, 대략 2천여 개로 추산되는 지방의 군(郡)·현(縣)·부곡(部曲)·향(鄕)·소(所)·처(處) 공동체를 계층으로 편성하여 지배하는 정치체제였다. 이 고려의 경제체제에 대해 12세기 초에 고려를 다녀간 송의 사신은 “주(州), 군(郡)의 토산은 다 관가의 공상(貢上)에 들어가므로 장사치는 멀리 나들이하지 않는다. 다만 대낮에 고을에 가서 각각 가지고 있는 것을 서로 바꾸는 것으로서 만족하는 듯하다”고 기술하였다. 고려를 다녀간 다른 사신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인들은 미(米)·포(布)를 화폐로 사용하였으며, 동전의 사용을 불편하게 여겼다. 고려의 경제체제, 더 정확히 말해서는 왕도(王都)에 집주한 지배계급의 생활물자를 공급했던 주요 경로는 국가적 공납제였다. 시장·화폐경제는 그 형태가 읍저(邑底)에 열리는 허시(墟市)로서 유치하였을 뿐 아니라 그 비중도 보잘것없었다. 단, 개경과 외국과의 교역은 꽤나 활발했던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13세기 후반 고려가 세계제국 원(元)의 속국으로 편입된 후 대외교역은 일층 커지고 화려해졌다. 그렇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국가적 공납제에 바탕을 둔 것이지 시장경제의 일환은 아니었다.

15세기 이후의 조선왕조는 이전의 고려왕조에 비해 보다 합리적으로 정비된 관료제적 집권국가였다. 지배세력인 양반관료들은 고려에서와 같이 서울사람들만은 아니고 상당 부분 농촌에 자신의 농장과 노비를 소유한 지주적 존재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의 생활자료가 공납제에 의해 조달되는 경제의 주요 형태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성리학을 국교로 하여 왕조를 개창한 정치세력들은 질박(質樸)한 자급자족의 농촌경제를 지향하였다. 개인에 의한 대외교역은 사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되고, 대외교역은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공무역만이 남게 되었다. 농촌의 장시(場市)도 한동안 폐지되었으며, 다시 열리기 시작하는 것은 15세기 후반부터이다. 뒤이은 16세기의 경제체제와 관련해서는 이문건(李文健)과 유희춘(柳希春)이라는 두 명의 고급관료가 남긴 장기간의 일기가 매우 구체적인 정보를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다. 두 고급관료의 경제생활에 있어서 국가로부터 지급되는 월급은 그다지 큰 의의를 지니지 못하였다. 그 대신 자신의 많은 사노비나 국가로부터 할당된 공노비로부터 수취하는 공물이 가장 커다란 수입원을 이루었다. 그와 더불어 같은 양반신분의 친척과 동료 관료들로부터 받는 선물도 못지않게 커다란 수입이었다.

요컨대 두 양반관료의 경제생활은 공물과 선물에 기초해 있었다. 다시 말해 경제인류학자 폴라니가 정의한 재분배(redistribution)경제와 호수(互酬, reciprocity)경제가 16세기 경제체제의 기본 형태를 이루었다. 시장경제의 비중은 그야말로 작았다. 예컨대 유희춘이란 관료가 서울생활 10년간 시장에서 재화를 구입한 횟수는 고작 70여 회에 그쳤다. 시장은 공납과 선물의 네트워크에서 제외된 하층민들이 생계를 위해 출입하는 장소에 불과하였다.

시장경제가 재분배와 호수경제를 대체하기 시작하는 것은 17세기 후반부터이다. 대략 반경 6km와 인구 1만 5천의 범위에 하나의 장시가 5일마다 규칙적으로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와 더불어 화폐가 미·포의 물품화폐에서 동전의 금속화폐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국가의 다종다양한 공물 수취도 쌀 일색으로 점차 통일되어 갔는데, 대동법(大同法)으로 불리는 이 재정개혁은 시장경제의 발전을 촉구하였다. 양반관료의 경제생활도 공납과 선물에서 시장으로 그 토대가 바뀌었다. 양반관료에게 매년 상당량의 공물을 바쳐야만 했던 노비신분의 농민들은 18세기에 걸쳐 거의 사라졌다. 농·공업에 있어서 상품생산과 시장교환은 제법 활발하였으며, 주요 상품마다 주요 특산지가 전국에 걸쳐 성립되었다. 대부분의 18세기 사람들에게 있어서 시장은 이미 불가결의 경제형태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장경제에서 자본주의적 경제형태가 발생하기에는 몇 가지 중대한 장애가 있었다. 그 하나로서 대규모 경쟁적인 해외시장이 결여되었던 시장조건을 들 수 있다. 일본과의 무역은 18세기 이후 일본이 주요 수입품이었던 백사(白絲)와 인삼을 성공적으로 국산화함에 따라 점차 축소되었다. 중국과의 무역도 정체를 면치 못하였으며, 더구나 그 무역에서 조선은 만성적인 적자였다. 그 결과 근대적인 통상이 개시되는 1876년 이전에 조선의 대외 무역의존도는 1%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그렇게 해외시장이 결여됨에 따라 농촌 소농사회에서 초기 자본주의적 공업형태가 조직될 여지가 없었다.

다른 중대한 장애는 국가적 재분배체제였다. 시장경제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경제생활에서 가장 중요했던 미·포 두 재화에 관한 한, 조선왕조는 그의 전통적인 재분배체제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른바 환곡(還穀)이라는 쌀의 국가적 재분배체제는 18세기 말까지 전국적 쌀 유통에 있어서 그 비중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고 있었다. 쌀의 전국적 유통에 있어서 시장경제의 비중은 국가적 재분배체제보다 적었다. 주곡(主穀)의 수급에 있어 조선왕조만큼 거대 규모의 재분배체제를 구축한 다른 나라는 찾기 힘들 것이다.

요컨대 17∼19세기 조선왕조의 경제체제는 시장의 비중이 늘고 있었지만 균안(均安)의 이념과 재분배체제에 기초한 도덕경제(moral economy)로서의 특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조선왕조도 끝까지 도덕권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전술한 대로 조선왕조가 변화하는 국제경제의 환경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면서 새로운 비교우위의 국가경쟁력을 모색하지 못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권력의 속성으로부터의 제약이 컸기 때문이다.


신화로서 민족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국제적 위상을 전제하면서 지난 세기의 전반기에 있었던 일제의 조선 지배가 남긴 역사적 의의를 간추린다면, 다른 무엇보다 ‘근대적 경제성장’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제도의 혁신’이 그 기간에 일제에 의해 수행되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일제가 한반도를 자신의 영토로 ‘영구병합’하기 위한 야심에 가득 찬, 그렇지만 처음부터 잘못 기획된, 프로젝트의 초기 투자였다. 어쨌든 ‘근대’가, 필자가 앞서 정의한 사회의 문명적 편성태로서의 ‘근대’가, 식민지기에 걸쳐 성립하였다.

가족이 국가로부터 부여된 신분과 직역(職役)의 단위임을 벗어나 오늘날과 같은 소규모 혈연공동체로 순수화한 것도, 그로 인해 장차 그 가족에서마저 자립적인 고독한 실존의 개인이 성립할 전망이 확보된 것도, 식민지 초기에 도입된 근대적 민법에 의해서이다. 토지소유가 그에 부속되어 온 온갖 정치적 상징을 불식하고 근대적 형태로 추상화하는 것도, 그러한 일이 지적 재산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생산요소에 걸쳐 두루 성립하는 것도, 일제에 의한 재산제도의 개혁에 의해서였다. 시장경제가 국가적 재분배체제로부터 해방되어 ‘보이지 않는 손’의 지휘 하에 자율적으로 운동하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자기유지적’인 ‘근대적 경제성장’이 개시된 것 모두 식민지 초기부터의 일이다.

앞서 명확히 하였지만, 식민지기의 그 같은 사회경제적 발전은 결코 제국주의에 의해 값싸게 베풀어진 문명의 시혜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이한 두 문명의 융합과정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식민지기를 넘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그 과정의 역사적 기초에는 19세기까지의 한국사가 가족·사유재산·시장의 여러 방면에서 이룩한 일종의 프로토(proto)문명의 작용이 있었다. 그렇게 오늘날의 한국형 근대는 토착문명과 외래문명의 벡터(Vector) 합성으로 성립하였다. 자주 오해되고 있기에 그 점을 재삼 강조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한국인들의 정신문화나 정치행위와 관련하여 더 없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민족’이라는 집단적 정체성 내지 그것의 정치적 표현인 민족주의도 엄밀히 말해 위와 같은 한국형 근대의 일환으로서 지난 세기에 걸쳐 만들어지고 성숙된 것이다. ‘가족’도 그러했다고 앞서 지적하였지만, 19세기까지의 한국인들에게 ‘민족’이란 개념과 그를 표현할 용어는 없었다. 원래 ‘족(族)’이란 왕족, 귀족, 사족과 같은 말에서 보듯이 지배신분을 가리키는 글자이다. 그 글자가 자신의 족당(族黨)을 보유하고 있지 못한, 그래서 아무런 힘도 없는 피지배신분인 ‘민(民)’과 결합하기는 조선시대의 언어·문자생활에서 발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민족’이란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러일전쟁 이후라고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한반도 주민의 집단적 위기감의 발로로써 그 말이 일본에서 수입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한편, 오늘날 민족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는 ‘동포(同胞)’라는 말의 조선시대의 쓰임새를 보아도, 모태를 같이 하여 직접 피를 나눈 형제를 가리키거나, 다같이 왕의 은덕으로 살고 있는 백성이라는 뜻이거나, 나아가서는 다같이 공자(孔子)의 교화를 받고 있는 동양인이라는 국제주의의 표현으로 쓰였을 뿐이다.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뜻으로 바뀐 것도 20세기부터이다.

이 같은 개념사를 넘어 인간관계의 역사를 직접 따져 보아도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예컨대 고려왕조의 경우 거란족의 후예라고 백안시되었던 재인(才人), 화척(禾尺)들이 인구의 상당 부분을 점하였다. 이후 조선왕조에서는 피가 더럽다고 여겨진 노비라는 비천한 신분이 인구의 3∼4할을 차지하였다. 그들의 피가 얼마나 더럽게 여겨졌는지는 부모의 한쪽만이 노비라도 그 자식을 노비로 귀속시켰고, 심지어 비첩과 관계하여 낳은 자기 자식조차 노비로 삼아 상속하였던, 가혹한 신분법제가 더없이 좋은 증거이다. 그렇게 인간들이 상이한 부류로 나뉘고 대립했던 사회에서, 같은 땅에 살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민 모두를 ‘동포’와 같은 큰 범주로 통합할 하등의 정치적 필연은 없었다.

그러니까 1920년대에 성립한 민족주의 역사학이 한국인을 두고 유사 이래 혈연·지역·문화·운명·역사의 공동체로서 하나의 민족이었다고 선언하였을 때, 그 위대한 선언은 본질적으로 신화의 영역에 속하는 명제였다. 한국사에 있어서 민족은 제국주의의 대립물로서 성립하였다. 인종에 기초한 차별만큼 인간 영혼에 깊은 상처를 안기는 것은 없다. 그 때문에 생긴 한국인들의 집단적인 상처는 그들이 공유하는 프로토 문명의 작용을 받아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의식으로 전화하였다. 예컨대 한국인이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는 혈연에 기초한 민족의식은 18∼19세기에 걸쳐 확산 일로에 있었던 한국형의 친족원리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설명하기 힘들 것이다. 한국형의 친족원리에 있어서 조상이 같은 동성의 사람들은 대수(代數)의 제한없이 모두가 하나의 친족이었다.

제국주의 하에서 비체계적으로 발생한 한국의 민족주의는 해방과 더불어 국민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바뀌었다. 국민국가가 체계적으로 고안한 민족상징을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새롭게 쓰기 시작한 민족설화에 귀를 기울이면, 지배민족이었던 일본에 대한 무한한 증오가 저음으로 울리고 있음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일본은 악의 화신이었다.” 지난 1993년 일본 동경에서 열린 양국 역사학자들의 모임에서 어느 국사학자가 거침없이 내뱉은 말이다. 일제의 지배정책이 한국형 근대의 성립에 있어서 어떠한 벡터로 작용하였던가에 대한 분석적 고찰은 그러한 정신세계의 국사학자들에겐 거의 신성모독에 가까운 일이었다. 일제의 지배는 시종일관 한국 민족의 수탈과 말살에 광분한 것 이상이 아니었다.

국사학자들에 의해 그러한 신화가 만들어지고 국민교육을 통해 널리 보급되기에 이른 한 가지 좋은 사례로써 일제가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통하여 전국 농토의 40%를 국유지로 수탈하였다는 국사교과서의 서술을 들 수 있다. 원래 그러한 주장은 식민지기의 과학적인 논저에서는 물론, 독립운동가들의 가장 선동적인 연설에서도 들을 수 없는 것이었는데, 1950년대에 일본 동경대학에 유학 중이던 이재무(李在茂)라는 한 청년에 의해 최초로 고안되었다. 그는 식민지기에는 일제의 탄압이 엄하여 역사의 진실이 밝혀질 수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아이디어는 20년 뒤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한 역사학자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에 따르면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수행한 목적은 처음부터 “한 손에 피스톨을 들고 다른 한 손에 측량기를 든” 관헌에 의한 토지수탈이었다. 근대 역사학의 이름으로 이처럼 경박하게 창출된 신화의 다른 사례를 찾기는 힘들다. 관련하여 필자는 이전에 다음과 같은 비판을 가한 바가 있는데, 여기서 되풀이한다. “이러한 연구가 어떠한 사례연구도 없이, 어떠한 실지답사도 없이, 그 이전 시대의 토지제도에 대해선 극히 불완전한 지식의 소지자들에 의해 책상머리에서 고안되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1987년 이후 ‘민주화 시대’의 도래와 함께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자 체제와 이념을 아주 달리하는 남과 북의 두 국가를 하나로 합치겠다는 정치세력과 대중운동이 성숙하고, 이어 1997년 김대중 정권의 성립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또 문화적으로까지 굳건한 헤게모니를 구축하게 된 최근의 현대사를 후세의 역사가들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러한 놀랄 만한 변화를 이끌어낸 최대의 공로자로 필자는 한국 현대의 신화체계로서 국사를 추천함에 주저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남쪽의 국가와, 필자가 보기에 일종의 재판농노제(再版農奴制)와도 같은, 국가이성의 발달 수준이 지배계급이 수도에 집주한 고려시대로 후퇴한 듯이 보이는 북쪽의 국가를 하나로 합치겠다는, 그야말로 엉뚱한 국가공학(國家工學)이 국민 대중으로부터 그토록 광범하고 헌신적인 지지를 이끌어 내었음은, 어느 유능한 정치지도자의 간교한 대중조작의 탓일 수만은 없고, 유사 이래 한국인은 하나의 민족공동체였다는 아무래도 증명될 수 없는 신화의 괴력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의 국사가 15∼19세기 조선왕조의 문민정치를 서유럽 근대의 민주주의와 거의 같은 수준의 문명으로 평가하고 있음은 국사의 신화로서의 속성이 더 이상의 여지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극한에 도달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필자의 한국사 이해에 있어서도 조선왕조는 그 기간에 성숙한 프로토문명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와 그 사회는 어디까지나 재분배에 기초한 도덕경제요, 도덕사회(moral society)이다. 도덕사회의 도덕율에도, 일체의 사회경제적 맥락을 사상해 버리면, ‘보석’처럼 빛나는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중세의 도덕사회가 근대의 경제사회로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약점은 인간의 도덕능력을 사람에 따라 달리 평가하고 차별하는 데 있다. 그러한 종교적 교의에 기초하여 인간의 사회적 지위는 세습적 신분으로 고정된다. 도덕사회의 재분배원리는 그러한 신분원리의 경제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고귀해 보이는 도덕률이 비열한 인간차별을 동반하였던 좋은 사례를 조선왕조의 17세기 전반까지의 역사에서 발견한다. 그 기간 조선의 성리학은 점점 그 비중이 증가하고 있는 노비인구의 더없이 혹독했던 신분예속을 정당화하였다. 이후 19세기 말까지도 조선의 성리학은 인간이 사회적으로 평등하며 그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근대사회의 공리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국사가 사회경제사적 맥락이나 심지어는 그 철학사적 의의까지 일체 배제하면서 조선왕조의 도덕정치를 서유럽 근대의 민주주의와 동질의 것으로 평가하고 있음은, 필자가 알고 있는 한, 현대의 역사적 사회과학이 허용하는 이성적 추론을 넘어선 일이다. 그래서 국사로부터의 그러한 주장을 신화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면서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휘감고 있는 일대 혼란은 무언가 새로운 형태의 시스템이 고안되지 않고서는 선진사회로의 진입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안기고 있다. 그 새로운 시스템의 기본 원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제도와 규범을 요구하고 있는가? 이제부터 한국사회가 그 해답을 모색하고 실천해 가는 과정은 어떠한 선생도 동반자도 없는 그야말로 고독한 구도자의 길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해답은 어디 다른 곳이 아니라 한국사회 내부에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있는 문명의 형태와 수준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가 소득 1만 불 전후의 중진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 경과했던 함정들보다 더 심각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 누구도 쉽게 통제하기 힘든 집단적 열정으로서 민족주의가 함정의 폭과 깊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가 조장하는 공동체적 평균주의는 정치적 포퓰리즘의 원천일 뿐 아니라 분배를 둘러싼 계급갈등을 필요 이상으로 증폭시킨다. 이웃 나라를 ‘강포한 도둑’이나 ‘악의 화신’으로 불러도 별다른 지적 저항이 야기되지 않는 문화라면, 선의의 국제협력이나 시장통합은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은 편이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민족주의의 부작용은 ‘동포’라는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상징을 내걸고 그야말로 반문명의 극치라 할 북한의 ‘수령체제’에 대한 비판을 봉쇄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지성이 그렇게 봉쇄되었다면, 선진국으로의 진입 가능성도 마찬가지로 봉쇄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이 글의 제목을 ‘국사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라고 다소 거칠게 단 것은 그러한 민족주의를 재생산하고 있는 제도적 장치가 국사이기 때문이다. 과학으로서 문명사와 비교사는 국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지성의 공백이 신화성의 민족 담론으로 채워지고 있음이 대한민국이 당면하고 있는 위기의 근원이다. 그러기에 국사는 해체되어야 하며 ‘한국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시대정신 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