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정통성 경쟁을 넘어서 -임시정부와 항일무장투쟁

이강기 2015. 9. 19. 12:25
정통성 경쟁을 넘어서 -임시정부와 항일무장투쟁
 
1. 들어가는 말
정통성이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얼마전까지 이남은 이북을 북괴로, 이북은 이남을 남조선괴뢰도당이라 표현했었다. 남북은 서로를 소련과 미국의 꼭두각시로 규정하고 자기 정부에만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왜 남북이 정통성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남북이 대내적인 정통성 확보의 수단으로 삼은 것은 끊임없는 상호비방이었다. 이러한 정통성 경쟁이 얼마나 소모적이었는지는 분단 이후 50여년의 역사가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21세기 남북화해의 시대에 들어선 지금, 우리는 정통성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해야 할 것인가.

2. 남쪽의 주장
먼저 남쪽의 주장을 들어보자. 남쪽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한다. 헌법전문에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조항이 이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가지 문제점이 제기된다. 과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민족해방운동의 배타적 정통성을 담지하고 있는가? 또한 과연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하였는가이다.

1) 임시정부의 조직과 활동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직접적 산물로서 좌우를 모두 포함하여 한국민족해방운동의 지도기관으로서 출범했다. 한성, 노령, 상해 3곳의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과정을 통해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했고, 그 노선은 왕정으로의 복귀를 뜻하는 복벽운동이 아니라 공화주의로서 정체도 공화제를 지향했다. 이승만과 이동휘가 각각 초대 대통령과 초대 국무총리로서 그 수반이 되었다.

그러나 그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민족해방운동의 노선이 나뉘고, 잠재해 있던 지역 갈등이 독립운동 진영 안에서도 분열요소로 등장하면서 임시정부 내부에서도 전략적 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준비론과 외교론, 그리고 독립전쟁론이 그것이다. 또한 국내 독립운동과세력과의 연계 위해 구상했던 연통제마저도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무엇보다 임시정부의 주된 노선이었던 외교활동도 별다른 성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출범 초, 임시정부는 국가의 3 요소인 주권, 영토, 주민 중 어느 것도 갖지 못했지만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다. 임시정부가 위치해 있던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라는 조건은 동양 최대의 국제도시로 외교활동에 유리하며, 일본 영사경찰의 영향이 미치지 못한다는 점에서 외교활동에는 적격이었다. 그러나 그 지역의 한인사회가 매우 적고, 한국본토와 거리가 멀며, 또한 독립군 활동기지와도 격리되어 있다는 점은 임시정부가 대표해야 할 '자국민'과의 거리를 두게 되는 선택이었다.

더구나 1921년 사회주의자들이 철수하면서 임시정부는 민족통일전선적 성격을 잃고 이후 쇄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23년에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자들을 소집한 국민대표대회에 임시정부 고수파가 불참한 상태에서 임시정부의 전면적 개편을 주장한 개조파와 새로운 조직을 주장한 창조파가 분열되고 창조파가 이탈하는 등 노선분화가 뚜렷해졌다.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진영의 총영도기관에서 임시정부 고수파만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독립운동 단체로 전락하게 되었다.

임시정부가 자기쇄신책으로 선택한 것은 1925년 이슴만을 대통령직에서 탄핵, 축출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1919년부터 1925년의 6년 동안 6개월만 상해에 있었을 뿐 실질적인 수반의 역할을 수행하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1920년대 중후반 국내외에서 활성화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 계열이 힘을 합치자는 민족유일당 운동이 추진기간 동안 임시정부는 지도적이거나 주류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던 임시정부가 다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게 된 계기는 1932년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의거 이후, 중국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부터였다.

2) 통일전선으로서의 임시정부
해방 전 임시정부와 좌익세력의 합작이 어려웠던 요인 가운데에는 임시정부의 핵심 지도자인 김구가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주의적 태도에 대해 가진 불신이 있었다. 물론 임시정부도 통일전선을 건립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김원봉 등의 좌익세력과는 1939년 5월 김구, 김원봉 공동 명의의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통해 보조를 맞추기 시작해, 1942년 임시정부의 개편 때 본격적인 좌우합작을 이루기 시작했다. 또한 독립동맹과의 합작을 모색해 1941년에 광복군을 결성한 뒤, 1942년 조선의용대 중경 잔류파가 가담을 하기에 이르렀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 및 정책 또한 바뀌었다. 토지 국유화 및 대생산기관의 국유화, 8시간 노동제, 파업의 자유, 의무교육, 면비(무료)교육 등이 주요 슬로건으로 등장했다. 민족해방운동 진영에서 가장 보수적인 단체였던 임시정부가 사회주의적 요소를 포함한 대단히 진보적인 정책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일부 복고적 측면도 있었지만 해방 당시 임시정부의 정책은 중국본토의 중국공산당 지역에서 활동하던 화북조선독립동맹, 만주 지역의 조국광복회 등의 강령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2차대전의 와중에서 임시정부는 연합국으로부터 교전단체로 승인받으려는 등 국제적 지위의 향상에도 노력했다. 중국은 이를 지원하였으나 미국의 압력 때문에 공식승인하지는 않았다. 미국은 임시정부의 대표성 자체도 부인했을 뿐더러, 임시정부를 승인할 경우 나타날 소련의 반응은 물론, 중국의 영향력 증가도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국제적 지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광복군 9개 준승이다. 9개 준승에 따른다면 당시 광복군의 작전지휘권은 중국정부에게 있었다. 이는 현재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실질적으로 주한미군사령부에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후 임시정부의 끈질긴 외교적 협상을 통해 1945년 중국국민당정부로부터 작전지휘권을 얻어내게 된다. 비록 1개 도에 1명씩 파견하는 죽음을 전제한 소수의 광복군이었지만 조선을 해방시키는 전쟁에 참전하여 피를 흘린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임시정부가 남의 나라 땅에서 그 나라 군부로부터 훈련을 받고 무기와 자금을 지원받는 처지에서도 작전지휘권을 인수했다는 사실 앞에서 과연 임시정부를 계승했다고 자처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고개를 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3) 해방 후의 임시정부
해방 이후 남측의 유일한 정부는 미군정이었다. 미군정의 반공노선이 적극화되면서 해방 후의 정치상황은 민족 대 반민족의 대립구도에서 좌우대립 구도로 변화되었다. 먼저 좌익을 중심으로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이에 대해 한민당이 임정 봉대를 내세우며 일체의 연합전선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민당 측의 자의적인 임정봉대론은 임시정부 측에 의해 거부되었다. 귀국 초기 단계의 임시정부는 한민당을 친일세력으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민당 역시 임시정부의 환국 후 임시정부에 대한 종래의 과대평가를 접고 이승만에 접근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임시정부의 정통성 또는 정부로서의 자격을 제일 먼저 부인한 세력은 바로 미군정이었다. 정부 자격으로서의 환국이 좌절된 데는 이러한 연유가 있었다.

더구나 김구 등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은 공산주의를 반대하지만 외세의 지배는 더 배척했기에 미군정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김구는 반탁운동을 만류하는 하지 앞에서 자살 소동을 벌였고, 이 사건을 겪고 난 뒤 하지가 반탁운동을 쿠데타로 규정하고 김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정도였다. 이는 오히려 김구의 대중적 인기를 상승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반탁운동은 이승만과 같은 우익진영 쪽으로 경사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탁운동의 선두주자 이승만은 일찍이 일제 시기에 미국의 위임통치를 주장한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가 해방 이후 반탁으로 선회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의도는 임시정부처럼 민족자존의 입장에서 외세의 신탁통치를 거부하는 것이라기보다 소련을 배제하는데 있었다. 이처럼 임시정부가 현실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반외세의 차원에서 우익 진영에 가담함에 따라 임시정부 내의 좌익인사들은 1946년 초 임시정부에서 이탈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에 가담하게 되었다. 탁치 등의 문제를 둘러싼 좌우대립은 임정만을 분화시키는데 그치지 않았다. 결국 1946년 2월14일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다음날인 2월25일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각각 발족함으로써 38선 이남의 정치구도는 좌우익 대립의 구도로 재편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재편에는 김구 등의 임시정부세력 자체의 입장도 한 몫 했다. 무엇보다 이들 스스로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던 점은 다른 세력과의 합작에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다. 더욱이 정치노선에서도 뚜렷한 우경화가 드러나고 있었다. 해방 후 임시정부세력의 여당이라 할 수 있는 한국독립당의 정책이 우경화되어 토지국유화 등 중요산업 국유화의 원칙이 후퇴했다는 것에서 그 일단을 볼 수 있다. 또한 1946년 초반 김구, 신익희 등이 이북에 테러단 파견한 점이나 1945년 말 반탁운동 전개 이후 임시정부가 친일파에 대한 엄격한 태도를 완화하고 이들을 싸고도는 듯한 인상을 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면면들이다.

물론 이와 같은 정치구도에서 남북 공히 실질적인 단선단정이 기정사실화되어가자 김구,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단정단선을 반대하며 남북협상을 시도한다. 그러나 남이나 북 어디에서도 대표성을 인정받지 않게 된 임시정부 세력의 한계는 백범 김구가 암살되는 시점(49.6.26)을 고비로 명백해진다. 또한 그 무렵 이남에 닥친 반민특위 해산과 남로당 프락치 사건 등은 임시정부가 애초에 주장해왔던 반외세의 기치가 반공의 미명 아래 퇴색되어가는 과정이었다.

4) 과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민족해방운동의 배타적 정통성을 담지하고 있는가?
해방 당시 임시정부는 27년의 역사를 지닌 가장 역사가 깊은 독립운동단체였다. 임시정부가 오랜 역경 속에서 초지를 잃지 않고 독립을 위해 애쓴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다. 이처럼 초기의 임시정부가 민족해방운동의 총영도기관으로 출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지위가 오래 가지는 않았다. 앞서 밝힌 것처럼 하나의 독립운동단체로 전락한 것도 엄연히 인정해야 할 사실인 것이다. 따라서 임시정부가 민족해방운동의 배타적 정통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을 수 밖에 없다.

5) 대한민국 정부는 과연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는가?
일찍이 백범 김구는 대한민국정부의 임시정부 법통계승 주장에 대해 이런 반쪽 짜리 정부는 100개를 세워도 임시정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단호히 부인한 바 있다. 이는 임시정부의 중요한 면면을 과연 대한민국 정부가 계승했는가를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먼저 임시정부 세력이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게 추진한 남북협상의 문제는 어떠한가. 이승만을 수반으로 한 대한민국 정부는 남북협상을 전면으로 부인하는 단선단정의 노선에서 성립한 것이라는 점에서 출발선부터 남북협상이라는 정치노선은 폐기되고 있었다. 오로지 멸공통일만이 대한민국정부의 살 길이요, 미래상을 약속하는 열쇠였다.

정책의 계승면을 보면 어떠한가. 앞서 보았듯이 한국독립당의 노선은 기존 일제시기 임시정부의 노선에서 벗어나고 있었으며, 그나마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정에서 한국독립당 등 남북협상파 정치세력이 배제하고 임시정부 세력을 탄압했던 친일세력들을 끌어안으면서 정책적 계승은 물론 인적인 계승의 면에서도 단절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기는커녕 정면으로 부인하고 등장한 것이 분명하다.


3. 이북의 항일혁명전통론

1) 이북의 김일성에 대한 정통성 시비
이북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는 주로 그 통수권자인 김일성에 대한 것이었다. 가짜 김일성론이 바로 그것이다. 일제 시기에 백마를 타고 만주벌판을 주름잡으며 일본군을 무찌르던 김일성이라는 전설적 명장이 있었는데 이북의 김일성은 전설적 명장 김일성 장군의 업적과 이름을 가로채어 마치 그가 진짜 김일성인 양 행세하는 가짜라는 것이다. 이는 해방 직후부터 한민당, 친일파, 극우파 등이 주장했다.

이남과 달리 통수권자에 대한 가짜설이 유포된 것은 왜일까. 일제시기부터 알려진 김일성의 권위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이북의 지도자로 등장한 김일성을 가짜로 몬 것이었다. 문제는 학문적인 관점에서 볼 때 황당하기 짝이 없는 가짜설이 어떻게 그토록 오랜 기간 이남 사회를 지배해 왔는가에 있다. 한국전쟁 당시 군 수뇌부는 물론 그 뒤의 군과 정계를 이끌은 박정희의 전력이 반공적인 친일파였다는 점은 이를 설명해주고도 남는다.

한편 앞서의 가짜설과 달리 김일성을 인정하나 낮게 평가하는 설이 있다. 바로 이정식·스칼라피노, 서대숙, 김준엽·김창순 등의 평가인데 김일성을 중국공산당 산하 유격대의 중상급 지휘자로서 보는 것이다. 이들은 김일성이 만주에서 유격대를 이끈 사람이란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의 업적을 별볼일 없는 것으로 낮게 평가하고 있다. 김일성은 민생단 사건에서 다른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이 숙청되는 가운데 살아 남았으며, 김일성의 정책은 사실 코민테른이나 중국공산당의 정책을 그대로 따른 것일 뿐이고, 김일성이 중국공산당 체계 속에서 성장했으므로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주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김일성의 권력장악과정에서 소련의 지원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며 "김일성은 이 무렵의 다른 어떤 정치지도자들보다도 외세에 밀착"되어 있는 소련의 "괴뢰"라는 것이다.

2) 김일성 신화
해방 전야에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진 김일성의 전설은 김일성이 이북의 지도자로 등장하는 데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김일성이 소련의 지원을 얻은데는 이러한 명망성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는 신화의 형성과 유포가 갖는 의미를 무시하고, 1) 전설적 명장 김일성 장군은 따로 있다거나 2) 신화와 실재와의 차이만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그러나 왜 하필 김일성에게, 20세기 중반에 신화가 형성되었는지 반문해볼 필요가 있다. 신화가 우선 집권 후의 날조물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신화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당연히 허황된 이야기이다. 그러나 허황되다고 이를 무시하면 식민지 시기 말기 이런 신화를 탄생시킨 대중들의 의식과 정서를 이해할 수 없게 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먼저 차분히 신화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을 살펴보자. 첫번째, 정의로운 약자가 꼭 이겨야한다는 민중들의 염원이 그 근저에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화는 민중영웅에 초자연적인 힘을 부여하여 민중 스스로를 격려하려는 내적 동기에 의해서 형성된다. 김일성 이전에도 갑오농민전쟁기의 농민군 지도자들이나 항일의병기의 의병장들은 이처럼 신화를 낳은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일병에 패하여 전사하거나 처형당하면서 신화를 자신의 몸과 함께 땅에 묻었던 반면, 김일성은 신화와 함께 살아 돌아옴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이 극대화될 수 있었다. 그 신화의 내용은 무엇인가. 김일성은 반드시 이기며,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다. 그에 관련된 신출귀몰하는 각종 출현설이 바로 그것이다.

두번째, 신화탄생의 현실적 배경은 태평양 전쟁 시기 대중들의 소규모 저항의 확산에서 김일성의 존재와 활동에 대한 기대가 비약적으로 커졌다는 점이다. 패망 전야에 식민지 국가권력은 700만의 징용, 20만의 징병, 쌀공출 뿐 아니라 부엌까지 들어와 놋그릇을 약탈해갔고 여성들을 정신대로 끌어갔다. 창씨개명, 조선어 말살 등을 통해 정신문화적 영역도 피폐해져갔다. 이러한 전시동원으로 인해 일제와 우리 민족해방운동 간의 싸움에서 중간지대는 없어지고 어느 한편에 가담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대중들도 더이상 구경꾼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면서 정치적 각성에 이르게 된 것이다. 더욱이 태평양 전쟁이 장기화되어 일제가 승리할 가망이 없는 것이 명확해지자 소규모, 자발적인 식민통치에의 저항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른바 '사상범죄'가 급증한 것이나 징용, 징병자의 도주(일본에 끌려간 징용자의 35.6%가 도망), 낙서, 유언비어가 비일비재했던 것은 이를 뚜렷이 말해준다. 이러한 각성과 저항은 해방후 정치적 상황을 전개시킨 혁명적 잠재력이었다.

김일성의 존재 자체는 당시 이러한 자발적 성격의 저항운동에 희망을 부여하고 있었다. 일제 말기 김일성이 백 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소련에 피신해 있던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기대는 소규모 대중저항의 급속한 확산과 더불어 급속히 커졌고, 김일성 신화는 날이 갈수록 확대 재생산되고 있었다. 어느 일본경찰의 기록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김일성 처럼 되라고 빌었다"고 하며, 일본인 관리이자 학자인 카마다 자와이찌로(鎌田澤一郞)의 기록에는 1943년 남선의 국민학교 6학년, 중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일본인 (조선인 포함) 중에서 누구를 가장 존경하는가를 조사했더니 천황을 월등히 제치고 김일성이 67%를 득표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김일성인가? 실상 대중들은 김일성에게만 관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반일독립의 저항인사들이 한 두 차례만 승리해도 대중들은 저항인사들의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모두 좌절하거나 실패하고 피살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반해 김일성이 끝까지 크나큰 실패를 겪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큰 기대를 받을 만한 요소가 되었다. 더구나 김일성은 적시에 국내에 진출하여 구체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전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기존 민중영웅들이 전한 {정감록} 류의 추상적인 메시지에 비해 큰 파괴력을 지니는 것이었다. 대중들은 김일성 부대나 그와 연관된 유격대의 구체적인 활약을 보면서 이를 과장하고, 전설을 스스로 만들어 내면서, 자신들이 만들어 낸 전설을 이야기하며 즐거워하고 고무받았다. 이처럼 김일성의 인기가 높아가고, 그의 존재가 조선독립의 희망처럼 되자 일제는 김일성 사망설을 조작, 유포할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작업은 뒷날 가짜 김일성 설의 소재로 이용되기도 한다.

3) 이북 정권의 탄생
이북정권은 연합정권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김일성의 지도력은 확고했다. 그리고 그 통치력을 이남에까지 확장시키려는 계획 속에서 한국전쟁은 '민족해방전쟁'으로 규정되었다. 탄생 때부터 이남 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출발했던 이북정부는 전쟁을 통해 정통성을 가진 유일한 정부가 되길 원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각기 자기 정통성을 주장하는 2국가로의 분단이었다.

4) 이북에서의 반종파투쟁과 혁명전통론의 대두
제각기 '미수복지구'를 남긴 자칭 정통성을 가진 두 국가는 자기 사회 내에서 정통성을 확보하는데 주력했다. 이북의 경우 반종파투쟁이라는 과정을 통해 김일성계 항일빨치산 계열을 중심으로 하는 정통성의 계보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직후의 남로당계 숙청과 그 뒤를 이은 연안파, 소련파의 숙청은 그 발판이 되었다.

더 나아가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대두된 주체사상은 북한의 독자적 노선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혁명전통을 체계화하고 이를 이론화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애초에 연합정권으로 출범한 이북정권은 항일빨치산의 혁명전통을 전면에 내세우게 되었다. 나아가 유일사상체계가 확립되면서 전사회의 주체사상화를 추진하고 김정일 후계 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은 김일성과 그 계열의 항일빨치산세력만을 이북은 물론 한반도 전역에서의 배타적 정통성을 담보하는 주체로 주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이북 정권 수립의 중핵인 김일성과 항일빨치산들은 분명 해방 직전 우리 민족해방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집단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실질적인 총영도기관은 아니었고, 배타적인 정통성을 주장할만한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이는 김구와 임시정부가 처한 위치와 마찬가지였다.

4. 남북의 정통성 경쟁 : 그 치열했던 소모전을 넘어서
그렇다면 정통성을 주장하는 정권 자체는 과연 실제 통치권역 내에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던가. 이남의 경우만 해도 군사정권은 스스로 이남 사회 내에서의 정통성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나 5.17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이나 정통성을 결여한 것은 물론이다. 남쪽에서 말하는 이북의 이른바 '통미봉남' 정책이란 무엇인가. 이북이 미국만을 상대로 하고 남한을 따돌리는 외교정책을 말한다. 이러한 태도의 이면에는 이북은 이남을 미국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해온 인식이 있었다. 여전히 작전지휘권이 주한미군에게 있다는 것과 이남 정권이 실제 정전협정에서의 서명 당사자가 아니라 미국이었다는 점 등이 바로 그 근거였다.

그러나 이미 해방 이후 55년의 세월이 지난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해방 당시의 정통성 문제가 그대로 적용되기에는 상황의 변화가 너무 큰 것이다. 특히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북의 정권은 각각 자기의 통치지역 내에서 나름대로 상당한 지지기반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이남의 경우도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등의 성과를 흡수하면서 정권이 '반통일세력'이라는 오명을 벗어가고 있다.

정통성 강조는 분단 극복보다는 분단과 대립 강화의 논리이다. 50년 동안 고착화되었던 분단 상황은 남북 모두 배타적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배타적 정통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결국 흡수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한홍구, 현대사분과)