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실패한 역사인가?1)
김일영 (성균관대학교 정외과 교수)
Ⅰ. 한국 현대사를 보는 두 가지 시각: 수정주의와 포스트 수정주의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존재, 아버지
현재 한국은 과거사 평가 문제를 놓고 ‘기억을 둘러싼 계급투쟁’을 벌이고 있다.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을 어떤 의미체계로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현재의 갈등에는 현 국면에서 경쟁?대립하고 있는 정치?사회집단들의 이해관계와 세력관계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란 좀더 살갑게 정의하면 앞선 세대의 삶의 발자취이며, 현대사는 부모나 조부모의 삶의 궤적이라 할 수 있다. 평범한 소시민이야 덜 하겠지만 적어도 ‘유명(有名)’인을 부모로 둔 사람들에게 현대사는 곧 아버지의 개인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에서 역사관, 즉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자식(후속 세대)이 부모(앞선 세대)를 어떻게 보고 받아들이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역사관을 부자간 내지는 세대간의 갈등문제로 환치시키면, 우리는 이것이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애증의 운명으로 얽힌 부자관계, 온갖 방식으로 아버지를 부인하고 죽이고 지우려하지만 결국에는 그 관계의 고리를 벗어던지지 못하는 아들의 운명은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왕? 이래 문학이나 예술의 영원한 소재거리였다.
이문열의 소설 ?시인?은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역모(逆謀)에 걸린 할아버지 때문에 벼슬길이 막혀 평생을 방랑하는 김삿갓(김병연)의 생애를 극화한 소설이다. 여기서 김병연은 평생 조부를 부인하고 지우려 하지만 결국에는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이 주는 보다 중요한 메시지는 김병연이 조부를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과 아들 사이에 닮은꼴의 문제가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아들에 의한 아버지 지우기와 찾기 작업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운명. 이것이 고대의 ?오이디푸스 왕? 신화로부터 최근의 ?시인?까지 수천 년 이어지는 인류 역사의 지적 축적이 주는 교훈이다.
아버지 지우기에만 익숙한 수정주의자들과 ‘386세대’
1980년대 이후 한국 현대사 연구는 커다란 전환을 보였다. 이 무렵 ‘커밍스와 그의 아이들’(Cumings and his children)을 중심으로 분단과 한국전쟁의 기원을 새롭게 조명하는 연구가 붐을 이루었다. 이 과정에서 분단과 전쟁의 책임을 소련과 북한(김일성)에게서 찾던 ‘전통주의’(traditionalism)는 쇠퇴하고 미국과 남한(이승만)에게 더 많은 책임을 지우는 ‘수정주의’(revisionism)가 등장했다.
‘수정주의’는 광주라는 원죄(原罪)를 공유한 미국 및 군부지배세력에 대한 사회적 반감과 어우러지면서 1980년대 이후 연구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한국 현대사 연구의 지적 헤게모니는 수정주의자들, 즉 커밍스의 아이들에게 장악되었다. 이의 세례를 받은 통칭 ‘386세대’들은 교육과 대중매체 및 생활현장에서 수정주의적으로 해석된 한국 현대사를 젊은 세대들에게 급속하게 확대 재생산시켰다.
한국 현대사 연구에서 수정주의자들의 공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한국 현대사에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어두운 면을 많은 1차 자료를 동원해 치밀하게 연구함으로써 그곳에도 볕이 들게 했다. 이들의 연구가 아니었으면 역사가 되지 못했을 수 있는 많은 사건들이 이들 덕에 역사에 편입되어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이들의 노력이 이 정도에 그쳤더라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정주의자들과 ‘386세대’는 한국 현대사 전체를 그들의 눈으로 재해석하려 들었다. 그들에게 한국 현대사는 반민중, 반민족, 반민주의 역사였다. 그들에게 우리 현대사는 오욕의 역사이고, 지우고 싶은 대상이며 다시 쓰고 싶은 대상이었다.
이 점에서 수정주의자들과 ‘386세대’는 아버지 지우기에만 너무 익숙한 것 같다. 그들은 아버지 죽이기에만 골몰하여 과거사 청산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를 ‘살부계’(殺父契)의 일원으로 만들고 있다. 한승원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에 나오는 얘기다. 일제 하에서 친일파를 부모로 둔 자식들이 스스로 자기 아버지를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서로 다른 사람의 아버지를 해치워 주는 살부계를 조직했다는 것이다. 허구이지만 끔찍한 얘기다. 그런데 최근 과거사 청산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권, 시민단체, 언론, 연구자들이 벌이는 이전투구와 남의 집 족보 캐기를 보고 있노라면 이들이야말로 합심(?)해서 살부계를 조직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남의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나섰다가 자기 아버지마저 죽임을 당하는 세상, 의도치 않게 서로의 아버지를 죽여주는 세상, 누가 봐도 결코 정상은 아니다. 일찍이 버크(E. Burke)는 프랑스 혁명을 열병에 비유했는데, 지금 우리 사회도 유사한 열병을 앓고 있다. 병인(病因)은 여러 가지겠지만, 아버지 지우기에 치우친 수정주의자들과 ‘386세대’의 역사관도 그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포스트 수정주의의 대두
1980년대 말부터 국내외 조건이 반전(反轉)되었다. 국내적으로는 민주화가 진척되었고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가 붕괴되었다. 다행히 1990년대 중반 이후 사회과학을 중심으로 한 일부 연구자들 사이에서 민주화와 탈냉전의 흐름을 연구에 반영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그들은 이러한 변화를 격동과 흥분 속에서 보낸 1980년대를 성찰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탈냉전은 연구자들에게 사회주의권의 자료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써 이러한 성찰을 뒷받침할 자료를 제공했다. 그들은 구(舊)소련이나 중국의 자료를 열람함으로써 분단과 전쟁의 책임을 미국과 남한(이승만)에게만 돌리던 불균형을 어느 정도 시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포스트 수정주의(post-revisionism)’의 움직임 속에서 지난 날 격정과 흥분 속에서 한국 현대사 연구로 침윤되었던 편향적 ‘거품’이 어느 정도 빠지게 되었다.
포스트 수정주의가 보는 한국 현대사
포스트 수정주의 입장에서는 지난 60여년의 한국 현대사를 국가건설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현재 산업화와 민주화 양자를 병행발전 시키면서 각각을 고도화 내지는 심화시키는 단계에 처해 있다고 본다. 수정주의자들 및 ‘386세대’는 미시적, 일국(一國)적, 도덕(규범)적인 시각에 사로잡혀 한국 현대사를 부정 일변도로 보는데 반해, 포스트 수정주의는 좀더 거시적이고 비교사적(comparative historical) 시각에서 한국 현대사를 균형 있게 보려고 애쓰고 있다.
이런 포스트 수정주의의 입장에서 여기서는 세 가지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대한민국 수립을 어떻게 볼 것인가, 둘째, 1950년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마지막으로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세 가지 문제이다.
Ⅱ. 대한민국 수립을 어떻게 볼 것인가?
미국과 이승만에게 전가되는 단독정부 수립의 책임
‘수정주의자’들은 분단, 즉 단독정부(이하 단정) 수립의 책임을 미국과 이승만에게 돌리고 있다. 커밍스에 따르면, 1945년 말부터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냉전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미군정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좌파의 힘에 맞서기 위해 그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면서 우파와 연합하여 남한에 독자적인 행정기구(남조선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전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은 빨라야 1946년 초(케난(G. Kennan)의 ‘긴 전문’(long telegram)이나 처칠(W. Churchill)의 ‘철의 장막’(iron curtain) 연설), 공식적으로는 1947년 초(트루먼 독트린, Truman Doctrine)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그 보다 수개월 내지는 1년 이상 앞서 미군정 주도로 ‘때 이른’ 냉전이 개시되었다는 것이다.
단정 수립의 또 다른 주역으로 비난받고 있는 사람은 이승만이다. 그는 1946년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정 수립도 가능함을 처음 언급했다. 비록 그보다 한 달 전 제1차 미소공위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지만 이 시점의 주된 쟁점은 여전히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여부였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누구보다도 먼저 단정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고, 그 발언은 그에게 단정수립의 ‘주범’이라는 올가미를 씌우는 계기가 되었다.
북한에서 먼저 시작된 단정 수립 움직임
그러나 단정 수립 움직임이 먼저 노골화된 것은 사실은 한반도의 북쪽이다. 소련은 해방된 지 한달 남짓 지난 1945년 9월 20일 이미 북한에 별개의 정부조직을 세울 결심을 굳히기 시작했다. 이 날 스탈린(J. Stalin)은 “반일적이며 민주적인 정당?사회단체들의 광범위한 동맹에 기초하여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다. 이것은 민족주의 우파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련이 점령한 북한에 별개의 중앙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으로 보기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에 따라 소련 점령군사령부는 10월 8일부터 10일 사이 북한 지역의 행정을 담당할 한국인 중앙행정기구를 창설하기 위한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평양에서 열었다. 이어서 13일까지는 북한 지역에 별개의 공산당을 만들기로 최종 결정한 ‘서북5도 당대회’가 열렸다. 그 후 많은 중요한 일들이 일어났다. ?이북5도행정위원회?가 설립되고 산하 조직으로 10개의 행정국이 창설되었으며,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만들어졌고, 소련에 의해 북한의 지도자로 선택된 김일성이 군중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며, 조만식을 위시한 ?조선민주당? 계열은 점차 배제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북5도행정위원회?와 10개 행정국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북한에 이미 별개의 정부가 들어섰다는 조짐으로 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지고 토지개혁과 중요 산업 국유화 등을 골자로 하는 ‘민주제개혁’이 수행되었으며, 이듬해 2월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까지 창설되었다. 1946년 초 북한에서 나온 문건을 보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출범을 ‘우리의 정부,’ ‘인민의 정권’이라고 지칭하면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들 스스로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인정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민주기지노선? 또는 ?민주기지론?이라는 용어가 구체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립되고 북한 지역에 별개의 행정조직이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이 노선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48년 3월 김일성은 제2차 당 대회의 보고에서 “소련군이 점령한 38선 이북 지역이 혁명을 위해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곳에서 먼저 혁명을 수행하여 북한 지역을 ‘민주기지’로 만든 후에 전체 조선으로 혁명으로 발전시키자”는 요지의 연설을 하는데, 이러한 ?민주기지론?의 내용은 이미 1945년 후반부터 북한에서는 실천에 옮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미소 합의와 좌우 단결 없는 신탁통치는 비현실적
신탁통치(이하 탁치)를 둘러싼 미소와 남북한 및 남한 내의 좌우간의 대립은 남북한에 별개의 정부가 들어서는 데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이것은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이 한국에 알려지면서 시작되었다.
이 결의사항의 골자를 추려보면, 우선 조선임시정부의 수립을 돕고 그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를 설치한다. ?미소공위?는 조선의 민주적인 정당?사회단체들과 협의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 후 ?미소공위?, 조선임시정부, 민주적인 정당?사회단체의 3자가 협의하여 조선에 독립 국가를 수립할 방안을 작성한다. 이 제안은 미, 영, 중, 소 4개국 정부에게 제출되어 이 국가들이 최고 5년 기한으로 탁치를 실시할 협약을 작성함에 있어 참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구 자체로만 본다면 좌파의 주장처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사항은 이용할만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특히 거기에 비록 일정 기한의 탁치를 거치더라도 임시정부를 거쳐 통일된 독립정부로 나아가는 방안이 담겨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세력관계나 미소 및 좌우간의 이해갈등 등을 고려한다면 이것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측면이 적지 않았다. 이것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했다. 남한과 북한의 좌우세력은 정파적 이해보다는 민족적 대의에 입각해 서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어야 했으며, 미국과 소련도 자국의 이해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서로 양보하는 자세를 가졌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령에 따라 단독정부를 수립할 준비가 이미 상당 부분 갖추어진 가운데 우파인 ?조선민주당? 계열은 힘을 잃고 소련에 우호적인 좌파적 정당?사회단체들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반면 남한에서는 좌우가 극심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미군정은 우익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력 면에서 우위인 좌파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미국과 소련은 과연 서로 협조했는가? 1946년 3월 20일부터 5월 8일 사이에 열린 1차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를 놓고 본다면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이 위원회는 본의제인 조선임시정부 구성 문제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미소 양국은 두 달 동안 자신들과 협의를 벌일 조선의 민주적인 정당?사회단체를 선정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입씨름을 벌이다가 무기한 휴회에 들어가고 말았다. 소련 군정의 대표는 반탁행위를 한 정당이나 단체는 협의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고, 미군정의 대표는 그것을 의사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비난하다가 ?미소공위?가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소련 군정은 북한을 이미 좌파 일색으로 만드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북한에서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정당?사회단체를 협의대상으로 선정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나 남한은 사정이 달랐다. 우파는 반탁이었고 좌파는 찬탁이었기 때문에 미군정으로서는 협의대상으로 삼을 정당?사회단체를 선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우파는 격렬하게 반탁운동을 하면서 협의대상으로 선정되기를 거부하고 있었고, 그렇다고 자신들과는 맞지 않는 좌파 정당과 단체를 협의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는 것이 미군정의 사정이었다. 여기에 소련 군정이 나서서 반탁을 하는 정당?사회단체는 협의대상으로 선정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미군정의 입장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사항의 이행 여부를 둘러싸고 가장 중요한 변수 중 하나인 미소의 협조가 결코 쉽지 않음이 ?미소공위?를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사항이 부딪힌 가장 큰 난관은 그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이었다. 비록 그것이 조선이 독립에 이르는 합리적인 절차를 담고 있다고 할지라도 오랜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반년이 채 안된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기에는 정서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그들에게 4개국 탁치란 또 다른 식민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좌파의 ‘3상회의 결의사항 전폭 지지’라는 주장은 그들의 본 뜻과는 달리 국민들에게 ‘찬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탁치 문제를 계기로 해방 직후부터 압도적 우위를 점하던 좌파로부터 국민들이 점차 이반되기 시작했다.
단정 수립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차선의 선택
1947년 트루먼 독트린 발표 이후 미소간의 냉전이 본격화되었다. 같은 해 ?미소공위?가 또 한 차례 열렸으나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이제 한국 문제는 미국과 소련의 손을 떠나 유엔으로 이관되었고, 거기서 유엔 감시 하에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결의되었다. 그러나 소련이 이 안을 거부함으로써 결국 유엔 감시 하에 남한만 총선을 치르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어 북한에서도 9월 9일 별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분단이 공식화된 것이다.
이렇게 남북한에 별개의 정부가 들어선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특히 정읍 발언으로 단정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는 이승만의 단정노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승만의 단정노선을 비판적으로 보는 논리의 이면에는 통일정부를 수립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의 회한이 깔려있다. 이 입장에서 볼 때, 1948년 8월 15일 탄생한 남한은 통일국가가 아니라 분단국가였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근대 국민국가, 즉 ‘결손(缺損)국가(broken state)’가 생겨난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이승만은 결손국가 탄생의 주역으로서 반민족적인 인물로 평가될 수밖에 없으며, 통일, 즉 근대 국민국가의 완성이 지상과제로 제기된다.
당시나 지금이나 통일정부 수립의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해 부인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만 당시의 국내외적 조건에서 그것이 실제로 가능했겠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당위성과 현실성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통일정부를 수립한다고 할 경우 통일의 내용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견이 서로 갈릴 수 있다. 자본주의체제를 염두에 둘 수도 있고 사회주의체제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중도(중립)적인 체제가 옳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냉전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독트린 발표로 시작되어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끝났다. 한국에서의 분단과 단정수립은 이러한 냉전의 세계사적 전개와 관련시키지 않고는 그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승만의 단정노선은 냉전에 저항하기 보다는 미국에 편승하여 남한에 먼저 정부를 세우고, 그것을 토대로 북한을 통일하자(북진통일)는 2단계 전략의 일환이었으며, 냉전의 종언을 지켜본 현시점에서 볼 때 그것은 최선은 아니지만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차선의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냉전에 대한 비교사적 고찰
1947년 냉전이 시작되자 모든 나라들은 선택을 강요받았다.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진영과 소련 주도의 사회주의진영 중 어느 한쪽에 가담할 것인가 아니면 둘 다 거부하고 독자적인 길을 갈 것인가가 이들에게 주어진 선택지였다. 미?소 중 어느 한 블록에 가담하는 것은 선택의 내용이 무엇이든 냉전 질서에 순응하는 길이었다. 반면 독자노선을 택하는 것은 양자택일적인 냉전 질서 자체에 저항하는 길이었다.
저항에 나선 나라들은 많지 않았다. 독자노선을 택한 나라로는 유고슬라비아,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드골 치하(1958 - 1969)의 프랑스 등이 있었다. 이 중 냉전 초기부터 독자노선을 취한 나라는 유고슬라비아 정도였다. 유고슬라비아는 대독(對獨) 레지스탕스 운동의 영웅인 티토(Tito)가 자신의 폭넓은 국내적 지지기반을 토대로 1947년경부터 소련에 대해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나머지 국가들은 적어도 1950년대 후반에 가서야 이런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중소분쟁으로 사회주의권이 균열하면서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등이 중심이 되어 비동맹운동이 시작되었고, 유럽에서는 드골이 ‘위대한 프랑스’를 내세우며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비동맹운동과 드골의 독자노선은 미?소 중심의 패권주의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수렴했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순응의 길을 택해 미?소 양 진영 중 하나에 가담했다. 선택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고, 강요된 경우도 있었지만, 그 구분이 애매하여 자발적 강제이거나 강제적 자발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피점령국의 경우였다. 그 중에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점령당한 독일, 오스트리아, 일본 같은 전범국(戰犯國)도 있고, 전범국의 피식민지였다가 연합국에 점령당한 한국 같은 나라도 있었다. 또한 독일, 오스트리아, 한국처럼 분할 점령을 당한 나라가 있는가 하면, 일본처럼 단독 점령을 당한 나라도 있었다. 미국이 단독 점령한 일본이 냉전이 시작되면서 자본주의진영에 편입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분할점령을 당한 국가들은 점령 주체가 복수였기 때문에 어느 한 진영에 편입되기가 쉽지 않았다. 이 경우 국가가 쪼개지면서 각각이 서로 다른 선택을 하는 경우(독일, 한국)도 있고, 선택을 거부하고 중립국으로 남아 분단을 피한 경우(오스트리아)도 있다.
단정노선과 민주기지론(1): 기능적 등가성
한국의 경우로 돌아오자. 전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에 대해 각국이 취했던 순응과 저항의 태도는 한국 내부에서 모두 나타났다. 이승만의 단정노선은 미국 중심의 냉전질서에 편승하는 것이었고, 김일성의 민주기지론은 소련 중심의 냉전질서에 편승하는 것이었으며, 중간파의 남북협상론은 냉전질서를 거부하고 독자노선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의 단정노선과 김일성의 민주기지론은 남북한에 별개의 정부가 수립된 후 각각 북진통일론과 남진통일론(국토완정론)으로 이어졌다. 이 점에서 이승만과 김일성은 모두 냉전에 편승하여 2단계 통일방안을 추구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중간파는 남북협상을 통해 남북한에 별개의 정부가 들어서는 것 자체를 저지하고 곧바로 통일수립의 수립을 추구하는 노선이었다.
중간파의 노선은 명분은 있으나 냉전이 본격화된 초기에, 분할점령을 당한 나라에서, 세력이 크지도 못한 중간파가 성공시키기에는 때 이른 시도였다. 앞서 밝혔듯이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아도 냉전질서 자체에 대한 거부와 저항의 움직임은 그것이 다소 이완조짐을 보이는 1950년대 후반에야 등장했다. 오스트리아는 분할점령을 중립화 통일로 극복한 유일한 나라인데, 그것 역시 10여년의 점령기간을 거친 후인 1955년에야 가능했으며, 온건 사회민주주의자인 칼 레너(K. Renner)를 중심으로 민족 내부의 단결을 도모한 후 점령국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볼 때 1940년대 후반 시점에서의 한국 중간파의 협상노선은 냉전의 세계시간에 비추어 볼 때 너무 조숙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남한에서 이런 맥락을 잇는 움직임은 1950년대 후반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전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질서 자체를 거부하는 비동맹운동이 고조된 때에 등장했다. 이 점에서 중간파의 남북협상론에 비해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냉전의 세계시간과의 간극은 훨씬 적었다. 그러나 결과는 별로 다르지 않았다. 조봉암 역시 이데올로기적 분단 상황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결국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했고 분단된 한국에서는 세계적 차원에서의 냉전 이완도 별 효과를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에 편승하여 단정을 수립했고, 김일성은 소련에 편승해 ‘민주기지’를 구축했다. 남북한에 별개의 정부가 수립된 후 각각은 북진통일론과 남진통일론(국토완정론)으로 이어졌다. 이 점에서 양자는 서로 우열을 따지기 어렵다. 이승만의 단정노선과 김일성의 민주기지론 그리고 이승만과 김일성의 북진 및 남진통일론은 남북한에서 기능적 등가물(機能的 等價物, functional equivalent)로서 작용했다. 단정노선은 남한판 민주기지론이었고, 민주기지론은 북한판 단정노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수정주의’는 김일성의 민주기지론에 대해서는 별로 비판하지 않으면서 이승만의 단정노선에 대해서는 유독 인색하게 평가하고 있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이들은 어떤 논거에서 이렇게 차별적으로 평가하는지 궁금하다.
단정노선과 민주기지론(2): 결과적 차이
이승만과 김일성은 똑같이 냉전질서에 편승했지만 선택의 내용은 미국과 소련으로 정반대였다. 두 사람의 노선은 처음에는 남북한 양쪽에서 기능적 등가물로 작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노선은 점차 차별성을 드러냈고, 냉전이 끝난 현시점에서는 우열이 완전히 드러났다.
두 노선 사이의 첫 번째 차이는 이승만의 단정노선은 실제로 북진통일론으로 나아가지 못했지만,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일으켜 민주기지론을 남진통일론(국토완정론)으로 현실화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이승만의 단정노선은 미국의 정책방향과 일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실현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북진통일론은 미국의 냉전정책의 기본틀인 봉쇄(를 통한 현상유지)와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허용될 수 없었다. 미국은 이승만의 단정노선이 북진통일로 진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미합의의사록?을 통해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장악했고, 주한미군을 서울 북방에 주둔시켜 남북한 모두에 대해 인계철선 역할을 하도록 했다. 반면 소련은 김일성의 민주기지론을 허용했고, 더 나아가 남진통일론도 허락했다. 그러나 미국의 대대적인 개입을 보고 소련은 곧 실수를 깨달았으며, 한반도의 분단이 38선이 아니라 휴전선을 통해 원상회복된 후 다시는 이런 시도를 허락하지 않았다(1970년대 중반 김일성은 남베트남의 패망을 바라보면서 남한을 다시 한번 밀어붙일 생각을 했다. 그는 “(남한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이요, 얻는 것은 조국통일”이라고 하면서 남한 해방을 주장했지만, 중국과 소련이 이에 협력하지 않음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승만과 김일성 노선 사이의 또 다른 차이는 냉전의 종언으로 드러났다. 냉전이 사회주의의 붕괴로 끝나는 것을 지켜본 현시점에서 자본주의진영에 가담한 이승만의 단정노선과 사회주의진영에 가담한 김일성의 민주기지론 사이의 우열은 분명하게 판가름이 났다. 물론 역사에서 지나친 결과론적 평가는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명백히 결과가 드러난 경우 그것을 완전히 도외시할 수도 없다. 인간의 문제는 인위적 실험이 어렵기 때문에 현실에서 나타난 결과가 실험을 대신해 줄 수도 있다.
후쿠야마(F. Fukuyama)의 ‘역사의 종언’에 대한 동의여부와 무관하게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아무도 부인하기 어려운 공통된 가치이자 목표가 되고 있다. 이승만 정부가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꽃피운 것은 분명 아니다. 당시 정치는 권위주의적이었고, 시장은 경제를 움직이는 부분적 메커니즘에 불과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권위주의가 전체주의보다 나으며, 부분적으로 작동할지라도 시장이 전면적인 통제와 계획보다는 효율적이라는 점이다. 권위주의와 부분적 시장 속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시장이 꽃필 여건이라도 만들어지지만 전체주의와 통제경제 하에서는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이 점에서 오늘날 전체주의적 북한의 곤궁은 김일성의 민주기지론에 뿌리를 두고 있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이승만의 단정노선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Ⅲ. 1950년대: 불임(不姙)인가 맹아(萌芽)인가?
1950년대는 대개 잿빛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전쟁, 궁핍, 지저분함, 무규범, 퇴폐, 혼란, 독재 등이 우리에게 연상되는 이 시대의 이미지이다. 이 시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에 의해 내동댕이쳐졌다는 상실감 속에서 방향을 잃은 채 살아갔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앞선 가운데 하루하루의 생존이 문제가 되던 때였다. 이를 가리켜 이문열은 잔혹한 ‘불임(不姙)의 세월’이라 했고, 이범선은 조물주의 ‘오발탄’들이 행선지를 모르는 채 떠다니는 시기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김수영은 당시 지식인들의 정신세계를 “알맹이는 다 이북 가고 여기 남은 것은 찌꺼기뿐”이라는 자학적 상태로 묘사했다.
이러한 암울함은 일차적으로는 전쟁의 상흔이 워낙 깊었던 탓이다. 하지만 전후 이어진 정치사회적 혼란과 무기력함도 이런 어두운 이미지를 우리에게 각인시키는데 일조(一助) 했다. 특히 1950년대의 사회적 무기력함은 1960년대 이후의 역동성과 대비되면서 이 시기를 더욱 어두운 색깔로 덧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근자에 들어 1950년대에서 이후 시기의 싹을 발견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1950년대를 건너뛰어서는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가 보여준 정치경제적 역동성을 설명할 수 없다. 1960년 4?19월 혁명 이후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운동은 끊임없는 탄압과 좌절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1961년 군사쿠데타 이후 군부엘리트가 주도한 위로부터의 산업화는 보기 드문 역동성을 과시했다. 이러한 두 과정이 1950년대와 무관하게 설명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1950년대를 더 이상 한국 현대사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로 취급하지 말고, 바로 거기서 이후 시기의 맹아(萌芽)를 찾아보자는 움직임이 최근 일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자료를 통해서 본다면 1950년대는 불임의 세월만은 아니었다. 1953-1960년 사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4.9%로 비슷한 수준의 후진국들의 평균성장률 4.4%를 조금 상회했다. 이 시기 원조자금으로 건설된 사회기반설비는 1960년대 이후 산업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해방 당시 13세 이상 인구의 80%가 어떤 형태의 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1952년부터 실질적인 의무교육이 시작된 결과 1959년에는 순문맹율이 22.1%대로 낮아졌다. 같은 기간 고등교육 이수자도 크게 증가함으로써 1960년대 이후 노동집약적 산업화의 밑바탕이 되는 양질의 풍부한 노동력의 풀(pool)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 산업화를 이끌어 갈 엘리트 관료들이 재무부와 부흥부(復興部) 주변에 속속 충원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런 점에서 이 시기는 1960년대 이후 꽃피는 역동성의 싹을 회임(懷妊)한 시기였다.
Ⅳ. 박정희 시대, 어떻게 볼 것인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찬반논리와 쟁점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한국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런 발전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문제를 둘러싸고는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다.
한편으로는 비록 박정희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긴 했지만 국민을 절대빈곤으로부터 구하고 국가의 경제적 위상을 드높였다는 점에서 당시 성취된 경제발전을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 입장은 결과론적 시각에서 박정희 시대에 추구된 경제발전전략 - 외자의존?수출지향?국가주도 - 이라든지 경제성장을 위해 정치발전과 통일을 잠시 접어두자는 ‘방법론적 유보’(선성장 후분배 또는 선성장 후통일)론에 대해서도 당시 시대여건에서 효율성 추구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절차와 과정을 보다 중시하고 삶의 질적 측면을 우선시 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결과론적 논법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 입장은 박정희 정권이 지닌 태생적(胎生的) 한계 - 친일경력이라든지 쿠데타를 통한 집권 등 - 로부터 그의 정당성을 문제 삼으면서, 당시의 발전전략이 초래한 대외종속성?불균형성?반민중성과 방법론적 우회 전략이 지닌 반민주성과 반민족(통일)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들이 볼 때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발전이나 분배의 개선과 함께 갈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참여와 분배, 그리고 통일이 없는 성장은 무의미하며, 진정한 발전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두 입장은 1960-70년대 친(親)체제(또는 산업화) 세력과 반체제(또는 민주화) 세력의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다. 산업화 시기에는 산업화를 담당한 세력의 논리가 반대파인 민주화 세력의 논리를 압도했고, 민주화 이후에는 거꾸로 후자가 전자를 구축(驅逐)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일반인들은 대개 박정희 정권이 ‘경제는 잘 했는데 정치는 못했다’는 식의 편의주의적인 양가(兩價)의 논리를 지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는 세 가지 쟁점, 즉 민주화와 산업화 사이의 관계, 경제발전의 원동력, 그리고 발전에 대한 가치평가라는 세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박정희 시대를 평가해 보겠다.
Ⅳ-1. 정치발전(민주화)과 경제발전(산업화) 사이의 관계
세 가지 입장
박정희 정권을 둘러싼 여러 쟁점 중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문제는 ?정치발전과 경제발전 사이의 관계?이다. 그것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며,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는 ‘항상’ 병행가능한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문제를 보다 쉽게 표현하면, 박정희 정권이 ?경제는 잘 했는데 정치는 못했다?는 식의 우리 사회에 보편화된 인식이 과연 옳은 것인지 또는 그런 인식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대략 다음 세 입장이 있다.
첫째,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양립가능하며, 따라서 민주적 경제발전이 가능하다. 단기적으로는 개발독재나 권위주의적 발전국가 방식이 가시적인 경제발전의 성과를 낳는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개발방식이 남기는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따라서 다소 더디더라도 정치적 민주주의 및 경제적 분배개선과 함께 가는 발전노선을 추구해야 한다.
둘째,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양립은 이론적으로는 주장 가능하다. 하지만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양자를 성공적으로 병행추진 한 예를 찾기 어렵다. 이 점에서 산업화 초기단계에서는 자본주의적 경제발전과 ‘권위주의적 발전국가’ 사이에 ‘선택적 친화성(elective affinities)’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이 논리를 산업화가 성숙단계에 들어선 현재에까지 연장하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며 정략적이다.
셋째, 박정희 식의 개발독재는 그 당시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경제성장을 위해 바람직했으며, 그 유효성과 필요성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는 두 번째 입장에 서서 이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산업화와 민주화의 균형발전은 모든 나라들이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소망하는 것이 ‘항상’ 실현가능한 것은 아니다. 경제발전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진행된 나라에서는 민주주의를 병행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그러나 이러한 병행발전이 ‘항상’ 가능한가는, 다시 말해 산업화 초기 단계에도 이러한 병행발전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김대중 정권은 출범하면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모토로 내걸었고, 노무현 정권 역시 이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간에 이루어진 경제발전의 성과와 수준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지극히 타당하며 현실적인 목표이다. 그러나 이 목표를 산업화 초기 단계인 박정희 정권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시야를 한국에만 두지 말고 좀더 넓힐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비교사적 관점에서 박정희 시대의 발전경험을 다른 나라의 그것과 견주어볼 때 그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대화되면서 좀더 객관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론적으로 합의되기 어려운 쟁점
산업화와 민주화 사이의 관계는 일찍이 19세기의 맑스(K. Marx)와 베버(M. Weber)로부터 1960-70년대의 립셋(S. M. Lipset), 헌팅톤(S. Huntington), 무어(B. Moore), 오도넬(G. A. O'Donnell) 등을 거쳐 최근의 뤼쉐마이어(D. Rueschemeyer)와 스티븐즈 부부(J. D. and E. H. Stephens)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회과학자들 사이에서 논의가 끊이지 않은 고전적인 주제이다. 따라서 이에 관한 이론적 및 경험적 연구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들의 결론은 저마다 다르다.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을 저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논거로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투자재원의 마련을 위해 소비를 축소해야 하고 정치적 안정과 질서유지를 통해 합의에 기반한 강력한 국가행위를 끌어내는 것이 필요한데, 선거구민을 의식해야 하고 사회 내 여러 집단들로부터의 압력에 직면해야 하는 민주주의에서는 그런 필요조건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반면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을 촉진시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로 민주주의야말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보장하고 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도모하며 정치적 안정과 질서유지를 통한 합의의 도출을 가능케 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양자간에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이 문제에 관해 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계몽된 추측을 제공하는 것뿐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이론적으로 제각기 결론이 다른 문제에 이 글이 새삼 개입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여기서는 이 문제를 규범적 차원이나 추상적 이론의 차원이 아닌 역사적이고 경험적 사실의 차원에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영국은 병행발전의 모델이 아니다
정치와 경제의 병행발전이 보편적 과제로 제시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추적해 가보면 우리는 ‘모델로서의 영국’의 경험과 만나게 된다. 흔히 영국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의 획기적(epochal) 사건을 순차적으로 겪으면서 양자를 조화 있게 발전시켜온 대표적 국가로 간주되고 있다. 이런 영국의 예는 근대화론자들에 의해 많은 후발국들을 가위처럼 짓눌러 왔다.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추진한 많은 후발국들은 영국모델을 척도로 한 정치적 항의와 도덕적 심문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런데 영국의 경험이 과연 여타 국가들의 발전경험을 잴만한 보편적 척도나 모델이 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영국의 발전경험을 보편적 모델로 삼아 후발산업화 국가나 후후발산업화 국가에 대해서도 그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는 단선적 발전개념이 과연 타당한가?
이런 근대화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영국의 경험은 근대화를 이루는 다양한 길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더 나아가 그것은 되풀이되기 어렵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서구민주주의라는 것은 단지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나타난 하나의 귀결에 불과”하며 “20세기의 70년대에 서서 되돌아본다면 비민주적이거나 심지어 반민주적인 근대화도 있었다는 부분적 진리가 제기”된다고 하면서 영국을 위시한 앵글로 아메리카적 경험을 상대화시키는 무어(B. Moore)의 주장이나 “근대화문제에 대한 자본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해결책은 되풀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슈바이니쯔(K. de Schweinitz)와 “역사적으로 보면 민주주의체제는 법칙이라기보다는 예외”였다는 벨러(H. U. Wehler)의 예외론 등이 모두 이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렇게 영국의 경험을 근대화에 이르는 다양한 경로들 중 하나로 상대화시켰으면서도 이들은 여타의 경로, 특히 위로부터의 혁명의 길을 설명할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국의 경험을 다시 모델로 끌어들이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무어의 경우 그것은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 없다’(No bourgeois, no democracy)는 맑스주의의 명제를 그대로 수용하는 데에서 잘 드러나며, 이런 무어의 입장은 독일의 경험을 ‘특수한 길’(Sonderweg)로 이해하려는 벨러나 코카(J. Kocka), 빙클러(H. A. Winkler) 같은 학자들의 입장과 그대로 연결되고 있다.
무어가 국가(Crown), 지주귀족, 그리고 부르주아 사이의 세력관계 및 동맹관계의 내용, 지주귀족의 농업경영방식, 그리고 농민층의 결집가능성 등 여러 요인을 동원해 근대화에 이르는 다양한 경로를 나누려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국 부르주아혁명의 유무를 가지고 앵글로 아메리카적 길과 여타의 길 - 위로부터의 혁명과 농민혁명 - 을 구분함으로써 상대화시켰던 영국의 경험을 다시 모델로 도입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과연 부르주아혁명이 민주주의를 가져왔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경우 민주주의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 때의 민주주의는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후자의 경우라면 앵글로 아메리카적 경로의 대명사인 영국을 과연 민주화와 산업화를 순차적 내지는 병행적으로 추진한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후자의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는 도대체 누가 가져오는가?
영국에서 부르주아화한 지주귀족과 부르주아의 힘이 강력했으며, 그들이 전쟁을 통해 절대왕권을 제어하고 영국을 대륙의 여타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국가로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경우 수립된 민주주의는 결코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의 제도와 절차를 갖춘 ‘보통민주주의’(mass democracy)는 아니었다. 그것은 ‘유산자(有産者)민주주의’(bourgeois democracy)였다. 19세기 초까지 영국에서 참정권은 토지귀족에게만 허용되었으며, 1832년 선거법개정을 통해서도 그 허용범위가 산업자본가에게 국한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후 선거법 개정은 노동운동의 주요과제였으며 그러한 노동운동에 대해 당시 영국정부가 심한 탄압을 가했다. 이러한 노력과 투쟁 끝에 영국에서 노동자가 선거권을 얻는 것은 1918년이고 부녀자까지 획득하여 일반국민 전체가 선거권을 갖게 되는 것은 1928년이었다(뒤의 (표 1) 참조). 1928년 영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1990년 미국 달러 기준으로 환산하면 5,115 달러였다(뒤의 (표 2) 참조). 이 모든 점들을 상기한다면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 없다’는 명제는 성립하기 어려우며, 영국을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적으로 추진한 모델로 보기 힘듦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독일을 ‘특수한 길’로 보는 역사학자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영국이 결코 모델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하는 일리(G. Eley)나 블랙번(D. Blackbourn)의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일리는 ‘특수한 길’론자들이 19세기 영국에 대해 민주화의 정도는 과장하고 국가의 억압성 정도는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흔히 영국의 경험이라고 일컬어지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조화로운 동시성’은 구체적인 역사지식에 반대되는 도그마일 뿐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가 시작되고 강화된 것은 통상 부르주아혁명으로 불리는 정치적 변혁이 발생한 한참 뒤이다. 그리고 그 때 그것을 추진하는 담당자가 되었던 것은 부르주아가 아니라 산업프롤레타리아를 위시하여 도시수공업자, 쁘띠부르주아지, 독립자영농 등이었다. 따라서 일리는 부르주아지를 항상 자유주의 및 민주주의와 연결시키는 것은 편견이라고 주장한다. 부르주아가 진실로 원하는 바는 산업자본주의를 자유롭게 발전시키기 위한 법적·제도적 틀의 마련이지 정치적 자유주의는 아니다. 만약 부르주아혁명 개념을 이렇게 법적·제도적 틀의 마련이라는 의미로 재(再)정의한다면 독일도 그것을 조용하게 겪었으며, 그 점에서 독일은 결코 예외, 즉 특수한 길을 걷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국의 경험은 모델도 예외도 아니다. 영국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적으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점이 증명된 이상 그것은 더 이상 다른 나라들에게 정치와 경제의 병행발전을 강요할 수 있는 모델이 되기도 어렵고, 또 되풀이되기 어려운 예가 될 수도 없다. 실제 영국의 경험은 산업화를 거쳐 민주화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그 후의 대부분의 국가들의 경험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영국은 그것을 가장 먼저 겪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영국은 병행발전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선구적 예’(prototype)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경험적 예를 찾기 어려운 병행발전론
이렇게 영국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추진 한 것이 아니라 그 역의 경우의 선구적 사례라면 산업화 초기 단계에 민주주의에 의거해서 경제를 도약시킨 사례를 찾기는 정말 어려워진다. 특히 그 범위를 후발산업화 국가들과 그 이후에 본격적인 산업화를 추진한 국가들로 한정시킬 경우 그 예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후발산업화 국가들 뿐 아니라 사회주의적 방식의 산업화를 추진한 구(舊)소련이나 동구권 국가들, 그리고 최근의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NICs)에 이르기까지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성공적으로 병행시킨 나라는 없었다. 그리고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오늘에 와서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방식으로 산업화를 추진한 국가들만이 비교적 순탄하게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과거 제3세계 권위주의국가를 이론적으로 합리화시켜 주는 도구라고 비난받던 헌팅톤(S. Huntington)의 이론이 오히려 경험적으로 증명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점에서 박정희 정권 하에서 일어난 권위주의적 경제발전은 영국을 ‘선구적 예’로 하는 일반적 경험에서 보아 크게 일탈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울러 실존하지도 않았던 영국 모델을 근거로 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병행론을 가지고 박정희 시대를 비판하는 일도 이제는 그쳐야 한다.
물론 지금까지 예가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양립시킨 사례가 등장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 점이 모든 경험론적 주장의 취약점인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것을 보편화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개연성 면에서 현재까지는 양립불가능성의 명제가 절대적 우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경험적으로는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 ‘선택적 친화성’2)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권위주의체제가 반드시 경제발전을 가져온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3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권위주의체제 중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가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한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 경제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동인(動因)을 권위주의체제로만 환원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국가들의 정치체제가 권위주의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양자간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 우리는 경제발전 과정에서 국가의 성격과 역할에 주목하게 된다. 이 문제는 박정희 시대에 일어난 경제발전의 주된 요인이 무엇이냐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에 장을 바꾸어 살펴보기로 하겠다.
Ⅳ-2. 박정희 정권 하의 경제발전 메커니즘
리더십인가 편승인가
박정희 정권 하의 경제성장 요인에 관한 대표적인 두 견해는 ‘리더십’론과 ‘편승’(free ride)론이다.
모든 희망을 잃고 ‘엽전은 안돼’라는 식의 패배감에 젖어 있던 이 나라 국민들에게 박정희는 탁월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으면서 그들을 동원하여 오늘의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이 전자의 논리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당시 박정희는 국내외적으로 이미 갖추어져 있던 경제발전에 호의적인 조건 - 1950년대 말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냉전정책의 변화, 이미 마련되어 있던 경제개발계획안, 양질의 풍부한 노동력, 이미 이루어진 농지개혁의 성과 등 - 에 편승했을 뿐이기 때문에, 만약 박정희 아닌 다른 사람이 집권했어도 그 정도의 경제적 성과는 거두었고 그것도 민주적인 방식으로 성취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우선 편승론은 그들이 주장하는 조건들을 모두 인정하더라도 왜 그러한 편승효과가 박정희 등장 이전(특히 장면 정권 하에서는)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그의 등장 이후에야 발전으로 수렴되었는지에 대해 해명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을 박정희의 개인적 리더십으로만 환원시키는 것도 비과학적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경제발전을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제도나 정책, 더 나아가 국가의 성격과 역할 등의 요인에 보다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민중억압정책과 시장중심정책
정책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검토될 필요가 있다. 우선 민중억압정책이다. 이에 따르면, 박정희 때문에 발전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의 리더십 탓이 아니라 민중부문에 대한 그의 일관된 억압성?배제성과 자본으로부터의 자율성 확보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도 이러한 민중억압적 정책을 폈으면 동일한 고도성장이 가능했으리라는 주장이다.
박정희 정권이 민중억압 내지 민중배제적 정책을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만 경제발전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모든 권위주의체제는 경제발전을 가져온다는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 민중억압정책은 이 시기에 이루어진 여러 정책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시장중심정책이 경제발전을 가져왔다는 신고전파적 해석이다.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달성하는 데는 시장메커니즘 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비교우위에 입각한 국제무역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한국은 바로 이런 비교우위에 입각한 시장경제 모델에 충실했기 때문에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고전파적인 시장중심설명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이 이론으로는 동아시아의 신흥공업국들이 왜 수입대체산업화로부터 수출지향산업화로 정책을 변화시켰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거꾸로 말해 수출지향산업화정책이 진정으로 우월한 산업화전략이라면 어째서 다른 나라들이 그 정책을 채택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들이 어떤 정책이 발전에 미치는 정책적 효과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정치, 특히 특정정책이 채택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 이론에 따르면 정책만 올바르면 경제발전은 항상 가능하다는 과장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예컨대 다른 개도국들도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과 같이 비교우위에 입각한 수출지향산업화정책을 추진하면 모두 경제발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 나라들이 수출지향적 정책으로 돌아설 경우 약간의 경제적 성과는 거둘지 모른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모델이 다른 나라들에 그대로 복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의 성공은 그런 정책을 선택한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 정책을 선택하도록 만든 국내외적 조건(환경)의 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특정정책을 조건지우는 국제적 환경 및 국내의 사회경제적 구조와 제도적 환경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세째, 이들이 주장하듯이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의 발전은 비교우위에 기초하여 이윤획득 가능성을 극대화한 결과 나타난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국내 및 국제시장의 힘들을 제어하고 그것을 국가목표 달성에 동원하는 전략적 역할을 수행한 결과로 봐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국가에 의해 시장이 대체되지는 않았지만 시장의 합리성이 국가가 정한 산업화의 우선순위에 의해 제약되고 지도되는 가운데 경제발전이 일어났던 것이다. 따라서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의 발전은 국가가 우위에 선 상태에서의 국가와 시장간의 ‘공조’(synergy)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후발산업화과정에서의 국가의 역할
여기서 우리는 국가의 역할과 성격에 주목하게 된다. 산업화에서 민주화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영국과 여타 후발 및 후후발국가들 사이에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양자간에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산업화과정에서 경제에 대한 국가개입의 정도 면에서는 양자간에 분명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도의 차이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시 말해 영국은 국가개입이 없는 자유방임주의였고 여타 국가들은 국가개입주의적이었다는 말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개입이 자본주의 발전과정과 불가분의 관계(an integral part)였다는 점은 오늘날 많은 학자들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자유방임주의의 본질이 ‘불개입의 개입’이며, 영국에서 ‘자유시장’의 등장은 결코 ‘자연발생적’이지 않고 ‘꾸준하고도 조직화되고 통제된 (국가)개입주의가 광범위하게 증대’된 덕이라는 폴라니의 주장이 그 예에 해당된다.
그러면 무엇이 이러한 국가개입이나 역할에 있어 정도의 차이를 낳는가? 이와 관련하여 주목하게 되는 것이 거쉔크론의 주장(A. Gerschenkron, 1962 : 5-30)이다. 그는 일찍이 유럽의 후발산업화국가들에 관한 비교연구를 통해 산업화의 시점문제에 주목하면서 “각국의 산업화과정에서의 특징은 산업성장에 있어 도약을 이루기 직전의 그 나라의 ‘상대적 후진성’의 정도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이 때 이러한 상대적 후진성의 정도에 의해 규정되는 요소로 산업성장의 속도, 대기업 우대, 중공업과 생산재산업에 대한 장려, 선진기술과 투자자본의 도입에 있어 해외의존, 소비수준의 압박, 농업의 경시, 우수한 인적 자원을 짧은 시간에 생산해 내기 위한 국가적 방책의 역할, 개발이데올로기의 영향 등을 들고 있는데, 그것은 결국 국가역할의 증대를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경제발전에서의 국가의 역할은 산업화의 시기가 상대적으로 늦을수록 일반적으로 커진다고 할 수 있다.
발전국가론
이렇게 후발 내지 후후발 산업화과정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역할이 큰 국가를 지칭하기 위해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라는 개념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발전국가론은 한국을 위시한 동아시아 경제발전을 설명하는 데도 유효성을 인정받고 있다.
발전국가란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기본 원칙으로 하면서도 방어적 근대화(defensive modernization)라는 목표를 위해 시장에 대한 장기적이면서 전략적인 개입을 하는 국가’이다.
후발 내지 후후발 산업화국가들은 대개 추격발전(catch-up development)과 자국 방어라는 이중의 과제에 직면한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경제발전 면에서 선발 산업화국가들을 추격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발국들의 정치경제적 팽창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해야 하는 두 가지 과제에 봉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이들 국가들은 부국과 강병을 동시에 추구하는 방어적 근대화를 목표로 삼는다.
국가가 시장에 대해 장기적이면서도 전략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한다. 첫째, 국가는 중점적으로 육성할 전략산업(target industries)을 결정한다. 이것은 국가의 방향이나 목표 설정과 관련된 지도자 개인이나 지도집단의 정치적 결단에 따라 결정되는 수가 많다. 특히 ‘국방’의 이유 때문에 중공업육성이 때 이르게 강조될 수도 있다. 둘째, 이러한 전략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국내외의 가용(可用)자원을 총동원한다. 셋째, 이렇게 동원된 자원을 국가는 전략산업 부문에 의도적으로 왜곡 배분한다. 넷째, 이러한 금융지원 외에도 국가는 산업별 지시계획, 가격의 과당경쟁 규제, 선택적 보호주의, 보조금 정책 등을 통해 전략산업을 집중 지원한다. 이 경우 강조되는 원칙은 형평이 아니라 선택과 집중이다. 다섯째, 이러한 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국가가 금융기관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는 것이 필수적이다. 여섯째, 이 경우에도 국가는 전략산업(에 종사하는 기업)에 무조건적으로 특혜를 주기보다는 그들이 이룩한 경제적 성과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는 방식으로 경제성장을 유도한다.
이러한 발전국가적인 시장개입의 과정에서 관치(官治)금융이 발생했고, 정경유착(政經癒着)이 싹텄으며, 비효율이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는 이렇게 한정된 자원을 특정분야에 몰아주는 방식이 상당한 효과를 발휘한 것도 사실이다. 이 때 정부가 추구하는 것은 단기적인 효율성(efficiency)보다는 중장기적인 효과성(effectiveness)이다.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경제발전과 권위주의적 발전국가 사이의 선택적 친화성
이러한 발전국가는 대개 민주적 의사결집 과정보다는 리더의 정치적 결단과 행정적 효율성을 앞세우며 자원배분에서 선택과 집중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발전국가가 민주적이 되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그것은 권위주의체제와 결합하는 수가 많았다.
앞에서 필자는 적어도 경험적으로는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 ‘선택적 친화성’이 있지만, 권위주의체제가 반드시 경제발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경제발전과 권위주의체제 그리고 발전국가 사이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 권위주의체제 하에서 경제발전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경우는 단순히 권위주의체제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발전국가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에서 권위주의와 발전의 관계에 관해 필자가 제시한 명제는 다음과 같이 수정될 수 있다. 즉, 적어도 경험적으로는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권위주의적 발전국가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 ‘선택적 친화성'이 있다.
Ⅳ-3. 박정희 정권 하의 경제발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선성장 후분배: 희생을 수반한 선택의 문제
그렇다고 권위주의적 발전국가 아래에서 이루어진 경제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많은 부작용과 희생을 도외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희생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도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병행추진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인정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보다 현실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1960년대 초 한국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란 두 가지 선택지에 직면했었다. 남은 것은 선택의 결단이었고, 그것은 희생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보다 희생을 줄일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양적으로 계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의 가치선택은 발전이었고 그 선택은 현실성이 있었다. 그것은 민주라는 가치의 소중함을 무시하기 때문은 아니다. 민주는 매우 중요하며 어떤 경우에도 포기될 수 없는 가치이다. 그럼에도 발전이란 가치를 옹호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이미 살펴보았듯이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민주를 선택하여 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룬 선례가 없다는 경험적 근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인데, 민주라는 가치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만약 굶주림이나 절대빈곤과 배타적 선택(trade-off)관계에 있다면 생각을 달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안할 사람 없다’는 속담도 있듯이 빵의 문제는 민주라는 가치를 의미 있게 만드는 전제이다. 전자 없는 후자는 그 의미가 지탱되기 어렵다. 따라서 적어도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서는 민주 보다 발전을 선택하는 것은 의미 있다고 본다.
이러한 가치선택에 입각할 경우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 하에서 일어난 경제발전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수반된 많은 희생은 가치선택의 결단에 부수되는 불가피한 손실로 여겨지게 된다. 이런 식의 평가에 대해 많은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만약 다른 가치판단에 입각할 경우 그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산업화 과정의 불가피한 희생과 박정희 개인이 나누어 져야 할 몫
그러나 그런 비판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우선 만약 우리가 발전이나 산업화 그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희생과 부작용도 어느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구상의 국가들 중 지난 200년 동안 전통적인 농업사회로부터 근대 산업사회로의 사회변동과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었다. 이 과정을 자본주의화라는 입장에서 바라본 맑스에게나 합리화의 관점에서 바라본 베버에게나 변동 그 자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운명적 과정에서 긍정과 부정 그리고 희망과 절망의 양면을 동시에 본다는 점에서도 두 대가(大家)는 같다. 맑스에게 있어 자본주의화는 임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가중(서구사회)되고 전통사회를 폭력적으로 해체(제3세계)시켜 가는 절망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사회주의로의 길을 닦는 희망의 도정이었다면, 베버에게 있어 합리화는 관료화의 진행에 따른 형식합리성의 증대라는 긍정적 측면과 실질합리성의 훼손이라는 부정적 측면이 동시에 일어나는 이율배반적 과정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어느 입장을 택하건 산업화과정에서 희생과 부작용의 측면을 부인할 수는 없으며, 또 그것은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부정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울러 그런 희생과 부작용이 산업화 단계가 초기일수록 크다는 것도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한국에서 이런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발된 것이 바로 박정희 정권 하의 1960-70년대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당연히 제기되는 의문이 이 시대에 발생한 여러 문제들과 부작용들의 원인을 과연 어디로 귀속시켜야 하는가이다. 박정희 정권 탓인가 아니면 산업화의 불가피한 부산물인가? 필자는 양자가 공유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당시가 산업화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들 - 예컨대 저임금?장시간노동?정치체제의 비민주성 등 - 이 있었지만, 그것이 당시 한국이 추구했던 독특한 압축형 산업발전전략으로 인해 가중되었고 그 와중에서 자원의 왜곡배분이나 일인 장기집권과 같은 현상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산업화 과정의 불가피한 희생의 측면을 고려했다고 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여러 비판이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산업화가 호오(好惡)의 가치판단을 떠난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과정이라는 점과 그러한 운명적 과정을 떠맡아 추진한 박정희 정권에게 그 시대의 모든 문제를 귀속시키는 오류를 범하지는 말자는 것이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체이다.
맑스와 베버에게 산업화과정이 긍정과 부정 그리고 희망과 절망의 이중적 과정으로 보였듯이 우리에게 박정희 시대는 발전과 퇴행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발전이 퇴행을 낳았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다시 발전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기반도 마련해 주었다는 점이다. 권위주의적 경제발전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부작용과 희생이 따랐지만, 그 속에서 자신의 모태인 권위주의를 부정하는 원동력인 중산층이 성장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발전은 퇴행의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못한다. 이것은 베버에게 있어 형식합리성의 증대가 실질합리성을 해쳤지만 전자 없는 후자만의 요구가 무의미하고 공허한 것과 같은 논리이다.
<표 1> 현 선진국의 민주주의 도입 시기
|
성인남성에 대한 보통선거권 도입 연도 |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통선거권 도입 연도 |
오스트레일리아 |
1903년 |
1962년 |
오스트리아 |
1907년 |
1918년 |
벨기에 |
1919년 |
1948년 |
캐나다 |
1920년 |
1970년 |
덴마크 |
1849년 |
1915년 |
핀란드 |
1919년 |
1944년 |
프랑스 |
1848년 |
1946년 |
독일 |
1849년 |
1946년 |
이탈리아 |
1919년 |
1946년 |
일본 |
1925년 |
1952년 |
네덜란드 |
1917년 |
1919년 |
뉴질랜드 |
1889년 |
1907년 |
노르웨이 |
1898년 |
1913년 |
포르투갈 |
n.a. |
1970년 |
스페인 |
n.a. |
1977년(1931년) |
스웨덴 |
1918년 |
1918년 |
스위스 |
1879년 |
1971년 |
영국 |
1918년 |
1928년 |
미국 |
1965년(1870년) |
1965년 |
* Ha-Joon Chang, Kicking away the Ladder: Development Strategy in Historical Perspective(London: Anthem Press, 2002), p.73. | ||
|
1인당 GDP (1990년 미국 달러 기준) |
현 선진국들NDCs (보통선거권 도입 연도/1인당 GDP) |
현 개발도상국들 (보통선거권 도입 연도/1인당 GDP) |
1,000달러 미만 |
|
대한민국(1948년/$777) 미얀마(1948년/$393) 방글라데시(1947년/$585) 에티오피아(1955년/$295) 이집트(1952년/$542) 인도(1947년/$641) 인도네시아(1945년/$514) 자이레(1967년/$707) 케냐(1963년/$713) 탄자니아(1962년/$506) 파키스탄(1947년/$631) |
1,000~1,999달러 |
|
가나(1957년/$1,159) 나이지리아(1979년/$1,189) 멕시코(1947년/$1,882) 불가리아(1945년/$1,073) 터키(1946년/$1,129) 헝가리(1945년/$1,721) |
2,000~2,999달러 |
노르웨이(1913년/$2,275) 독일(1946년/$2,503) 스웨덴(1918년/$2,533) 오스트리아(1918년/$2,572) 이탈리아(1946년/$2,448) 일본(1952년/$2.277) |
콜롬비아(1957년/$2,382) 페루(1956년/$2,732) 필리핀(1981년/$2,526) |
3,000~3,999달러 |
덴마크(1915년/$3,635) 프랑스(1946년/$3,819) 핀란드(1944년/$3,578) |
타이완(1972년/$3,313) 칠레(1949년/$3,715) |
4,000~4,999달러 |
네덜란드(1919년/$4,022) 벨기에(1948년/$4,917) |
브라질(1977년/$4,613) |
5,000~9,999달러 |
뉴질랜드(1907년/$5,367) 영국(1928년/$5,115) 오스트레일리아(1962년/$8,691) 포르투갈(1970년/$5,885) |
베네수엘라(1947년/$6,894) 아르헨티나(1947년/$5,089) |
10,000달러 이상 |
미국(1965년/$13,316) 스위스(1971년/$17,142) 캐나다(1970년/$11,758) |
|
* Ha-Joon Chang, Kicking away the Ladder: Development Strategy in Historical Perspective(London: Anthem Press, 2002), p.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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